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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불교 대학생 여러분, 그리고 신입생 여러분,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여러분들에게 다함이 없는 찬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현지사 자재만현입니다.
오늘은 불교 대학생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하하는 의미에서 불교의 꽃이요 정수리인 영산불교 현지사의 위상에 대해 차원 높은 법설을 선물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영산불교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영산불교 대학생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십시오. 이렇게 내가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이유는, 칠십억 지구촌 인구 중에서 고작 일천여 명 만이 부처님 교단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매우 희유한 사실 때문입니다. 영산불교 현지사라는 불교 교단은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부처님께서 와계신 부처님 회상입니다.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업장 소멸을 받아 윤회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유한 교단이고, 왜곡되고 왜소화된 세계 불교를 바로잡고 이끌어갈 비전이 살아있는 훌륭한 교단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교단은 첫째로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우주대법왕이신 부처님께서 나유타하고도 아승기겁 전에 성불하셔서 지금까지 멸도 함이 없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부처님 대반열반 하신 지 2,500년 이래 처음으로 불신관을 정립한 교단입니다. 둘째로는 윤회의 주체가 되는 인간 영혼의 실체까지 밝혀낸, 그리하여 마침내 무아와 윤회 주체 간의 모순을 해결하여 2천 년간의 무아 윤회 논쟁의 종지부를 찍은 교단입니다. 그러므로 알고 보면 경천동지할 두 큰일을 해낸 진정한 불교의 정법교단입니다. 불교의 꽃이요, 정수리가 되는 교단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불교 교학적인 면에서 불신관과 인간의 본체가 되는 영체설은 위대한 불교의 핵심이 되는 사상입니다. 부처님 입멸 이후 백여 년이 지나 교단이 분열되어, 부파불교의 시대가 탄생한 이래, 불교사(史)적으로 두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생겼습니다. 즉 무아와 윤회 주체 간의 모순을 해결하는 일과, 불신관의 이론을 정립하는 일이었습니다.
부처님 가신지 백여 년 경부터 부파로 분열되면서 천 년 동안이나 지속한 이 시대를 부파불교(아비달마 불교) 시대라고 합니다. 그중 큰 세력을 형성하면서 "삼세실유법체항유(三世實有法體恒有. 3세(三世)란 과거 · 현재 · 미래의 3세를 말하는 것이며 일체의 법이 이 3세에 걸쳐서 실재한다는 것이 "삼세실유법체항유(三世實有法體恒有)"라는 주장의 근저이다.)"와 오위칠십오법(유부(有部)에서는 일체법(모든 법 · 법 전체)을 유위법 4위와 무위법 1위의 5위로 조직하였고, 다시 그 5위는 75종의 법으로 분류된다고 하여 일체법을 5위 75 법으로 조직함), 업감연기설을 내어놓은 심오한 철학사상을 가진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부파불교 시대의 종파 또는 부파들 중에서 가장 유력한 부파이며, 부파불교의 사상적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파이다. 줄여서 유부(有部)라고도 한다. "설일체유부"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모든 법(一切法)이 존재한다(有)고 설명하는 부파(部)로, "과거, 현재, 미래의 3세에 걸쳐 법의 실체가 존재한다. 즉, 법의 실체는 항상 존재한다"라는 뜻의 삼세실유법체항유(三世實有法體恒有)는 설일체유부의 주장을 대표하는 명제이다. 이상 위키백과에서 일부 인용함.)에서조차도 위 두 핵심 과제만은 해결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중관, 유식, 선의 대승불교에 와서까지 이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소, 대승을 넘어선 금강승이라고 자부하는 티베트 밀교에서조차 알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서기 4~5세기경의 인도 유식불교의 두 조사, 무착과 세친 보살이 나와 불의 삼신관을 정립하고, 아뢰야식 주체의 무아윤회설을 정립함으로써, 불교사(史)의 두 가지 난 문제를 해결했다고 만족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불신관은 실체와는 거리가 먼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삼신관으로써, 부사의 한 불신을 이루고 있는 무량광 빛의 실체도 몰랐고, 불타의 무량한 지혜와 무한한 위신력, 구원력을 지니신 절대자로서의 부처님의 실체를 알 수 없었기에, 염불이 정법임을 선언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무아와 윤회 주체의 문제에서도, 무아의 뜻을 현상계의 실체 없음을 본체계까지 확대 적용하여, 인간의 본체이며 윤회의 주체인 영혼체까지 없다고 하는 왜곡된 무아론을 그대로 둔 채, 독립적인 윤회 주체가 결코 될 수 없는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근본 식을 사실상 윤회 주체로 내세움으로써,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또 하나의 잘못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럼 이 두 과제의 해결을 보지 못함으로써, 어떤 불이익이 초래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힌두교는 아트만이라는 영원불멸하는 자아를 인정합니다. 우주 만물을 낳은 범(梵)이 개별 주체에 들어간 것을 아트만이라고 하고, 수행을 통해서 이 아트만이 범과 하나임을 깨닫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경지가 되면, 윤회에서 해탈을 얻을 수 있다는 교리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도인들은 이 아트만이 윤회의 주체, 토대가 된다고 믿으며, 당연히 윤회와 해탈을 굳게 믿는 영성이 맑은 민족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힌두교는 업을 말하고, 윤회를 인정하며, 윤회하는 생사에서 해탈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우수한 종교입니다.
그러나 윤회의 주체를 아트만이라는 실체로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아트만을 영혼이라고 보지만, 영산불교 현지사에서 말하는 개개인의 영적 실체인 영체와는 다릅니다. 영체는 그 사람의 인격적 실체입니다. 1·2·3·4 네 겹의 영혼체가 다층 구조로 겹쳐져 있어서 인간 몸을 받아올 때는 4번 영체가 주가 되고 나머지 지옥, 아귀, 축생, 하늘 천상, 아수라에 몸 받아 갈 때는 3번 영체가 주인 역할을 합니다. 이때 1·2번 영체는 3번 영체 안으로 겹쳐 듭니다. 4번 영체는 인간 몸을 벗을 때 제거되어 없어집니다. 해탈 성자로서 아라한이나 무루대아라한, 그리고 천녀의 세계에 날 때는 2번 영체로, 보살이나 붓다 되어 갈 때는 1번 영체로 갑니다. 그리고 1·2·3번 영체는 영겁을 지나도 죽지 않으며, 1번 영체는 우주 본성과 같은 본체입니다. 영산불교 현지사의 시각으로 윤회 주체의 문제를 다루어야 했는데, 왜곡된 무아설 때문에 찰나멸 찰나생하는 심식류 따위를 윤회의 주체로 내세우거나, 오온 상속이라고 하는 일종의 업 상속을 윤회의 과정으로 설명하면서, 힌두교의 거센 공격에 맞서다 보니, 진리 아닌 억지 논리로 통할 리 만무했습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논쟁하다 보니, 결국 힌두교 측의 일방적인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 버렸습니다. 자연 불교도들은 힌두교에 차차 흡수되어가서, 아소카 대왕 당시의 찬란했던 불교의 교세는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A.D(기원후) 13세기 초, 이슬람 세력이 인도를 침공하여 큰 불교 사원을 파괴하고, 수많은 스님을 학살함으로써 교단을 붕괴시켜 불교가 멸망하게 되었다 하지만, 불교는 힌두교의 막강한 영향 아래에서도 1,800년 동안 쌍벽을 이루면서, 인도의 사상과 문화의 한 축으로써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이슬람 침공을 두고 불교가 인도에서 그 짧은 기간에 완전히 사라져 버린 원인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어쩌면 불교보다 더 심한 탄압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힌두교나 자이나교가 살아남은 것만 보아도, 뭔가 보다 본질적인 것이 있다고 보이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영산불교 대학생 여러분! 불교가 인도 땅에서 그 짧은 시간에 흔적 없이 송두리째 사라진 본질적 이유는 다음의 부처님 말씀 속에 있습니다.
“무아가 잘못 해석되었느니라. 자재만현이 맞느니라. 자재만현은 법왕자로써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하느니라. 이것이 불교가 망한 원인이니라.”
불교는 어떤 종교보다 힌두교와 비교가 안 되는 우수한 종교로서의 본질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훌륭한 생사관이 있고, 부처님의 업장 소멸이라는 우주적인 구원력이 있습니다. 악도에 떨어져 영겁토록 고통받을 그런 악인도 해탈 열반할 수 있는 구원 사상은 불교밖에 없습니다. 정법 아라한이 나오고, 보살과 붓다를 내는 우주적 진리의 종교입니다. 이러한 불교의 고유한 본질적 가치를 제시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불교의 핵심적 교리인 무아설을 왜곡하여 힌두교의 아트만 이론과 잘못된 차별화를 시도하면서 업, 윤회, 해탈의 주인공은 없다고 떠들고 다님으로써, 허구적 성격의 종교라는 인식을 인도인들에게 확산시켰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겼습니다.
이 세상 현상계의 일체법에는 영원불멸의 실체는 없다는 뜻으로의 무아를 본체계의 존재까지도 그 어떤 실체도 없다고 잘못 해석함으로써 인간의 본체가 되는 영혼의 존재도, 불보살의 존재까지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왜곡된 무아설의 실체입니다. 아무리 윤회하는 삶이 고통이라고 외쳐봐야 고통받는 나의 실체, 나의 영혼체가 없다는데, 또 우리 인간은 모두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기를 바라는데,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는 해탈의 주인공이 없다고 하는데, 나라는 해탈의 주체가 없는데, 그런 불교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서 믿을 사람, 따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부처님의 위대하신 실체를 몰라 구원 사상도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했습니다. 이는 불신관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때문입니다.
불세존께서는 2,500년 전에 80세를 일기로 대반열반에 드시어 육신은 재가되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부처님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과연 그 위대하신 부처님은 어디로 가셨을까? 우주 만물을 낳은 공의 자리로 돌아가셨을까요? 저 높은 하늘 천상 어디에 가 계실까요? 아니면 세상에 두루 변재한 법의 몸으로 계실까요? 참으로 궁금하고 막막했지만, 도무지 부처님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깊이 사유하고 연구해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불신에 대해 이신설(二身說)을 내어놓은 용수라는 인도의 걸출한 큰스님도, 불의 삼신설을 정립한 무착, 세친 큰 스님도 부처님의 실존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부처님은 점점 잊혀 갔습니다.
우리 부처님은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의 존재를 이야기하거나 신비한 부처님의 위신력을 말하는 경전의 말씀들은 그저 상징이나 방편으로 해석되고 이해되었습니다. 불신관의 취지는 바로 부처님의 계심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불교는 안타깝게도 이 과제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불교는 해결해야 할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급기야 인도 불교는 자멸하게 됩니다. 대가치고는 너무나 엄중한 대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우리 불교가 힌두교의 아트만 사상에 밀려 패망한 역사적 사실은 불자로서 생각해볼 때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전 인도를 석권하다시피 했던 당시의 불교가, 어이없게도 힘없이 주저앉게 되었는지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 영혼의 실체인 영체만이라도 밝게 밝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아의 뜻을 왜곡만 아니 했다면, 연기설, 인연법과 사성제, 팔정도, 삼법인설을 토대로 한 업, 윤회 해탈을 가르치는 수준 높은 교설만 가지고도 지금쯤은 불교가 세계화되고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 출가 스님이나 학자들은 ‘마음이 곧 부처다.’라고 하거나, 인간의 본래면목이 부처요, 아미타불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심지어 일부 불교 교단이나 불교 학자들은 ‘지옥 극락은 마음의 산물이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부처님께서 고구정녕 말씀하셨던 육도윤회마저 부정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세존께서 대반열반하신 지 2,5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 불교는 부처님을 잃어버린 불교, 부처님 없는 불교가 되어버렸습니다. 부처님에 대한 신심도 떨어져 아예 부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육도윤회를 의심하게 되어 생사관도 없고, 계율 지켜 착하게 살려는 생각도, 열심히 수행하려는 마음도 사라지게 만듭니다.
그런데 여기서 크게 눈을 뜬 분이 나왔습니다. 해인삼매, 대적정삼매라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깊은 삼매에 들어 2,500여 년 동안 잃어버렸던 우리 부처님을 찾은 분이 출세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부처님을 찾고, 불의 실존을 확인한 것은 실로 인류역사상의 대경사를 넘어 우주적인 대축복입니다. 앞으로 우리 인류에게 가져다줄 위대한 가치를 생각한다면, 실로 그 가치는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인물은 한국 땅에 몸 받아오신 광명만덕 태사부님이십니다. 부처님 영산 당시 가섭존자이십니다. 이분이 부처님을 만나 불과를 이루기까지 수행과정을 일지로 생생하게 써서 세상에 내놓은 책이 바로 염불삼매입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부처님께서 불신으로 살아계심을 알 수 있고, 인간 본체가 영체임을 밝히고 있으며, 붓다가 되기 위해 필요한 불신을 어떤 과정으로 얻게 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견성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부처가 아니며, 밀교 금강승의 비밀 행법으로 즉신성불 한다는 주장 역시 옳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법화경에서는 우리 부처님께서 무량의 세월 전에 불과를 이루셨다는 구원실성을 말하고 있고, 그때부터 빛의 몸으로 상주하시면서 법을 설하고, 무수한 보살을 내셨다는 말씀, 화엄경에 육신을 지닌 부처님·응화신불께서 대적정삼매에 들어 법신불과 계합하신 후 보신불을 나투시어 무량광을 방광하시니, 화장장엄세계를 만들어 내십니다. 그리고 천상과 지상을 오가시며, 화신불을 내시면서 보살들에게 위신력을 주시어 법을 설하게 하시는 등, 법신·보신·화신의 삼신불의 불가사의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장면, 그리고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의 육신은 멸도하셨지만, 불신으로 항상 계신다는 불신상주를 말하고 있고,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열반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대승경전의 말씀은 상징이나 방편, 내지는 비유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진실한 말씀들이라는 것을 나는 강조하고 싶습니다. 나는 왜 대승경전의 말씀이 진실이라고 말하는가? 바로 광명만덕 태사부님과 나는 염불삼매 속에서 부처님을 친견함으로써, 또 불신을 증득한 붓다의 지혜로써 이를 모두 확인하고 증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미증유한 진실은 세계 불교 어느 종파에서도 알아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현지사는 불교의 궁극적 진리를 깨닫고 증거하는 세계 유일의 교단이요, 불교의 최정점에 서 있는 교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불교의 꽂이요, 정수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지사의 영산 불교대학에 입학하여 이런 심오한 진리를 배운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번 학기 동안 강의를 잘 듣고 신심을 잘 다져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