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주펜문학>
나기철羅基喆 연보
평안남도 성천군 영천면 대자파리가 고향인 아버지 나윤섭(羅允燮)과 평남 안주군 신안주면 원흥리가 고향인 어머니 김복석(金福錫), 1951년 한국전쟁 1.4후퇴 때 각각 월남.
아버지는 평양에서 사업, 어머니는 평양간호조산전문학교에 재학 중이었음. 1952년 서울에서 결혼.
1953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 72-7 출생.
1958 가족이 강원도 원주로 이주. 1군사령부가 멀리 보이는 원주 시내 외곽 학성동에서 삶. 아버지 군납업체 동흥실업사 운영.
1964 가족이 부산으로 이주. 영도의 영선초등학교 6학년 전학. 남항동 시장에서 식료품 가게. 장사가 잘 안 돼 영선동 산으로 이사. 8월 가족이 제주로 이주. 제주동초등학교 전학. 가 족 제주항 동부두 쪽에서 몇 달 살고 지인이 있는 조천읍 신촌리로 감.
1965 오현중학교 입학. 제주시 화북동 원명사에서 살게 됨. 환속한 고은 시인이 있었음. 방 청소 등을 하며 2년 간 시인의 행적을 옆에서 봄. 절 부설 베나레스도서관 서고에 드 나들며 책 읽음. 『대학국어』에 나온 한국 현대시에 크게 매료 됨.
1966 12월 원명사 나옴.
1967 이후 학원문학상 입선 2회.
1968 3월 제주신문사 주최 제1회 3월학생문예(현 제주학생문예) 중등부 산문 당선 (「소 녀」). 오현고등학교 문예장학생 입학. 5월 시내 고교 문학동인 〈湖心〉 결성. 짝사랑하 는 여학생 어머니가 갑자기 타계한 여름날 밤, 그 집 앞에서 재수 중인 3년 선배 문무 병과 운명적인 듯 만남. 아버지 뇌졸중으로 쓰러짐.
1969 제2회 3월학생문예 고등부 시 가작(「종소리」). 오현고등학교 학생회 부회장.
1970 제3회 3월학생문예 고등부 시 당선(「수선화」). 크게 고무됨.
1971 제4회 3월학생문예 고등부 시 당선(「이별」). 이후 내내 제주문단에 등단한 느낌을 가짐.
1972 제주대학교 국문학과 입학. 문학평론가 김시태 교수의 문하로 지냄.
1973 골빈당 당원. 문무병(당수), 장일홍, 고충석, 이재훈, 김상철, 고희범, 강창일, 김용훈, 김태성, 홍진표, 부종호, 김영범 등. 현재까지 이어옴.
1975 제3회 제대문학상 시 당선(「여행」). 제대문학회 회장.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최종심. 여름, 시내 옥림여관에 든 소설가 황석영을 친구 김용훈과 수소문하여 만남. 이후 현 재까지 관계가 이어짐.
1976 미당 서정주 시인 화갑 기념 전국순회 시화전 제주관광호텔. 안내하며 서정주 시인 만남.
1977 제주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78 한림공업고등학교 임시교사. 안덕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가정교사 오인순(吳仁順) 만남.
1979 오인순과 결혼. 아버지 별세.
1980 신성여자고등학교로 옮김. 문예부 조직. ‘신성문학의 밤’ 시작. 딸 혜미(惠美) 출생.
1982 김시태 교수(한양대)에 의해 모르는 사이 『시문학』 5월호에 시 「悲願」, 「山 위에 누워」 초회추천(심사 김광림, 유경환). 제주문인협회 가입. 제주시 수눌음소극장에서 ‘5인시 발표회’(문무병, 김광렬, 김승립, 김수열, 나기철).
1983 송상일, 오경훈, 고시홍, 장일홍, 문무병, 김광렬, 김승립과 〈경작지대〉 동인 시작. 1989년 해체 시까지 동인지 4호 냄.
1985 아들 민형(民炯) 출생.
1987 『시문학』 2월호에 시 「원주」, 「제주해협」으로 추천완료(문덕수, 이원섭, 권일송 선).
제주문인협회 사무국장(회장 한기팔). 이후 한기팔 시인과 각별하게 지내옴.
1988 제주시인 10인 신작시집 『탐라, 우리 바다의 영광』(박덕규, 정한용 엮음, 청맥)에 시 수록.
1989 문무병 김광렬, 윤주상과 〈깨어 있음의 시〉 동인 결성. 1991년 창간호. 이후 김수열, 김석교 참여. 2007년까지 동인지 12호 냄.
1992 첫 시집 『섬들의 오랜 꿈』(둥지) 발간. 화가 강요배 귀향 후 고교 동기들 10명 조배기 모임 결성, 제주 오름 등 다니기 시작함
1994 한국시인협회 회원.
1996 민예총 제주도지회 공동대표(지회장).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 전공 수료.
1997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제주작가회의 창립 준비위원.
1999 제2시집 『남양여인숙』(현대시) 발간. 한기팔 시인과 아시아시인대회(울란바토르) 참가.
2001 『21세기 한·일 신예시인 100인 시선집』(다층) 수록.
2002 귤림문학회 회장. 제주대 평생교육원 시창작반 담당(~2003). 제주시사랑회(제주시낭송 협회 전신) 자문위원(~현재).
2003 『좋은 시 2003』(삶과꿈)에 시 수록. 이후 5회 수록 후 발간 중단.
2004 제3시집 『뭉게구름을 뭉개고』(문학의 전당) 발간. 제5회 오현문학상 수상. 제주작가회의 제주문학관건립특별위원회 위원장.
2005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 『삷과문화』 편집인.
2007 복효근, 오인태, 윤효, 이지엽, 정일근, 함순례와 짧은 시를 추구하는 〈작은詩앗·채송화〉 동인 결성. 현재까지 동인지 29호 냄. 『블로거들이 읽은 우리 시대 좋은 시- 아침에
시를 줍다』(북인)에 시 「사랑 노래」 소개.
2009 제주문학관건립추진위원회 위원.
2010 제4시집 『올레 끝』(서정시학) 발간. 조금씩 환해지기 시작함.
2012 ‘권영민의 문학콘서트 6- 사투리와 함께 읽는 팔도 시 이야기’(공주문화원)참여. 고재종, 정일근, 최명길, 구재기, 나기철.
2013 신성여자고등학교 교사 명예퇴직. 19년 살던 아라동 천일아파트에서 봉개동 명도암 은혜마을로 이사.
2014 제5시집 『젤라의 꽃』(서정시학) 발간. 제주신문에 ‘시로 여는 제주아침’ 게재(200회).
제주철학사랑방 회장.
2016 서울 인문학 공부 모임 〈연백시사〉(월 2회) 가입. 공간시낭독회 명예회원.
2017 아들 민형 결혼.
2018 제6시집 『지금도 낭낭히』(서정시학) 발간. 공주시가 지원하는 제5회 풀꽃문학상 본상 수상. 제1회 서정시학상(이후 서정시학 작품상과 통합)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 학나눔 도서 선정. 제주문화원 문화학교 문예창작반 전담 강사(~현재까지).
2020 만해축전 한국시인협회 세미나 〈‘대학국어’에서 ‘채송화’까지〉 발표.
2021 창원 김달진문학관 ‘시야, 놀자’ 초청 대담.
대표시
들판의 동백꽃
오름 오르기 위해 가는, 바람 차고 추운, 사람들 별 다니지 않는 들판, 꽃들 붉게 피우며 거기 동백나무 하나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나무 아래 머물다 거기서 얼마 되지 않는 한 오름을 올랐습니다. 오름은 마른 줄기 가로막고 가팔랐습니다. 친구와 나는 일행과 떨어져, 오르다 오르다 힘겨워, 내려가 동백나무를 표지로 그 옆에 누워 있기로 했습니다. 한참 후 오름 다 오른 일행들 내려와 우리 곁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다른 곳 달리 동백나무 일정한 주위에는 희한하게 바람 하나 없는데 가만히 보니 동백꽃 붉은 빛깔들, 그 힘으로 바람을 멀리멀리 보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거기 있는 마른 억새랑 들풀이랑 우리들 모두 따스하게 녹여 주며.
얼마 후 우리는 거길 떠났지만 그 동백나무 오래오래 그 곳서 그 부근 고요하게 해 줄 것 같았습니다. 따스하게 해 줄 것 같았습니다.
서귀포에는 내가
서귀포에는 내가
달맞이꽃이라고 부르는 여자가 있다
바다 남빛 물결에
피는 꽃
수백송이 흩으려 놓고
자지러지다가도
정작은 수줍은 달맞이꽃이
되고 싶은,
서귀포에는 내가
휘파람새라고 부르는 여자가 있다
이젠 반쪽의 자리가 비어도
슬프지 않고
아침 식탁에 수저가 한 벌이어도
외롭지 않다고
잠시 휘파람새가 되어 보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스물다섯인,
서귀포에는 내가
삼매봉이라고 부르는 여자가 있다
어느 날 찾아가
시와 그림을 보고
한 바퀴 돌아 내려와
새섬 앞 통통배 소리처럼
떠내려가는 나를
잡아 주던
그 봉우리 같은,
도서관에서 만난 여자
집에 가려고
참고열람실에서
일어나
개가열람실을 지나는데
안에 서 있는
한 여자!
다시 보려고
다가가니
자동문이 닫혔다
두드렸으나
열리지 않았다
사랑 노래
그래,
너 좋을 대로
좋은 사람
잘난 사람
다 만나고
나 같은 놈일랑
한 삼사십 년쯤 후
내가 푹, 쭈그러지면
그때라도
만나 주거라
엄마
아내가 집에 있다
아파트 문
열기 전
걸음이 빨라진다
어렸을 때
엄마가 있는 집에
올 때처럼
----------------------------------
젊은 날의 초상
그리운 것 간절한 것의 표현
나기철
평남 성천이 고향인 아버지는 평양에서 장사를 하다가, 어머니는 평양간호조산전문학교에 다니다가 1.4후퇴 때 각각 월남했다. 부모님은 사변 중 서울서 만나 결혼했다. 우리 집은 내가 6살 때 원주로 옮겼다. 다시 1964년 6학년 초 부산으로 내려갔다. 아버지의 사업은 점점 축소됐다. 그해 여름 우리 가족은 도라지호를 타고 제주로 갔다. 전형적 장사꾼인 아버지는 사업에 대한 꿈이 컸지만 늘 여건이 따라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린 나의 눈에는 섬의 모든 것이 너무 낯설었다. 빈털터리가 된 아버지 어머니는 오일장 등엘 부지런히 다녔다.
중학교에 장학생으로 합격한 나는 어머니의 기지(機智)에 의해 시내에서 좀 떨어진 화북 원명사(圓明寺)에 맡겨졌다. 졸업식 날 담임 선생님께서 부르셔서 교무실에 가 보니 스님이 한 분 앉아 계셨다. 스님을 따라가니 거기였다. 나는 별도봉에서 사라봉으로 이어진 길을 걸어 학교엘 오갔다. 그 사이에 공동묘지가 있었다.
학교는 그 때 시내 중심 오현단(五賢壇) 자리에 있었다. 절간에서 다니는 내게 아이들은 "까까중"이라고 놀리기도 했으나 나는 그런 건 아니었다. 나는 우리 집 형편이 좀 펴면 집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그 때 원명사에는 주지 스님에 의해 베나레스도서관이 세워져 있었다. 나는 그 도서관 서고에 자주 들어가 이 책 저 책 꺼내 읽곤 했다. 『대학국어』 앞에 있는 소월, 만해, 영랑의 시를 보자 가슴이 막 뛰었다.
거기 갓 지어진 3층의 슬래브 건물 1층 한 켠에 시인이 있었다. 서른세 살의 길고 가늘고 흰, 환속한 고은(高銀) 시인이었다. 그의 방은 책상도 없고 보내오는 책들이 한 켠에 높이 쌓여 있었다. 그는 가끔 만년필 같은 것을 빌리러 2층의 우리에게 올라왔다. 청소를 하러 그의 방 앞에 가면 신구문화사 원고지에 쓴 에세이가 널려 있기도 했고, 3일을 계속 잘 때도 있었다.
어느 날 붉은 색 표지의 그의 두 번째 시집 『해변의 운문집』이 내게 왔다. 그 시들은 표현의 높낮이가 심해 내겐 이해하기 힘들었다. 오래 지나서 보니 그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에서 따온 것인 듯했다. 그렇다.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은 바로 바다로 떨어지는 자살 터가 있는 별도봉 뒤로, 눈앞에 한 뼘 바다가 아득히 나타났다. 나는 시인과 그 이 년 동안 어떤 말도 나눈 적이 없었다. 다만 그가 당시 시를 지망하던 스님과 옥상에서 이야기하는 걸 아래서 본다든가, 스님들과의 간단한 대화를 곁에서 듣는다든가, 그가 개설한 1층의 금강고등공민학교에서의 수업을 이따금 보곤 할 뿐이었다. 나는 그때 그보다 20년이나 아래인 열세 살이었으니까.
1972년, 나는 후기인 제주대학 국문학과에 들어갔다. 국립이어서 등록금이 쌌다.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비행기 모양의 학교 본관 앞에서 김시태 선생을 만나자 나는 농담처럼, "선생님 때문에 들어왔습니다." 했다. 나는 김시태 선생을 고등학교 때 <문학의 밤> 같은 데 초청한다던가 하여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또 그분은 제주신문의 <3월학생문예>에서 고2, 고3 때 두 번이나 내 시를 당선작으로 뽑아 주기도 했다. 선생은 그때 30대 초반이었는데, 제주 출신으로 동국대 국문학과, 대학원을 거쳐 몇 해 전 여기 전임으로 왔던 것이다. 그는 이미 1969년 『현대문학』지에 평론으로 등단한 바 있었다.
습작시를 들고 나는 선생의 집엘 자주 갔다. 그분은 내가 자리에 앉으면 담배부터 권했다. 그만큼 격의 없으셨다. 집은 당시 제주시 서쪽 외곽 용담동 캠퍼스 뒤의 속칭 ‘다끄네’라는 곳에 있었다. 어느 날 습작시를 보여 드리고 옆을 보니 식민지 시대에 나온 희귀본 시집들이 빛바랜 모습으로 빽빽이 꽂혀 있었다. 이병주 교수께서 전부 주시더라고 했다. 거기 미당의 원본 시집들도 다 있었다. 나는 『화사집』부터 『동천』까지 다섯 권을 빼어들고 빌려달라고 했다. 선생은 대뜸 그러라고 하셨다. 두어 해 전 선생의 시집 『쳐다보는 돌』(1970, 현대문학사)도 나와 있었다.
그 분은 술은 잘 못했지만 우리에게 늘 다정했다. “허허” 하고 웃는 안경 너머의 얼굴은 그때 30대 초밖에 안 됐어도 초탈한 이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선생은 그때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는데, 강의가 끝나면 가끔 내게 일요일 날 집에 좀 들릴 수 없느냐고 했다. 오전에 가 내외가 외출한 텅 빈 집에서 하루 종일 원고지에 과제물을 옮기기도 했다.
제주대학은 당시 제주시의 법문학부와 서귀포의 농수산학부로 나눠져 있었다. 식민지 시대의 경성제국대학의 그 법문학부가 이곳에 남아 있었다. 법문학부는 고교 수준의 규모였다. 시대는 어둠으로 접어들었지만 아직 이 대학에는 낭만만 계속되고 있었다. 이념 서클도 없었고 학기 초부터 총학생회장 선거 열기가 좁은 대학 구내를 휩쓸었다. 나는 고교 동창인 같은 과의 김용훈과 늘 붙어 다녔다. 강의 후엔 시 외곽 용담동의 학교에서 시내 한복판 소라다방까지 걸어갔다.
오후의 거리는 언제나 한적했다. 소라다방에 앉아 있으면 주머니가 비어 있어도 어떻든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 앞은 한영실비집이란 술집. 우리는 졸업할 때까지 그 부근에서 살다시피 했다. 방학이면 내려오는 서울 <골빈당>과 섬에 남은 <골빈당>의 합수가 거길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73년, 박목월 시인에 의해 『心象』이라는 시지가 나왔다. 모던한 장정, 참신한 기획이 크게 돋보였다. 첫 회 김성춘에 이어 그 무렵 2회 당선자가 여러 명 발표 되었는데, 그 중 권명옥의 「오류동1,2,3」이 가슴을 적셨다. 내 영혼의 목마름 때문이었으리라. 적절한 행의 배치와 반복, 시각과 청각적 이미지의 조화. 나사로를 부르는 예수의 음성이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2행을 '쳐 울리어'로 끝내고 '울리어'를 한 행으로 처리한 것이라든가, '숨고, 흰 잠이, 들어, 쓴다' 등을 한 행으로 처리한 기법이 눈에 확 들어왔다. 진술 없는 묘사가 묘사로만 끝나지 않고 많은 의미를 생각하게 했다. 이른 바 '낯설게 하기'가 이런 것일 것이었다. 이런 종교적인 용어만 사용해도 일반인들에게는 벌써 낯선 효과가 있을 것이었다. '강릉천주교회'나 '포도나무'도 그런 것이었다.
‘잠 깨는 이의 귀 가까이 주일 아침은/놀람의 종을 쳐 울리어/울리어/나사로야,/나사로야,/나사로야,/숨어서 부른 이는 /숨고/세상은 흰 눈에/흰 잠이/들어/나 홀로 깨어 고향의 아버님께 긴 편지를/쓴다.’(「오류동 ·1」) ‘가을 날 새 집 짓는 사람들의/웃음소리와/산에서 내리는 새 소리 사이 시든 풀밭에/내 하루를 팔베개해 눞히면/가령, 눈에 밟히는/강릉천주교회 뒤 팔린 옛집 뜰안의/포도나무/어제오늘 낮달 가까이 내어 준 내 공복의 기침소리/들린다는/내 아버지의 아픔에 고이는/넝쿨이여,/눈에 밟히는/강릉천주교회 뒤 팔린 옛집 뜰안의/포도나무를 재우려고/가을날 새 집 짓는 사람들의/웃음소리와/산에서 내리는 새 소리 사이 저문 풀밭에/내 하루를 팔베개해 눕히면’(「오류동 ·2」)
이 「오류동」 시편들은 소리 나지 않게 종교를 전하고 있었고 또 나를 돌아보게 했다. 그래서 나는 당시 제주YMCA에서, 내려와 있었던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이종헌 목사가 이끄는 <성서 모임>을 하면서, 어느 작은 교회 낙성식 때 '강릉천주교회'를 '내도교회'로 패러디 해 읽기도 했다. 소감에서 그는 이 시를 '조잡품 오류동' 이라고 했지만, 내게는 오히려 새로운 언어의 미감을 보여준 정제품으로 여겨졌다. 오래 지난 후 권명옥 시인과의 연락이 이어졌으나, 만나자, 만나자 하다가 못 만난 채 그는 멀리 가 버렸다.
어느 날 이종헌 목사가 『현대문학』을 들고 왔다. 거기 김현승의 시 「마지막 지상에서」가 실려 있었다. 그가 이 시를 소개했다. 김현승은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어렸을 때 제주에 와 Y 바로 옆 성내교회에서 이 년을 살다 간 적도 있었다. 김현승 시인은 「가을의 기도」같은 시로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날 본 이 시는 매우 달랐다. 우선 길이가 짧았다. 짧지만 울림은 큰 것이었다. 전부 6행밖에 안 되는 이 시가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아마 이 시에서 나는 처음 단시(短詩)의 매력을 체득한 것 같다. '오늘 하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두고두고 그 의미를 생각하게 했다. 시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시는 이처럼 다 말해질 수 없는 그 무엇을 말하는 것이었다.
1975년, 나는 3학년이 돼 있었다. 72년 대학에 들어왔지만 나는 이리 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차분히 공부를 할 마음도 분위기도 아니었다. 다시 1년을 쉬게 되었다. 내 딴에는 다시 도전해 보리라 생각했던 것인데 그게 여의치 않았다. 다시 복학을 하였다. 그 시절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몇몇과 <제대문학회>를 만들었다. 같은 과의 여학생을 쫒아다니다 낭패를 보기도 했다. 집은 여전히 가난했다. 바로 아래 누이가 당시 수출 붐을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중학교를 나온 누이는 열일곱이었다.
신촌 바닷가 상점에서 어머니는 홀로 앉아서 막막한 나날을 견뎠다. 나는 하릴없이 바닷가를 서성였다. '바다에 떠 다닌다/ 물마루에 앉아 시를 쓴다/ 뜰에 널어 둔 빨래 나부껴 와/ 구름 안고 천리 밖 기웃거리는/ 네 쉰 소리이다/ 아침은 세수하러 갔다가 얼굴 못 들고/ 죄의 긴 수렁에 빠져서 운다/ 깨어나는 섬들의 오랜 꿈이여/ 원래 내 심신은 병 깊어서/ 손으로 물살 헤저으며/ 紗羅岳을 오른다/ 누이의 소식은 아직 모른다' (졸시, 「9월」)
격정과 적막의 나날이었다. 스물두 셋 나의 날들은 황량했다. 친구와는 늘 붙어 다녔다. 검은 겨울 외투를 오래 입고 다녔다. 우리는 시니컬했다. 모범적인 동료들에게는 이질적 존재로 비쳤으리라. 좁은 대학 구내가 답답했다. 바라보면 앞은 늘 막막한 수평선.
그 무렵 섬에 한 시인이 나타났다. 서귀포의 한기팔 시인. 시인이 귀하던 여기서 그의 출현은 각별했다. 그를 처음 대면한 것은 그 해 가을 제주관광호텔에서 열린 미당 화갑시화전 때였다. 4학년인 나는 김시태 선생에 의해 안내를 맡고 있었는데, 한 시인과 서귀포에 다녀오신 미당께서 호텔 현관으로 들어서며, "어, 기팔이 거 재미있게 살던데." 하셨다.
그 무렵 시인에게 제일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냐고 물으니, "김춘수와 박용래"라고 하시던 게 생각난다. 내 취향과 많이 맞았다. 그 후로도 한참 시인과는 안면만 있다가 아주 가까워진 건 1987년 그가 제주문협 회장과 내가 사무국장을 맡고서부터였다. 둘 다 썩 어울리는 자리는 아니었다. 서귀포에 계신 한 시인과는 수시로 전화를 하곤 했다. 그 후 나는 시인을 뵈러 자주 보목동엘 갔다. 그의 집은 서귀포 시내에서 벗어나 동쪽으로 조금 가면 나타나는데 앞 바다에는 섶섬이라는 아름다운 무인도가 있다. 그는 여기서 태어나 20대 대학 시절과 그 후 몇 년을 빼곤 줄곧 이곳에서 살아왔다.
나는 시인과 여행도 자주 다녔다. 90년대부터 변산반도로, 남해 금산으로, 선운사로, 몽골로 시인 한두 명과 같이. 나는 그를 통해 늘 '시인'의 향취를 흠뻑 맡았다. 올해 83세. 몇 년 전 오키나와, 작년 그리스 터키에 이어 올해도 여럿이 러시아 예술 기행을 다녀왔다. 건강하시고 술도 세다. 이 서정 시인께서 내 곁에 오래 오래 계셔 주기를.
2007년 가을, 울산의 정일근 시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해남의 영랑문학상 시상식에 갔다가 서울의 윤효 시인을 만나 얘기를 하던 중, 우리 시의 장형화, 요설화, 난해함에 대해 의기투합하여 전국적으로 짧은 시 동인을 만들어 보자 했다며 함께 하자고 했다. 나는 물론 그러마 했다. 그래 그 해 겨울, 논산의 탑정호숫가 한 펜션에서 윤효(서울), 정일근(울산), 이지엽(서울), 복효근(남원), 오인태(진주), 함순례(대전), 나기철(제주)이 모여 짧은 시 동인 <작은詩앗 · 채송화>를 결성했다. 그 후 김길녀(부산), 나혜경(전주) 시인이 들어오고 반연간으로 올해까지 21호를 냈다. 올해 정일근 시인이 나가고 오성일(서울) 시인이 새로 들어왔다. 첫 호부터 동인 신작시 외에 초대시, 채송화의 친구들, 채송화가 읽은 좋은 시, 채송화 시론 등으로 보폭을 넓혔다.
나는 넷째 시집부터 <서정시학>과 인연을 맺어왔는데, 작년 여섯 번째 시집 『지금도 낭낭히』(서정시학)로 공주에서 주는 제5회 풀꽃문학상을 받았다. 또 제1회 서정시학상도 받았다. 육지에서 주는 상이라 더 기뻤다. 다음은 풀꽃문학상 수상 소감이다.
<중 2 때 시와 처음 만난 이래 어언 50년입니다.
1.4 때 각각 월남한 부모에게 서울서 태어나 열두 살 때 섬에 온 후 여기서만 살았습니다. 문학 소 · 청년기를 거쳐 서른이 넘어 등단하고 동인지들, 시집도 몇 권 냈지만 육지에서의 반응은 거의 없었습니다. 바다 건너로 부친 것들이 헤아릴 수 없습니다.
넷째 시집을 내며 앞에, ‘그래,/이번으로//어디서/살짝 비춰주기라도 한다면,//그러지 않는다면,//나는 망했다!’라고 자탄스럽게 외치기도 했습니다.
그 때 몇몇 선생님들께서 손을 주셨습니다. 그 얼마 전 짧은 시를 추구하는 <작은詩앗 ·채송화>동인들도 함께 만났습니다. 비로소 외롭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시를 써오면서 시는 다름 아닌 그리운 것, 기다리는 것, 안타까운 것, 간절한 것의 표현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잃지 않고 시를 써나가겠습니다.
변방의 섬 시인에게 이런 게 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간 적적한 시간이 많았지만 이번 수상은 제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어렸을 때 저를 시의 길로 이끌어주신 김시태 선생님, 시집 세 권을 이어 내주시고 늘 훈훈한 눈빛을 주시는 최동호 선생님, 함께 하고 있는 <작은詩앗 · 채송화> 동인, 철없는 짝을 만나 참 힘겨웠을 아내, 그리고 저를 시인 되게 해 준 제주 섬에게 이 기쁨을 돌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시와정신』 2019. 가을. ‘젊은 날의 초상 69’
〈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나기철 시집 『젤라의 꽃』
강경석 다음은 시집 세 권인데요. 세 분 중 가장 연장자이신 나기철(羅基喆) 시인의 『젤라의 꽃』부터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시집은 지난 호에서 다뤘거나 오늘 다루게 될 두 사람의 젊은 시인들 작품과는 달리, 그야말로 전통적인 서정시의 작법과 감성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이런 시집을 요즘 평단에선 많이 논의하지 않는 편이지요. 편향을 깨자는 취지가 한편으로 있고 또 이를 거울삼아 최근의 젊은 시단을 돌아보는 계기도 되겠습니다. 적극 추천해주신 김사인 선생님께서 먼저 한말씀 해주시면 어떨까요.
김사인 다섯 권의 좋은 시집을 가진, 시력 삼십 년이 가까운 육십 대의 시인입니다. 생활터전과 창작활동의 중심이 제주인 분이어서 수도권 문단의 젊은 독자들께 낯이 좀 설지 모르겠습니다만, 나기철 시인 뿐 아니라 오늘의 혹독한 서울중심주의 외곽에서 진지하게 창작을 수행하는 분들이 처처에 생각 이상으로 많다는 것을 유념하는 것은, 우리가 근시안적 무지에 발목잡히지 않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교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선 이 시집의 시들은 대다수 젊은 시인들의 요즈음 스타일과는 정반대로 굉장히 짧아요. 마치 1950년대의 김종삼(金宗三)이나 박용래(朴龍來) 시인을 연상시키죠. 작품 길이뿐 아니라, 어떤 내용을 시쓰기로 삼는가 하는 점에서도 그분들과 닮은 반면, 젊은 시인들과 대조적이지요. 이번 시집이 나기철 시인의 이전 시집들에 비해 빼어난 것은 아니지만, 같이 놓고 이야기해보고 싶었습니다.
강경석 말씀하신 두 선배시인과 견주자면 김종삼 시인은 리듬이 단아하지만 양풍(洋風)이 도도하다고 할까요, 해서 나기철 시인과 아주 가깝지는 않은 듯한데 박용래 시인과 연관해볼 면은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특히 시집의 3부 끝자락에 「까마귀떼」라는 시가 전형적입니다. 시인이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면 박용래 시인이 썼다고 해도 넘어갈 것 같더군요. 유사한 작법을 보여주는 시인들이 많이 계시죠. 송종원 형은 어떻게 보셨나요?
송종원 지방 문인들이 소외되어 있고 지방에서 만들어지는 문예지를 평단에서 관심의 대상으로 두지 않는 현상은 문제이긴한데, 문단의 서울중심주의와 시의 성과를 따지는 일은 별개의 사인이겠죠. 결론적으로 말해 저에게는 이 시집이 그리 매력적이진 않았어요. 풍경이나 사건을 앞부분에 걸어두고 뒤에 가서 그에 따른 정서나 깨달음을 노래하는 작품이 많아요. 한시(漢詩)에서 많이 보아온 방식에 가깝죠. 대개의 작품 형식이 이렇게 확정적이다보니 군더더기가 들어올 필요가 없고 그러다보니 언어가 간명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시의 언어가 간명할 때 우리가 기대하는 건 시 속에 들어선 침묵의 압력일 텐데, 그 압력이 그리 강해질 여지가 없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보다 좀더 문제적이라고 본 것은 상당히 남성중심적 언어로 씌여졌다는 거예요. 시에 등장하는 여성을 구분하면 어머니, 아내, 안젤라라는 여인의 형상이 있는데, 이들이 다 남성을 위해 복무하는 여성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모성신화적 형상에 가까운 어머니, 어머니의 빈 자리를 대체하는 아내, 그리고 어머니의 역할의 수행과는 무관한 연애의 대상으로서의 여성. 이런 여성상이 과연 성정치적으로 올바른가를 물어보아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강경석 저도 사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개인적인 슬픔을 다룬 작품은 썩 매력적이지는 않다고 느기낀 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늘 정치적으로 늘 올바르지는 않잖아요.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어요. 가령 시인이 자기 작품세계를 돌아본다거나 동시대 시단의 흐름 속에서 자신이 선 자리를 가늠해본다거나 하는 게 다 넓은 의미의 비평행위죠. 그래서 시쓰기가 이미 하나의 시론(詩論)이 되기도 한다는 말이 성립하는 것 같습니다.그런 의미에서 나기철 시인이 구사하는 시론은 우리 시단의 첨단을 통과해서 되돌아간 것이거나 적어도 거기에 새로운 긴장을 불어넣는 방식은 아닌 것 같아요. 그것과 싸우고 통과한 나름의 방식이 이 안에 살아 있어야 하는 데 그렇지는 않은 거죠.
김사인 말씀드렸듯이 이 시집이 나기철의 시집들 가운데 돋보일 만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또한 두 분의 시읽기 방식도 나는 솔직히 좀 불만스럽군요.(웃음) 이 시집이 지금 우리가 보통 우리라고 말할 때의 한국어 생활권역의 가장 치열한 복판을 자기 몸으로 통과한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는 동의해요. 그런데 이런 시집은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건가, 시쓰기라는 형식을 통해 행하고자 하는 게 뭔가를 다시 생각하게 해요.
나는 나기철의 시작 태도에서 일종의 문학적 금욕주의랄까요, 염결성과 청빈 등의 고전적 덕목을 떠올리게 하는 시적 태도를 봅니다. 이것은 그것이 사물이든 상념이든 시적 대상을 대함에 있어 정중함이나 조심스러움을 잃지 않고자 하는 태도로 나타나지요. 또 시어나 표현에 있어서도, 쓰는 사람의 욕구 위주로 일방적으로 언어를 ‘사용’하려 하지 않지요. 이런 조심스러움은 얼마간 소극적이거나 소승적인 감각이기 쉬워서 현실의 격동을 시의 문면에 실갑게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삶과 언어를 대하는 이러한 마음가짐과 품위는 매우 귀한 것이라는 점은 말하고 싶어요. 이런 시적 감각과 소위 미래파적 감각은 서로 비춰주고 서로 버텨줘야 모두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시단은 사회 전반의 어떤 편향에 휘말려 한쪽이 과도해져 있지요. 그래서 나는 예컨대 민영(閔暎) 정희성(鄭喜成) 서정춘(徐廷春) 나기철 같은 시인들이 더 소중히 여겨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강경석 아까 박솔뫼의 감수성을 평가하실 때의 논리와 나기철 시집의 의의에 대해 설명하실 때가 겉보기엔 모순되어 보이는 것 같아 의아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근원에서는 서로 통하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저 멀리 있는 관념으로부터 추출된 무엇이 아니라, 체험적 진실로부터 올라온 자연스러움에 주목해야 한다는 취지로 들립니다. 이 시인이 시를 대하는 태도는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반란, 세속적 욕망이나 생활에서 부딪히는 여러 문제를 통어하는 데 핵심이 있는 것 같아요. 언어의 조탁이란 산사(山寺)처럼 평온한 마음에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 내면의 지옥을 다스리는 가운데 역설적으로 나오는 것일 테니까요. 요즘 문학에서 욕망의 적나라한 발산이 우세한 것처럼 보인다면, 나기철 시인에겐 그걸 통제하면서 생기는 각성된 체념 같은 게 엿보인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송종원 4부의 모리셔스 여행시편이 독특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네요. 여행시편이라는 게 여행지가 주는 정서적 고양감이라든가 낫섦에 도취해서 씌어지기 쉬운데, 이 시집은 좀 달랐어요. 모리셔스와 제주라는 공간에 새겨진 실향의 역사를 차분히 중쳡시켜 바라보는 시인이, 이분은 어디를 가든지 자신의 삶 혹은 몸을 구성하는 한 부문으로서의 역사적 지층을 늘 의식하고 있구나 하는 신뢰를 주었습니다.
-『창작과비평』 2014. 여름. 발췌
---------------------------------------
새로운 서정시의 모색과 디지털 시대의 극서정시
- 강은교, 이시영, 나기철, 최동호의 근간 시집을 중심으로
최동호(시인, 문학평론가)
나기철의 시집 『젤라의 꽃』(서정시학, 2014) 역시 단형시에 대한 집중적인 탐구를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여백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행간을 구사하기 위해 단락과 호흠을 조종하여 간결하지만 밀도 높은 서정시를 보여준다. 다음과 같은 시는 그가 경험한 인생의 체험 속에 어머니의 생애까지 집약시킨 것으로 외적으로 보아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결코 단순하게 읽어서는 안 되는 시이다.
살던 집
문 닫히고
제주 바다 하얗다
청천강 옆 마을로
날아가신
어머니
- 「새」 전문
시의 소재는 어머니의 죽음이지만 어머니의 생애는 물론 화자 자신의 삶도 함께 담고 있다. 나기철의 시집 『젤라의 꽃』은 어머니에게 바쳐지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그의 시편들로 미루어 보건데 그의 머머니는 평안남도 청천강 옆 마을에서 출생했으며 1·4후퇴 때 월남하여 서울에서 스무 살에 결혼하고 원주와 부산을 거쳐 제주도에 정착한 분이다. 어머니는 평생 고향을 그리워했을 것이며 그 그리움은 나기철의 의식 속에서 발효되어 서정시가 된 것이다.
어머니는 새가 되어 고향으로 날아가셨다고 했는데 그녀의 죽음에 대해 슬픔을 직접 표현하는 시어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살던 집 문 닫히고 나니 “제주 바다 하얗다”는 표현에는 이미 화자의 깊은 슬픔이 담겨 있다. 죽음의 궁극은 백색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백색에 고향 마을로 날아가 어머니가 죽은 후 평안하기를 바라는 아들의 슬픔이 담겨 있다. 여백과 울림을 통해 어머니의 대한 슬픔이 깊이 표현된 것이다. 나기철이 언어를 극소화시키기 위해 시의 제목을 ‘새’라고 한 것도 이러한 발상이다.
연둣빛 바람
누렇게
지는 이파리
하나
다시
바람 분다
저 너머
어제와 다른
구름
- 「녹나무」 전문
이 시의 묘미는 마지막 ‘어제와 다른/구름“에 있다. 녹차 물이 푸르게 우러나는 것과 같은 시이다. 화려한 수사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심심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시적 탐색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30년에 가까운 시력과 다섯 번째 시집에 이르러 도달한 나기철의 어제와 다른 시적 성취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비평적 쟁점으로 제기된 극서정시가 2011년 조정권, 이하석, 최동호 등이 각각 『먹으로 흰 꽃을 그리다』, 『상응』, 『얼음 얼굴』, 등의 시집을 간행하면서 작품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문인수의 『그립다는 말의 긴 팔』(2012), 송재학의 『날짜들』(2013), 정일근의 『방』(2013), 그리고 나기철의 『젤라의 꽃』(2014) 등이 지속적으로 간행되어 극서정시의 모색은 심화되었다. 활자문화 시대에 형성된 시의 기존 관념을 바꾸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 『문학사상』2014. 8. 발췌
------------------------------------
한국 현대시의 문제점을 진단해본다
이승하(시인, 중앙대 교수)
세상에는 운문과 산문 두 가지 종류의 글이 있는데 시인들이 운문을 쓰지 않으면 시는 결국 사라져버릴 것이다. 우리 시가 20세기에 들어와 얻은 것은 자유요, 잃어버린 것은 리듬감, 즉 운율이다. 장장 2,500년 동안 시는 눈으로 읽는 '詩'가 아니라 입으로 읊조리는 '詩歌'였다. 古代歌謠, 鄕歌, 高麗歌謠, 時調(時節歌調), 景幾體歌, 龍飛御天歌, 月印千江之曲, 歌辭……. 歌, 謠, 曲이 반드시 붙어 있었다. 하지만 서구 자유시의 유입 이래 우리 시는 가락을 서서히 잃게 되었고, 결국 독자도 잃게 되었다. 자유시는 ‘운율’이라는 전통을 배격해야지만 ‘자유’를 획득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서와 사상을 운율적이고 함축적으로 표현한 문학의 한 갈래”라는 시의 정의를 생각해본다면 산문보다 짧기 때문에 시가 아니고, 운율과 함축성이 있어야 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시는 운율을 잃어버렸고 함축적이지도 않다. 도대체 무엇을 시라고 할 수 있는가?
조동일은 『한국 시가의 전통과 율격』(한길사, 1982)에서 3음보격을 계승한 시인으로 한용운ㆍ김소월ㆍ김영랑을 꼽았고, 4음보격을 계승한 시인으로 이상화를 꼽았다. "2ㆍ3ㆍ4음보의 결합에 의한 새로운 형식의 창조"를 보여준 이로 이육사를 꼽았다. 우리의 전통적 율격을 잘 계승한 시, 아니, "전통적 율격을 새로운 창조를 위해 변형시켜 계승"한 시를 훌륭한 시로 평가했던 것이다. 조동일의 관점에 의하면 지금 이 시대의 시인 중에는 박이도나 송수권, 허형만, 나기철 같은 시인이 훌륭한 시를 쓰는 좋은 시인이 아닐까.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20세기 최고의 싱어송라이터(음유시인) 밥 딜런이었다. 그가 만든 노래의 노랫말에 담긴 반전사상이나 문명비판사상을 높게 평가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수상 이유의 전부가 아니었다. 스웨덴한림원은 "미국 노래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내며 귀를 위한 시를 썼다."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이 수상 소식이 우리나라 시단에는 별다른 울림을 주지 못한 것 같다. "귀를 위한 시", 즉 노랫말의 문학성을 높이 산 것이었으며 시 같은 가사를 쓴 시인이었기에 문학상을 준 것이었다. 좋은 노래는 멜로디만 좋아서 되는 것이 아니다. 가사가 좋아야 한다. 좋은 가사란? 시적인 가사여야 한다. 노래로 만들기 위해 썼기에 리듬감을 지닌 것은 당연하였고, 밥 딜런은 거기다 함축성을 지닌 노랫말을 지어 붙였기에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만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소월의 시가 유독 노래로 많이 만들어진 이유가 무엇인가. 민요의 가락이 배어 있는 시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 그런 시를 쓰는 이가 있는가? 전통을 무시하는 것이 무조건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민요조 서정시가 아니더라도 "자기 내부의 감정을 운율적으로 나타낸 시"라는 서정시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상기해본다면 운율의 상실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 이승하 문학평론집 『욕망의 이데아』(2018, 케이엠), 발췌
-------------------------------
나는 내 자신이 아니다
- 나기철 의 시
안수환(시인)
삶과 죽음은 지금부터는 더 이상 형태를 입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이 형태를 입게 되면 그것은 위장僞裝일 것이며, 생명활동을 희롱하는 처사가 되기 십상일 테니 말이다. 시인은 언어의 준동을 경계해야 한다. 생각해보라. 인간들에게는 자기 자신이 감내해내야 할 운명이 따로 있지 않은가. 시의 독성毒性이 이에 이르렀다면, 시인은 시를 달리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시는, 시인이 자기 자신의 운명을 아프게 떠맡는 역경逆境이다[즉, 시는 아픔으로부터 온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는 내 자신과 맺은 계약에 대한 일인칭의 환상을 내동댕이치는 일이다. 생각해보라. 나는 내 자신과 세계와의 간격을 너무 멀리 설정해 놓고 있지 않았던가.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몸에 붙은 시간을 맘대로 허비하고 있지 않았던가. 이로부터, 이른바 욕망의 물질화가 개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역』 ䷍ 화천대유火天大有의 괘사卦辭는 이렇게 말했다; “커다란 존재는 (내) 삶의 중심을 크게 넓혀놓는다”[즉, 대유 원형 大有 元亨]. 세상의 중심은 내 자신의 몸에 붙어있지 않았다. 그것이 대유大有였던 것이다. 나는 세계-내-존재이면서도 (하이데거 M. Heidegger 1889년~1976년. 『존재와 시간』), 그러나 내 마음-밖의-존재[즉, 공空 『반야심경般若心經』]이기도 했다. 인간의 시선은 수시처변隨時處變한 뒤에라야 공空을 다시 쳐다보게 된다 (『주역』 「서괘전序卦傳」). 그런 다음 시인은 자기 자신의 적대敵對로부터 돌아와 낮은 눈높이로 세계를 바라본다. 시인 나기철은 다음과 같은 시 「따스한 날」을 이렇게 쓴다 (사화집 『중심의 색깔』 2009년, 제5호, 작은詩앗 채송화, 고요아침);
오월의 따스한 날
오전이다
죽음이
철쭉으로 피어 있다
이런 날은
그곳에
갈 수 있겠다
인간에게는, 죽는 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기철은 이렇게 말한다; “오월의 따스한 날 / 오전이다 / 죽음이 철쭉으로 피어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철쭉”이 피어오르는 날 사람은 죽을 수도 있겠다는 말이었다. 소멸이 운명의 형태라면, 인간의 죽음은 “오월의 따스한 날 / 오전”이라야 좋을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사람은 죽음을 연기할 수도 없으며, 또 앞당길 수도 없다. 죽음이 저쪽에서 홀연 (나를) 불러대면, 나는 그에 즉각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죽음 앞으로 달려가는 방식이다. 죽음의 계약은 일방이었다. 이때 마음의 평정은 누구의 몫이겠는가. 죽음의 권한은, 보건대 내 자신의 현존 바깥에 있는 “오월의 따스한 날 / 오전”의 손아귀에 있었던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죽음의 주권자가 될 수 없다. 그러기에 인간은 언제고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작달막하게 낮추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 그는 죽음과 함께 공모하되 죽음의 명령에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 그 길의 경계선상에는 물론 운명의 결여에 대한 저항과 함께 삶의 성향을 되돌려놓는 믿음까지 포함돼있었던 것. 나기철은 어언간 죽음의 시각에 대한 정보를 필연처럼 엿듣고 있었던 것. 저렇게 “죽음이 / 철쭉으로 피어 있”지 않았던가. “철쭉”이 죽음의 권력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는 “철쭉”이 그의 몸인지도 모른다. 죽음은, 철쭉꽃 속에 용해된 불이었던 것이다. 꽃은 다른 한편 물방울로도 주입된 불이었을 테니까.
인간의 정신은 나무의 상수常數에 붙어 있는 원인을 본받는다. 태양을 향해 수액을 정성껏 뽑아 올리는 나뭇가지들은 질 좋은 열매를 매달고 있다. 이처럼 정신의 질화 qualification를 위해 씌어진 시는 영혼의 내밀한 경험들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쉬이 시인의 상처자국을 없애준다. 이러한 활력은 바로 또 공허에 관해 명상하는 시인들 시선의 열선熱線들과 깊이 제휴한다. 어떤 때는 불의 열기로, 어떤 때는 물의 냉기로 사물들의 직핍直逼을 삭제하는가 하면 다시금 그것들을 복원해낸다. 시인의 실체론적인 믿음은 그렇게 완성되는 것이었다. 달리 말해서 물상들 속에 뿌리를 내린 시는 인간의 체온을 빼버린 물질의 가연성可燃性 [즉, 형상의 묘용妙用]과 제휴한 나머지 시인 자신의 직관마저도 인식의 뒷자리로 밀쳐놓는다. 그것들은 시적 대상의 가연체 속에 매몰될 뿐이다. 이미 유有와 무無는 이름이 있건 없건 만물의 묘용妙用과 차별상差別相을 드러내보이는 인식의 문이 아니었던가 (상무욕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요 차양자동 출이이명 동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所徼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노자』 1장). 인식의 가장 확실한 접점接點은 시인의 손발에 불꽃을 당긴 환상에 매달려 있지 않고, 그의 심중 깊숙이 바람을 풀어놓은 직설에 닿아 있다. 직설이 바람의 체액體液이었으므로. 시인 나기철은 또 다음과 같은 시 「먼나무」를 이렇게 쓴다 (시집 『지금도 낭낭히』 2018년, 서정시학);
도서관 가는 길가
염주알들
붉게
멀리까지 치렁치렁하다
아직 먼
나의 길
그의 시에 해설을 붙이면,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의 시간은 멀리 있고, 그의 공간은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혹은 그 반대일는지도 모른다. 그의 시간은 실행으로 옮긴 다음 이쪽에 바짝 붙어있었으며, 그의 공간은 실행으로 옮기기 전 저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먼나무”는 제주공항 근처든 서귀포든 곶자왈이든 애월읍이든 큰길가 가로수로 서서 거기 빨간 열매를 매달고 있는 나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먼나무”를 멀리 있는 나무라고 명명했다. 이는, 나무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말이 아니라 “나의 길”이 “아직 먼” 길로 떨어져 있다는 뜻이리라. 지극한 “길”의 그윽함이리라. 그의 “길”은 고정된 내면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먼” 윤곽을 띠고 머나먼 천왕성天王星 Uranus 저쪽으로 달려가는 예법일 테니까. 그만큼 그의 복락은 간결했으며, 그만큼 그의 무심은 시종여일 논외의 순수를 갈망하는 구득求得이었을 테니까. 그러기에 그의 낱말은 연기煙氣를 피우지 않았다. 그는, 낱말의 강약을 결합하되 인식의 일률 대신 천령天令에 순응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그는 결코 낱말을 업신여기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의 시는 짧다. 시인의 시 「먼나무」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물망초를 떠올리곤 했다. 물망초는 키가 좀 작고, 줄기가 약하며, 습지에 살면서 파란색 꽃을 피운다. 도나우 강변에 살던 어느 청년이 애인을 위해 그 꽃을 따려다가 그만 급류에 휩쓸리고 말았다. 그는 꽃을 애인에게 던져주며 “나를 잊지 말라” (forget-me-not)고 하면서 물에 떠내려가 죽었다. 물망초勿忘草란, 그 이야기를 번역한 꽃말이다. 그런즉 꽃의 내면에는 누가 살고 있겠는가. 물망초 속에는 도나우 강가에 살고 있었던 작은 요정이 날아와 바로 그 꽃잎에다 불을 밝혀놓고 있었던 것)). 알고 보면, 지금 시인의 시 내부 온도 속에도 저와 같은 요정이 날아와 숨을 북돋으며 꼼틀거리고 있었던 것. 이제 시인의 손가락으로 만질 수 있는 영험靈驗으로는 낱말의 극지極地몇 걸음이면 충분했다. 그는, 그의 눈빛에 닿지 않는 곳으로는 멀리 발걸음을 떼지 않을 것이다. 무엇하러 사방 70리 길 밖으로 빠져나가려 하겠는가.
-『시문학』 2021. 9.
===================================
제5회 풀꽃문학상 수상작 선정이유서
제5회 풀꽃문학상 심사는, 예심에서 추천된 본상 후보 다섯 분과 젊은시인상 후보 다섯 분을 대상으로, 이분들의 최근 시집을 차근차근 읽어나가면서 진행되었다. 본상 부문은 등단 20년이 넘은 중견 및 중진 시인이었고, 젊은시인상 부문은 등단 10년 내외의 시인이었다.
먼저 본상 부문에 올라온 분들은 모두 우리 시단에서 남다른 위상을 점하고 있는 시인들이기 때문에, 그 성취의 높고 낮음에 차이를 두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수상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은 매우 깊이 있고 탄탄한 시적 성취를 보여주는 시인들을
일별하게 된 셈이다. 오랜 논의 끝에 심사위원들은 나기철 시인의 최근 시적 성취가 괄목할 만한 것이며, ‘풀꽃문학상’이 추구하는 맑은 서정시의 기율을 충족하고 있다고 합의를 이루었다. 곧 그의 시편이 자연에 대한 강한 친화력과 함께 단형 서정 속에 빛나는 인간 본질에 관한 사유를 두루 결합하였다고 판단한 것이다.
나기철 시인은 그동안 삶의 순간적 아름다움과 풍경의 세부를 단형의 정갈하고도 선명한 이미지로 잡아 그것을 단아한 정조로 노래해왔다. 그는 내면의 미세한 움직임과 풍경의 심미적 순간성을 가득 품으면서, 근원적인 것들의 소리를 예민하게 들으면서, 세상의 심층을 투시해온 시인이기도 하다. 이번 수상시집 『지금도 낭낭히』(서정시학, 2018)에서 시인은, 시를 어떤 풍경의 경지에 근접하게 끌어올리는 성취를 보여주었다. 가장 짧은 형식을 통해 가장 넓은 세계를 조망하려는 역설의 눈길과, 세상에 대해 차분하게 관조하는 시인의 개성적 시선이 결합된 가작들을 품은 것이다. 특별히 나기철 시인은 ‘제주’라는 아득한 삶의 터전이자 ‘타향’이자
‘어항’이자 온 세상이기도 한 곳에서, 애잔하고 절실하게 다가오는 미감을 통해 ‘시인’으로서의 소중한 자의식을 탐구해간다. 이처럼 나기철 시편은 지상의 세계에 개입하여 그것을 순간적으로 초월하려는 지향을 보여주면서, 거기에 실존적 고백을 얹기도 한 심미적 풍경의 세계를 낭낭하게 창조하였다. 이번 수상이 오랜 시력에 상응하는 격려가 되기를 희망한다.
2018년 10월 20일
심사위원: 윤석산(위원장), 윤효(시인), 유성호(문학평론가)(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