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 행 지 : 서해랑길 1, 2코스(땅끝탑~송지면사무소~영터버스정류장) 해남군 송지면.
산 행 일 : 2025. 02. 22.(토)
산행코스 : 서해랑길 1코스(14.9km) + 2코스(14.9km) = 32.8km, 8시간 30분 소요)
- 시점 : 땅끝탑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 1, 2코스 분기점 : 송지면사무소 (송지면 산정리)
- 종점 : 영터버스정류장 (화산면 관동리)
산행참석 : 24 백두.
<서해랑길 1코스(14.9km)>
▶ 코스 : 땅끝탑~3.3km~송호해변~1.6Km~황토나라테마촌~2.7Km~송지저수지~7.3Km~송지면사무소
땅끝모노레일 주차장 ~ 스카이워크 입구 ~ 땅끝탑(1코스 시점) ~ 연리지 ~ 송호해수욕장 ~ 송호 보건진료소 ~ 꼼지락 캠핑장 ~ 땅끝 황토나라 테마촌 ~ 송호마을 입구 표석(77번 땅끝해안로) ~ 송종마을회관 ~ 송지정수장 정문 ~ 송종마을 하수처리장 ~ 마련정류장 ~ 소죽마을 ~ 송지면사무소 |
▶ 개요
- 한반도의 최남단, 국토 순례의 시발지이자 대륙을 거슬러 오르는 서해랑길의 출발지.
- 바다를 끼고 아름답게 펼쳐진 숲길과 붉은 황토길, 마을길, 해안길 등 다양한 길을 걸으며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코스.
▶ 볼거리
- 횃불을 형상화한 전망대 '땅끝전망대'
- 한반도 최남단 땅끝에 세워진 '땅끝마을탑비'
- 2km에 이르는 완만한 백사장과 울창한 송림으로 피서객들이 즐겨 찾는 '땅끝송호해변'
- 황토를 테마로 한 캠핑장, 숙박시설, 다목적운동장을 갖춘 복합문화공간 '땅끝황토나라테마촌'
<서해랑길 2코스(14.9km)>
▶ 코스 : 송지면사무소~6.6Km~땅끝염전~2.9Km~두모마을회관~7.5Km~관동방조제~0.9Km~영터버스정류장
송지면사무소 ~ 미학리사무소 ~ 우근제 수문 ~ 우근리 경로당 ~ 태양광 단지 ~ 땅끝염전 ~ 송암마을 정자쉼터 ~ 백포만방조제 ~ 두모마을회관 ~ 나주임씨 정려비 ~ 백포방조제 ~ 중정리회관 ~ 대지리회관 ~ 사포리회관 ~ 관동방조제 ~ 관동방조제 수문(2코스 종점) |
▶ 개요
- 땅끝해안도로를 따라 쪽빛 바다를 바라보며 산길, 들길로 이어진 마을과 마을을 이어 걷는 길.
▶ 볼거리
- 마한시대 대규모 고분 유적지로 관련 유물이 다수 출토된 '해남안호리고분군'
- 작은 어선이 드나드는 소박한 남도 어촌마을 풍경의 '두모 선착장'
<산행지도>
남파랑길 5~6코스를 마치고 다음 코스인 창원구간 6~7코스를 '진해 군항제'에 맞추어 진행하기로 하고 다른 걷기길을 찾아보다가 서해랑길을 해남 땅끝에서부터 진행하기로 한다. 전국 이곳저곳에 진행 중인 걷기길을 흩어 놓아야 예정했던 걷기길의 일기예보가 원치 않은 상황이면 쉽게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좋은 대안을 찾을 수도 있기는 하지만 워낙 장거리 걷기길을 목표로 설정해 놓은 터라 다른 곳에 눈을 돌리기보다는 당면한 목표를 어떻게든 마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는 판단도 한몫을 하기는 했다.
서해랑길 1~2코스 트레킹을 공지해 놓았는데 당일 일기예보에 전국적인 강한 꽃샘추위가 예보되었다. 심지어 우리나라의 남쪽 끝인 해남도 아침최저 기온이 -6℃로 한파 수준이 예보되었다. 그동안 남파랑길에서 아침식사를 매식으로 해결했던 터라 대안을 찾지 않을 수 없었고, 부랴부랴 주변의 모든 식당들을 검색해서 일일이 전화로 아침식사 가능 여부를 문의 한 끝에 두세 곳의 대안을 마련하여 상의한 끝에 한 곳에 예약을 해 놓고는, 약간의 눈이 예보된 당일의 날씨가 더 악화되지 않기를 기도하며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선다.
서해랑길 시작 지점인 해남 땅끝은 지난 2015년 땅끝기맥 종주때와, 보길도 탐방과 청산도, 완도 탐방등 여러차레 왔었기에 오가는 길이 눈에 선한 편이지만, 자정 무렵에 서울을 출발한 버스가 한달음에 내달려 고속도로를 벋어날 즈음에 눈이 떠졌는데 빠르게 지나가는 차장 밖 야경이 예전에 보던 풍경이 아닌지라 스마트폰 지도를 꺼내어 확인해 보았더니 머릿속에 그리던 코스와는 다른 코스로 해남 땅끝마을을 향하고 있다. 눈을 뜨고 빠르게 지나가는 밤풍경을 보고 있자니 불안한 마음이 자꾸만 커지기에 다시금 눈을 감은체 그저 별일 없이 긴 어둠이 끝나기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버스가 땅끝모노레일주차장에 도착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불을 밝히고 트레킹 준비를 시작한다.
우리나라의 최남단 땅끝마을에서 출발하는 서해랑길 트레킹임에도 불구하고,
한파 예보에 따라 심하다 싶을 정도로 철저히 차려입고서,
<갈두마을(땅끝마을)>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우리나라 국토의 땅끝에 위치한 마을인 갈두마을(땅끝마을)은 갈두산에 칡이 많아 '칡머리'로 불리던 것이 한자 갈두(葛頭)를 써서 명명된 것이다. 이곳은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고, 갈두항 앞에 나란히 있는 두 개의 맴섬 사이로 뜨는 일출은 갈두마을 관광의 백미로 특히 양력 2월 중순 무렵과 10월 20일에서 25일 사이에 맴섬 가운데로 떠오르는 일출은 가히 환상적이다. 또한, 땅끝천년숲옛길 3코스 중 약 17km의 땅끝 길이 이곳 땅끝마을에서 시작하여 미황사역사길, 다산초의교류길과 연결되며, 갈두마을에서 땅끝탑까지 조성된 무장애길 해안 처음길은 갈두마을의 해안 자연경관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산책길로 서남해의 탁 트인 바다 전망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땅끝탑 앞의 스카이워크까지 이어진다. 연말연시가 되면 갈두마을은 해넘이 해맞이 축제를 하며 지난 한 해의 액운을 떨치는 해넘이 행사와 신년 아침에 소원을 담은 띠배 띄우기 행사 등 다채로운 축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인정 나누기 행사를 통해 마을 주민들이 떡국을 쑤어 관광객들과 나누어 먹으며 서로서로 새해의 시작을 응원한다. 갈두마을 주변으로 땅끝전망대와 땅끝 스카이워크, 땅끝 모노레일, 송호해수욕장, 사구미해수욕장, 땅끝해양자연사박물관, 땅끝오토캠핑리조트, 황토나라 테마촌 등 마을 주변 곳곳이 온통 볼거리 즐길거리로 넘쳐난다. 갈두항 여객선 터미널에서 보길도에 갈 수 있는 노화도로 가는 배를 이용할 수 있다.
대낮같이 훤히 밝혀진 주차장을 뒤로하고,
땅끝항에서 땅끝모노레일 탑승장으로 이어지는 길에 접속하여 좌틀하면,
<땅끝항(갈두항)>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의 땅끝항은 해남군 유일한 연안항으로 갈두항으로 불리었으나, 2014년 9월 땅끝리 행정마을 명칭과 일치하도록 땅끝항으로 개명하였다. 땅끝해안도로, 땅끝탑, 땅끝전망대 등 주변에 볼거리도 많아 이웃한 노화도, 횡간도, 흑일도 등 완도군 지역주민들과 해남을 찾는 관광객 등 연간 27만여 명이 방문하고 있다. 그동안 땅끝항에는 여객선 터미널이 없어서 많은 불편을 겪어 왔으나, 2021년 4월 지상 1층 연면적 499.6㎡ 규모의 시설로 매표소와 대합실, 사무실 등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춘 여객선 터미널이 들어섰다. 여객선 터미널이 준공됨에 따라 이용객들이 보다 쾌적하고 편리하게 뱃길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모노레일 탑승장 건물 앞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탑승장 건물 앞에는 해남군 마스코트인 '희망이', '땅끝이'와 함께 '한반도의 시작 땅끝해남' 포토 조형물이 있고,
<땅끝관광지>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바다와 하늘이 만나 시작되는 ‘땅끝’은 백두대간이 남으로 내달려와 마지막 용트림하며 멈춘 곳으로, 백두대간의 시작이요 끝이다. 한반도의 기가 가장 많이 뭉친 곳이기도 한데, 그 기로 하늘 문을 열어 많은 선인들과 예술인들이 신성한 제를 올리는 곳이라고 신성시했다. 그래서 하늘과 바다를 향해 소원을 빌면 소원을 이루며 희망이 싹튼다는 이야기도 땅끝마을에 전해온다. 땅끝은 이러한 상징성으로 전국의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국토순례의 시발지이며 해양문화의 중요한 요충지이자 이동로이기도 하다.
모노레일 탑승장 건물 앞을 지나 땅끝탑으로 가는 해변 산책로로 들어선다.
산책길 입구로 들어서니 '땅끝 천년숲 옛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땅끝 천년숲 옛길>
'땅끝 천년숲 옛길'은 국토 순례 1번지로 남파랑길 및 서해랑길을 비롯한 각종 걷기 길의 시·종점인 해남 땅끝에서 시작한다. 미황사 창건설화가 있는 미황사 구간의 총길이 52km의 옛길을 정비하여 국토순례 및 도보여행을 위한 신개념 이동로를 조성함으로 인해 지역의 새로운 명소 창출을 조성하고 자연보전, 생태환경 교육과 다양한 체험거리를 제공하여 군민과 관광객의 정서함양 및 복리증진을 높이는 데 있으며, 주변환경을 고려한 친환경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복원하여 이용자들로 하여금 옛 선조들의 숨결을 느끼는 쾌적하고 편안한 노선을 제공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안내판)
1코스 땅끝길은 16.5㎞ 거리에 약 7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코스는 송지면 땅끝마을~땅끝 맴섬~땅끝마을 관광지[땅끝탑]~땅끝호텔~도솔암~미황사이다. 도솔암~미황사 구간에 너덜겅[돌이 많이 흩어져 깔려 있는 비탈]이 있다. 3개의 코스 중 가장 힘든 코스이며 보행자들을 위한 보도교, 돌계단, 로프 펜스 등이 설치되어 있다.
2코스 미황사 역사길은 20㎞ 거리로 약 8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코스는 송지면 미황사~현산면 송촌1제~현산면 봉동계곡~현산면 덕흥마을~삼산면 대흥사로 이어지는 구간이며, 미황사와 대흥사라는 두 개의 천 년 고찰을 볼 수 있다. 비교적 완만한 코스로 조성되었다.
3코스 다산초의 교류길은 15.5㎞ 길로 약 7시간 정도 소요된다. 코스는 삼산면 대흥사~삼산면 구림리, 상가리, 평활리, 중리~옥천면 청룡제~탑동[오층석탑]~세곡재로 조성되었다. 기존에 있던 도로를 이용해 조성된 구간으로, 삼산면 구림리, 상가리, 평활리, 중리, 옥천면 백호리 등 해남군의 시골 마을을 감상할 수 있다.
좌측 흑일도와 백일도 방향 전망 쉼터 뒤로 대낮같이 불을 밝혀 놓은 땅끝항과 바위섬인 맴섬도 보이며,
최근에 새로이 단장된 듯 보이는 산책길을 따라,
좌측 사자끝샘 방향 이정표를 지나는데,
좌측 아래로는 최근에 설치한 듯 보이는 '스카이워크'가 멋들어진 자태를 뽐내고 있고,
예전에 걸은 기억에는 없는 최근에 새로 설치한 해안 비탈의 데크길을 따르니,
갈림길에서 내려서야 했던 예전의 탐방로와는 달리 바로 땅끝탑 스카이워크로 들어서게 되는데,
<땅끝탑 스카이워크>
땅끝탑은 북위 34도 17분 38초 한반도의 땅끝지점에 우뚝 솟은 세모꼴의 기념탑이다. 한반도의 최남단을 기념하는 높이 9m의 땅끝탑에서 바다를 향해 길이 18m의 스카이워크가 설치되어 있다. 해남군은 땅끝 노후관광지 재생사업을 통해 땅끝탑 앞 전망대를 바닥의 일부가 유리로 된 스카이워크로 리모델링하여 이곳을 방문한 관광객들은 투명한 강화유리를 통해 땅끝바다 위를 직접 걸어보는 스릴을 맛볼 수 있다. 땅끝마을 갈두산에 위치한 땅끝 전망대에서 데크길을 통해 아래쪽으로 500여 m를 내려오면 만날 수 있다. 모노레일 탑승장에서 바로 이어지는 걷기길도 있다.
땅끝탑 스카이워크는 땅끝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기를 주제로 한반도의 시작이자 끝을 의미하는 알파와 오메가의 기호를 디자인 컨셉으로 제작되었다. 스카이워크에 올라서면 육지 방향으로는 땅끝탑과 포토존이 서 있고 해안 방향은 아름다운 땅끝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스카이워크 끝에 서면 바다와 하늘을 향해 탁 트인 시야를 통해 오롯이 바다 위 공중에 떠 있는 자유로움을 느끼게 된다. 또한 이곳은 일몰명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해가 지면 주변이 어두우므로 땅끝탑 스카이워크 방문 시 주의를 요한다.
한반도의 땅끝지점으로 남파랑길의 종점이자 서해랑길의 출발점을 알리는 땅끝탑이 우뚝 솟아있고,
<땅끝 유래>
이곳은 한반도의 최남단으로 북위 34도 17분 32초의 해남군 송지면 갈두산 땅끝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만국경위도에서는 "우리나라 전도 남쪽 기점을 이곳 땅끝 해남현에 잡고, 북으로는 함경북도 온성부에 이른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서는 해남 땅끝에서 서울까지 천리,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를 이천리로 잡아 우리나라를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땅끝은 한반도의 시발점이자 끝이다. 대륙과 해양의 접점에서 다양한 문화가 만나 오늘의 땅끝을 이루고 있다. 2001.12.31 -해남군수-
"여기는 땅의 끝, 한반도의 시작, 땅끝탑"
한반도의 땅끝을 알리는 세모꼴의 땅끝탑에는 손광은 시인이 쓴 시가 써져 있다.
< 땅끝탑 > - 손광은 -
이곳은 우리나라 맨 끝의 땅 / 갈두리 사자봉 땅 끝에 서서 /
길손이여 / 토말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게 /
먼 섬 자락에 아슬한 / 어룡도, 백일도, 흑일도, 당인도까지 /
장구도, 보길도, 노화도, 한라산까지 / 수묵처럼 스며가는 정 /
한 가슴 벅찬 마음 먼 발치로 / 백두에서 토말까지 손을 흔들게 /
수천년 지켜온 땅끝에 서서 / 수만년 지켜갈 땅끝에 서서 /
꽃밭에 바람일듯 손을 흔들게 /
마음에 묻힌 생각 / 하늘에 바람에 띄워 보내게
우리나라에서 가장 남쪽이라는데 왜 이리 춥지라며 서둘러 서해랑길 출발 인증을 남기고는,
무심코 남파랑길 1코스 안내판 옆에 서 있는 남해와 서해가 갈리는 지점을 표시한 이정목의 서해 방향 표시를 따라,
데크 계단길로 내려가니 어둠속에서 두 손을 모으고 바다를 향해 기도를 하고 있는 할머니 조각상이 나타나는데,
< 칡머리 당할머니 / 갈산마을 당할머니 >
땅끝바다와 대한민국의 안녕을 비는 신통한 할머니가 땅끝 칡머리 당할머니다. 땅끝 앞바다를 지나는 모든 배의 안전을 관할했던 당할머니의 위엄과 신통함은 오래전부터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 뱃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서해에서 남해로, 동해에서 서해로 조업을 가는 배들은 반드시 갈산 당할머니가 보이는 곳에 배를 멈추고 징과 북을 치며 안전과 풍어를 빌었다. 바다에 음식을 뿌리고 당집에 음식을 바치는 것도 관례였다.
갈산 당할머니의 영험함 때문에 당집을 지키는 당지기의 위세도 대단했다. 땅끝 앞바다를 오가는 선주들은 관례처럼 당지기에 제물과 돈을 줬고 혹여나 당지기가 받은 제물과 돈을 사적으로 취하기라도 하면 격노한 당할머니가 천벌을 내렸다. 또 누가 바다어장에 낭패를 부리거나 제때 제삿밥을 주지 않으면 풍랑을 일으켜 배를 침몰시켰다고 한다. 당할머니의 위엄 때문에 벼슬아치들도 당집 앞에선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걸어가야만 했다.
땅끝의 옛 이름은 칡머리다. 지형이 바다를 향해 칡머리처럼 튀어나왔다고 해서 땅끝마을은 '칡 갈(葛)'자에 '머리 두(頭)'자를 써 갈두, 옆 마을은 갈산(葛山)이라 이름지어 불렀다. 이곳 마을 앞은 물살이 거칠어 해난사고가 잦았고 이에 옛사람들은 갈산마을 숲속에 해신당을 지어 칡머리당할머니를 모셨다. 당집은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유실되었다가 2006년에 복원하였다.
그리고 2023년 봄, 해남군은 땅끝을 찾는 모든 이들의 소원과 나라의 안녕을 위해 우리나라 최남단 땅끝탑 우측 바위 언덕에 땅끝 칡머리당할머니 동상을 세웠다. 이곳은 남파랑길과 서해랑길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이제 갈산 당할머니는 뱃사람들의 안녕뿐만 아니라 땅끝을 찾는 모든 이들과 나라의 안녕을 주관하는 당 할머니가 됐다.
따르던 데크길이 당할머니 동상 앞에서 끝이나 더이상 진행이 불가하여,
당할머니에게 '날이 매우 차, 감기에 걸리기 쉬우니 옷이라도 제대로 입으시라' 부탁을 드리고는 발길을 돌려,
땅끝탑으로 돌아나와 전망대 방향 계단길로 오르다가,
삼거리 갈림길에서 예전에 걸은 기억이 있는 직진의 땅끝전망대와 땅끝마을 방향을 두고,
좌틀하여 오토캠핑장 방향 해안산책길로 들어서며 본격적인 서해랑길 트레킹을 시작한다.
<해남 땅끝>
백두대간의 시작이자 끝이며 한반도의 기가 가장 많이 뭉친 곳, 땅끝관광지는 그 이름만으로도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땅끝'이라는 이름 때문에 희망의 시작점이자 국토순례의 시발지로도 불리는 땅끝관광지는 1997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후 북위 34도 17분 32초 지점에 높이 10m의 땅끝탑을 세우고 땅끝 사자봉 정상에 땅끝전망대를 건립하였다. 또한 땅끝전망대에 올라가는 관광객들의 편의를 돕기 위해 모노레일이 2005년부터 운행되고 있다.
땅끝관광지가 다른 곳과 다른 것 중에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국토순례의 시발지임과 전국 최고의 해넘이해맞이 명소라는 점이다. 매년 8,000여 명 이상의 국토순례객 들이 이곳에서 대장정을 시작하고 있으며, 매년 12월 31일이 되면 땅끝 해넘이 해맞이의 장관을 만나기 위해 전국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과 함께하는 '땅끝 해넘이 해맞이 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한국관광공사 선정 네티즌이 가보고 싶은 곳 1위, 2012년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 대상 등을 수상한 땅끝은 명실상부 대한민국 대표 관광브랜드 중의 하나이다. (안내판)
갈두산 산허리를 감아도는 데크길 해안탐방로를 따라,
탐방로 중간중간에는 바다 쪽으로 돌출되게 쉼터를 만들어 놓았는데,
첫 번째 '사자끝샘 쉼터'에 이어 '당할머니 쉼터'와 '학도래지 쉼터'를 연이어 지나게 되고,
<사재끝샘 이야기>
갈두항에서 땅끝탑으로 가는 산책로에 있는 군부대 초소 밑은 경사가 급한 해안절벽인데, 절벽 아래에 샘이 있다. 이 일대를 '큰사재끝'이라 하고 이 샘을 '사재끝샘'이라 한다. 샘으로 가는 길은 초소 밑으로 내려가기는 어렵고, 물때를 맞추어 마을 사람들이 이용했던 해안을 따라가야 한다. 샘은 바위틈 새로 물이 고여있는 샘이 있고, 바위 중간에 약 1.5m 정도의 둥그런 홈이 패어있는 곳에 물이 고이는 샘이 있는데, 마치 바위 속에서 물이 솟아나는 것처럼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으며 그 양 또한 많았다. 땅끝마을에서는 정월 초하루 국수당에서 도제를 지내는데, 도제를 주관하는 제관은 사재끝까지 와서 이 물로 목욕재계를 했는데, 마을에서 많이 떨어져 있고 길까지 험한 이곳까지 와서 목욕재계를 한 정성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5년 전쯤 이곳에 벼락이 쳐 사재끝샘 위에 있던 바위가 굴러 정확히 샘 위에 얹히면서 지금은 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바위 틈새 샘은 지금도 솟아나고 있다. 이 샘물은 우리나라 북단에 위치해 있는 백두산 천지 물이 백두대간을 따라 백두산의 정기를 나눠준 뒤 최종 종착지인 이곳 땅끝 사재끝샘에서 다시 용솟음치는 것이라고 한다. (안내판의 쉼터 이름은 '사자끝샘 쉼터'로, 내용에는 '사재끝샘'으로 표시되어 있음?)
탐방객들의 수많은 바램이 매달린 '연리지'가 나오는데,
<땅끝 연리지(連理枝)>
땅끝마을 갈두산에는 연리지 두 곳이 있는데, 이곳 연리지는 때죽나무로 수령 약 50~6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보통 연리지는 한 나무의 다른 가지가 붙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연리지는 서로 다른 나무의 나뭇가지가 붙어서 이루어진 매우 특이한 경우의 연리지다. 이곳에서 약 10m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연리지도 때죽나무로, 수령은 약 30년 정도로 추정되며, 이 연리지는 오른쪽 나무의 가지가 왼쪽 나무의 줄기로 파고들어 연리지가 되었다. 연리지는 보통 오래된 수목에서 발생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땅끝 연리지는 수령이 어린 나무에서 발생되어 희소성이 크며, 또한 한 곳에 두 개의 연리지가 생긴 매우 특이한 경우로 땅끝을 찾는 연인들의 진실된 사랑이 맺은 결과라 할 수 있다.
연리지는 「다른 나무끼리 가지가 이어져 엉켜 있다」는 뜻으로, 예로부터 금슬이 좋은 부부를 연리지에 비유한다. 서로 다른 집안에서 자란 남녀가 부부의 연으로 한 가정을 이루어 화목하게 사는 것이 연리지의 모습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사랑과 결혼을 앞둔 이들이 연리지 앞에서 사랑을 맹세하면 꿈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연리지(連理枝)에 관한 고사는 後漢書(후한서) 蔡邕傳(채옹전)의 '比翼連理(비익연리)에서 유래되었다. 채옹은 성품이 강직하고 학문이 뛰어나며 효성이 지극하기로 유명했다. 어머니가 병에 걸려 자리에 눕자, 채옹은 3년 동안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지극 정성으로 병간호를 했으나 보람도 없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채옹은 슬퍼하면서 어머니 산소 옆에 초막을 짓고 시묘(侍墓) 살이를 하기 시작했다.
분묘 옆에는 나무 두 그루가 자라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두 나무의 ‘가지가 서로 붙어 엉키더니[連理枝(연리지)]’ 한 나무처럼 되고 말았는데,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저건 채옹의 효성이 어머니를 감동시켜 모자간이 한 몸이 된 것을 상징하는 거야.”라고 말하며 채옹을 칭찬했다.
백거이(白居易)는 《장한가(長恨歌)》에서 당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비련을 그려 『在天願作比翼鳥 在地願爲連理枝(재천원작비익조 재지원위연리지 ; 나는 새가 되거든 남방의 비익조같이 함께 날고, 나무가 되거든 연리의 가지가 되어 떨어지지 말자던 임금님 말씀)』라고 노래하였다.
연리지에 관한 또 다른 유래로, 춘추시대 진(晉)의 조간자(趙簡子)가 나루터 아전(衙前)의 딸을 소실로 데려오니, 그의 처가 청릉대(靑陵臺)에서 떨어져 자살했는데, 후에 그 부부의 무덤이 따로 있었으나 두 무덤에 나무가 나서 가지가 서로 향해 뻗어 나가더니 하나로 합치더라 하였다. 부부끼리 또는 남녀가 섞인 계(契) 모임을 ‘연리계(連理契)’라 한다.
다른 연리지처럼 굵은 나무를 찾았으나 다른 나무의 작은 가지가 맞붙은 연리지를 겨우 찾아 카메라에 담는다.
데크길 좌측의 '달뜬봉 쉼터'를 지나고,
<중리마을의 마을샘과 달뜬봉 이야기>
중리마을 위쪽에 마을샘이 있는데, 이 샘은 송지면에서는 소죽마을샘, 산정마을의 감나무골 마을샘과 더불어 물이 좋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다른 마을의 샘들이 매립되거나 관리가 거의 되지 않는데 반해 중리마을샘은 지금은 사용하지는 않지만 정성스럽게 관리 보존되고 있다.
중리마을에서는 극심한 가뭄이 들면 마을의 남녀노소 모두가 지추밭골 위에 있는 달뜬봉 봉우리로 올라가 불을 피워 비가 오기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지냈다. 달뜬봉은 마을 저수지 위쪽 산에 있는 봉우리로 이 봉우리로 달이 뜬다. (안내판)
하트 모양의 '댈기미 쉼터'도 지나니,
<소원이 이루어지는 댈기미 이야기>
땅끝 전망대 서쪽 아래 바다를 '댈기미'라고 한다. 자갈이 깔려있는 댈기미는 앞으로 바다가 펼쳐져 있고, 밀려오는 파도를 직접 만날 수 있다. 조약돌 밭이 넓게 분포되어 있어 또 하나의 명소인데, 완도 구계등과 흡사하게 둥근 조약돌이 많고 형형색색의 미석이 시선을 집중시켜, 수석 수집가들에게는 이미 널리 알려진 곳이라고 한다.
이곳은 풍경이 매우 아름답기도 하지만 또 하나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데, 댈기미에서 사자봉(땅끝전망대)을 보면서 자갈을 집어 물속으로 던지며 소원을 빌면 꼭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다만 곁에 아무도 없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
댈기미 앞 바닷속에는 큰 여(암초)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미황사 창건설화에 나오는 인도 돌배가 가라앉아 있는 것이라고 전해 온다고 말한다. (안내판)
우측 땅끝전망대 방향 갈림길을 지나게 되고,
지계곡을 넘는 데크 다리를 건너서 좌측으로 휘어져 나가는 숲길을 따라 '사자포구 쉼터'를 지나,
<미황사 창건설화와 땅끝 사자포구>
호남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달마산 자락에 자리 잡은 미황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미황사에 있는 사적비(1692년 숙종 13년)에는 창건에 얽힌 이야기가 적혀있다.
신라 경덕왕 8년(749년) 이곳 땅끝 사자포구로 한 석선(石船)이 다가왔는데 이 돌배에는 화엄경과 법화경을 비롯하여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40성중(聖衆), 16나한상과 탱화, 금환(金環), 그리고 검은 돌들이 실려 있었다. 당시 달마산에서 수행하고 있던 의조(義照) 화상이 목욕재계하고 두 사미승과 100여 명의 향도를 거느리고 포구(현 갈두항)로 나가 돌배를 맞이하였다. 사람들이 불상과 경전을 모실 곳을 의논하고 있는데, 검은 돌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왔다. 그날 밤 의조화상의 꿈에 금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인도에 있는 한 왕국)의 왕으로, 금강산이 일만 불(佛)을 모실 만하다 하여 배에 싣고 갔더니 이미 사찰들이 들어서서 봉안할 곳을 찾지 못하여 되돌아가던 길인데, 이곳에 이르러 달마산 꼭대기를 바라보니 일만 불이 나타남으로 여기에 부처님을 모시려 하오.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 소가 누웠다 일어나지 않거든 그 자리에 모시도록 하시오"라 하고는 사라졌다.
다음날, 의조화상이 검은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는데 소가 한 번 크게 울고 땅바닥에 눕더니 일어난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짓고, 산골짜기에 이르러 다시 쓰러져 일어나지 아니한 곳에 미황사(美黃寺)를 창건했다. 미황사의 ‘美(미)’ 자는 소의 울음소리가 하도 아름다워서 따 온 것이고, ‘黃(황)’ 자는 금인(金人)의 황홀한 색에서 따와 붙인 것이다. (안내판)
'불무청 쉼터'도 지나고,
<송종마을의 불무청과 석탄 광맥 이야기>
송종리와 중리 사이인 신풍에 불무청이라고 불리는 골짜기가 있는데, 지금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이곳에 길을 내다 가마굴처럼 생긴 굴이 발견되었으며 굴속에는 옹기 편들이 박혀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 중에는 그곳의 이름이 불무청이고 소량의 옹기 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옹기를 굽는 가마터였거나 대장간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나 불을 때거나 그을린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불무란 말은 풀무의 고어로 불을 피울 때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를 말한다. 풀무질은 보통 대장간에서 불을 세게 하기 위해 바람을 일으키는 일이므로 불무청을 쇠를 다루는 대장간(송지지역에서는 '성냔간'이라고 부른다)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마을에는 석탄광과 금광이 있었는데 석탄광은 송종수원지 정수장 앞쪽에 있었으며, 부산 사람들이 개발하여 1970년대까지 많은 양을 캐냈다고 한다. 석탄 광맥이 송종리에서 갈두리까지 이어졌다는 구전이 있는데 대전에서 온 박승보라는 사람이 혼자 힘으로 18년 동안 이 일에 매달려 광맥을 파들어갔는데 150m까지 팠을 때 물이 차올라 중단했다고 한다.
금광은 일제 강점기까지 채굴을 하였다고 하나 1999년 송종상수원이 생기면서 수몰되었다. (안내판)
둥그런 형태의 난대림 쉼터를 지나니,
<당하리(갈산마을)와 난대림 이야기>
갈산마을에서 땅끝으로 이어지는 산속 산책로는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처녀림 그대로다. 나무 터널 밑으로 구불구불 놓여있는 부드러운 흙길, 울창한 난대림 사이로 빼꼼히 얼굴을 내민 갖가지 약초들은 이곳이 인간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져 있었음을 말해준다.
당초 이 산책로는 해안초소를 위한 길이었다. 갈산의 오솔길에는 해남 최대의 난대림 군락지가 형성돼 있고 갖가지 약초들이 서식하고 있다. 후박, 동백, 돈나무, 보리수 등의 아름다운 군락을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곳이다. 경쾌하면서도 우렁찬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걷는 2km에 이르는 산속 오솔길의 끝이자 시작인 갈산마을, 송호해변을 끼고도는 이 마을은 울창한 난대림 숲에 숨겨진 마을이다. (안내판)
가야할 갈산 마울에서 이어온 임도 종점에 내려서게 되는데,
이후 서해랑길은 임도로 바뀐 땅끝산책로를 따라 북쪽 갈산마을로 진행하게 된다.
호젓한 시멘트 포장임도를 따르는데,
앞쪽으로 훤히 불을 밝히고 있는 갈산마을과 갈산항이 시야에 들어오며,
비포장으로 바뀌어 더욱 정감이 가는 임도를 잠시 더 따르다가,
갈산마을로 들어서며 삼거리 갈림길에서 우향 하면 팽나무 고목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이내 좌측 갈산항 방향 갈림길을 지나게 된다.
도로를 따라 산모퉁이를 돌자 좌전방 나뭇가지 사이로 길게 이어진 송호해수욕장 불빛이 시야에 들어오며,
우측의 땅끝오토캠핑장을 지나 갈산입구 삼거리에서 우측 초승달 모양의 송호해수욕장 방향 땅끝해안로로 들어서며,
<송호(松湖) 해수욕장>
송호(松湖)는 해변가로 노송이 무성하고 바닷가의 고운 모래와 맑고 잔잔한 물결이 호수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해남의 가장 대표적인 해수욕장으로,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땅끝 송호해변은 백사장 길이 1.5㎞, 수심 1~2m, 폭 200m이고,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에 선정된 곳이다.
송호 해송림은 해안가와 도로에 인접하여 길이 약 394m, 면적 약 1만 6474㎡에 걸쳐, 7.5m에서 38m의 너비로 약 640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고, 수령은 200년 정도 된 나무를 비롯하여 어린 나무까지 다양하게 분포하면서 해안방풍림(海岸防風林)의 기능을 한다. 1992년 3월 9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우측 해수욕장 백사장과 송호리해송림 사이의 보도로 내려서서 진행하면,
백사장 옆으로 아름드리 소나무가 방풍림을 이루고 있는데,
비스듬히 누운 소나무는 그대로 두고 길을 내어놓아서 무심코 걷다가는 머리통이 남아나지를 않을 듯하고,
이내 송호해수욕장 중간쯤의 분수대 광장에 도착하여 뜨거운 커피와 차를 나누며 첫 쉼을 가진다.
송호해수욕장 중앙 분수광장에서의 쉼을 뒤로하고,
갈대를 역어 지붕을 만든 이색적인 파라솔이 늘어선 백사장으로 내려서니,
가로등 불빛에 비친 호수같이 잔잔한 송호해수욕장과 백사장이 강추위에 얼어서 굳은 듯하고,
해수욕장 안전 감시대와 샤워장을 지나자,
비스듬히 드러누은 소나무가 지나는 과객의 겸손을 강요하고 있고,
"여행의 시작, 땅끝 해남"이란 글귀 아래 링 형태의 그네를 지나면,
한밤중인지 신새벽인지 모를 시간임에도 훤히 불을 밝히고 있는 특산물 매장과 편의점을 지나게 되는데,
앞서간 분들이 편의점 우측의 땅끝해안로를 따라 진행하는 바람에 서로의 행방을 찾느라 상당한 혼선을 겪게 된다.
송호선착장 방향의 해안 도로를 따르다가 송호보건소 앞 삼거리에서 우틀하여,
이내 다시 좌측 시멘트 블록 담장 끝에서 좌틀하여 비포장의 농로를 따르면,
울창한 난대림 숲으로 이어진 탐방로가 이어지더니,
예전 군 해안초소를 리모델링한 듯 보이는 '꼼지락 캠핑장'을 지나게 되고,
가드 로프까지 설치된 호젓한 탐방로를 잠시 더 따르면,
우측 언덕에서 좌측 해안으로 내려서는 도로를 가로질러 진행하게 되는데,
좌측 어불도와 어란진항 방향 바다에 떠있는 배들을 멀리 진도쯤의 불빛이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고,
어둠속이라 용도를 알 수 없는 구조물을 좌회하여 나가니,
땅끝황토나라 테마촌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우측 편으로 '오토캠핑존'을 두고 좌측으로 휘어져 진행하면,
<땅끝 황토나라 테마촌 오토캠핑리조트>
땅끝 황토나라 테마촌은 땅끝 일대를 대표하는 상징성과 기능성을 갖춘 종합 관광지 조성 사업을 실시하여 2011년에 85,950㎡의 종합 관광지로 개장하였다. 2018년 제5회 전라남도 친환경 디자인 공모전에서 황토의 특성을 살려 자연친화적인 관광 휴양, 그리고 숲속 자연과 바다를 풍경으로 야영장을 구성하였다는 좋은 평가를 받아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숲속 캠핑존, 오토 캠핑존, 수변공원, 음악 분수, 황토 문화체험관, 진미 특판장, 놀이터, 다목적 운동장, 산책로, 안내센터, 세미나실, 주차장 등이 조성되어 있는데, 객실[1실 30㎡]은 16실로 비수기 주중 요금은 4만원, 주말·휴일은 5만원이고, 성수기 요금은 비수기보다 각 만원이 더 높다. 숲속 캠핑존[1석 23㎡]은 30개의 캠핑존이 있으며, 오토캠핑존[1석 46㎡]은 캐러밴을 비롯하여 26석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황토나라 테마촌 숙박동 건물이 나오며,
서해랑길은 송호항 선착장 방향인 땅끝황토나라 테마촌(숙박동) 우측 계단으로 내려가,
송호항 진입도로로 내려서서 우측 도로를 따라 진행하니,
좌측에 송호마을 표석이 있는 땅끝해안로에 접속하여 좌측 도로를 따라 진행하게 되는데,
총무님과 몇몇 분이 송호해수욕장에서 흩어진 분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 오래지 않아 도착한 분들과 함께 2차선의 땅끝해안로를 따르다가,
송종마을 버스정류장 직전에서 좌측 송종마을 방향 농로로 들어서서,
지름길인 땅끝해안로를 두고 송종해변을 거쳐가는 우회로를 따르게 되는 이유는 인도 구분이 없는 국도를 피하기 위한 해파랑길 설계자의 배려에 의한 것이라 생각하며 우회 농로를 따라 수산물 가공공장쯤을 지나,
송중리방파제로 이어지는 도로에 접속하여 우측 송종마을 방향 도로를 따르는데,
좌측 송종해변에는 각종 폐 어구가 가득 쌓여 있고,
땅끝해안로 방향으로 되나가는 도로를 따라 송종마을로 들어서서 담벼락의 재밌는 글과 그림을 보며 진행하다가,
땅끝해안로에 접속하는 송종마을회관 앞에서 다시 좌틀하여,
마을길로 진행하다가 마을을 벗어나며 나오는 갈림길에서 우측 도로를 따라,
마침내 77번 국도 땅끝해안로에 접속하여 100여 미터 진행하다가 전주에 걸린 "마봉송종길" 이정표를 따라 좌틀하여 농로로 접어드는데, 이곳에서도 그냥 77번 국도 해안땅끝로를 따라 계속 진행하면 1코스 종점인 송지면사무소에 바로 도착할 수 있지만, 코스 설계자의 배려로 우틀하여 농로를 따라 마봉리를 거쳐가는 우회길로 진행하게 된다.
송종마을 앞 농로를 따르다가,
담벼락에 쓰인 싯귀에 헛웃음을 머금으며 송지정수장 직전 사거리에서 직진하여,
송지정수장 울타리를 만나 우측으로 휘어져 오르니,
송지정수장 정문을 지나게 되고,
송지정수장 우측 끝에서 좌측으로 휘어져 올라 송지저수지 울타리 옆 임도를 따라 진행하게 되는데,
송지서수지가 상수원으로 쓰이고 있으며 따르는 도로가 '송지 송호 임도'임을 알리는 표시목이 이어져 있다.
하루 중 기온이 제일 낮은 시각임에도 해변을 벗어나 내륙으로 진행하게 되니 심하게 불어오던 맞바람이 잦아들어 오히려 다소 푸근해진 듯한 느낌으로 점점 밝아오는 사위에 안도하며 송호저수지 둘레 포장임도를 따르는데,
도로가의 "땅끝 잇까리(항목) 대중소"라 적힌 한글 간판이 나의 모국어 지식이 부족함을 일깨워 주고,
<잇까리/이까리>
'이까리'라고도 하며 말대 또는 말목이라고도 부르는데, 바다에 박기 쉽도록 아래를 뾰족하게 깎은 것이 특징이다. 말목(末木)은 나무를 깎아 그 끝을 뾰족하게 하여 갱참(坑塹)에 박아 놓는 것을 말하며, 이 지역 말로 양식장 등에서 설치물을 고정할 때 사용되는 나무 막대기를 말한다. 주변에 김 등의 양식장이 많아 잇까리를 생산하는 업체도 성업하는 모양이다.
울타리가 끝나는 지점에서야 겨우 송호저수지 모습이 공개되며,
도로변 폐가로 보이는 건물 벽면에는 "~를 찢어 죽이자"는 등의 섬뜩한 구호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더니,
방치된 폐가와는 달리 좌측의 선산(일선)김씨 가족묘지는 으리으리하게 잘 꾸며져 있고,
'해남교통'이라 표시된 버스가 스쳐가는데 저 버스를 타면 송지면소재지로 갈 수 있을 텐데 하는 때늦은 후회와 함께,
길게 이어지는 농로를 따르는데 갑자기 일기예보에는 없던 '눈(雪)'이 내리기 시작하며,
빨리 송지면소재지에 도착하여야 뜨듯한 아침식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며 나그네의 마음을 더욱 급하게 한다.
우측 임도로 이어지는 '달마고도 자전거길'은 서울 남태령에서 시작하여 해남 땅끝까지 이어진 삼남길 구간으로, 몇 해 전 서울에서 출발하여 전남 장성까지 진행한 상태라 올 하반기쯤에 지나게 될 것으로 보여 감회가 남다르게 느껴지고,
송호리에서 마봉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를 지나는데, 앞서간 김전무가 밀려온 허기로 갈 수가 없다며 눈 바닥에 배낭을 내리고 '먹고 갑시다'을 외치고 있지만, 아침식사가 송지면소재지에서 기다리는지라 못들은채 지나서 마봉리로 들어서니,
<마봉리(馬峰里)>
마봉리는 고려 시대 특수 지역의 하나인 마봉소(馬峰所)가 있던 지역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영암군에 속한 지역으로, 옛 영암군 남 60리[약 23.56㎞]에 마봉소가 있다.”라고 적혀 있다. 마봉은 말[馬]과 관계가 있다. 제주도에서 올라온 말이 통호리나 이진리에서 목골재를 넘어와 마을의 동남쪽에 있는 몰골의 넓은 목장에서 사고 팔렸다. 마을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마봉마을, 신흥마을, 장척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마봉마을 동쪽으로 달마산이 있고, 남쪽으로 몰골이재 넘어 통호마을이 나온다. 몰골이재는 송지면에 있는 재 중에서 가장 높고, 통호마을과 사구마을 사람들이 월송리나 면소재지인 산정리로 나오기 위해 넘었던 재이다.
직진의 송지면 방향에서 우측 도솔봉(도솔암)이 갈리는 교통표지판이 나타나며,
마련마을 앞 우측 도솔봉 방향 갈림길 삼거리를 지나는데,
갈림길 곡각지에는 송지면사무소가 4.2km 남았다는 서해랑길 이정표와 달마산 설명판이 세워져 있다.
<달마산((達摩山, 489m)>
해남군 북평면과 현산면, 송지면에 걸쳐있는 산이다. 땅끝을 향해 펼쳐져 있는 암릉이 다도해와 어우러져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불썬봉”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이곳에 봉수대가 있어서 ‘불을 사용하다’라는 남도 사투리에서 ‘불 쓴 봉우리’라는 뜻으로 불썬봉이라 부른 것을 미황사 스님들이 불선봉(佛禪峰)이라 부르는 바람에 불선봉이 되었다 한다.
달마산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선종의 시조가 된 달마대사가 머무를 만큼 산세가 뛰어나다는 데서 유래했다. 기록상으로 고려의 무외스님이 처음으로 이 산을 달마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는 '달마산 정수리의 바위들은 사자와 용, 호랑이가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불썬봉을 불선(佛仙), 불성(佛聖)봉으로도 부른다. 미황사 스님들은 달마봉이라 부른다. 달마(達摩)란 범어(梵語, 산스크리트어)인 ‘다르마’에서 유래되어 ‘경전’ 또는 ‘진리’를 의미하며, 달마대사는 중국에 선(禪)을 전한 후 천축국(인도)으로 돌아가지 않고 해동의 바닷가 달마산에 머물렀다는 설로 이 산의 이름을 달마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달마(達摩)는 조사선의 초조(初祖)로 인도의 스님이었는데, 중국으로 건너와 선맥(禪脈)을 이어 육조 혜능조사로 이어져 우리나라 조계종맥으로 이어지는 스님이다. 달마대사는 본래 인도 파사국(波斯國)의 왕자였다. 6세기 전후에 북위(北魏)로 건너가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가 되었다. 당시 주류를 형성한 강설불교(講說佛敎)의 모함을 받아 여섯 번이나 독약을 받았다. 결국 중국에서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인도로 되돌아가고 만다.
이 전설에 대한 우리나라 땅끝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달마는 고향으로 가지 않고 해남으로 왔다고 믿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도 이를 뒷받침한다. 고려 때 무외스님이 쓴 글에 “1281년 겨울에 남송의 큰 배가 표류해 이 산에 정박했을 때 한 고관이 나와서 달마산을 향해 예를 올리며 우리나라에서는 이름만 듣고도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서 자랐으니 부럽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가 머무를 땅이다”라며 그림으로 그려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마련마을을 뒤로하고 송지면사무소 방향 도로를 따라 마음까지 비춰낼 듯 보이는 마봉2저수지를 지나,
도로를 하얗게 덮으며 내리는 흰 눈에 취해 살짝 들뜬 마음으로 도로에 남겨진 앞서간 분들의 발자국을 따르다가,
따르던 도로를 두고 좌측 농로로 진행해야 하는 삼거리 갈림길을 놓치고 직진하다가 발길을 되돌려,
별다른 표식이나 이정표가 없는 갈림길로 돌아와 진행방향 좌측 농로로 진행한다.
'Y'자 갈림길에서는 우측으로 들어서서,
방금 지난 백두들의 발자국이 찍힌 농로를 따라,
좌측의 전주이씨 가족묘지를 지나고,
'Y'자 갈림길에서 리본이 걸린 좌측 길로 진행하는데,
10여 년 전에 걸었던 땅끝기맥의 달마산 능선에 자꾸만 시선이 가고,
서해랑길 이정목이 있는 아스팔트 도로에 접속하여 우향 하였다가 이내 좌측으로 들어서서,
소죽리 대죽마을 뒤편 길을 따라 진행하게 된다.
<소죽리(小竹里)>
소죽리(小竹里) 서쪽 바다에 섬 두 개가 나란히 있는데, 하나는 크고 다른 하나는 작다. 섬에는 대나무가 서식하고 있어 큰대섬, 작은대섬으로 부른다. 소죽마을은 작은대섬에서 이름을 따와 소죽(小竹)이라 하였다. 소죽마을은 통일신라 말에서 조선 초까지 존재하였던 지방의 특수행정조직인 향·소·부곡 가운데 영암군에 있던 심정부곡(深井部曲)으로 추정된다.
대죽마을을 지나 농로를 따라,
능선 위 태양열 발전단지를 향해 진행하여,
고갯마루를 넘고,
종점까지 1.6km 남았다는 서해랑길 이정목이 있는 삼거리에서 우측 길로 들어서서,
산자락으로 이어지는 농로를 따르면,
"해남군 산정배수지"라 쓰인 철제 구조물을 지나 소죽리 소죽마을로 들어서게 된다.
소죽마을로 들어서니 담장에 태극기와 '해남 송지면 심정골 소죽' 페널이 걸려있고,
좌측 노거수 뒤로 살짝 보이는 정자가 호기심을 자극하며,
우측 소죽리 경로회관을 지나는데,
<소죽마을 유래>
마을 서쪽 바다에 2개의 섬(큰대섬과 작은대섬)이 있는데, 작은대섬의 지명을 따서 소죽도(小竹島)라 부르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영암군 편에 통일신라 말부터 심정부곡(深井部曲)으로 불린 기록이 있어 천년의 역사가 깃든 유서 깊은 마을이다. 1300년 경에 양천 허씨 잠(潛)이란 분이 처음 부락에 정착하여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마을뒷산 정상에 "중구할머니"를 모시는 당집이 있고 해마다 중구날(음9월9일)에 중구할머니께 제사를 모시고 있다. 소죽마을 하면 샘물과 미나리로 그 명성을 떨쳤다. 마을 중앙에 하나뿐인 샘이 있는데 사시사철 마르지 않고 여름철에는 시원하고 겨울철에는 따뜻하여 물맛이 좋기로 지역 사회에서 소문이 났다. 1960년도에 가구 수 98호인데 마을 주민들의 식수로 충분하였고 샘 아래에 빨래터가 있어 이른 새벽이면 마을 아낙들 간에 소식을 주고받는 소통과 만남의 장소 역할도 하였다. 샘 아래서 재배한 미나리로 생선회를 곁들이면 그 맛이 일품이라 하여 명성이 자자하였다. 2000년경 샘 아래쪽에다 물저장 탱크 시설 후, 샘물의 양이 크게 줄었고 또 살다가 떠나간 빈 집터만 39호로 줄다 보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2021년 으뜸 마을 만들기에 선정되어 사장에 있는 은행나무 주변을 공원화하고 길가에 홍가시나무를 심어 오가는 이를 즐겁게 할 것이다. 2022년 현재 58가구 96명 주민들이 마을을 아끼고 가꾸며 화목하게 살아가고 있다. -청정전남으뜸마을-
좌측 마을 어귀에 '김공 종국 공적비'가 세워져 있고,
그 위에 은행나무 보호수와 쉼터 정자가, 그 우측에 덕을 기린다는 화강암 표석이 세워져 있다.
마을 어귀의 '세월도 쉬어가는 곳'이란 쉼터를 지나,
야트막한 고갯마루를 지나면,
송지면소재지인 산정리로 들어서게 되고,
<산정리(山亭里)>
산정리는 송지면의 서남쪽으로 굴곡이 심한 해안선이 펼쳐져 있고, 들과 논이 많다. 현재 산정1리마을, 산정2리마을, 엄남마을, 미학마을, 석수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산정리는 송지면사무소 소재지이며, 북쪽으로 미야리, 서쪽에는 어란리, 남쪽으로 바다, 동쪽으로 소죽리와 접하고 있으며, 공공기관과 교육기관 및 송지우체국, 송지면보건지소, 수협, 농협, 송지매일시장 등이 있다.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주 소득원은 쌀이다. 석수마을은 과채 시설재배로 소득을 높이고 있다.
육각 정자를 지나 송지면소재지인 산정리로 들어서며,
아침식사를 예약해 놓은 중앙식당으로 가기 위해 송지면사무소로 이어진 직진의 도로를 두고 우측 골목으로 들어서서,
천주교 산정성당을 좌측으로 보면서 진행하다가,
좌측 산정 장석거리 공영주차장으로 들어서면,
정면 산장길 건너편으로 송지우체국 건물이 보이고,
송지우체국 좌측 맞은편에 아침식사를 예약에 놓은 '중앙식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백반으로 차려진 반찬 하나하나가 모두 입에 붙는다며 칭찬 일색이다.
예술적인 손맛으로 정성을 다해 아침식사를 차려주신 중앙식당 여사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서,
다시 배낭을 메고 눈이 흩날리는 식당문을 나서서,
180m 떨어진 송지면사무소 방향으로 진행하는데,
무릎통증으로 더이상 걷기가 어렵다는 분들과 해남읍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해파랑길 1코스와 2코스의 분기점인 송지면사무소에 도착하여,
<송지면(松旨面)>
송지면(松旨面)은 통일신라 때 신라 지방제의 특수 행정구역인 향(鄕)·부곡(部曲)으로 있었다. 고려시대 초에는 송양현이라는 이름으로 있다가 다시 특수 행정조직인 소(所)와 부곡으로 영암군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고적(古赤)을 보면, 송지부곡(松旨部曲)이 등장하는데 이는 지금의 송지 지역을 말한다. 해남현과 관련하여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월경(越境)은 영암의 옛 임내인 목천, 팔마, 신개, 거요량, 홍의, 북평, 송지, 심정의 땅이 군의 남쪽으로 들어왔다.”라고 언급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송지부곡이 현의 남쪽 60리[23.56㎞]에 있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들어 1409년(태종 9) 향·소·부곡의 폐지와 함께 송지부곡은 사라지고 영암군 송지시면과 송지종면으로, 일부 지역은 해남군 은소면 지역으로 편제된다. 조선시대 은소면, 영암군의 송지시면과 송지종면에 해당하였던 지역은 1914년 송지면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은소면, 송지시면과 송지종면을 합하여 해남군 송지면으로 개설하였고, 면사무소를 미야리(美也里)에 두었다. 1933년 면사무소가 산정리로 옮겨졌다. 1921년 완도군 군외면에 속해 있던 어불리를 어란리에 편입하였고, 어란리가 커짐에 따라 어란리에 속하였던 동현, 내장, 외장의 3개 마을을 갈라서 동현리를 새로 설치하여 16개 리가 되었다. 1973년 월송리를 현산면에 이속시키고, 동현리를 다시 어란리에 합하면서 14개 리가 되었다. 1982년 산정마을에 일개 반으로 있던 엄남과 산정2구가 분리되면서 14개의 법정리 42개 행정리가 되었다.
송지면사무소 곡각지에 세워진 '서해랑길 2코스' 안내판 앞에서 1코스 완주에 이어 2코스 출발 인증을 남긴다.
마침 전통 오일장(송지오일장 2,7일)이 열리고 있는 송지면사무소를 뒤로하고,
송지면사무소 옆 도로를 따라 송지산정교회 앞을 지나,
오거리에서 직진 '산정 5길'을 계속 이어가니,
산정리 마을 담벼락에는 빈 벽면을 뭣을 채울까 고민을 하기도 전에 그려진 듯 보이는 낙서가 채워져 있고,
'T자' 삼거리에서 좌틀하여 '산정 3길'을 따르다가,
삼거리에서 직진 방향의 '산정 6길'을 따라 산정마을을 벗어나,
'산정천'을 가로지르는 '미학2교'를 건너,
우측의 '용 건축' 좌측으로 이이진 '땅끝해안로' 아래 굴다리를 통과하여 미학마을로 들어선다.
가옥들이 예전에 섬이었던 동산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의 미학마을로 진행하여,
<미학마을>
산정리 미학마을은 미역섬, 미도로 불렸으며, 1918년 우근방조제가 완공되면서 육지와 연결되었다.
팽나무 고목과 육각 정자 쉼터가 있는 'T자' 갈림길에서 좌측 '미학리사무소' 방향으로 진행하는데,
커다란 창고 건물 벽에 그려진 그림이 마을 이름과 관련이 있는지가 궁금해지고,
미학마을 사무소 앞 'Y자' 갈림길에서 우측 길로 들어서서,
작은 동산 기슭을 따라 빙 둘러 이어진 가옥들의 벽화를 감상하며 나가다가,
우측 마을 가옥 사이로 이어진 미학길을 따라,
마을 뒤편 언덕을 넘어서,
간척지 수로를 건너며 우근리로 들어서며 우틀하여 우근들을 가로질러 우근마을 방향으로 진행하게 되는데,
진행길 우측 넓은 들판 너머로 송지고등학교가 위치하는 미야리의 강남마을이 보인다. 1918년 우근방조제가 생기기 전까지 미야리 마을 앞에는 바닷물이 들어왔으며, 방조제로 형성된 농경지를 ‘개들’이라 부르고 있다.
<우근리 강남들>
위 사진의 정면 우근리 방향 우측으로 산기슭에 강남마을이 보이고 강남마을 앞쪽의 넓은 들판이 '강남들'이다. 강남들 우측으로 미야리의 미야지와 송지고등학교가 위치한 미야리 마을이 있다. 1918년 우근방조제가 생기기 전까지 미야리 마을 앞에는 바닷물이 들어왔으며, 방조제로 형성된 농경지를 ‘개들’이라 부르고 있다.
제방길을 따라 아스콘 포장의 '농장길'을 가로질러,
정면 멀리로 보이는 우근제 수문 방향으로 진행하여,
좌틀하여 우근제 수문 옆 교량을 건너며,
우틀하여 2차선의 내장길을 따라 진행하다가,
갈림길의 서해랑길 이정표에서 우틀하여 우근마을 방향 농로를 따라 길게 진행하게 된다.
넓은 우근들 농로인 내장길을 따라 진행하다가,
우근리 내장마을로 들어서는 내장길을 따라 서해랑길 2코스 사각 표지판이 걸린 삼거리에서 우측길로 진행하여,
"佛心(불심)" 글씨와 연화선 그림이 그려진 집을 지나 좌측으로 휘어져 마을을 벗어나,
우근마을 방향으로 진행하면,
이내 우근리 방조제로 들어서서,
좌측 흰 얼음으로 덮인 갯벌과 우측 억새밭과 민물 호수 사이로 이어진 우근리 방조제를 따르다가,
'미학 배수장'을 지나서 우틀하여 진행하면,
팽나무 고목이 있는 우근리 마을회관을 지나게 되고,
<우근리(右近里)>
우근리는 1918년 우근방조제가 축조되고 갯벌이 간척되면서 형성된 마을로, 간척 공사를 담당했던 일본인의 성(姓)이 ‘右近(우근)’인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새 제방을 막아 마을이 생겼다는 뜻에서 '새언머리' 혹은 '새언동'으로 불렀다.
이곳에 간척지가 생기자 완도와 진도 등 인근 섬과 강진에서 사람들이 이주해 왔는데, 최초로 마을에 들어온 사람은 밀양박씨 박종철(朴鐘喆)이 진도에서 우근방조제 공사 노동자로 왔다가 간척지가 조성되자 정착하였고, 이후 현풍곽씨, 김해김씨, 경주정씨 등이 들어오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
주민들은 어업과 농업을 겸하고 있는데, 간척지에서 쌀농사를, 바다에서는 김 양식을 하고 있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갯벌에서는 부녀자들이 굴과 꼬막, 낙지 등을 잡아 소득을 올리고, 겨울에는 인근 김 공장에서 일을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마을에 미곡창고가 있어서 우근리에서 생산된 곡물을 돛배에 싣고 완도의 노화도와 보길도로 실어 갔다고 한다.
우근마을 동구밖길을 따라 나가다가,
2차선의 '농장길' 도로에 접속하며 좌틀하여 학가리 방향으로 진행하는데,
아침식사 후 못 쉬었다며 학가리 들판 태양광단지 직전의 정자쉼터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과일을 나눈다.
<학가리(鶴加里)>
학가(鶴加)는 마을 뒷산이 학 형국이고 실제로 많은 학이 날아와 앉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학가마을, 신평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930년까지 방조제가 축조되기 전에는 섬이었으나 1918년 우근방조제, 1930년 백포만방조제가 축조되면서 동쪽이 육지와 연결되었으며, 마을 앞으로 농경지와 염전이 생겨 주민 대부분이 농업과 어업을 겸하고 있으며, 벼농사와 굴 양식, 김 양식, 염전을 주로 한다.
학가마을 일대 총 3만 3000여㎡에 달하는 염전이 태양광 발전 시설로 변모되었다. 4월 말에서 5~6월까지 꽃게를 잡는다. 갯벌에서는 겨울철에 굴을 채취한다. 신평마을은 백포간척지로 형성된 농경지에서 쌀을 수확하고 있고, 특작물은 마늘이다. 학가마을 북서쪽 바다에는 시루섬이 있으며, 물이 빠지면 시루섬까지 건너갈 수가 있다.
육각정자를 뒤로하면 좌측으로 대단위 태양광 발전단지가 이어지다가,
좌측 학가리로 이어지는 갈림길 사거리에서 땅끝염전이 200m 남았다는 표지판이 있는 직진길로 진행하면,
아직도 살아남아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이 보이더니,
'땅끝햇살소금'이란 상표를 가진 땅끝염전을 지나게 되고,
가차리 배수문을 지나며 학가리에서 가차리의 영역으로 들어서서,
<가차리(加次里)>
가차리는 마을 앞이 배 모양이고 뒤는 학이 나는 전선후비학(全船後飛鶴) 형국으로, 배의 앞이 멍에 모양이라 '멍에 가(駕)'를 쓰고, 배를 차에 비유하여 '수레 차(車)'를 써서 가차(駕車)라 하였다고 전하지만,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가차내(加次乃)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가차마을, 송암마을, 부평마을, 화내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특작물은 마늘이다.
가차리에는 서울상회땅끝염전, 서울염전, 송암염전 등이 있으며, 학가마을은 굴과 꼬막을 채취하고 김 양식을 한다. 동쪽에 있는 가차들은 1930년 백포만방조제가 생기면서 형성된 간척지이다. 옛 송지천에는 민물새우와 가재, 참게, 송사리 등이 많이 서식하여 이것을 먹이로 하는 학이 수천 마리 날아들었다.
환경보호란 명분으로 값비싼 전기를 생산하여 국민의 등골을 휘게하는 태양광 단지가 또다시 이어지는데,
길가에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멀구슬나무가 예쁜 구슬 모양의 열매를 매달고 있고,
<멀구슬나무>
전라남도, 경상남도, 제주도의 표고 300m 이하 마을 부근이나 산록에 식재 또는 자생한다. 구주목, 구주나무, 말구슬나무로도 불린다. 남도에서는 댈롱개나무, 몰꼬시나무, 중대가리나무 등으로도 부른다고 한다. 방충제로 이용되기도 했고 최근에는 신약 물질로 주목하고 있다고 한다. 원산지는 히말라야와 인도이다. 학명은 Melia azedarach L.이다. 나무의 지름은 30∼100㎝이며, 높이는 15∼20m이다.
태양광단지 옆에는 과거 염전에서 일하던 인부들의 숙소로 추정되는 폐건물이 세상사의 무상함을 말하는 듯하다.
'77번 국도 땅끝해안로'에 접속하여 '땅끝해남 함초' 간판을 지나며 100여 미터 진행하다가,
좌측 정자가 있는 농로를 따라 우측 송지천 기수역에 설치된 송암배수장 다리를 건너며 군곡리로 들어서,
<군곡리(郡谷里)>
군곡리(郡谷里)는 송지면의 법정리로 방처, 군안, 현안, 신정마을의 4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군곡리는 마을에서 발견된 고인돌과 조개무지, 움집 주거지 등으로 미루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1930년 백포만방조제가 축조되면서 경작지가 늘어나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백포만방조제가 축조되기 전에는 마을 앞이 바다였으며, 바다와 갯벌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주민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며, 주 소득원은 넓은 간척지에서 군곡저수지 농업용수를 이용하여 생산되는 쌀이다. 특작물로 마늘을 재배하고 있으며, 무화과도 재배하고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2003년 사적 제449호로 지정된 철기시대 패총인 해남 군곡리 패총이 있다.
좌측의 "실뱀장어 불법포획 금지" 경고판을 지나, 서해랑길은 바로 좌측 방조제로 이어지지 않고 신정양수장을 지난 좌측 수로 제방농로로 이어지지만 잠시 후 다시 방파제길로 건너오게 되므로, 그냥 신정양수장 직전에서 좌측 방파제길로 들어서서 진행한다.
'신정양수장' 좌측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 만들어진 '백포만 방조제'를 따라 북쪽 끝 두모항으로 향하다가,
뒤돌아 보니 가공산(좌)과 10여 년 전에 걸었던 땅끝기맥의 달마산 능선이 선명하고,
.
좀체 가까워지지 않는 듯이 보이는 북쪽 방파제 끝의 두모항을 향하다가,
뒤돌아보니 방파제의 남쪽 끝 가차리는 그새 저만치 멀어져 있고,
우측 현산천을 지나는 지점을 경계로 행정계가 송지면 군곡리에서 현산면 백포리로 바뀌게 된다.
<백포리(白浦里)>
백포리는 백방산 밑에 있는 포구라 하여 백포 또는 백방포라 불렸다. 일설로는 간척되기 이전 포구 연안에 굴과 꼬막 껍데기가 패총처럼 쌓여 있어 하얗게 보였다 하여 백포라 하였다고 한다. 백포마을, 두모마을, 장등마을, 경수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백포마을은 약 400여 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되며, 약 250년 전에 공재 윤두서[1668~1715]가 백포에 별장을 두었지만,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아 오래 살지는 않았다.
두모마을은 원래 섬으로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에 두모포리라 기록되어 있어 오래전부터 포구 역할을 하였지만, 1930년 제방 축조로 육지화되었다. 경수마을 또한 두모제방 축조 전에는, 경도 또는 고래섬이라 불리는 섬이었으나 연륙되었다. 주민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 소득원은 쌀이다. 특작물은 고구마, 고추, 마늘, 양파를 재배하고 있으며, 백포마을과 장등마을에서는 축산업을 많이 한다.
문화유적으로 조선시대 가옥인 해남 공재 고택(海南恭齋古宅, 1996년 국가민속문화재 제232호)과 해남 현산 두모리 패총(2001년 향토유적 제5호), 현산면 효열부 나주임씨 정려(2006년 향토유적 제13호) 등이 있다.
백포만 방조제 북쪽 끝의 배수문을 건너서 좌측의 두모항 방향을 두고,
우틀하여 현산천에 설치된 배수장 수문 교량을 건너,
'해남의 탯줄'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신석기시대부터의 선사시대의 유물이 발견된 유서가 깊은 마을인 현산면 백포리 두모마을로 들어서서,
두모마을회관을 지나면,
15세에 시집을 와서 남편이 일찍 병사했으나 친정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평생 맹인인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는효열부 나주임씨 정려각이 나오는데, 정려각 뒤 따스한 길가에서 앞서간 백두들이 다리쉼을 하고 있다.
<현산면 효열부 나주임씨 정려(海南縣山面孝烈婦羅州林氏旌閭)>
두모마을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나주임씨 정려는 효와 열을 겸비한 나주임씨의 덕성을 기리기 위해 암행어사 성수묵(成守黙)의 특명으로 1866년(고종 3) 중건된 건물이다. 나주임씨는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원포가 친정이며, 15세에 김철산에게 시집왔으나 남편이 일찍 병사하자 맹인 시아버지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친정에서 부모가 위급하다고 하여 갔으나 개가(改嫁)시키려고 거짓 연락을 한 것임을 알고 맹인 시아버지를 봉양하러 다시 돌아오려 하였다. 그러자 친정에서 청년들을 동원하여 강제로 잡아두려 하자 바다에 투신하려 하였다. 이때 시댁에서 기르던 개가 나타나 임씨를 업고 바다를 건넜다. 시댁에 도착한 임씨는 맹인 시아버지를 모시고 평생 정절을 지키며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해남군 향토유적 제13호- (설명판)
'두모길'을 따라 두모마을을 벗어나며 넓은 들판으로 들어섰다가,
이내 '쓰레기 무단 소각 및 투기 금지' 경고판이 설치된 백포해변 '두모길'로 나서서,
길게 이어진 백포리 해안길을 따르다가,
화산면 안호리로 들어서서 해안길이 끝나는 '안호리 배수장'을 지나며 좌틀하여,
<안호리(安湖里)>
안호리에는 안정(安丁), 중정(中丁), 송계(松界) 마을이 있는데, 안정마을은 마을 형태가 정(丁) 자 모양이라 하여 안정(安丁)이라 하였다. 중정마을은 옛 해남군의 색금현(塞琴縣) 지역으로 마을 뒷산에서 철기시대 고분이 출토되었고, 사구미 또는 색금이라 불렸는데 이는 '삭금부사터'가 있어 생긴 지명이며 지금의 안호리 548번지[중정리 마을회관 부근]가 색금현원이 살았다는 터이다. 송계마을은 소나무가 많아 송계(松界)라 하였다. 주민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며 주 소득원은 쌀이다. 특작물로 고구마와 겨울배추를 생산하고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안호리 514-3 전 일대에서 마한 해상세력의 무덤이 발굴되었는데 해남에서 나온 마한 고분군 가운데 최대 규모이다. 바닷가에 맞닿은 산 사면에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초반 조성된 고분 50여 기로서 봉분 주위로 사다리꼴 도랑을 두른 마한의 전통 무덤이다.
화산면 안호리 중정마을 방향 해안 도로를 따르는데,
모래가 도로 위까지 보이는 것으로 보아 파도가 심할 때는 도로까지 바닷물이 넘치는 듯하다.
중정마을 앞 해안길을 따르다가,
중정마을 배수장 앞 'ㅏ'자 갈림길에서 우틀하여 중정마을 방향으로 진행하여,
중정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도로에 접속하여 우측으로 나가면,
중정마을회관 앞 팽나무 보호수와 중정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나며,
바로 좌측 농로로 들어 진행하다가 다시 좌틀하여 완만한 오름길 농로를 따라 능선마루로 오르게 되고,
나지막한 능선을 넘는 77번 국도 '백포해안로'를 건너게 되는데,
서해랑길은 횡단보도를 건너 좌측 정자 쉼터를 끼고 좌틀하여 이어지며,
정자 옆에는 서해랑길 이정목(종점까지 3.4km)이 서 있고,
'안호리 석호리 유적' 안내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일대가 안호리 유적지 발굴지역인 안호리 514-3 주변인 모양이다.
<해남 안호리·석호리 유적(海南安湖里·石湖里遺跡)>
2015~18년 화산·평호 도로 건설공사 중 발견된 해남 안호리·석호리 유적에 대해 대한문화재연구원이 2017년 2월부터 4개월간 조사한 결과, 삼국시대 유구로 고분, 주거지, 도로 등이 확인되었고 이외에도 고려-조선시대 유구 등 총 223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삼국시대 고분은 봉분 주위로 사다리꼴의 도랑을 두른 마한 전통의 무덤 양식으로 매장 주체부는 독무덤[甕棺墓] 58기, 움무덤[직장묘, 土壙墓] 57기를 사용한 마한 최대 규모의 고분군이다. 특히 독무덤은 합구식(合口式), 삼옹식(三甕式)이 확인되는데 옹관 수량이 총 124기로 단일 유적으로는 최대급에 해당된다. 사다리꼴 고분은 주구(周溝)를 공유하거나 확장하는 것은 영산강유역의 공통적인 현상으로 해남지역도 영산강유역의 마한 사회의 장제문화를 공유한 것으로 밝혀졌다.
안호리는 해남지역만의 독특한 독무덤이 확인되었고, 내부에서 목 짧은 항아리[短頸壺, 단경호], 겹아가리 항아리[二重口緣壺, 이중구연호], 양이호(兩耳壺), 조형토기(鳥形土器) 등의 토기류와 함께 환두도, 철도끼[鐵斧, 철부], 철정(鐵鋌), 철도자 등의 철기류와 목걸이에 사용한 구슬류 등 200여 점 이상의 부장 유물이 확인되었다.
석호리 고분군 하단부에는 주거지, 수혈, 도로유구 등 생활유구가 확인된다. 이곳은 바닷물이 만입되는 낮은 지대에 생활 터전을 잡고 높은 사면부에는 분묘군을 조성하여 커다란 하나의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경관은 해안가에 선착장을 갖춘 해촌마을 형태로 해남반도의 고대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판단된다.
해남 안호리·석호리 유적의 출토 유물은 해남에서 같은 시기에 조성된 해남 부길리 옹관묘, 분토리 고분군, 신금 유적 자료와 비슷한 양식을 띠고 있다. 해남 안호리·석호리 유적의 주인공들은 백포만 일대에서 철기를 매개로 대외 교류에 참여하였던 마한 해상 세력으로 판단된다. 특히 『일본서기』에 기록된 침미다례(枕彌多禮)와 연관성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정자 쉼터를 지나 농로인 '안정길'을 따르다가,
행정구역이 안정리에서 석호리로 바뀌며 '대지큰길'로 바뀐 도로를 따라 좌측의 '대지저수지'를 지나고,
<석호리(石湖里)>
석호리는 화산면의 법정리로 북쪽과 동쪽에 구릉지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간척지인 넓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흑석(黑石), 좌일(佐日), 대지(大只)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주 소득원은 쌀이며, 특작물로 고구마와 마늘, 인삼을 생산한다.
문화유적으로는 흑석마을에 흑석패총(黑石貝塚)이 있고, 좌일마을에는 청둥오리, 기러기, 고니 등의 철새들이 많이 날아온다.
완만한 언덕을 넘어 대지리 마을로 들어서다가,
대지리 마을회관 직전 삼거리에서 좌측 길로 내려서고,
이내 다시 삼거리 갈림길에서 77번 국도 백포해안길로 이어지는 대지큰길을 두고 우측 대치길로 들어서서,
시멘트 포장의 대지길을 따르게 되는데,
대지마을로 들어서는 'Y'자 갈림길에서 좌측길에는 들어오지 말라는 뜻의 개(DOG) 집이 놓여있어서,
우측 창고건물과 인가 사이로 이어진 대지 마을길로 들어서면,
우측에 자라요리 전문점인 "용천정" 간판을 달고 있는 가정집을 지나게 되는데,
집 앞 양식장에서 자라를 직접 키워서 판매하기도 하고 액기스 판매와 음식점까지 하는 꾀나 유명한 곳이다.
석호리 대지마을을 통과하여 77번 국도 '송평로'에 접속하여 좌향에 이어 바로 우틀하여,
평호리 '평호들'을 가로지르는 농로를 따라 길게 진행하다가,
<평호리(平湖里)>
평호리는 동쪽을 제외하면 삼면이 바다인 마을로, 간척된 땅을 제외하고는 크고 작은 산지로 이루어져 주민들은 농업과 어업을 병행하고 있다. 사포(沙浦), 평발(平發), 구성(九星), 송평(松平)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사포마을은 살포리, 색금이라고 불리었고 모래와 포구가 있어 사포(沙浦)라고 하였다고 한다. 주 소득원 중 농업은 쌀이고, 특작물로 고구마, 배추, 마늘 등을 생산하고 있으며, 어업은 주로 김 양식과 함께 갯벌에서 꼬막과 낙지, 주꾸미, 바지락을 채취하고 있다. 김은 인근 김 가공 공장에서 마른 김으로 가공되어 판매되고 있다.
직진의 길이 끊어진 'ㅜ'자 갈림길에서 우틀하여 사포마을 방향으로 진행하고,
사포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사포길'에 접속하여 우향 하였다가 이내 좌향 하여 사포마을 안으로 진행한다.
사포길을 따라 사포마을 뒤편으로 진행하니,
좌전방 멀리로 걷고 있는 6코스의 마지막 부분인 관동방조제를 지난 관두산쯤이 조망되고,
이내 2차선의 포장도로인 '좌일길'에 접속하여 좌측 좌일 마을과 관동방조제 방향으로 진행하는데,
따르는 좌일길 앞쪽으로 서해랑길 2코스 종점인 관동방조제와 관두산이 조망되고,
좌일 마을로 들어서서 도로 우측의 정자에서 쉼을 하려다가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쉬지 못하고 계속 진행하여,
서해랑길 이정목(종점까지 0.8km)이 세워져 있는 관동방조제로 남쪽 끝에서 우틀하여,
화산면 관동리의 영역으로 들어서서 관동방조제를 건너게 된다.
<관동리(關東里)>
관동리는 관두산 모양이 사람이 상투를 쓰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여 관머리산이라고 부르다가 마을이 산의 동쪽에 있다 하여 관동(館東)이라 불렀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한자 표기가 관동(關東)으로 바뀌었다. 현재 관동마을, 명설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관동마을은 바닷가 마을로, 무역항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는 제주도를 비롯, 중국 남경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관두항에서 떠났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 관두항은 해남현 남쪽 40리[약 15.70㎞]에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관두항이 개항된 시기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농업과 어업을 겸하고 있으며, 주 소득원은 쌀이고, 특산물은 고구마이다. 관두산 봉수지(館頭山烽燧址)가 관두산 정상 해발 121m에 있는데, 관두산 봉수는 세종 대에 초축(初築)한 것으로서, 조선시대부터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한 주요 군사적 거점지였다. 2015년 6월 29일 해남군의 향토유적 제29호로 지정되었다.
<관동방조제(冠東防潮堤)>
해남군 화산면 관동리와 평호리 사이에 이어진 방조제로 화산면 방조제라고도 부른다. 1967년 관동방조제가 완공되었으며, 총길이 780m이다. 2000년 제12호 태풍 프라피룬으로 인해 일부 유실되기도 하여 보강공사를 하였다.
2014년 8월 31일 자정을 전후하여, 밀물 때 닫혀 있어야 할 관동방조제 배수갑문이 수 시간 이상 열려 있어 간척지로 바닷물이 유입되어 논 207㏊ 중 100㏊가량이 침수되었고, 바닷물 염분으로 인한 농민들의 피해가 심각하게 발생하였다.
좌 바다, 우 습지와 관동벌을 나누는 관동방조제를 따라 오늘 처음으로 느린 걸음으로 진행하면,
방조제 위에 널어놓은 양식장 설비의 용도에 대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관동방조제 북쪽 배수문 앞에 도착하니 애마가 기다리고 있고,
서해랑길 1, 2코스 완주 축하 인사를 건네고는,
관동방조제 배수문 교량을 건너 관동리 영터마을로 들어서면,
삼거리 모퉁이에 서해랑길 2코스 종점이자 3코스 시점을 알리는 '서해랑길 해남 3코스' 안내판이 자리하고 있고,
형식상 2코스 종점인 영터정류장은 우측 도로 300m 지점이고, 3코스는 좌틀하는 관두산 방향 도로로 이어진다.
기다리던 버스에 올라,
해남읍의 해물탕 전문점으로 이동하여,
높아진 기대치에는 못 미친다는 평을 늘어놓으며 즐거운 뒤풀이 시간을 가지고는,
멀고 먼 귀갓길에 오른다.
요즘 매스컴을 보면 참으로 말장난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동일한 사안을 두고 각자 자기진영에 유리하게 논리를 전개하는데,
언뜻 맞는 듯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상식이나 합리성이 결여된 경우가 많다.
그런 억지 논리와 감언이설에 속아서 그릇된 의사결정을 하게 되면
그에 따른 피해를 나는 물론 나의 아들딸을 포함하여
제대로 된 판단을 했던 사람들조차 모두 피해를 입게 된다.
보이는데로 보지 말고 들리는데로 듣지 않으려 늘 깊이 생각하며 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