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의 역사
인간들은 원시시대부터 동굴 등 천혜(天惠)의 조건을 갖춘 공간을 찾아서 기거(寄居)하며 종족(種族)을 번성시켜 왔다. 최적의 삶의 공간을 찾아다니며 경험으로 발전하던 풍수는 이미 고대사회(古代社會)에서는 산신(山神)과 수신(水神) 등 자연을 숭배하던 토속신앙과 접목이 되며 인간들의 생활과 함께 발전되어 왔다. 단순히 물과 바람을 응용하며 좋은 자리를 찾던 초기 단계의 풍수는 음양오행(陰陽五行)과 결합하며 이론적으로 정립되기 시작하였으며, 학문적 구성과 체계를 갖춘 풍수지리학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당나라 때로 보인다. 땅의 형세(形勢)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이치(理致)를 규명하려는 풍수지리학은 동양철학(東洋哲學)의 커다란 한 축으로서 자리 잡았으며, 현대에 이르러는 학문적 체계가 좀 더 구체화 되었고, 또한 우리의 생활 속에 뿌리 깊게 발전하고 있다.
풍수(風水)는 인류문화의 발전과 함께하며 중국의 황하강(黃河江) 유역에서 발생하였으며,〈周礼, 春官〉에는 “凡國之大事, 先筮而后卜”라고 하였는데 상(商), 주(周)시대에는 사람들은 비교적 중대한 활동이나 행사를 치르기 전에 대부분 “卜筮”를 행한 후에 거행하였으며, (중략) 그 중 가옥(家屋)을 축조(築造)할 때 점치는 것은 전문적으로 “卜宅”이라고 일컬었다. 즉 처음에는 복술(卜術)로서 풍수의 길흉을 점하던 것이 점복(占卜)의 이론체계인 팔괘(八卦)와 구궁(九宮), 오행(五行) 등이 점차적으로 접목되어 풍수이론의 근간으로 자리 잡았을 것으로 보인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거치며 주역(周易)과 음양오행(陰陽五行)이론이 심층적으로 정립(正立)이 되었는데 한대(漢代)에 이르러야 비로소 지리적(地理的)인 관점에서 체계화된 현존하는 최초의 풍수서인《청오경(靑烏經)》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고, 이는 현재까지 많은 풍수서들의 시조격(始祖格)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나 저자는 작자미상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이다.
이후 진(晉)나라 사람 곽박(郭璞276~324)이 펴낸 《장서(葬書)》는 초기 풍수학의 핵심이론이라 할 수 있는“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에 따른 “장자승생기(葬者乘生氣)”설을 밝히는 등, 《청오경(靑烏經)》과 함께 풍수지리학의 최고의 고전(古典)이 되었으며 장경은 청오경과 더불어 당시의 왕실과 상류계층에 알려졌다. 특히 당 현종이 금색 비단주머니에 넣고 간직하였다 하여 《금낭경(錦囊經)》이라고도 하며, 후대에 《장서(葬書)》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장경(葬經)》이라고도 불리웠다. 《금낭경(錦囊經)》은 장설(張說), 일행(一行), 홍사(泓師) 등 세 명이 주석(註釋)를 달았으며, [사고전서(四庫全書)]에도 들어있으며, 규장각에도 판본이 있다. 풍수지리의 역사가 전개되는 과정에 있어서 《금낭경(錦囊經)》의 이론은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저자인 곽박(郭璞)에 대해서도 잠시 주목을 할 필요가 있다. 곽박은 진나라 사마예(司馬睿)가 황제(皇帝)가 되었을 때 복지(卜地)와 점택(占宅)을 담당한 고위관리였었다. 곽박은 《금낭경(錦囊經)》 이외에도 이 무렵 사주(四柱)라는 용어를 문헌상 최초로 발견 할 수 있는 『옥조신응진경(玉照神應眞經)』을 저술하였을 뿐더러, 공간성(空間性)만 있고 시간성(時間性)이 결여되었던 풍수지리에 시간성(時間性)을 가미하여 더욱 기묘(奇妙)하게 되는 “현공학(玄空學)”에 대한 이치(理致)를 깨우치고 있었던 천문(天文),지리(地理),인사(人事)에 달통했던 분이었다.
당(唐)나라 시대 풍수의 대가(大家)로서는 풍수의 중시조라고 하는 양균송(楊筠松) 선사(仙師)와 그의 제자인 증공안(曾公安)이 있었다. 양균송 선사 이후부터는 "풍수를 구빈지학(救貧之學)이라"고 했었는데, 이는 "풍수야 말로 빈한함에서 구제할 수 있는 학문이고, 풍수로서만이 사람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양균송의 저서로 《감룡경(撼龍經)》, 《의룡경(疑龍經)》, 《청낭경(靑囊經)》, 《청랑오어》등과 《천옥경(天玉經)》등을 지어 현공대괘(玄空大卦)인 애성법(埃星法) 등을 밝혔으나, 현공학의 핵심비결은 천 여 년을 밀전(密傳)으로 공개되지 않았다.《감룡경(撼龍經)》은 성봉(星峰)을 구성(九星)의 형태로 분류하여 길흉(吉凶)을 논하였고, 《의룡경(疑龍經)》은 간룡(幹龍)과 지룡(枝龍)의 분류와 혈법(穴法)에 대하여 논하였다.
양균송의 제자인 증공안(曾公安)은 《용혈사수심경(龍穴砂水心鏡)》을 저작하여 처음으로 용혈사수론(龍穴砂水論)을 등장시켰다.
송대(宋代)는 진단(陳摶)과 그의 제자인 오극성(吳克誠)이 있었고, 오극성의 아들이며〈현공비지(玄空秘旨)〉,〈천기부(天機賦)〉 등을 지은 오경란(吳景鸞)이 있었다. 진단(陳摶)선생은 8대 신선(神仙)중의 한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인(奇人)이면서, 하도낙서(河圖落書)의 응용과 술수(術數) 체계를 완성시켰고, 또한 오경란(吳景鸞)은 주자(朱子)의 증조할머니의 묘(墓)자리를 잡아 주어 남송(南宋)대의 주자라는 대학자가 나올 수 있도록 하였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송(宋)나라 때 풍수가 크게 유행하였는데 형기론을 위주로 연구하는 사람들을 형법가(形法家) 또는 형기파(形氣派) 또는 강서파(江西派)라 하고, 이기론을 위주로 연구하는 사람들을 이기가(理氣家) 또는 이기파(理氣派) 또는 복건파(福建派)라고 하는데 강서(江西)나 복건(福建)이라고 하는 것은 학문적 이론이 발생된 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형기(形氣)는 강서파인 북파(北派)의 양균송의 이론이 위주가 되었다. 일명 만두(巒頭)라고도 하여, 산형(山形)의 성체(星體) 뿐만이 아니라 용(龍), 혈(穴), 사(砂), 수(水)등의 전반적인 형세(形勢)를 살피는 모든 방법을 뜻한다."
이기(理氣)라는 것에 대하여 《청랑경(靑囊經)》에서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이(理)는 기(氣)가 돌아가는 이치이고, 기(氣)는 형체(形體)속에 들어 있다." 이는 천하의 모든 만물(萬物)은 형이상(形而上)이든 형이하(形而下)든 이기(理氣)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은 없다는 논리로서 복건파인 남파(南派)에서 유행하였으며 물의 흐름인 수법(水法)을 중요시 했다.
명(明)나라 때는 장종도(張宗道)의 〈지리전서(地理全書)〉, 〈지리변정(地理辨正)〉의 장대홍(蔣大鴻) 등이 있었는데, 특히 주경일(周景一)의 〈산양지미(山洋指迷)〉는 산의 형세의 곡률에 따른 개면(開面)여부에 의한 혈(穴)의 진가(眞假)를 분별할 수 있도록 하여 풍수서의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다.
청대(淸代)에 이르러 섭구승(葉九升), 윤일작(尹一勺), 심신주(沈新周) 등에 의하여 다수의 풍수서들이 나왔으며, 특히 심소훈(沈紹勳)(1849~1907)이〈심씨현공학(沈氏玄空學)〉과〈지리변정쾌요(地理辨正快要)〉를 세상에 내 놓아 그동안 밀전(密傳)으로만 전해지던 현공학(玄空學)이 세상에 나와 빛을 보게 되었다.
다음은 장태상교수께서 추천하시는 풍수필독서 목록이다.
〖표 1-1〗 풍수지리학의 필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