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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을 이륙한 TK1761 항공기는 3시간 반이 11시40분 경 헬싱키 공항에 도착한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장으로 향하는 곳곳 안내판에는 영어 등 다른 6개 글자들(독일어, 스페인어, 중국어, 일본어)과 더불어 한글도 병기돼 있어 대한민국의 높아진 국격을 실감한다. K-POP의 영향일까? 좌우간 무척 반갑다.
대부분 우리나라 여행자들이 여행을 하는 국가에 대해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이 여행하는 것 같다. 여행지 국가에 대해 좀 더 공부해서 알고 가면 그 나라을 이해하고 여행하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시작하기 전 가이드 북과 블로그, 여행 책자 등을 미리보고 자료를 수집해 소책자를 만들어 가지고 다닌다. 아래 내용은 내가 수집한 핀란드와 헬싱키에 대한 자료이다.
핀란드는 북위 60∼70°, 동경 20∼32°에 걸쳐있어 1/3은 북극권에 속하며, 남북길이는 1,165km이고 동서 최대너비는 550km이다. 북쪽으로 스웨덴, 동쪽으로 러시아와 접해 있다. 수도는 헬싱키이다. 핀란드인들은 스칸디나비아 족과 발트 인종에 속한다. 인구는 2024년 기준 554만 명이고, 공식 언어는 핀란드어와 스웨덴어이다. 대부분 국민들은 복음주의 루터교를 믿는다.
BC 7200년 이전 인간이 거주한 흔적이 있으며, 기원 무렵에 이곳으로 발트 해의 핀족이 이주해왔다. 볼가강(江) 유역의 원주지를 떠나 차차 서쪽으로 진출하여 핀란드에 정착한 핀인들에게 로마 가톨릭이 전파된 것은 12세기였다. 12세기에 스웨덴 왕과 웁살라 주교의 '십자군'이 핀란드로 진격해왔으며, 1323년에 스웨덴은 핀란드 최초의 공동체인 타바스티아와 카렐리아를 합병했다. 가톨릭 교세의 확장과 동시에 스웨덴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기 시작해 13세기에는 스웨덴 영토의 일부가 되었다. 1581년에 핀란드는 대공국이 되었다가 1634년에 스웨덴 왕국에 합병되었다. 스웨덴은 관대한 지배체제를 유지하며 핀인들에게 자치를 허용하여 지주귀족을 중심으로 민족문화가 형성되었고, 또 종교개혁시대에는 루터파의 프로테스탄트가 전국에 골고루 보급되었다. 그 후 17세기 스웨덴의 전성기에는 핀란드 자치의회가 설치된 데 이어 오보(현재의 투르쿠)에 핀란드대학(헬싱키대학교)이 설립되었다.
세계적 지배세력으로서의 스웨덴이 쇠퇴하자 핀란드는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에 놓였다. 러시아는 핀란드에 대한 권리를 재주장했고, 1721년에는 대북방전쟁의 종결로 뉘스타트 조약에 따라 핀란드 영토의 일부를 양도받았다. 1808년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핀란드를 침범했고, 나폴레옹전쟁이 한창이던 1809년에 핀란드 전국토를 병합하자 이에 위기를 느낀 핀란드는 민족주의 정신이 발현돼 1935년 민족주의 정신의 구심(求心)으로서 50편의 시가(詩歌), 22,795행으로 이루어진 민족서사시《칼레발라》가 뢴로트에 의해 복원 편집되기도 하였다. 이는 예로부터 칼레바의 나라(영웅의 나라라는 뜻)를 노래한 서사시, 즉 핀란드에 전승돼온 장대한 민족서사시로 핀인(人)과 랩인의 싸움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며 신화적 요소와 영웅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제정러시아는 엄격한 지배정책을 실행, 1835년 핀란드 의회의 입법권을 정지시키고, 1902년에는 핀란드군(軍)을 러시아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러시아어(語)를 공용어로 정하는 정책 등 러시아화 정책을 추진해 나가자 핀인(人)의 민족주의 열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했으며, 시벨리우스의 애국교향시《핀란디아》가 만들어진 것은 민족정신의 발로였다.《핀란디아》는 조국 핀란드의 신비스러운 자연과 가혹한 운명을 깊이 공감하는 민족의 소리로, 민중으로 하여금 강렬한 조국애를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공연이 금지되기까지 하였다. 1904년 러시아 총독 보브리코프가 암살되고, 1917년 러시아혁명이 발발하자 1917년 12월 핀란드는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했으며, 뒤이어 핀란드군과 이 도시를 점령한 러시아군 사이에 잠시 유혈내전이 일어났으나, 1918년 공화제를 실시하여 처음으로 독립된 통일국가를 이룩하였다. 1920년 러시아도 이를 승인해 핀란드 공화국이 성립하였다.
1905년에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고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핀란드 독립의 토대가 마련되어 1917년 12월 6일에 독립을 선포했다. 1939년에 일부 영토를 합병하자는 소련의 요구를 핀란드가 거절하자 소련은 핀란드를 침공했고, 짧은 전쟁을 치른 후인 1940년에 핀란드인들은 휴전을 간청하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핀란드 전쟁(1939∼40)이 시작되자 핀란드인들은 러시아 영토로 진격해 들어갔으나 1944년에 평화가 정착되자 본래의 거주지로 돌아갔다.
1944년에 체결된 화해 배상금 조항 때문에 핀란드는 막대한 경제적 고난을 겪었으나, 종전 후 소련과의 관계는 대체로 우호적이었다. 핀란드 정부는 강대국과의 비동맹 정책을 일관적으로 내세우고 있었으나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위기를 느낀 핀란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해 러시아 침공에 대비하고 있다.
헬싱키는 1550년 스웨덴의 구스타프 바사 왕이 세웠는데, 그 이유는 핀란드 만 반대 편에 있는 레발(지금의 에스토니아 공화국에 있는 탈린)과 경쟁하기 위한 것이었다. 헬싱키는 원래 반타 만에 접해 있었으나 1640년 좀더 아래쪽인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 1770년 전염병이 휩쓸고 지나갔고, 1713년 화재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이 도시의 재개발사업은 그후 18세기에 러시아의 공격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1808년 다시 화재가 발생함으로써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1809년 핀란드는 러시아로 넘어갔으며, 1812년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핀란드 대공국의 수도를 투르크에서 헬싱키로 옮겼다.1748년 항구 외곽에 있는 조그만한 도서지역에 요새를 건설함으로써 이곳은 한층 더 안전하게 되었다. 반면 헬싱키 중심부는 유명한 건물을 많이 설계한 독일의 건축가 C. L. 엥겔의 영향을 받아 완전히 재건되었으며, 철도 건설과 산업화는 헬싱키의 성장에 큰 기여를 하였다. 수차례 전쟁 포화를 겪은 20세기 초반에도 헬싱키는 꾸준히 성장하였다. 인구는 약 120만 명이다.
헬싱키 공항을 나오자 헬싱키 현지가이드가 우리를 맞이한다. 그녀를 따라 전세 버스를 타고 우리가 헬싱키에서 처음 찾은 곳은 암석교회로 암석교회(Temppeliaukio Church)는 바위를 파서 만든 교회로 1969년 티모(Timo)와 투오모 수오말라이넨(Tuomo Suomalainen) 형제의 설계로 바위산에 조성되어 있어 암석교회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주변의 자연환경을 고려하여 만든 초현대적으로 설계한 핀란드의 대표적 건축물로, 마치 UFO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내부 벽은 다듬지 않은 거친 돌로 둘러싸여 있고, 지붕은 구리로 돔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천장은 콘크리트 대들보로 바위와 연결되어 있으며, 구리 천장과 바위 외벽 사이의 공간을 투명한 유리로 처리해서 건물에 둥글게 자연광이 들어올 수 있게 했다. 내부의 바위는 다듬지 않고 거친 모습 그대로 두었으며, 바위틈으로는 물이 흐르고 있다. 설교단 앞에는 오케스트라를 위한 공간이 있으며 음향 효과를 충분히 고려해서 설계했기 때문에 작은 음악회 공간으로 자주 쓰인다고 한다. 벽에는 파이프 오르간이 있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피아노 연주회가 끝나고 관광객들만 있었다. 교회 외벽은 파낸 돌들을 쌓고 철사로 묶어두었는데 이 돌들은 외부의 소음을 막아 줄뿐 아니라, 사람들이 교회 천장이라 할 수 있는 바위 위를 걸어 다니는 것도 막아준다고 한다.
다음으로 간 곳은 핀란드의 세계적인 음악가인 장 시벨리우스를 기념하여 만든 시벨리우스공원이다. 시벨리우스는 핀란드의 작곡가로 민족적인 소재를 유럽풍인 지적 묘사로 처리한 작풍이 특징이라고 하며 국민적 대서사시《칼레발라》를 비롯하여 《투오넬라의 백조》, 교향시《핀란디아》등으로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이 곡이 작곡될 당시가 1899년으로 아직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얻지 못한 상태였고 시련과 극복 등 독립을 원하는 열망을 담아 만들어진 교향곡이기 때문에 핀란드 국민들이 가장 사랑받는 작곡가가 되었다고 한다. 공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24톤의 강철로 만든 파이프오르간 모양의 시벨리우스 기념비와 그 옆의 시벨리우스 두상이다. 핀란드의 여류 조각가 엘라 힐투넨(Eila Hiltunen)이 1967년 시벨리우스 사후 10주년을 기념해 만든 것으로 은빛으로 빛나는 600개의 강철 파이프는 마치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 나무 잔디 오솔길 호수와 어울어진 예술품답게 바람이 불면 오르간 선율이 흐른다. 유럽인에게 인기 많은 시벨리우스 기념비는 항상 사람이 많다. 관광객들이 카메라를 바닥에 놓고 카메라를 바라보며 강철파이프와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모습이 많이 보여 우리도 한 컷!
이어서 현지가이드는 우리를 원로원광장 (Senate Square) 으로 안내한다. 광장 중심에는 제정러시아 황제였던 알렉산드르 2세의 동상이 있는데 핀란드를 독립국가로 인정하고, 핀란드어를 사용하도록 허용한 황제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그 동상을 두고 철거를 할 것인가 그대로 둘 것인가 논란이 있었으나 이 동상이 여기에 있는 것도 핀란드의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여기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고 한다. 이 광장은 정사각형 형태로 이루어진 광장으로, 약 40만개의 화강암 포석으로 깔려있다고 한다. 원로원 광장의 위에는 헬싱키 대성당이 있는데 루터란 대성당(헬싱키대성당)이라고도 한다고 하며 1830년에 착공해 1852년에 완공한 성당으로 네오클레식 형식으로 지어졌다고 하며 흰 기둥과 녹색돔이 조화로운 건물이라고 한다. 이 성당은 헬싱키 어디에서도 볼 수 있어서 헬싱키의 랜드마크 같은 건물이라고 하며 핀란드 루터교의 총본산으로 매년 35만명이 찾아온다고 한다. 광장에는 1950~60년대에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올드 카들이 많이 나와 올드 카 자랑을 하고 있는데 차 주인들의 모습이 매우 당당해 보인다.
원로원 광장에서 걸어서 페리 승선장과 맞닿아 있는 항구에는 마켓광장(Market Square) 으로 걸어 간다. 철길을 건너자 곧 싱싱한 야채와 달콤한 향기의 체리와 딸기를 파는 노점들이 나타났다. 이 곳은 19세기 초 헬싱키 중심부가 핀란드 대공국의 수도로 재건되면서 탄생했으며 핀란드어로는 광장시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마켓광장은 수많은 관광객과 시민들이 찾는 명소로 매일 아침 들어오는 싱싱한 해산물과 야채, 과일이 관광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 곳으로 다양한 길거리 음식을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어 배낭여행자들이 찾는 곳이며, 현지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장소로써 싱싱한 채소부터 과일, 생선 등이 매일 거래되고 신선하고 값싼 생선이 많아 ‘피쉬 마켓(Fish Market)’이라고도 불리며 오전 시간에는 식품 중심, 오후에는 잡화 중심의 시장이 열린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특히 핀란드에서만 볼 수 있는 전통 수공예품, 기념품 등을 파는 노점상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눈치 빠른 상인들은 알아차리고 한국말로 "맛있다." "언니, 싸다. 하나 먹어봐요." 하면서 호객을 하여 나도 그들이 건네주는 빛깔 곱고 토실한 체리를 먹어 보았는데 정말 달콤했다. 하지만 납짝 복숭아 1kg(7개)에 20유로(한국 돈 3만원), 체리 1kg에 30유로 (한국 돈 4만5천원), 멸치만한 청어새끼 말린 것 1kg에 15~20유로 등 놀랍게도 비싼 현지 물가에 지갑 열기가 망설여진다. 우린 상인이 권하는대로 체리 하나씩을 맛보고 지나가려니 뒷통수가 가려워 납작봉숭아 1kg을 샀다.
마켓광장 동쪽으로 핀란드가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지어진 우스펜스키성당이 보인다. 우스펜스키라는 단어는 성모(聖母) 승천(昇天) 의미를 가지고 있는 러시아어로 이 성당은 모스크바의 우스펜스키 사원 다음으로 규모가 크지만 핀란드는 루터교를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으로 러시아 정교회 신자들은 1%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다시 원로원광장으로 돌라와 버스를 타고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가는 크루즈 선인 실자라인을 타기 위해 승선장으로 향한다.
가이드는 이동 중인 버스안에서 우리에게 핀란드에는 3S가 있는데 3S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SAUNA와 Sibelius, 그리고 SISU란 핀란드인의 정신이 있다고 하며 특별히 SISU에 대해 설명한다.
북극권이란 험난한 자연환경, 그리고 1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스웨덴과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핀란드인들은 고난을 버텨내는 것을 미덕으로 삼아왔다. 그러다보니 핀란드인들의 문화 속에는 자연스레 인내 비슷한 개념이 생겨났다. 이것이 바로 시수(Sisu)다. 시수의 사전적 정의는 '성공확률이 극히 낮아 보이는 과제를 눈 앞에 두고서도 주저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담담하게 도전하고 버텨내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한 줄로 요약되는 게 아니고 뒤에 여러 가지 조건이 더 붙는다. 시수는 단순히 인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최대의 결과를 도출 해내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극한의 스트레스 역시 스스로 극복해내며 침착함과 집중력을 유지해야 한다. 자기연민 같은 나약한 생각은 도움이 되지 않으니 철저히 배제한다. 중과부적으로 실패하더라도 절망하지 않고 결연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만약 그 희박한 확률을 뚫고 성공한다면, 이번에는 '얀테의 법칙(주: 겸손과 절제를 강조하는 북유럽식 예절문화)'이 적용된다. 성공에 대해 흥분하거나, 남들에게 이를 자랑하거나, 스스로 자만심을 가지지 않는 냉정함을 갖추어야 한다. 핀란드인들은 시수(sisu) 라고 부르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허세와 용맹, 잔인함과 끈기, 모두가 포기한 상황 속에서도 홀로 계속 싸우고자 하는 결연함, 승리하려는 의지의 복합적 산물이다. 핀란드인들은 시수를 '핀란드의 정신'으로 번역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직설적인 단어다. 지난 주 핀란드인들은 한 전선에서는 러시아 영토로의 진격을, 다른 전선에서는 강화된 러시아 군의 무자비한 공격을 견뎌내면서 세계에 시수의 좋은 예를 보여주었다 . 라도가 호수와 북극해 사이의 러시아-핀란드 국경 대부분을 형성하는 황무지에서 핀란드인들은 확실히 우위를 점했다. — 타임지 , 1940년 1월 8일자 시수라는 단어 자체는 1930년대에 등장하였다. 하지만 시수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39년 소련과의 겨울전쟁 덕분이었다. 누가 봐도 게임이 되지 않아 보이는 엄청난 열세 속에서 핀란드군은 4배나 많은 러시아군을 상대로 엄청난 선전을 벌이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타임지 기사에서 인터뷰한 핀란드군 병사들은 자신들이 쳐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것은 죽음 말곤 없다" 결국 핀란드는 겨울전쟁에서 패했고, 이후 나치독일과 손을 잡고서 2차 대전에 참전했지만 또 다시 패배했다. 하지만 불가능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세는 핀란드인들의 문화적 중심점이 됐다. 이후로도 시수는 틈만 나면 핀란드 출신 유명인들의 입을 통해 간간히 언급되었다. 전직 F1 드라이버 미카 하키넨(Mika Häkkinen)은 시수를 '핀란드식 용기'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오늘날 핀란드에서는 시수가 산봉우리, 자동차 브랜드, 스포츠 팀, 헤지펀드 사명, 사람이름, 단체 명칭 등등 여러 가지 이름에 적용되어 쓰이고 있다. |
우리 한국인들에게도 수 천년 중국, 몽골 등의 외침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은 은근과 끈기란 정신이 생겨 났듯이 러시아, 스웨덴, 독일, 폴란드 등 강대국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겨 난 핀란드인들의 국민성이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