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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 민형이다."
언니와 동네에 잠깐 산책하러 나갔다가 들어오는 길, 대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인영. 옆에서 걷던 언니가 발걸음을 멈추고 목소리까지 작아진다.
“야 숨어, 숨어.”
“숨긴 왜 숨어. 우리가 뭐 죄지었어?”
“딱 보면 몰라? 이리와 얼른.”
내 팔을 잡아당겨 코너로 몸을 숨기는 언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라 몸을 뒤로 물렀다. 언니 머리 위로 고개만 빼서 보고 있으니 낯선 차 한 대와 대문 앞에서 어떤 여자와 마주하고 서 있는 이마크… 아니 이민형.
“누구야?”
“내가 어떻게 알아. 나도 오늘 처음 보는데. 야 사귀는 건 아닌 거 같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나도 오늘 처음 보는데.”
“야 간다. 오 키 크다. 그런 거 보면 민형이 항상 키 큰 애들만 만나는 거 같아. 안 그러냐?”
“가- 얼른. 나 피곤해.”
“뭐야- 산책 같이 갔다 오면 맥주 같이 마셔준다며!”
내 팔뚝을 때리는 언니를 앞서 걸어가면 뒤에서 언니가 큰 소리로 ‘이민형!’ 하고 부른다. 그러면 집에 들어가려다 고개를 돌려 마주치는 얼굴은
이 집에 살고있는 이씨 남매들 중 셋째,
그리고 지금 나와 함께 2층에서 지내고 있는
마크,
아니 이민형이다.
2.
“산책 갔다 와?”
“뭐야? 누구야? 예쁘던데?”
“그냥 작업 같이 하는 사람이야. 나 차 안가져왔다니까 이 근처에 들릴 데 있다고 태워준 거야.”
“이 시간에? 이 동네에?”
언니가 이민형의 팔짱을 끼면서 물으면 이민형은 건조한 얼굴로 대답했다.
“피곤해. 들어가자.”
“아니 젊은것들이 왜 이렇게 피곤해해? 어?”
“그래. 들어가자.”
허리에 손을 짚고 나와 이민형을 번갈아 보던 언니를 두고 이민형이 먼저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 역시 언니를 두고 이민형 뒤를 따라 들어갔다. 저 큰 가방에 도대체 뭘 저렇게 넣고 다닐까. 커다란 크로스백의 끈을 고쳐매고는 걸어가는 뒷모습.
“야.”
"왜"
사람이 부르는데 돌아보지도 않고 귀찮다는 듯 왜, 이런다.
"......"
“아 왜-”
그냥 말없이 가만히 있으면 그제야 피곤한 얼굴로 뒤돌아본다.
얼굴에 정말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또 눈이 빨갛다.
“…아니야.”
황당하다는 얼굴을 뒤로하고 먼저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도 모르겠다.
집으로 들어가는 애를 왜 불러세운 건지.
3.
지금 내가 사는 이 집에는 나 포함 네 명이 산다.
이여림, 이여주, 이동혁 그리고 이민형.
이렇게 넷이 살게 된 건 막내 동혁이가 스무살이 되고 나서 부터니까 햇수로 6년째다. 어렸을 때는 이 집 주인인 우리 삼 남매 가족이 1층에 살았고, 2층에 이민형네 가족이 세 들어 살았다. 캐나다에서 나고 자랐던 이민형은 부모님의 이혼으로 중학생때 엄마와 단둘이 한국에 이사왔다. 그리고 여림언니, 나, 이동혁 순으로 우리 삼남매는 모두 이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내가 대학생 때 잠깐 기숙사에 살았을 때랑, 교환학생 갔을 때를 빼면 우리 삼남매는 단 한번도 이 집을 떠났던 적이 없다. 그리고 이민형이 지금 스물일곱이니까 딱 10년. 10년의 시간 중 나에게도 이민형에게도 돌아올 집 역시 이 집 한 곳 뿐이었다.
이민형이 성인이 되고 이모는 재혼했고, 2층엔 이민형 혼자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 동혁이가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우리 부모님까지 교외로 나가서 한적한 곳에서 지내고 계신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작은 단독주택은 우리 넷의 몫이 되었다. 집에 관련된 거의 모든 일은 첫째인 언니가 전부 관리한다. 그러니 나야 집 관련해서는 신경 쓸 일이 거의 없고 언니가 그렇다면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만 끄덕이는 편이다.
원래 1층과 2층을 잇는 계단이 주방 옆으로 크게 나 있었는데 이민형네 집에 세를 주게 되면서 그 계단 중간에 문을 만들어 막아놨었다. 그렇게 내내 지내다가 부모님이 이사 가시면서부터 떼버렸다. 별이 없으면 보통 1층에서 넷이 다같이 저녁을 먹는데 굳이 바깥 문으로 왔다 갔다 하기도 귀찮고 무엇보다 내가 2층 방을 쓰기로 하면서 더욱더 문이 무의미해졌다.
1층에는 방이 세 개였는데 화장실이 있는 가장 큰 안방은 당연히 엄마, 아빠가 썼고 그다음으로 큰 방은 여림언니가, 남은 방 하나에 나랑 이동혁이 이층침대를 놓고 초등학생 때까지 썼던 거 같다. 그다음부터는 뭐 동혁이는 거의 거실에서 생활했다고 해도 무방했다. 대학까지 집에서 다녔던 언니와는 다르게 나는 대학에 가자마자 기숙사로 들어갔다. 그 덕에 이동혁만 신났지. 내가 쓰던 방을 차지해서 쓰다가 부모님이 이사를 하고 나서는 언니가 제일 큰 방으로, 동혁이가 언니 방으로. 나머지 방 하나는 옷 방으로 바뀌었다. 4학년이 되면서 다시 집에 돌아온 내가 옷을 다 버리고 들어가겠다며 작은 방으로 향하는 걸 언니랑 이민형이 위에 빈방 많으니까 위에서 지내라며 겨우 막았다.
집에 돌아온 이후 사실 2층은 내 공간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이민형은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기도 했고, 애초에 물건이 많지 않았다. 대부분을 작업실에서 보내는 이민형이 아끼는 물건이라곤 쇼파 앞에 있는 스피커랑 통기타 한대 정도. 그걸 보고는 나중에 동혁이가 한참 후회했다. ‘그냥 작은 누나한테 내 방 내주고 내가 2층으로 올라올걸. 형도 작은누나보다 내가 더 좋지 않아?.’ 하면서.
어쨌든 이런 시간을 거쳐 지금은 1층에 이여림, 이동혁.
2층에는 나와 이민형이 살고 있다.
“야 2층! 너네 수박 먹을거야?”
계단 밑에서 언니가 소리치는 게 들린다. 대답할 기운도 없는지 소파에 널부러진 이민형 대신 내가 대답했다.
“이따 먹을게!”
“야 뭔 이따야. 먹을거야 말거야?!”
이민형에게 턱짓을 했다. 그럼 거기에 뭐.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이민형. 계단 끝으로 걸어가 밑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안 먹는대.”
그러면 언니 목소리가 멀어진다. ‘아 목 아파-’ 하고 중얼거리면서.
3.
“야. 씻고 자. 어? 일어나.”
“… 좀 놔둬 나 좀… ”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이민형의 팔을 툭툭 치니 귀찮다는 듯 휙 뿌리친다. 아오 저 성질머리.
“씻고 자라고.”
“아, 내가 알아서 할게! 왜 그래 진짜!”
“뭐 내가 씻겨줘?”
“아 미쳤어?”
“일어나라고 얼른.”
귀찮은 건 잠깐이지 씻고 자면 훨씬 개운하게 잘 수 있는데. 안 그래도 밤마다 작업한다고 제대로 못 자서 고생하면서. ‘일어나 얼른.’ 하고 억지로 잡아 일으켜 앉히면 눈을 감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늘어지는 몸. 어깨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사이를 손가락에 힘을 줘서 주무르면 아주 단단하다. 이렇게 힘이 들어가 있으니까 피곤하지. 몇 번 누르지도 않았는데 ‘아아- 아파’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면서 신경질적으로 내 손을 치워버린다.
이게 진짜…
“비켜.”
“너 눈 엄청 빨개 알아?”
“피곤하다고 했잖아 내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마주한 두 눈이 지나치게 빨갛다. 아니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이렇게 빨개도 되는 거냐고. 내게서 등을 돌리는 몸을 붙잡아 다시 내 앞으로 돌렸다. 턱을 붙잡고 눈을 쳐다보니 그대로 눈을 감아버린다.
“눈 떠. 너 이거 정상 아니야. 병원 가자.”
“놔.”
“나와. 병원 가게.”
“이 시간에 무슨 병원에 가. 누나가 이러고 안 있으면 나 진작에 씻고 누웠겠다.”
얼굴을 붙잡고 있던 손을 또 쳐 내리면서 짜증을 내는 이민형. 텔레비전 밑 첫 번째 서랍을 열어 안약을 꺼냈다.
“눈.”
“하지 말라고 진짜.”
“스읍- 눈 떠 얼른.”
내가 팔을 붙잡고 있으니 마지못해 천장을 보고 가만히 있는다. 오른쪽 눈에 한두 방울을 똑똑 떨어트리니 작게 여러 번 깜박이더니 양옆으로 주르륵- 하고 안약이 샌다. 왼쪽 눈에도 똑같이 해주고 나서야 팔을 놔줬다. 약을 두면 뭐하냐고 넣을 생각을 안 하는데. 이거 들고 다니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매번 여기에 박아두고 사는 건지.
“씻어 얼른.”
“아 알았다고.”
화장실 쪽으로 등을 밀었더니 쿵! 하고 발을 구르면서 소리를 지르고 화장실로 향하는 이민형이다. 그러게, 처음부터 말을 들었으면 내가 이러지도 않지. 내가 아까 말했을 때 먼저 씻었으면 진작에 잤겠다. 소파에 대충 던져진 이민형 가방에 안약을 넣어놓고 방에 들어가려는데 가방 안 핸드폰이 세차게 울어댄다.
“야 전화 오는데?”
“누군데?”
“…지윤누나?”
“그냥 놔둬.”
그러니까 나도 진짜 모르겠는데
내가 왜 그랬는지.
“여보세요?”
- 아… 마크 핸드폰 아닌가요?
“네, 맞는데요. 누구세요?”
- 저는 마크랑 같이 작업하는 사람인데요, 전할 말이 있어서…
“이 시간에요?”
- 내일 일정 관련해서… 근데 그쪽은 누구세요?
“…어… ”
뭐라고 대답할지 생각하는 순간 탁- 하고 내 손에서 핸드폰을 채갔다.
“아 누나 미안해. 우리 누나야. 내가 벨 소리로 해놨더니 나 씻는 동안 계속 울리니까 시끄러워서 받았나 봐. 응? 내일?”
‘그냥 놔두라니까 진짜.’ 핸드폰 아래를 손바닥으로 막고서 나를 노려보고 방으로 들어가면서 발로 방문을 탁- 하고 닫는 이민형였다. 저거 머리 안 말리고 또 베개 축축한 상태로 그냥 자려고.
“저 성질 진짜...”
닫힌 문을 노려보다가 나도 내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았다.
4.
“나 다음 달부터 출근하면 이제 아침 못 해줘. 다들 알아서 챙겨 드시길-”
밥 먹으라는 소리에 1층에 내려오면 동혁이가 국을 퍼 나르면서 얘기했다.
“민형이는?”
“씻어.”
“하여튼 제시간에 내려오는 법이 없지.”
언니가 물어본 말에 대답하니 동혁이가 고개를 저으며 이민형 밥까지 퍼 놓고 자리에 앉았다. 뒤늦게 머리를 말리지도 않고 내려온 이민형이 의자를 꺼내 앉았다. 앉아서도 물만 마시고는 숟가락들 생각을 안 했다.
“여태까지 버틴 게 용하다.”
“아- 그러면 이제 작은 누나가 아침 하면 되겠다.”
“뭔 소리야? 이여주 출근 안 해 이제?”
“나 출근 안 하면 아침 안 먹어. 잘 거니까 깨우지 마.”
“이여주 쉰대. 1년 동안.”
어렵게 젓가락질하는 여주를 보면서 여준이가 말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집에서 노는 사람이 아침 하는 게 룰인데. 낮에 자면 되잖아.”
“시끄러- 그때 가서 다시 얘기해.”
“이 씨… ”
투닥거리는 둘을 쳐다보는데 이번에는 누나가 말했다.
“너네 오늘 약속 있어?”
“아니-”
“나는 낮에 잠깐.”
차례대로 여준이와 내가 대답하고 공여주를 쳐다보니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엄마, 아빠가 저녁 같이 먹자더라. 지난주에 약속했는데 까먹었어.”
“누나는 그런 기억력으로 회사를 어떻게 다니냐 진짜. 촬영 날짜는 안 까먹어?”
“시끄러워. 장소는 네가 엄마랑 통화해봐.”
“맨날 나한테만 시끄럽대. 알았어…”
누나와 여준이가 떠드는 와중에도 국에 대충 밥을 말아놓고 숟가락으로 꾹꾹 눌러대기만 하는 여주였다. 그리고 그런 여주 얼굴을 들어 올렸다.
“눈 봐봐.”
“뭐야. 공주 눈 또 그래?”
“어제는 더 심했어. 꿈에 나올까 무섭더라.”
“아 치워-”
턱을 붙잡고 있는 내 손을 쳐낸다.
“안약 가방에 넣어놨으니까 버티지 말고 넣으라고 좀.”
“형… 누나도 서른이야.”
“넌 시끄러워.”
“내일부터 밥 안 해.”
그렇게 다시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만 나다가 누나가 먼저 늦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에 말아놓은 밥을 반도 안 먹은 공여주도 뒤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여주 국그릇을 보면서 여준이가 말했다.
“아, 이게 뭐야. 무슨 매너야 이게? 말은 건 다 먹어야 될 거 아니야.”
의자를 집어넣고 일어난 여주가 그런 여준이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두 번 쓸어내리며 말헀다.
“짜.”
그렇게 주방을 나서는 뒷모습을 노려보던 여준이가 소리를 질렀다.
“내일부터 진짜 밥 안 해! 진짜 안 해!”
하여튼 아침마다 조용한 날이 없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소리를 치는 여준이의 이마를 숟가락으로 탁- 때리면 여주가 나간 자리를 쳐다보던 두 눈이 나를 쳐다본다.
“아 왜 때려-”
“이게 어디 누나한테 소리를… 조용히 하고 밥 먹어 얼른.”
“누나도 형한테 소리 지르는데 왜 나한테만 뭐라고 하는데!”
“이게 형한테 어디... 눈 안 깔아?”
“다들 나만 만만하지. 서른까지만 참는다. 진짜….”
“참나 ㅋㅋㅋ 서른까지만 참으면 어쩔 건데 네가 ㅋㅋ”
네가 서른되려면 아직 4년이나 남았는데. 그때까지는 이렇게 해도 되는 거냐 그럼. 그릇에 소리 나게 숟가락질을 해대는 녀석이 웃겨서 쳐다보다가 ‘설거지 내가 할 테니까 공여주한테 소리 지르지 마.’ 하면 또 금방 좋다고 실실거린다. 단순한 자식.
“형.”
“왜.”
“형은 아직 누나 좋아하지?”
이 미친…
“가끔 너- 무 티 나거든. 아까도 그래. 이러다가 큰누나도 알겠어.”
“설거지 네가 해.”
“작은누나 요즘 누가 자꾸 데려다줘. 형보다 키도 커.”
“2층 빨래도 네가 할래?”
“누나 말로는 그냥 선배라는데 절대 아니야. 퇴근하면 빨리 집에 가야지 남의 집 앞까지 왜 태워다줘? 안 그래?”
“청소기까지 돌려놔. 갔다 와서 확인한다.”
“형 여자친구랑 왜 헤어졌어? 작은누나 때문에 그런 거 맞지.”
결국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등 뒤에서 끝까지 입을 놀리는 여준이다.
“공주 영국 간대.”
계단을 오르려다 다시 몸을 돌려 주방으로 돌아왔다.
“뭐?”
여주가 남긴 밥을 훌훌 떠먹던 녀석이 반찬을 집어 먹으며 말했다.
“나도 대충 들은 거라 잘 모르는데, 저번에 친구랑 통화하는 거 들었어. 한 달 있다가 영국 가서 몇 달 동안 있을 거라던데?”
“언제 그랬는데?”
“저번 주였나?”
“누나도 알아?”
“큰누나? 몰라. 아직 공주가 우리한테 말 안 했으니까 큰누나도 모르지 않을까?”
공여주가 영국에…
“설거지 진짜 내가 해?”
“그럼.”
“내가 좋은 거 알려줬잖아.”
“뭐 알려줬는데 네가.”
“작은누나 영국 간다는 거.”
“말했다. 2층 청소기까지 돌려놓으라고. 거짓말하면 죽어. 언제 돌렸는지 기록 뜨는 거 알지.”
“형 영국 언제가? 빨리 가버려.”
“그리고 누나한테 그냥 공주가 뭐야, 누나라고 하랬지. 죽을래?”
질린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녀석을 뒤로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5.
“너희는 약속도 없어? 어떻게 저녁 먹자고 하면 한 명도 안 빠지고 다 참석이야?”
“안 오면 안 왔다고 뭐라고 할거였으면서.”
이모의 말에 누나가 의자를 빼고 앉으니 삼촌이 웃으면서 누나가 자리도 앉기 전에 비운 컵에 물을 따라주셨다.
“공주는?”
“오고 있대.”
“작은누나는 하여튼 맨날 늦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드르륵- 하고 문이 열렸다.
“공주 왔어? 어머 얘, 너 왜 이렇게 살이 많이 빠졌어? 어?”
공여주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우리 엄마가 여주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헀다.
“진짜? 나 살 빠졌어 이모?”
“어이구- 좋아하기는. 곧 얼굴 사라지겠다 야. 밥 안 먹어 요즘?”
“이제 곧 찔 거야 다시. 오늘이 제일 말랐으니까 많이 봐 둬.”
엄마가 여주 등을 살짝 치면서 ‘으이그-’ 하고는 옆으로 끌어다 앉혔다. 그렇게 여주까지 앉고 나니 룸이 꽉 찼다. 안쪽 테이블에는 이모랑 삼촌, 여림 누나와 여준이가 마주 보고 앉고. 우리 테이블에는 아빠, 엄마 그리고 나랑 공여주가 마주 보고 앉았다.
“흥민이가 영국에서나 와야 이렇게 다 같이 밥을 먹네.”
“그러게- 날이 갈수록 얼굴 보기 어려워서 어떡해?”
“삼촌 이번 시즌에 경기 보러 온다더니 오지도 않고.”
“그러니까. 아니 뭐가 자꾸 일이 생기네.”
밥을 먹으면서 밀린 대화를 나누는데 아빠가 말을 꺼냈다.
“여주 영국 간다며.”
“응? 응. 안 그래도 오늘 말하려고 했는데.”
진짜네. 나도 모르게 옆자리에 앉은 여준이에게 고개가 돌아갔다. 그러면 자기 말이 맞지 않냐는 듯 턱을 치켜드는 얼굴을 잠깐 쳐다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맞은편의 얼굴을 쳐다봤다.
“저 다음 달에 영국 가는 거 확실해졌어요. 한 5개월 정도?”
“그렇게나 길게? 저번에는 두 달만 있다 올 거라며.”
이모가 젓가락도 내려놓고 깜짝 놀라면서 되물었다.
“응. 그냥 좀 쉬면서 서치만 하려고 했는데 기획안이 통과가 돼서 촬영도 좀 하다 올 거 같아.”
“그럼 쉬는 게 쉬는 게 아니네.”
“다른 촬영을 안 하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는 건데 뭐. 그리고 다녀와서도 6개월은 쉬기로 했어요.”
이번엔 삼촌이 물었다.
“집이랑 다 알아봐야겠네?”
“응. 이제 슬슬 알아봐야지.”
얘기를 가만히 듣던 아빠가 말했다.
“집을 왜 구해?”
“응?”
“아휴- 흥민이 집 있는데 집을 뭐 하러 구해.”
“그래. 여주 너 예전에 영국에 있을 때도 둘이 잘 지냈잖아. 5개월이면 그때보다도 짧구만. 귀찮게 집 구하지 말고 그냥 같이 지내.”
“안돼 이모. 나 생활 습관 엉망이라 오빠한테 방해돼. 집 구하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냥 천천히 구하면 돼요.”
“에이- 위험하게 어디 엄한 데 가지 말고 그냥 같이 지내.”
“나 진짜 괜찮아 삼촌- ㅋㅋ”
아빠가 짐짓 단호한 말투로 얘기하자 웃으면서 대답하는 여주였다.
“그래- 우리 여주 제 멋대로 지내서 안 돼. 지금도 흥민이가 잠깐 한국에 있으니까 같이 사는 거지 엄청 참으면서 살걸?”
“집이 좁은 것도 아니고 남는 게 방인데 뭘 그래? 그냥 같이 지내. 뭐 하러 돈을 써-”
이모와 엄마가 말을 주고받는 동안 정작 집 주인인 나는 한 마디도 못 했다.
“형은?”
그리고 내 옆에서 웃음을 참고 있는 듯한 목소리.
“형 생각이 중요한 거 아니야? 형 집이잖아.”
어쩐 일로 맞는 소리를 하는데 왜 이렇게 얄미운지 모르겠다.
나도 숟가락을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은 얼굴을 쳐다보면 언제부터 보고 있던 건지 아침보다 조금 더 빨개진 눈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나는 상관없어.”
우리 집에서 살던,
밖에서 살던
상관 없어 나는.
6.
“아 씨…”
“아싸- 5만원. 형, 진짜 못한다 ㅋㅋㅋ 뭐냐 진짜.”
“그만해 이제.”
컨트롤러를 던지듯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전엔 어떻게 하는 건지 알려달라며 한 판만 같이 해달라고 내 다리에 매달리던 녀석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당해내질 못한다. 이것도 예전만큼 재미있지도 않네. 계속 져서 그런가. 두 시간 동안 얼마를 쓴 거야 도대체. 오늘 청소기까지 착실하게 돌려놔서 이렇게 될 거 다 알면서도 내가 놀아준 거다 인마. 느리게 게임기를 정리하는 여준이 뒤통수를 쓸어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라가게?”
“응.”
“작은누나가 내일 깨우지 말래. 내일 출근 안 한대.”
“누나는 오늘 안 들어와?”
“큰누나 오늘 촬영이지 않아? 달력 봐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벽면에 크게 붙어있는 연간 달력. 별게 다 적혀있다. 누나는 여기다가 저녁 식사 약속을 적어놓고도 말해주는 걸 까먹었네.
5월 15일 -16일
여림 촬영 (광주)
5월 17일- 18일
여주 편집날이라 늦음. 전화x
5월 24일- 29일
여림 촬영 (태국)
ㄴ 부럽다 ㅡㅡ
ㄴ 부럽다~~ 누나 나 말린 망고~~❤️
ㄴ ㅗ
5월 28일
흥민 입국
6월 4일
여준 혜진이 전시회 ❤️
ㄴ 축하한다고 전해
ㄴ 축하
6월 5일
저녁 다같이
6월 8일- 6월 9일
여림 촬영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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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3일
흥민 출국
7월 15일
여주 출국
7.
“목 부러지겠다 아주.”
뒤에 팔만 뻗으면 쿠션이 몇 개인데 하나도 안 받치고 목으로만 버티는 거 좀 봐 저거. 바닥에 누워 목만 세워서 소파 다리에 기대어 텔레비전을 보는 여주였다. 하여튼 손 엄청 가. 목뒤로 손을 집어넣어 들어서 쿠션을 끼워 넣으니 ‘아 왜-’ 하면서 내 손을 밀어낸다. 왜겠냐고…. 그게 사람 목이냐 거북목이지.
“머리 안 말릴래? 자꾸?”
“잔소리할 거면 들어가고.”
“안 하게 네가 잘하던가. 너 영국에서도 계속 이러면 서로 피곤해져.”
“걱정 마. 오빠랑 안 살 거니까.”
서서 공여주를 내려보다가 그대로 바닥에 앉았다.
“뭐?”
“같이 안 산다고. 그러니까 피곤해질 일도 없다고.”
“왜.”
“뭘 왜야. 같이 사는 것도 웃기지.”
“… 지금 같이 살잖아.”
“다- 같이 살잖아 지금은.”
여전히 텔레비전만 보는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자 몸을 일으켜 나를 쳐다보는 공여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오빠 귀찮게 안 해.”
“야… 내가 귀찮아서… 그러는…”
“티비 더 볼 거야? 안 볼 거면 끈다.”
그렇게 리모컨으로 티비를 끄더니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저게 또 말 다 안 끝내고 들어가네. 그거 하지 말라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방금 닫힌 공여주 방문을 열었다.
“너 내가 말하다가 중간에 사라지지 말랬지.”
“할 말 남았어?”
“왜 못사는데?”
“뭐?”
“나랑 같이 왜 못사냐고.”
이불을 덮고 누웠다가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아무것도 안 남았다며.”
“뭐?”
“나한테 아무것도 없다며. 그런데 같이 왜 못 지내냐고. 너 나한테 미련 있어?”
“오빠 미쳤어? 목소리 낮춰. 문이라도 닫던가.”
헤드에 기대있던 몸을 벌떡 일으킨다. 뭘 저렇게 놀라. 어차피 집에 공여준밖에 없는데. 너는 공여준이 우리 어떤 사이였는지 알고 있는 거 모르지. 말없이 눈을 마주치다가 잡고 있던 문고리를 밀어 문을 닫았다.
“대답해. 미련 있냐고.”
“없어.”
찰나의 고민도 없이 바로 답을 한다.
“그러면 왜 못 사는데.”
“오빠야말로 왜 그래? 오빠 나 귀찮아하잖아. 나한테 잔소리 하는 거 지겹다며.”
“그럼 그냥 같이 살아. 딴 데 가서 괜히 고생하지 말고.”
“고생해도 내가 해. 오빠한테 도와 달라고 안 해. 그리고 내가 어디서 지내던지 상관없다며!”
“네가 따로 지내면 내가 더 신경 쓰여. 괜히 어디 가서 사고치고 다니지 말고 그냥 같이 살아.”
“말 다했어?”
“하여튼 그런 줄 알아. 딴짓 하지 마.”
다시 방문을 열고 나와 빠르게 맞은 편에 내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아니 진짜 상관없는데 나가서 살던 말던. 근데 웃기잖아 지금도 같이 지내면서 굳이 거기까지 와서 따로 살건 뭐냐고. 괜히 밖에서 지내다가 문제 생겨서 불려 다니는 게 더 피곤했다. 말만 저렇게 하지 분명 손 많이 갈 일이 생길 게 뻔했다. 도와달라고 안 한다고?
나도 알아.
네가 나한테 도와달라고 안할거라는거.
그러니까 보이는데 두려는거야.
8.
쾅- 하고 닫힌 문을 가만히 쳐다봤다.
왜 저래 또….
다 자기 생각해서 나가서 살겠다고 하는 건데 어디서 또 핀트가 나간 건지. 생활 습관이 달라서 방해가 될 거 같다고 했던 말은 사실이다. 한국에서는 영국에서만큼 루틴을 지키는 편이 아니니까 괜찮은 거지 영국에서 지낼 때 얼마나 빡빡하게 지내는지 뻔히 아는데. 안 봐도 뻔했다. 벌써 귓가에 스치는 잔소리가 수십 개다. 서로 편하자고 그러는 거지 내가 뭐 괜히 그러냐? 애꿎은 이불만 발로 팡팡 차대면서 움직이다가 금방 더워지길래 발로 이불을 밀어내고 그대로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나한테 아무것도 없다며. 그런데 같이 왜 못 지내냐고. 너 나한테 미련 있어?”
그런 게 남아있을 리가 없다.
우리는 헤어진 지 2년이 넘었고
그 사이에 서로 다른 인연도 있었고
지금처럼 이렇게 같이 지내도 아무 문제 없으니까.
“나야 좋지- 돈도 아끼고. 귀찮다고 나중에 쫓아내기만 해봐라.”
굳게 닫힌 방문을 노려보다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문에 도어락을 달던가 해야지.
맨날 자기 멋대로 열었다가 닫았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