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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조물주 믿음의 생활화>의 줄거리 :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까? 정말입니까? 사람들은 창조론을 믿는 것과 창조주를 믿는 것을 혼동합니다. 철석같이 창조론을 믿으면서 실제 삶의 현장에서 절대로 창조주를 믿지 않습니다. 진화론을 반대하면 올바른 창조신앙인처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실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창조주로서 믿음이 생활화되지 않는 한 창조주를 실제 믿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에 대한 믿음은 실시간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야만 합니다.
조물주 믿음의 생활화
(창세기 1:3~26)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본문은 하나님이 본격적으로 피조의 세계를 영역별로 창조해 나가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8절까지만 읽었지만 나머지 부분도 꼭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도신경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신앙고백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시라는 것은 기독교의 엄연한 교리이며 신앙고백 상의 이론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진화론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창조론을 이야기합니다. 이론적으로 진화론과 창조론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이론을 붙잡는 것과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이론을 붙잡는 이들은 창조론을 신봉하는 창조론자들입니다. 그러나 창조주에 대한 믿음이란 창조론 신봉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이것을 혼동합니다.
신학교 교수님들이 모인 세미나에도 참석해 보았습니다만 제가 느끼기에는 신학교 교수님들조차도 ‘창조주를 믿는 것’과 ‘창조론자로 사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말로 고백함을 곧 삶의 현장에서 창조주를 믿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저는 창조론자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창조론자는 있어도 실제 삶에서 창조주를 믿는 사람은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창조론을 신봉하는 사람입니까? 삶의 현장에서 창조주를 믿는 사람입니까?
창조주를 믿는 신앙인은 진화론에 맞서서 창조론을 변명하거나 설득하고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진화론 따위와 맞서 싸울 시간이 없는 이유는 실시간으로 한순간의 빈틈도 없이 창조주와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와의 연결이야말로 발등에 떨어진 불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진화론 따위를 신경 쓰면서 진화론이 맞다, 틀리다 혹은 창조론이 맞다, 틀렸다고 이야기할 겨를이 없습니다. 지금 실시간으로 창조주 하나님이 나와 연결되어서 하시려는 일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진화론과 맞서 싸우고 창조론을 위해 변명하려는 모든 자들은 조물주이자 창조주를 믿는 자들이 아니라 창조론을 신봉하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제 삶의 현장에서 조물주를 믿는 믿음의 생활화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가정에서 창조주를 믿는 믿음을 생활화하고 있습니까? 직장에서는 어떻습니까?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 때는 어떻습니까? 이러한 생활 현장에서 창조주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이제 우리는 동서남북 교회 모임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모임에서 창조주이자 조물주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실시간으로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믿음의 생활화는 두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첫째 단계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기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미 나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라고 항의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정말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둘째 단계는 창조주와 호흡 맞추기입니다. 이러한 두 단계를 통해서 조물주 믿음의 생활화는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창세기 1장을 대하는 우리의 기본 태도부터 점검해 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25절에서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꿈이란 내 마음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거짓 것으로 대체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진리인 말씀이 없다면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 경배하고 섬기게 됩니다. 좀 더 쉽게 말해보자면 조물주보다 피조물에 더 관심을 두고 좋아하게 됩니다. 지금 창세기 1장을 보면서 여러분의 눈에는 창조하시는 하나님이 보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의 세계가 보입니까? 제가 신학자들이 모인 세미나에 참석해서 느꼈던 것은 모든 신학자들이 창세기 1장에서 피조물의 세계를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이 피조물을 만드셨다는 것에 방점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과정을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첫째 날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서 빛이란 넷째 날 만드신 해에서 나오는 햇빛이 아닌 빛 자체입니다. 물이 바닷물, 냇물, 수돗물 등으로 구분될 수 있듯이, 빛도 전등 빛, 햇빛, 횃불 빛, 별빛, 달빛 등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첫째 날에 그 빛 자체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우주 만물을 창조해 가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 만물의 개수는 수천억, 수천조, 수천 경이라는 숫자로도 다 셀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이 단순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의 세계를 알리고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기록하고자 했다면, 성경 66권 전체를 다 창조론에 투입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한 장으로 마무리됩니다. 성경이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가르쳐주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의 세계가 아니라, 피조의 세계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다시 질문해 봅니다. 여러분은 창조주 하나님을 관심하십니까? 아니면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의 세계를 관심하십니까? 창조주에 대한 관심이 우선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붙잡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꾼 상태에서 성경 66권 전체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왜 여러분의 삶을 관심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을 창조하신 창조주는 왜 관심하시지 않습니까? 종교는 내 삶을 관심하고, 내 삶을 만드신 하나님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속에서 당신이 만들어 내실 피조물을 생각하셨습니다. 그 피조물을 생각하시자마자 피조물이 있어야 될 장소를 염두에 두셨습니다. 그곳이 바로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생각하실 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창조의 공터에서 당신의 피조물을 만들어 내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기록되었듯이 여섯 단계를 거쳐 창조를 이루어 내십니다. 이러한 과정을 기술하고 있는 창세기 1장의 핵심은 창조주 하나님의 자발성입니다.
예를 들어 셋째 날에는 식물을 만드십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식물의 가짓수는 셀 수 없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하나님이 셀 수도 없이 다양한 식물을 만드셨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누구도 식물을 만들어 달라고 하나님께 부탁하거나 요청한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스스로 빛을 만드셨고, 궁창을 만드셔서 궁창 아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셨고, 물을 모아 뭍이 드러나게 하셨고, 바다를 지으셨고, 각종 식물을 지으셨고,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셨으며, 바닷속의 수많은 생물과 공중에 나는 모든 새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땅에 기는 생물과 짐승을 만드시고 마지막으로 사람도 창조하셨습니다. 이렇게 수천 경이라는 숫자로도 셀 수 없는 우주 만물의 창조가 단 한 장에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창세기 1장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자발성입니다.
창조는 누가 시킨 것도, 요청한 것도, 부탁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수천 경을 동원해도 셀 수 없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심지어 나의 머리털까지 세고 계십니다. 무엇 때문에 내 몸의 수천억 개의 세포를 만드시고 나를 이끌어가고 계신 것일까요? 여러분이 부탁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자발성에 의한 일입니다. 본문은 이처럼 자발성으로 똘똘 뭉친 창조주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발성의 화신과도 같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을 대할 때 피조물인 나는 어떤 점을 유의하면서 살아야 될까요? 창조주 하나님은 순전히 자발적으로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생각하신 대로 만드시기를 원하셨고 그렇게 하신 뒤에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내 삶을 생각하시고, 보시기에 좋도록 나의 삶을 이루어 가시려는 마음을 갖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관점을 가질 때 창조주에 대한 믿음은 서서히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창조론 신봉자입니까? 창조주 신앙인입니까? 저는 여러분이 지금 어떤 삶의 현장과 어떤 삶의 처지에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자발적으로 보고 계시고, 그 상황과 그 문제에 이어서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수천 경의 숫자를 동원해도 셀 수 없는 그 많은 만물을 자발적으로 지으신 하나님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쉬지 않고 바라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생각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한 자발성의 창조주가 나를 보시고, 나를 알고 계시고, 나에 대해 생각하심에 대해서 이제까지 어떻게 행동해 왔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세포 수까지 알고 계시고, 여러분의 삶의 모든 일들에 대해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을 이끌어 가시기 위해 정하신 창조의 공터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창조의 공터에 발을 들여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 하나님을 기억함이 없다면 생각하시는 하나님,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내 삶을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창조의 공터로 만드시고 그곳에서 당신의 생각을 펼치시려는 하나님을 정면으로 반대하게 됩니다. 내가 내 삶에 대해 생각하자마자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곳으로 뛰어들게 됩니다. 무당이 춤을 추듯이 내가 그 공터에서 춤을 추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생각을 펼쳐나가실 수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삶을 돌이켜보면 창조주를 믿었다기보다는 창조론자로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즌3을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생활화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내 삶이 흥왕해서는 안 됩니다. 설령 내 삶에 문제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종류의 문제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반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삶을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알고 계십니다. 생각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내가 마음속에서 이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삶의 문제를 끌어안는다는 것은 나를 보시고, 아시고, 내 삶에 대해 생각하시고, 앞으로 그 생각을 펼쳐나가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절대 믿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이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흥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주 하나님은 지금도 내 삶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생각하고 계시며, 그 생각대로 펼쳐나가시려고 시동을 걸고 계십니다. 그런데 나의 삶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흥왕해진다면 이미 창조의 공터 안으로 뛰어든 것입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곳으로 뛰어들었기에 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답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에서 내 삶을 흥왕시키고, 삶에 대한 생각을 왕성하게 해나가서는 안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에서 문제를 흥왕하게 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 상태는 창조론 신봉자일 뿐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발적으로 빛을 만드셨고, 궁창을 만드셨으며,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뉘게 하셨으며, 땅과 바다를 만드셨고, 식물을 만드셨고, 해와 달과 별들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바닷속의 생물과 공중의 생물과 땅의 짐승과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이러한 창조는 누가 시키거나 요청해서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스스로 하신 일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으실까요? 여러분의 마음이 삶에 대한 생각들로 왕성하게 가득 차 있을 때 하나님이 가만히 기다리시다가 여러분이 답을 내면 원하는 대로 응답해 주실까요? 이것은 창조주를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신학교 교수든 총장이든 목사든 장로든 권사든 삶에서 정말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창조주를 믿는다면 그 증거는 ‘하나님이 지금 내 삶의 상황을 생각하신다. 그 생각을 펼치실 곳을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곳으로 정하셨다. 그러므로 마음속에서 내 삶을 생각한다면 나 스스로 삶을 혼돈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생길수록 창조주 하나님이 생각하고 계시므로 나는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창조주를 믿는 신앙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살아본 순간이 있습니까? 이대로 사는 목사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대로 살고 있는 장로나 권사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동서남북 교회의 모임에서는 삶이 흥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여러분 중에는 이러한 이야기의 취지를 모르는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가해질 때 제자들은 흩어졌습니다. 삶의 터전을 떠난 이들이 신경 써야 할 삶의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문제를 신경 쓰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삶의 현장에서 믿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이들에게 삶을 위한 터전이나 삶을 위한 준비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마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만 흥왕했습니다. 그럴 때 이들을 보시며 생각하시는 하나님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곳에서 이들의 삶의 상황을 만들고 이끌어 가셨습니다. 문제를 마음에 가득히 담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동서남북 교회 모임의 목적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했던 예배당의 소그룹의 형태가 이와 같았습니다. 그렇기에 예배당에서 아무리 소그룹을 강조하고 왕성하게 교육했어도 결국 교회는 이 꼴이 되었습니다. 더는 그러한 모습을 답습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동서남북 교회의 모임으로 모일 때 삶으로 흥왕한 마음을 가지고 모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우리가 모여서 하는 일은 마음이 삶으로 흥왕한 상태를 죽이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 들어있는 그리스도로 흥왕하게 하는 것을 서로 돕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 마음이 창조주 하나님으로 흥왕하게 될 때 내 삶은 하나님이 생각하십니다. 이것을 제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창세기 1장에서 보여주시는 자발적인 하나님의 창조를 믿고, 하나님이 생각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병에 걸렸어도, 자녀가 문제라도, 형제간의 문제가 있어도, 돈 문제가 있어도,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떻게 할지는 명백합니다. 조물주 믿음의 생활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제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발적으로 내 삶의 모든 순간을 생각하십니다. 이 하나님과 호흡을 맞춘다는 것은 내가 더 이상 삶을 끌어안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속에서 삶에 대한 나의 생각, 나의 언어, 나의 말씀이 흥왕하게 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창조주, 생각하시는 창조주, 전능하신 창조주와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는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본문이 가르쳐 줍니다.
본문에서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독특한 시간 흐름의 패턴이 반복하여 언급됩니다. 아직 해가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저녁과 아침은 없습니다. 여기서 저녁과 아침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앞서 살펴본 대로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이 저녁과 아침이라는 시간의 패턴을 따라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시간의 패턴을 살 때 창조주 하나님과 호흡을 맞출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시간 패턴을 통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렇게 활동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는 우리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시간 패턴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상징적 표현이라고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24시간 하루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하던 시절로 돌아가서 저녁과 아침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시기적으로는 주전 1,450년경으로써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의 일입니다. 전깃불이나 가로등이나 네온사인 같은 인공의 빛이 없던 시대이며, 촛불도 귀하고 겨우 등불이 있었던 시대입니다. 해가 지고 땅거미가 드리워지는 저녁이 되면 모든 생활 활동은 중지됩니다. 농사도 할 수 없고, 물고기를 잡을 수도 없고, 사냥도 할 수 없으며, 가내수공업도 멈춰야 합니다. 저녁은 곧 활동이 불가능해지고 가족들이 모이는 시간입니다. 이러한 저녁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왜 아침보다 저녁을 앞세워서 창조 활동을 하셨을까요? 본래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인간의 시간 패턴에 구애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굳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패턴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이유는, 이렇게 소개되고 있는 창조주 하나님과 호흡을 맞춰 살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저녁이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내면과 외면의 모든 활동을 끄는 시간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생각대로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저녁이란 내 삶에 대해서 생각하시는 하나님, 그 생각대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삶에 대한 나의 내면의 활동부터 완전히 꺼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옛날에 저녁이 되면 가족이 다 모였듯이, 나의 삶에 대한 내면의 모든 활동을 꺼버릴 때 이루어지는 일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과의 만남입니다. 다음 시간에 보다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만 26절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란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저녁이 되면 온 가족이 모든 노동의 현장으로부터 활동을 중지하고 집으로 모입니다. 삶에 대한 나의 모든 생각을 끌 때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저녁을 맞이할 때 아침이 찾아옵니다. 저녁은 내 마음속에서 삶에 대한 생각이 흥왕하여 창조의 공터에 뛰어드는 일이 없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께 마음이 달라붙을 때 하나님이 마음대로 활동하실 수 있는 아침이라는 시간이 열리게 됩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말씀대로 저녁을 통하여 모든 내면과 외면의 활동을 중지하고 창조주 하나님만을 기억하고 바라봅니다. 그럴 때 창조주 하나님은 내 삶에 대해서 갖고 계신 생각을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창조의 공터에서 마음껏 ‘있으라! 있으라! 있으라!’고 말씀하시며 보시기에 좋게 창조해 가시는 아침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저녁을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나의 내면과 외면에 저녁을 만들 수 있을까요? 그냥 내가 ‘생각 중지, 활동 중지’라고 마음 먹는다고 저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일을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이 이 땅에서 호흡을 맞추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녁과 아침이라는 패턴을 따라야만 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어떻게 사람이 자기 내부와 외부에 저녁을 만들어 내느냐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내 삶에 대해서 죽은 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조차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심을 고백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향하여 하나님 아버지는 생각을 갖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곳에서 창조주 하나님이 펼쳐내시는 삶이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가 필요하지만 예수님은 죄 없으신 상태에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의 패턴을 이루어가셨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5장 19절의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당신도 본질상 하나님이시면서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신다고 반복하여 말씀하신 이유는, 그것이 인간에게서 드러나야 할 하나님과의 호흡 맞추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 하신다는 예수님의 고백을 수십 번, 수백 번 강조하여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삶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문제다. 이것은 잘못됐다. 이것은 없어져야 한다. 이것은 발전돼야 한다.’라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자신의 말씀이 흥왕합니다. 이것은 창조주를 믿는 태도가 아닙니다.
정말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하나님이 창조의 공터에서 내 삶을 생각하신 대로 이끌어 가시며, 보시기에 좋게 만들어 가시리라는 사실을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러한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죽어라 생각하고 붙잡고 고민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지독한지 결국 독생자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보면서 너희 속에 저녁을 이루어 내라!’고 하셨을 정도로 내 속에 저녁을 만들어 내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내 스스로 아침을 시작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아침이 아니라 내가 움직이는 아침으로 시작해서 아침과 저녁이라는 패턴의 삶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창조론을 신봉하는 자들입니까? 창조주 하나님을 실시간으로 믿는 자들입니까? 창세기 1장은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호흡을 맞출 수 있기를 바라시며,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심으로써 우리 마음속에 저녁을 이룰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의 패턴을 따라 살아갈 때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가 자발적으로 생각하신 모든 내용들이 여러분 삶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곳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을 보시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매 순간 감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창조론 신봉자가 아니라 창조주를 믿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까지 창조론은 순교할 각오로 붙잡고 창조주 하나님은 없는 듯이 살았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게 하시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창조주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 모든 삶의 순간과 모든 사건들 앞에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의 패턴을 따라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