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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늘 소망은 패자의 도피 행각인가?>의 줄거리 :
하늘 소망은 지속되는 고난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 붙잡는 대안일까요? 세상 중심부로 들어가 주류가 될 수 없는 변두리 사람들의 자기 정당화인가요? 250년 지속될 고난의 여정으로 들어가는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하늘을 소망하는 이 세상 나그네의 신분을 구약의 선지자뿐 아니라 천사들조차 부러워한다는 사실을.
하늘 소망은 패자의 도피 행각인가?
(베드로전서 1:3~12)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우리가 읽지 않은 10~12절에서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드로 사도는 먼저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대해 구약의 선지자들이 자세히 연구를 해서 성경 속에 기록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도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자들이 전해준 내용이기도 하다고 하였습니다. 또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라는 복음은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받으심과 영광 받으심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러한 내용을 연구했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로 가는 일이 단순히 세상에 대한 도피가 아님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생활화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날마다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가는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말이 산 소망이지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이 세상을 회피하고 도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러한 시각이 잘못되었음을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완성된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이야기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천사들이 이 땅에서 태어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나그네로 살다가 하늘로 올라가는 자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생활화할 사람들을 부러워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게 된 이유는 6절의 내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고난받기를 기뻐하고 나그네 되기를 자처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늘에서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소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고난이 하늘 소망을 도와준다는 말입니다. 다만 이 상황은 겉으로 보기에는 세상을 도피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고난으로 인해 안정된 생활환경을 만들 수 없기에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차선책을 선택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하늘로 가는 것이 이 세상에서 자리 잡지 못하는 약자와 패자들의 변명이나 자기 정당화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서가 쓰인 시기는 네로의 박해가 극심해지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로부터 교인들은 2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고난과 박해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인들은 ‘고난이 우리의 운명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마음이 하늘로 가는 것뿐이다. 이 세상에서 잘 되기를 소망할 수 없으니 하늘이라도 소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다. 주류가 될 수 없는 비주류로서 어쩔 수 없이 하늘을 소망하는 나그네로 살 수밖에 없다.’라고 여길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러한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소망하는 일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가능합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을 붙잡음으로써만 하나님이 계신 하늘 보좌 우편까지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직면할 수 있는 자리에 가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 소망을 두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나그네가 될 수밖에 없는 삶은 결코 현실 도피가 아닙니다.
오랜 기간 동안 구약의 선지자들이 자세히 살펴서 연구하여 기록한 내용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알았다면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것은 천사들의 로망이기까지 합니다. 하늘의 천사들조차도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만들어진 후에 생활화하며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로망은 소설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꼭 이루고 싶은 이상이나 소원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생활화하는 나그네의 삶이 천사들의 로망입니다.
천사들이 나그네의 삶을 부러워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천사들에게 한계가 있다면 하나님에게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다는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하나님이 빛이 뿜어져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황홀경에 빠졌던 것과 같습니다. 천사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상태에서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그렇게 좋으신 하나님의 빛이 가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을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을 소망할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천사들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을 수도 없고, 하나님을 소망할 수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조건은 육체입니다. 육체를 입고 있기 때문에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이 가려져 있다는 사실이 믿음의 전제가 됩니다. 오감에 가려져 계신 하나님을 믿고 소망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에 천사들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의 좋음을 직면하고 하나님에게 사로잡혔으면 됐지 굳이 믿고 소망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베드로는 4절에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유업은 곧 아들이 받는 상속입니다. 인간과 천사는 같은 피조물이지만 처지가 다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직면하여 하나님의 좋으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들은 유업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서 유업을 이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천사들이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좋음에 사로잡히는 반면,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더불어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어떤 천사도 사위일체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완전히 가려져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을 믿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좋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좋음만을 소망하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력이 우리를 아들들이 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생활화함으로써 유업을 받는 자의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이러한 일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 산 소망을 가지고 나그네로 살아가는 우리를 로망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로부터 하늘 소망이 현실 도피가 아님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고난을 겪으며 이 세상에 정착할 수 없고 안정된 생활을 누리지 못하는 중에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패자들의 도피 행각이나 자기 정당화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로마 제국의 박해가 있을 줄 몰랐던 구약의 선지자들은 물론이고 천사들까지도 부러워할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일은 그만큼 대단한 일입니다. 몸에 갇혀서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오감을 통해 끊임없이 세상이 마음에 들어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음이 세상을 떨치고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소망하며 하늘로 올라가서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황을 이루는 일은 결코 도피일 수 없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 부러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해진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며 이루신 그리스도 연쇄 과정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머릿속에는 ‘나그네’라는 단어가 중심에 있었습니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강력하게 대두되는 단어가 ‘산 소망’입니다. 산 소망을 가진 나그네를 천사들이 로망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고난은 마음이 세상에 정박하지 못하게 하고 하늘로 가는 일에 도움을 줍니다. 다만 고난을 도피해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곧 고난이 없다고 해서 마음은 이 땅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이 세상의 주류가 되고, 이 세상의 중심부로 향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해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기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하늘로 가는 것이 어디까지나 차선책으로 유용한 일로 여겨진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음을 구약의 선지자들도 부러워하며 심지어 천사들까지도 로망으로 여기고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천사들의 로망입니다.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나도 한 번 육체를 입고 태어나서 저렇게 살아봤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좋음이 가려진 상태에서 믿고 사랑해 보고 싶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 하늘의 천사들이 육신을 입을 수만 있다면 이들은 하나님의 좋음을 알고 있기에 악착같이 하나님을 소망하고자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어떤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고,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는 일에 전력을 다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자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허락된 일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감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천사보다 나은 점입니다.
이렇듯 베드로 사도의 머릿속에서 나그네와 산 소망의 결합은 천사도 부러워할 모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삶의 현장에서 나그네가 될 수 있고 산 소망을 가질 수 있을까요? 나그네가 되기 위해서는 삶의 현장에 마음을 붙일 대상이 없어야 합니다. 나그네는 지금 자기가 속한 곳에서 마음 붙일 곳이 없어서 스쳐 지나가는 자들이고, 전혀 다른 곳에 마음을 붙이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는 음식을 먹을 때도 마음을 붙이지 않고 먹습니다. 가족을 대할 때도 마음을 붙이지 않고 대합니다. 사업을 하고 직장 생활을 해도 마음을 붙이지 않습니다. 운전을 해도 차에 마음을 붙이지 않습니다. 여행을 가도 여행지에 마음을 붙이지 않습니다. 쇼핑을 해도 물건에 마음을 붙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나그네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마음을 붙이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영적인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환경을 늘 의식 속에 켜놓을 때 십자가를 중심으로 세상과 하늘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하늘에는 내 보물이 있고 세상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내려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내려오는 곳에는 내가 마음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보물인 하나님이 계신 쪽으로 올라갑니다.
마음은 채워지고자 하는 공백이 있고, 이 공백에서 생겨난 흡입력은 24시간 작동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영적 환경을 의식에 켜놓으면 채움을 위한 흡입력이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흐르고, 주님이 올라가 계신 하늘에는 내 보물이 있음을 의식합니다. 이 의식이 늘 켜져 있을 때 채움을 원하는 마음은 저절로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하나님이라는 보물을 향하는 마음의 흐름을 산 소망이라고 부릅니다.
한편 산 소망이 있다면 죽은 소망도 있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흘러가서 목표한 것을 가져도 채움이 생기지 않는 대상에 대한 소망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다 없어질 것들에 대한 소망입니다. 일시적이고 없어질 것들을 소망함으로써 나를 죽게 하는 소망이 죽은 소망이고,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가기에 천국에서 없어지게 하는 사망의 소망이기 때문에 죽은 소망입니다.
우리는 산 소망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산 소망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영적 환경을 의식에 켜놓을 때만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비유하자면 마음의 소망은 항구에 정박한 배와 같습니다. 정박을 하게 되면 이 땅에서는 나그네가 되는 것이고 세상에 마음을 붙이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 전체에 대해 나그네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문자 그대로의 나그네의 삶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대한민국에 집이 있는데 1년 동안 외국에 나가 살게 되었다면 나그네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나그네의 삶이란 이런 육체적인 관점에서의 나그네의 삶이 아닙니다. 마음이 무엇에 정박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 안에서도 소망 때문에 나그네가 되는 일은 지금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여성이 어떤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상형의 청년을 만나 결혼을 꿈꾸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결혼 생활과 자기 꿈을 양립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고 결국 꿈을 위해 결혼을 포기하고 청년을 놓아줍니다. 이 여성은 소망 때문에 청년에 대해 나그네가 됩니다. 이러한 원리는 다른 모든 일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소망은 마음을 한곳에 정착시키는 것입니다. 그 소망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소망하는 대상 이외의 모든 대상에 대해서는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로 살게 됩니다.
제가 캐나다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시간만 나면 걷던 둘레길이 있었습니다. 번천 레이크라는 곳인데 울창한 산속에 터널을 뚫고 수원지로부터 물을 끌어들여 만든 인공 호수입니다. 그 호수를 중심으로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2시간 정도가 걸렸습니다. 얼마나 물이 맑고 아름다운지 한국에 돌아오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이 그곳을 갈 수 없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해야 할 일들이 더 우선적이었기에 번천 레이크를 스쳐 지나가야만 했습니다.
여러분도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배우자가 좋을 수 있습니다. 자녀가 좋을 수 있습니다. 사업이 좋을 수 있습니다. 외모가 좋을 수 있습니다. 돈이 좋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 다 번천 레이크입니다. 이러한 대상들을 나그네로 지나칠 수 없다면 본문에서 언급한 대로 영혼의 구원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고난이 주어졌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하늘을 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산 소망을 가진 나그네가 되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엄청난 기회입니다. 영감을 받은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하늘에서 하나님의 좋음을 직접 보는 천사들이 부러워 할 정도로 대단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좋음이 가려진 상태에서 믿을 수 있는 기회, 그렇게 좋으신 하나님만을 소망할 수 있는 기회, 그 하나님만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 이러한 기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천사들도 부러워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하나님을 직면하여 하나님의 좋음에 사로잡혀 있는 천사들이 부러워하는 일을 지금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소망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어지는 고난은 ‘웬 떡이냐!’라며 기뻐할 일입니다. 6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고난이 없어도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가야하는 나그네로 살아야 하는데, 고난받음으로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는 일을 도와주고 있으니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상황이 이 세상의 중심부에서 거리가 먼 변두리일 수 있습니다. 누가 봐도 보잘것없는 환경적 여건에서 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을 붙잡고 마음이 하늘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삶의 여건이 열악하다면 능력이 없기 때문도 아니고, 열악한 조건 때문에 하늘로 향할 수밖에 없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에 대한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 주권적으로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결과가 세상에서 별 볼일 없다고 여겨지는 환경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여러분을 돕기 위함이고 천사들도 부러워하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이 부러워하는 사람은 스티브 잡스나 빌게이츠 같은 재벌이 아닙니다.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이나 우리나라의 윤석열 대통령도 아닙니다. 서울대 총장을 부러워하지도 않을 것이며 검찰총장이나 대법원장을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좋음을 마주하고 있는 존재들이기에 이 세상에서 부러워할 존재가 없습니다. 그러한 천사들이 부러워할 존재가 딱 하나 있다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생활화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이 땅을 나그네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산 소망을 가진 나그네야말로 천사들의 로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삶을 쉽게 살 수 있도록 주권적으로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인정도 없고, 세상에서 부릴 수 있는 권세도 없고,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돈도 없고, 외모도 탁월하지 못하고, 학벌이나 지식도 남다르지 못한 여건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구현할 수 있는 최고의 삶은 나그네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생활화함으로써 하늘에 산 소망을 둔 나그네의 삶이 가능하도록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박해받는 고난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의 바람과 욕구보다는 항상 부족한 상황이 주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고난을 받는다면 기뻐하고 감사할 일입니다.
세상의 중심부에 들어가지 못하고 변두리에 머물고 있습니까? 성공했다고 내세울 만한 점이 아무것도 없는 인생입니까? 이러한 여러분의 인생 때문에 기뻐 뛰며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재벌 되고, 권력자 되고, 성공하는 사람들보다 더 크게 사랑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이 사랑이 믿어지기를 바랍니다. 가난하고, 별 볼 일 없고, 세상의 변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붙잡고 생활화하며 이 땅에 마음 붙이지 않고 산 소망을 가지고 나그네로 사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좋으심을 직면하고 있는 천사들의 로망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내심을 십자가의 의미를 통하여 다시 한번 우리 속에 깊이 받아들이게 해주시옵소서. 이 세상에서 정말로 별 볼 일 없는 환경에 처해 있음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임을 뼛속까지 깨닫고 노래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