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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전도(지역을 중심으로)
“여러분들이 부처님께서 처음 설법하신 바라나시의 사르나트에서 구리가 장자의 부부처럼 삼귀의 오계를 받고 출가한 마음으로 성지순례를 시작한지 오늘로써 열하루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열흘 간 단기 출가를 했다고 볼 수 있죠. 그 열흘 동안 우리는 부처님께서 처음 설법하신 바라나시의 사르나트, 6년 고행하신 전정각산, 깨달음을 얻으신 보드가야, 일천 비구를 교화하신 우리벨라 가섭터, 가야 가섭을 교화한 가야산, 처음 사찰이 건립된 죽림정사, 왕사성, 영축산, 칠엽굴을 순례하고, 그리고 바이샬리의 진신사리탑과 원후봉밀터를, 그리고 께사르 스투파를 거쳐서 파바마을의 춘다 공양터, 쿠시나가라의 열반당, 부처님을 화장한 라마바르총, 그리고 네팔로 넘어 가서 부처님이 태어나신 룸비니, 29세까지 성장하신 카필라성, 그리고 석가족이 부처님을 영접한 쿠단과 꼴리족이 세운 랑그람 진신사리탑을 참배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인도로 와서 석가족이 세운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을, 그리고 천불화현탑을, 그리고 사위성의 기원정사를 참배하고, 오늘 이제 상카시아의 부처님이 하강한 곳의 탑을 참배함으로 해서 10대 성지순례를 마치고 3개의 진신사리탑까지 참배를 마쳤습니다.
☞카필라바스투-가야산-정전각산-보드가야☞카필라 바스투(룸비니,)
1)룸비니(부처님의 탄생)
부처님이 태어나시고 자라신 네팔 룸비니에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룸비니 대성 석가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새벽 4시30분 대웅전에서 새벽 예불을 드렸습니다. 욕심과 성냄을 내려놓고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오백여 대중이 모여 법륜 스님과 대성 석가사 총무 보현 스님과 함께 부처님이 태어나신 이곳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예불을 드리니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 룸비니 대성 석가사에서의 새벽 예불
아직은 캄캄한 새벽, 부처님의 고향인 카필라 성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천일결사기도를 올리니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고 편안해졌습니다.
고요한 새벽 들길을 달리는 버스 안, 차가운 기온으로 뿌옇게 흐려진 창을 연신 닦아내는 버스 조수와 먼 순례 여정을 함께하는 운전기사님의 노고에 깊이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윽고 버스는 안개가 자욱한 부처님의 고향 카필라성에 도착하였습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캄캄한 어둠을 뚫고 모두들 헤드 랜턴을 비추며 발을 딛고 가사를 여법하게 수하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카필라성의 서문으로 들어갔습니다. 경주의 반월성처럼 생긴 성터에 자리를 잡고 안아 순례단은 부처님께서 출가하시기 전의 삶에 대하여 스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은 부처님의 고국인 카필라바스투라는 나라이고요. 또 부처님의 고향 카필라성이기도 하고, 여러분들이 앉아 있는 이 터는 태자 궁터입니다. 부처님의 집터이죠. 부처님의 고향에 오셔서 부처님이 자란 터에 지금 앉아 있습니다.
정반왕은 40세가 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아이가 생겼기 때문에 그 기쁨이 너무 컸고 그래서 아들 이름을 싣다르타라고 지었습니다. 싣다르타는 ‘모든 것이 다 뜻대로 이루어지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히말라야 산에 사는 아시타 선인을 불러서 아이의 운명을 점치게 했습니다. 아시타 선인은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보더니 눈물을 흘립니다. 정반왕이 왜 그런가 하고 물었더니 “이 아이는 세속에 남아 있다면 왕들 중에 왕인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출가 수도를 하게 되면 부처를 이룰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가 혼란스럽다 보니 세상을 태평스럽게 하는 성왕이 출현하기를 기대하거나 전통 사상이 무너지고 사상이 혼란스러워지니까 모든 것을 깨달은 이 붓다의 출현을 기대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나 아시타 선인은 ”이 아이는 출가 사문이 되어 부처를 이룰 것입니다. 다만 내 나이가 너무 많아서 이 분의 가르침을 듣고 나도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해서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납니다” 라고 말합니다.
태자는 어느덧 자라서 12살이 되었고 왕이 되는 학습을 하기 위해 아버지를 따라 농경제에 참석했습니다. 농부가 밭갈이 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농부의 몰골이 너무 비참했습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고통스러울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농부가 쟁기질을 하면서 소를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그 채찍을 맞은 소의 엉덩이에 피가 맺혔습니다. 왜 사람은 조금 편리하기 위해서 저렇게 소를 고통스럽게 하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쟁기가 땅을 갈자 땅 속에서 작은 벌레들이 기어 나왔습니다. 새들이 날아와서 그 벌레들을 쪼아 먹고 있었습니다. 그 때 태자는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하나는 죽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께 사는 길은 없을까?’ 이런 큰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농경제에 참석하지 않고 염부수 나무 아래에 앉아 소의 큰 눈망울에 고인 눈물을 생각하면서 깊은 사색에 잠겼습니다. 정반왕은 농경제가 끝나고 아들을 찾았습니다. 아들이 나무 아래에서 명상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 모습이 너무나 거룩해서 자기도 모르게 절을 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 이후로 싣다르타 태자는 즐거움은 잠시 뿐이고 늘 농경제에서 본 중생의 고통이 생각나고 그러면 즐거움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또 사색에 잠기는 일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반왕은 아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많은 별궁을 짓고 연회를 베풀고 했지만 아들의 얼굴은 쉽게 밝아지지 않았습니다.
농경제 사건 이후 얼마 뒤에 세상에 나가서 민중들의 생활을 시찰했는데, 동쪽 문으로 나가서 늙은이를 만났고, 남쪽 문으로 나가서는 병든 이를 만났습니다. 서쪽 문으로 나가서 죽은 이를 만났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본질적인 문제를 말하기도 하지만 당시 계급 사회에서 민중의 고통을 가장 잘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싣다르타는 중생의 고통에 대해서 깊이 느끼게 되고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을 넘어서서 그 고통이 자신의 고통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출가가 인생이 뜻대로 안되어서 하는 것으로 많이들 생각하는데 경전을 읽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중생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출가를 했다는 그 원력이 경전 곳곳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출가를 사회 도피처럼 생각하는 이 이미지를 우리가 바꿔야 합니다. 출가는 큰 원을 세워 세상을 뛰어넘는 행위입니다.
북쪽 문으로 나갔을 때 수행자를 만났습니다. 거기에 한 수행자가 조용히 앉아 있는데 몰골은 늙고 병든 사람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두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습니다. 입고 입는 옷은 초라하고 몰골은 늙었지만 그의 품위는 너무나 당당했습니다. 그래서 싣다르타는 그 출가사문을 만나면서 모든 고뇌를 벗어날 새로운 길을 발견한 듯 했습니다. 즉 ‘껍데기의 모습은 거지와 똑같은데 인간이 어떻게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저렇게 품위있게 될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출가를 결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반왕은 혹시 자기가 오래 왕을 해서 아들이 왕이 되지 못해 그런가 해서 한 지역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태자가 그 지역에 갔을 때 역시 노예 계급은 헐떡 거리며 일을 하고 있고 소도 숨을 헐떡거리며 쟁기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을 잘 다스린다는 것은 소에게도 고통이고 노예에게도 고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소의 고삐를 풀어서 자연으로 돌려보내라, 그리고 노예 계급을 해방시켜라” 이렇게 명령을 내립니다. 이건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인류사에서 주인이 하인을 해방시킨 첫 번째 시도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세상을 아무리 잘 통치한다고 해도 그것은 계급 사회를 유지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이것은 싣다르타가 더욱더 세상에서는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없다고 느낀 계기가 돕니다. 즉 세상의 평화와 행복이라는 것이 어떤 특정 계층의 평화와 행복이지 또 다른 계층에는 큰 고통이고 속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는 불행해야 하는 그런 모순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더 이상 진리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출가를 굳건히 결심하고 부모에게 “늙고 병들고 죽지 않는 길이 있다면 나에게 알려 주십시오. 그러나 누구도 저에게 그 길에 대해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그 길을 찾아가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어머니의 눈물도 싣다르타의 출가를 말릴 수 없었습니다.
출가하는 그날 밤 새벽에 일어나서 아기가 마음에 걸려 문을 살짝 열어보니 부인이 아기를 품에 안고 자고 있었어요. 부인이 깰까 해서 그만두고 나와서 동쪽 문을 뛰어넘었다고 합니다. 왜 성을 뛰어넘었다고 말할까요? 우리 모두는 왕이 되는 것이 꿈이예요. 그런데 부처님은 왕의 지위가 주어졌는데도 그것을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왕궁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그래서 출가 수행자는 천하를 다 준다고 해도 눈도 깜짝하지 않는 자세여야 합니다. 그 때 출가할 때 ‘내가 깨달아서 일체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할 수 있는 그 좋은 법을 얻기 전까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이런 대결정심을 내고 출가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이곳에서 사셨던 29년 동안의 삶입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가 우리와는 더 가깝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이후의 붓다는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지만 젊은 시절의 붓다는 우리와 똑같이 고뇌하고 헤매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청년 싣다르타의 고뇌를 느껴보는 것은 소중한 의미가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시고, 대중과 함께 경전독송을 하고 명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다시한번 순례단에게 “오늘을 사는 우리 불자들이 부처님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지는 못하더라도 좀 검소하게 살아보자”고 하셨습니다. “적게 먹고, 옷을 검소하게 입고, 큰 집으로 자꾸 이사 가려고 하지 말고 좀 검소하게 살아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인류가 함께 행복해지는 것을 추구하자”고 덧붙이셨습니다.
그리고 이슬이 내린 새벽 카필라성에 앉아 청아한 무변심 법사님의 선창에 따라서 ‘싣다르타의 출가’ 노래를 따라 부르니 한국으로 돌아가면 헐떡거림과 욕심을 좀 내려놓고 더불어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유성출가를 하셨다는 동문으로 가 보았습니다. 원래는 이곳에서 ‘출가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데 이번에는 순례객이 너무 많아 그러지 못하고 잠시 둘러보기만 했습니다.
순례단 전체는 부처님처럼 동문을 뛰어넘지는 못하고, 북문 쪽으로 난 작은 개구멍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소년 싣다르타가 걸었을 논밭이 보이는 시골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탑터가 나타났는데 정반왕과 마야부인을 기린 탑이거나 싣다르타가 북문에서 수행자를 만난 것을 기념한 탑일 수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탑돌이를 하고 다시 돌아나왔습니다.
카필라성 주위 마을은 2600여년 전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이곳 사람들은 헐벗어 있었고 지나가는 순례객들을 향해 구걸의 눈빛을 간절히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순례지인 쿠단으로 향했습니다. 쿠단은 성도 후 6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부처님을 정반왕이 마중나온 곳으로 이를 기념한 탑이 있는 성지입니다. 스님께서는 성도 후 사위성에 부처님이 오셨다는 얘기를 들은 정반왕이 부처님께 사신을 보내 왕궁으로 초청하였지만 사신으로 간 사람들 모두 부처님을 친견 후 깨달음을 얻어 출가해 버려서 함흥차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 주셨습니다.
▲ 쿠단
그리고 석가족이 모두 깨달음을 얻었는데 유독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이가 정반왕이었다고 합니다. 정반왕에게 부처님은 오직 아들로만 보였기 때문에 그 집착심으로 인해 가장 가까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정반왕의 얘기를 듣고 나니 아무리 부처님과 가까워도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면 깨달음의 기회도 놓치게 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쿠단에 세워진 탑에는 옛날 당시 문양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순례객들은 문양을 직접 보고 만져보며 옛 숨결을 그대로 느껴보았습니다.
다시 대성 석가사로 돌아와서 점심 공양을 맛있게 먹고 룸비니로 걸어갔습니다. 울창한 숲길을 지나 긴 수로를 따라 1km 걸어가니 드디어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에 도착했습니다. 어여쁜 꽃이 피어있고, 아름드리 보리수가 있는 아름다운 이곳에서 부처님께 예불을 드리고, 스님께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순례단을 위해 발원을 해주셨습니다.
▲ 룸비니
그리고 부처님의 전생담을 기록한 본생경과 부처님의 탄생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룸비니 동산입니다. 아까 전에 갔던 카필라성과는 28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아이를 낳기 위해 아침 일찍 카필라성을 출발하여 마야 부인의 고향인 데바다하로 가다가 카필라성과 데바다하의 중간 쯤인 이곳에서 산기를 느끼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는 태어날 때도 길에서, 도를 이룬 것도 길에서, 설법도 길에서, 돌아가시는 것도 길에서,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전 생애가 ‘도(道)’와 관계가 깊습니다. (웃음)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 즉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의 과거 수행 이야기가 담긴 자아카타, 한문으로는 본생담이라는 경전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무려 547편이 남아 있습니다. 내용 전체를 대강 보면 부처님이 처음 발원해서 보디사트바가 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는 보살로 살아간 이야기이고, 마지막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이 과거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옛날에 선혜라는 이름의 한 동자로 태어나셨습니다. 고귀한 바라문 집안에 태어났지만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20대 초반에 모든 재산을 물려 받았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부모님이 지금의 재산을 모으기 위해 그렇게 많은 노력을 했는데 돌아가시면서 한푼도 못가져 가는 것을 보고 진정으로 자기 것이 아닌 재산과 명예와 지위에 한평생을 바친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를 깨달았어요. 그래서 그 많은 재산을 왕에게 주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숲속으로 가서 수행자가 됩니다.
스승을 찾아 나섰다가 오백 바라문이 모여서 진리를 논하는 자리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거기서 오백 바라문이 묻는 질문에는 선혜 동자가 다 대답을 하는데, 선혜 동자가 묻는 질문에는 오백 바라문이 아무도 대답을 못했어요. 그래서 오백 바라문 중에 한 사람이 “여기서 당신의 스승이 될 사람은 없소. 지금 이 세상에는 연등부처님이 출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분이라면 당신의 스승이 될 수도 있소” 라고 말하자, 선혜 동자는 연등부처님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연등부처님 근방에는 사람들이 구름때처럼 모여서 곁에 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친견을 못하고 교외로 나가니까 사람들이 길을 닦고 있었어요. 부처님이 이 길로 지나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선혜 동자도 길을 닦기로 했습니다. 신통력이 있었기 때문에 신통력으로 길을 닦을 수도 있었는데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몸으로 길을 닦았습니다. 그런데 연등부처님과 대중이 오는데 길을 다 못 닦았어요. 그래서 자기 옷을 벗어서 깔았어요. 그래도 모자라서 자기 몸을 뉘었어요. 그래도 모자라서 자기 머리를 풀어서 던졌어요. 그러면서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과 상가 대중이 저를 밟고 지나가십시오” 이렇게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신심이 깊구나. 이 인연 공덕으로 다음 생에 부처를 이루리라” 하셨어요.
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보디사트바가 되어서 어떤 때는 원숭이로, 어떤 때는 코끼리로 태어나서 행하는 수많은 보살행이 나옵니다. 그 끝부분에 해당된다고 생각되어지는 얘기가 도솔천의 천주인 호명 보살이 된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어지러우니까 세상 사람들이 붓다의 출현을 갈구하는데 그 붓다가 되실 예정자가 호명보살이예요. 그래서 호명보살이 저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며 누구를 아버지와 어머니로 할 것인지 살펴서 마야부인을 어머니로 정반왕을 아버지로 선택하셔서 이 세상에 몸을 나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상아가 여섯인 흰 코끼리가 되어 마야 부인의 태중에 드는 모습이죠. 이런 전생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듣고, 또 마야부인의 몸에서 태어난 이야기, 태어나서 동서남북 일곱 걸음을 걷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라고 첫 일성을 하신 이야기, 이것은 육도 윤회를 벗어나서 해탈하리란 것과 가장 존귀한 존재로서 중생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의미란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출현하신 이유를 들으니 참으로 부처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어서 부처님의 탄생의 과정이 쓰여져 있는 경전을 독송한 후 명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이 부처님의 탄생지라는 아쇼카 석주와 부처님의 발자국과 부처님 탄생 설화를 새겨놓은 건물 안 유적지를 둘러보았습니다.
유적지를 둘러보는 동안, 조별로 스님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무려 52조나 되다 보니 사진 촬영을 하는 데만 1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도 스님과 함께 사진 한 장을 남길 수 있다며 모두들 기뻐하면서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편안하고 안온한 룸비니 동산을 뒤로하고 다음 순례지인 로히니 강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로히니 강은 석가족의 카필라바스투와 마야부인의 고향인 꼴리족의 데바다하 사이를 흐르는 강입니다. 어느해 가뭄이 심해 석가족과 부처님의 외가족인 꼴리족이 서로 농사에 필요한 물을 얻기 위해 싸움이 시작되어 급기야는 로히니 강을 사이에 두고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갔다고 합니다. 이를 부처님께서 중재하셨던 일화가 있는 곳이여서 스님께서는 지나가는 길에 그 일화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 로히니 강
“로히니 강 분쟁 사건은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부처님이 이를 말린 사건입니다. 석가족과 꼴리족 양쪽 종족의 논밭이 가뭄이 들어서 타들어 갔어요. 이렇게 가다가는 농사를 다 망치게 되니까 한쪽만이라도 곡식을 살리자고 해서 서로 물을 가져가려고 입씨름을 하게 된 거예요. 입씨름을 하다가 결국 주먹 싸움이 되고 주먹 싸움이 서로 돌멩이를 집어 던지는 패싸움이 된 겁니다. 농민들의 분쟁이 결국 군대가 개입하면서 전쟁이 일어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의 살상을 막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분쟁의 현장에 오십니다.
양쪽 지도자를 불러놓고 물어봅니다. “물이 귀합니까? 사람의 피가 귀합니까?” 그러자 양쪽 지도자가 “어떻게 귀한 피를 하찮은 물에 비유합니까” 대답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그 하찮은 물을 위해서 그 소중한 피를 흘리려고 하지 않소” 라고 얘기합니다. 그 때 그들은 감정에 휩싸여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격화된 감정이 누그러지고 양 종족은 협력을 해서 수로를 새로 개발해 가뭄의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로히니 강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경전을 읽으면서 강이 얼마나 좁으면 서로 돌멩이를 던지며 싸우나 했는데, 정말 돌멩이 갖고 싸울만한 거리죠?
이렇게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두 부족은 전쟁을 멈추고 오히려 수로를 확충하는 쪽으로 힘을 모음으로 해서 더 발전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미움 있는 곳에서 미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미워할 일 없는 곳에서 미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미워할만한 일이 있는 곳에서 우리가 미워하지 않을 때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겠죠. 우리 남북 간에도 서로 미워하고 원망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 불자들이라면 미워할 만한 상황에서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한반도에서도 미워하는 증오의 감정을 종식시키는데 우리 불자들이 좀 더 앞장선다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가져오는데 더 기여를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버스 안에서 로히니강에 관한 경전을 읽었습니다. 하루 빨리 남북 대결이 청산되어 통일이 이루어져 남북한 국민들의 고통이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 버스 안에서 로히니 강에 관련된 일화가 담긴 경전 독송
다음은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랑그람을 참배했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자 진신사리는 8등분이 되어 각 나라에 모셔졌는데 그 중 부처님의 외가 쪽인 꼴리족이 사리를 가져와 세운 이 탑은 아쇼카 왕 때도 헐리지가 않았다고 합니다.
아직까지 원형이 잘 보존된 귀한 진신사리탑인데, 스님께서는 “이 곳은 성지 순례객 만 명 중에 한 명이 겨우 왔다 가는 곳입니다. 이곳에 온 것에 대해서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하며 이곳에 참배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인연인지 알려주시며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이곳은 라마 마을의 꼴리족이 부처님의 사리 일부를 가져가서 탑을 쌓은 곳입니다. 이곳이 더 소중한 이유는 아쇼카 왕이 사리탑을 헐어서 사리를 꺼내었는데 이곳만은 헐지를 못했다고 해요. 그것은 여기를 지키는 용왕이 ”당신이 나 보다 사리를 더 잘 지킬 수 있으면 모셔가라“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여기 주위가 빙 돌아가면서 강입니다. 호수 속에 탑을 쌓아놓은 것처럼 섬과 같이 딱 형성되어 있어요. 묘합니다. 이 탑을 헐려고 할 때 큰 뱀이 나타나지 않았겠느냐 싶어요. 인도에서는 뱀을 용왕이라고 해서 성스럽게 생각하거든요.
▲ 랑그람 진신사리탑
그 이후에도 동네 사람들의 얘기에 의하면 이 탑을 도굴하려고 하는 사람이 탑에 손을 대면 동네 사람들에 얘기에 의하면 천둥이 치거나 사람이 즉사하거나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해요. 그래서 여기는 손을 대면 안된다는 소문이 나서 이 탑은 도굴도 하지 못하고 심지어 발굴도 하지 못했다고 해요. 얼마 전에 발굴 했는데, 탑 자체에도 손을 안 대고 변두리만 파서 탑의 형이 어떻게 생겼는지만 확인했다고 해요. 그러니까 다른 탑은 다 발굴을 해서 사리를 꺼내었는데, 여기는 아직 발굴이 안되었으니 만약 발굴이 된다면 사리 용기에 부처님 몸의 유골 중에 8분의 1이 가득히 담겨 있겠죠. 그래서 8개의 사리탑 중에서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랑그람 진신사리탑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성지순례객들도 여기 와서 참배를 하고 가야 하는데, 이런 사리탑이 있는지도 모르는 분이 많아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여기 참배한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한국 불교인들을 대표해서 왔다고 생각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불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순례단은 진신사리탑을 빙 둘러싸고 정성스럽게 마련한 공양을 올리고 예불을 드리고, 108배 정진을 하였습니다.
이곳은 아이들이 거칠고 위험한 지역이여서 해가 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야 해서 108배 정진을 하는 동안 몇 분씩 자신이 정진하던 자리 앞으로 나와 탑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특히 랑그람 사리탑 앞에서는 이번 인도 성지순례 스탭들과 법사단도 스님과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오늘 마지막 순례 일정을 마치고 대성 석가사로 돌아왔습니다. 석가사에서 준비한 맛있는 공양을 도반들과 함께 나눠 먹으며 얼굴에 웃음꽃이 핍니다.
-바라나시
1)가야산
⟪“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이 가야산입니다. 우리 나라 역사에 가야라는 나라가 있죠. 그 이름이 여기 가야에서 온 말이예요. 가야시는 부처님 당시부터 있었던 아주 오래된 도시입니다. 이 산은 가야에 있다고 가야산이라고 불리었는데, 현재는 저 산꼭대기에 브라만 신을 모셔놓았기 때문에 ‘브람조니’라고 부르고 있어요. 그리고 멀리서 보면 꼭 코끼리 머리 같이 생겨서 한문으로는 ‘상두산’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그래서 경전을 읽을 때 상두산이라고 적혀있으면 가야산을 말하는 것이라고 아시면 돼요.
부처님이 카필라바스투에서 출가를 하셔서 왕사성으로 오셔서 두 분의 스승 아래에서 공부를 했고 그 스승의 경지에 이르렀는데도 그것은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내가 배울 사람은 없으니 그 다음 단계는 스스로 증득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시고 용맹정진하러 가야 쪽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이 산위에 올라가서 사방을 주욱 둘러보고 강의 동편 전정각산이 좋겠다 싶어 그곳으로 가서 6년 고행을 하셨습니다. 저 쪽을 한번 보세요. 저곳이 니련선하, 네이란자라강입니다. 저 네이란자라강 동편이 둥게스와리입니다. 둥게스와리는 부정한 곳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행하기에는 아주 좋아보이셨나봐요. 그곳으로 가서 거기서 6년간 용맹 정진을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이 가야산을 내려가면 이제 둥게스와리로 가게 됩니다.
경전의 기록에는 이 산 위에 올라가서 주위를 둘러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욕망을 쫓아서 그것을 충족시켜서 만족을 얻는 쾌락을 추구하고, 또 고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지금 고행을 하는, 이런 수행을 하고 있다고 보시고 진정으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탈을 구하기 위해서 정진하겠다는 결심을 이 산 위에서 하십니다.
그리고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뒤에 바라나시 녹야원에서 야사 등 60명을 교화하고 다시 이곳 가야 근교의 우루벨라 촌으로 오셔서 우루벨라 가섭, 나디 가섭, 가야 가섭 등 가섭 삼형제가 거느리고 있던 1000명의 제자들을 교화를 하게 됩니다. 그 1000명의 비구가 이 자리에 앉아서 부처님의 설법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500명이 앉아 있는데 저 뒤의 남아 있는 공간을 보니 1000명이 다 앉아질까요? 충분히 앉아지겠죠. 이제 증명이 되었어요. (웃음)
그리고 여기는 그 1000명의 제자들에게 불의 설법을 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마음 속에 질투심이 있고 탐진치 삼독이 있는 한 해탈을 못한다’, ‘외부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는 성불할 수 없다’ 고 하면서 부처님은 그들을 깨우쳐 주었어요. 그래서 불을 섬기는 제사 도구를 다 강물에 버리고 1000명의 제자들이 이 산에 모여서 부처님의 불의 설법을 들었어요. “너희들은 밖의 불은 껐다. 그러나 아직 마음 속에 있는 탐진치 삼독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부지런히 수행정진해서 마음 속에 있는 탐진치 삼독의 불을 꺼라” 하는 유명한 설법을 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자, 이제는 다시 차를 타고 부처님이 6년 고행을 하셨다는 저 강 건너 동편의 언덕 전정각산으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가야시에서 수자타아카데미가 있는 둥게스와리까지는 11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둥게스와리는 불가촉 천민이 주로 사는 지역이고 여러 가지로 환경이 매우 열악했습니다. 스님께서도 처음에는 이곳을 못 찾아 엉뚱한 마을에 가져갔던 옷가지 등을 나눠주고 오실 정도로 외진 지역인데, 오늘은 아주 잘 포장된 길을 만났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도로 사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며 몇 년 전 이곳에 근무했던 장영주 행자님은 무척 놀라워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구걸하며 따라 붙는 아이들에게 돈을 줘 보기도하고 이런 저런 시행착오를 거치시다가 아이들이 구걸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방법으로 학교를 지어야겠다고 결심하셨다고 합니다.
가야산에서 내려오는 길에도 구걸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산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끈질기게 따라오며 구걸하는 아이들을 보며 스님께서 왜 둥게스와리에 수자타아카데미를 세우셨는지 그 큰 뜻을 다시 헤아려 보기도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부처님께서 6년 간 고행하실 때의 얘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이 산을 경전에서는 상두산이라고 합니다. 산이 코끼리 머리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코끼리 상, 머리 두자 해서 상두산입니다. 이곳 현지에서는 가야산이라고 불리고요. 부처님은 출가 후 남쪽으로 내려오셔서 라즈기르, 지금의 라자그라하, 왕사성에 오셔서 두 분의 스승을 찾아서 수행하시고 그 스승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것이 완전한 해탈이 아님을 아시고 스승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 때 같이 수행하던 다섯 명의 도반들이 부처님과 함께 떠났어요. 그래서 부처님은 왕사성 서문으로 나오셔서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에 이르러서 먼저 이 산에 올라 주위를 쭉 둘러보셨대요. 사방을 쭉 둘러보니까 동쪽으로 네이란자라 강이 흐르고 있거든요. 그 강 건너편에 언덕이 있는데 거기가 수행하기가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그리로 건너가셨다 그래요.”
스님을 따라 2-30여 분을 올라 가야산 정상에 서니 보드가야 전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경전에 기록된 걸 보면 당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수행을 너무 게으르게 한다고 본 거 같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 나는 용맹정진해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리라!’ 이런 원을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고 그 적당한 장소로서는 강 건너편에 있는 지금의 마을인 ‘둥게스와리’ 우리 경전에는 쁘락보디힐 그러니까 전정각산이죠. 거기가 좋겠다고 보신 거 같습니다. 그곳은 계급이 낮은 가야 사람들이 죽으면 화장을 못하고 그냥 시체를 갖다 버린 곳입니다. 그 숲을 우리가 시타림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지금의 둥게스와리는 시타림입니다. 초전법륜지인 사르나트도 바라나시 사람들의 시타림이었어요. 그런 것처럼 강을 건너서 시체를 갖다 버리니까 일반인이 접근을 잘 안 하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조용해서 수행하기에 좋겠다고 생각하시면서 동편을 내다보고 저곳에 내가 가서 정진을 해야 되겠다는 원을 세우는 장면이 경전에 나옵니다.”
안개 때문에 시야가 좋지 않아서 네이란자라 강 건너편 까지는 보이지 않지만 그 장면을 떠올리니 마음이 비장해집니다.
“그리고 경전에 다시 이곳이 나오는데 부처님이 사르나트로 가셨다가 60명의 제자들에게 전법선언을 하시고 부처님 홀로 이곳으로 옵니다. 여기보다 남쪽으로 좀 내려가면 우루벨라에 가섭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수행을 하고 있었어요. 부처님께서 가섭 삼형제와 그의 제자 1000명을 교화하고 설법을 하셨는데 그 설법한 장소가 이 가야산입니다. 그때 설한 설법을 ‘불의 설법’이라고 해요. 불을 섬기던 가섭형제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불을 섬기던 이전의 모든 도구들을 강에 버리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부처님께서는 ‘너희들이 바깥의 불은 껐다. 그러나 마음속에 있는 탐진치 삼독의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이 삼독의 불을 꺼라’ 이런 설법이에요. 이 불의 설법을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산상수훈과 비교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가야산에서 내려와 버스를 타고 30여 분을 더 가서 수자타아카데미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하니 수자타아카데미 학생들이 320명이나 되는 순례단에게 일일이 꽃목걸이를 걸어주며 열렬히 환영해 줍니다. 이런 환영을 받을 자격이 있나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20여 년간 이렇게 되기까지의 공로를 생각하니 감사함과 더불어 이것이 인도인들의 환영하는 방식인가보다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둥게스와리는 부정한 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머무시고 깨달음을 얻음으로 해서 이곳이 가장 성스러운 곳이 되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불교 성지가 대부분 당시에는 부정한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땅에는 성스러움도 더러움도 없고, 결국은 사람이 부정하게 생각하면 부정한 것이 되고 성스럽게 생각하면 성스럽게 된다는 이런 의미입니다.” <!--[endif]-->
학교 내에 있는 전정각사에 들러 참배를 하고 부처님이 6년간 고행하셨던 전정각산으로 향했습니다. 올라가는 길에는 다른 성지와 마찬가지로 구걸하는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습니다. “제가 처음에 왔을 때 사진을 보면요, 전정각산 올라가는 길이 오솔길인데 양쪽에 빡빡하게 환영하는 인파처럼 그렇게 아이들이 앉아서 구걸을 했습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구걸의 행렬은 없어지지 않는데 이건 관광객이 오기 때문에 이 동네뿐만 아니라 이웃동네에서도 몰려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 걸식은 끝이 안 나는 것 같아요. 다만 우리가 수자타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못하도록 해서 이제 그 아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여기 계시는 아저씨 같은 경우는 동네 유지인데 멀쩡하신 분인데... 근데 처음엔 저도 이걸 굉장히 부정적으로 생각했는데 우리가 가게를 운영하듯이 이 사람들에게도 하나의 생계수단인 거죠? 근데 그걸 우리 생각을 가지고 무조건 하라 마라하기가 그렇죠.” <!--[endif]-->
산에 오르기 전 부처님께서 수행하셨다는 유영굴에서 이곳에서 설하신 경전을 독송하기 위해 둘러앉으니 전정각산이 병풍처럼 눈앞에 펼쳐집니다. 저 산에서 부처님은 6년간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고행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분은 이렇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끝간데까지 했는데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어요. 그때 어떤 것을 발견했느냐 하면, ‘욕망을 따라가는 것도 욕망을 억압하는 것도 근본원인은 욕망에 대한 작용이다.’ 그래서 그것을 발견하고 그분께서는 바로 다만 욕망인 줄 알아차릴 뿐이다. 다만 알아차리고 지켜볼 뿐이지 욕망을 따라가지도 않고 욕망을 억압하지도 않은 거예요. 이렇게 제3의 길을 발견하셨어요. 이것을 우리가 중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서쪽 네이란자라 강가로 가서 목욕을 하고 쓰러졌는데 수자타가 공양 올린 유미죽을 드시고 건강을 회복하여 정진을 해서 마침내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으신 거죠” <!--[endif]-->
스님을 따라 전정각산에 올랐습니다. 높지는 않지만 온통 삐죽삐죽한 바위로 된 험한 산능성이를 벌벌 떨면서 따라갔습니다. 스님은 치렁치렁한 가사를 입고 어찌 그리도 잘 가시는지 신기할 뿐입니다.
산에서 내려와 간단한 세면을 하고는 수자타아카데미에서 정성껏 준비해 주신 한국식 식사를 맛있게 했습니다. 식사 후에는 저녁예불을 하고 스님으로부터 수자타아카데미의 역사와 현황 및 과제 등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내일 모레가 수자타아카데미 20주년 기념일이라 학교에서는 한 달 전부터 준비에 분주했다고 합니다. 강의를 마치자 시간이 거의 10시가 되었습니다. 다들 많이 피곤한 것 같습니다.
2)정전각산
1)“이곳이 부처님이 6년간 고행하셨다고 하는 전정각산입니다. 저기 보이는 흰 건물에 제1유영굴이 있고요. 잠시 후 산에 올라가다보면 오른쪽에 제2유영굴이 있고요. 저 높은 봉우리 밑에 제3유영굴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곳에서 용맹정진을 하셨는데 대단한 결심을 하셨어요. 경전에 기록에 보면 음식도 나중에 가서는 하루에 대추 한알을 먹다가 3일에 한알을 먹다가 이렇게까지 했어요. 대추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마을에 가면 자연산으로 풍부한 것은 대추 밖에 없습니다. 제가 여기서 학교를 지을 때도 마을 사람들이 저에게 공양 올리는 것은 대추였어요. 아마 그래서 대추를 드신 것 같아요. 그래서 거의 야생동물처럼 사셨는데, 음식도 제대로 안 먹고 추위도 피하지 않고 더위도 피하지 않고 그렇게 고행을 했어요. 그렇게 극심한 고행을 해서 여러분들이 고행상에서 보듯이 뱃가죽이 등허리에 붙어 있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6년이나 했는데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수행을 다시 되돌아보았습니다. 욕구를 따라가는 것만 욕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욕구를 억압하는 것도 욕망에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정반대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욕구에 대응하는 거였어요. 이것을 발견하시자 밥을 안먹는다든지 잠을 안잔다든지 하는 극단적인 것이 해탈에 도움이 안된다고 보시고 그것을 버리셨어요. 욕구를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욕구를 참는 것도 아니고 욕구를 알아차리고 욕구를 지켜보는 제 3의 길인 ‘중도’를 발견하시고 이 산을 내려가셨어요.”
그리고 부처님의 고행 당시의 정황이 잘 기록된 경전을 함께 독송하고, 또 고행하시던 그 모습을 떠올리며 잠시 명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백명의 대중이 전정각산에서 명상하는 모습이 또한번 장관을 이루었습니다.
8호차부터 13호차까지는 산 중턱에 위치한 유영굴에 참배를 하고 곧바로 숙소로 돌아왔고, 1호차부터 7호차까지는 스님을 따라 전정각산의 능선 위로 올라 둥게스와리 마을 전체의 전경을 조망해보며 해질녘 풍경을 만끽하고 내려왔습니다.
2)새벽 5시, 성지순례단들의 성스러운 새벽예불이 수자타아카데미 교정의 어둠을 불 밝히듯 열어젖힙니다. 예불 후 6시 10분, 전정각산을 오르기 위해 지바카병원 정문에 모였습니다.
동쪽 전정각산 능선 너머엔 벌써 붉은 기운이 퍼져 있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는 오늘이 개교 20주년이라 곳곳이 분주함으로 들썩입니다.
순례단은 스님을 따라 전정각산으로 한걸음 한걸음 따라갑니다. 산 입구에서 스님은 돌이 많으니 “조심해서 천천히 따라 오세요”라고 일러 주십니다. <!--[endif]-->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네모난 웅덩이에 물이 고여 있는 곳으로 스님께서 내려가시며 “이 산에 유일하게 물이 고여 있는 곳으로 사람도 동물도 함께 먹고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는 웅덩이 위쪽 돌무덤 옆 작은 웅덩이를 가리키며 아마 이곳이 부처님께서 6년 고행하시며 드시던 물인 것 같다며 이곳을 ‘부처님 샘터’라 불린다 하셨습니다. 이곳에는 가시나무가 많은데 옷에 걸리면 가시가 꼭 움켜쥐고 있어 억지로 떼어내면 옷이 망가지니 살살 달래줘야 한다며 세심하게 일러 주십니다. 바위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에서 명상을 하며 쉬었다 가자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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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한 점 없어 춥지 않아 아마 부처님께서 이러한 곳에서 명상을 하셨을 것이라 하십니다. 우리는 스님의 안내에 따라 모두 명상을 했습니다. 마치 3천년 전 부처님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스님은 명상하는 순례자들을 보시며 “마치 새들이 앉아 있는 것 같네요” 하십니다.
정상에 도착하자, 이곳이 아쇼카 왕이 부처님의 고행을 기리기 위해 탑을 세웠다고 설명하시는데 어떤 것이 탑인지 참 궁금했습니다. 흔히 탑은 흙으로 봉긋하게 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보이는 건 돌무더기뿐입니다.
전정각산에는 6기의 탑이 세워졌는데 정부에서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도굴꾼에 의해 탑이 커다랗게 구멍이 파여 점점 훼손되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endif]-->
하산 후 바로 아침밥을 먹고 설성봉거사님 부도탑 앞에서 12주기 추모식을 가졌습니다. 설성봉거사는, 1998년 생업을 그만두시고 북한동포 돕기를 시작으로 정토회에 입문하여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을 해왔으며, 특히 서울과 부산, 대구, 대전의 정토법당 불사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인도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2002년, 수자타아카데미에서 기술학교를 운영하다 괴한에게 총을 맞아 돌아가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설거사님과 함께 활동한 이화승님이 ‘뭐든지 부탁만 하면 염소 눈처럼 작은 눈으로 빙긋이 웃으며 들어주던 거사님’을 떠올리며 추도문을 낭독할 때 참가자 모두 그분의 뜻이 꼭 이루어져 모두가 어우러져 사는 세상이 꼭 이루어지기를 기원하였습니다. 거사님의 희생이 지금은 이곳 수자타아카데미에 빛으로 돌아오셔서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이 된 것 같습니다. <!--[endif]-->
수자타 20주년 개교 기념행사를 하기 위해 아침부터 학교는 분주합니다.
스님께서는 행사 전,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주신 위말라야스님과 차담을 나누고, 학교에 오시는 내외빈들을 일일이 맞으셨습니다. 이제 스무 살이 된 수자타아카데미는 이 마을을 이끌어 갈 건장한 청년학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초대 손님도 3천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우선 인도 중앙정부 국회의원인 MP 하리만지, 보드가야 대탑 주지스님과 사무국장, 설성봉거사님 사건 때 많은 도움을 주신 위말라야 스님, 방글라데시 템플 주지스님 외 14분, 미얀마 템플 주지스님, INEB 사무국장, 지역 국회의원, 지역 공무원, 석가족의 초기 활동가와 수자타아카데미 초창기 교사, 성지순례단 320명, 수자타아카데미 부지를 기증하신 동네 주민, 그리고 수자타아카데미 학생 1000여 명, 가까운 동네 주민들이 아침 9시부터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습니다.
20주년 기념행사는 수자타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굵직한 행사를 거침없이, 분주하지만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며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 뭉클해지고 한 사람의 원이 이렇게 이루어져 가니 커다란 감동이 물 밀리듯 밀려옵니다.
고등학생은 초등학생의 선배 겸 선생님이 되어, 중학생은 유치원 선생님이 되어 배움과 가르침을 동시에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강당에 모여 있는 학생들이 떠들면 언니 오빠들이 조용하라 하니 금방 시끌시끌했던 행사장은 바로 조용해지곤 합니다.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들은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손님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바쁩니다.
수자타 교가와 환영가를 우렁차게 부르는 아이들의 모습이 밝고 힘찹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빠지지 않는 색동 한복 입고 추는 꼭두각시 춤, 인도 전통무용과 코끼리 춤, 태권도 공연의 실력은 대단했습니다. 인도 태권도 대회에 출전해서 금상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인기와 감동을 한꺼번에 받은 건 수자타아카데미 20년 퍼포먼스였습니다. 구걸로 하루를 살아가던 아이들이 <우리도 이제 공부하고 있어요>라고 하기까지 20년 역사는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스님이 이곳 마을에 쏟아부었던 사랑과 노고, 부처님의 자비가 무엇인지 아이들의 눈을 통해서 확인하니 나도 모르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주루룩 흐릅니다.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치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공연 또한 감동이었습니다. 저마다 숨어있는 이이들의 끼를 이끌어 내어 아이들 스스로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은 보는 이들의 감동을 자아냈습니다. 굶주린 이들은 먹어야 하고 아픈 아이들은 치료를 해야 하고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은 배워야 한다고 구호처럼 외치던 까닭을 알 것 같습니다. <!--[endif]-->
행사 막바지에 스님께서 무대에 오르시자 큰 박수가 쏟아집니다. 스님은 그동안 수자타아카데미가 있기까지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오늘 초대된 분들을 한분 한분 무대로 부르시어 소개하시고 일일이 감사의 선물을 드렸습니다. <!--[endif]-->
“수자타아카데미 20주년이 되기까지 이렇게 많은 이들의 후원과 노력에 감사드립니다. 처음 초등하교 7명으로 시작한 학교가 이제 마을마다 15개의 유치원이 들어섰고 1천 명의 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곳은 학교를 안 가는 아이가 없습니다. 20년 전에는 학교는 가면 안 되는 곳으로 알았던 것이 이제는 안 가면 안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모든 아이가 학교에 다닙니다. 이 아이들이 저의 보살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결핵으로 죽어 갔으나 이제 결핵으로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어린아이가 배고프거나 약이 없어 죽거나 산모가 죽는 일 또한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이곳에서 할 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지난 20년간 해온 것처럼 계속 해갈 것입니다. 이 아이들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 아이가 잘 자라 가정의 희망이 되고 지역의 희망이 되고 인디아의 희망이 되도록 우리 모두 아이들에게 협력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ndif]-->
개교 1주년 때 운동장 한쪽에 심은 보리수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수자타아카데미의 넓은 그늘이 되어주듯, 20년 전 한 수행자의 원은 이렇게 이루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endif]-->
행사가 끝나자 순례객도 학교에서 준비한 인도식 점심을 먹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수자타에게서 공양받은 유미죽과 뿌리, 달, 야채샐러드와 오렌지를 맛있게 먹고 오후에는 각 차량별로 수자타아카데미 인근 둥게스와리 마을을 둘러보러 가기로 하였습니다.
인도 JTS에서 마을개발 사업을 하는 곳으로, 아자드비가, 스리람푸르, 안투비가, 두르가푸르, 소라즈비가, 만코시힐, 아마르푸르, 자그디스푸르 마을입니다.
스님께서는 수자타아카데미가 있는 두루가푸르 마을로 갔습니다. 20년 전, 처음 스님께서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 둥게스와리에는 학교를 졸업한 단 2명이 있었는데 그중 한분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스님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집을 둘러보았습니다. 집이 비교적 깨끗하였는데,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10년 정도 선생님으로 봉사를 하고, 지금은 정부학교 교사로 근무를 하고 있다고 하니 더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이전에 사용했던 큰 우물이 있었습니다. 이 우물은 초기에는 턱이 없어서 오염된 물이 바로 들어와서 콜레라와 전염병의 온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물에 턱에 만들어 오염된 물이 우물 안으로 흘러들어가지 못하도록 우물을 개선하다가 차츰 핸드펌프를 설치하여 지금은 우물을 사용하지 않고 모두 핸드펌프로 깨끗한 물을 먹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현재 JTS는 15개 마을에 68개의 핸드펌프를 설치, 지원하고 있습니다. <!--[endif]-->
흙먼지가 펄펄 나는 길을 걸어가니 처음 이곳에서 학교를 지을 땅을 기증한 분이 스님께 오셔서 인사를 하셔서 스님께서 저희들에게 이 분을 소개시켜주셨습니다. 처음으로 땅을 기증하신 분이라고 하니 더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저희들이 기쁘게 박수를 쳤습니다.
이어서 유일하게 이곳 출신이면서 학교 선생님을 하신 분이 나오셔서 반갑게 인사를 하자 스님께서는 이 집에서 처음 머무르셨다고 하시면서 집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때의 집은 23년 전이라서 허물어지고 없고 그곳에 다시 새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스님께서 머물렀던 흙집을 사진으로 찍어서 흙담 벽에 스님 모습을 그려놓고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래된 사진이었으나 수자타 아카데미와 인도 JTS의 역사를 보는 듯하여 감격스러웠습니다. 스님께서 깜깜한 방에 염소를 키우고 한쪽 옆에 볏집을 깔아서 주무시던 일화를 설명해주셨는데 사실 실감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초창기 수자타 아카데미의 건물 1층 한 칸도 다 짓지 않은 상태에서 개원한 사진 등 오래된 사진을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가 보여주었는데 생생한 역사를 보는 듯하였습니다. <!--[endif]-->
이어서 다음 집으로 이동을 하였는데 이곳에서는 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셨습니다. 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이 비교적 잘 사는 듯하여 가보니 문만 같은 집이고 그 옆에 허물어가는 흙집의 한칸에 염소 한 마리 송아지 두 마리와 함께 할머니가 기거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할머니가 살고 있는 방이 스님께서 처음 머물렀던 집의 모습과 똑같다고 하였습니다. 2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여기는 이렇게 살고 있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창문 하나 없는 깜깜한 방에 송아지와 염소와 같이 사니 겨울에는 온기가 있어서 아마도 더 따뜻할 것 같다고 설명하십니다. 이곳에서 스님께서 선물을 드리고 또 다음집으로 이동을 해보았습니다.
이곳에서는 한 할머니가 남편도 자식도 다 먼저 보내고 손녀딸과 그 손녀딸의 자녀들과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곳 두르가푸르 마을의 극빈자 중의 극빈자인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아이가 5명인데 본인의 나이는 물론이거니와 아이들의 나이를 다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엄마가 정말 조그마하여 엄마의 나이를 가늠할 수도 없었는데 제일 큰 남자아이가 수자타아카데미 5학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아래에 딸아이에게 오빠랑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몇 년차로 태어났는지 등등 여러 가지를 물어보시고 이름도 물어보고 하면서 아무래도 10살 같다고 하면서 이제부터 10살이라고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주 어린동생들은 유치원에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이 여자아이도 수자타 아카데미의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정부학교로 가도록 하였는데 이곳에서 차별이 심하여서 학교를 중단하였다고 스님께서 설명해주셨습니다. 불가촉천민마을 아이들이 정부학교에 가도 차별이 심하니 중도에서 학교를 포기하고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있는 이곳 여자아이 2명에게 다시 학교에 오라고 스님께서 당부를 하고, 또 이곳 실무자들에게 정부학교에 갔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둔 아이들을 조사하여 다시 학교에 받아들이는 것을 고민해보라고 하였습니다. 집을 방문하니 집에 소똥말린 것들을 보관하고 천정의 한켠에도 소똥을 모아두었는데 소똥이 연료로 사용되니 재산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곳에서는 벽이나 나무에 소똥을 잘 펴서 발라서 말리고 있는 장면을 쉽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집으로 이동을 하였습니다. 이곳에서는 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시는데 할머니는 먼 친척집의 처마에 벽을 세워서 처마와 벽사이가 이 할머니가 기거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방이 아니기 때문에 바람이 그대로 다 통하는데도 옷도 이불도 변변히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님께서 왜 구걸을 하지 않느냐고 하니 너무 늙어서 구걸도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스님께서 담요를 가져다주겠다고 하니 따라 나오시면서 쌀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쌀과 담요를 주시겠다고 하면서 실무자에게 쌀과 담요를 할머님께 전달하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나오자 할머니의 두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도 참 많이 먹먹해집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유럽에서 보내는 적은 돈의 후원금들이 이분들에게는 아주 소중한 담요와 쌀과 식수로 돌아가는 것을 현장체험 하듯이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마을을 천천히 돌아보니 나오니 아이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와서 손을 잡습니다. 그렇게 2시간 30여분 마을을 둘러보고 숙소인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endif]-->
학교에 돌아와서도 스님은 오늘 행사로 멀리 상카시아에서 찾아오신 석가족 청년 활동가들과 차담을 나누셨습니다.
저녁에는 전체 순례단이 모두 모여 마을을 다녀온 소감을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3)보드가야
1)안녕하세요. 오늘은 인도성지순례 5일째, 둥게스와리에서의 첫 새벽을 맞았습니다.
아직 어두운 이른 새벽, 가사를 수한 500명 대중이 수자타아카데미 쁘락보디홀 강당에 모여 부처님께 예불을 올리니 정말 출가수행자가 된 듯 결연합니다. 예불을 마치고 운동장에서 보온병에 따뜻한 물과 아침 도시락을 받아들고 8km 떨어진 보드가야로 향한 순례길에 올랐습니다. 욕망을 좇아가는 것도 억압하는 것도 모두 욕망에 매여 있는 것임을 깨달은 부처님이 6년간의 고행을 끝내고 전정각산에서 하산해 강에서 목욕을 하고 쓰러져 수자타의 유미죽으로 건강을 회복한 뒤 보드가야로 가서 성도에 이르신 여정을 따라가 보는 것입니다.
고행을 마치고 부처님이 건너셨다는 네이란자라강을 건너며
인도는 지금 건기로 네이란자라강이 대부분 모래바닥을 드러냈지만 강물이 얕게 흐르는 곳에 다다른 스님께서 징검다리를 찾아 날아다니듯 훌쩍 건너셨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건너기가 어려워 스님께서 “신발 벗고 맨발로 건너오세요” 라고 하셔서 일제히 맨발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두발로 젖은 모래바닥의 시린 기운을 전해 받으니 정신이 또렷해집니다.
스님께서는 “네이란자라 강에서 목욕을 하면 천국에 이른다”면서 “우리는 발만 담그고 건넜으니 그 발만 천국에 가겠다”는 우스개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전정각산을 내려와 강 건너편 쪽에서 목욕을 하셨다고 하는데, 스님은 “건기에는 강 건너편 쪽에만 강물이 흐르기 때문에 경전내용이 실제와 꼭 맞다”고 하셨습니다. 강 너머 마을로 들어서니 부지런한 마을 주민들이 새벽부터 군데군데 불을 피우고 몸을 덥히고 있었습니다.
마을을 지나면서 부처님이 네이란자라 강에서 목욕하시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고 하는 곳에 세워진 탑터를 지났습니다. 탑이 모두 허물어져 있고 쓰레기만 쌓여 있었습니다. 스님께서 설명을 해주셔서 알 수 있었지 자칫하면 지나칠 뻔 했습니다. 부처님의 유적지가 보존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매우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부처님이 목욕을 하시다가 쓰러지신 곳에 세워진 탑터
스님은 부처님 성도 직전 유미죽을 올린 수자타의 공양이 왜 불교 최고의 공덕인지에 대해서 들려주셨습니다. “수자타는 부처님인 줄 알지 못하고 배고파 쓰러진 수행자에게 유미죽을 끓여 보시했기 때문에 그 공덕이 매우 크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인 줄 알면 너도나도 대접하려 했기 때문”이라면서 걸인에 대한 적선과 수자타 아카데미를 세우게 된 배경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인도의 구걸하는 아이들에 대해 주어도 문제이고 주지 않아도 문제였는데, 이 아이들이 거지가 되지도 않게 하면서 진정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고민하시다가 수자타아카데미를 세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자타의 공양처럼 이들 중 부처가 있을지 어찌 아느냐” 하며 웃으셨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도 도와준다는 개념보다는 버려진 아이들을 부처님께 공양하듯이 하자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라 합니다.
수자타 탬플을 지나 강변에 있는 우루벨라 가섭의 수행터로 갔습니다. 우르벨라 가섭의 수행터에 이르자 스님은 웃으시며 “500명 제자가 정말 함께 수행을 하였는지 확인해 보자”며 들어가십니다. 당시 우르벨라 가섭은 80세로 이 지역에 명망이 있는 지도자였기에 35살 부처님은 풋내기에 불과하였을 것입니다. 우르벨라 가섭을 교화하기 위해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하는 부처님께 머물 곳이 없다며 거절을 하자, 부처님은 “어떤 자리도 좋습니다”고 하셨습니다. 우르벨라 가섭은 부처님을 ?아낼 심산으로 “화룡(코브라 뱀)이 있는 곳 밖에 없다”고 해서 부처님은 화룡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우르벨라 가섭은 ‘좋은 수행자를 잃었구나’라며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무사히 자고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우루벨라 가섭을 교화하기 위해 360번의 신통력 내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루벨라 가섭은 젊은 수행자가 훌륭하지만 그래도 나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해서 쉽게 교화되지 않았습니다.
2)새벽 5시, 새벽예불을 마치자마자 수자타아카데미에서 밤새 만들어준 주먹밥을 받고 길을 떠납니다. 안개가 자욱한 칠흙 같은 어둠 속에 서로가 빛이 되어가며 부처님이 가셨을 그 길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오늘은 버스로 가는 게 아니라 도보 순례입니다. 부처님께서 네이란자라 강변에서 쓰러져 수자타의 공양을 받은 수자타마을, 우루벨라 가섭과 500명을 교화한 곳, 그리고 부처님의 성도지 보드가야 대탑입니다.
건기로 인해 바짝 마른 네이란자라 강 모랫길을 앞서 가는 도반의 발자국과 작은 후레쉬 불에 의지하며 45년을 길에서만 교화하시며 법을 전하신 부처님 당시를 상상해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니련선하 강 모랫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긴 순례단을 보니 1250명의 제자와 함께하는 부처님의 교화행렬과 지금 이 길을 가는 이들이 함께 오버랩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임이 자랑스러워집니다.
둥게스와리 마을의 골목골목을 지나고 논밭 길을 지나는 여정이 색다르게 느껴지는 건 저만의 생각일까요? 날이 희뿌옇게 밝아올 무렵 인도 JTS에서 건립 중인 명상센터 예정지에 도착하여 주먹밥으로 아침식사를 하면서 언젠가는 부처님께서 수행하신 이곳 명상센터에서 인도 불교의 부흥을 위해 일하리라 발원해봅니다.
“부처님께서는 네이란자라 강 건너 전정각산의 고행림에서 6년간 수행을 하시다가 중도를 발견하고 산에서 내려오시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출가 이전의 생활이 욕망의 충족으로 얻어지는 쾌락을 맛보며 지내왔다면 출가 후는 욕망을 억제하는 것으로 그것 또한 욕망의 반응으로 살아오심을 알고 이 마저도 버리고 욕망을 다만 알아차리고 지켜보는 중도를 발견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게 됩니다. 네이란자라 강을 건너 목욕을 하다가 쓰러지셨는데 마침 소젖을 짜서 돌아오던 촌장의 딸 수자타가 이를 발견하고 우유에 쌀을 넣은 죽을 공양 올린 자리가 바로 이곳입니다. 그 자리를 기념하여 아쇼카 왕이 탑을 쌓았던 곳입니다. 그 죽을 드신 부처님은 그래서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쌓은 탑터 주위에 수자타 템플이 세워졌지만 현재는 힌두교 절로 남아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부처님의 성도 직전 올린 수자타의 공양이 왜 불교 최고의 공양인지를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수자타의 공양이 중요한 것은 부처님을 위대하게 한 게 아니라 수자타를 위대하게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인 줄 알고 공양을 올리는 건 쉬운 일이지만, 그냥 길거리에 쓰러져가는 수행자를 정성스럽게 간호했는데 그 사람이 부처가 됐다는 것은 이 세상의 가장 천하고 작고 낮은 자가 부처가 됐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 세상의 가장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바로 나에게 하는 것과 같다는 예수님의 말씀과도 통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수자타의 공양이며, 수자타의 공양이 칭송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둥게스와리의 학교를 ‘수자타아카데미’라고 이름붙인 이유도 어쩌면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수자타의 후예일 것이고, 많은 순례자나 부처님마저도 그들의 공양을 받은 분들이 아닐까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 공덕으로 우리들에게 불법이 전해졌고, 법을 받은 우리가 이곳에 와서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가 있으며, 수자타가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에게 공양 올려서 살려서 붓다를 만들었듯이 우리도 버려진 아이들을 부처님을 공양하듯이 하자는 것입니다. 도와준다는 개념보다는 공양 올린다는 개념에서 수타타아카데미라 이름하였습니다.”
네이란자나 강은 두 갈래로 나뉘어 흐르는데 왼쪽을 모하나 강, 오른쪽을 네이란자나 강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우루벨라 마을은 이 두 강 사이에 있으며 우루벨라 가섭이 500명의 제자와 함께 수행하던 곳은 지금의 모하나 강변에 있습니다. 이들은 불을 피워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불을 숭배하는 집단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60명의 제자들을 모아놓고 ‘모두 전도의 길을 떠나라’ 하고는 당신도 우루벨라로 가서 교화하겠다고 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곳에 도착하여 부처님은 우루벨라 가섭에게 ‘하룻밤 재워달라’고 했으나 여기는 잘 장소가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어디든지 좋다’고 했어요. 여기서 어디든지 좋다고 한 것은 네 맘대로 해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루벨라 가섭은 ‘남은 장소는 독룡이 있는 굴밖에 없다’면서 그곳으로 안내하며 내심 ‘오늘 젊은 수행자가 한 명 죽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아침이 되자 죽은 줄 알았던 부처님이 멀쩡하게 나오는 것을 보고 우루벨라 가섭이 이 젊은 수행자가 보통이 아님을 알았지만 그래도 자기의 신통보다는 못하다고 여기고 360가지의 신통으로 내기를 했다고 해요. 그만큼 우루벨라 가섭을 교화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독룡이 살았다는 굴은 우루벨라 가섭이 이후 부처님 제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코브라를 조각해 놓고 힌두교 사원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우루벨라 가섭의 교화를 보면서 지식이나 재주를 많이 가진 이는 그만큼 법을 만나기 쉽지 않으며, 바꾸어 말하면 전법이 쉽지 않다는 의미이니 온갖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 역시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 부처님께서 이미 그 길을 일러주셨으니 그분이 가신 길만 따라가면 되니 이 또한 감사할 뿐입니다.
논과 밭이 어우러진 둑길을 지나는 긴 행렬, 이른 새벽의 도보순례여서 몸은 무겁지만 마음만은 한결 가벼워집니다. 마을과 밀밭을 지나 부처님께 공양올린 수자타의 집터에 이르렀습니다. 수자타의 공덕을 기려 큰 탑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드디어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곳, 보드가야의 대탑에 도착했습니다. 순례단 일부는 부처님께 올릴 공양물을 준비하여 앞서 나가고 나머지 일행은 가사를 수하고 긴 행렬을 이루어 대탑에 이르렀습니다. 얼마 전 티벳 승려들의 참배시 대탑에서 폭발사고가 있어 검문이 좀 삼엄합니다. 우리는 대탑을 돌며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고 탑의 4면을 빙 둘러 에워싸고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공양과 사시예불을 올렸습니다.
참배객이 많아 오래 머물 수 없어 명상원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스님으로부터 보드가야 성지에 대한 설명에 이어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설하신 경전을 다함께 합송하였습니다.
“우리는 흔히들 보드가야 하면 부처님께서 깨달은 곳으로만 알고 있지만 이곳은 부처님의 수행, 성도, 교화를 함께 하신 중요한 곳입니다.
특히 부처님의 전법 교화에 있어 중요한 곳입니다. 초전법륜지인 사르나트에서는 60명을 교화한 데 비해 이곳 우루벨라에서는 1천 명을 교화하셨습니다. 그것도 일반인이 아닌 수행자 집단의 교화를 통해 당시 대국인 마가다국의 왕을 교화하는데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가섭 3형제와 함께 왕사성으로 갔기 때문에 빔비사라 왕을 쉽게 교화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부처님께서 6년간 고행하신 전정각산과 부처님께서 사르나트에서의 전법선언 후 대규모로 교화를 하신 우루벨라도 모두 보드가야를 중심으로 위치해 있습니다.
순례 일행은 차량별로 나뉘어 법사님의 인솔아래 찬찬히 보드가야 대탑을 다시 참배하고 개인별로 기도명상을 하며 짧지만 성도지에서의 시간을 알차게 보냈습니다.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부처님 성지순례는 마을마다 다니면서 나이 드신 분들에게 불교 성지에 대한 전설이나 구술을 받아 성지순례지도를 새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인도 성지에 대한 자료는 대부분 일본에서 정리한 것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불확실한 부분도 있고 해서, 그래서 앞으로 인도와 한국 청년 108명과 함께 한 달 정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그 일을 마음껏 해보고 싶어요. 인도가 산업화가 되면 전설이나 구술이 모두 없어지기 때문에 그 전에 해야 하는데 언제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그러자 여기저기 청년 아닌 어른들도 함께 하고 싶다며 아우성입니다. 대중의 요청대로 우리 손으로 부처님 성지를 다시 쓰는 그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순례 일정이 진행될수록 스님의 성지에 대한 애정과 한 인간으로서의 부처님에 대한 재조명, 그리고 그 법에 대한 귀의도에 머리가 저절로 숙여집니다.
“우리의 삶은 늘 한계를 지닌 존재라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동시에 이 한계를 넘어서는 가능성을 열어줘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부정해도 안 되고, 한계 속에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인간에게 희망이 생기는 겁니다.
여기서 부처님이 성도하심은 인간이 가진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 희망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를 두고 어떤 분은 우주가 한 번 생기는 거보다 더 귀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죽지 않고 영원하다는 데 희망이 있는 게 아니라 이 한계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붓다께서 열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순례에서 이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나이, 직업, 남녀, 지위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존재임을 자각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희망적인가. 비록 눈물을 흘리지만 이에 젖지 않고, 슬픔을 느끼지만 빠지지 않고, 화를 내고 괴로움에 몸부림치지만 이에 메이지 않고 일어서서 도전하고 나아갈 수 있는 거, 죽음이 다가올 때 호흡기를 끼고 몸부림 치기보다는 때가 되면 미소 띠고 죽을 수 있는 삶, 이런 삶을 가지면 좀더 복되지 않은가. 부처님 법을 만났으면 지위, 학벌, 남녀, 더 나아가 성격이나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은가.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루를 살더라도 자기 자신을 만끽하고 자기가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세상에 유용하게 쓰이고 생을 마칠 수 있으면 복되지 않은가.
이것이 부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피가 아닐까. 이보다 더 큰 선물을 우리가 이 세상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우리가 부다가야 대탑에서 붓다가 되는 것을, 단순히 능력적인 면에서 보지 말고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을 다시 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 우루벨라 가섭의 수행터
어느날 성대한 제사를 지낸 후 부처님께 “당신이 보았으면 좋았는데” 하면서 자랑하던 우르벨라 가섭에게 부처님은 “마음 속에 질투심이 있으면 해탈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하니 우르벨라 가섭은 자신의 질투심을 알아차리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500명의 제자들도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된 후 지금까지 사용하던 제사 용구를 모두 물에 던져버렸습니다. 물에 떠내려 오는 형님의 제사 용구를 보고 형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염려하여 쫓아온 동생 나디 가섭은 형님의 말을 듣고 300명 제자와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고, 막내 동생 가야 가섭 역시 200명의 제자와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설명을 들으며 화룡(코브라) 굴을 바라보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 부처님이 우루벨라 가섭을 교화하기 위해 하룻밤 머무셨다는 화룡굴
우루벨라 가섭의 수행터를 지나자 밀밭이 펼쳐졌습니다. 수자타 마을은 땅이 비옥해 논밭이 많았습니다. 물안개가 가득한 논두렁길 위를 오백대중이 묵묵히 한줄로 걸으니 다시한번 장관이 펼쳐집니다.
▲ 논두렁길 위를 오백 대중이 함께 걸으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자타의 집이였던 곳에 세워진 수자타의 탑을 참배했습니다. 탑을 한바퀴 돌면서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보드가야로 향했습니다.
▲ 수자타의 집터에 세워진 탑.
4시간을 걸어 발바닥과 종아리와 어깨가 아플 무렵 보드가야 대탑에 도착했습니다. 오백 대중은 일제히 가사를 수하고 향을 든 채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입장을 하였습니다.
행렬의 선봉에 스님께서 서시고 그 뒤에 정성껏 준비한 공양물과 향을 부처님께 공양올리고, 다시 대탑을 돌아 부처님이 성도하신 보리수 나무 그늘 넓은 터에 이르러 예불을 올렸습니다.
인도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방문객들도 모두 스님과 정토회 순례단의 예불 모습에 관심을 집중하였습니다.
▲ 부처님이 앉으셔서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예불을 올립니다.
보드가야 대탑은 부처님이 성도하신 자리에 아쇼카 왕이 세운 불탑으로 ‘마하보디 수투파’라고도 합니다. 불교가 쇠퇴하자 힌두절이 되었는데 미얀마 왕이 거금을 주고 관리 권한을 얻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예불을 마치고 스님께서는 순례단 전체를 위해 축원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있었던 부처님의 행적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이곳은 강변이였어요. 부처님께서는 강변의 큰 보리수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으셔서 이곳에서 마지막 정진을 해야되겠다고 결심을 하십니다. ‘내가 깨닫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 즉 죽어도 좋다는 결심을 합니다. 이것을 대결정심이라고 합니다. 그러고나서 49일만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49일 동안 용맹 정진을 하셨으니까 적어도 49일은 음식을 전혀 안드셨던 것입니다. 기록을 보면 깨달음을 얻기 직전의 마지막날 밤에 욕계의 맨 꼭대기에 있는 타화자재천궁이 흔들흔들 했어요. 그래서 자재천왕이 저 인간세상을 둘러보니까 한 미미한 인간이 모든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경지에 이른 겁니다. 그래서 마왕의 세 딸을 보내서 욕망으로 유혹을 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잘 채색된 항아리에 똥만 가득한 것들아“ 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락’이 곧 ‘고’임을 아신 것입니다. 고만 고가 아니라 락도 곧 고임을 꿰뚫어 아신 겁니다. 부처님의 손끝이 마왕의 세 딸에게 향하자 세 딸은 노파로 변해서 부끄러워 도망을 가버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무런 미동이 없자 두번째는 마왕이 일만 군대를 보내서 부처님을 공격하도록 했습니다. 곧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해서 수행을 포기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무런 두려움이나 미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모든 창과 화살이 부처님 몸에 닿자 다 연꽃이 되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마왕은 부처님을 항복시킬 수 없다고 느끼고 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이 수행을 포기하면 자재천왕의 자리를 주겠다. 그러니 그만두면 어떻겠느냐?”고 합니다. 저 같으면 아무래도 받았을 것 같아요. 왜 그럴까요? 자재천왕의 자리를 저한테 주면 통일을 금방 이루게 되겠지요? 성평등도 금방 실현되고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될테니까요. (웃음)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나는 아무 것도 바라는 바가 없다” 이렇게 말했어요. 이렇게 했기 때문에 더 이상 붓다의 수행을 멈추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자재천왕이 붓다에게 “해탈이나 열반이란 것은 그런 말만 있지 실제로는 그런 경지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것은 너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다. 나는 너와 비교할 수 없는 한없는 공덕을 쌓았다”고 말합니다. 자재천왕이 이를 비웃자 부처님께서 “대지의 신이여, 나의 모든 공덕을 증명하라”고 하니까 대지의 신이 일어나서 붓다가 과거 생애에 한량없이 지었던 수많은 공덕을 찬양합니다. 그러니 마왕이 부끄러워 도망갔습니다. 이것을 표현한 것이 수하항마상입니다.
마왕을 항복받고 새벽녘 동쪽에 샛별이 뜰 때 붓다께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깨달음을 얻고 바로 그 자리에서 일주일 간 깨달음의 즐거움을 만끽했다고 해요. 그리고 장소를 조금 옮겨서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 나무를 응시하면서 일주일 간 선정에 들었습니다. 세 번째 주에는 보리수 나무 주위를 천천히 행선하면서 열아홉 발자욱을 왕복하며 걸었습니다. 이 대탑의 북편으로 가면 부처님이 걸었다는 곳에 연꽃 표시를 해두었습니다. 네 번째 주에는 부처님 몸에서 광명이 났다고 해요. 그리고 대탑의 동편 정문 앞에 계실 때 어떤 바라문이 지나가면서 “이 세상에 가장 고귀한 것이 무엇이냐?” 라고 묻습니다. 원래 정답이 있는 질문이였어요. 가장 고귀한 것은 어머니 아버지의 윗대로 7대까지 브라만의 피만 섞여야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청정한 자가 가장 성스러원 자이다” 라고 합니다. 그 바라문이 자기 생각과 틀리니까 “흥” 하고 콧방귀를 끼고 지나가버렸다고 해요. 자신의 고정관념 때문에 붓다를 친견하지 못한 거죠. 여섯째 주에는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어요. 이 전체가 물바다가 되었는데 그 때 문차린다 용왕이 나타나서 부처님을 감싸서 비를 맞지 않게 보호했다고 합니다. 일곱째 주에는 두 상인이 지나가면서 수행자에게 공양을 올리면 복을 받는다고 해서 두 상인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어요. 그런데 그들은 부처님께 공양만 올렸지 법을 청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복은 받았지만 해탈은 얻지 못했습니다.
바라문처럼 종교인이거나 지식인은 고정관념이 많아서 법을 듣지 못했고, 사업가들은 돈 버는데만 사로잡혀서 복을 구하느라 법을 듣지 못했습니다. 또 강가강을 건널 때 가난한 뱃사공은 먹고 사는 데 급급해서 법을 듣지 못하게 됩니다. 어쨌든 성도 후 7주간 있었던 이야기를 법사님들이 다 안내해 드릴테니 한번 둘러보세요.
그러니까 49일 동안 법열을 느끼는 시간을 갖고 상인으로부터 공양을 받은 이야기가 나오니까 최대한 98일 동안 밥을 안 먹었다고 볼 수 있죠. 일곱째 주의 첫 번째날에 상인으로부터 공양을 받았다면 적어도 91일 동안 공양을 안드신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우리가 단식을 해도 적어도 언제까지는 가능하겠습니까? 석달은 가능합니다. 그래서 스님이 석달을 해보려고 했는데 옆에서 말리는 바람에 70일까지는 단식을 해봤었어요. 20일만 더 해봤으면 죽는지 사는지 점검을 해볼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웃음)
부처님이 6년 고행하시고 파리한 몸으로 바로 성도하시면 이 고행이 성도의 원인이라고 오해를 하겠죠. 그래서 건강을 회복하시고 성도를 하신 겁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여기서 경전독송을 하겠습니다.”
이어서 당시의 부처님 행적이 담긴 경전을 함께 독송했습니다.
▲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경전 독송
그리고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부처님을 생각하며 명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상상을 하니 말할 수 없는 감동과 전율이 밀려왔습니다.
명상을 마치고 그룹별로 법사님들의 안내를 받으며 대탑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성도 후 부처님께서 머무셨던 장소들을 둘러보고 벽화에 관한 설명도 들었습니다. 다시 대탑 앞으로 돌아와 부처님의 수행과 성도, 교화활동에 깊은 감사를 표하며 각자 108배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보드가야 대탑에는 오체투지를 하는 티벳 불교도인들이 많았고 사람들마다 절하는 방식도 다양해서 전세계의 불교도인들이 모였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 청년들에게 무차린다 용왕과 부처님의 일화를 설명해 주고 계신 유수 스님
▲ 대탑 주위에 그려진 조각들에 대해 설명해 주시는 보수 법사님
그리고 대탑을 배경으로 스님과 함께 차량별로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모두들 성지에서 스님의 법문을 듣고 정진을 할 수 있었음에 기쁜 마음이 되어 활짝 웃을 수 있었습니다.
▲ 차량별로 스님과 함께 단체사진. 공양물을 올린 13호 차량의 순례단과 함께.
순례단은 보드가야 대탑에서의 일정을 마쳤습니다.
2.바라나시(녹야원:초전법륜): 5비구(수행자)+야사등(재가신도)=60명 교화
다섯 비구와 야사 등 60명의 대중을 사르나트에서 교화하고 전법선언을 하신 후 가섭 형제를 교화하기 위해 다시 우루벨라 마을로 향하신 그 길을 따라 갑니다. 바라나시에서 가야까지 부처님이 전법을 위해 걸어가셨던 그 마음을 느껴보며 무려 250km에 달하는 머나먼 길을 버스를 타고 7시간 동안 달려가 봅니다.
인도는 6월 말에서 9,10월까지는 우기이고 나머지 계절은 건기라고 합니다.
☞바라나시(강가강,사르나트)
1)강가강
바라나시 근교의 무갈사라이 역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강가강을 성스럽게 생각하는 힌두교인들의 문화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강가강에서 목욕을 하면 업이 사라진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부처님께서 “만약 그렇다면 강가강에 살고 있는 물고기가 가장 먼저 해탈할 것”이라는 비유를 들려주어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워준 일화를 들려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강 반대편에 보이는 모래벌이 우기가 되면 다 물에 잠긴다고 설명해 주셨는데, 정말 바다처럼 보일 것 같았습니다. 왜 인도 사람들이 고통 받는 세상에서 희망의 세상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강을 건넌다는 표현으로 사용했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배를 타고 화장장이 있는 곳으로 가보았습니다. 아침 일찍이여서 그런지 화장이 이뤄지는 모습은 보지 못했고, 대신 시체가 거의 다 타고 시신을 둘러쌌던 노란색, 황금색 천들이 연기가 자욱한 장작 더미 위로 흩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호화로운 왕궁에서 사셨던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는 시체를 둘러쌌던 저 노란색 황금색 천을 입고 평생을 사셨다는 말씀을 들으니 고개가 절로 숙여졌습니다. 스님께서 “화장장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돌아가신 영가의 왕생극락을 위해 해탈주를 하자”고 하셔서 배 위에서 다함께 해탈주 삼독을 하였습니다. 순례객들 중에는 나뭇잎 위에 꽃잎과 촛불을 담아 강 위에 띄우며 소원을 비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2)사르나트
사르나트는 부처님께서 다섯 비구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하셨던 곳입니다. 불교인들에게는 참으로 역사적인 장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 있었고, 설한 법이 있었고, 법을 전해받은 다섯 비구가 있었기에 그 법이 26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우리에게 법이 전해진 것입니다.
사르나트에 도착한 500여명의 순례단은 성지 입구에서부터 맨 앞에 서 계신 스님을 따라 2줄씩 줄을 맞춰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일제히 입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정근을 하며 탑을 세바퀴 돌고 탑이 잘 보이는 곳에 앉아 간절한 마음으로 사시예불을 올렸습니다. 사시예불 후 스님께서는 순례단 전체를 위해 축원을 해주시고, 이곳 사르나트에서의 부처님의 행적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특히 스님께서 “여기 앉아 계시는 여러분들이 5백성 중 한명이였을지 모릅니다” 라고 하셔서 대중들 모두가 함께 웃었습니다.
“우리가 앉아 있는 이곳이 부처님의 8대 성지 가운데 하나인 또 4대 성지 가운데 하나인 초전법륜 성지입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법 바퀴를 굴리신 곳인 사르나트, 녹야원입니다. 바로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 최초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은 다섯 아라한이 출현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삼보가 성립되었습니다. 스스로 깨달은 이를 ‘붓다’라고 하고, 깨달은 이가 깨닫지 못한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한 가르침을 ‘담마’라 하고, 깨닫지 못한 이가 깨달은 이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사람을 아라한이라고 하는데 이 분들은 혼자가 아니고 여러명이기 때문에 복수의 의미를 써서 ‘상가’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붓다, 담마, 상가가 성립했기 때문에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곳입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200년이 지난 후에 인도에서 제일 위대한 성군이였던 아쇼카 왕이 출현했는데, 그분은 인도의 크고 작은 나라들을 통일하고 불법에 귀의를 했습니다. 통일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을 크게 참회하고 불법에 귀의하고나서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기념탑을 쌓았어요. 이곳에는 부처님이 처음으로 설법한 곳이라고 해서 기념탑을 쌓고 아쇼카 석주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13세기 이후에는 인도 불교가 다 망해버리고 600년이 지나니까 이곳이 다 정글이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130여년 전에 영국 사람이 이 아쇼카 석주를 발견하고 이곳이 부처님이 처음으로 설법한 곳임이 다시 밝혀지고 성지가 복원되기 시작했습니다.
☞ 라즈길(왕사성.빔비사라왕.영축산)
1)라즈길은 왕사성이라고 우리에게 더 익숙하게 알려져 있는 곳으로 원래 이름은 라자그라하인데 왕의 집이란 뜻입니다. 왕사성은 부처님 당시 북인도에서 가장 큰 나라인 마가다국의 수도로서 당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왕사성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인 천년의 요새였습니다.
이 곳은 부처님이 성도하시기 전에 두 분의 스승을 만나 수행한 곳이었고, 수행하시는 부처님의 청청한 모습을 보고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께서 성도하시면 자기를 깨우쳐 달라고 부탁한 곳이기도 합니다.
스님의 설명을 다 들은 후 오늘의 첫 목적지인 영축산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영축산은 부처님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으로 법화경, 반야심경, 열반경이 설해진 곳이고 염화시중의 미소가 행해진 뜻 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영축산을 오르는 길은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을 만나러 다닌 길이라고 하여 빔비사라왕의 길이라고 불립니다. 왕이 마차로 산 아래까지 와서는 마차에서 내려 가마로 500미터 정도 산으로 오르다가 다시 100m 정도 걸어갔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영축산 가는 길 초입에는 부처님의 주치의인 지바카의 망고원이 있었습니다. 빔비사라 왕이 마차에서 내려 가마로 가기 시작한 곳은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헤치려고 던진 돌 파편에 부처님이 발을 다쳐 제자 아난다에게 업혀 내려와 지바카의 응급치료를 받았던 곳이기도 하고, 육방예경이 설해진 곳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육방예경은 부처님 당시 어리석은 젊은이를 깨우치기 위하여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부부, 친구, 주인과 하인 관계에서 각각 가져야할 마음자세를 가르친 이야기라고 합니다. 스님의 인기 저서 ‘스님의 주례사’도 이 육방예경을 바탕으로 주례를 본 것이라고 합니다.
영축산 정상에는 신기하게도 여러 크고 작은 굴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 곳에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수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굴 이름도 제자들의 이름을 따서 아난다굴, 사리불굴, 목련굴, 마하가섭굴 등으로 불렸고 차례대로 참배하였습니다.
또한 산의 정상부근에는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해치기 위해 돌을 던졌다고 전해지는 곳이 있었는데 스님께서는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상세하게 해 주셨습니다. 자신이 똑똑하다고 자만심에 빠진 사람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해주는 일화였습니다.
영축산 정상에는 독수리를 닮은 바위가 있었고 그래서 이름이 인도말로 ‘그리드라쿠타’ 즉 독수리봉이라고 불리우는데, 한문으로는 ‘영축산’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영축산의 정상이 좁아서 순례단의 일부만 정상에 앉고, 나머지 순례단은 모두 정상 바로 밑으로 차례대로 앉아 영축산 정상을 향하여 가사를 수하고 부처님 당시에 설한 경전을 독송하였습니다. 500명이 읊는 예불은 장엄하기까지 했습니다.
공간이 비좁아서 예불은 앉은 자리에서 그냥 했습니다. 예불문에 나오는 ‘영산당시 수불부촉...’ 에서 바로 그 영산이 이곳인데, 예불을 하면서 “영산당시” 라고 읊으면서 무언가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부처님이 2,600년 전에 설법을 하신 바로 그곳에 지금 500여명의 순례단이 다시 찾아와 예불을 올리고 있으니 참으로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버스로 5분쯤 걸리는 곳인 빔비사라왕의 감옥터로 갔습니다. 감옥터는 왕사성의 내성 맨 끝에 위치한 곳으로 감옥터의 외곽만 남아 여기가 감옥이었구나 짐작하게 할 뿐이였습니다. 아침 내내 끼여있던 안개가 많이 걷혀졌고 해가 밝게 비추고 있어 따뜻하기까지 했습니다. 순례단은 조별로 정렬하여 앉아 가사를 수하고 예불을 드렸습니다.
스님께 빔비사라 왕이 아들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된 사연과 그런 왕을 위로하신 부처님의 이야기, 감옥에 갇혀 굶고 있는 왕에게 음식을 몰래 전하려던 왕비 위제희 부인이, 아들에게 이 사실을 들켜 골방에 갇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부처님의 위로를 청하고, 부처님은 그런 왕비를 위로하기 위해 관무량수경을 설하신 이야기 등을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이곳은 빔비사라왕의 감옥터입니다. 왕이 자기가 만든 감옥에 갇힌 겁니다. 빔비사라왕은 당시 인도 강국의 절대왕인데 나이가 사십이 될 때까지 아들이 없었어요. 당시에는 왕위를 아들이 잇잖아요. 아들이 없으니까 정정이 불안한 거예요. 어느날 용한 점쟁이를 찾아가서 점을 치니까 3년 후에 아들이 생긴다는 거예요. 저 히말라야 산에서 수도하는 수도승이 명이 3년 남았는데 그 사람이 죽으면 자신의 아들로 태어나도록 인연이 되어있다고 했어요. 왕이 사실을 확인해보고 아들 갖고 싶은 마음이 급하니까 그 수도승이 빨리 죽으면 아들이 빨리 태어날 것이 아니냐 그런 생각이 들어서 사람을 보내서 ”빨리 죽어라“고 했더니 그 수도승이 거절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왕명을 거역했다고 해서 죽임을 당하게 된 겁니다. 이 사람이 죽으면서 ‘내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 하고 죽은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죽자마자 바로 위제희 부인에게서 애기가 생긴 겁니다.
그래서 왕은 애기를 갖게 된 기쁨과 원수라는 사실에 대한 불안함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애기를 낳자 마자 2층에서 아래층으로 던져버렸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애기가 땅에 떨어졌는데도 손가락 하나만 부러지고 무사한 겁니다. 그래서 왕이 다시 마음이 바뀌어서 애기를 극진히 키웠습니다. 그 애기가 바로 아자타사투 왕자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데바닷타가 부처님 교단의 새로운 리더가 되려고 하는 시도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아자타사투와 데바닷타는 모의를 해서 아자타사투 왕자는 빔비사라 왕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고, 데바닷타는 부처를 해치고 자기가 새 부처가 된다는 새로운 세상을 꿈꾼 겁니다. 그 때 데바닷타가 아자타사투를 꼬드긴 이야기가 “왕은 너의 아버지라고 하지만 사실은 너의 원수다” 하는 비밀을 이야기해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자타사투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아버지를 감옥에 가두고 굶겨 죽이려고 한 겁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왕의 부인이면서 왕의 어머니가 될 위제희 부인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권력을 쟁취하는 싸움을 하게 되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남편이 이기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죽고, 아들이 이기면 자기 남편이 죽고, 누가 이겨도 진 자는 역적이 되고, 역적은 살려두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여자가 된 것입니다. 해결책이 없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아버지를 살리려고 하니까 아자타사투 왕은 어머니도 아버지와 한패라고 생각하고 어머니도 감옥에 가둡니다. 그래서 감옥에 갇힌 위제희 부인은 저 멀리 영축산을 바라보면서 자기 신세 타령을 하면서 부처님께 기도를 합니다.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아들을 낳게 되었고, 부처님은 왜 데바닷타 같은 저런 악인을 친족으로 두었나 원망을 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지금 너가 억울하고 분한 것 같지만 사실 빔비사라 왕은 자기 아들을 얻기 위해서 남을 죽이고, 너도 너의 아들을 얻기 위해서 그것을 방치했고, 아들은 제 원수를 갚는다고 제 아비를 죽이는 이런 중생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해 줍니다. 그러니까 위제희 부인은 ’나는 이런 세상은 싫습니다. 이런 괴로움이 없는 세상은 없습니까?‘ 하니까 부처님이 극락 세상을 보여주자 위제희 부인은 극락 세상에 나기를 발원합니다.
위제희 부인은 “나는 지금 부처님의 위신력을 빌려서 극락 세상을 볼 수 있지만 후세 대중은 어떻게 극락을 볼 수 있겠느냐?”며 부처님께 청하니 부처님께서 극락을 보는 16가지 관법을 설해 줍니다. 이것이 바로 ‘관무량수경’입니다. 대부분의 경전이 부처님의 제자들이 거룩한 질문을 해서 법문이 설해지는데, 이 경은 가장 곤궁에 처한 여인이 울부짖으면서 부처님께 기도한 데 따른 부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는 더 소중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앉은 방향이 영축산이예요. 위제희 부인처럼 영축산을 향해서 경전을 독송해 보겠습니다.”
스님의 이야기를 다 듣고 위제희 부인의 간절한 마음이 되어 경전을 독송하고 잠시 명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부처님의 설법이 아니었다면 위제희 부인이 얼마나 더 고통스러웠을까 헤아려 봅니다.
빔비사라왕 감옥터에 조별로 돗자리를 펴고 모여 앉아 수자타아카데미에서 해 준 밥을 반찬과 함께 맛있게 먹은 후 다음 장소인 죽림정사로 떠났습니다.
날씨가 갑자기 더워집니다. 버스 안에서 새벽에 추워 껴 입었던 옷들을 벗었습니다. 날씨가 요동을 치니 벗어 놓은 옷이 한 짐이나 됩니다. 5분쯤 달려 죽림 정사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니 콧물이 흐르는 꼬질꼬질한 아이들이 손을 내밀며 우리를 먼저 반깁니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딱하고 안스럽습니다. 스님께서는 어김없이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며 이 아이들의 다음 세상을 위해 발원을 하십니다.
죽림정사는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의 법을 듣고 감명을 받아 부처님과 1,000명의 제자가 머물 곳을 보시한 곳으로 초기 사찰의 원형이 된 곳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도 예불과 공양을 올리고 이곳에서 설한 경을 함께 읊고 명상도 했습니다. 명상을 하며 지금 맡고 있는 공기를 부처님과 제자들도 맡았을까 생각하니 부처님이 더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예불을 올린 후 스님께서는 이 곳에서 부처님의 상수 제자인 사리불 존자와 목건련 존자가 부처님께 귀의한 이야기며, 빔비사라 왕이 죽림정사를 보시한 이야기 등을 해주셨습니다.
“이곳이 1,250명의 대중이 있었던 죽림정사입니다. 우리가 늘 예불문에 ‘천이백 제대 아라한’ 또는 금강경에 ‘천이백오십 대 비구중’하는 바로 그곳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바라나시 사르타트로 가셔서 교진녀 등 오비구와 야사 등 육십명을 모아놓고 전법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우루벨라촌으로 오셔서 우루벨라 가섭, 나디 가섭, 가야 가섭 등 일천명을 교화하셔서 가야산에서 탐진치 삼독의 불을 끄라는 유명한 설법을 하신 뒤에 그 천명의 대중을 이끌고 이곳 왕사성으로 오셨습니다
왕은 왕사성 서문 밖 제띠안까지 마중을 나왔고 부처님의 법문을 들은 왕은 바로 그 이치를 깨닫자 너무 기뻐 부처님을 왕궁으로 초대했습니다. “내가 왕이 되었고, 내가 다스리는 나라에 부처님이 출현하셨고, 내가 부처님을 친견해서 이렇게 법문을 듣게 되었고, 또 내가 그 법문을 이해하게 되어서 지혜의 눈이 열렸다” 면서 “마지막 소원이 하나 있는데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거였다” 라고 하고 “왕궁에 오셔서 저의 공양을 받으옵소서” 청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거절을 하셨어요. 즉 수행자는 궁중에 출입을 하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왕은 부처님이 머무실 좋은 자리가 어디일까 생각해봤는데, 성 안은 너무 번다하고 성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탁발하기 어려우니 성으로부터 적당히 떨어져 있는 곳이 좋겠다 해서, 북문 밖에 있는 자신이 아주 아끼던 대나무가 우거진 숲을 보시했습니다. 대나무가 우거진 숲을 죽림이라고 합니다.
대나무 숲에서 어떻게 머무는가 하는데 여기 보시면 알지만 인도 대나무는 하나씩 솟는 것이 아니고 무리를 지어서 이렇게 솟아서 마치 보리수나 느티나무 모양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대나무 숲은 수행자들이 정진하기에 좋고, 그래서 이곳이 불교 교단에 처음으로 세워진 죽림정사입니다.
인도 풍습으로는 항상 절에 연못이 있었어요. 이곳 죽림정사의 연못은 카란다카 연못이라고 불리는 곳인데 장자 카란다카가 보시를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천이백 대중이 이곳에 머무실 때 아난다 존자는 이 물을 떠서 부처님이 발을 씻을 수 있도록 해드린 그런 곳입니다. 그러니 눈을 감고 가만히 명상을 하면 부처님과 아난다 존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웃음)
부처님이 이곳에 머무실 때 ‘앗사지’라는 비구가 있었어요. 앗사지는 사르나트에서 오비구 가운데 마지막에 깨달은 비구예요. 앗사지가 왕사성 안에서 탁발을 하고 다녔어요. 수행자는 두리번 두리번 하지 않고 발 끝 한치 앞만 보면서 정진을 하며 걷습니다. 그 걷는 모습이 너무나 수행자다워서 이 모습을 사리푸트라가 본 것입니다. 그래서 저 분은 참 위대한 수행자다 해서 사리푸트라가 가서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니 “저는 붓다의 제자입니다” 라고 대답했어요.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과 비견되는 여섯명의 스승이 있었고 이것을 육사외도라고 하는데, 사리푸트라는 그 중에 산자야라는 분의 제자였어요. 그런데 그 앗사지의 거동을 보고 감동을 해서 “당신의 스승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하니 “그분이 계신 곳에 가서 여쭤보십시오” 그랬어요. 그래도 한마디만 이야기해 달라고 하니 앗사지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생겨남으로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라고 하면서 설했어요. 이것을 듣고 사리푸트라는 마음 속에 많은 의문이 풀렸어요.
그래서 사리푸트라는 자신의 그 기쁜 마음을 자신의 친구인 목갈리나와 나누기 위해 수행처로 돌아왔습니다. 목갈리나가 사리푸트라의 환한 얼굴을 보고 “무슨 좋은 일이 있소?” 라고 물어서 그 내막을 이야기해 주니 목갈리나도 바로 큰 감동을 받았어요. 그래서 자신들의 스승인 산자야를 찾아가서 “이런 위대한 수행자가 출현했는데 우리 같이 가서 법문을 들으면 어떻겠소?” 그러니 산자야는 “그것은 믿을 수가 없소” 하면서 회의론을 폈어요. 그래서 사리푸트라와 목갈리나는 스승을 두고 자기들만 붓다에게로 갔습니다. 그래서 두 분이 자신의 제자 100명씩 총 200명을 데리고 붓다에게 가서 법을 청해 듣고 다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러니 천명이 함께 왔는데다가 이백명이 더 합류했으니 이제 천이백명이 되었습니다. 또 그 전에 육십명의 아라한이 있었죠. 그래서 이 분들은 부처님이 성도하고 1년 안에 제자가 되신 분들이니까 불교 교단 안에서는 모두 장로가 되잖아요. 그래서 늘 천이백 제대 아라한을 칭송하는 이유가 이 분들이 가장 교단의 장로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천이백오십 대중과 함께 계셨다고 경전에 많이 나오잖아요. 그런 소중한 곳이 바로 이곳 죽림정사입니다.”
그리고 죽림정사에서의 부처님의 행적이 담긴 경전을 함께 독송하고 잠시 명상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오늘은 일정이 많아 바쁘게 다음 장소인 칠엽굴로 갔습니다. 칠엽굴로 가는 길은 ‘온천정사’라는 목욕을 하는 곳이 있어 초입부터 굉장히 복잡했습니다. 온천정사의 맨 위쪽은 높은 카스트가 목욕하지만 맨 아래쪽의 더러운 물에서는 낮은 카스트가 목욕을 한다는 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21세기인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다시한번 제대로 느끼게 됩니다.
▲ 온천정사를 지나 칠엽굴을 향해 오르는 길.
산 꼭대기에 자이나교의 성지가 있어서 그런지 올라가는 길은 잘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멀고 가파른 길을 한참 올라 칠엽굴에 도착했고, 이어폰을 통해 스님께서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걸음 한걸음 올라가시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경전에는 칠엽굴에 아라한 500명이 모여 앉아서 경전을 결집했다고 하는데, 스님께서 “여기 500명이 진짜 다 앉을 수 있는지 보기 위해 500명을 데려왔다” 고 하시면서 “봐라. 500명 다 앉을 수 있네” 하시자 다 같이 크게 웃었습니다.
▲ 경전을 결집할 당시처럼 칠엽굴 앞에 오백 대중이 앉았습니다.
칠엽굴은 부처님 사후 부처님 말씀을 최초로 결집한 제1결집이 행하진 터로 아난다와 우파리가 초안을 내고, 마하가섭 존자가 사회를 보고, 500명의 아라한이 초안을 검증하는 형식으로 결집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스님께서는 칠엽굴에서의 경전을 결집할 당시의 상황과 부처님 입멸 후에 불교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여러분들 여기까지 올라오신다고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앉아 있는 이곳이 바로 경전이 처음으로 결집된 칠엽굴입니다. 왜 칠엽굴이라고 부르냐면 나뭇가지 잎사귀처럼 일곱 개의 굴이 연결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칠엽굴에서 경전을 결집했다고 하니까 무슨 제주도 만장굴 같은 곳에 들어가서 하신 줄 아는데 그렇지 않고 우리가 앉은 여기서 결집을 했습니다. 굴 속은 깜깜해서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경전을 결집했겠어요? 여기 동굴이 후끈 후끈 하잖아요. 수행자들이 동굴 안에서 정진하기 좋았기 때문에 많이 알려진 곳이였어요.
그런데 왜 여기까지 올라와서 경전을 결집했을까요?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결집한다고 하니까 너도 나도 참여하겠다고 한 겁니다. 만약에 저 밑에서 하면 누구는 참여하고 누구는 참여 안 하고 통제를 못합니다. 그래서 마을에서 떨어져 있는 이곳까지 올라와서 경전을 결집했다고 해요.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를 때 대부분 슬퍼했어요. 그런데 몇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고 해요. 특히 젊은 사람들 중에는 ‘아이고, 그 늙은이 잘 죽었다’ 이렇게 생각한 사람도 있었어요. 왜냐하면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하라, 이것은 하지마라’ 이런 잔소리가 많았다고 받아들인 거예요. 이 얘기를 장로들이 듣고 굉장히 걱정을 한 거예요. 지금 부처님이 돌아가시자마자 저런 사람들이 생기는데 세월이 흐르면 어떨까요? 온갖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나는 부처님 말씀을 이렇게 들었다 하는 문제가 생기면 진위를 규명하기가 어렵잖아요. 그래서 마하가섭 존자가 부처님의 말씀을 전부 모아 놓아서 가짜가 생기더라도 막을 수 있게 해야겠다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결집하겠다고 하니까 수천명이 다 참가하려고 해서 마하가섭 존자가 아라한과를 증득한 사람에 한한다고 제안을 했어요. 그래서 여기 500명이 모인 겁니다. 그 때 재정 후원을 아자타사투 왕이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처님을 25년 동안 시봉한 아난다가 그때까지 아라한과를 아직 증득하지 못했다는 것이였죠. 부처님을 시봉하고 법문을 듣기만 했지 아직 자기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거예요. 아난다는 당연히 자기가 참가할 줄 알았는데 참가가 안되었어요. 아난다에게도 불명예이지만 아난다가 없으면 경전을 결집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그래서 아난다가 그날 밤에 백천간두 진일보의 정신으로 목숨을 건 정진을 해서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해요. 아난다는 맨 마지막으로 오백 대중에 함께한 겁니다.
우리도 여기 오백 명이 모였는데 지금 조는 사람도 있네요. (웃음) 오백명이 모여서 부처님 말씀을 결집하려면 소란했겠죠. 그래서 사회를 마하가섭 존자가 보고 경의 초안을 아난다가 내었어요. 아난다가 먼저 초안을 내면 다른 사람들이 다 듣고 검증을 했어요. 아난다가 언제 어디서 부처님이 누구에게 어떤 법문을 했는지를 읊조리면 거기 모인 사람들이 “옳소. 나도 그렇게 들었소”, “그것은 다른 곳에서 하신 말씀과 섞였소” 이렇게 하나하나 검증을 했어요. 그래서 성경보다는 월등하게 정확합니다. 불경은 깨달은 오백명이 모여서 하나 하나 검증해서 확인된 것을 결집을 시켰으니 정확도에 있어서는 비교가 안됩니다.
초기에 모든 경전은 암송에 의해서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고 500년이 지난 뒤에 문자로 적게 된 것입니다. 암송이 기록보다 더 정확합니다. 글로 쓴 것은 글자가 틀리면 완전히 오류가 생기거든요. 아난다는 부처님이 하신 말씀의 곡조까지 흉내를 그대로 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세가지 의심이 들었다고 해요. 첫째, 부처님이 살아서 돌아오셨는가. 둘째, 타방에 계신 부처님이 이곳에 오셨는가. 셋째, 아난다가 성불했는가. (웃음)
이런 의심이 들만큼 녹음기 틀어놓은 것처럼 그대로 재현이 된 겁니다. 그렇게 해서 오백명이 다 검증을 해서 모든 경전을 결집한 장소가 바로 이곳입니다. 한번 보세요. 오백명이 앉아도 충분하죠? 딱 오백명이 앉으면 되는 자리네요. 가섭 존자가 오백명 이상은 안된다고 한 이유도 자리가 좁아서 안되었겠어요.” (웃음)
오백 대중이 모여 경전을 읊는 모습을 상상하며 명상도 하고 경전 독송도 함께 했습니다. 2,600년이 흘러 오늘 오백 대중이 이렇게 다시 모여 이곳에 앉아 당시 상황을 다시 재현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다함께 “만세”를 힘차게 부르면서 기념사진을 찍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칠엽굴을 바쁘게 나와 오늘의 마지막 여정인 나란다 대학으로 갔습니다. 나란다 대학 유적지 맞은 편에 작은 박물관이 하나 있어서 먼저 그곳부터 들어가서 이곳에서 발굴된 불상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여러 불상들 중에 특히 부처님의 8대 성지가 다 나와있는 불상이 있어서 관심있게 보기도 했습니다. 박물관 입구에 나란다 대학의 전체 규모를 알 수 있는 모형이 있었는데, 현재 발굴된 것은 10분의1도 안된다고 하니 당시에 얼마나 규모가 컸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 나란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불상. 8대 성지가 한 불상 안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나란다 대학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란다 대학은 불교를 가르치던 곳으로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큰 대학이었는데 교사만 천오백명이였고 학생은 만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혜초 스님도 이곳에서 공부했다고 합니다. 그런 역사적이고 온갖 지혜가 넘쳐났을 곳을 무슬림이 침공해서 모두 불 태워버렸고, 더군다나 도서관은 6개월이나 불 탔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 나란다 대학. 네모난 곳이 스님 한 명이 명상을 하던 방이라고 합니다.
나란다 대학을 끝으로 오늘의 많은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순례단은 모두 라즈길에 예약된 숙소 곳곳으로 흩어져서 하루종일 걷고 걸었던 여독을 풀었습니다.
내일은 새벽 3시30분에 기상해서 4시에 출발하는 일정입니다. 바이샬리로 가서 아직 3개 밖에 발견되지 않았다는 진신사리탑을 참배하고 또 원숭이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는 원후봉밀터를 참배할 예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스님께서는 부처님의 생애를 탄생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2시간에 걸쳐 촘촘히 정리해서 복습해주시고 이어 지난 며칠간의 순례 일정에 따라 순서대로 복기해주시니 순례를 다시 다녀온 듯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풀밭에서, 석산에서, 탑 앞에서,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강당에서, 버스 안에서, 밤낮으로 펼쳐주셨던 법문을 대중들이 조금이라도 놓쳤을 새라 살뜰히 챙겨주시는 스님의 마음이 감동으로 전해집니다.
각 성지에 얽힌 중요한 교화이야기와 신화적 표현 속에 숨은 인류문화사적, 상징적 의미도 다시 짚어주셨습니다. 룸비니에서 부처님이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왕족출신을 상징하고, 일곱 발자국을 걸은 것은 육도윤회에서 한걸음 나아가 해탈열반을 상징한다는 것,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뜻을 의미한다는 것, 아시타 선인의 예언에서 혼란스러웠던 인도 사회를 세속적으로 다스려줄 전륜성왕과 가치관의 혼란을 잡아줄 붓다의 출현을 희원하는 시대적 분위기를, 카필라성에서 두 스승님에게 받은 교육이 왕이나 브라만을 교화할 수 있는 식견을 갖추는 바탕이 되었음을, 사문유관을 통해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같이 행복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시혜적 자비’가 아닌 ‘자기화된 자비’를 보여주셨음을, 당대 육사외도 등의 출가사문은 인도의 전통사상에 반대하는 비주류였음을, 히말라야산 아래 카필라성의 지리적 환경이 뒤가 높고 앞이 트여 심리가 안정된 심성을 형성하는 데 작용했을 것이라는 것, 왕위를 버림으로서 기득권을 포기하고, 머리를 자름으로서 기존의 가치관을 버렸다는 것, 고행하는 이들을 보면서 복진타락의 한계를 깨닫고, 빔비사라왕과의 일화에서 왕위를 가래에 비유하며 권력을 버린 이야기, 전정각산에서의 6년 고행에서 욕망을 따르는 거나 억압하는 것 모두 욕망에 대한 작용 반작용에 불과함을 알고 악 쓰고 참는 수행이 아니라 편안한 상태에서 미세한 것을 알아차리는 중도의 길을 가셨음을, 다양한 교화사례를 통해 재가자도, 여성들도 모두 수행해서 해탈할 수 있음을 알게 해준 이야기 등을 구슬에 실을 꿰듯 찬찬히 꿰어주셨습니다.
스님은 여성과 관련된 설법을 순례 중에 빼먹으셨다며 연화색녀 교화사례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셨습니다. 이어서 보름 동안 바라나시부터 어제 샹카시아까지 순례한 공간들을 모두 훑어주시니 복잡하게 얽혀있던 지난 일정들이 환하게 정리되고 부처님의 발자취를 다시 압축적으로 체험한 것 같아 환희심과 감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성지순례를 마치며 이제 더 이상 껄떡거리지 말고, 겸손하고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삶의 방식을 바꾸자고 강조하시면서 이렇게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이제 정리가 좀 돼요? 성지순례를 하면서 바깥으로 보면서는 ‘우리가 가진 것이 참 많구나’ 하는 것을 많이 느꼈죠. 그러니 첫째, 이제 더 이상 껄떡거리지 말고 있는 것만으로도 풍요롭게 생각하는 자세를 가져보세요. 둘째, 조금이라도 나눠가져야겠다는 마음을 좀 내었으면 좋겠습니다. 껄떡거리지 않으려면 가치관이 바뀌어야 해요. 검소하게 살고 겸손하게 사는 것을 기쁨으로 여겨야 해요. 그래야 당당해질 수 있어요. 우리 삶의 방식을 바꾸자는 것입니다. 완전히 다 버리고 출가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방향을 그쪽으로 잡고 항상 지금 누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참 미안하다는 마음을 가졌으면 해요. 부처님보다 더 많이 먹고 잘 입고 잘 자고 하면서도 늘 괴로워하는데 이 먹고 입고 자는 문제로 인생의 행복이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돈이 필요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제 돈에 너무 껄떡거리지 말자는 것입니다. 화장하지 마라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너무 집착은 하지 마라는 것이예요. 머리를 손질하지 마라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너무 집착하지는 마라는 겁니다. 옷을 아무렇게나 입으라는 것은 아니지만 깔끔하게 입으면 되지 옷으로 너무 폼 잡으려고 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열등의식이 있으니까 자꾸 옷으로 커버하려고 하고, 얼굴로 커버하려고 하고, 머리 모양으로 커버하려고 하고, 큰 집으로 커버하려고 하고, 차로 커버하려고 하는데, 아무리 해봐야 그건 내 것이 아닙니다. 이 몸둥이도 내 것이 아닌데 그것이 어떻게 내 것이 될 수 있겠어요?
이렇게 헐떡거리며 살면 죽을 때가 되어서 후회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법에 귀의함으로써 삶의 자유와 행복을 얻어야 되고, 우리가 사는 모습이 현대 문명이 갖는 구조적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그 길에 우리가 서 있어야 합니다.
성지순례를 마치셨으니 이제 법에 귀의하는 불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탈 열반을 수행의 목표로 해야 합니다. 이것은 내 인생에서도 새로운 희망이지만 이런 방향으로 살면 우리 인류에게도 새로운 희망이 됩니다. 그렇게 해야 환경문제도 해결되고, 양극화문제도 해소되고, 계급차별도 해결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좀 더 앞서가는 문명을 만드는 선진적인 사람이 되자는 발원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불교가 최고야’, ‘불교 믿으면 부자가 된다’ 이런 신심이 아니라 법의 이치를 깨닫고 삶이 좀 차분해져서 좋다고 들뜨지 않고 뜻대로 안된다고 가라앉지도 않고 거기에 빠지지 않는 여여한 삶을 우리가 살아갔으면 해요.
요즘 세상이 얼마나 좋습니까? 옛날에는 불법을 공부하려면 머리 깍고 스님이 안되면 접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직장 다니면서도 불교 공부할 수 있지, 결혼하고도 공부할 수 있지, 이렇게 세상이 너무 좋아져서 공부가 제대로 안되는 것 같아요. 결혼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재산을 다 버려라 하는 것도 아니고 좀 껄떡거리지만 말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나에게도 남에게도 자랑이 되는 그런 불자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발심이 되면 이 보름이 아깝지가 않습니다. 돈 삼백만원이 아까운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술먹고 옷사고 낭비할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돈 축에도 안들어가는 액수잖아요. 앞으로 평생 껄떡거리면서 보석 사고 화장품 사고 좋은 술 사고 비싼 향수 뿌리고 하는데 쓸 돈은 죽을 때까지 수십만 달러가 될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 성지순례 왔다 간 덕분에 엄청난 돈을 버신 거예요. (웃음)
인간적으로 따지면 밥도 똥밭에서 먹고 세수도 제대로 못하고 덜덜덜 떨면서 다니는 것 보면 마음이 안되었어요. 모두 집에 가면 마나님이고 사회에서는 목에 힘주고 다니는 분들인데 이런 숙소에 재우고 오라 가라 하는 것이 미안할 때도 있는데, 그렇게 정에 끄달리면 제대로 가르쳐주질 못해요. 그러나 인간적으로 보면 좀 미안해요. 나이 오십이 넘어서 스님한테 야단 맞아 가면서 다니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집에 가면 다 자기가 왕인데... (웃음) 그런데 우리 인생의 행복을 위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려면 저 같은 사람이 이렇게 야단을 치고 구박을 안 하면 누가 그렇게 해주겠어요? (웃음)
대구에 있는 어떤 분은 남편이 죽고 굉장히 열등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성지순례 한번 왔다가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 이렇게 느끼고 애들 셋을 혼자서 키우는데 아무 열등의식이 없이 아주 당당하게 키웠어요. 그래서 저를 만나면 늘 “저는 온전히 성지순례 다녀온 덕택입니다” 라고 얘기하는 분이 있어요. 여러분들도 성지순례를 다녀와서 삶이 조금 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이렇게 정리를 하면서 저의 역할은 마치겠습니다.”
2)성지순례 7일째입니다. 3일 동안 편히 풀어놓았던 짐을 싸서 다시 길을 떠납니다. 지난밤 수자타아카데미에 보시할 물건과 반찬들을 내어 놓았기에 가방의 무게는 좀 가벼워졌습니다.
순례단은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해서 아직도 깜깜한 새벽 5시, 부처님의 성도 전과 성도 이후 이야기와 유적이 넘쳐나는 라즈기르로 출발합니다.
버스 안에서 새벽예불을 하고 스님께서 오늘 일정을 안내합니다. 영축산과 빔비사라 왕의 감옥터, 죽림정사, 칠엽굴, 나란다대학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 벅찬 오늘 일정은 정말 기대됩니다.
라즈기르의 옛말은 라자그라하인데 왕사성을 말합니다. 라자는 왕이라는 뜻이고, 그라하는 집을 뜻합니다. 그러니 라자그라하는 왕의 집이 있는 성이란 뜻입니다. 라자그라하는 부처님 당시 북인도의 강대국인 마가다국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고 스님께서 안내해주셨습니다. <!--[endif]-->
또한 왕사성은 부처님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라 합니다. 카필라 성을 떠나 출가하신 부처님은 이곳 왕사성에서 두 분의 스승을 만나 수행하셨고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과 첫 만남을 가지셨습니다. 성도 후는 1천 명의 비구와 함께 돌아와 이곳에 자주 머물면서 교화 설법하여 빔비사라 왕은 물론 사리푸트라와 목갈리나, 마하가섭 등 유능한 제자의 귀의를 받고 최초의 불교 사원인 죽림정사를 기증받은 곳이기도 합니다.
스님은 영축산을 향해 가는 버스 안에서부터 부처님께서 자주 머무시며 법을 설하시고 교화하신 왕사성에 대한 안내를 쉽고 재미있게 해주셨습니다.
영축산 입구에는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을 만나러 다닌 ‘빔비사라 로드’ 표지판이 있습니다. 조금 더 올라가면 빔비사라 왕이 마차에서 내려 걸어갔던 길이 있고, 신하들도 뒤로 하고 왕 혼자 부처님을 만나러 걸어갔던 길을 만납니다. 강대국 최고 통치자인 빔비사라 왕의 고뇌의 깊이가 느껴졌습니다. 부처님을 만나서 내어 놓았던 고민만큼 가벼워졌을 것이라 상상해봅니다.
“우루벨라 가섭을 통해 부처님을 알게 된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의 법을 듣고 크게 깨달음을 얻고 부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왕자일 때 평생 소원이 다섯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내가 왕이 되는 것이고, 둘째는 부처님이 내 나라에 출현하는 것이고, 셋째는 내가 그 부처님을 만나 뵙는 것이고, 넷째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이해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내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모든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부디 저의 왕궁에 오셔서 공양을 받아주십시오.’ 그러나 부처님은 이를 수용하지 아니하십니다. 부처님은 걸식만을 했고 궁성 출입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빔비사라 왕은 왕사성에서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왕궁 밖에 있는 자신의 아름다운 대나무 숲을 부처님께 기증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후에 가게 될 불교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입니다.” <!--[endif]-->
당시 강대국 왕의 공양도 물리치는 부처님과 그런 부처님의 법문을 청해 듣기 위해 궁 밖에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무를 수 있는 숲을 기증하는 빔비사라 왕의 아름다운 모습을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새겨야 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빔비사라 왕이 마차에서 내려 걸어갔다는 곳은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해치려고 던진 돌 파편에 부처님이 발을 다쳐 제자 아난에게 업혀 내려와 지바카가 응급치료를 했던 곳이기도 하고, 선생경, 일명 <육방예경>이 설해진 곳이기도 합니다. <육방예경>은 법륜스님의 인기 저서 <스님의 주례사>의 근거가 된 경전이기도 합니다.
스님과 함께 영축산으로 오릅니다. 스님은 몸이 예전 같지 않다 하시면서도 앞장서 가시면서 영축산에서의 부처님 교화모습을 설명하시는데, 부처님에 대한 지극한 예경심이 듣는 이로 하여금 숙연하게 하였습니다. 스님의 성지에 대한 설명도 감동이지만 부처님을 대하는 스님의 모습 그 자체가 더 큰 법문으로 다가옵니다.
“영축산은 부처님 일생에서 아주 중요한 곳으로 참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예불문에 나오는 ‘영산’이 바로 이곳이며, 또 염화시중의 미소와 관련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반야심경, 열반경, 법화경 등 많은 경전이 설해진 곳입니다.” 이외에도 교훈이 되는 설화의 많은 부분이 영축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축산 정상 바로 아래 아난다굴, 사리불굴, 목련굴, 마하가섭굴을 참배하고 부처님이 법을 설하시던 영축산 정상을 향해 공양단을 차립니다. 가사를 수하고 부처님께 예불공양을 올리고 당시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설하신 경전을 독송합니다. 이곳에서 설하신 반야심경을 독송하는데 마음이 색다릅니다.
“부처님이 영축산에 계실 때 마가다국의 아자타삿투 왕이 어떻게 하면 밧지족을 침공하여 승리할 수 있는지를 신하를 통해 부처님께 여쭙게 되는데, 이때 부처님은 묻는 말에 대한 답변보다는 어떻게 하면 나라가 망하지 않는지 7가지 사례를 말씀하시는데 이것이 모두 밧지족을 두고 이른 말입니다. 그러면서 부처님은 나라가 번영하는 길, 평화의 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국론이 분열된 우리 나라의 상황에서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봅니다.”
영축산에서 내려와 빔비사라 왕 감옥터로 갔습니다. 부처님의 주치의였던 지바카의 집과 망고 숲을 지나쳐 가면서 스님께서는 부처님과 빔비사라 왕에 대한 이야기를 재밌게 해주셨습니다.
빔비사라 왕의 아들인 아자타삿투 왕자는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이곳 감옥에 가두고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부처님과 빔비사라 왕, 그리고 왕비인 위제희 부인, 그의 아들 아자타삿투는 경전에 여러 번 등장하는 인물인 만큼 이들의 이야기를 현대사회에도 그대로 적용해보면 좀 더 지혜로운 길을 가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아자타삿투왕은 감옥에 갇힌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못 먹게 엄명을 내리자 왕비 위제희 부인은 위장하여 온몸에 꿀반죽을 한 밀가루를 몸에 붙이고 감옥으로 가서 왕에게 음식을 공급하게 됩니다. 이전 왕의 아내이자 현재 왕의 어머니인 위제희 부인은 이 상황이 괴로워 영축산에 있는 아난다 존자에게 법을 청하였고 이에 부처님께서 직접 오셔서 관무량수경을 설하여 그를 깨치게 합니다. <!--[endif]-->
빔비사라 왕 감옥 터에서 아침을 먹었습니다. 오늘 아침 수자타아카데미에서 지어준 밥에 온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죽림정사로 이동하였습니다.
죽림정사에서도 예불공양을 올리고 경전동송을 하고 명상을 했습니다. 그리곤 스님께서 죽림정사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성도 후 1천 명 제자와 함께 당시 가장 강대국인 왕사성으로 오셨습니다. 이때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을 위해 궁에서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의 대나무 숲을 부처님께 기증하게 됩니다. 인도의 대나무 숲은 수행자들이 수행하기엔 아주 접합한 곳으로 이것이 최초 사원 죽림정사입니다.”
죽림정사는 대나무가 많았으나 몇 년 전 대나무 꽃이 피어 모두 죽고 새로이 대나무 숲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과 제자들이 죽림정사에 머무실 때, 당시 부처님의 5비구 중 가장 늦게 깨친 앗사지의 탁발 나온 모습을 보고 사리불이 감동하여 친구 목건련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한 곳입니다. 또한 마하가섭 존자도 부처님이 죽림정사에 있을 때 귀의하게 되는 등 불교교단의 기반이 형성되어지는 본격적인 교화활동이 펼쳐지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부처님이 마지막 열반을 떠나시기 전 영축산을 내려와 이곳 죽림정사에서 ‘승단이 망하지 않은 7가지 법’을 설하신 곳이기도 합니다.
죽림정사를 나와 바로 칠엽굴로 갔습니다. 칠엽굴 가는 길엔 유난히 구걸하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아이를 안고 구걸하는 아이들, 천으로 둘둘 말아 가짜 아이를 만들어 구걸하는 아이, 장애인 노인이 길거리에 가득하였습니다.
칠엽굴은 부처님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현재 전해오는 부처님 말씀을 결집한 역사적인 곳입니다. 부처님 열반 후 부처님 가르침을 멋대로 해석할 것을 우려한 가섭존자가 아라한과를 증득한 장로 500명을 동굴에 모아놓고 부처님 말씀을 기록, 정리한 곳입니다. 부처님을 가까이서 모신 아난존자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나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라고 송을 하면 500아라한이 하나하나 부처님 말씀의 진위여부를 확인해서 첨삭해서 정리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긴장감과 감사함이 가득합니다. 이 결집으로 인해 부처님의 법이 면면히 흘러 나에게까지 전해왔으니 말입니다. 이것을 제1결집이라고 합니다. 제2결집은 바이샬리에서, 제3결집은 파탈리푸트라에서 있었습니다. 캄캄한 굴 안을 들어갔다 나와서 칠엽굴 앞에 앉아 스님으로부터 경전 결집에 대한 안내를 듣는데 우리가 500아라한이라도 된 듯 착각을 하게 합니다.
칠엽굴에서 천천히 내려오면서 스님은 산 아래 라즈기르의 정경을 설명해 주시며 성지순례 초창기의 갖은 에피소드들을 들려주셨습니다.
어느새 오늘의 마지막 여정지 나란다대학입니다. 오기 전에 사진과 책에서 이미 봐왔는데도 한눈에 전체가 조망되지 않은 어마어마한 규모에 우선 놀라게 됩니다. 나란다 대학은 부처님 열반 후 불교가 번창하면서 세워진 사상 최초 최대의 대학으로 7세기경 현장스님이 방문했을 때는 교사가 천오백 명, 학생 1만 명에 달하는 규모였다고 하는데, 이슬람의 침공으로 모두 불태워지고 남은 흔적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현재 발굴된 길이가 1km인데 전체 길이가 10km라고 하니 정말 세계 최대의 대학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던 거 같습니다.
이렇게 오늘은 라즈기르의 영축산과 빔비사라 왕 감옥터, 죽림정사, 칠엽굴, 나란다대학 등, 부처님의 왕성한 교화활동 만큼이나 빡빡했던 하루였습니다.
내일은 여성이 최초로 출가한 곳,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 공양을 했다는 바이샬리와 부처님이 열반하신 쿠시나가르로 갑니다.
인도 성지의 인터넷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바로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