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은 소중한 생명이 탄생하는 시작이고, 태교는 원만한 인격이 만들어지는 첫걸음이다. 그래서 우리의 옛 조상들은 임신의 과정에 대단히 신중했고 태교의 중요성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정조 24년(1800)에 쓰인 <태교신기(胎敎新記)>에서는 "이름난 의사는 병이 생기기 전에 미리 다스리고, 아이를 잘 가르치는 자는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한다."는 말로 태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전통의 태교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태교를 함께 강조했고, 임신 중의 태교만 아니라 임신 전의 태교도 매우 중시했다. 아버지는 항상 절도 있는 몸가짐과 절제된 성생활을 하고, 천지의 기운이 교합하는 좋은 날을 알아두어 아내와 동침했다. 어머니는 임신을 위해 흑염소, 잉어, 가물치 등 영양가 높은 음식을 먹고 바른 심성을 수양하였다.
평온한 얼굴과 정성스러운 솜씨, 진실한 마음을 표현하는 말, 후덕한 마음이 임신 전 어머니가 지켜야 할 태교의 사덕(四德)이었다. 이와 같은 태교의 과정은 단순히 훌륭한 아기를 낳기 위한 부모의 바람만이 아니라 훌륭한 인물을 키워내는 실질적인 교육의 첫발이었다.
2) 태교이야기
<태교신기>에는 "스승의 십년 가르침보다 어미의 열달 태교가 더 중요하다."라는 말이 있다. 이만큼 옛날 어머니들은 태교의 중요성을 깊이 알고 있었다. 신라시대의 대학자 설총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데, 요석공주는 설총을 임신했을 때 늘 <관음경>, <승만경>, <금강경> 등의 불경을 암송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은덕을 입은 훌륭한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바램 때문이었다. 또 공자의 어머니 안씨 부인은 매일 니구산(尼丘山)에 올라 기도드리며, 훌륭한 자식이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황의 학통을 이은 장흥효의 딸 정부인 안동 장씨는 어려서부터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훌륭한 어머니의 소양을 닦았다. 혼인한 후에는 남편을 공손히 섬기고 어려운 종갓집 살림을 일으켰다. 대학자 이현일 등 자녀 열 명을 태교할 때에는, 자녀들이 공부 잘 한다는 명성보다 선량하다고 칭찬받는 인물이 되라고 가르쳤다. 이들 뿐 아니라 율곡 이이와 여류시인 매창을 키워낸 신사임당, 자식을 위해 세 번 이사한 맹자의 어머니도 훌륭한 태교를 행했던 어머니였다.
3) 태교음식
음식이 바로 사람의 몸을 구성해가듯, 임신 중에 먹는 음식은 임산부의 몸과 태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전통의 태교에서는, 모양이 삐뚤어졌거나 날짐승이 쪼던 과일, 설익었거나 철 지난 과일, 우렁이와 가재, 나귀고기와 말고기 등을 임산부가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또 비늘 없는 고기를 먹으면 난산하고 엿기름과 마늘은 태를 삭이며 개고기를 먹으면 아기가 소리를 내지 못하고 오리고기와 오리알을 먹으면 아기가 거꾸로 나오게 되며 생강을 먹으면 육손이가 된다는 등 다양한 속설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
태교를 잘 하기 위해서는 음식 뿐 아니라 행동도 신중해야 한다. 전통의 태교에서는 임산부가 조금이라도 바르지 못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살아있는 것을 죽이거나 해치는 행동, 거짓말을 하거나 헛된 욕심을 부리는 행동, 남을 미워하거나 시기하는 행동 등 선하지 못한 행동들은 모두 해서는 안 된다. 그런 행동들은 직접적으로 태아의 심성에 영향을 준다고 믿었다. 어머니의 행동이 선량해야 태아도 선량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4) 출산 후 교육
왕실이나 양반가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바로 목욕을 시켰는데, 목욕물은 매화, 복숭아, 자두나무의 뿌리, 호두를 넣어 끓인 다음, 산돼지의 쓸개를 섞어 만든 것이었다. 이것은 아기의 건강과 위생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약물들이 아기에게 흡수되어 첫 두뇌 발달과 정서 안정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었다.
생후 3세 이전에 두뇌 발달과 인격 형성이 거의 다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이미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 있다. 옛 선조들도 이 점을 알고 있었으므로 영아들의 두뇌 발달과 정서 함양을 위한 여러 가지 교육법을 탐구했다.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곤지곤지나 잼잼의 놀이법 등이 바로 그것이다.
곤지곤지는 손바닥의 경혈을 눌러주어 기혈의 순환을 돕는 방법이었고, 양손을 균형 있게 이용하는 잼잼이나 짝짜궁은 뇌의 평형적인 활동을 돕는 것이었다. 요즘은 보기 힘든 부라부라좌법은 아기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아기를 들어 살살 흔드는 것으로, 아기의 척추를 곧게 세워 척수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고 뇌의 기능을 향상시켜주는 것이다.
5) 유아교육
아기가 젖을 떼고 말도 제법 할 때가 되면, 본격적으로 몸가짐 공부와 글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우선 <천자문>을 가르쳐 글자 하나하나를 알아가도록 가르치고, 그 다음엔 <소학>이나 <추구(推句)>, <동몽선습>등을 가르쳐서 문장을 익혀나가게 한다. 한자 교육이 주를 이루었지만 한글도 함께 가르쳤다.
이 시기의 교육은 주로 반복을 통한 암기 교육이었다. 유아는 아직 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선 글자와 글을 반복적으로 읽고 암기하여 머리 속에 넣어둔다. 그런 다음 시간이 더해가면서 예전에 외웠던 구절들을 되뇌면서 그 의미를 자연스럽게 깨달아가는 것이다.
몸가짐의 공부는 <소학(小學)>의 내용을 직접 생활 속에서 실천하게 하는 것이다. 특히 ‘쇄소응대진퇴’(灑掃應對進退)의 몸가짐, 즉 물 뿌려서 마당을 쓸고 어른에게 공손히 응대하며 나아가고 물러남에 공경한 몸가짐을 유지하는 것을 가장 기본 사항으로 삼았다. 또 글공부를 할 때에는 욕심내어 많이 암기하는 것보다 바른 자세로 앉아 정신을 집중하여 또박또박 읽어나가는 태도를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3. 초등교육
1) 서당
서당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다른 어떤 교육 기관보다도 숫자가 월등히 많았고 또 오랫동안 유지되던 사립교육기관이었다. 서당은 조정의 규제를 받거나 유림의 공론을 거쳐 설립되지도 않았다.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그 규모에 상관없이 서당을 열어 학생을 가르칠 수 있었다.
서당은 가장 대중화된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양반집 자제 뿐 아니라 평민 자녀들까지 서당에 다니며 기초 글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반 자제들에게 서당은 더 높은 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기초 과정이었던 반면, 평민 자제들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교육의 기회였다. 이런 점에서 서당은 가장 널리 퍼져있던 기초 교육기관이었던 것이다.
서당은 운영 주체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뉠 수 있다. 가난한 선비가 생계를 위해 아이들을 가르쳤던 생계형 서당이 있는가 하면, 부잣집 자제를 위해 가정교사를 들였던 독선생 서당도 있었고, 한 집안에서 후손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개설한 문중 서당과 마을 사람들이 뜻을 모아 자치적으로 설립한 마을 서당도 있었다.
2) 선생님과 학생
어린이는 보통 7-8세 때 서당에 입학했는데, 보통 동짓날에 입학식을 했다. 입학한 후 대략 15-16세까지 서당을 다녔다.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과정까지 서당에서 마쳤던 것이다. 학생수는 적게는 서너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까지 되었고, 학생 연령은 7세에서 16세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종종 20세가 넘는 늙은 학생이 어린 아이들과 함께 글공부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당의 개설에 어떠한 제재도 없었듯, 서당 훈장의 자격에도 특별한 기준이 없었다. 그래서 훈장들의 실력은 천차만별이었다. 경서와 역사 등에 박식한 훈장은 거의 드물었고, 대개가 주석서와 한글 언해본을 참고하며 경서의 뜻을 해독하는 수준이었다. 더구나 작문을 할 줄 모르는 수준 미달의 훈장도 허다했다고 한다. 서당은 대개 훈장과 학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비교적 큰 서당에는 접장을 따로 두기도 했다. 접장은 학생들의 통솔자이자 훈장의 수업을 도우면서 신입생들을 지도하는 조교 같은 사람이었다.
3) 교육내용
서당에서 가르치던 것은 보통 강독(講讀), 제술(製述), 습자(習字)의 세 가지였다. 강독은 소리 내어 책을 읽고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고, 제술은 글짓기와 논술이었으며, 습자는 글씨쓰기이다. 강독은 <천자문>에서 시작해서 <동몽선습>, <소학>, <명심보감>, <사서삼경>, <사기>, <통감>, <당송문> 등으로 점차 그 수준이 높아져갔다. 제술은 5언 절구나 7언 절구, 작문 등이 주를 이루었다. 학식 높은 훈장이 있는 서당에서는 여러 가지 문장 형식과 문체를 연습하기도 했지만, 규모가 작은 서당에서는 아예 제술을 가르치지 않았다.
습자는 정자 쓰기인 해서를 위주로 연습시켰는데, 이것이 익숙해지면 필기체인 행서와 초서를 가르쳤다. 책을 베끼거나 편지 쓰는 법을 가르쳐 실제로 활용하도록 하였다.
4) 서당의 일과
서당에서는 처음 학동들에게 <천자문>의 한 글자 한 글자를 반복적으로 소리 내어 읽고 글자를 암기하게 했다. 그 다음에는 <소학>이나 <동몽선습>을 같은 책을 같은 방식으로 읽으면서 문장의 이치를 깨닫게 했고, 마지막으로 학동 스스로 그 뜻을 깊이 깨치도록 이끌어주었다.
서당의 학동들에게 정해진 학년은 없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천자문> 한 권을 몇 달에 떼기도 하고 몇 년을 읽기도 했다. 다만 훈장이 보기에 책 한 권을 완전히 소화했다고 판단되면 다른 책을 공부하게 했다. 따라서 책 한 권을 뗀다는 것은 한 단계의 공부를 마친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학동이 책 한 권을 떼면, 그 집에서 떡을 해서 서당 사람들을 대접하는 ‘책거리’ 잔치를 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강압적으로 주입시키는 지루한 수업을 한 것만은 아니었다. 학동들이 지루해할 때는 삼국지 같은 옛날 얘기로 흥미를 돋우기도 했고, 더운 여름철에는 딱딱한 경서 강독수업보다는 시를 읊고 외우는 풍류를 가르치기도 했다.
내용출처 : 한국국학진흥원(조선시대 선비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