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 11년 7월 20일
옛날 주(周) 나라의 문왕(文王)이 세자(世子)로 있을 때에 착한 여인(女人) 사씨(姒氏)를 얻어 배필을 삼으니, 저구(雎鳩)가 서로 화답해 우는 것처럼 화순(和順)하고, 얌전한 덕행(德行)이 가지가 굽어 드리우듯 아랫사람들에게 미치는 어짐[仁]을 미루어 인지(麟趾)의 응보를 가져 왔으며, 자손을 위한 좋은 계책[燕翼之謀]를 남겼다고 한다.
아아, 아름답구나. 후세(後世)로 내려오면서 순후(淳厚)한 풍습(風習)은 점점 엷어지고 여자가 지켜야 할 훈계는 전하지 아니하게 되니, 후비(后妃)와 빈어(嬪御) 중에는 간혹 남의 아내로서 마땅한 덕행은 생각지 아니하고 남편의 달콤한 사사로운 총애(寵愛)만을 다투어 바라는 이가 있게 되었다. 심(甚)한 자는 아양을 부리는 방법을 쓰며,압승(壓勝)의 술법(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쇠고챙이로 심장을 찌르고 눈을 후벼 파고 손발을 묶는 행위)으로써 독점하려고 하다가 폐출(廢黜)되는 일을 재촉하게 된다. (생략) 우리의 조종(祖宗)은 가법(家法)이 매우 엄정(嚴正)하여 매양 내조(內助)의 공(功)을 얻었다. 내가 전년에 세자(世子)를 책봉하고, 김씨를 누대(累代) 명가(名家)의 딸이라고 하여 간택(揀擇)하여서 세자빈(世子嬪)을 삼았더니, 뜻밖에도 김씨가 미혹(媚惑)시키는 방법으로써 압승술(壓勝術)을 쓴 단서가 발각되었다. 과인(寡人)이 듣고 매우 놀라 즉시 궁인(宮人)을 보내어 심문하게 하였더니, 김씨가 대답하기를, ‘시녀(侍女) 호초(胡椒)가 나에게 가르쳤습니다.’ 하므로 곧 호초를 불러 들여 친히 그 사유를 물으니, 호초가 말하기를, ‘거년 겨울에 주빈(主賓)께서 부인(婦人)이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 술법(術法)을 묻기에 모른다고 대답하였으나, 주빈께서 강요하므로 비(婢)가 드디어 가르쳐 말하기를, 「남자가 좋아하는 부인의 신을 베어다가 불에 태워서 가루를 만들어 가지고 술에 타서 남자에게 마시게 하면, 내가 사랑을 받게 되고 저쪽 여자는 멀어져서 배척을 받는다 하오니, 효동(孝童)·덕금(德金) 두 시녀의 신을 가지고 시험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했는데, 〈효동·덕금〉 두 여인은 김씨가 시기하는 자이다. 김씨는 즉시 그 두 여인의 신을 가져다가 자기 손으로 베내어 스스로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이나 하여 그 술법을 써 보고자 하였으나 그러한 틈을 얻지 못하였다고 한다. 호초가 또 말하기를, ‘그 뒤에 주빈(主嬪)께서 다시 묻기를, 「그 밖에 또 무슨 술법이 있느냐.」고 하기에 비(婢)가 또 가르쳐 말하기를, 「두 뱀[兩蛇]이 교접(交接)할 때 흘린 정기(精氣)를 수건으로 닦아서 차고 있으면, 반드시 남자의 사랑을 받는다.」 하였습니다. 가르친 두 가지 술법의 전자(前者)는 박신(朴信)의 버린 첩 중가이(重加伊)에게서 전해 들었고, 후자(後者)는 정효문(鄭孝文)의 기생첩 하봉래(下蓬萊)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또 세자궁(世子宮)에 순덕(順德)이라는 시녀가 있는데, 본래 김씨의 집종[家婢]이었다. 일찍이 김씨의 약낭(藥囊) 속에 베어 넣은 가죽신의 껍질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괴이하게 여겨, 호초(胡椒)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우리 빈(嬪)께 이런 짓을 하라고 가르친 자는 누구냐.’ 하고 즉시 그것을 꺼내어 감춰버렸다 한다. 과인은 이 말을 다 듣고 즉시 순덕(順德)을 불러다가 거듭 물으니 다시 다른 말이 없었으며, 또 말하기를, ‘비(婢)가 일찍이 주빈(主嬪)의 어머니 집에 가서 가죽신의 껍데기를 내보이고 이어 그 까닭을 말하였습니다. 그 가죽이 아직도 비(婢)에게 있습니다.’ 하고, 꺼내어 바치는 것이었다. 이에 과인은 중궁(中宮)과 같이 김씨를 불러다가 친히 정상과 사유를 물으니 일일이 자복(自服)하였고, 베어낸 신의 가죽이 갖추어 있고 증언(證言)이 명백하여 전세(前世)의 애매하고 의사(疑似)한 일에 견줄 것이 아니었다. 슬프다, 정말 이런 일이 있었구나. 아아, 세자를 정하고 그 배필을 간택한 것은 진실로 장차 종묘(宗廟)의 제사를 받들며, 남의 어머니로서의 궤범(軌範)이 되어 만세(萬世)의 큰 복조를 연장하려고 한 것이었다. 지금 김씨가 세자빈이 되어 아직 두어 해도 못 되었는데, 그 꾀하는 것이 감히 요망하고 사특함이 이미 이와 같기에 이르렀으니, 오히려 어찌 그가 투기(妬忌)하는 마음이 없고 삼가고 화합(和合)하는 덕(德)을 드러내며, 닭이 세 차례 울어 새벽이 되었다고 알리어092) 내조(內助)를 이룩하고, 종사(螽斯)093) 의 상서를 불러 들일 것을 바랄 수 있겠는가. 이러한 〈부덕(不德)한 자가 받드는 제사는〉 조종(祖宗)의 신령이 흠향하지 않을 것이며 왕궁(王宮) 안에 용납할 수 없는 바이니, 도리대로 마땅히 폐출(廢黜)시켜야 할 것이다. 내 어찌 그대로 두어 둘 수 있겠는가. 이미 선덕(宣德) 4년 7월 20일에 종묘에 고하고 김씨를 폐빈(廢嬪)하여 서인(庶人)을 삼았으며, 책인(冊印)을 회수(回收)하고 사삿 집으로 쫓아 돌려보내어서 마침내 박행(薄行)한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의 가법(家法)을 더럽히지 못하게 하였다. 그의 비위를 맞추어 아첨하여 그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한 시녀 호초는 유사(有司)에 넘겨서 법과 형벌을 바르게 밝히도록 하였다. 생각건대, 이것은 상례(常例)에 벗어난 일로서 실로 국민들의 귀와 눈에 놀라움을 줄 것과 더욱 모든 관료(官僚)들도 아직 그 일의 시말(始末)을 깊이 알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기 때문에 이에 교서를 내려 알리노라."
* 세종 13년 5월 6일
제주에 사는 효덕(孝德)이란 여인은 어두운 눈에 티를 없애고, 교치(嚙齒) 후충(喉蟲)을 고치므로, 명소(命召)하여 쌀과 콩 아울러 5석, 염장(鹽醬) 및 면포·정포 각 3필을 주었다.
* 세종 13년 5월 13일
"도내의 각 고을에 사는 저주(咀呪)하는 사람들 중에 한 여인이 뱀의 그림을 음식에 넣고 주문(呪文)을 외고 한 남자에게 먹이니, 남자가 복통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곧 웅소근(雄蔬根)을 다려 먹이니 세 마리의 뱀이 뱃속에서 나왔는데, 그 중에서 두 마리는 죽이고, 한 마리 뱀을 개에게 주었더니, 개가 먹고 사흘만에 죽으므로, 개의 배를 갈라 보니, 그 뱀이 살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해 동안 옥중에 있다가 목을 매어 자살하고, 두 여인만은 정상을 얻지 못하여 오랫동안 옥중에 가두었으니, 억울함이 적지 아니합니다. 형벌을 삼가는 뜻에 위배되오니 석방시키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 세종 13년 5월 19일
정사를 보았다. 의령(宜寧)의 한 여인이 자기 남편을 죽였는데, 공모한 자를 국문하니 없다고 하니, 다시 고문(拷問)하자, 친정 아비와 더불어 공모하였다고 하므로, 그 아비를 국문하니 처음에는 불복하다가, 다시 고문하자 역시 여인의 말과 같으니, 법률을 참조하면 모두 능지 처사(凌遲處死)에 해당된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인이 처음에 공모자를 말하지 아니하다가 고문을 하니까 자기 아비를 말하였으니, 이것은 정말 의심스러운 일이니 아비의 죄는 감하는 것이 옳겠다."
* 세종 13년 7월 15일
강계부(江界府)의 여인 대이(大伊)가 간부(奸夫) 백성 엄송(嚴松)과 더불어 본부 김귀생(金貴生)을 모살(謀殺)하였으니, 대이는 율이 능지 처사에 해당하고, 송은 처참에 해당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 15년 12월 20일
함길도의 어떤 여인이 본국을 배반하고 몰래 타국에 귀화(歸化)하매, 유사(有司)에서 참형에 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죄는 마땅히 사형에 처하여야 하나, 이 사람은 여자인데, 역시 남자와 같이 처결하여야 하는가. 율문(律文)에는 비록 남녀의 구분이 없으나, 가장 가벼운 형벌에 좇아 처리하는 것이 어떤가."
* 세종 16년 3월 25일
대마도(對馬島)에 잡혀 갔던 본국 여인 성구지(性仇之)는 족친도 없고 집도 없어 그의 기한(饑寒)이 우려되니, 그 소재지의 수령으로 하여금 항상 구호를 가하여 의복·식량 등을 갖추어 지급하여 기한이 없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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