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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좋아하기’ 스위치를 끄고 살자>의 줄거리 :
건강, 부자, 성공, 합격 등등. 긍정적인 것의 있음을 좋아함. 질병, 가난, 실패, 불합격 등등. 부정적인 것의 없음을 좋아함. 이런 좋아함 자체가 없이 땅을 살아야 합니다. 건강 질병 부자 가난 성공 실패 합격 불합격은 얼마든지 내 삶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좋아함을 꺼야 합니다. 왜 그래야만 할까요? 이 땅에서 살면서 좋아함이 작동하면 나는 반드시 다른 신을 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예 좋아함의 기능 자체가 통째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사는 동안 무조건 좋아함의 스위치 자체가 꺼진 상태여야 합니다.
삶에선 무조건 ‘좋아함’을 꺼라
(사사기 2:1~23)
1.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2.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4.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5.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2.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13.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1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15.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5절에 언급된 보김은 벧엘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이곳에서 백성이 소리높여 울었다고 해서 울음의 장소라는 이름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6~10절까지는 여호수아서 마지막 장에서 나왔던 이야기가 다시 언급됩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던 백성의 지도자들이 살았을 동안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겼으나, 여호수아가 죽은 때를 경계로 해서 이스라엘은 깊은 영적인 침체기에 빠져듭니다. 15절을 보면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가 크게 비틀어졌습니다. 그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본문 중심으로 <삶에선 무조건 ‘좋아함’을 꺼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우리 마음에는 좋아함의 기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좋아함의 스위치를 꺼야만 합니다. 절대로 좋아함의 스위치를 켜놓고 살면 안 됩니다. 건강, 부요함, 성공, 합격 등등 이러한 것들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좋아함이 발동합니다. 반대로 질병, 가난, 실패, 불합격 등등 이러한 것들은 없기를 바라면서 좋아함이 발동합니다. 그런데 긍정적인 것들을 좋아함이나 부정적인 것들의 없음을 좋아함이나 일단 좋아함의 기능이 켜져 있으면 안 됩니다. 건강이나 질병, 부요함이나 가난, 성공이나 실패, 합격이나 불합격 같은 일들은 얼마든지 삶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을 대하든, 질병을 대하든, 부요함을 대하든, 가난을 대하든 좋아함의 스위치가 꺼진 상태여야만 합니다. 좋아함의 스위치가 켜져 있는 상태에서는 건강해도, 부요해도, 성공해도, 합격해도 삶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좋아함을 켜놓으면 반드시 다른 신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특별한 종교적 행위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마음의 움직임인 좋아함이 신앙입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을 좋아함을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대신 다른 대상을 좋아하면 좋아함의 대상을 신격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돈이 들어왔다면 그 좋아함이 돈을 신격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자녀의 형통이 들어왔다면 그 좋아함이 자녀를 신격화하는 것입니다. 돈을 좋아해서는 안 되고, 자녀의 형통을 좋아해서도 안 됩니다. 좋아함은 하나님을 향해서만 켜져야 합니다. 좋아함이라는 마음의 기능은 천국에서만 작동해야 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무엇을 좋아하거나 싫어한다는 기능 자체가 켜지면 안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공백 상태이기에 채워지고자 합니다. 이로부터 좋아함의 기능이 움직입니다. 가지면 마음이 채워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추구하는 것이 좋아함입니다. 내가 돈을 가지면 마음이 채워질 것이라고 믿기에 ‘돈을 가졌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래 좋아함은 천국에서만 작동되어야 하는 마음의 기능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탄이 끼어들어 세상에서 좋아함의 스위치를 켜놓게 했습니다. 이로부터 사람은 세상에서 닥치는 대로 좋아하게 되었고, 그렇게 좋아하는 모든 대상이 다른 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음에서 신격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죽음을 기점으로 이스라엘은 심각한 영적 침체기에 빠져듭니다. 이와 관련하여 2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언급하신 언약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6장 5절에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그렇게 할 때 이들의 삶을 완전히 책임지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언약이기도 합니다. 이 언약에서 내가 할 일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고, 하나님이 하실 일은 내 삶을 완전히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삶을 책임지실 뿐만 아니라 죽은 뒤의 영생도 책임지십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함이란 마음의 기능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어쩔 수 없이 좋아함의 기능이 작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대상을 가짐으로써 마음을 채우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마음을 다해 사랑함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하나님만을 향해 좋아함을 켜놓고 뜻과 힘을 다해 그 하나님을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좋아함의 기능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대상을 향해서 켜놓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사탄은 세상의 대상을 향해 좋아함을 켜놓게 했습니다. 이로부터 사람은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좋아하게 되었고 인생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좋아함과 관련하여 신의 정의를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학에서 말하는 신의 정의가 아니라, 실제 나의 삶과 연관된 상태에서 신의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내 공백의 마음 채움을 위해 좋아하는 대상이 신입니다. 마음의 좋아함이라는 기능이 켜져서 어떤 대상을 좋아하면 그 대상이 나의 신입니다. 본래 하나님만을 향해 좋아함이 켜져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제쳐놓고 다른 대상을 좋아하면 그 대상을 하나님의 자리에 세운 것입니다. 좋아함이 모든 대상을 신격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다른 신의 의미입니다. 자녀의 형통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자녀의 형통이 다른 신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은 내가 좋아하는 자녀의 형통이라는 신을 위하여 보조적으로 동원되는 신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다른 신의 조교가 되는 셈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언약이란 ‘좋아함의 기능을 나를 향해서만 켜놓아라. 그러면 너희가 삶을 좋아하지 않아도 내가 너희의 삶을 책임지겠다. 나에게는 너희의 삶에서 이루어지면 좋을 계획이 있고, 내가 이루는 것만으로도 너희의 삶은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좋아함의 스위치를 나를 향해서만 켜놓아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과 언약을 맺지 말라는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과의 왕래를 금지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신을 섬길 것을 우려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근본 취지는 가나안 족속과 교통하게 되면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삶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 다니지 않는 사람은 승진을 좋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회사에 다니는 사람은 동료들과 어울리는 동안 승진을 신경 쓰게 됩니다. 모든 동료들이 승진을 좋아하기 때문에 어느덧 나도 승진을 좋아하게 됩니다. 제가 자녀가 없을 때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자녀의 형통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17년 만에 아들을 낳고 보니 자연스럽게 학부형과 어울리게 되었고 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문제는 좋아함입니다. 좋아함 없이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은 전부 좋아함으로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면 삶에선 좋아함의 스위치가 켜지면 안 됩니다.
본래 좋아함의 기능은 하나님이 넣어주셨기에 천국에서 작동되는 것이지 세상에서 켜지면 안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기독교 종교의 현실을 봅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든 것을 똑같이 좋아합니다. 세상에서 좋아함을 켜놓고 닥치는 대로 다른 신을 섬깁니다. 그리고는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드린답시고 앉아 있습니다. 온통 좋아함을 켜놓은 상태에서 다른 신들을 마구잡이로 좋아하며 믿음, 천국, 구원, 영생이라는 단어를 덧붙입니다. 그리고 그 단어를 붙잡고 ‘나는 구원받았어. 나는 죽으면 천국 갈 거야.’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입니다. 문제는 마음에서 좋아함의 기능을 켜놓고 닥치는 대로 좋아하면서 다른 신 좋아하기를 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나오는 한 사람이 일주일 동안 살면서 좋아한 신들이 몇 개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열 개, 스무 개의 신들이 예배당 안으로 따라 들어옵니다. 이러한 예배당은 만신전이 된 것입니다.
과거 저는 강릉에서 어느 예배당에 7년간 출석했습니다. 예배당에 나가서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 교회의 목사님은 제가 아는 목사님들 중에서 특별히 점잖고 양심적으로 설교하셨습니다. 제가 박사 학위를 받은 조직신학은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가 진짜 복음적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기능을 가진 신학입니다. 이러한 조직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도 훌륭한 설교를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예배당에 갈 때마다 구토를 할 것 같았습니다. 설교의 문제가 아니라 교인들이 뿜어내는 예배당의 공기 자체를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도 제대로 못 하고 있지만 한 가지 아는 것이 있습니다. 절대로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좋아하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좋아함의 기능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곳을 향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이러한 감각 자체가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한 번 부르려면 나를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다른 신을 섬기느라 철저히 더러워졌는가를 보고 십자가에서 죽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인이 이에 대해서 아무 감각이 없습니다. 심지어 그 점잖은 목사님조차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분위기에 휩쓸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중에는 구토를 할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좋아함을 꺼놓고 세상을 살 수 있는가?’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민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좋아함이 주된 기능입니다. 가지면 채워질 수 있다고 믿어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결국 하나님만 좋아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 사는 동안에 좋아함의 기능을 켜놓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다른 것을 좋아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는 의미에서 다른 민족과의 교류를 막으신 것입니다.
좋아함은 전염됩니다.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대상은 자꾸 내 안으로 들어와서 좋음으로 확신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것을 보니 진짜 좋은 것이 아닐까?’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돈을 좋아합니다. 그렇기에 돈은 무조건 좋게 여깁니다. 그러나 신앙적 관점에서 볼 때 돈은 들어오는 대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에서 들어올 만큼만 들어와야 필요한 대로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조차 돈은 무조건 많이 들어오면 좋은 줄로 압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돈은 많을수록 좋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 좋아함이 그대로 옮겨와서 세상 사람들이 돈을 좋다고 하니 돈은 분명히 좋은 것이라고 확신을 합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몸이 아픈 것을 나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평생 육체를 찌르는 가시와 같은 아픔을 안고 살면서,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온전해질 수 있음을 은혜 위에 은혜로 여기며 늘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다 건강이 좋다고 하니 교인들조차 건강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늘그막에 은퇴해서 이사를 할 때 제일 먼저 보는 것이 종합 병원입니다. 내가 이사하려고 하는 곳에 종합 병원이 있는가 없는가를 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예배당에 모여 있습니다.
3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풀어보자면 ‘너희가 나 아닌 다른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교통하면서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한다면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옆구리에 가시가 되리라는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너희에게 옆구리가 될 것이며’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옆구리란 대적들이라는 뜻의 ‘차딤’으로써 적대자라는 뜻의 ‘차르’의 복수형입니다. 내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다 세상에서 좋아함의 기능을 켜놓고 사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모든 사람이 나의 경쟁자이고 대적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각각 좋아함의 스위치를 켜놓을 수 있습니다. 부부싸움이 발생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좋아함 때문입니다. 세상 안에서 서로 다른 좋아함을 가지고 있기에 충돌하면서 서로의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 노릇을 하게 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배우자를 향해 평생 원수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서로 좋아함을 켜놓은 상태에서 같이 사니까 내 옆구리를 제일 많이 찌르는 가시가 남편이고 아내입니다. 그렇기에 배우자가 평생 원수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의 형통을 좋아하기에 자녀 때문에 불행합니다. 자녀가 내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좋아함을 켜놓고 있는 상태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은 다 찔림이고 가시가 됩니다.
다시 3절을 보면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올무라고 번역된 원문을 보면 유혹하여 덫에 빠뜨리다라고 하는 단어에서 나온 명사입니다. 함정에 빠진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내가 돈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며 재물을 다른 신의 대표격으로 내세우셨습니다. 마음이 무언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채워서 만족하겠다는 욕구 때문입니다. 이 욕구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으로서 돈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올무가 된다는 것은 마음의 본래 목적인 만족할 수 없는 함정에 빠진다는 의미입니다.
돈으로 만족하려고 하는데 돈 때문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돈이 올무가 되어서 나를 만족과 기쁨으로부터 완전히 격리해 버립니다. 진정한 만족과 기쁨으로부터 귀양살이를 보내는 것입니다. 또 내가 자녀의 형통을 좋아한다면 그 자녀의 형통이 함정이 되고 덫이 되어서 나를 진정한 기쁨과 만족함으로 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고, 건강을 좋아하고, 형통을 좋아하고, 성공을 좋아하고, 취미를 사랑하고, 여행을 즐기면서 살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서 좋아함의 기능을 켜놓은 채로 만족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좋아함의 기능을 켜놓고 이 세상에서 어떤 대상을 붙잡았다면 올무에 걸린 것입니다. 그 대상은 진정한 만족함과 기쁨으로는 절대 갈 수가 없는 함정이고 덫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이 덫에 빠지게 합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 대신에 보이고 들리고 만질 수 있고 냄새 맡고 맛볼 수 있는 것 중에서 좋음을 찾도록 유혹합니다. 아담은 이 유혹에 넘어감으로써 세상에서 다른 신을 찾고 좋아함의 기능을 하나님 이외에 다른 대상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대상 때문에 만족할 수 없다니 무서운 일입니다.
사람은 돈이 없어 불행하거나 질병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돈을 향해 좋아함을 켜놨기 때문에 불행합니다. 건강을 향해 좋아함을 켜놨기 때문에 불행합니다. 좋아함을 꺼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8절에서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언약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언약을 지키겠습니다’라는 서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믿음이란 이 세상을 향해 좋아함을 절대로 켜놓지 않겠다는 언약입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십자가에서 좋아함의 스위치가 꺼졌다는 고백입니다.
십자가는 사탄에 속아서 세상을 향해 자꾸 켜지려는 좋아함의 스위치를 꺼버리는 장치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이란 세상을 향해 좋아함을 켜놓은 것입니다. 이어지는 19절을 보면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세상을 향해 좋아함을 켜놓은 자들의 마침이 멸망일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의 신은 배라는 것은 결국 육체의 배를 채우는 것이 그들이 좋아하는 것이고 다른 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세상 사람들 앞에서 ‘나는 이만큼 돈을 벌었어! 나는 이만큼 건강해! 나는 이만큼 성공했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영광은 결국 똥통에 빠진 영광입니다. 그런데 그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또 20절을 보면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것은 좋아함을 켜놓고 사는 장소가 땅이 아니라 하늘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 너무 좋고 명품이 너무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단순히 돈을 좋아하지 말고 명품을 좋아하지 말라고 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문제는 마음의 좋아함의 기능이 세상을 향해 켜져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할 때도 좋아함이 켜진 상태에서 내가 지금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무엇인가를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돈이 벌려도 좋아할 수 없습니다. 돈이 안 벌려도 싫어할 수 없습니다. 싫어함이란 결국 돈이 없는 상태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좋아함이 켜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몸의 병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좋아함이 켜져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머리털까지 세시면서 나를 이끌어 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어 하시는 좋아함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이 세상 삶의 좋아함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으로 충분합니다. 보시기에 좋은 대로 끌고 가시면 될 뿐입니다. 내 좋아함은 켜질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할 때 나를 살펴보면서 좋아함이 켜졌다고 느껴진다면 이미 다른 신이 들어와 있고 다른 신으로 더러워진 상태입니다. 이러한 나를 십자가에서 통째로 죽이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 승천함으로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을 마주 봅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상태에서도 십자가를 계속 바라봐야 합니다. 올라간 상태에서도 십자가를 봐야 하는 이유는 의식이 켜져 있는 상태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눈앞에 나타나는 사람이나 사건이나 과제를 의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식할 때 마음이 딸려 들어와서 좋아함이 켜지면 안 됩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침에 좋아함을 끄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향해서만 켜놓습니다. 몸은 나가서 일도 하고 사람도 만나며 이것저것을 의식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거래처 사람을 만날 때는 그를 의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때 마음이 하늘에서 내려와 좋아함이 켜져서는 안 됩니다. 마음은 하늘에 그대로 있으면서 이 땅에서 좋아함이 작동되지 않는 상태에서 거래처 직원을 만납니다. 거래의 성사를 좋아하고, 거래의 실패를 싫어하는 마음의 좋아함이 켜져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좋아함이 세상을 향해 켜져 있다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의도와 계획이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내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도 십자가를 붙잡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마음이 땅에 있을 때는 다른 신으로 범벅이 되어 더러워진 상태를 죽이기 위해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이제 마음이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을 마주 봅니다. 하나님을 마주 본 상태에서도 십자가를 보면서 마음이 세상으로 넘어가서 좋아함의 기능이 작동되지 않게 합니다. 하늘에 올라간 상태에서도 계속 십자가를 봐야만 세상을 사는 동안에도 마음의 좋아함이 켜지지 않습니다. 하늘에 올라간 마음으로 바라보는 십자가는 이 세상에 대해 내 마음의 좋아함을 무조건 차단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항상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는 이 세상에서 죽었다.’라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죽었다는 것은 ‘나는 이 세상에서 좋아함이 꺼진 사람이다. 나는 이 세상에 대해서 좋아함이 죽은 상태다. 나는 이 세상을 향한 좋아함의 기능을 못 박아버렸다.’라는 뜻입니다. 말로만 죽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실제로 내 마음의 좋아함의 기능이 죽는 것입니다. 단순히 ‘나는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었다.’라고 하기보다 구체적으로 ‘세상에 대해서 나의 좋아함의 기능이 죽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편, 우리가 읽지 않은 마지막 부분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게 되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을 향해 좋아함을 켜놓았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은 풍요와 다산을 관장한다고 여겨지는 남신과 여신입니다.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결국 풍요와 다산입니다. 풍요와 다산은 오늘날에 적용하자면 결국 부흥입니다. 부흥은 예배당에서만 쓰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사업이 부흥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곧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태도입니다.
마지막을 보면 이러한 선민의 삶에 일정한 패턴이 나타남을 말씀하십니다. 좋아함을 켜놓고 사니까 당연히 다른 신을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좋아하는 것들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어려움을 주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숨을 못 쉬겠다고 난리를 치며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사사들을 보내 구원하십니다. 그렇게 숨통이 트이면 이스라엘은 또다시 좋아함을 켜놓고 이 세상 것을 좋아합니다.
좋아함을 끄지 않고는 다른 신을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이러한 패턴이 반복되는 이유는 이들이 좋아함을 꺼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 악순환은 좋아함의 기능을 꺼야만 끝이 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때만 가능합니다. 아무쪼록 땅에서 좋아함의 기능을 켜놓고 살던 나를 발견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면서 주님과 함께 죽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한 상태에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고, 사도 바울이 그렇게 살았고, 베드로와 모든 사도들이 그렇게 살았고, 초대 교인들도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좋아함을 죽이고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상태에서도 십자가를 계속 보면서 좋아함을 끕니다. 세상에 대한 좋아함을 켜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는 나의 좋아함의 스위치가 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계속 보면서 좋아함을 끕니다. 아이가 성적표를 받아왔는데 형편없습니다. 그 앞에서 좋아함의 스위치를 끕니다. 좋아함의 스위치를 끄면 싫어함의 스위치도 꺼집니다.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 왔습니다. 이때도 좋아함의 스위치를 끕니다. 아이가 합격을 했어도 좋아함의 스위치를 끕니다. 몸에 병이 났어도 좋아함의 스위치를 끔으로써 싫어하지 않습니다. 몸이 건강해졌어도 좋아함의 스위치를 끕니다. 그래야 이 땅에서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좋아함은 천국에서 작동하는 기능입니다. 아무쪼록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이 세상을 향해서는 무조건 좋아함의 스위치를 끈 상태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좋아함의 기능은 귀한 특권입니다. 그런데 이 기능을 아무 곳에서나 켬으로써 망하는 일이 많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잊지 않게 하셔서 이미 좋아함을 세상에서 켜놨다면 통째로 죽게 하시고,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를 대면하고 있다면 이 땅에서 삶이 진행될 때 십자가를 바라보며 절대로 세상을 향해서는 좋아함의 스위치를 켜지 않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