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미학살마을'을 가다
▲ 하미학살마을 안내판이다(25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함을 알려주고 있다) |
기자는 출국전에 인터넷 검색읕 통해 월남전의 '하미마을 학살'의 진상을 알아봤다.
<1968년 2월 22일(음력 정월 24일) 청룡 부대의 3개 소대가 '쾅남성 디엔반 현'에 위치한 '하미 마을'에서 비무장한 민간인 135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하미 마을'을 세 방향에서 에워싸며 들어와 마을 사람을 세 곳에 따로 모았다. 장교의 지시에 따라 자동소총과 유탄발사기가 발사되었고 마을 30가구 135명이 2시간 만에 학살당했다. 학살이 끝난 뒤 몇 안 되는 생존자들은 서둘러 무덤을 만들고 희생자들을 묻었다. 그러나 한국군은 불도저를 가져와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를 한꺼번에 묻어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한국군이 불러 모을 때 크게 저항하지도 않았고 도망가지도 않았는데 생존자인 '응웬 티 본'은 마을 사람들이 혹시나 죽이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속에서도 군인들이 먹을 것을 나눠주려고 모으는 것이라 여겼다고 증언하였다. '하미 마을' 사람들은 학살 이전에 주민들이 부대원들을 기억할 정도로 한국군과 관계가 좋았다.
"학살이 일어난 것은 아침 9시 경이었어요. 7 - 8시 경에 '호이안' 쪽에서 군대가 들어왔지요. 학살이 있기 며칠 전부터 한국군들은 사람들을 모아서 빵을 주었어요. 그래서, 그날 아침도 빵을 주나보다 하고 한 군데로 모였지요. 한국군들이 우리를 죽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죽일 거라고 생각했다면 도망을 가지 그렇게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모이지 않았을 거야.”>라고 정리하고 있다.
호텔에서 출발한 차안에서의 가이드 설명을 들은 전우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차창밖을 보면서 귀는 해설에 전념하는 전우들이다. 다낭의 숙소에서 출발한지 1시간이 지나자 좁은 시골길이 시작되더니 반시간이 지나자 하미마을에 도착하였다. 다왔다는 안내자의 설명이 끝나자 우리 동지들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내려 걸어서 밀림을 헤치고 들어가니 훤한 공터가 있다. 전형적인 시골의 마을인데 바로 그곳에 위령비가 있다.
과거 이 밀림을 헤치고 작전을 하던 음산한 기분이 드는 것은 오늘의 하미마을의 분위기에서 오는 것만도 아니리라. 사실 월남의 나무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기위해서 가시가 나있다. 저 가시때문에 미국에서 지급한 쟝글복은 그대로 찔리면 찣기는 아림을 방문하는 전우들은 기억하고 있다.
하미마을에 도착하기전부터 눈시울을 적시던 박만0(66, 백마사령부 병참부) 전우는 “이곳의 전투에 직접 참여는 않았지만 참전군인 명단에 내 이름이 올려진다면 이는 내 인생 최대의 부끄러움입니다. 우리 사회에 월남인들을 만난다면 죄지은 마음으로 배려와 연민의 손길을 내어주고자 합니다. 우리가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면 이는 짐승만도 못합니다. 월남인들이 당했을 고통을 생각하면 내가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죄송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몰염치한지를 새삼느끼게 됩니다."고 말했다.
민간인을 학살한 파월 미군은 법정에 섰다고 가이드는 말한다. 미국 시민단체는 미군이 학살한 '밀라이' 마을에 병원, 학교 등을 세워줬다. "미군이 전쟁때는 폭탄으로 폭격하더니, 전쟁 후에는 돈으로 폭격한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학살을 당할거면 미군에 당하지 왜 한국군에게 당했느냐"는 자조적인 말도 한단다.
* <'밀라이' 사건은? 1968년 3월 16일. 베트남 사이공(현 호치민 시) 동북방 140km 지점 ‘쾅가이’성 ‘송미’촌 ‘밀라이’마을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이다.
그해 베트콩(vietcong-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설날 대공세에 밀린 미군은
게릴라의 은거지를 타격해 실지를 회복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특히 미 육군 11보병여단 1대대는 베트콩 수중에 들어간 밀라이 일대에 진격해 촌락을 초토화시킬 작전을 세우고 있었다. 대대장은 “거기 가서 확 쓸어버려!”라는 명령을 내렸다. 밀라이는 미군 사이에 ‘핑크 빌’(pink-ville, 빨갱이가 가득한 마을)로, ‘프리 파이어 존’(free-firing zone, 무차별 사격해도 되는 지역)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진격 선봉 찰리중대는 최근 대원 5명을 적의 부비트랩에 잃었다. 그래 적개심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밀라이 진입 전날 밤, 작전회의에서 중대장 '어니스트 메디나' 대위는 “과감, 과감, 과감하게 공격하라. 이 잡듯 철저히 수색하고 완벽하게 섬멸하라.”고 강조했다. 최선봉에 나설 1소대장 '윌리엄 캘리' 중위는 “겉보기엔 민간 마을이지만 주민은 모두 적의 동조자, 내통자다. 남자는 무기를 지녔고, 여자는 배낭을 나르고, 아이들은 미래의 베트콩이다. 움직이는 것은 모두 처단하라”고 소대원을 다그쳤다.>라고 인터넷에서 검색된다.
박만0 전우는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우리 파월 전우들이 죽을 죄를 졌습니다. 당시 청룡 해병 전우들은 낯선 환경과 불안한 전장의 환경인 정글속의 월남 사람들은 전부 베트콩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베트콩을 나쁜 사람으로 교육을 받았고 그들을 죽여야 내가 산다고 학습을 받았습니다. 용서를 해주신다면 남은 인생은 월남을 위해 무엇이든지 봉사하면서 사죄를 받고 싶습니다.”고 절규했다.
눈물반, 콧물반의 얼굴로 용서를 빈다는 박 전우는 "반공주의로 의식화된 한국군으로서는 만약에 제가 이 하미 마을의 작전에 참여했어도 죽여야 내가 산다는 사명으로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을 것입니다."고 절규하여 당시의 학습된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이들 주민들이 인정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당시 미군은 한국군에 수색을 시킴으로서 미군은 직접 월남 원주민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수색은 한국군이 맡았으며 우리 청룡은 의사소통도 이루어지지 않고 낯선 전쟁의 긴장과 공포속에서 전과를 올리기위한 무리한 작전으로 청룡 상층부의 묵인아래 무차별 사살이라는 비극의 사건이 발생했으리라는 가이드의 해설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베트남 파병을 하면서 만약 베트남에서 공산군이 승리하면 그 여파가 한반도에도 미칠 것이라며 '베트남은 우리의 제2전선'이다."라고 설명했다.(한겨레신문 2016년 8월 29일자 <고엽제와 사드의 공통점>의 권혁철)
한국군이 세운 '한국군의 위령비'의 사연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2000년 12월, '월남참전전우복지회'는 '하미마을'에 3만달라를 기부하며 학살 위령비가 착공되었다. 그러나 완공을 앞둔 2001년 '월남참전전우복지회'는 비문의 내용을 문제삼아 교정할 것을 요구하였고 주민들은 결국 세울 것인가 말것인가를 줄다리기를 하다가 결국 그 비문 위에 연꽃 그림을 덧쐬우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 하미마을 위령비문은 대신에 연꽃으로 덧쒸워진 것을 알 수 있다. 훗날 저 연꽃이 벗겨지는 날에 전우들의 민낯이 안스러울 것이 틀림없으리라! |
결국 그들 주민들의 속마음을 정리했던 비문은 언제인가는 저 연꽃을 제거하면서 들어나게 될 것이란다. 그들의 한(恨)이자 절규의 '한국군에 대한 증오비'가 바로 연꽃 뒤에 숨어있는 것이다.
월남인들의 세운 '한국군 증오비'의 삽화(상명대학 만화가 고경일 교수)로 한겨레신문 2016년 7월 12일자 소개) 머지않은 곳에 있는 월남인들이 십시일반하여 만든 그들의 성금으로 만든 이웃의 한국군 '증오비'의 비문을 여기에 그대로 옮긴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약 50여개의 한국군 증오비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옆 마을의 '베트남 꽝응아이(Quang Ngai)' 지역에 세워져 있는 한국군 <증오비(碑)>의 비문이다.
▲ 하미마을 옆의 월남인들이 십시일반하여 세운 '한국군 증오비'의 삽화로 상명대학교 고경일 교수의 작품으로 한겨레신문 2016년 7월 12일자 |
<하늘에 가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한국군들은 이 작은 땅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참혹하고 고통스런 일들을 저질렀다. 수천 명의 양민을 학살하고, 가옥과 무덤과 마을들을 깨끗이 불태웠다. 1966년 12월 5일 정확히 새벽 5시, '출라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코리아 남쪽(대한민국) 청룡여단 1개 대대가 이곳으로 행군을 해왔다. 그들은 36명을 텅 빈 폭탄 구덩이에 넣고 쏘아 죽였다. 다음날인 12월 6일, 그들은 계속해서 꺼우안푹 마을로 밀고 들어가 273명의 양민을 모아놓고 각종 무기로 학살했다. 모두가 참혹한 모습으로 죽었고 겨우 14명만이 살아남았다. 미제국주의와 코리아 남쪽(대한민국) 군대가 저지른 죄악을 우리는 영원토록 뼛속 깊이 새기고 인민들의 마음을 진정토록 할 것이다. 그들은 비단 양민학살 뿐만 아니라 온갖 야만적인 수단들을 사용했다. 그들은 불도우저를 갖고 들어와 모든 생태계를 말살했고, 모든 집을 깨끗이 불태웠고, 우리 조상들의 묘지까지 갈아엎었다. 건강불굴의 이 땅을 그들은 폭탄과 고엽제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불모지로 만들었다.>
상명대학교 고경일 교수가 한겨레신문(7월 12일자)에 삽화이다. "아직도 세워지고 있는 이런 증오비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하고 고교수는 묻는다. 우리 당사자인 파월 전우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특히 청룡부대 당시 지휘관들은 답변을 해야 한다는 가이드의 주문이다. 아니 지휘관들은 앞서 언급한 박정희 대통령의 '베트남은 한국의 제2전선'의 설정으로 월남현장으로 내몰리면서 주월사 작전사령부와 예하 맹호, 백마, 청룡은 그들의 임무를 위한 수행함에 남다른 강요를 설정했을 것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참고로 한국의 한국전쟁에서 과거 인민군이 남하하였을 때 협조를 하였다는 이유로 학살된 9분의 위령비 비문(경기도 김포군 하성면 석탄리 태산공원 옆의 골짜기)을 여기에 옮겨본다. "원한의 세월 반백년 승천하신 원혼이시여 국운의 비통함이라 원망하옵소서, 불초자 우리뜻을 모아 통한의 심정으로 위령비를 건립하옵고 이곳에 신조유택하오니 존령이시여 영세시안하옵소서 삼가명복을 비나이다. 권00 외 8분"으로 표기되어 있다. '위령비'는 서로 싸우다가 죽음을 당하였을때의 용어이고 '증오비'는 일방적으로 죽음을 당했을 때의 용어라는 가이드의 해설이다.)
일부의 전우들은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를 더이상 전우들에게 말하면 안 된다는 논리를 펴는 전우가 있는가 하면 '수치, 수모가 됐던 역사도 실제 그 진실이 뭔가를 밝혀내야 한다는 소리가 토론되었다. 우리 한국군이 미군의 용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우리 파월전우들이 두번 죽는 것이라면서 없던 일로 하자는 소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러나 진실에 입각해 미래의 월남과의 역사를 만들어가야 한다면서 당당하게 있는 그대로의 파월의 역사가 만들어져야 한다면서 "월남전쟁은 아직도 진행중입니다."는 전우들의 일부가 있었다.
* 결국 더 밝히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로 국방전우신문(회장 석정원)은 8월 1일자 1회만 게재하고 2회부터의 하미마을 증오비의 기사를 연재하지 않는 않는 것으로 '한국군 전적지 기행 기사'는 연기되었다.
그러나 '세계월남참전 한국총연합회(약칭 세월참)' 전우들은 당시 우리의 파월 전투수당을 10%만 지급하고 90%를 국고에 귀속시켜 당시의 가난하였던 보릿고개에서 탈출하여 오늘에 이르렀는데 정부와 정부의 배려로 성장한 기업인들은 사회적 책임을 하지 않았음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차제에 그대로 밝혀야 한다는 논리를 줄기차게 펼치는 전우들이 있음을 밝힌다.
특히 1972년 맹호사단 군수처에서는 마지막 철수전의 물동량파악에 분주했던 필자는 파월 부대는 군복과 침구류 등을 세탁하면서 부대 대항 경쟁을 시키면서 "세탁은 곧 애국이다."라고 독려했었던 우리 전우들이다. 미군으로부터 받은 세탁비의 수입 - 그 중심에 '한진용역'이 있었다. 그 한진이 1977년 한진해운을 설립하였으니 그가 고 조중훈 기업인이다. 그 조회장이 2002년 사망하고 부인 최은영이 맡으면서 그 경영은 부실하고 만다. 금번 국정감사에서 최은영의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한진해운 사태 정상화를 위해 사재출연의 한계를 봐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 파월 전우들은 착잡하기 그지 없다.
고 조중훈의 아들 대한항공의 조양호 회장 그리고 그의 딸 조현아의 땅콩회항 사건으로 세계에서 볼쌍 사나운 도덕적 해이를 질타하는 소리가 높다. 우리 파월 전우들은 피와 땀으로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 대한민국과 애국 세탁으로 '한진용역'을 키웠겄만 지금 패닉에 빠진 '한진그룹'은 나몰라라 행태를 부리고 있는 꼴 사나운 모습이다.
부모 덕에 아무 고생없이 부회장에 오른 한 여인이 안하무인격 행태를 보고 느낀 우리 파월 전우들의 비애감은 남다르다.
지나가며 재미삼아 개구리에게 던지는 돌에 맞아 죽는 개구리는 생명을 잃는 아픔을 당하듯이 술을 한잔하고 홧김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출항하는 비행기를 되돌려 내리게 하는 그 황제 경영주의 객기에 사무장이였던 승무원의 인생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아니 우리 파월 전우들이 '세탁 애국'을 실천했던 50년전의 전우들을 조금이라도 상상했다면 어떻게 저런 망나니 짖을 할 수가 있을까?
이번 사태에서 3세 딸의 어리석음이 그룹에 나아가서 국가에 크나큰 피해를 준 것이라 되돌릴수 없다. 파월 전우들이 피와 땀으로 키운 한진은 사람내음새의 상도(商道)는 없고 오직 개인의 이문과 멋대로의 상술(商術)만이 만연한 오늘 우리 전우들의 가슴이 무너지는 번민에 빠져들게 되는 것을 저들은 알고 있을까?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미망인 이영0((57, 여)씨는 “흔히들 전쟁은 정상이 아닌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양심과 이성이 마비되어 일어난다고 하지만 양심적인 한국군이 어떻게 이곳 월남에서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면서 울먹였다. 누구도 다음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진광0(십자성, 69) 동지는 "이유야 어찌 되었건 남여노소 불문하고 집단으로 학살된 그 당시의 참상이 떠오릅니다. 1880년생부터 1966년생 애기들의 영혼들이여 지하에서나마 고이 잠드시고 그당시 일을 저지른 청룡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요. 135분의 영혼들 모두에게 사죄드립니다."면서 눈시울을 적시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해외 관광의 많은 지출이 되고 있지만 월남만은 다르다면서 이곳 월남 상품들을 구입해줘야 한다면서 상품을 구입하는 그이다.
“지하에서 고이 잠드시고 그 당시 일을 저지른 한국군의 죄를 용서바란다.”고 진 전우는 말하며 따라놓은 막걸리를 공중에 대고 뿌렸다. 그들은 135명의 영혼앞에 진심으로 사죄를 드린다면서 분향을 하고 막걸리를 따라놓고는 엎드려 눈물을 흘리는 왕년의 파월 전우들이다.
▲ 하미학살마을 위령비 앞에 선 전우들(뒤에 사망자 명단이 적혀있는데 맨끝은 이름을 아직 갖지 않은 젖먹이로 표기 되어 있다. 원컨대 여기 왼쪽의 진광흔 동지와 그 우측이 필자 고순계이다. 그 오른쪽부터는 얼굴이 노출되는 것을 부담으로 망상처리하기를 원함을 밝혀둔다.) |
"1880년생부터 1966년생의 어린이 애기의 영혼들이 지하에서 고이 잠드시고 그 당시 일을 저지른 이들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135분의 영혼 모두에게 사죄를 드립니다."는 진광0 전우의 절규앞에 다른 전우들도 묵묵히 눈시울을 적시며 분향을 하고 막걸리를 따랐다.
가이드 이정근(55, 한국국적으로 부인은 태국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면서 아들은 한국군 복무 중)시는 135명의 비문뒤의 연꽃 그림이 있기까지의 사연을 말했다. 사실은 이곳의 비문을 갖고 갈등을 겪다가 결국 이렇게 연꽃으로 조율이 되었다면서 아직도 월남과 한국은 수교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곳 주민들의 마음의 고향에는 진정으로 수교가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흔히 말하는 베트남 여인과 한국 총각들과의 만남도 월남 남쪽 호치민의 경우이지 중부나 북부에서는 아주 드물다고 말했다.
▲ 위령비 옆에서 소를 방목하고 있는 노부부가 한가롭다(그들은 우리 전우들과 무척 말을 하고 싶어 했으나 어느 누구도 소통을 할 수 없었다. 왜냐면 가이드는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이미지로 남고 싶지 않다면서 벙어리가 되었음을...) |
이 위령제가 반쪽 자리가 아닌 온전한 위령제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월남전쟁이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속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라는 이정근(55, 한국 국적이며 아들은 한국군 복무중)가이드의 해설이다.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을 방문한 '쩐 득르엉' 베트남 주석에게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데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 부총재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이튿날 개인명의의 성명을 내어 "(대통령의 발언은) 대한민국의 명예에 못을 박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겨레21' 남종영 기자)
베트남정치국 전쟁범죄조사보고서는 베트남 전쟁기간 동안에 한국군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 희생자는 5천 여명이 넘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고, 민간인 학살에 대한 연구자들은 9천 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증오비는 50~60개로 추산된다. 하미마을 사람들은 매해 음력 1월 24일을 전후로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진 전우는 하미마을에서 손짖발짖으로 배운 월남말을 총동원하여 그곳에서 소를 치면서 풀을 뜯기던 60세 전후의 주민과 그의 아들에게 주머니에서 잡히는 돈을 몽땅 주면서 자신은 월남인들을 상대로 총을 쏘지는 않았다면서 '나트랑' 지역의 십자성부대 사령부에서 일한 것을 미안해 했다.
진 전우는 전투수당추진이 잘 되어 통과되면 그 수당을 몽땅 이곳 베트남의 자선단체에 기증할 생각이며 남은 여생을 월남의 발전을 위한 일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유교문화의 모계사회이어서 이곳 남자들이 며느리를 데리고 올 때에는 딸을 키워줘서 고맙다면서 통상 지참금 500만원을 처가에 주지만, 외국으로 시집을 갈 때는 1천만을 준다고 가이드는 말한다.
왜 베트남의 미래는 밝은가하는 질문에 인구 9천만중에서 약 50%가 18세 이하라는 점을 들어 베트남의 미래는 밝다고 말하는 가이드는 베트남을 기회의 땅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는 1986년부터 '도이모이 정책'으로 대우를 시발점으로 3천여개의 한국기업이 들어와 있으며 삼성은 500달라 즉 월 약 60만원의 저렴한 인건비로 경쟁력있는 상품들을 만들어 베트남뿐만 아니라 동남아에 수출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 '도이 모이(doi moi)'는 경제 개혁ㆍ개방 정책을 일컫는 용어이다. 도이모이(Doi Moi)란 '새롭게 한다'라는 뜻이다. 베트남판 페레스트로이카인 '도이모이' 정책은 베트남의 사회주의 경제 체제 도입 과정에서의 시행 착오와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1975년에 통일을 이룬 공산 베트남은 그 후 10년간 전쟁 피해 복구와 경제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높은 경제 성장률을 보인 주변 아시아 국가들과의 경제력 격차는 더욱 커지고, 구소련의 몰락으로 원조가 급격히 감소되면서 경제 위기 의식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여건에서 1986년에 시장 경제 활성화와 대외 개방을 근간으로 하는 '도이모이' 정책을 채택하게 되었다.
'도이모이' 정책의 실시로 국가적 소유에서 개인의 소유로 그리고 농업ㆍ가격ㆍ재정ㆍ금융ㆍ무역 및 외환 제도 등 다양한 방면에서 개혁을 단행했다. 즉 공적 소유제가 사회주의에서 유일한 소유 형태라는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 사유제를 포함한 다양한 소유제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했고, 사기업의 경영 자율권을 보장했다. 또한, 개방을 통해 외국 자본과 기술을 유치하고, 해외 시장을 확대함으로써 국내 자원을 최대한 개발할 수 있도록 유도하여 국제 시장 경제의 활성화를 추구한다는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도이모이 정책 이후 베트남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는 물론 우리 나라와도 수교를 맺고 활발한 경제 교류를 하고 있다. 도이모이 정책에 따른 빠른 경제 성장으로 베트남은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동아백과 사전 참조)
우리 국내 은퇴자들 특히 파월 동지들은 국내에서의 귀농보다는 이곳으로의 귀촌(농)으로 인생후반기를 지낼 것을 고민하고 있다는 진광0 동지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마침 그곳에서 소를 키우는 월남 주민에게 다가가 사죄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 "주머니에서 잡히는 돈을 몽땅 그의 호주머니에 넣어주고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진동지는 아름다운 천사와 같았다.
▲ 하미학살마을 위령비 앞의 주택입구에 설치된 복을 부르는 조상위령비 |
필자 고순계/서울시립대학교 ROTC 5기 포병장교로 임관하였다. 1969년도에 육군중위로서 파월하여 기갑연대 61포병 전포대장을 역임하고 대위가 되어서는 맹호사단 사령부 군수처로 자리를 옮겨 철수기획관으로 근무했다. 귀국하여서는 고려대학교 ROTC 군사학 교수를 거쳐 국방대학교에서 육-해-공군 정훈장교반과 지휘관 과정에게는 리더십 과목을 강의하다가 2002년 정년퇴직하였다. 교수학술논문에 고려대학교 최장집 교수의 청와대 퇴출을 지켜보면서 '마녀사냥 치유'의 논문과 군최초로 '단전호흡을 통한 군정신전력 강화방안'을 교수학술논문에 게재했다. 동학-천도교 김 철 교령 보좌역을 하면서 ‘인내천통일중앙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지금은 '1촌1사 평화통일신문'을 발행하면서 '평화통일 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다. 국방전우신문의 논설위원으로서 금번 청룡의 전적지 탐방 기자로서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