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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믿음의 마지막 목표와 현재 출발점>의 줄거리 :
어린 사무엘이 젖을 떼고 성막에 머물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바친 한나의 하나님 찬양이 나오고, 한편 엘리 대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의 신분으로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저지르는 악행이 나란히 소개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처지가 모두 남의 일이 아닙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의 하나님 멸시 행위는 사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서 발을 떼는 출발점이고, 한나가 하나님으로 충만하여 이 세상을 바라보며 부르는 노래의 내용은 우리 믿음의 마지막 목표 지점을 가리킵니다.
믿음의 마지막 목표와 현재 출발점
(사무엘상 2:1~17)
1.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4.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5.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12.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13.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관습은 이러하니 곧 어떤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14.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가지되 실로에서 그곳에 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15.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16.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지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우리가 읽은 1~5절은 한나가 사무엘의 젖을 떼고 성막에 머물도록 하나님께 바친 후에 부른 노래입니다. 그리고 12~17절에는 대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행실이 얼마나 악했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나가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부르는 노래와, 당시 실로에 있는 성막에서 대제사장으로 있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얼마나 멸시하였는가를 연이어 나란히 보여줍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믿음의 마지막 목표와 현재 출발점>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내 믿음의 마지막 목표와 그 목표를 향해 가는 여정에 있어서 내가 지금 서 있는 출발점이 어디이며 무엇인가를 알아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삶의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믿음의 구체적인 목표가 있습니까? 그 목표를 향하여 ‘오늘은 이만큼 전진이 이루어졌다’ 혹은 ‘오늘은 오히려 후퇴했다’라고 스스로 충분히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명확한 믿음의 목표가 있습니까? 그러한 목표가 있어야 지금 나의 상태가 어떠한지도 알 수 있습니다. 목표가 없다면 지금 내가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만나는 분마다 복음에 대한 말씀을 드릴 때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를 의식에서 놓지 말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이 약하기에 믿음의 이상적인 상태를 놔버리고 ‘이 정도면 됐지’라고 하는 현재 상태에 타협하면 믿음의 진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현장과 변화산 사건을 자꾸 반복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우리 믿음의 가장 이상적인 상태를 보여주고, 믿음의 목표로 정해야 됨을 아주 구체적으로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을 통해 실제 삶에서 변화산의 사건이나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현장에서 드러나는 마음 상태가 내게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끝없이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나는 바로 변화산 사건이나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현장 같은 마음 상태에서 노래를 합니다. 이러한 이상적인 믿음의 목표 지점을 향하여 가기 위해 나는 어떤 상태에 서 있는가를 알게 해주는 출발점의 사건도 제시됩니다. 악한 행실을 하며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는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것을 알려줍니다. 우리 중에 이미 홉니와 비느하스의 처지를 등 뒤로 돌리고 떠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목표 지점을 향하는 공통된 출발점은 홉니와 비느하스의 상태입니다.
한나의 노래에서 1절을 보면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 이제 이 세상을 향하여 내 마음에서 거칠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나는 아기가 없을 때 브닌나의 격동과 도발로 인해 질식할 것 같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중 ‘나는 자식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있다.’라는 마음을 갖고 하나님으로 숨을 쉬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 숨통을 트는 삶이 반복되는 중에 점점 하나님과 친해지고 이제는 하나님과 호흡이 척척 맞을 정도로 하나님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물로 태어난 것이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이 태어나자 한나의 마음은 더 확증적이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대하여 더 강력하게 마음이 충만해졌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세상을 보고 노래했습니다.
이어서 2절을 보면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라고 했습니다. 거룩함이란 칼로 자르듯이 구분됨입니다. 여호와가 어떤 점에서 칼로 자르듯이 다른 대상과 구분될까요? 여호와는 최고로 좋으심에 있어서 다른 대상과 구분됩니다. 그리고 여호와는 유일한 있음이라는 면에서 다른 대상과 구분됩니다. 다른 대상은 모두 있게 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만이 주권자이시고 다른 모든 것은 아버지의 주권의 다스림을 받는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구분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이고, 유일한 주권자이십니다. 한나의 마음에서 이 하나님이 의식되어 존재감이 느껴지고, 좋음으로 인한 만족감이 느껴지고, 주권자이심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세상을 보자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좋고 나쁨의 모든 기준과 평가가 완전히 허물어져 버리고 맙니다. 용사와 나약한 자가 있는데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보니 용사도 대수롭지 않고 나약한 사람도 업신여길 대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부자도 부러워할 대상이 아니며 가난한 자도 무시할 대상이 아닙니다. 귀족이라고 높게 여기지 않으며 천민이라고 낮게 여기지 않습니다. 한나의 마음에서는 세상이 신줏단지처럼 붙들고 있는 좋고 나쁨의 기준이 완전히 폭발해서 없어져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 충만한 자의 특성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한나와 같은 마음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 믿음의 목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건강하게 백 세까지 장수하는 것을 좋음으로 여깁니다. 또 돈이 백억쯤 있는 것을 좋음으로 여깁니다. 연예인 뺨치는 외모와 몸매를 좋음으로 여깁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에 정말 연예인 뺨치는 외모의 여성분이 있습니다. 제가 집사람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다 가끔 만나는데 만날 때마다 놀랍니다. 그분의 딸이 더 나이 들어 보일 정도입니다. 뭘 어떻게 했기에 안 늙는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또 세상은 뉴스에 나올 정도의 대박 사건으로 여겨지는 성공을 좋음으로 여깁니다. 모두가 침 흘리며 부러워하는 자녀들의 합격,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명품이나 아파트나 자동차를 좋음으로 여깁니다.
이처럼 크고 작은 온갖 세상의 좋음이 가득 모여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질 수도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변화산 사건처럼 육안으로 볼 수 있게 번역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하나님이 세상 좋음에 나타나신다면 이상하게도 백 세 건강이 조금도 좋음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그렇게 좋아 보였던 백 세 건강이 하나도 좋아 보이지 않고, 설령 내일 죽는다고 해도 하나도 나빠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비교하자니 백억 재산도 하나도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당장 먹을 끼니가 없는 가난함도 하나도 나빠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명품이 좋아 보이기는커녕 거추장스럽기만 합니다. 오히려 그런 것을 달고 다녀야만 했던 마음 상태가 창피합니다. 영적으로 볼 때 이러한 것들을 좋아하던 상태가 촌스럽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좋음이 번역돼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면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변화산 사건을 실제로 경험한 베드로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하며 산에서 내려가지 않으려 합니다. 산 아래에는 좋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동안 좋게 여겼던 것들은 무수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심을 보자마자 세상에서 그렇게 좋게 여겼던 것들이 조금도 좋게 여겨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상태가 믿음의 목표 지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신 것을 보여주시고는, 그것을 싹 거두어 버리시고 육체를 입은 모습으로 되돌아오십니다. 하나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우리의 오감에 대해 감추고 계십니다. 그 대신 목표를 정해주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나는 너희에게 영인 나의 모습을 번역해서 보여주었다. 너희가 육안으로 나의 번역된 모습을 보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고 나쁘다고 하는 것이 하나도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음이 될 것이다. 이제 그러한 마음 상태가 되어라. 다만 이제 내가 번역한 나의 모습을 거둬들여서 너희 육체의 오감으로 감지할 수 없도록 만들 것이다. 너희는 오직 믿음 안에서 나의 모습을 보아라. 번역된 나의 모습을 보았을 때 세상의 좋음도 더는 좋음이 아니고, 세상의 나쁨도 더는 나쁨이 아니게 되었던 것과 같이 되어라.’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한나는 바로 그러한 상태에 도달하여 노래합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되자 세상에서 좋고 나쁨의 선을 그어둔 것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용사처럼 힘이 있는 자는 좋고 힘이 없는 자는 나쁘고, 잘 먹고 사는 건 좋고 굶주리는 것은 나쁘고, 귀족은 좋고 천민은 나쁘고, 부자는 좋고 가난한 자는 나쁘고 이러한 기준들을 다 정해놓았습니다. 그런데 한나가 사무엘을 계기로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세상을 보니, 사람들이 좋다 나쁘다 하는 것들이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고 부러워할 것도 없고 거부할 것도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게 오감에 가려져 계십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마치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것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데 하나님을 눈으로 볼 때와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이 믿음이고 믿음의 목표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느 정도로 믿음의 목표 지점에 도달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을 봐도 ‘이게 뭐가 좋다고 하나?’라고 여기고, 사람들이 세상에서 나쁘다고 하는 걸 봐도 ‘이게 뭐가 나쁘다고 하나?’라고 할 정도로 하나님의 좋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하나님의 좋음으로 가득 차면 세상 사람들의 좋고 나쁨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도 맞는 게 없습니다. 한나의 노래를 보면 3절에서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행동을 달아봄이란 사람들이 하는 말과 실제 삶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휴무 기간에 어디에도 가지 않고 집에서 기도에만 힘썼습니다. 확실히 기도하는 만큼 받는 은혜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전에는 시사 프로그램을 볼 때 패널들의 말을 들으면서 ‘이 사람의 말은 옳은 것 같고 저 사람의 말은 틀린 것 같다.’라는 분별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도에 힘쓰며 하나님으로 더 많이 충만해지니까 똑같은 시사 프로그램을 봐도 분별이 생기지 않습니다. 기존에 제가 동의하던 패널이 말하든지 부정하던 패널이 말하든지 동의하게 되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게 됨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며 하나님을 많이 갖기를 계속하는 동안 나중에는 그들의 말이 마치 썩은 시체에 생긴 구더기의 꿈틀거림처럼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도 들을 말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한 사람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있음에 대한 존재감도 없고, 하나님의 좋음에 대한 만족감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의식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예 모르는 채로 자기가 배우고, 경험하고, 책에서 본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들이 듣고 있기조차 끔찍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더러운 것을 담은 상자 안에서 구더기의 꿈틀거림처럼 느껴졌던 것입니다.
민주당 사람들의 말이든지, 국민의힘 사람들의 말이든지, 트럼프의 말이든지, 시진핑의 말이든지, 이란 지도자의 말이든지, 이스라엘 총리의 말이든지, 김정은의 말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이 하는 말들은 더러운 것을 담은 상자 안에서 꿈틀거리는 구더기에 불과한 것들이라서 아주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역사에 대해 그렇게 무관심해서 되겠느냐? 독일의 신학자인 칼 바르트도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라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칼 바르트를 전공한 제가 말씀드립니다. 신문을 봐야만 세상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불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머리카락 하나 나고 빠지는 것과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조차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주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바를 하면 됩니다. 내가 역사를 보면서 누가 옳고 그르며 이편저편을 따진다면 아직 믿음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목표조차 없는 상태로 자기의 출발점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출발점은 어디일까요? 이미 출발점을 지나서 많이 진전이 됐든, 아직도 그곳에 머물러 있든 출발점이 어디인지를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이었습니다. 12절을 보면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라고 했고, 17절을 보면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한 이유는 여호와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들이 어떻게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것일까요? 제사장은 성막에서 일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를 수 없습니다. 성막의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법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소에 있는 분향단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상징하고, 떡상의 진설병은 하나님으로 배부름을 상징하고, 등잔대의 빛은 하나님을 머금은 선민들의 말과 행동을 상징합니다. 이들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율법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앎이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히브리어 야다(ידע)로써 아담과 하와가 동침해서 알았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경험적으로 인격적으로 관계적으로 나와 너의 상대하는 관계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 앎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알았으며, 성막의 존재 의미도 이론적으로는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고기를 멋대로 갈고리로 건져서 가져갑니다. 레위기 7장 34절을 보면 제사장의 몫으로 주어지는 고기에 대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물 중에서 그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를 가져다가 제사장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주었나니…”라고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러한 말씀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물에 삶은 고기를 갈고리로 골라내서 잡히는 대로 먹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는 먼저 기름을 떼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향기인 화목제로 드려야 했지만, 이들은 기름을 태워드리기도 전에 생살을 요구했습니다. 쉽게 말해, 제물로 바비큐를 해서 먹겠다고 나섰던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의식이 완전히 꺼진 상태였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도 알고, 율법도 알고, 성막의 의미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에 대한 의식은 완전히 죽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집사람과 대화를 합니다. 그런데 집사람이 하는 말만 듣고서 생각하고 반응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유일하신 있음과 유일하신 좋음과 유일하신 주권자 되심을 의식에서 놓쳐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하나님을 알지 못함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도 하나님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다 알았지만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의식이 죽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상대하지 않은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도 하나님에 대해 이론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삶의 현장에서 일을 하든, 사람을 만나든, 무엇을 하든지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내 의식에서 하나님이 계신다는 존재감이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만족감도 없고, 하나님이 주권자 되심에 대한 인정함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해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이 느껴져야 되고, 좋음으로 인한 만족감이 느껴져야 되고,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몸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몸으로 인정함이란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 때문에 내 말과 행동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권자 되심을 인정한다면 아내와 이야기할 때도 제 생각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내의 머리카락과 세포 수까지 다 주장하시는데, 그 주권자 앞에서 내 생각을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기억한다면 나는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내 마음을 다 드려야 하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내에 대해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다. 지금 내가 아내와 대화하는 중이라도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라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대해 죽은 것입니다.
제가 아내를 마주할 때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아내를 마주하고 있는 나의 죽음으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십자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치 홉니와 비느하스가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제사의 과정을 무시한 것과 다름 없습니다. 이들이 제사의 과정을 무시한 이유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에 대해서 의식이 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내와 말하는 상황에서도 주님의 십자가 제사는 진행 중입니다. 내 마음이 아내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제사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 죽음의 사건이 지금의 사건으로써 제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정작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로 가야 한다는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제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제사의 완성입니다. 그 십자가 죽음을 무시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직장에 나가서 일할 때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홉니와 비느하스와 똑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읽겠지만 결국 홉니와 비느하스가 저지른 악행으로 인해 엘리의 가문은 끊어집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지금 의식해야 할 상대방으로 의식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함으로써 멸문지화를 당하게 됩니다.
선민 중에 제사장도 멸문지화를 당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 나갑니다. 우리도 똑같은 상태로 살았습니다. 삶에 나가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나고, 맛볼 수 있는 것들에 쫓겨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와 똑같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론은 다 알면서도 삶에서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이자 상대자로 의식하지 않으니 더 악합니다.
아예 하나님의 이름도 모르고, 이론도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하나님에 대한 이론도 다 아는데 정작 삶에서 하나님을 지금 상대하지 않는다면 더 악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눈으로 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의 자극에 의해 격동되고 격발되면서 말하고 행동하며 살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인 십자가의 제사를 근본적으로 멸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제사를 멸시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을 멸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의 진보가 없습니다.
우리 믿음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에 대한 의식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세상을 보면 백 세를 건강하게 사는 것도 좋은 것이 아니고, 요절하는 것도 나쁜 것이 아니게 됩니다. 백억이 있는 것도 좋은 것이 아니고, 당장 내일 먹을 끼니가 없는 것도 나쁜 게 아니게 됩니다. 자녀가 성공하는 것도 실패하는 것도 좋음도 나쁨도 아니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귀족이라고 하는 것도 천민이라고 하는 것도 좋음도 나쁨도 아니게 됩니다. 이처럼 실제 삶에서 세상 사람들이 좋고 나쁨에 대해 갖고 있는 기준과 가치가 폭발하고 파괴되고 없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좋음으로 가득 차 있는 증거입니다.
이 상태가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내가 지금 돌에 맞아 죽어도 나쁨이 아니고 손해 볼 것도 없다.’라는 목표가 있습니까? ‘변화산 사건에서처럼 내가 산 아래 내려가서 얻을 좋음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기도하는 시간이 제일 좋다. 예수님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과 하나가 되는 그 시간이 제일 좋다.’라고 하는 기도의 생활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시고, 새벽 미명에 기도하시고, 사람을 피해 기도하시고, 이슬을 맞으며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조차 그렇게 하신 기도 생활의 진짜 의미를 깨달으며 믿음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 점검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믿음의 출발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알고 이론도 압니다. 그런데 삶의 현장에 나가면 하나님의 있음도 좋음도 주권자 되심도 내 의식에서 하나도 남지 않습니다. 오직 고깃덩어리를 원하는 삶을 삽니다. 삶은 고깃덩어리, 생 고깃덩어리를 얻겠다고, 하이에나처럼 육체의 먹을거리만 향합니다. 이렇게 육체로 느낄 수 있는 좋음만을 향해서 달려가는 삶이야말로 믿음의 출발점입니다. 여러분은 이 출발점에서 얼마나 벗어났습니까? 믿음의 목표와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여정의 출발점이 분명히 내 안에서 의식될 수 있어야 믿음의 진보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경이로운 하나님에 대한 한나의 경험이 우리의 경험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홉니와 비느하스의 경험은 이미 충분합니다. 너무 오랜 시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제는 적어도 이 출발점으로부터는 떨어져 나와 거리를 넓혀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