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실하지 않은 자
넘보지 못하게
안상호
가을 산열매는
갑옷을 입는다
열매로 오는 길에는
낮은 포복으로도
가 닿기 힘든
가시덤불을 앉히고
짧고 연한 부리 말고는
따로 포크 나이프가 없는
산의 어린 것들,
먹을 만큼만 먹은 후
젖니를 빛내며 기쁘게
노래할 수 있는 자 말고는
넘보지 못하게
일 년에 한 번
들쥐 어린 것, 산새 어린 것
큰 뿔 산양 어린 것들
가시나무 찔레 밭에서
저희끼리 재재대며
기쁨의 식탁 가질 수 있도록
아무 데나 기웃거리고,
아무 거나 남김없이 쓸어 담는
산 아래 어떤 것들
손대지 못하게
이빨 센 자들이 함부로
송곳니 드러내지 못하도록
한 끼 밥 말고는
똥 과자 부스러기도 없는
산의 어린 것들
이 열매에 기대
눈 내리는 한 겨울
또 나야 하기에
이 가을, 산열매는
풍미를 내보내고
꼭 필요한 탄수화물과 단백질에
비타민 몇 점만 남긴 뒤
겉에는 각질을 두르고
그 위에 바늘을 앉혔다
절실하지 않은 자
아무도,
넘보지 못하도록
하늘에는 목소리 없는
날개 큰 새
초계기로 띄워
소리 없이 나르게 하고
근육이 말씀하길
안상호
동네 체육관에 가서
근육을 붙인다
이두박 삼두박 사두박
숫자 붙은 근육을
차례대로 뻗치기 시키고
게으르게 퍼져 있던 핵심 근육도
소집령을 내린다
말년 병장 같은 힘살들
잡아 둬야 할 때라는 말이 생각난
한가한 오후
샤워를 해도 쓸려 나가지 않는
단단한 근력
운동이 끝난 뒤
장례식에 간다
친구는 누워 있고 한 때
건빵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던
친구의 앞가슴 살
조문객에 앞서
영결식장을 빠져나간다
치즈버거, 정의, 애호박전, 계엄 반대,
맛있는 자유와 낭만 섹스 등과 함께
자기들이 필요하지 않은 때
곧 올 것이라고, 슬쩍
일러주며
노화가의 잠
안상호
담쟁이 잎이나 하나
그려 넣어 볼까 했는데
그럴듯한 벽돌담이 없구나
창밖엔 라티노 이웃의 녹슨 차 몇 대
팜 트리 잎들이 떨어져 뒹굴고
가난한 오후 햇살이
길을 건너고 있더구나
많은 겨울과 가을 들녘을
함께 했던 아내는
마음을 먼저 저 세상에 보낸 후
젊을 때 잠시 내가 그렸던
인물화의 뒷모습으로
딴 세상에 앉아 있다
많은 들을 그렸으나
그린 들을 집에 들이지 않았고
들과 나는 서로 외로웠다
눈 덮인 겨울 산은
계절이 여럿 지나도
눈을 인 채 그 자리에 서 있고
내가 그린 실경은
늘 그림자요 허상이었다
몸 같이 마음이 늙지 않아
힘들었다 많은 너희처럼
내가 걸어온 굴곡지고 어두웠던 골목
한 때 지나치게 슬프거나
지나치게 아름다웠던 노래들
윌셔 길의 작은 화실
턴테이블에까지 불러왔으나
노래나 인생의 큰일은
대부분 사랑이더구나
내가 손금으로 점쳐 줬던 많은 일생들
빈 하늘에 길을 내듯
어떤 사랑들이 왔으나
왔던 사랑은 되돌아가고
미술대학 응달 진 실기실
저녁 창가를 기웃거리던
떨어진 이삭 같은
햇살 몇 가닥
헐리웃 산이 멀지 않은
양로병원 침상 위를
찾아와 어른대는구나
붓으로 한 세상을 얻었다
생각했으나 돌아보니 세상은
늦가을 농가나
산자락 겨울나무 같았다
지난 세월은
농담이 다른 선 몇 개로 남고
나는 이제
버려질 것들 쪽에 섰음을 안다
좋은 벼루에 갈아 놓았던 송연묵
기도를 열어
그 물을 받아들이려 한다
내가 머무는 양로병원
창턱에 또 한 세상이
막 와 닿은 것 같으므로
내가 그렸던
산마을 너와 지붕
가만히 삐걱이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저녁 밥 짓는 연기처럼
낮게 깔리던 음악 하나가
떠나는 내 뒷모습을
지켜보며 우두커니 서 있을지
몰라, 모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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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25집 꽃을 말하다
절실하지 않은 자 넘보지 못하게 외 2 / 안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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