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호작약 외 3편
보란듯 활짝 붉은 치마폭 펼친다
작정하고 눈부신 순금의 음부
요부인지 요조숙녀인지
독인지 약인지
수작 잊은 어둠이 뿌리까지 환하다
스물일곱 살
청춘의 오와 열을 맞추느라 층층이 골몰하는 사이
첫눈 불꽃과 꽃가루 폭죽, 풍선 껌과 솜 사탕,
초콜렛 디스코와 설탕 늪, 상주하는 외계인과 얼음 하트,
회오리 칵테일과 소빙하기 혁명이
입술과 혀가 닿기도 전에, 제 달콤함을 못이겨 녹아버렸다
눈물행성
칼날이 자오선의 매운 중력을 횡단한다 비로소
드러나는 침묵 행성의 공전 궤도들, 백색왜성으로
소진된 항성의 피붙이들, 뒤늦은 통곡을 구심력으
로 춤추는 동심원 우주, 자신을 중심으로 울며 돌아
가는 자전 궤도가 소멸의 외곽을 둥글게 끌고 간다
라훌라
키가 훌쩍 자란 푸른 갈대가 빛바랜 낡은 코트를 벗는다
매운 강바람에 어린 싹이 얼까, 불어난
강물에 얕은 뿌리가 쓸려갈까, 반 너머 바스라진 후에도
품에서 놓지 못한 노심초사, 아비의 몸을 벗는다
죽어서도 죽지 못하는 아비를 벗는다
최정란 경북 상주 출생. 200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여우장갑』 외. 최계락문학상 외 수상.
디카소시집 비평
일상 사물을 빛나게 하는 시인의 눈
최정란의 디카시
오홍진(문학평론가)
디카시는 일상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디카시의 필수적 구성요소인 사진 기호를 시인은 일상 속에서 얻기 때문이다. 시인은 길을 걷다가 문득 시적인 영감을 일으키는 사물의 풍경과 마주한다. ‘날이미지’라고 이름 붙은 이 풍경을 시인은 카메라로 찍어 사진 기호로 만든다. 알다시피 디카시는 사진 기호와 언어 기호로 구성되어 있다. 독자는 사진 기호를 본 후 언어 기호, 곧 시를 읽게 된다. 언어로 쓰인 시를 해석하는 데 사진 기호가 큰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일상의 한 풍경이 사진 기호에 담긴다는 점에서 디카시는 일상 속에서 일상 너머를 들여다보는 시의 특성을 정확히 보여준다. 최정란은 무엇보다 지금 우리 눈 앞에 펼쳐진 사물의 풍경에 주목한다. 일상 사물이 디지털카메라와 만나 어떻게 한 편의 디카시로 승화되는지 면밀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보란듯 활짝 붉은 치마폭 펼친다
작정하고 눈부신 순금의 음부
요부인지 요조숙녀인지
독인지 약인지
수작 잊은 어둠이 뿌리까지 환하다
- 「환호작약」
청춘의 오와 열을 맞추느라 층층이 골몰하는 사이
첫눈 불꽃과 꽃가루 폭죽, 풍선 껌과 솜 사탕,
초콜렛 디스코와 설탕 늪, 상주하는 외계인과 얼음 하트,
회오리 칵테일과 소빙하기 혁명이
입술과 혀가 닿기도 전에, 제 달콤함을 못이겨 녹아버렸다
- 「스물일곱」
「환호작약」에서 시인은 붉은 치마폭을 활짝 펼친 작약꽃을 사진 기호로 제시하고 있다. 접싯물에 담긴 작약꽃을 보며 시인은 “작정하고 눈부신 순금의 음부”를 떠올린다. 음부는 생명이 피어나는 자리이다. 작약은 붉은 치마폭을 펼쳐 순금의 생명력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요부나 요조숙녀, 독이나 약과 같은 기호는 작약꽃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것은 작약꽃에 부여한 인간의 생각일 뿐이다. 작약은 그저 스스로 생명을 피운 상황을 한없이 즐길 뿐이다. 디카시 제목인 ‘환호작약’은 여기서 피어난다. 환호작약歡呼雀躍은 기뻐서 크게 소리치며 날뛰는 상황을 의미한다. 작약芍藥꽃과는 한자가 다르지만, 시인은 ‘작약’이라는 말의 유사성을 통해 꽃을 피우고 기뻐서 환호하는 작약의 모습을 ‘환호작약’이라는 사자성어로 표현하고 있다.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끝내 생명을 피운 작약의 환호는 눈부신 작약꽃을 보며 환호하는 시인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묵묵히 생명을 피운 존재만큼 눈부신 게 어디에 있을까? 생명을 피운 작약이나 그 기쁨을 온몸으로 만끽하는 시인이나 눈부시게 빛나는 생명의 향연을 즐기고 있다. 시인은 “수작 잊은 어둠이 뿌리까지 환하다”라는 역설적 시구로 이 시를 맺고 있다. 뿌리까지 환한 어둠의 상상력을 가만히 음미해 보라. 뿌리는 생명의 젖줄과 같다. 뿌리가 죽으면 생명은 이내 살 힘을 잃어버린다. 뿌리가 환할수록 생명 또한 환해진다. 작약꽃이 붉은 치마폭 사이로 드러낸 “눈부신 순금의 음부”는 어둠조차 환하게 밝히는 뿌리의 힘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환호작약하는 생명의 힘은 여기서 비롯된다고 보면 좋겠다.
「스물일곱」에는 9가지 맛으로 구성된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사진 기호로 제시되어 있다. 27개의 큐브로 만들어진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통해 시인은 ‘스물일곱’ 청춘에 서린 다양한 맥락을 시화하고 있다. “청춘의 오와 열을 맞추느라 층층이 골몰하는 사이”라는 시구에 표현된 대로, 시인은 27개의 큐브 하나하나에 드리워진 청춘의 맛을 상상한다. 청춘은 솜사탕처럼 달콤한 시절이다. 하지만 동시에 청춘은 그런 달콤함 속에 끈적끈적한 아픔을 늘 숨기고 있다. 저 27개의 큐브에 담긴 달콤한 맛이라고 다르지 않다. 달콤한 맛이 짙어질수록 청춘의 그늘 또한 짙어진다. 그렇다고 청춘이 이 달콤함을 마다할 수는 없다. 인생에서 청춘의 시간만큼 달콤한 시절은 없을 테니까. 오와 열을 맞추는 일만으로도 청춘은 그지없이 아름다운 시간으로 우리네 기억 속에 남는다.
문제는 흐르는 시간이 이 청춘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청춘의 달콤한 맛은 “입술과 혀가 닿기도 전에” 녹아버린다. 달콤한 맛은 쾌락을 부른다. 쾌락에 빠질수록 쾌락을 향한 욕망은 더욱더 부풀어진다. 시인은 “설탕 늪”을 말하고 있다. 저 27개의 큐브 아이스크림에 도사린 늪에 빠지면 그 누구도 헤어나오기가 어렵다. 움직일수록 몸은 늪 속으로 깊이깊이 빠져들어 간다. 무엇이 환호작약하는 작약꽃과 아주 달콤한 청춘의 맛을 갈라놓는 것일까? 작약꽃은 달콤한 맛에 길들어져 있지 않다. 그저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환한 생명을 즐길 따름이다. 달콤한 맛을 즐기는 청춘은 다르다. 입술과 혀에 닿기도 전에 녹아버리는 이 가공할 맛/욕망을 몸속 깊이 새기고 있다. 달콤한 맛에 빠진 대가로 생명의 환호작약을 잊은 청춘의 비애가 새삼 느껴지지 않는가?
칼날이 자오선의 매운 중력을 횡단한다 비로소
드러나는 침묵 행성의 공전 궤도들, 백색왜성으로
소진된 항성의 피붙이들, 뒤늦은 통곡을 구심력으
로 춤추는 동심원 우주, 자신을 중심으로 울며 돌아
가는 자전 궤도가 소멸의 외곽을 둥글게 끌고 간다
- 「눈물행성」
키가 훌쩍 자란 푸른 갈대가 빛바랜 낡은 코트를 벗는다
매운 강바람에 어린 싹이 얼까, 불어난
강물에 얕은 뿌리가 쓸려갈까, 반 너머 바스라진 후에도
품에서 놓지 못한 노심초사, 아비의 몸을 벗는다
죽어서도 죽지 못하는 아비를 벗는다
- 「라훌라」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자색 양파의 단면을 사진 기호로 제시한 「눈물행성」에서 시인은 자전과 공전을 반복하며 움직이는 천체를 통해 우리네 삶의 진실에 접근한다. 자전自轉은 천체 스스로 그 내부를 지나는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일을 뜻하고, 공전公轉은 한 천체가 다른 천체의 둘레를 주기적으로 도는 일을 가리킨다. “매운 중력”이라는 시구에 표현된바, 이 세계의 모든 생명은 중력에 매인 삶을 살고 있다. 시인이 중력이라는 현상에 ‘매운’이라는 감각어를 붙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청춘이 밖으로 확산하는 달콤한 불과 같다면, 중력은 모든 사물을 중심으로 이끌어 들이는 매운 힘과 같다. 중력이 없다면 그 무엇도 지구상에 발을 붙일 수 없다. 달콤한 맛에 취한 청춘들은 시간이라는 중력에 휩싸여 저마다의 매운 삶을 살아간다. 인생의 달콤한 맛과 매운맛은 시간 속에서 뒤얽혀 한 사람/천체의 움직임을 낳는 근원으로 작용한다.
시인의 말마따나, ‘눈물행성’의 인생은 공전 궤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신을 중심으로 울며 돌아가는 자전 궤도가” 어울려야 비로소 한 우주의 삶이 제대로 돌아간다. 사진 기호에는 중심에서 동심원으로 번지는 저 “눈물행성의 공전 궤도”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 공전 궤도는 한 천체와 다른 천체의 관계를 상정한다. 지구는 태양의 주변을 공전하며 365일의 시간을 만든다. 태양이 없으면 지구는 어떻게 될까? 동시에 23.5도로 기울어진 지구는 자전하면서 하루의 시간을 보낸다. 자전하지 않으면 지구는 또 어떻게 될까? 시인은 “자전 궤도가 소멸의 외곽을 둥글게 끌고 간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칼날이 양파를 가르는 순간 이런 ‘눈물행성’의 상황이 어김없이 드러난다. 눈물은 중력에 휩싸인 생명 우주의 반응을 감각적으로 표현한다. 자전과 공전이라는 우주 현상으로 뭇 생명의 생태를 표현한 것이 참으로 이채롭다 할 만하다.
빛바랜 갈대가 사진 기호로 제시된 「라훌라」에도 인생의 매운맛이 선연히 드러난다. 시 제목인 ‘라훌라’는 깨달은 자, 석가모니의 아들이다. 시인은 왜 깨달음에 이른 존재의 아들을 시 세계로 불러낸 것일까? 이 시는 사실 라훌라보다는 아비 석가모니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봄과 여름에는 푸른 갈대가 자라고, 가을과 겨울에는 갈색 갈대가 자란다. 키가 훌쩍 자란 푸른 갈대가 낡은 코트를 벗을 때는 그러므로 봄이 오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때까지 아비는 행여나 매운 강바람에 어린싹이 얼까, 불어난 강물에 얕은 뿌리가 쓸려갈까 걱정하며 자식을 품에서 놓지 못한다. 오죽하면 아들 라훌라가 태어난 걸 안 석가모니가 ‘속박’이라는 말을 떠올렸을까. 라훌라의 말뜻 역시 ‘속박’이다. 속박이란 무언가에 얽매인 상태를 가리킨다. 석가모니가 아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혈육을 향한 사랑이 깨달음에 미칠 영향을 염려했을 뿐이다.
잠든 아들을 안아주지도 못하고 석가모니는 길을 떠났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위대한 여정을 시작했다. 그래도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만은 늘 가슴에 품었다. 깨달은 이도 이런데, 평범한 사람이야 말해 무엇 할까? 푸른 갈대가 훌쩍 자라고 나서야 아비는 “죽어서도 죽지 못하는 아비를 벗는다”라는 이 디카시의 결구를 가만히 음미해 보라. 깨달은 석가모니는 훗날 라훌라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깨달음의 길을 아들에게 유산으로 전했다. 세속과 인연을 끊은 아비는 마음 깊은 자리에 자식을 품었다. 키가 훌쩍 자랄 때까지 반드시 걸어야 할 길을 보여주었다. 석가모니의 이 마음을 시인은 푸른 갈대를 온전히 품고 한겨울을 견딘 낡은 갈대의 형상으로 표현한다. 그 낡은 것마저 내려놓음으로써 아비는 비로소 자기를 얽어맨 인연 줄을 벗은 셈이다.
최정란은 네 편의 디카시에서 일상 속 사물에서 피어나는 시적 맥락을 다채롭게 구현하고 있다. 그녀는 일상을 구성하는 사물들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일상의 모든 사물은 시인의 눈을 따라 시적 사물로 거듭날 수 있다. 작약꽃이 그렇고 아이스크림이 그렇다. 자색 양파와 갈대 또한 시인의 눈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일상 사물에 상징성을 부여함으로써 시인은 사물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는다. 그래서일까, 최정란의 디카시는 사진 기호와 언어 기호의 사이가 다소 넓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만큼 독자의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넓어지는 특성도 동반한다. 일상 사물에 매이지 않고 그 너머로 나아가는 시인의 눈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자칫 사진 기호에 예속될 수 있는 디카시의 시적 영역을 넓히고 있다고 말해도 좋겠다.
오홍진 대전 출생.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저서 『연인들, 사랑을 묻다』 외. 계간《디카시》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