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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꽃으로 살아남았다
장미꽃 한 송이에도 온 우주가 들어 있다고 말한 어느 시인의 문장이 떠오른다. 평생 대부분을 집순이로 살아온 나에게는 큰 위로가 되는 문장이다. 그 문장 속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스며든다. 꽃을 사랑하는 마음도 일종의 핏줄일 수 있을까. 마음속에 새겨진 DNA 같은 것 말이다.
친정아버지께서 양조장을 운영하시던 시절, 고향인 명봉역 둘레의 큰 나무들을 기증하셨다고 들었다. 부도 이후 이사한 집의 옆집에는 엄청난 규모의 정원을 가진 분이 살았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큰 연못이 있었고, 한낮이면 연못 둘레에서 터져 나오는 연꽃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해 질 무렵과 이른 아침이면 연꽃 향기가 가득했다.
나는 그런 풍경 속에서 자랐다. 백목련과 자목련은 물론이고 이름을 다 적을 수 없을 만큼 많은 꽃들이 있었다. 망한 집의 둘째 딸이었던 나는 날마다 눈만 뜨면 보이는 찬란한 꽃들에 취해 살았다. 그저 행복했다. 취학 시기를 놓쳤어도 햇빛만 따라다니며 행복했다.
어른이 되어 가정을 꾸린 뒤에도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것은 늘 식물이었다. 13평 아파트 베란다에 사과 궤짝 여러 개를 놓고 작은 정원을 만들었다. 나팔꽃과 수세미, 여주를 심고 비닐끈을 길게 매달아 허공에 길을 내주었다. 꽃과 덩굴들은 그 길을 타고 힘차게 올라가며 저마다의 함성을 지르는 듯했다. 그 후로도 내가 사는 곳의 빈자리마다 꽃들이 자리를 잡았다. 꽃을 사는 데에는 한 번도 주저함이 없었다. 꽃값은 늘 모든 지출의 맨 앞자리를 차지했다. 반면 옷은 달랐다. 십 년은 기본이고, 이십 년 넘게 입은 옷도 있었다. 그런 옷들을 보며 여동생은 이 집에 팔려오면 옷도 죽지를 못하네, 하면서 웃었다.
그러다 전북 익산으로 직장이 정해졌다. 나는 빈터만 보아도, 햇살이 넉넉하게 드는 곳만 보아도 꽃을 심었다. 그러던 어느 가을, 오랫동안 품어 온 소원이 이루어졌다. 군산시 나포면 법주사 근처에 있는 13평 규모의 폐가를 겨우 300만 원에 사게 된 것이다. 집을 둘러싼 폐가와 빈터를 합하면 무려 600여 평에 이르렀다.
나는 날마다 호미를 들고 땅을 일구었다. 그 땅은 마치 삼국시대의 냄새가 나는 듯했다. 오랫동안 버려져 굳어 있던 외로운 땅을 꽃 천지로 바꾸어 갔다.
황하코스모스와 양귀비, 나팔꽃, 금계국, 작약, 붓꽃, 마가렛을 심었다. 해바라기만큼 크게 피어나는 수선화와 꽃잔디도 언덕을 따라 심었다. 계절이 흐르자 꽃들은 땅을 가득 채웠고, 마을 분들은 이 집은 천국이네, 하면서 놀러 오실 때마다 감탄하곤 했다. 나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벽을 허물어 방과 창고를 연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긴 문이 모두 열 개가 넘었다. 덕분에 작은 13평 폐가 안에는 오래된 유럽의 골목길을 닮은 공간이 생겨났다.
여행지에서 특별한 풍경을 만나면 누구나 그 자리를 쉽게 떠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나는 타고난 집순이라, 어디에 있든 눈길이 닿는 모든 순간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꽃을 심었다. 오직 꽃을 어디서나 바라보고 싶어서 벽을 뚫고 문을 달았다. 주워 온 한옥 창틀은 물론이고, 운 좋게 얻은 작은 통유리창들도 곳곳에 달았다. 그 창들은 꽃들을 환하게 내 시야 속으로 데려왔다. 마치 내 뒤통수와 옆구리, 등과 배까지 뚫어 사방으로 꽃을 보게 해주는 것 같았다. 그 집에 처음 들어가 살 때는 보이지 않던 무덤들이 첫눈이 내리자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밝은 대낮에 둘러보니 마을 사람 수보다 무덤 수가 더 많아 보일 만큼 낙후된 곳이었다. 여러 사정으로 다른 곳의 무덤들까지 이 마을로 옮겨 왔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나는 괜히 주먹을 불끈 쥐게 되었다. 그래서 마을 길가와 빈터마다 꽃을 심기 시작했다. 꽃의 기운으로 무덤들의 고독과 어두운 기운을 조금이나마 밀어내고 싶었다. 시간이 흐르자 폐가들이 하나둘 팔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가꾼 600여 평의 꽃밭 덕분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사람들은 그 풍경이 주는 행복을 함께 누렸다. 동네 사람들의 기이한 눈길쯤은 모른 척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세상을 꽃으로 가꾸어 가는 일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놀라운 경험도 했다. 어느 해에는 대왕호랑나비들이 떼를 지어 날아왔다. 마치 언어가 있고 귀가 있는 생명들처럼 날마다 찾아와 언덕의 꽃들과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어느 날은 여러 사람이 숨을 죽인 채 나비 수를 세어 보았다. 각자 위치를 나누어 맡고 조심스럽게 숫자를 헤아렸다. 나비들도 우리의 호기심을 아는 듯 얌전히 날아다녀 주었다. 그렇게 확인한 숫자가 무려 70여 마리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들은 딱 한 해만 찾아왔다. 다음 해에는 서너 마리 뿐, 몹시도 서운했고 지금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내가 무엇을 서운하게 했기에 돌아오지 않았을까, 가끔 생각한다.
나포에서의 꽃 사랑은 뜻밖에도 내게 조금 더 넓은 시인의 길을 열어 주었다. 어느 날 서울의 한 대학에서 학생 130여 명이 대형버스 세 대를 타고 박라연 문학기행을 왔다. 마을 사람들은 무척 놀랐다. 내가 마이크를 들고 한 시간 넘게 문학 강연을 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 후 사람들은 내가 무슨 대단한 힘이라도 가진 사람인 양 여기기 시작했다. 심지어 자녀 취직을 부탁하는 분들도 있었다.
그 무렵 창비에서 시집 출간 제안을 받았다. 그렇게 『헤어진 이름이 태양을 낳았다』를 펴냈고, 다행히 독자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영랑시문학상도 받았다. 남편이 퇴직한 뒤 서울로 올라온 후에도 나포에서 키웠던 꽃들의 여운은 계속 남아 있었다. 그 힘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을 출간했고, 청마문학상도 수상했다.
그런데 꽃과의 인연은 또 다른 시련을 안겨 주었다. 아파트 화분걸이에 야생화를 가득 키우고 있었는데,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이면 꽃들이 크게 흔들렸다. 그것이 방범 시설에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담당 직원이 찾아왔다. 그는 그날 오후 4시까지 모든 화분을 철거하라고 통보했다. 나는 부끄러움도 잊고 그분의 팔을 붙들고 울었다. 앞으로 더 조심하겠다고 사정했다. 그러나 직원은 단호했고, 남편 역시 철거하는 것이 맞다고 했다. 결국 나는 울음을 멈추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관리사무소장을 찾아가서 말했다. 주민 가운데 우리 꽃들 때문에 실제로 민원을 제기한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대표자회의를 열어 주십시오,라고. 사실 우리 집 앞을 지나다니던 주민들은 꽃 앞에서 걸음을 멈추곤 했다. 그럴 때마다 저 꽃들 주인이 바로 접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유치원 아이들을 데리고 와 꽃 이름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있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꽃들을 모두 치우라고 하는 것은 마치 자식들을 몇 시까지 고아원에 보내라고 명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런 심정으로 소장님께 호소했다.
다행히 소장님은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셨다. 결국 다른 집에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더욱 조심해 관리하기로 하고 화분들을 그대로 둘 수 있게 되었다. 꽃들은 다시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지만 나는 두려워졌다. 마침 그 무렵 익산의 한 면 단위 지역에 넓은 테라스를 가진 아파트 전세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곧바로 서울 집을 세놓고 이사를 감행했다. 하지만 삶은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남편은 시골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우울증 치료를 받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나 역시 해마다 한 번 이상 이석증이 재발하는 일을 겪게 되었다.
그런데 지난 5월 초, 나는 참으로 놀라운 경험을 했다. 가족사 문제로 새벽에 몰래 테라스로 올라가 통화를 해야 했다. 식물등을 모두 켜자 16평 테라스를 가득 채운 꽃들이 일제히 나를 반기는 듯했다. 마치 괜찮다고, 잘 버텨 왔다고, 앞으로도 견뎌 낼 수 있다고 응원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단명한 관상이라던 박라연이 아직도 살아 있는 이유를. 50년 동안 내가 키워 온 꽃들이 생을 마치기 전, 제 몫의 목숨을 몇 올씩 나에게 나누어 주고 떠난 것이 아닐까.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십만 송이의 꽃들이 자기 몫의 수명을 조금씩 건네주었기에 내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 생각을 되뇌며 천천히 테라스를 내려왔다.
예전부터 나는 꽃값을 깎아 본 적이 없다. 꽃을 데려오는 일을 흥정의 대상으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식을 흥정해서 데려올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내 직업을 모르는 이웃들이 꽃구경을 오곤 한다. 그들은 종종 이런 말을 했다. 유튜브 하셔야겠어요. 와, 정말 대단하네요. 자랑할 만하시네요.... 하지만 자랑이라니. 그 말은 늘 조금 낯설고 씁쓸하다. 혼자 보기 아까워 사람들을 초대한 것뿐인데 말이다.
사람들은 시인을 흔히 불행과 가까운 존재로 생각한다. 가난하고, 고단한 운명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여긴다. 그런데 나를 보면 예외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니다. 왜 나만 불행을 피해 갈 수 있겠는가. 다만 꽃들이 있었을 뿐이다. 꽃들이 내 몫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 짊어져 주었기에 견딜 만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어쩔 수 없다. 허리도 많이 상했다. 화분걸이에 꽃을 걸어 키우느라 고개를 위로, 뒤로, 옆으로 길게 빼고 지내다 보니 이석증 재발에도 영향을 준 듯하다. 그래서 조금씩 꽃들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한련화와 수레국화, 쑥부쟁이, 바늘꽃, 문빔은 씨를 뿌리고 뿌리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대가족이 되었다. 다알리아와 칸나도 해마다 뿌리가 늘어나 식구가 많아졌다. 꽃들은 아침마다 나를 웃게 했고, 살아가게 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을 조금 비워야 할 것 같다. 꽃을 가꾸기에는 내가 너무 연로해졌다.
이제 꽃들과의 추억을 기억의 창고에 차곡차곡 넣어 두려 한다. 그래도 가끔은 상상한다. 죽는 날까지 집순이인 나는 어떤 장례식을 맞게 될까. 외아들 하나뿐인 데다 관계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장례식이 조금 쓸쓸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상상 끝에는 늘 같은 풍경이 떠오른다. 쓸쓸한 미소 사이를 비집고 꽃들이 몰려오는 모습이다. 내가 키웠던 꽃들이 어디선가 찾아와 조문해 줄지도 모른다. 후후. 돌아보면 나는 꽃을 통해 우울을 밀어냈고, 꽃을 통해 시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넓혀 왔다. 먹고살기 힘든 시인들이 많은 세상에서 무슨 해괴한 자랑이냐고 나무라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이것은 자랑이 아니라, 꽃들에게 바치는 감사의 인사이기 때문이다. 안녕!
박라연 전남 보성 출생.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빛의 사서함』 외. 영랑시문학상 외 수상.
꽃 속에 내 시간을 숨긴다
에밀리 디킨슨은 평생 매사추세츠 애머스트Amherst의 집에 살면서 정원을 가꿨다. 식물학을 공부했고, 수백 종의 식물을 채집하기도 했다. “I hide myself within my flower”(나는 내 꽃 속에 나를 숨긴다) 이것은 에밀리 디킨슨의 시 「With a flower」의 첫구절이다. 그 다음 구절은 “그 꽃을 그대 가슴에 달면/그대는 모르는 사이/나 또한 함께 품게 된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시를 보면 디킨슨에게 꽃은 단순한 관상용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존재를 전달하는 언어인 듯하다. 그뿐 아니라 꽃은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아 두는 방식이기도 했을 것이다. 꽃은 피고 지는 것으로 계절을 말하고, 계절은 다시 삶의 시간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꽃을 좋아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지 모른다. 나는 꽃을 보는 사람이라기보다 꽃으로 시간을 읽는 사람에 가깝다.
디킨슨의 정원에 피었던 장미, 수선화, 제비꽃, 토끼풀, 라일락 같은 꽃들, 그 이름들은 내게도 낯설지 않다. 나는 2년간 연희동의 마당 넓은 집을 빌려 살았다. 한 연극 배우의 집이었다. 꽃을 좋아한 배우가 가꾸던 모란, 작약, 해국, 라일락, 수선화.... 그 계절의 개화들은 매일 조금씩 다른 얼굴로 마당에서 깨어났다. 아침이 오면 나는 가장 먼저 마당으로 나가서 새로 핀 꽃을 찾았다. 달력장을 넘기기 전에 꽃달력이 먼저였다. 절대 피지 않을 듯이 봉오리를 움켜쥐고 있던 작약이 문득 벌어지거나 말간 해국이 한꺼번에 입술을 열고 있던 아침, 나는 그때 하루하루가 새로 오고 있다는 것을 꽃으로 세었다. 작약이 열리는 속도와 해국이 입을 여는 순서가 곧 내 시간의 단위였다.
이렇게 마당의 꽃을 만나기 오래 전부터 나는 야생화에 빠져 들판을 헤매고 다닌 적이 있었다. 내가 남쪽 도시에 살 때의 일이다. 숱하게 꽃을 쫓아 다녔지만 기억에 남은 두 번의 큰 장면이 있다. 그것은 봄과 여름이라는 시간의 기억이기도 하다. 봄의 기록장을 열면 강렬하게 각인되는 여린 꽃송이가 있다. 아직은 겨울이 채 빠져나가지 않은 산 속, 좀 싸한 3월의 계곡변에서 처음 노루귀를 만난 날이다.
산 속에서 또 산을 만나고, 절 하나가 아슬하게 산의 8부 능선쯤에 매달려 있던 곳이다. 노루귀를 찾아 작정하고 나선 길이었다. 그러나 노루귀는 쉽게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마른 낙엽들을 슬슬 치우면 아직 언 땅이 부끄럽게 얼굴을 내민다. 그렇게 깜깜한 어둠도 눈부실 수 있다니. 그 속에 꿈틀거리는 생명의 빛이 뿜어져 나오리라 기대하던 순간 마침내 한 송이의 분홍노루귀를 찾아냈다. 분홍 꽃잎을 겹겹이 모으고 뾰조록히 얼굴을 내민 노루귀, 가늘고 여린 꽃잎 아래 줄기의 솜털은 바짝 긴장해 있었다. 그것은 탄성 말고는 달리 표현할 언어가 없었다. 땅의 성감대를 처음 건드린 노루귀가 세운 뽀얀 솜털! 노루귀보다 내가 더 수줍어져서 가만가만 그녀의 살갗을 낙엽으로 다시 덮어주었다.
물봉선을 만난 것은 여름이 조금 점잖아져갈 때였던 것 같다. 지금은 그 일대의 지명은 잊었지만, 그때 만난 꽃들의 얼굴은 잊혀지지 않는다. 가연지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저수지를 끼고 산길을 오르면 야생화 동산이 있다. 비밀화원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을 정도로 사람의 흔적은 없다. 그때 만난 물봉선 군락은 지금도 내게 선명한 한 컷의 화면으로 각인되어 있다. 조금 눅눅한 그늘진 곳에 노란색과 분홍색의 물봉선이 작은 입술을 쫘악 벌려보이는 것이다. 손으로 슬쩍 군락을 건드려 보면 간혹 씨앗이 튀어나가기도 했다. 숱하게 시간이 쌓여갔지만 해마다 여름이 좀 누그러지면 노랗거나 분홍색인 입술로 내지르던 물봉선의 환호들이 들린다. 노란 물봉선와 분홍물봉선, 미꾸리낚시가 현란하게 얽힌 그 꽃밭. 내 잎과 네 잎이 뒤엉켜 있어도 내 잎을 주장하지 않던 그 아름다운 꽃밭. 간간히 뿌리던 빗방울과 산 아래 민가가 너무도 멀어 보이던 그 비밀화원을 생각한다.
꽃을 찾아 들판을 떠돌던 내 병을 잠시 멈추게 한 것은 뜻밖에도 너른 마당이었다. 멀리 꽃을 찾아갈 필요가 없었다. 시간은 이미 마당 한가운데에서 째깍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3월 초의 아침, 서서히 날이 밝아오고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던 어둠이 걷힌다. 웃옷 하나를 걸치고 현관문을 밀면 아직 차가운 바람이 훅 밀고 들어온다. 대여섯 계단을 내려서면 마른 풀들이 기다린다. 누렇게 마른 잔디, 그 사이에 듬성하게 올라오는 푸른 것들이 눈에 띈다.
조팝나무에는 초록 소름처럼 새눈이 돋고 있다. 최선을 다해 봄에게 예의를 갖추는 시간 같다. 철쭉 그늘에도 초록식물이 땅을 뚫었다. 저게 살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지만 그네의 터전을 내가 마음대로 옮길 수는 없다. 마당에서 계단을 따라 슬금슬금 주름잎들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그건 이 마당에서 봄의 지휘봉이 된다. 옅은 보라꽃이 계단을 밟기가 힘들 정도로 자잘하게 퍼져 핀다. 이때쯤 마당 구석에서는 앵두가 망울 하나씩을 팟팟 터뜨린다. 분홍봉오리가 벌어지면 신기하게도 꽃은 흰빛에 가까워진다. 그러다가 수술이 노랗게 보일 정도로 벌어지면 벌들이 날아든다. 그리고 앵두와 가지가 얽혀있던 개나리도 노란 꽃잎을 내보인다.
마당의 낮은 곳에서는 보랏빛 제비꽃이 어느덧 짹짹거리고 노란 수선화가 길게 부풀어있다. 마침내 조팝은 꽃받침에 싸여있던 하얀 꽃망울을 터뜨리며 웃기 시작하고, 이 두근거림이 번져, 이르게 핀 수수꽃다리가 보라색 작은 얼굴들을 펴보이고 있다. 더러는 옹크린 채로 더러는 터뜨린 채로 한껏 시간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 가지 아래에 복수초가 노랗고 납작한 꽃잎을 정연하게 펼쳐놓고 잠깐 멎어있다.
4월에 들어서면 모란을 자주 들여다보게 된다. 너펄너펄 시원스럽게 피는 모란이 마당을 덮으면 봄의 시간을 내가 다 쓰고 있는 느낌이 든다. 겹겹이 포개진 진분홍 꽃잎 사이로 어떤 최선의 순간이 끼어 들었을지도 궁금해진다. 어디 그뿐인가. 절대로 꽃잎을 열지 않을 듯이 주먹을 쥐고 있던 작약이 마침내 제 몸을 열기 시작한다. 구겨진 기분을 펼치듯 하나씩 열리는 그것은 어디를 향한 개방인지 참 숭고하다. 자숙의 시간을 보내는 듯이 보이는 하늘매발톱이 보라를 좀 더 깊게 키울 동안 모란은 더 크게 웃는 법을 배워서 노란 속내를 다 내보인다.
언제부턴가 하나씩 철쭉이 피기 시작한 것은 참 순한 시간을 예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당 구석에 번지기 시작하는 민들레를 들여다보는 것은 참 낯익은 시간을 마주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 속에서 뜻밖의 섬세한 초침소리를 듣게 된다. 그것은 아주 작은 꽃마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더없이 앙징스런 꽃이다. 초침소리들이 귀를 가득 채울 때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시간의 폭포에 현기증을 느끼며 주저앉게 되는데, 눈앞에 풍성한 수국 다발이 머리를 친다. 연둣빛 작은 꽃잎이 뭉텅뭉텅 모여 공동체 생활의 기쁨을 보여주는 꽃이라니.... 풋풋한 냄새가 아찔하다.
5월이 되었나 싶으면 시퍼런 줄기 끝에 자주달개비가 청초한 꽃을 피운다. 하얀 찔레도 개화의 전갈을 향기로 보내고, 절대 터지지 않는 비눗방울 같이 솟아오르는 토끼풀꽃도 금방 마당 한 구석을 하얗게 뒤덮는다. 노란 감꽃이 피었다가 지고 감나무 아래 감자꽃도 하얀 꽃잎을 할딱 뒤집을 때면 어느새 삼색 병꽃이 제 속의 화려함을 내보인다.
마당에 좀 늦게 핀 철쭉이 타들어가듯 녹아내릴 즈음엔 뒤쪽문 앞에는 산수국이 신비로운 빛깔로 오밀조밀 핀다. 6월도 중순이 된다. 빽빽한 꽃에 보라색 나비가 앉아있는 것 같은 이 산수국을 정지용 시인은 시 「백록담」에서 도체비꽃이라고 했던가.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는 구절이 입안에 맴돈다. 그리고 작년에 구근을 심은 리아트리스가 시간을 거꾸로 헤아리며 위에서 아래로 피기 시작한다. 진분홍 털실같은 꽃이 정수리에서부터 터지기 시작하면, 작은 야구방망이 모양의 꽃대는 위태롭게 서서 불안정한 몸을 잘 지탱하려 애쓴다. 7월이 되기가 무섭게 마당은 큰 등을 하나 세운 듯이 노란 해바라기가 활짝 핀다. 해바라기를 겁 없이 타고 오르는 나팔꽃, 그 옆에 수줍은 레이스꽃을 단 목백일홍, 그리고 손톱을 물들이고 싶게 만드는 나지막한 봉숭아까지 마당에 순하게 번진다.
가을이 되면 마알갛고 하얀 얼굴로 송송 고개를 내미는 해국이나, 얼굴이 더 쬐끄만 노란 감국, 그리고 봄에 피었다가 무슨 연유인지 가을에 또 새로 꽃을 피우는 자주달개비, 알록달록 제 색깔을 다 하나씩 가진 소국들까지 이 마당은 좀처럼 지칠 줄 모르며 끊임없이 새 꽃을 피워낸다. 하루하루 꽃을 만나며 그들의 언어를 나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 때로는 시를 쓰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꽃은 늘 자신이 사라질 시간을 품고 피어난다. 그래서 나는 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꽃을 통해 시간을 바라보는 일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꽃은 내게 그 시간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시계였다. 시인의 취향이란 결국 아름다운 것을 고르는 취향이 아니라, 흘러가는 시간을 오래 바라보는 취향인지도 모르겠다.
천수호 경북 경산 출생.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내일의 유리 예보』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