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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믿음 끊김 없으면 받는 하늘 선물들>의 줄거리 :
야고보서의 주제는 '끊김이 없는 믿음'입니다. 생활 현장에서 말하고 행위를 해야만 하는 그 어떤 순간에도 믿음 끊김 현상이 나타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마음에 각인하려는 것이 야고보서 전체의 취지입니다. 그래서 편지 서두에서 이렇게 믿음 끊김이 없으면 내가 받아서 누릴 수 있는 하늘 선물들을 나열하십니다. 지혜와 세상 가치 졸업장과 온갖 천국산 좋음과 하나님 자신입니다.
믿음 끊김 없으면 받는 하늘 선물들
(야고보서 1:5~18)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믿음이 끊기지 않는다면 반드시 하늘로부터 선물들이 주어집니다. 반대로 하늘 선물들을 받은 기쁨이 충만하지 않다면 그 이유는 믿음이 끊겼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는 ‘신약의 잠언, 신약의 아모스’라고 불립니다. 이렇게 불리는 이유는 야고보서가 특별히 윤리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본문 말씀의 50% 이상이 ‘~을 하라’는 명령형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가 윤리를 강조한다고 이해한다면 본래의 취지를 붙잡을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가 기록된 시기는 46~49년 사이로 추정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때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로 10여 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당시 교인들에게는 예배당을 비롯한 지금 같은 기독교 종교로서의 시스템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야고보 장로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자들에 의해 제시되는 증언들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믿음이란 결코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세상을 빠져나가는 부활의 사건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을 누가복음에서는 ‘별세’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셨습니다. 교인들에게 이외에는 달리 기억해야 될 사실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애인이 잠깐 미국으로 떠나면 한국에 있는 나의 마음은 애인을 따라 미국으로 가게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태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의 흐름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의식이 깨어있는 동안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과 함께 언제나 마음이 하늘로 흘러가는 상태가 믿음입니다. 교인들에게는 이러한 믿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끊기지 않으면 하늘의 선물들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해 하늘을 향하는 마음의 흐름이 끊기지만 않으면 세상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하늘의 선물들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승천으로부터 10여 년이 지나면서 로마 제국 각지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출신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라는 명확한 사실들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하늘을 향하는 믿음에 끊김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역할을 하던 야고보는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야고보서 전체의 내용은 행위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행위가 필요한 생활 현장의 급박한 순간에도 믿음이 끊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성경에 있는 모든 명령형의 말씀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제시되는 모든 명령의 궁극적 취지는 단순히 무엇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움직여야 하는 생활 현장의 급박한 순간에도 하늘을 향하는 마음의 흐름이 절대로 끊기지 않게 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야고보서를 통해서 생활 현장 속에서 믿음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 또 다른 측면의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본문의 내용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끊김이 없을 경우에 이 땅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흐름이 끊김 없이 하늘로 이어지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라는 통로를 통하여 하늘의 선물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선물로 지혜가 언급됩니다. 5절을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서두에서 인내가 언급됨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인내와는 별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지혜가 언급되는 것이 다소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6절을 보면 의심하지 말라는 요청이 이어집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의심으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크리노(διακρίνω)의 원형을 보면 ‘무엇과 무엇 사이’라는 뜻하는 접두사 디아(δια)와 ‘분리시키다’라는 뜻의 크리노(κρίνω)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의심하지 말라’는 표현은 흔히 신앙과 의심 사이에서 갈등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해석을 합니다. 그런데 갈등하게 되었다면 이미 의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심이란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가 분리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야고보는 내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계속 하늘을 향한 흐름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지혜를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내 마음의 흐름이 끊김 없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동안에만 하늘의 창고 안에 가득히 준비되어 있는 지혜의 선물이 주어질 수 있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일까요? 지혜란 내가 말하고 행동해야 되는 모든 순간에 하나님과 연결됨으로 주어지는 지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이 생각이 내려오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 연합할 때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 제가 지금 이런 일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될까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이러한 기도는 마음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고 하늘에 연결되어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것을 모르느냐?’라고 절대 꾸짖지 않으십니다. 비록 그것이 사소한 일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를 묻는 자들에게 언제나 풍성할 정도의 지침들을 내려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선물로써의 지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내용으로부터 인내 뒤에 지혜가 언급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1~4절에 걸쳐 믿음의 끊김 현상을 막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끊김이 없을 때 주어지는 선물로써 제일 먼저 지혜를 이야기합니다. 지혜란 곧 말과 행동을 해야 할 때 하늘에서 내려오는 지침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야고보서의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말과 행동을 위한 지침으로써의 지혜가 맨 처음에 언급되는 이유는 믿음이 끊기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야고보 장로가 굳게 붙잡고 있던 믿음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선물로 이 세상 가치에 대한 졸업이 언급됩니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가치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는 일이 잘 풀리는 것, 건강과 장수, 부유함, 자녀의 형통 같은 것들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표적 가치입니다. 그런데 하늘을 향하는 마음의 끊김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세상 가치는 가지고 싶은 대상이 아닙니다. 세상 가치를 졸업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가치에 대한 졸업이란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는 세상 가치가 아무런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하늘을 향한 마음의 흐름이 끊김이 없을 때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흘러감이 끊기지 않는 상태가 믿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을 때는 이 세상의 가치를 졸업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들이 없어도 아쉽지 않고, 있어도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9~11절을 보면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낮은 형제’란 이 세상의 가치가 많지 않아 스스로를 낮은 자로 여기며 위축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돈 없는 사람은 돈 많은 사람 앞에서 위축될 수 있습니다.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사람 앞에서 위축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늘을 향한 마음의 흐름이 끊기지 않는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서는 높고 낮음의 개념이 바뀝니다. 돈이 많은 사람, 외모가 잘생긴 사람, 이 세상의 가치를 많이 가진 사람, 권력자들 앞에서 위축되지 않습니다. 위축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데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하늘을 향하는 흐름이 끊기지 않는 사람에게는 세상 가치가 마음을 위축시키는 이유로 작용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을 향하는 마음의 흐름이 끊기지 않을 경우에는 혹시 부자라고 할지라도 가진 돈이 아무것도 아님을 마음에서 느끼게 됩니다. 돈은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대표적인 가치입니다. 이러한 돈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껴질 수 있는 이유는 더 좋은 것을 마음에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돈을 가지려 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돈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진정한 좋은 것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 끊김이 없을 때 주어지는 세상 가치의 졸업이라는 선물입니다.
한편 우리가 읽지 않은 12절을 보면 이러한 내용과 연관 지어서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와 관련된 내용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시련을 견디면 인내가 만들어지고, 인내가 만들어지면 믿음의 끊김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3절에서는 이러한 믿음 끊김을 막아주는 인내를 가져다주는 시련을 시험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2절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라고 할 때 언급된 시험(test)이 시련을 의미한다면 13절에서 언급된 시험은 유혹(temptation)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과 시련을 유혹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박해를 받아 삶의 터전을 잃고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나의 마음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을 따라 아버지가 계신 하늘로 가야된다.’라고 생각하며 정신을 차리고 인내로 붙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어진 박해는 인내를 길러주는 시련으로써의 시험(test)이 됩니다. 이러한 시험을 이겨낸 자는 이제 웬만한 어려움이 주어져도 인내로 견뎌 나갈 수 있게 됩니다. 하늘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도록 세상에 대한 마음의 내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한편 박해가 가해졌을 때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가 안정적으로 잘살아 보고자 한 일 아니냐? 예수를 믿어서 집과 밭을 빼앗기고 쫓겨나야 한다면 믿을 필요가 없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보니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말이 맞다. 예수 믿기는 생활 터전을 빼앗기면서까지 할 일이 아니다.’라고 받아들이게 되면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이러한 분명한 유혹이 아니더라도 은연중에 유혹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이 주어지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나를 바라보시며 사랑하신다는 게 진짜일까?’라고 의심할 수 있습니다. 시련을 유혹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똑같은 시련이 주어져도 정신 차리고 일어나서 마음이 예수님 따라 하늘로 가는 사람에게는 모든 시련은 인내를 키우고 끊김 없는 믿음을 만들어 주는 자랑하지 못해 안달하는 기쁨 거리가 됩니다. 그러나 시련을 유혹으로 받아들여서 넘어간다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시련을 유혹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도 사정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사랑이시라면 어떻게 나에게 이러한 어려움을 주실 수 있느냐?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이 맞느냐? 내게 이렇게 어려운 상황이 임한 것을 보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도 확실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라고 되물을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14~15절을 보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심하는 반응이 나오게 되는 이유는 욕심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채워지고자 욕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마음의 구조이기에 악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무엇을 좋게 여겨서 욕구하느냐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만으로 채워질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세상의 가치들을 좋다고 여기며 욕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언급된 욕심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을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형통을 좋아합니다. 모두 욕심입니다. 우리는 ‘잘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무척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나 본래 ‘좋겠다.’라는 말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나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 ‘이 일이 잘됐으면 좋겠다, 저 일이 잘됐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굳이 ‘좋겠다.’라는 말을 붙이고자 한다면 ‘이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만 되면 좋겠다.’라고 바랄 수 있을 뿐입니다. 세상의 가치에 대해 내가 기뻐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바람을 갖는다면 그것은 다 욕심일 뿐입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하나님을 의심하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것들에 대한 강한 애착이 욕심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가치를 졸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에 대한 아까움과 애착이 있다면 저주에 빠져있는 상태입니다.
한편 믿음이 끊기지 않고 하늘을 향한 마음의 흐름이 유지되는 사람들 또한 비어있는 마음을 채워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16~17절을 보면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속지 말라’ 함은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에 속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돈을 좋아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여전히 마음에서 돈의 좋음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속고 있는 상태입니다. 돈뿐만이 아닙니다. 건강이 좋다고 느껴질 수 있고,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을 따라 가치를 획득하는 형통이 좋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 포착된다면 ‘내가 지금 속고 있다!’라고 깨닫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쁨과 좋음에는 세상의 조건은 상관이 없습니다. 슬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령 지금 돈이 없어서 망하게 된 상황이더라도 슬프다면 속고 있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 망하는 상황이라도 마음이 기쁠 수 있는 이유는 좋음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음이란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절대 이 세상의 사업이 흥하거나 망한다고 해서 좌우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속지 않음은 마음의 끊김 현상을 없애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속는 이유는 세상에 대한 욕심 때문입니다. 그리고 욕심이 생기는 이유는 세상의 가치들이 좋다고 느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좋다고 느끼지 않아야 될 대상에 대해서 좋음을 느낀다면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속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하늘로 올라감은 끊기게 됩니다.
17절 하반절을 보면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변함이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육체를 갖고 계신 분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좋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서 주어지는 좋음은 변함이 없는 좋음입니다.
빛이신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좋음을 제공하십니다. 빛은 다른 것들을 보이게 하지만 빛 자체를 볼 수는 없습니다. 빛이신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좋은 것들 또한 변함이 없습니다.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다는 말씀이 뜻하는 대로 보이는 이 세상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좋음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사람이 빛 앞에 섰는데 그림자가 없다면 무척 이상할 것입니다. 물리적 형태를 가진 대상에게는 반드시 그림자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좋음은 그림자조차 생기지 않는 좋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파악되는 그림자가 없는 분이시듯,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하시는 좋음도 이 세상에서는 파악이 되지 않는 좋음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야고보는 쉽게 변하며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이 세상의 물질적인 좋음들, 눈에 보이는 좋음에 속지 말 것을 요청합니다. 하늘을 향한 마음의 흐름인 믿음이 끊기지 않을 때 눈에 보이는 상황이 어떻든지 우리의 좋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음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의심하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채 하나님께로부터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아서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채로 사는 모든 기독교 종교인이 바로 이와 같은 상태입니다. 일상의 모든 삶을 의심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믿음이란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고,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가 벌어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반면 의심은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채 땅에 있어서 하나님과 내 사이가 벌어지게 된 상태입니다. 기독교 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그렇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체계에 갇힌 대답일 뿐이지 실제 마음 상태를 반영하지 못합니다. 실제 마음은 하나님과 벌어진 채 의심 속에 있는 상태입니다. 의심 속에 있다는 것은 곧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내 마음이 밀착되는 상태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이 일체가 되어 계시기에 예수님 안에 있는 내 마음도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면 그 자체로 내 마음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분리된 상태입니다. 의심 속에 있다면 믿음은 시작조차 못한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이론상으로만 ‘하나님은 창조주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많은 기독교 종교인이 이론을 붙잡고 있는 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합니다.
야고보서는 바로 이러한 상태를 경계합니다. 2장 19절에서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마귀 사탄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믿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종교인들이 의심 속에 있는 상태와 비교하자면 오히려 마귀 사탄의 믿음이 확고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할 수 없다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이는 곧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더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길까지 만들어 주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가정이나 직장을 비롯한 생활 현장에서 하나님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 하나 되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마음은 죽어도 하늘을 향해 흐를 수 없습니다. 믿음이 끊긴 상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믿음이 끊긴 상태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착각할 뿐입니다. 심지어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도 믿음은 끊겨 있습니다. 목사님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이야기하지 않으니, 교인들의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서 밀착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하늘로 흘러야 하고, 끊김이 없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계속해서 하늘로 흐르고, 예수님 안에서 밀착되어야만 하나님과의 사이가 벌어지는 의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목사님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교인들의 마음이 무슨 수로 하늘로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처음부터 의심 속에 있는 것이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믿지 않는 상태에 있으면서 이론에 갇혀서 믿는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야고보 장로의 말에 따르자면 사탄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믿는다고 합니다. 다만 사탄은 그렇게 믿는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싶어 하지 않을 뿐입니다. 의심하는 상태는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믿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모든 말과 행동을 해야 되는 급박한 생활 현장에서 마음이 하늘로 흐름을 유지하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고 살다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가치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없어도 위축될 필요가 없고 있다고 그 위에 서서 높아질 수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진짜로 하늘에서 좋은 것들이 내려옵니다. 그림자조차 생기지 않고, 이 세상에서 어떤 물리적 조건과 환경 속에서도 변함이 없는 절대적 좋음을 받아 누리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면서 예수님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가 분리되는 일이 없도록 하며 이로부터 내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가 분리되는 악몽 같은 현실은 제발 이제는 더 이상 어느 한순간에도 일어나지 않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