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께 구원받고 양육까지 받는 법>의 줄거리 :
십자가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양육까지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나를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하나님이 나를 천국에 속한 아들답게 양육하신다. 십자가 복음과 관련하여 간단한 바른 교훈을 기억하여 놓지 말고 붙잡고 있으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양육하신다.
하나님께 구원받고 양육까지 받는 법
(디도서 2:1~15)
1.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여
2.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
3.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다만 구원받은 상태로 끝난다면 알렉산더와 후메내오와 같이 믿음에서 파선하는 일이 생깁니다.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아들 되는 자격을 얻었다면 이제부터 하나님의 아들답게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답게 됨은 우리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닌 하나님께 양육을 받아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본문 11~12절을 보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께 구원받은 모든 사람은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양육까지 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양육을 강조한 이유는 디도가 사역하던 그레데의 형편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레데 출신으로써 그리스의 7대 현인으로 불리던 에피메니데스는 자기 고향 사람들을 향한 6행시를 지었는데 아주 신랄한 비판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일부를 인용합니다. 1장 12절을 보면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풍토에서 유대 율법주의적인 거짓 교사들이 잘못된 가르침을 전했고 하나님을 시인하면서도 온몸으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삶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거짓말쟁이고 악한 짐승 같고 배만 부르기를 바라는 게으름뱅이 상태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을 얹어준 결과로 나타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그레데 교인들이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으로 바꾸어 갈 수 있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양육을 가르쳐줍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동일시함으로써 구원받았고 하나님 아들의 자격을 얻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서는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이 나타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레데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이제까지 거짓말쟁이였고 악한 짐승 같았고 게으름뱅이였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 대답이 바로 본문에서 하나님의 양육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뿐만 아니라 양육의 은혜 또한 주시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으로 바꾸어 가시고자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양육에 대해 우리는 올바른 마음가짐과 태도를 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1절을 보면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양육을 받기 위해서는 바른 교훈이 꼭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이어서 본문 2~3절을 보면 디도가 목회자로서 나이 든 남녀에 대해 해야 할 말을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10절까지는 젊은 남녀와 종들에게 해야 할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내용은 무조건 이렇게 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음속에서 바른 교훈을 기억하고 있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면 이러한 행동들이 나타나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알면 자신으로부터 다른 말과 행동이 나타날 때 ‘내가 마음속에서 바른 교훈을 의식하지 않고, 바른 교훈을 내 것으로 삼지 못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깨우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하든지 바른 교훈을 자기 것으로 삼게 해줄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 일이 중요한 이유는 바른 교훈을 의식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아들다운 모습으로 양육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내면에서 바른 교훈을 의식하고 기억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나를 양육해 가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라면 교인들의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실을 보면서 이들이 바른 교훈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를 깨닫게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른 교훈을 받아들이고 내 것으로 삼게 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바른 교훈을 의식하고 기억하게 한다면 하나님의 양육은 반드시 따라옵니다. 14절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였던 것처럼 거짓말쟁이였고 악한 짐승 같았고 게으름뱅이였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도 이렇게 될 수 있다면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돈 걱정, 건강 걱정, 자녀 걱정은 합당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양육하셔서 선한 일을 위해 필요한 사람으로 모든 조건을 갖출 수 있다면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선한 일만 해나갈 뿐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바른 교훈이란 어떤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앞서 1장 1~2절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 영생의 소망을 언급하였습니다. 이 말들을 쉽고 기억하기 좋게 표현해 보자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염두에 두면 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이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영생의 소망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신 곳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을 염두에 두는 것이야말로 바른 교훈의 핵심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십자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열리는 영적 사실들에 대한 태도입니다. 쉽게 말해 십자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바른 교훈의 출발점이자 열쇠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동일시의 믿음을 갖게 되면 영적인 사실들이 우리 앞에 열리게 되는데 그 핵심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을 기억하고 내 것으로 만들면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쟁이인 나, 악한 짐승 같아서 나의 유익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나, 오직 육체로 느끼는 기쁨과 즐거움만을 추구하며 영적인 일과 선한 일에 대해서는 게으름뱅이인 나를 하나님 아들의 모습으로 바꾸어 가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신 곳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바른 교훈을 마음에서 의식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양육 받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일들을 위해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양육 받기는 너무나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수고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이와 관련하여 바른 교훈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님의 있음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를 ‘택하신 자들의 믿음’이라고 언급한 이유는 이 믿음이 세상 사람들과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있음을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다만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은 있음을 느끼고자 하는 대상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육체의 오감에 의존하여 있음을 의식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은 오감으로는 느낄 수 없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있음을 먼저 의식하고자 합니다. 의식함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을 상대할 분으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르고 대화할 수 있는 분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입니다.
둘째,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이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지난 시간에 진리와의 연합은 일인칭, 이인칭, 삼인칭의 영역에서 모두 일어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일인칭 영역은 나의 자아의식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하면 내가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아이를 앞에 두고 있을 때 아버지나 어머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진리에 부합하는 자아의식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배우자를 앞에 두고 있을 때 남편이나 아내라고 생각한다면 그 또한 진리에 부합하는 자아의식일 수 없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자녀에 대해, 배우자에 대해, 세상 모든 일에 대해 죽은 자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가진 자요, 예수님과 연합한 자의 자아의식입니다.
이인칭 영역은 상대방에 대한 부분입니다. 이인칭 영역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을 나의 상대자로 삼게 됩니다. 내가 지금 회사에서 사장님을 마주하고 있다고 해서 사장님을 상대자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집에서든 회사에서든 나는 하나님만을 상대자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돈 문제가 발생했더라도 내가 직면하는 첫 번째 유일한 이인칭의 당신은 돈 문제가 아닌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사장님 앞에 있다고 해서 사장님을 직면하고, 돈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돈을 직면한다면 이인칭으로 관계할 대상이 잘못된 비진리의 상태입니다.
삼인칭 영역은 내가 제3자가 되는 부분입니다. 내가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죽은 자라는 일인칭의 진리를 유지하고, 내가 상대해야 될 대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라는 이인칭의 진리를 넘어가면, 내 몸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성령님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체성이 나를 장갑으로 끼시고 살아가시기 때문에 내 몸으로 살지만, 성령님이 사시는 것이 됩니다.
셋째, 영생의 소망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신 곳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우리가 외출하면 집을 돌아갈 곳으로 의식하게 됩니다. 한편 집에 있을 때는 직장을 가야 할 곳으로 의식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대한 그리움은 일상적인 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바른 교훈의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이 바른 교훈은 나의 생활 현장에서 기억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상대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늘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그리워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 늘 기억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을 보면 ‘신중함’이라는 표현이 다섯 차례나 언급됩니다. 신중함이란 매우 조심스러운 마음가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중함이라는 표현을 통해 생활 현장에서 바른 교훈을 놓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회사에 나가서 신중하게 ‘나는 누구인가? 내가 상대해야 될 대상은 누구인가? 내가 말하고 행동함은 어디에서 비롯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이라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식합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회사라는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임을 의식합니다. 나의 몸은 회사에 있지만 마음에서는 사장님이나 일이 아닌 하나님을 유일한 당신으로 직면하며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기를 추구합니다. 그럴 때 내가 회사에서 해야 될 말과 행동은 오직 성령님에 의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을 신중하게 해나가라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활 현장에서 바른 교훈을 기억할 때 하나님의 양육에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신중함을 가지고 나는 누구인지를 생각하고, 신중함을 가지고 내가 상대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며, 신중함을 가지고 내 몸으로 하는 말과 행동이 어떻게 나와야 하는지를 생각합니다. 지금 내가 회사에 있지만 퇴근하면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대신 지금도 나를 내려다보고 보고 계시는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이 계시는 천국으로 마음이 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천국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곧바로 올라가실 정도로 좋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정리해보면 바른 교훈 붙잡기의 4대 강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나는 누구인가? :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이다.
2. 나의 상대는 누구인가? : 내가 지금 삶의 현장에서 상대해야 될 유일한 당신은 하나님 아버지뿐이다.
3.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 것인가? : 예수님과 하나님과 연합하면 생활 현장에서 성령님에 의해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
4. 어디를 그리워할 것인가? :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계신 천국은 내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곳으로써 내가 가야할 아버지의 집이다.
우리는 이 4대 강령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양육은 진행되어 갑니다.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의 모습이 선한 일을 위하여 준비되는 하나님 아들의 모습으로 바뀌어 가게 됩니다.
이 바른 교훈의 4대 강령의 핵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십자가에서 연합함으로써 하나님과 성령님에 대한 길이 열립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그리워할 수 있습니다.
다시 12절을 보면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으로부터 바른 교훈의 4대 강령을 기억할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양육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경건하지 않은 것을 버리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경건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일이란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된 상태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입니다. 따라서 경건하지 않은 일이란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오는 모든 말과 행동입니다. 바른 교훈을 생활 현장에서 의식하고 기억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경건하지 않은 일들을 없애 가십니다.
그리고 세상 정욕을 버리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세상 정욕이란 곧 세상에 대한 욕구입니다. 내 마음이 몸에 붙어있을 때 세상에 대한 욕구가 생깁니다. 몸으로 만나는 세상에 대해 이게 이루어지면 좋겠고, 저게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욕구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생활 현장에서 바른 교훈의 4대 강령을 의식하고 기억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점점 더 세상 정욕을 버리도록 양육해 가십니다.
한편 바른 교훈의 4대 강령을 기억하는 동안 신중함이 생겨납니다. 기억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생활 현장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는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을 바라는 마음가짐이 신중함입니다. 그럴 때 의로움이 나타납니다. 의로움은 곧 옳음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부장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부장이라는 자아의식을 갖는 것은 바른 교훈에서 벗어난 상태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부장이라고 부를지라도 나는 스스로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회사라는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바른 교훈을 기억할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그렇게 하도록 양육해 가십니다.
내가 하는 일이란 단지 생활 현장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억하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해야 한다는 생각뿐입니다. 이러한 바른 교훈을 기억할 때 태도가 신중해집니다. ‘내 직함이 부장일지라도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다. 내가 상대해야 될 사람은 과장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과장에 대해서 이야기하실 주체도 성령님이시다.’라고 생각할 때 실제로 성령님께서 회사라는 상황에 맞는 말과 행동을 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서 나타나야 할 신중함과 의로움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의 자아의식은 세상의 직함일 수 없습니다. 회사에 있을지라도 부장이 자아의식일 수 없습니다. 자녀 앞에 있을지라도 부모가 자아의식일 수 없습니다. 틀렸고 의롭지 못한 자아의식입니다. 회사에서도 자녀 앞에서도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입니다. 이렇게 신중한 자아의식이 의로움이 됩니다. 그리고 경건함이란 의로운 연합 상태에서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이 되고 싶어야 하고 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인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끔 할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를 디도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힘을 모아 거대한 프로젝트를 이루기를 좋아합니다. 수없이 많은 건물을 짓고 댐을 만듭니다. 국가단위의 경제개발 계획을 세우고 진행해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사람을 바꿀 수 있는 프로젝트가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바른 교훈의 4대 강령을 기억할 수 있으면 됩니다. 생활 현장에서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입니다. 생활 현장에서 내가 상대해야 할 대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뿐입니다. 생활 현장에서 나로 하여금 말하고 행동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생활 현장에서 내가 의식하고 잊지 말아야 할 곳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계시는 천국입니다.
이 바른 교훈의 4대 강령을 일상적으로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의식할 때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들조차도 하나님의 아들로 양육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디도에게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바른 교훈의 4대 강령은 결코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있음을 의식함입니다. 믿음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내 의식과 욕구로 이인칭이신 하나님께만 관여하는 것이 연합입니다. 그럴 때 성령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내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말과 행동을 장악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을 일상적으로 의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하고 의식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양육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경건하지 않은 말과 행동들을 제거해 가실 것이고, 마음이 몸에 붙어서 세상에 대해 갖던 정욕을 버리고,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가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아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았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양육까지 받아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명실공히 하늘에 속한 아들들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상상도 할 수 없는 프로젝트를 우리 앞에 제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맡아야 될 부분이 너무 간단해서 민망할 정도입니다. 우리의 생활 현장에서 바른 교훈의 4대 강령을 꼭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지렁이 같은 존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당당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양육의 과정이 오늘도 진행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