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Ω 경계에서
이 이야기들은 선형적인 시간축 위에서는 순서대로 놓이는 동시에, 시간과는 관계없는 단 하나의 지점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근데 이런 말을 뭐하러 하지. 아! 즉, 실재의 현현은 마치 인과관계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이야기들은 스스로 레고블럭처럼 선후의 접합부를 찾아가지만, 이야기 밖은 늘 영원한 현재입니다. 언제, 어느때라도 늘 불빛이 새어나오는 그 문 앞이란 말이죠. 똑똑똑──. 그런데 이 소리는 문의 저쪽편에서도 똑같이 들려옵니다. 아니, 더 간절하게요. 우리를 찾으면서요. 이건 우리가 정말 믿을 수 있는 현실에 대한 정말 믿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1 할머니와 방아깨비의 장 : '내'가 없는 현실의 실재
이제 또 추석이고, 할머니의 소식이 가깝게 찾아오네요. 음력 8월 초순에 맞으실 생신이 아마도 마지막 생신이 되실거라 하니, 할머니의 추석얼굴도 이번이 마지막 업데이트겠죠. 거동이 이젠 거의 불가능하시다고 해서 휠체어를 빌려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쫄랑쫄랑 구청으로 향했어요.
집까지 휠체어를 밀고 오는데 왠지 재밌었어요. 팀 버튼의 <화성침공(Mars Attacks, 1996)>에서 주인공 소년이 할머니를 모시고 대피하는 장면도 생각나며, 사람들과 가로수 사이를 요리조리 헤치며 다녔습니다. 그럴수록 할머니에 대한 느낌은 더욱 실체화되었고요. 어느 순간 빈 휠체어에는 이미 할머니가 타고 계셨어요. 저는 할머니의 성근 백발과 작은 어깨를 내려다보며 휠체어를 밉니다.
발걸음은 처연해지고, 눈 앞이 자꾸만 흐려져요. 할머니에 대한 기억들은 생생하게 자라나고, 영화 <사토라레(Satorare, 2001)>의 장면도 개입합니다. 어렸을 적 폐렴에 걸려 몸이 불덩이처럼 뜨겁고 아플 때, 나도 아래턱을 내밀고 울면서 그랬는데... "할머니.. 너무 아파.. 할머니.. 살려줘.." 그리고 나를 포대기에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시던 할머니의 그 밤도 그랬는데...
아, 도저히 걸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네요. 휠체어를 한쪽에 세워놓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웁니다. 꺼이꺼이. 지나가던 누가 병신처럼 바라본다면 그 새끼도 가서 죽여버릴거야. 엉엉. 눈물은 폭풍입니다.
폭풍이 살짝 지나가고 가는 비로 바뀌었을 때, 하늘을 올려다봐요.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오후의 하늘은 정말 파랗네요. 햇살은 온화하고, 바람은 시원합니다. 시간은 평화롭게 흐르고, 행인들도 고요히 흘러가네요. 아무 것도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어긋난 톱니바퀴는 없어요. 그렇지만 이 모든 게 너무나 말이 되기 때문에, 뭔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산다는 게 진짜 뭘까?"
가슴 깊은 곳에서 진짜 질문이 샘솟아요. 그런데 그 순간, 무언가 목 뒤를 간지르는 움직임을 느낍니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팔을 휘둘러 쳐냅니다.
툭, 하고 떨어진 그 움직임의 주체는 바로 한 마리의 작은 방아깨비였어요.
우쒸. 저는 깜짝 놀란 마음으로 방아깨비를 응시합니다. 방아깨비도 제쪽으로 시선을 돌린 가운데 우리는 경계에서 대치하고 있어요.
아, 이럴수가! 그때 정확하게 이해합니다. '내'가 없다는 사실을요.
할머니도 슬픔도 이미 그곳에는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방아깨비와 놀람밖에는 존재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방아깨비라는 대상과, 대상에 놀란 그 마음만이 '나'라는 전부였어요. 갑자기 이 모든 게 장대한 코미디 같습니다. 웃음이 배에서 흘러 나오네요. 실험 삼아 할머니라는 대상 속으로 다시 들어갔더니, 바로 눈물이 고여요. 담배를 꺼내 물고 담배연기를 응시하면 슬픔은 온데간데 없이 담배연기만 존재합니다. 이게 바로 이야기들의 '틈새'에서 발견되는 현실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정말로 '내'가 없긴 없군요. 아주 실제적으로.
#2 우주에 버려진 강아지의 장 : '나'와 '나의 현실'을 만드는 이야기들
왜 나는 늘 버려지는 걸까. 뭘 잘하든 못하든 늘 사람에게 버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야. 내가 뭔가를 버리더라도 이미 나는 그 안에서 내가 먼저 버려진 것으로만 경험하게 돼. 대체 왜일까. 내 얘기 좀 들어줘.
반복되는 버려짐의 주제와 그 구조에 대해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어요. 아주 짧은 대화가 오갑니다.
아하. 그렇구나. 똑같아 보여도 시그널이 다른거구나. 음음. 맞아. 내가 버림받은 게 아니라 시그널을 잘못 읽은거구나. 음음. 그렇지. 하하하. 내가 버림받은 게 아니구나. 이제 다행이야. 괜찮아.
헉! 그게 아니에요. 이 대화를 통해 제가 경험한 건 사실 위와 같은 인지적 이해와 해석을 통한 합리화가 아닙니다. 이 대화 속에서 정확하게 확인된 지점은 바로 이겁니다.
"헉뜨, '내'가 멍멍이였구나."
친구야, 고마워. 맞아요. 마치 우주에 홀로 버려진 것처럼 정에 주려 있던 강아지가 늘 여기 있었어요. 그 강아지의 이야기가 여기에서 작동되고 있었어요. 그런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었어요. '버려진 강아지'가 '나'였기 때문에, 그 이야기 속에서는 늘 '버려짐'만 현실로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하나의 이야기책의 결말은 늘 똑같듯이, 아름다운 비극의 이야기는 늘 아름다우면서 늘 비극인 게 당연합니다.
여기에서는 아주 정직한 인정이 필요했습니다. 사실 '나'는 이 '버려진 강아지'와 동일시할만큼 이 비극의 이야기를 아주 좋아했다는 것. 아, 라이카(Laika), 하치, 늑대왕 로보, 버려지고 소외된 견공들의 이야기는 얼마나 슬프고 아름답던가요. 이처럼, 이 버려진 강아지의 이야기가 그저 잔혹하기만 한 비극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친밀감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자마자 그 다음으로 넘어갈 징검다리가 생겨납니다.
초등학교 3학년 어느 겨울날, 학교에 가려고 현관을 나서는데 5년간 기르던 흰둥이가 다리를 뻣뻣하게 뻗은 채 현관 앞에서 얼어 죽어 있는 것을 봤어요. 할머니는 날이 너무 추워 밤을 못넘긴 것 같다고 말씀하셨죠. 딱딱한 동태처럼 굳은 몸을 아무리 흔들고 어루만져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어요. 아마도 죽음을 처음 경험한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초딩답게 슬픔을 음미할 새도 없이 학교에 갔습니다.
그리고 오후에 집으로 돌아와 대문을 여는데, 오 이럴수가, 흰둥이가 절 보고 멍멍 짖으며 달려와 제 품에 안겼습니다. 우와, 뭐야, 너 죽은 거 아니었구나. 그리고 저는 초딩답게 이 기쁨 역시 음미할 새도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가 밥을 먹고 게임을 하며 놀았습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할머니께서 제 방에 오시더니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작은 미소를 띄우고 계셨던 것도 같아요.
"흰둥이가 이제 하늘나라에 갔네. 우리 애기한테 인사하고 가려고 잠깐 기다렸나 보다."
말했다시피, 저는 초딩답게......
세월이 지난 뒤, 이 기억이 가끔씩 되살아날 때면 저는 다짐했어요. 그래, 인생은 개처럼 살아야겠다. 그 변하지 않는 신의, 절대 배신하지 않는 믿음, 인간에 대한 그 뜨거운 신뢰, 늘 그 자리에 있는 것과 같은 영원의 대변자처럼 그렇게 살아야겠다고요. 이게 이야기에 매혹됨으로써, 즉 이야기와 동일시됨으로써 그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게 된 순간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게 되면 우리는 그 안에서 결핍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에 응답되어야 할 몫을, 타인에게 요구하거나 역으로 제공하게 되죠. 물론 그럴수록 결핍은 더욱 심해집니다. 나중에는 자신이 대체 뭘 원하는지도 모른 채 오직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맹목적인 갈증으로만 움직이게 되고요. 이는 곧 이야기에 씌인다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정체는 사실 '상실'입니다. 그런데 저는 '버려짐'을 먼저 확인하기까지는 이 이야기가 '상실'이라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요. 이게 바로 일반적으로 우리가 헤매는 방식입니다. 현실은 이렇게 점층적으로 무게를 더해갑니다. 알려지지 못했던 '상실'의 이야기가 '버려짐'의 이야기로 바뀌어 돌아가는 속에서 길을 잃곤 하죠. 그러나 눈 앞에 있는 이야기들만 차곡차곡 확인할 수 있다면 실재는 반드시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제는 훤히 드러나있는 그 단순한 '상실'의 이야기에 응답해야 할 시간입니다. 그때 나누지 못했던 정서와, 그때 전하지 못했던 인사와 함께. 맨 처음에 얘기한 것처럼 이건 시간축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원이 늘 선물인 거에요.
"흰둥아, 기다려줘서 고마워. 너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나도 참 즐거웠어. 생일선물로 받은 너를 처음 내 품에 안았을 때의 따듯한 그 느낌, 집에 오면 늘 누구보다 먼저 맞아주던 네 목소리, 내가 어디를 가든 꼬리를 흔들며 반갑게 따라다니고, 멀리서도 나를 알아봐 달려와주며,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었던 네 모습, 그 모든 것들을 내 삶에 선물해줘서 너무 고마워. 우리, 다음에 또 만나자. 그때는 더 즐겁게 놀자. 어디서든 꼭 건강해. 안녕. 그래.. 안녕.. 정말 고마웠어."
응답되지 않은 이야기들은 늘 '나'가 되어 우리 삶을 맴돌며 우리의 현실을 조직해나갑니다. 이야기에 대한 응답은 이미 '나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이야기 안에서는 불가능해요. 바로 그 '이야기 자체'가 응답되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요.
이야기들을 '나'로부터 독립시켜 그 이야기들에 응답한다는 것은, 아무 것도 우주에 떠도는 작은 먼지로 내다버리지 않는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Pieta, 'Welcome home, Laika'
Dmrityr Maximov
#3 숲 속의 어린양의 장 : 이 삶이 이야기임을 드러내는 '시선'
혹시 영화 <네 번(Le Quattro Volte, 2010)>을 본 적이 있으시다면, 지금부터 얘기할 '시선'이란 것에 대한 감은 더욱 확실해집니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시선'에 대한 영화니까요. 모든 영화가 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특히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관객이 '시선' 그 자체의 관점이 되어볼 수 있도록 기능합니다.
영화는 이탈리아의 한 산골마을을 조명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네 번의 삶에 대해 다루어요. 그들은 각각, 늙은 목동, 아기염소, 전나무, 그리고 숯입니다. 이 네 가지 형태의 삶의 모습을 카메라는 조용히 응시하며 따라갑니다. 이 이야기들 속에는 특정하게 의도된 플롯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 관객들은 이야기들에 자신을 대입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이야기들과의 관조적인 거리감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냅니다. 말하자면, 관객들에게 이 네 가지 삶의 이야기들은 결코 '나'의 이야기가 아니게 되는 셈이죠.
이 명확한 경계로 말미암아, 관객들은 '시선'의 관점에서 이야기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는 알게 되요. 이 이야기들엔 아무런 잘못이 없고, 문제가 될 것도 없으며, 더 해야 할 것도 없이 그 자체로 온전하다는 사실을요. 관객들은 '시선'의 힘을 지금 간접적으로 체험한 것입니다. 맞아요. 이 영화는 우리의 삶이 어떻게 온전함을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아주 정확한 묘사입니다. 그 답은 바로 '시선'의 드러남이에요. '시선'이 비출 때, 우리는 온전해집니다.
영화의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무리를 잃은 채 혼자 헤매던 한 아기염소가 커다란 전나무 아래에서 울다 지쳐 잠이 듭니다. 이 에피소드와 유사한 설정으로, 저에게서 끝없이 돌아가고 있던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건 한 마리의 어린양에 대한 이야기에요.
어린양은 엄마, 아빠가 없어 늘 무리 중에서도 외로움을 느꼈어요. 어린양은 따듯한 사랑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어요. 자신이 울타리를 넘어 숲으로 도망가면, 반드시 목자가 걱정하며 찾으러 올거라고. 목자는 친절하고 따듯하니까, 자신이 사라지면 99마리의 양을 버리고 오직 자신만을 찾으러 와줄거라고 어린양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래서 울타리를 뛰어넘어 깊고 깊숙한 숲 속으로 도망쳐요.
어둑한 숲 한가운데 틀어 박혀 어린양은 자신을 찾아와줄 목자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목자는 오지 않아요. 어린양은 시간이 지날수록 춥고, 무섭고, 배고프고, 지쳐갑니다.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이 지난 끝에, 목자에 대한 그리움은 이제 배신감으로 또 증오로 바뀝니다. 아무도 자신을 찾아와주지 않는 이 현실이 서럽고, 서럽고, 또 서러워요.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작동하던 이야기.
그런데 이 이야기를 떠올리며 팔에 난 상처를 어루만지는 순간, 알게 되었어요. 이 팔의 상처가 생기고, 번지고, 남겨진 것을 모두 지켜본 시선처럼, 어린양이 울타리를 넘기 전부터, 오직 어린양만을 지켜보고 단 한순간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하나의 '시선'이 있었다는 걸요.
그 '시선'은 어린양의 모든 고통과, 아픔과, 탄식을 다 지켜보았어요. 다 알고 있었어요. 눈물 한 방울도 빼놓지 않고 전부요. 그 '시선'은 어린양을 떠난 적도 없었어요. 언제나 어린양의 제일 가까이에 있었어요. 버려졌다는 슬픔에 잠겨 세상을 저주하고, 그 자신을 미워하며 분노를 토해낼 때도, 시선은 결코 어린양을 혼자 두지 않았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내려앉아 이미 함께하고 있었어요.
"얘야, 내가 늘 네 옆에 있잖니."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어요. 아름다운 우화도 아니었어요. 실재했어요. '시선'이 늘 거기에 있었어요. 그 '시선'이 절 바라보고 알아주기에 전 존재할 수 있었던 거에요.
그동안의 설움이 북받쳐 펑펑 울고, 기쁨 역시 주룩주룩 흐르는 가운데, 한편으론 정말 의아했어요. 어쩌면 이렇게도 가까이 있는데 모를 수 있었을까? 이 당연함이 왜 그렇게도 만나기 힘든 것이었을까? 이건 너무나도 당연하고 근본적인 현실로서 우리 모두가 누려야 할 선물일텐데, 아, 우리는 얼마나 이로부터 유배되어 있는지요.
이건 황홀경과 같은 어떤 특정한 상태에 대한 진술이 아니에요. 그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아주 당연한 우주의 사실이 하나 확인되는 거에요. 상태는 지나가더라도, 그 앎은 이 존재에 새겨져 분리될래야 분리될 수도 없고, 망각될래야 망각될 수도 없게 됩니다. 그건 모종의 완전한 상태에 대한 그리움이나 회한이나 기대의 정조를 띠지도 않습니다. 늘 나와 함께한다는 확신만이 모든 삶을 안아 올립니다. 그 자리에서,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잘못된 게 없다는 온전함이 정확하게 확인됩니다. 온전함은 선/악과 같은 가치나 사고 및 정서와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온전함은 그저 온전함일 뿐이에요.
'시선' 안에서 우리의 삶이 온전함을 회복하는 이유는, 이 삶이 그저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시선'은 정확하게 삶이 이야기라는 것을 드러내줍니다. '시선'이 비출 때, 삶이라는 이름으로 '나'라는 배역이 활동하고 있는 '이야기'가 그대로 확인됩니다. 그게 희극인지, 비극인지도요. 어떤 이야기든 잘못은 없습니다. 희극이든, 비극이든 그건 이야기 자체로서 온전할 따름이에요. '내'가 어떤 이야기를 '나의 현실'로서 받아들이고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이야기의 색채에 따른 현실이 내 앞에 펼쳐지고 있을 뿐이죠.
'버림받는 이야기' 속에서는 늘 '나'는 버림 받습니다. 그런 현실이 펼쳐져요. '애쓰는 이야기' 속에서는 늘 애쓰게 되고요. 한 이야기의 결말은 수백수천 번 반복되더라도 늘 같습니다. 이야기 안에서는 결코 그 이야기를 바꾸지 못합니다. 이야기책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야기의 플롯이 이끄는 책의 결말은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선'을 통해 이 삶이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그순간 이야기 밖으로 나온 존재가 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참여하고 있던 이야기의 온전성이 그대로 확인되요. 그리고 이 이야기 자체가 뭘 말하고 있는지도 알게 되며, 거기에 바로 응답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이야기 밖의 '시선'이 개입함으로써 이야기도 변화합니다.
이건 좀 의미있는 실험인데, 우리가 힘들어 하는 현재의 삶의 상황을 한번 하나의 이야기로 놓아보세요. 가능하다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들에 대입해봐도 좋고요. 그 다음 자신이 거기에서 어떠한 배역을 맡고 있는지 관찰해보세요. 그리고 사실은 내가 그 이야기를, 또 그 배역을 얼마나 좋아하고 친밀하게 느끼는지 정직하게 확인해보세요. 십중팔구 웃음이 나올 거에요. 그 웃음 속에 이미 '시선'은 드러나 있습니다.
#4 실존팔이소년의 장 : 끝없는 이야기, 영원한 쉼, 새로운 여행
실존팔이소년은 고민합니다. 다가가기에 효과적인 언어를 찾아서요. 경전의 언어들은 이미 고급 가치로 브랜드화해버려서, 그 결과 이야기 밖이 아닌 또 다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실존철학의 언어들은 이지적이고, 시크하며, 동시에 야성적이지만, 그 미학적 세련됨에 의해 소비가 견인되는 느낌도 있고요. 결국 좀 새로운 언어를 찾아야겠네요.
그렇게 '이야기'라는 이름의, 이야기 밖을 겨냥하는 이야기가 여기에 쓰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야기 속에서 삽니다. 인간의 삶은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이 이야기라는 표현은 융의 '원형(archetype)' 개념과 동일하게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모든 이야기는 원형이고, 모든 원형은 이야기에요. 그건 인간의 삶과 함께 태동하여, 스스로 움직이는,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운명적 힘입니다. 이 이야기에 따라 우리의 사고와 정서들이 그 안에서 자동적으로 결정됩니다. 결국 우리가 채택하고 있는 이야기가 우리의 현실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채택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존재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현재까지의 보편적인 인간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신하지 못합니다. 실존의 언어로, 이는 존재의 피투성 때문이죠. 사르트르(Sartre)는 이 현상을 즉자존재(卽自存在)와 대자존재(對自存在)의 존재방식으로 구분해서 표현했어요. 쉽게 말해, 인간은 돌이나 나무와 같은 사물과는 다르게 의식이 있는 까닭에, 그 자체로 그냥 존재할 수는 없고,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감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얘기에요. 즉, 스스로 채울 수 없고, 대상에 의해 채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감을 확보하기 위해 애용하는 방식이 바로 이야기로 존재감을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의 이야기에는 이미 정해진 구조와 배역들이 존재해요. 우리가 이야기 속에 들어가 하나의 배역을 떠맡았을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존재감을 느끼고 안도합니다. 네, 이건 뭐 페르소나(persona)로 이해하셔도 되요.
이처럼 모든 이야기는 우리의 존재감을 위해 기능합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사는 유일한 목적이기도 해요. 이야기들 중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고, 역으로 우리가 싫어하는 이야기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를 고통받게 하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걸 살게 되는 이유는, 역시 그 이야기를 통해서만 우리가 존재감을 느끼기 때문이고요. 역기능적 패턴이라는 건 이런 현상을 가리켜 하는 표현입니다.
자, 이렇게 우리의 삶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고, 이야기 중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이야기와 싫어하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이해했으니, 그렇다면 싫어하는 이야기를 자유롭게 좋아하는 이야기로 바꿔서 살도록 합시다. 저는 지금 이러한 기획의 '이야기치료(narrative therapy)'와 같은 관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불가능해요. 이야기는 인간이 마음대로 조물락거릴 수 있는 조작적 대상이 아니에요. 그건 마치 출판되어 널리 알려진 어떤 책의 내용을 독자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은 헛된 망상입니다.
이 이해를 명확하게 해야 될 것 같네요. 하나의 이야기는 이미 완결되어 우리가 손댈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 이야기 속에서 어떤 배역으로 살아갈 때, 그 배역이 경험할 정서나 사고도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건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이미 그 이야기가 그렇게 쓰였기 때문입니다. 소공녀는 늘 학대받고, 빨강머리 앤은 늘 몽상을 살며, 허클베리 핀은 늘 버려진 고아입니다. 이건 우리의 선택의 문제가 결코 아니에요. 이와 같은 이야기의 절대적 지배력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늘 고행의 삶입니다. 애초 답이 없는 곳에서, 답을 찾아 헤매는 것과 같아요.
이미 정해진 하나의 이야기 속에 우리가 들어가 있을 경우, 여기에서는 바로 패턴이 경험됩니다. 뭔가가 반복된다는 느낌과 함께, 내 노력과는 무관하게 늘 동일한 결과들을 경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해진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다른 결말을 맞이할 가능성은 0%입니다. 영화 <타이타닉(Titanic, 1997)>을 수천 번 봐도 잭은 늘 죽어요. 이건 안 바뀝니다. 잭이 죽어야만 그 이야기의 아름다움이 성립하기 때문에요. 바로 이겁니다.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구성하는 배역에는 아무 관심이 없어요. 오직 이야기 자체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만 움직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야기는 곧 원형입니다. 그 힘은 무시무시해요. 이게 조금도 추상적인 얘기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실존팔이소년은 또 고민합니다.
마크 포스터의 영화 <스트레인저 댄 픽션(Stranger Than Fiction, 2006)>에서는 이 이야기의 실체와 힘을 정말 잘 묘사하고 있어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해럴드 크릭은 어느 일상적인 출근길 아침에 한 여자 나레이터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 목소리는 자신의 행동과 심리상태를 마치 소설처럼 묘사하고 있었어요. 이 기이한 현상은 계속되고, 결국 해럴드는 저명한 문학교수의 도움으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비극 전문의 여작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녀가 새로 집필하고 있는 소설의 내용이 곧 해럴드의 인생이었던 거에요. 해럴드의 생각, 그가 느끼는 감정, 앞으로 전개될 행위, 그 모든 것들이 소설의 내용에서 단 한순간도 벗어나지를 않습니다. 해럴드 크릭은 결국 그 소설을 읽은 후에, 자신의 삶이 이 이야기에 운명적으로 매여 있다는 사실을 받아 들이고, 소설의 결말대로 기꺼이 죽음을 맞기를 선택합니다.
우리가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는 삶은 이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야기 안에 있는 한, 우리는 절대적인 운명의 노예에요. 진실입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존재감을 얻기 위해 이야기 속에 들어간 결과로 펼쳐진 현실은 바로 그 이야기에 속박된 꼭두각시에 다름아닌 것입니다. 좋아요, 그렇다면요, 단지 이야기를 사는 유일한 목적이 이 존재감의 획득이라면 말이죠. 만일 이야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우리의 존재감을 항구적으로, 네, 영원히 획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야기에 매인 존재가 아니라 좀 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지금 이 이야기가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이야기 밖에서 이야기를 보고 있는 '시선'이 바로 우리의 존재감의 항구적인 원천이에요. 동시에 '시선'이 드러나면, 이 현실이, 우리의 삶이 그저 하나의 이야기였다는 것이 그 순간 완벽하게 확인됩니다. '시선'을 만나면, 우리가 어떤 이야기 속에 있지 않아도 우리의 존재감은 결코 붕괴되지 않아요. 그 '시선'이 늘 우리의 존재감을 확인해줍니다.
친구가 들려준 이런 예를 한번 들어볼게요.
한 DVD플레이어가 있어요. 그 DVD플레이어는 오락영화든 공포영화든 늘 뭔가를 재생합니다. 영화를 재생해야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DVD플레이어는 오직 영화를 재생하는 동안에만 자신의 존재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DVD플레이어는 어느날 묘한 시선을 발견해요. 그 시선은 영화 화면에는 별 관심이 없고, 오로지 DVD플레이어 기기 그 자체만을 바라보고 있는 거에요. 어떤 영화를 재생하든 간에, 심지어는 정전일 때조차도 그 시선은 오직 DVD플레이어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때 DVD플레이어는 깨닫게 되요. 자신이 아무 것도 재생하지 않더라도, 이미 자기만을 바라보고 있는 그 시선이 자신의 존재감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것을요. DVD플레이어는 이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려고 애써 뭘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늘 관심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요. 그 관심은 곧 수용이며 사랑입니다.
이게 우리가 정말 믿을 수 있는 근원적 현실입니다. 우리를 언제나 관심 있게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우리는 애씀을 멈추고 이야기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게 되요. 그때서야 우리는 온전함이 뭔지 정말로 알게 되고, 이를 경험합니다. 우리가 빠져나온 이야기도 온전하고, 우리 자신도 온전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요. 왜 '시선'이 바라볼 때, 모든 것이 온전해지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건, 그야말로 신비 아닐까요.
또한 '시선'을 통해 이야기를 빠져나왔을 때, 그 순간 운명이 변합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현실이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이미 그 이야기를 초월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제 그 이야기 속에 더는 갇히지 않아요. 아, 이 반복되는 이야기의 결말은 언제나 비극이구나 하는 것을 확인한 사람은 절대 비극적이지 않게 됩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영화인 <스트레인저 댄 픽션>의 주인공인 해럴드 크릭도 이러한 방식을 통해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납니다. 그가 했던 일은 자신을 만드는 이야기의 수용이었어요. 즉, 자신의 삶이 그저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정직하게 확인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미 그 이야기보다 큰 자가 되었고, 이야기는 그에게 더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됩니다. 니체의 운명관이나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 같은 것들은 다 이 지점을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어요.
특히 틸리히는 더욱 강조합니다. "존재에의 용기는 운명의 모든 힘을 초월한다." 존재에의 용기는, 이야기 안의 배역에서 이야기 밖의 실재로 나오고자 하는 용기입니다. '실존(existence)'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의 밖에 서다'에요. 그 의미 그대로입니다. 우리의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이야기의 밖에 서는 것이 곧 실존이에요. '시선'의 힘을 통해서요.
<모모(Momo)>의 작가 미카엘 엔데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네버엔딩 스토리(The Neverending Story, 1984)>는 우리의 삶과 이야기, 그리고 '시선'의 관계를 뛰어난 통찰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바스티안은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들에게 쫓겨 헌책방으로 숨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끝없는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해요. 바스티안은 그 책을 몰래 가지고 나와 학교의 은신처인 다락방에서 탐독하게 됩니다. 책 속에서는 아트레이유라는 소년 용사의 모험담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환상세계가 '무(nothingness)'의 침공을 받아 무너지고 있고, 설상가상으로 환상세계의 통치자인 여왕은 원인모를 병을 앓고 있는 가운데, 아트레이유는 여왕을 고치고 환상세계를 구원할 방법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게 되요. 그 모험 중에 아트레이유는 자신의 사랑하는 애마를 잃고, 목숨을 위협받으며, 지치고 고된 시련의 순간들을 넘나듭니다. 바스티안은 그런 아트레이유의 모험담에 매혹되어 시간이 가는 것도 모른 채, 함께 울고 웃으며 이야기에 열중합니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 환상세계가 무너지고, 아트레이유는 여왕 앞에 서서 자신의 모험이 실패로 끝났다는 것을 고백하며, 구원자를 데려오지 못했다는 사실에 절망합니다. 그러나 여왕은 미소를 지으며, 아트레이유는 이 이야기의 결말까지 구원자를 데려오는 임무를 아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고 말합니다. 어리둥절한 아트레이유 앞에서 이제 여왕은 바스티안의 이름을 부릅니다.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달라고, 그럼으로써 책 속의 이 세계를 구원해달라고. 그리고 바스티안은 응답합니다.
이 영화가 우리의 현실을 얼마나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지는 놀라울 정도입니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아트레이유와 바스티안의 관계는,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와 '시선'의 관계입니다. 이야기 속에서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구원자는 이야기 밖에 존재합니다. 이야기 밖에서 이야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드러날 때, 지금까지 우리가 속해 있던 모든 이야기는 통째로 구원됩니다. 전부 온전해집니다. 이 끝없는 이야기들은 비로소 영원의 품 속에서 쉬게 됩니다.
'시선'은 내가 아닙니다. 신(神)도 아닙니다. 『신과 나눈 이야기』의 월시는 이 '시선'을 신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도 들지만, 분명한 것은 '시선'은 우리가 흔히 말하게 되는 우주의 궁극적인 귀결점으로서의 그런 존재는 아닙니다. 아니, 애초에 존재가 아닙니다. 주시자나 참나 같이, 구현된 또 하나의 존재가 아니에요. 어떤 실체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실재합니다. '시선'이 한번 만나지면 그동안 이야기 속에서 구걸하던 존재감의 결핍은 사라집니다. '시선'이 확인되면 이제 그건 어떤 상태나 상황과 관계없이, 뗄래야 뗄 수도 없고, 잃을래야 잃을 수도 없게 됩니다. 기존의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가장 견고한 보편적 자연법칙이 하나 생겨난 것과 유사합니다. 그건 그냥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입니다. 지구의 중력처럼요.
마르틴 부버는 이 '시선'의 주체를 초월적인 '너(thou)'라고 불렀고, 빅토르 프랑클은 이 관점을 받아들인 후 그 자신의 용어로 이를 다시 '무의식의 신(Unconscious God)'이라고 기술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용어들도 미묘한 실체성을 담보하기 때문에 정확한 표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뭔가를 존재하게 하고, 이를 자각하게 해주는 '근거'에 가까운 것 같아요. 틸리히가 묘사한 것처럼 '존재의 근거(the ground of being)'라는 표현이 적절하게 느껴집니다. '시선'이 확인될 때 우리 자신에게 느끼는 감각은,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Der Himmel Ueber Berlin, 1987)>에서 천사가 인간의 육체를 쓰고 활동하다가, 어느 순간 '엇, 나 천사였지?!'라는 근거성을 자각한 감각과 유사합니다.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 우리가 천사라는 것은 아니고요.
아. 이것도 명확해지네요. 우리가 특정한 어떤 상태를 소위 깨달음이라고 정의한다면, '시선'은 깨달음도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이 깨닫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자 근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즉, '시선'은 상태가 아니라, 상태를 만드는 그 무엇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비체험과 같은 비일상적 경험들 속에서 그 상태에 초점을 맞추면 헷갈리게 됩니다. 이를테면, 아 정말로 내가 없고, 우주와 내가 하나구나, 신의 품에 안겨있구나 등의 체험들 말이죠. 그 체험들은 결코 거짓도 아니지만, 실재도 아닙니다. 드러남으로 실재하는 것은 '시선'뿐이에요. 바로 이 "드러남으로 실재하는 것은 '시선'뿐이다."라는 사실이, 인지적 이해로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확인되고 만나져야 합니다. 그러면 그건 우리 존재의 의심될 수 없는 반석으로 자리잡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 '시선'은 비일상적 경험들 속에서 특별히 강하게 드러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치열한 일상적 경험들 속에서 더 쉽게 '시선'의 확인이 가능하기도 합니다. 비일상이든 일상이든 '시선'에게는 다 똑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경험한 실재가 '체험'이 아닌 바로 '시선'이라는 걸 정확하게 확인하고 만난 다음에는, 가장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이 '시선'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반면, 체험에 중심을 두게 되면 일상은 분리됩니다. '시선'의 힘을 '비일상적 상태'의 힘이라고 착각하게 되어, 계속 비일상적 경험을 원하게 되요. 그리고 그 비일상적 경험을 제공한 특정한 방법론의 가치에 집착하게 되고요. 그건 '시선'의 힘을 경험했지만, 그것이 '시선'이라는 걸 확인하고 만나지는 못한 경우라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최후의 질문은 이거네요. 이 실재하는 '시선'을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요? 그 대답 중의 하나는 역시 '질문'인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바깥에 있는 것은 이야기의 안쪽에 있는 우리에게는 분명 미지(未知)로 경험되죠. 그 미지에게 정직하게 질문하는 겁니다. 나 좀 구해달라고, 살려달라고, 거기엔 내가 정말로 쉴 곳이 있냐고. 이 질문은 사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하는 것이에요. 그 결과, 구원되는 것도 마음이고요.
늘 반복되는 이야기 속에서 마음이 어떤 걸 바라고 있는지 아주 정직하게 확인되었을 때, 바로 그 소망을 이야기 밖에 호소하면 응답은 꼭 주어집니다. 지금의 삶을 개박살내서라도 반드시 그 응답의 자리로 우리를, 아니 그 마음을 데려가요. 이야기의 힘도 무시무시하듯이, 질문의 힘 또한 무시무시합니다. 늘 충치 때문에 힝힝 아파하는 아이를 치과로 끌고 가 치통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엄마의 손길만큼 무시무시할 거에요. 그렇게 적어도 두 가지가 확인됩니다. 치통의 이야기는 이제 끝났다는 것, 그리고 엄마의 응답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
사실 모든 마음의 소망은 모조리 마음 밖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밖에 채워지지 않는 소망이기 때문에요. 다만 마음은 마음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 밖을 상상도 할 수 없고, 의도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늘 이야기 속에서만 뱅글뱅글 돌고 있는 거죠. 돌고 있다 보면, 언젠가는 소망을 이룰 수 있겠지 하면서요.
'외로워' '사랑받고 싶어' '최고가 될래' '나만 바라봐줘' '힘들어' '버리지 말아줘' '원해' '미워' 마음들은 이처럼 아주 단순하죠. 그리고 마음들이 바라는 건 사실 전부 하나입니다. 그건 '내 존재를 있는 그대로 알아줘.'입니다. 슬픔은 슬픔으로, 기쁨은 기쁨으로, 오직 그대로만 알려지기를 바라는 게 마음들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마음들이 이렇게 그대로 드러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자연스러운 구조가 바로 이야기에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는 정해진 마음만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고요.
그런데, 마음 밖의 '시선'이 드러나는 자리에서는 이러한 마음의 소망은 전부 다 충족됩니다. 이미 '시선'이 있는 그대로의 마음들을 다 바라보며 알아주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마음은 필연적으로 '시선'을 그리워하고 찾게 됩니다. 다만 그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를 뿐이에요. 말했다시피, '시선'이 마음의 밖에 있다는 사실은 마음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발상입니다. 서로를 그리워하나, 연결되지는 못하고 있는 견우와 직녀의 상황 같은 거죠.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마음과 '시선' 사이에 오작교를 놓아주는 일입니다. 그게 바로 '질문'입니다.
아주 단순한 마음의 소망이 확인된다면, 그 소망을 마음이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영역으로 보내버리는 거에요. 질문의 형태로. '사랑받고 싶어'라는 소망의 경우라면 '영원히 사랑받는 게 가능한 곳도 있을까?'로, '최고가 되고 싶어'라면 '언제나 최고가 되는 곳도 있을까?'로, '미워'라면 '아무 책임 없이 늘 미워할 곳도 있을까?'와 같은 식으로요. 어떤 질문이든, 그 질문의 수신자 항목에 항구적이고, 불변하며, 영원한 어떤 주소를 적어넣는 거에요. 설마 존재하리라고 마음이 기대조차 하지 못했던 그곳의 주소를요. 사실 이 과정에서부터 이미 '시선'은 적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중입니다. 틸리히는 이렇게 표현했죠. "궁극적이고 영원한 어떤 것에 대한 나의 관심은, 이미 나에 대한 그것의 참여를 함축한다."
정직함, 그리고 절실함, 또 아마도 치열함. 이 3박자가 맞으면, 특별한 방법이 아니더라도 삶 속에서 '시선'은 반드시 드러납니다. 아니, '시선'은 원래 드러나 있는 거고, 확인 가능합니다.
실존이든 뭐든, 이 '시선'은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이미 주어진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 선물은 조금 더 관찰해보면 캠핑도구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야기에서 떠나도 결코 굶어죽거나 동사하지 않도록, 또 장기간의 여행을 위해 만들어진 튼튼한 도구들이에요. 여행이라 부를 수 있는 자유는 아마도 이제 시작입니다. 베이스캠프에서 다들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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