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 (1-3)

[서상준]

1. 청춘극장

9월의 늦더위에 권태를 느끼며 자기 방에서 헤밍웨이가 쓴 노인과 바다를 읽는 섭이를 귀찮게라도 하려는 듯이 가족들이 모두 들로 나가고 없는 안방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그냥 끊어지게 기다려도 성가시게 계속 울렸다.

반갑잖게 안채로 올라가 수화기를 잡으니 끊어졌다.

전화기를 들었더니 교환양으로 있는 K양이 “뭐하다가 이제 봤나? 빨리 좀 받아라. 도동 손 씨 아저씨다 연결해 주께 기다려봐라” 하더니 연결이 됐다.

손 씨 아저씨가 대목용(추석) 능금을 상차해야 하는데 포장이 좀 바쁘다며 빨리 와서 상표를 좀 붙여 달라고 하셨다.

섭이가 손씨 아저씨 집으로 놀러 갔다가 일을 하고 있으면 가벼운 일을 도와도 힘든 일을 못하기 때문에 아저시가 일을 부탁하기는 처음이다.

무척 바쁘신 모양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과수원 안에 있는 손 씨 아저씨 집으로 가니 마을 아가씨들이 상차할 사과를 포장하다가 섭이가 나타나자 반갑게 일꾼이 왔다며 상자에 상표를 붙여달라고 부탁 하였다.

손 씨 사과밭에 자주 찾아오는 섭이를 잘 아는 아가씨들이 풀과 상표를 내다 주면서 오늘은 섭이씨도 일을 좀 도와주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손씨 아저씨 전화를 받고 일하러 온 섭이는 상표와 풀 통을 받아 상표를 붙였다.

손 씨 아저씨가 밭에서 나오다가 섭이를 보고는 곧 상차를 하려면 빨리 말라야 하니까 풀을 묽게 해서 풀칠을 가볍게 하라고 하셨다.

섭이는 종종 사과 상자에 상표를 붙여보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아가씨들이 사과를 담아 내놓은 상자에 상표를 붙였다.

대개 사과를 한 트럭 싣자면 여러 과수원 주인들이 의논해서 한 차를 만들기 때문에 짐을 실을 때는 서로 도와서 하지만 오늘은 손 씨 아저씨네 사과만으로 8톤 트럭에 한차를 실어야 하는데 일손이 부족해서 대구에 있는 청과시장에 오후 2시까지 도착하려면 바빴다.

사과를 상자에 담아 상표를 붙이는 것이 트럭에 싣는데 따르지 못해 사과를 가져가는 화주(貨主)가 독촉을 했다.

화장실 갈 여가도 없이 일을 해서 1시에 차가 나갔다.

차가 나가고 나서 일한 아가씨들과 일꾼들이 점심도 못 먹고 고생했다며 큰 솥에 국수를 삶아 열무김치에 말아서 먹고 해어졌다.

모두 나가고 난 뒤에 급하게 상차 시키느라 자네까지 불러 고생시켰다고 인사를 하시고는 “식구가 어제 대구에 가고 없어 좀 적적한데 오래간만에 자네와 같이 냇가에 나가서 피라미를 좀 잡어다가 매운탕으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하셨다.

도동 마을 변두리는 금호강을 끼고 크고 작은 사과밭이 단지를 이루고 있다.

손 씨 아저씨도 이곳에 15년 묵어 수확이 가장 좋은 사과나무 500주도 넘는 큰 사과밭을 가지고 있다.

사과밭 가운데에 큼직한 기와집을 지어서 살고 있다.

집에서 조금만 걸어 나가면 방축 너머에 금호강이 흐른다.

천엽을 좋아하시는 손 씨 아저씨는 초망을 들고 나가서 물고기를 잘 잡는다.

금호강은 투망질을 하기에는 돌멩이가 좀 굻지만 영천 오수동에서 황정 철교 아래까지 초망 질을 하기에 적당하도록 유수(流水)가 느리고 피라미가 많이 놀아 봄부터 가을까지 천엽꾼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강가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밤마다 강바닥에 어항을 놓아 피라미를 잡아서 새벽 기차로 대구에 내다파는 생계형 어부들도 있을 만큼 고기가 잘 잡힌다.

추석을 앞둔 초가을의 금호강은 여름을 지나면서 알맞게 살이 오른 피라미 떼가 강바닥에 흩어져 하얀 비늘을 햇빛에 빤짝이며 놀았다.

그물을 한 폭은 어깨에 걸고 양손으로 나눠 쥐고 냇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고기떼를 한쪽으로 몰아 그물을 던져 포물선으로 퍼져 떨어지기 바쁘게 여울 아래로 뛰며 그물을 당기면 하얀 고기들이 한 그물씩 담겨 나와 금방 먹고도 남을 만큼 잡혔다.

물이 맑은 황정 철교 그늘아래에서 손질까지 해서 들어왔다.

손 씨 아저씨네 집 마당 옆으로 사과 포장작업을 위해 지붕만 있는 큰 헛간과 사과 창고가 있다.

손 씨 아저씨는 석유곤로도 있지만 매운탕은 꼭 마당 한편에 만들어놓은 화덕 위에 양은솥을 올려놓고 손수 끓이신다.

천렵이나 낚시로 잡은 고기를 매운탕으로 끓일 때는 언제나 손수 끓이시며 다른 사람은 손도 못 대게 하는데 그 맛이 아주 일품이다.

손 씨 아저씨는 매운탕뿐 아니고 술안주용 요리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시며  자기 손으로 만든 술안주를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어주면 행복해 하신다.

여름 방학이면 사천강에 나가서 물고기를 잡아 아버지 도시오가 좋아하는 매운탕을 손수 끓였다.

어머니 갓난이는 민물고기는 물론 바다 생선도 비린내가 난다고 만지는 것을 싫어하여 생선이나 물고기는 진하가 늘 장만했다.

혼자서 매운탕을 끓일 때면 고향(개성) 생각이 나는지 서정적인 노래를 곧잘 불렀다.

올해 만60세로 지난봄에 회갑을 지내셨지만 건강하시고 운동을 좋아하는 근육질에 젊은 사람 못지않게 힘이 세다.

술을 좋아하여 혼자서도 잘 마시며 한잔 하시고 기분이 좋은 날이면 노래를 아주 멋 떨어지게 부르신다.

농사군 답지 않게 서재(書齋)에는 상당한 서적을 1000여권 장서하고 계시며 아는 것이 많으나 말이 적고, 군수 영감님과 경찰서장님도 자주 찾아와 술을 나누었다.

평소에는 이해하기 어렵도록 무거운 분위기를 지니고 계시면서 술에 취하기를 좋아하시나 흐트러짐이 없다. 

혼자 있을 때면 슬픈 느낌을 주는 노래를 잘 부르시는데, 진방남의 「불효자는 웁니다,」 현인의 「비 내리는 고모령,」 술이라도 한잔 하시면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을 구성지게 부르시는데, 노래 가락에서 고독과 슬픔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특히 자주 부르시는 이애리수의 노래 「황성의 옛터에」를 부를라치면 목이 메어 눈물까지 흘리셨다.

//타관 땅 밟아서 돈지 십년 넘어 반평생 사나이 가슴 속에 한이 서린다. 황혼이 찾아들면 고향도 그리워져 눈물로 찾아도 보네

불러 봐도 울어 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원통해 불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해도 다시 못 올 어머니여 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화덕 위에 올려놓은 양은솥에 매운탕을 끓이시면서 오늘은 취하기도 전에 부지깽이로 땅바닥을 치며 불효자는 웁니다. 이 노래를 숙연한 느낌이 들도록 처량하게 부르고 계신다.

늦게 얻은 두 아들은 대구에서 아직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고, 나이차가 10년 이상 나는 부인과 조용한 과수원 속에서 행복스럽게 살면서도 항상 애수에 젖은 노래를 부르므로 아주머니가 청승맞은 노래만 부르신고 핀잔을 하지만 대구도 않고 불렀다.

양은솥에서 매운탕이 끓는 동안 나무토막 의자에 앉아 노래를 부르시는 아저씨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슬슬해 보인다.

섭이는 매운탕이 끓을 동안 할 일이 없어 마당을 어슬렁거리다가 평상 위에 소설책이 놓인 것을 보고 집어 드니 김래성이 쓴 「청춘극장」이다.

섭이는 중학교 다닐 때부터 폐결핵을 앓아 고등학교를 가지 못하고 꿈 많은 청소년 시절을 병마와 싸웠다.

고등학교는 가지 못했지만 머리가 명석해서 자습으로 역사, 문화, 지리, 철학 등 다양한 책을 많이 읽어 젊은이로는 지식이 해박한 편이다.

섭이는 22살에 병원에서 폐결핵이 완치 되었다는 진단을 받았으나 체력이 허약하고, 폐결핵을 앓은 병력(病歷)때문에 병력(兵力)을 면제 받았다.

섭이 고향은 청송군 정자목이다.

고향에서 스물두 살적에 작은 고모가 살고 있는 영천읍 금로동으로 이사를 왔다.

주남들 대구선 철길 옆으로 6000평 정도의 논농사를 자작하는 아버지 덕택에 생활은 어렵지 않지만 오랜 폐결핵으로 체력이 약해 가벼운 일은 돕기도 하지만 힘든 일은 하지 않고 소설가의 되려고 열심히 습작을 하고 있다.

섭이가 손 씨 아저씨를 알게 된 것은 1969년 여름이었다.

친구들과 같이 죽뱅이(竹方) 마을 앞에서 고기를 잡다가 유리병 조각에 발이 베어 피를 흘리고 있는 아저씨를 만났다.

혼자서 고기를 잡다가 강바닥에 깨진 유리병 조각에 발이 베어 피를 흘리는 손씨 아저씨에게 달려와 입고 있던 러닝샤스를 벗어 찢어서 상처를 메어 지혈을 시키고 타고 온 오토바이에 태워 읍내 의원으로 가서 치료를 해 드렸다.

낮선 청년이 거침없이 자기 샤스를 찢어 상처를 싸매주며 병원까지 데리고 가서 치료비까지 내주는 의협심이 고마워 손 씨는 다음 날 읍내 나가서 러닝샤스 세트와 작은 선물을 사들고 금로동 섭이네 집을 찾아갔다.

손 씨 아저씨는 젊은 친구가 120cc나 되는 오토바이를 타는 것으로 보아 건달꾼으로 여겼는데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니 생각이 깊고 심성이 착한데다 지식이 풍부한 것을 보고는 조카처럼 친하게 지내고 있다.

폐결핵을 앓아 허약한 섭이를 위해 낚시로 큰 잉어나 민물 장어를 잡게 되면 곰을 고아서 보내주시는가 하며, 종종 전화로 불러내어 강물에서 천엽을 하거나 안강 하곡 저수지(霞谷 貯水池=일명 딱실 못)나 청통 풍락저수지, 혹은 형산강으로 낚시질을 다녔다.

생각이 깊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섭이가 써놓은 글들을 읽어보고 격려와 조언을 해주며 해박한 지식으로 여러 가지 스승노릇을 해 주셨다.

섭이도 연세에 비하여 젊은 사람을 잘 이해하고 지식이 풍부하신 손 씨를 아저씨라고 부르며 스승처럼 존경하고 따랐다.

섭이는 주왕산 자락의 작은 정자목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폐결핵으로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못하고 자습으로 소설가의 꿈을 가지고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친구들이 방학을 맞아 집에 내려오면 같이 어울려 정보와 지식을 나누었다.

친구네 마을 4-H 자원지도자(필자 註 : 4-H는 1910년 미국에서 시작하여 1947년 3월 경 우리나라에 도입된 농촌 청소년단체를 지도하는 부락 유지)인 남봉현 형이 섭이네가 어울려 노는 곳에 찾아와서 농촌에서 태어난 젊은 지식인들이 농촌을 살려야 한다며 농촌운동을 하자고 하였다.

4.19 학생혁명으로 자유당 독재정권을 몰아냈고,  5.16 군사 혁명으로 민주당 부패정권을 몰아냈지만 앞으로는 삽과 낫을 든 농민들이 일어나 농민혁명을 일어나야 하는데 농민 혁명을 위해 청년 지식인들이 우리나라를 덴마크처럼 농업복지국가 개발에 앞장을 서라고 하였다.

농촌운동에 뜻이 없는 친구들이라 남봉현 형의 웅변은 실효를 얻지 못했다. 그래도 농도원이나 농촌진흥원에서 실시하는 4-H 교육이 있을 때마다 다녀오라고 권했다.

모두 4-H 교육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중학교를 졸업한 후 병마로 집에서만 지내온 섭이가 따분한 일상에서 잠시의 탈출하고 싶어져 방학을 맞아 집에 와 있는 친구들을 꼬드겨 대구 방촌동에 있는 경상북도 농촌진흥원에서 실시하는 농공훈련에 참가 했다.

두 주간의 농공훈련은 섭이에게 새로운 청량감을 주지는 못했지만 글쓰기를 좋아하여 각 시군에서 한두 명씩 온 4-H회원들과 서로 연락을 주고받게 된 것이 유익한 결실이 되었다.

섭이가 교육을 마치고 돌아 온 날 저녁 남봉현 형이 자기 밭에서 수확한 수박을 한 통 들고 교육을 받느라 수고 했다며 섭이네가 모여 노는 곳으로 찾아왔다.

남봉현 형 집에서 방을 빌려 통일교를 포교하고 있는 아가씨 김 선생이 따라와서 섭이네 들에게 접근하였다.

대구에서 온 김 선생은 도회지 아가씨답게 세련된 용모였으나 통일교 교인이라 하여 경원(敬遠)하는데도 괘념치 않고 말참견을 하며 친해보려고 했다.

김 선생은 자기도 고등학교 시절 문학소녀였다며 어설픈 문학론으로 말참견을 하며 미리 섭이내 친구들의 이름을 알고 왔는지 말 할 때마다 이름을 부르며 적극적으로 파고들었다.

봉식이가 늦게 저희 포도원에서 딴 포도를 한 소쿠리 가지고 들어와서 “오늘 읍내 갔더니 극장에서 김래성의 원작 청춘극장을 상영 하더라 내일 저녁에 영화 보러 가자”고 하였다.

종환이가 봉식이가 가져온 포도를 먹으면서 “이 더운 여름에 극장은 무슨 극장이고 차라리 바둑이나 두자” 하였다.

봉식이는 영화가 보고 싶은지 “사람들이 영화가 잘 되었다고 하더라.”며 극장에 가자고 하였다.

남봉현 형이 나서서 청춘극장 소설을 읽어보았더니 젊은 사람들이 꼭 한번 읽어 볼만한 훌륭한 소설이었다며 꼭 한번 읽어보라고 권했다.

이야기가 영화에서 소설로 바뀌자, 통일교 김 선생이 말참견을 하고 나와 자기는 영화도 보고 소설도 읽었는데, 영화보다는 소설이 더 잘 되었다며 줄거리를 이야기하며 아는 채 하였다.

섭이네들은 별 흥미도 없는 이야기를 남봉현 형과 김 선생이 계속 늘어놓다가 집에서 남봉현 형을 불러 일어나자 김 선생도 같이 나갔다.

남봉현 형의 6촌 동생인 대현이가 형이 나가자 청춘극장은 문학성이 없는 흥미 소설로 사건과 인물 배역이 어색하다고 폄하했다.

벼들이 익을 무렵 대구 병원에 가서 정기 검진을 하고 오던 섭이는 버스 안에서 책을 파는 장사꾼들이 올라왔다.

두 사람이 열변을 토하며 소개하는 책은 「협객 김두환」과 「청춘극장」 두 권이었다.

반에 반값도 안 되는 100원에 두 권을 준다고 하였다.

달포 전 남봉현 형과 통일교 김 선생이 청춘극장 소설과 영화를 극찬 하던 일이 생각나서 대현이가 문학성이 없는 흥미 소설이라고 비평했지만 100원이라는 싼 값에 구미가 당겨 샀더니 해적판인지라 인쇄나 제본이 조잡하고 읽는 중에 책장이 빠져나왔다.

내용도 젊은이들이 읽어야할 책이라고 말하던 남봉현 형이나 김 선생의 말과는 달리 대현이 말처럼 철학이나 문학성 보다는 흥미소설에 불과하였다.

손 씨 아저씨 집 평상에 놓여있는 이 책은 正本이다

버스 안에서 섭이가 샀던 해적판과는 달리 인쇄와 제본이 깔끔하다.

아는 내용이지만 심심하여 뒤적이고 있는데, 매운탕을 다 끓인 손 씨 아저씨가 술병을 내어 오시면서 “그 책은 아까 화물차 운전수가 보고 있더니 놓아두고 갔는데 자네가 보고 싶으면 가져가서 봐라” 하셨다.

책을 덮으면서 “책 주인에게 돌려줘야지요. 저 이 책을 전에 읽어 보았습니다.” 하고 일어나 술병을 받아 평상에 술상을 차렸다.

매운탕에 라면을 넣어서 물에서 뛰고 놀다가 와서 시장했던 탓인지 매운탕도 매운탕이지만 라면 맛도 아주 일품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양주를 마셔보는 섭이는 소주처럼 홀짝 마셨다가 깜짝 놀랐다.

멋모르고 마셨는데 목과 코를 팍 쏘며 입안에 불이 나는 것 같더니 머리가 찡하며 정신이 아찔했다.

술을 입에 넣다가 놀라는 섭이에게 “젊은 사람이 그까짓 걸 가지고 뭘 그러느냐” 하시며 펌프에서 갓 퍼낸 찬 물을 조금 타주었다.

소주 한 병 주량은 되는 섭이지만 세 잔을 마시고나니 소주와는 달리 취기가 확 올라왔다.

사과 밭에서 울어대는 말매미 소리로 평화로운 석양녘 좀 시장 했던 섭은 매운탕 속에 든 뜨거운 라면을 먹으며 마신 양주 몇 잔에 취기가 올라 혀가 약간 꼬부라진 목소리로 청춘극장 이야기를 꺼냈다.

“아저씨 제가 청춘극장 저 소설을 읽어보았는데 말입니다. 작자 김래성 선생님이 양반 댁 귀공자님 이셨는지는 몰라도 좀 더럽게 썼더라고요.”

말은 정중하나 뼈가 있는 말에 손 씨 아저씨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작가 김래성 선생님이 소설을 더럽게 섰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하고 반문을 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김래성하면 일제하에 탐정소설 「마인」 「백가면」 「비밀의 문」등을 발표했고, 해방 후로도 대중소설 「인생화보」 「청춘극장」 「행복의 위치」 「인생안내」등으로 대중의 인기를 모은 작가다.

섭은 취기에 혀가 고부라져 흥분한 어조로 “청춘극장을 읽어 보셨습니까? 못 읽으셨다면 제가 설명을 좀 해 드리지요.” 하더니 “아저씨는 양반이셨습니까? 저의 조상님은 청송 심씨네 산지기를 지낸 천한 상놈이었습니다. 그래서 철이 들자, 무식하고 배운 것이 없는 아버지를 독촉해서 제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 산천을 버리고 지금 살고 있는 금로동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저는 앞으로 소설가가 되고 싶습니다. 김래성 선생님의 청춘극장 같은 무책임한 흥미소설이 아니라 인간애가 넘치는 희망의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김래성 선생님 그 분은 청춘극장에서 사대부 양반님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아온 상놈의 아들인 준길이는 아주 나쁜 악질 왜놈의 앞잡이로 만들어 놓고 말입니다. 나라를 망하게 한 사대부 양반 댁 도련님들은 독립운동을 하는 훌륭한 애국지사 배역을 맡겨주었더라고요. 양반집 도련님들은 어릴 때부터 상놈의 아들 준길이를 멸시하고 따돌리며 상놈의 새끼는 공부도 못한다고 놀리고 괴롭혔습니다. 미움과 천대에 대한 반항과 증오심으로 말미암아 삐뚤어진 준길이는 양반님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지 않고 살기 위해서 왜놈 헌병 보조원이 되더군요. 이런 준길이를 양반 댁 아드님들은 상놈의 자식이라 천성이 악하고 비겁해서 민족을 배신하고 왜놈의 앞잡이가 되었다고 증오하며 더욱 미워하더란 말입니다. 소위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애국운동을 하면서까지 천출로 태어나 자기를 천대하며 짓밟아온 양반님들의 구박에 반항하는 준길이를 이해하기보다 더 잔인하게 미워하는 이율배반적인 소설이더란 말입니다. 진정 일본의 압제로부터 조국의 해방을 꿈꾸는 애국청년들이라면 자기들의 멸시와 천대에 대하여 자주하고 싶어서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버린 상놈 준길이의 신분 독립을 이해하고 그를 멸시하고 천대한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빌며 앞으로 해방 될 조국 강산에서 함께 살아야 할 동포요 민족으로 품어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네의 주권은 찾겠다고 일제를 향해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비겁하게 준길이의 주권은 생각해 주지 못하고 계속 상놈의 새끼라고 멸시하며, 일본의 앞잡이 라고 원수시하는 그런 잘못된 가치관으로 쓰인 생명이 없는 소설이드라 말입니다. 사대부 양반들에게 인간 이하의 멸시와 천대를 받던 천한 상놈의 자식이 서럽고 한 많은 세상에서 자신의 자주독립을 위한 신분의 변화를 위해서라면 왜놈 헌병들의 앞잡이가 아니라 그 어떤 짓도 못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천대 받는 준길이로서야 천대하는 민족보다 쥐꼬리만 한 힘이라도 쓸 수 있게 해주는 왜놈 헌병 앞잡이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진정한 지성인이요 애국지사들이라면 준길이를 이해하고 한겨레동포로 돌아와 줄 수 있도록 품어주어야 옳지 않나 말입니다. 양반집 자제들에게 짐승보다 못한 천대를 받으며 굶주림의 가난 속에서 자란 준길이로서는 사대부 양반님들이 망해 먹은 조국이나 자기를 천대한 민족보다야 배부르게 먹고 살 수 있게 해준 침략국 일본이 고맙고, 자기를 무시하고 천대하던 양반님들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처 들고 큰 소리 한번 빵빵 칠 수 있게 해주는 일본 헌병들의 앞잡이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더러운 부귀영화를 위해 과거급제나 꿈꾸었던 조선의 양반님들이 일본 놈의 헌병 앞잡이가 된 준길이 보다 나은 것이 무어란 말입니까? 저는 준길이가 왜놈 앞잡이가 된 것이야말로 양반님들이 저질러놓은 업보에 대한 상놈이 할 수 있는 통쾌한 복수였다고 생각합니다. 불쌍하고 천한 상놈의 아들 준길이를 왜놈의 앞잡이로 만든 것은, 상놈을 인간 이하로 멸시하고 천대하며 나라를 망해먹은 자칭 사대부라는 양반 오리(汚吏)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준길이의 인권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면서 자기들의 인권과 주권을 찾겠다고 독립운동을 하는 양반님네 자제들은 지성인을 갖춘 애국자로 만들어놓은 이런 소설 나부랭이야 말로 우스운 난센스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상놈이 자기를 천대하며 짓밟고 멸시한 그런 조국과 민족이야말로 철천지원수가 아니고 무엇이었겠습니까? 비록 천대 받은 상놈이 아니라도 먹고 살기 위해 일본헌병 앞잡이가 된 자가 있어도 이 땅에서 태어난 같은 민족이기에 조국이 해방되면 함께 살아가야할 동포로 알고 조건 없이 용서 해 주고, 민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사랑해 주어야 진정한 지식인이요, 독립을 꿈꿀 수 있는 애국지사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조국의 독립을 꿈꾼다고 하는 소위 애국청년들께서 상놈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왜놈 앞잡이가 되었다고 증오하는 이따위 소설을 쓴 작가님이야말로 고약하고 몰지각한 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남들에게 하대를 받으며 사시는 것을 보고 자라난 서럽고 천한 상놈의 후손이라 가슴 속에 한이 서린 놈입니다. 조선에 양반님들 孔孟의 이름을 팔아 권력의 칼을 휘두른 인 백정(人白丁)이요, 순박한 백성들을 착취해 먹은 탐관오리 모리배(謀利輩)들이었기에 이 나라가 일본에 망하지 않았습니까? 진정한 애국자요, 선비라면 말입니다. 자기네 양반들이 민족을 배반했던 과거를 통회하고 반민족 행위를 하는 자들이라도 가슴에 품어 안고 민족일체를 이루려고 노력해야 진정한 지도자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천한 자들에게도 그들의 재능과 능력에 따라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도록 길을 열어주었더라면 그 나라를 자기 조국으로, 그 민족을 자기 동포로 지키며 보호하였을 것입니다. 조선의 참 선비 연암 박지원 선생님을 보십시오. 재능 있는 서출(庶出)들을 얼마나 아꼈습니까? 참된 작가라면 왜놈 헌병 보조원으로 전락한 준길이의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실에 가슴 아파하며 동포로서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소설을 썼어야 진정한 지식인이요. 그런 소설이라야 생명이 있는 문학이 되지 않겠습니까? 상놈의 인권과 주권 따위는 짐승처럼 멸시하고 천대하므로 준길이 같은 상놈들을 나라와 민족을 버리고 왜놈의 앞잡이가 되도록 해 놓고 자기들의 주권은 찾겠다고 일본의 지배로부터 독립하겠다니 이런 가관(加冠)이 어디 있습니까? 양반들의 지난날의 과오를 후회하며 상놈 준길이에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으로 자기들의 잘못을 용서 빌어서야 상놈도 준길이도 일본에 등을 돌리고 민족의 품으로 돌아올 여력이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나라를 망해 먹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여전히 상놈을 멸시 천대하며 우쭐되는 양반 자제님들은 지성을 갖춘 애국자로 만들어놓은 이따위 소설 나부랭이가 무슨 문학이며 예술이냐 말입니다. 이런 소설 나부랭이를 칭송하고 있는 이 나라 이 사회에 무슨 내일의 민주국가로서 희망이 있겠습니까? 아직도 이런 소설 따위의 정신문화를 가진 사람들 때문에 해방 된 후 오늘까지 이 나라 이 강산이 분열과 부도덕한 늪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본의 앞잡이가 된 천한 상놈들이 반민족 자가 아니라 가난한 백성을 착취하고 멸시 천대하여 왜놈의 앞잡이가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놓고 독립운동입네 하면서도 서로 감투싸움이나 했던 양반네들이이야 말로 진정한 반민족 자들이 아니었습니까? 연합군의 승리로 해방을 얻어놓고도 자기반성은 없이 친일 운운하는 무리들 때문에 국론이 분열하고 사회 갈등이 증폭되고 있지 않습니까? 양반으로써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 오적이 아니라면 그 어떤 친일 행위도 탓하지 말고 나라와 민족을 지키지 못한 지난날의 잘못을 자성하고, 정말 나라의 독립을 생각하던 애국 지성인들이었다면 친일을 한 자들까지도 해방 된 조국 강산에서는 함께 살아가야할 동포요 겨레로 알고 가슴에 품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김래성 선생님이 쓰신 청춘극장이 그런 훌륭한 소설이었다면 얼마나 멋지겠습니까? 이승만대통령께서 반민족특위를 해체한 것을 비난하는 인간들을 저는 시대의 아픔을 모르는 악질분자 놈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부모님은 무식해서 천대를 받으면서도 억울한 줄 모르고, 친일도 빨갱이도 해보지 못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제가 더 분노하는지도 모릅니다. 아저씨 제가 취했나 봅니다. 용서하십시오. 너무 횡설수설했습니다.”

때 아닌 섭이의 분노한 넋두리를 넋 나간 듯이 앉아서 듣고만 있던 손 씨 아저씨는 섭이가 토해낸 항변에 뜨거운 전율이 느껴졌다.

“자네가 한 말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어! 맞아, 그래 이야기를 계속 해봐라. 자네가 하는 말에 논리는 서툴었다마는 내 평생 처음으로 스승을 만난 것 같다. 오늘 해가 저물고 밤을 새우더라도 자네와 같이 마음을 열어놓고 정말 한번 취해보자!”

(계속)

어린 날의 회상

손 씨 아저씨는 섭이가 토하는 항변을 들으며 여러 잔을 마신 취기 탓으로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뜨거운 매운탕은 양주 안주로는 적당하지 않은 것 같다.” 하시며 안으로 들어가 섭이는 구경도 못해 본 쇠고기 육포와 마른안주에 정종을 한 병 가져 오셨다.

손 수 술잔을 채우시더니 섭이 잔을 부딪치며, “오늘은 젊은 자네와 내가 동지가 되어 보자.” 하고는 두어 잔을 거푸 마시더니 육포 안주를 씹으며 취기에 상기된 얼굴로 “마누라에게도 말 하지 못했지만 누구와 한번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젊은 자네와 같이 나눌 수가 있어 오늘이야말로 내가 살아온 보람이 있는 날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자네가 이다음에 내 이야기를 소설로 써준다면 더 큰 영광은 없겠구나?” 하시더니 60평생을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자신의 인생파노라마를 쏟아냈다.

선출(先出)이는 양산 범어(凡魚)리에서 성 참봉(成 參奉) 댁의 하인인 손 집사의 아들로 세상에 태어났다.

참봉 댁에는 선출이네 네 식구와 정돌이 영감 내외, 그리고 어린 딸과 같이 사는 순달이 모녀가 하인으로 행랑채에서 살았다.

담 밖에는 소를 먹이는 마구간이 달린 여러 채 오막살이 초가집에는 머슴들이 살고 있어 머슴집이라 불렀다.

전에는 이 집에도 하인들이 살았으나 갑오경장 후 10여년 지나면서 하나 둘 내보내고 갈 곳 없는 정돌이 영감 내외와 순달이 모녀만 남았다.

손 집사는 참봉 어른이 떠나지 말라 하고는 장가를 들자 집안 집사를 맡겨주었다.

머슴 집 마당 옆으로 있는 큰 돼지우리에는 여러 마리 돼지가 있어 명절이나 집안에 큰 일이 생기면 머슴 집 마당에서 한 마리씩 잡을 때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와서 구경을 하다가 내장을 삶아놓고 순달이 엄마가 내다주는 농주와 함께 얻어먹었다.

참봉 어른 댁에는 선출이보다 한 살 더 먹은 3대 독자인 손자 석이 도련님이 있었다.

도련님은 심성이 착하고 재주가 특출해서 일곱 살 어린 나이에 눈을 감고도 사서삼경을 줄줄 외워 주위에서 천재라고 칭송하였다.

여덟 살 어린도련님은 끼니를 굶는 마을 아이들을 불러다가 부엌에서 일하는 순달이 어미에게 부탁해서 밥을 먹게 하고는 동몽선습(童蒙先習)과 계몽편(啓蒙編)을 창호지에 써서 벽에 붙여놓고 가르쳐주었다.

참봉 댁 마님은 그런 손자 석이가 앞으로 큰 사람이 될 재목 같다며 그 소행을 기특하게 여기고 순달이 어미에게 항상 가마솥에 밥을 해놓고 마을 아이들을 데려오면 배부르게 먹도록 하라고 시켰다.

배가 고팠던 아이들은 석이 도련님에게 글을 배우는 것 보다 밥을 얻어먹는 것이 좋아 행랑으로 모였다.

선출이는 석이 도련님에게 글을 배우는 것이 재밌었다.

일곱 살 난 선출이가 동몽선습을 보지도 않고 줄줄 읽는 것을 본 손 집사는 아이들에게 진작 글을 가르쳐주지 못한 것을 깨닫고 책과 연필 공책을 사다가 저녁이면 선출이와 후출이 그리고 아내 갓난이에게까지 글을 가르쳤다.

손 집사는 남의 집 하인이지만 선비들 못지않게 한문에 능통하고 일본 말을 잘 했다.

청일전쟁 후 국력이 기울어지고 일본 세력이 밀려들어오자 성 참봉은 자기 옆에 일본말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어린 아들에게 일본 말을 가르쳤다.

마침 마을에 젊어서부터 일본 역관을 지내다가 관청에 미움을 받아 물러난  박 서방이란 사람이 마을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참봉 어른은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박 서방이지만 어릴 때 같이 자란 동갑으로 일본 역관으로 견문이 넓어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라 외아들에게 한문과 일본 말 선생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참봉어른은 아들보다 두 살 아래인 하인 용바우도 같이 한문과 일본 말을 배우도록 해주었다.

하인의 아들인 봉술이는 일만 시키면서 용바우는 자기 아들과 같이 공부만 하게 하였다.

성 참봉이 자기 집 하인을 아들과 같이 공부를 시킨 것은 대단한 개혁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용바우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는 말처럼 두 번 가르칠 필요가 없도록 재주가 총명했지만 엄마가 주인의 아들보다 늘 뒤 따라가는 채하라고 하여 주인의 아들이 칭찬을 듣게 하였다.

시간만 나면 독서를 하는 용바우의 한문 실력은 참봉 어른도 물어볼 정도다.

선출이가 저녁마다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면서 실력이 놀랍게 자랐다.

아홉 살 난, 석이 도련님을 물금에 있는 소학교에 보내면서 여덟 살 난 선출이도 같이 다니게 하였다.

학교에 보내주는 참봉 어른의 속심에는 선출이를 교육시킴으로 용바우 마음을 얻으려는 의도와 함께 선출이가 석이 도련님의 어린 경호원으로 붙여두려고 생각 했는지도 모른다.

선출이가 석이 도련님보다 한 살 어려도 키와 체격이 비슷하고 힘은 훨씬 세어 마을에서 아이들이 석이 도련님과 싸움이라도 할라치면 선출이가 대신 싸워 때려눕히므로 감히 싸우려 드는 아이들이 없었다.

석이 도련님은 부모님이 없다.

동래군 유지들이 단오 날이면 해마다 낙동강 변에서 씨름과 추천(鞦韆그네) 대회를 열었다.

일본의 침노에 분노한 유지들이 젊은이들에게 애향심과 기세를 키워주기 위해 만든 행사다.

동래군, 양산군, 김해군은 물론이고 창원군과 밀양군 등 원근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와서 각 지역 면단위 기(氣)싸움이 대단하였다.

석이 도련님의 아버지 새 서방님께서 머슴들과 머슴 아녀자들을 시켜 물금면 선수와 청년들에게 먹일 음식을 준비해서 소달구지에 실어 따르게 하고 면내 청년들과 어울려 구포 행사장으로 갔다.

새 서방님은 의협심과 든든한 재력이 있어 항상 면내 청년들을 몰고 다녔다.

점심을 먹고 나자 술을 마신 청년들의 기 싸움이 거칠어지고 있을 때 다대포에 있는 일본 군인들이 외출을 나왔다가 추천대회와 씨름판을 구경 하다가 청년들의 시비에 걸려들어 폭행을 당했다.

술에 취한 청년들이 일본 군인들과 패싸움이 되자 새 서방님이 성난 물금 청년들을 말리고 있는데 영문도 모르고 얻어맞은 일본군인 하나가 분을 못 이겨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마구 휘두르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옆구리를 맞았다.

칼이 깊이 찔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새서방님을 청년들이 업고 구포에 있는 의원을 찾아갔더니 응급치료를 해서는 동래에 있는 일본 양의(洋醫)를 찾아가라고 하였다.

동래로 가서 일본 양의에게 치료를 받았으나 낫지 않고 여름이 되면서 상처가 속으로 곪아 백방으로 치료했으나 고생만 하다가 추석을 앞두고 죽었다.

성 참봉은 아들의 죽음을 어디 한번 제대로 호소도 해보지 못했다.

관청에다 호소를 해보았지만 국력이 없다보니 일본 군인들이 한 일이라 어물거리기만 하였다.

다대포에 있는 일본군 부대를 찾아가 항의를 해보았으나 조선청년들이 먼저 시비를 걸어 생긴 사건을 따지려 든다며 분노한 일본군 장교가 오히려 성 참봉의 뺨을 때렸다.

평생에 처음으로 뺨을 맞아 본 참봉어른은 억울하고 분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남편을 잃은 새 아씨는 얼이 빠져서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늘 울기만 하다가 실성해져서 돌아다니더니 석이 도련님이 겨우 두 돌을 지날 무렵 세상을 뜨고 말았다.

참봉 댁에서는 조실부모한 석이 도련님을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키웠지만 응석을 부리거나 말썽을 부리지 않고 반듯하고 착하게 자라고 있었다.

참봉어른은 아들이 죽고 나서 글재주가 좋은 용바우에게 집안 재산관리를 전부 맡기며 집사라고 불렀다.

참봉 어른이 용바우를 집사라고 부르면서부터 집안에서 모두 집사로 부르고 작인들과 머슴들은 아예 집사님으로 존칭하여 불렀다.

진사공 산소에 석물을 교체하고 집으로 들어가던 참봉어른이 양산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잡혀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참봉어른의 조부이신 진사 공 산소는 병풍처럼 둘러친 청룡산 자락에 낙동강을 바라보는 양지에 있다.

45년 전에 세워 놓은 비석 뒷면에 進士公의 공적을 적어놓은 글에 진사(進士)라고 써야 하는 글자 한 자가 나아갈 진(進)자가 아닌 구슬 진(璡)자로 잘못 새겨져 있는 것을 가을 시제(時祭)를 지내다가 발견하였다.

진사공 비석을 세울 때 손 집사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참봉 어른도 열댓 살 어린 시절이라 살피지 못한 것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발견하게 되었다.

참봉 어른은 집안에 이런 큰 실수가 있느냐며 당장 교체를 하자고 했으나 주위에서 산소에 있는 석물(石物)은 함부로 손대는 것이 아니라며 한식에 가서 교체하는 것이 좋다고 권하여 그렇게 하기로 했다.

가을부터 겨울 내 참봉 댁의 화두는 진사공 산소 석물을 교체하는 일이었다.

1919년 한식일은 음력 3월 초엿새(양력 4월 5일)였다.

하필이면 이 날에 밀양군 부북면의 예림서원에서 창원, 밀양, 양산 등지의 유림들의 급한 회의가 소집이 되었다.

학문이 빈약해 유림 선비들과 어울리지 못하였던 성 참봉이 지난해 겨울부터 참석하며 임원까지 맡아보게 되었다.

유림에 어울리는 것이 숙원이었던 성 참봉은 유림의 일이라면 집안일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다.

부득이 진사공 산소에 석물을 교체하는 날을 한식 하루 전인 삼월 초닷새 로 당겼다.

산소는 아무 때나 손을 대면 안 된다고들 하는데 그러신다면서 마님이 유림에 못가시더라도 한식에 하자고 말렸지만 참봉 어른은 “유림 선비들의 모임이 어떤 모임인데 빠질 수 있단 말이냐?”며 기어이 초닷새로 밀어붙였다.

손 집사가 머슴들과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안골에 있는 진사공 산소로 가서 비석(碑石)을 교체하는데, 날씨까지 좋아 소달구지에 점심밥을 싣고 가는 작은 머슴을 따라 동내 아낙들은 동이에 국을 담아 이고, 노인네와 아이들도 따라나서 행렬을 이루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하얀 쌀밥에 고깃국으로 배가 부르도록 먹고 떡까지 얻어서 가져가는 등 안골은 온통 마을 소풍잔치가 되었다.

연초부터 큰일을 한다고 준비는 떠들썩했지만, 일이 단조로운데다 마을 젊은이들이 모두 나와 거들어 일찍 마치고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참봉어른과 마을 노인네들은 먼저 내려가고, 손 집사가 마을 젊은이들과 머슴을 데리고 마무리를 하고 나서 일꾼들은 남은 술항아리를 비우고 세 마리 소달구지에 올라타고 쾌지나 칭칭나네를 부르며 내려오는데, 마을에서 총각 하나가 급하게 뛰어 오더니 참봉 어른께서 순사들에게 잡혀갔다고 알렸다.

일행이 모두 놀라 소 달구지에서 내려와 어떻게 된 일이냐고 하였으나 전달 온 총각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아는 것은 없었다.

손 집사가 급하게 일꾼들 보다 먼저 집으로 달려갔다.

참봉 댁 마당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몸이 약해 평소에는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으시는 마님까지 바깥마당에 나와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집에 있었던 정돌이 영감이 “참봉어른께서 집에 들어와 두루마기를 벗어놓고 세수를 하는데, 일본 순사와 헌병들이 찾아와 조사 할 것이 있으니 경찰서로 같이 가 달라며 모셔갔다”고 하였다.

손 집사는 우선 참봉 어른이 밤에 입을 따뜻한 솜옷과 용돈을 좀 챙겨서 자전거를 타고 양산경찰서로 갔다. 

저녁때 기온이 서늘해지자 머슴들이 마당에 헌 가마솥을 내다가 숯불을 피워놓고 손 집사가 오기를 기다리던 마님은 늦어지자 온 집안에 불을 켜 놓게 하고는 안채로 들어갔다.

밤이 제법 깊어서야 자전거 소리와 함께 손 집사가 땀에 젖어서 들어왔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마님 방에서 오랫동안 있다가 나왔다.

그 동안 마을 사람들도 가지 않고 머슴들과 같이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손 집사가 나오자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손 집사는 아직은 영문을 모른다고 하였다.

참봉 댁은 바깥채와 안채 사이에 담 밖으로 드나드는 작은 문으로 나가면 별체가 있다.

별채는 뒤로 대나무가 숲을 이룬 아늑한 양지다.

안채 마당보다 서너 자(尺) 높은 곳에 지어져서 안채에서 보면 담이 무척 높고, 평소에도 아이들의 출입을 금하는 곳이다.

지난 연말부터 이 별체에 나선 손님들이 자주 찾아들었다.

성 참봉은 학문이 없는데다 이름뿐인 종 9품의 참봉벼슬도 돈을 주고 샀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그런 성 참봉이다 보니 그 동안 선비들의 모임인 유림에 들어가지 못했다.

밀양, 창원, 양산. 김해, 동래 등에서 유림들이 반일(反日)운동을 하다가 3.1 만세운동 기운이 태동하면서 자금을 모았으나 대부분의 부호들은 일본에 밀착 되어 있어서 자금을 부탁 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처사인지라 아예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범어리에 살면서 물금과 삼량진 벌에 삼 천석 지기가 넘는 토지를 가진 성 참봉 아들이 일본 군인들의 칼에 맞아 죽고, 동양척식회사가 토지 조사를 하면서 천석 지기가 넘는 토지를 등기가 되지 않은 땅이라 하여 빼앗기고 말았다.

재정이 필요했던 유림 선비들은 평소에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성 참봉이지만 일본에 한이 많은 사람이라 도와 줄 것으로 믿고 찾아들었다.

성 참봉은 일본에게 아들과 재산을 잃은 적개심을 어디다 말 한마디 못하고 울분을 삭여왔는데, 평소에 동경했던 유림 선비들이 이렇게 찾아와서 나라를 찾는 일에 참봉도 같이 하자고 했다.

유림 선비들과 얼마나 왕래를 하고 싶었던가?

이렇게 찾아와 나라를 찾는 일에 같이 하자고 부탁하자 참봉도 선비들에게 잘 오셨다며 유림을 위해 쌀 천석 금을 쾌히 내놓고 각처 농가에 놓아둔 수 백 마리 소 가운데 100마리를 거두어 팔아내겠다고 하였다.

성 참봉의 큰 손에 유림선비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유림 선비들은 소 백 마리에 쌀 천석 금을 쾌척한 성 참봉에게 의기(義氣)가 있는 선비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지금까지 이런 선비를 몰라본 것이 미안하다며 유림의 무임소임원으로 넣어주었다.

유림선비들과 어울리는 것도 반가운 일인데 의기가 있는 선비라는 칭찬을 듣고 임원까지 맡게 되자 성 참봉의 의협심은 한껏 넘쳐났다.

이래저래 유림 선비들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좋고 한적하며 사방에서 모이기에 중심 위치에 있는 성 참봉 별채로 자주 모여들었다.

그럴 때마다 관공서 출입을 자주 한 손 집사가 접대를 하며 중요한 심부름들을 맡았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부르면서 각처에서 만세운동이 퍼지고 있는 3월 3일 밤에 성 참봉은 손 집사를 데리고 별체에 앉아 술을 한잔 하는데 낮선 젊은이가 세 사람 찾아왔다.

구포 면서기로 있는 임봉래와 그의 친구들이었다.

임봉래는 경성의전에서 공부하고 있는 친구 양봉근으로부터 구포장날인 양력 3월 29일 구포장터에서 장꾼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도록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만세 준비를 하다 보니 당장 돈이 필요했다. 

가난한 조선의 젊은이들로는 자금 융통이 쉽지 않자 임봉래는 성 참봉을 찾아왔다.

임봉래는 단도직입적으로 창원군 마산과 삼진 지역에서 만세 준비가 활발한데 양산과 동래는 만세기운이 너무 조용하다고 한탄을 하면서, 오는 29일 구포장날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만세를 외치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태극기와 현수막을 만들고 사람을 동원하려다 보니 여비가 여의치 못해 도움을 청하러 왔다고 하였다.

성 참봉 재산에 청년들이 무슨 행사를 하겠다는데 못 도와줄 처지는 아니다.

더구나 일제에 항거하겠다는 청년들의 이기는 고맙고 기특하다.

그러나 만일을 생각해서 철부지들에게 함부로 돈을 내어줄 성참봉이 아니다.

도와주더라도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된다.

“자네들이 하는 일에 도와주고 싶지만 시국이 어수선한데 함부로 돈을 건넬 수는 없으니 자네들이 꼭 원한다면 내일 밤에라도 와서 빼앗아가라. 내가 자네들에게 그냥은 줄 수가 없네.”

눈치가 빠른 임봉래는 성 참봉의 말뜻을 알아듣고 이틀 후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일행을 데리고 나갔다.

머슴 집 마당에서 중 돼지를 한 마리 잡아 행랑채에서 머슴들과 그 가족들을 불러 들여 참숯불을 피워 고기를 굽고, 푸짐한 음식으로 밤이 늦도록 잔치를 하였다.

밤이 깊어 아이들은 가고 어른들만 술을 마시고 떠드는데 건장한 청년 다섯이 얼굴을 가리고 들어와서 하인과 머슴들을 한쪽으로 몰아놓고 술에 취한 참봉어른을 칼로 위협하며 돈을 내 놓으라고 하였다.

놀란 마님이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제발 사람은 다치지 말아 달라고 사정을 했다.

참봉 어른이 손 집사를 시켜 돈을 있는 대로 내 주라고 하였다.

괴한 한 사람이 손 집사를 따라 나가 건네주는 돈을 보따리를 받아 가지고 일행들과 함께 나갔다.

강도들이 대문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겁에 질렸던 머슴들이 따라 나가겠다고 나서는 것을 참봉 어른이 말리며 “따라 나가봐야 자네들은 이기지 못할 상대들이니 참아라. 소문이 나면 자네들이나 집안에 망신이니 소문나지 않게 말조심해라”고 주의를 주었다.

성 참봉은 하인들에게도 인심이 후하면서 어처구니없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저녁마다 별체에 야식을 올리는 갓난이를 방으로 불러들여 흔히 양반들이 하녀들에게 저지르는 음흉한 짓을 하고 말았다.

그것도 처녀나 과부가 아닌 서방이 있는 갓난이를.......,

보통 마름들은 작인들에게 토지를 얻어 농사를 짓게 해 준 대가를 챙겼지만 손 집사는 오히려 영등(影燈)이 지나면 작인들에게 한해 농사를 잘 지어보자며 그 가족들까지 불러 모아 닭을 잡고 하얀 쌀밥에 떡과 술을 대접하며 격려해주었다.

성 참봉 집에 강도가 든 이틀 후 삼랑진에 있는 작인들을 격려하러 갔다.

삼량진에서 작인들과 모꼬지를 할 때는 보통 2-3일은 자고 온다.

부엌 설거지를 마친 갓난이가 별채로 야식을 가져가는 것을 보고 선출이가 몰래 뒤를 따라 갔다.

갓난이가 마루 밑에서 야식을 가져왔다고 알리면 늘 들여놓고 가라고 하는 참봉 어른이 좀 들어와 앉으라고 하였다.

선출이는 엄마가 방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댓돌 가까이 다가갔다.

“나리!” 엄마의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놀라는 외마디 소리를 들은 선출이는 긴장했다.

겨우 아홉 살 아이답지 않게 하인들은 이럴 때 모르는체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엄마의 비명 소리 듣고는 애감이 이상하여 조심스럽게 별체 뒤뜰로 돌아가서 참봉어른이 거처하는 방 봉창 문 곁으로 다가가 안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엄마는 보내 달라고 애원을 하는데 참봉어른이 “네년이 내 말을 거역할 거냐?” 하고 엄한 목소리로 위협하는 소리가 봉창 밖에까지 들렸다.

조심스럽게 창호지가 찢어진 문구멍으로 안을 들어다 보았다.

구멍이 넉넉지 못해 어설피 보였으나 겁에 질려 떠는 엄마 손을 잡은 참봉 어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 사람아 말 들어라” 했다.

선출이는 동생 후출이와 같이 더운 여름철에는 작은 방에서 잠을 자지만 늦은 가을부터 늦은 봄까지는 작은 방은 불을 때도 따뜻하지를 않아 엄마 아버지와 한 방에서 잠을 잔다.

지난겨울에는 잠을 자다가 아버지와 엄마의 잠자리를 여러 번 훔쳐보았다.

어리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이다음에 나도 커서 순달이와 결혼하면 아버지처럼 하겠다고 야무진 생각까지 했던 선출이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기운 없이 방으로 돌아와 이불 속에서 엄마와 성 참봉의 일을 상상하며 슬퍼하다 잠이 드는데 엄마가 들어오는 인기척에 잠이 깼다.

전 같으면 엄마를 불렀을 것이나 모른 체하고 있었다.

밖에서 한참 있었는지 조용히 들어오는 엄마 몸에서 냉기가 느껴졌다.

윗목에 앉아 소리 없이 우는 엄마를 훔쳐보면서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상놈이기 때문이라는 나이답지 않은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삼량진에 갔다가 이틀 만에 돌아온 아버지는 저녁을 먹고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일찍 잠자리에 든 아버지를 따라 선출이와 후출이도 잠자리에 들었다.

잠결에 방안 분위기를 무겁게 느끼며 눈을 떠보니 아버지는 캄캄한데 앉아 담배를 피우고 엄마는 아랫목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저께 일을 혹시 아버지가 아셨을까?”

“알았다면 어떻게 알았을까? 거기 무슨 표가 났을까?”

선출이는 이상한 생각이 들며 마음이 초조해졌다.

담배를 태우던 아버지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우리가 떠나자” 하셨다.

엄마가 걱정스럽게 “어린 것들을 데리고 어떻게?” 하자, “나도 생각하는 게 있다. 걱정하지 마라. 아무래도 떠날 때가 된 것 같다” 하셨다.

선출이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훌쩍이는 엄마에게 아버지는 “울지 마라! 그게 어디 자네 잘못인가?” 하시더니 집안 이야기를 하셨다.

“전에 어매가 살았을 때다. 안방마님이 죽은 새서방님을 낳고 나서 허리를 다쳐 가지고 그놈의 짓을 하려니 허리가 아프고 힘들어 제대로 못했다고 한다. 그러자 참봉이 어매를 별채로 불러들여서 욕을 보였다. 어매도 자네처럼 영리하고 참 예뻤지! 마님도 참봉이 어매를 불러들이는 줄 알면서도 자기가 그 짓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죄로 모른 척 눈을 감아 준거야! 어매 나이 스물여섯 살에 아배가 돌아가셨는데, 아배가 돌아가신지 한 달도 못돼서 참봉이 어매를 불러다가 욕을 보였다. 집안사람들이 알까봐 마음고생을 얼마나 했겠나? 만약 아배가 돌아가신 후 한 두해가 지났더라도 어매도 사람이니 성 참봉이 불러들여도 그렇게 원망스럽지 않았을는지도 모르겠는데 남편이 죽고 한 달도 못돼서 가슴이 아픈 사람을 불러다가 그 짓을 하므로 어매는 죽고 싶었지만 어린 내가 걱정이 돼서 밤마다 그 능욕을 참고 견뎠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나? 내가 열일곱 살 나던 해 어매가 나를 앉혀놓고 그런 부끄러운 이야기를 해주고는 ‘네가 이 집을 나가서 스스로 살 수 있을 때까지는 절대 이 사실을 아는 체 하지 마라 아는 체 했다가는 살아남지 못한다.’ 하더니 36살 한창 나이에 목을 매버렸다. 상전들이란 여종을 통해 자기 자식을 낳아도 종으로 부려먹는 짐승 같은 것들인데 어매는 어린 나 때문에 밤마다 그 더러운 잠자리 시중을 들며 참고 살아오다가 내가 혼자서도 살아 갈 수 있다 싶었던지 그렇게 부끄러운 이야기를 내 앞에 털어놓더니 그만 목숨을 저버렸다 말이다.”

아버지는 목이 메어 눈물을 지으면서 엄마에게 “자네는 어제 일을 빨리 잊어라, 상것들에게 정조가 어디 있나? 양반들이 달라며 줘야지 어쩌나? 우리 어매처럼 자네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자네를 탓할 수 있겠는가? 짐승만도 못한 놈의 자식, 어매에게 그 짓을 해놓고 어떻게 자네까지......, 내가 언젠가는 한을 풀려고 했으나 장인어른이 나를 자네와 결혼시키는 바람에 쉬 결행하지 못하고 애들이 생기고, 종놈으로 태어난 탓인지 나도 쉽게 용단을 내지 못하는데 참봉이 무슨 마음이었는지 우리 식구에게는 과분하게 잘해주어 어매 일을 잊어주려고 했더니만 자네에게 또 그 짓을 했으니 이제 더는 참을 수가 없다. 늙은 놈이 어매를 죽게 한 것도 모자라 자네에게까지 그 짓을 했으니, 앞으로 잘못하다가는 우리 가족은 모두가 비명횡사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고는 다시 담뱃불을 붙였다.

엄마는 어제 일을 아버지에게 말하는 것이 도리라 여기고는 나오지 않는 말을 울먹이며 했다가 아버지가 이렇게 비장하게 나오자 고맙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해서 “여보시오! 무슨 변고를 치자고 그래요. 내가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만......., 우리 상것들이 양반들 앞에 무슨 힘이 있나요.” 하고 울었다.

“자네는 내가 하는 대로 가만히 보고 있어라. 자네와 애들을 두고 어설픈 짓은 절대로 안 한다.”

아버지 말소리에 비장한 느낌이 들었다.

경찰서 호출로 갔다가 오후 늦게 돌아온 손 집사는 마님 방에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나왔다.

잠자리에서 남편 걱정이 되어 “임자도 같이 연류 되는 것 아니냐?” 고 물어보는 아내에게 손 집사는 “구포장날 만세사건과 관련해서 참봉 댁으로 누가 찾아 왔는지를 조사 했지만 내사 하인이라 누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했더니 거짓말 하면 잡아넣는다고 위협을 한참 하다가 가라고 하더구먼.” 하고 대수롭잖게 말했다.

그래도 남편이 연류 될까봐 걱정하는 갓난이에게 “그런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걱정하지마라.” 하고 안심을 시키면서 품에 꼭 껴안았다.

선출이는 아버지가 엄마와 사랑하는 것을 훔쳐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다가 잠이 들었다.

경찰서에서 가족들에게 면회를 허락하였다.

허리가 좋지 못한 마님을 위해 인력거 둘을 불러 마님과 석이 도련님을 태우고, 손 집사는 자전거로 같이 양산경찰서로 갔다.

고등계 형사부장 후지끼상의 배려로 경찰서 직원 숙직실에서 손 집사는 마님과 석이 도련님을 데리고 참봉나리를 면회하였다.

면회를 다녀온 후로는 돈을 장만하기 위해 손 집사가 매일이다 하고 자전거를 타고 삼랑진과 물금으로 다니며 논을 팔려고 내놓았다.

참봉어른을 빼 내려면 경찰과 검찰에 아무래도 많은 돈을 써야할 형편인데 지난 가을 추수한 곡식은 유림에 천석이나 헌납하고 남은 것은 대부분 정초에 장리를 주었기 때문에 돈을 장만할 여분이 없다.

손 집사는 마님과 의논해서 부득이 토지를 얼마 팔려고 내 놓았으나 농사철이 임박해서 인지 사려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계속)

   - 새 주인을 위해 -

집에 왔다 간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선출이 형제가 신는 운동화가 한꺼번에 없어졌다.

손 집사가 동래 장에서 석이 도련님 운동화를 사면서 순달이 꽃신과 함께 사다준 운동화다.

마을에서는 운동화를 신는 아이들이 없으므로 누가 훔쳐 가도 감히 신을 수 없는데 이상하게도 선출이와 후출이 형제 운동화가 한꺼번에 없어져버렸다.

개가 물어갔나 해서 이웃집 거름 터까지 살펴보았다.

갓난이와 순달이 엄마가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자 작은 머슴이 짚신을 만들어주었으나 후출이는 울면서 짚신을 신지 않겠다며 맨발로 다녔다.

엄마가 물금 장날 신을 사준다고 달래도 말을 듣지 않았다.

물금 장날이 마침 공일날이어서 선출이와 후출이는 엄마 갓난이를 따라 장으로 갔다.

운동화를 사려고 엄마를 따라 장으로 가는 형제는 무엇이 좋은 지 장난을 치며 신이 났다.

개울을 따라 내려가는 길옆에는 하얀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향기를 풍겼다.

찔레꽃 향기를 유별나게 좋아하는 갓난이가 가시에 찔리지 않게 조심해서 한 가지 꺾어 손에 쥐고 향기를 맡았다.

후출이는 엄마 손에 있는 꽃을 달라고 해서 받아 쥐고는 흔들다가 꽃을 따먹었다.

선출이가 “찔레꽃 먹으면 콧구멍에 뱀 나온다.”고 놀렸으나 후출이는 “그저께도 아이들과 같이 먹었는데 뱀 안 나왔다.” 하고 속지를 않았다.

화창한 5월 초여름의 장터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갓난이는 선출이 형제를 잃어버릴까봐 손을 꼭 잡고 다니며 신발가게에 들려 까만 운동화를 샀다.

후출이는 잃어버린 운동화만 못하다고 칭얼거렸다.

갓난이는 칭얼거리는 후출이를 달랬다.

“아버지가 동래 장에 갈 때 좋은 운동화 사오라 하고, 그때까지 우선에 이것을 신자, 우리 후출이가 좋아하는 왜 국시(가락국수) 사 주께” 하였다.

왜국시를 좋아하는 후출이는 “아버지가 동래 장에서 꼭 사다 주어야 한다고 다짐을 하고는 왜국시를 사먹으러 갔다.

갓난이는 아이들이 국시를 먹고 나자 기차 정거장으로 가더니 기차를 탔다.

외갓집에 갈 때마다 타던 기차를 타면서 긴장한 엄마 표정을 보고 선출이는 이상한 느낌을 느끼고 말이 없는데 후출이는 기차를 타면서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차에 올라가면서 아이들에게 “외갓집에 간다. 차 안에서 까불지 말고 점잖게 앉아 있으라.” 하고 주의를 주었다.

기차는 외가가 있는 삼량진을 지나는데도 내리지 않아도 선출이는 엄마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후출이는 언제 외갓집 내리느냐고 물었다.

갓난이를 따라 기차에서 내려 역 광장으로 나오다가 선출이는 역사에 붙은 한문으로 된 密陽驛(밀양역)이라 쓰인 역 이름을 보고 “엄마 여기가 밀양역이야?” 했다.

그때 “선출아!” 하고 아버지 손 집사가 나타났다.

선출이와 후출이는 반갑게 “아버지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많이 기다렸지요.” 하는 갓난이 말에는 대답을 않고 “빨리 따라 오너라.” 하고는 골목 안에 있는 국밥집으로 들어갔다.

돼지 국밥을 시켰으나 선출이 형제는 물금 장에서 국시를 맛있게 먹어 배가 부른 탓인지 국밥은 먹지도 않고 후출이가 장난을 치는데 선출이는 가만히 있었다.

갓난이는 장터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왔으면서도 달게 먹지 않았다.

선출이는 아버지를 따라 기차에 오르면서 속으로 “우리는 이제 참봉 댁에서 멀리 도망을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출발을 하자, 손 집사는 긴장하는 갓난이에게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하게 묵어라” 하고는 권련을 피워 물었다.

선출이 형제는 종일 걸어 다닌 탓인지 차가 출발하자 곤하게 잠이 들었다.

긴 봄날의 해도 지고 어둠이 깔리는 창밖을 보면서 갓난이가 입을 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빈손으로 어디 가서 어떻게 살아요?”

“걱정하지 마라 우리 엄마 목숨 값은 찾아서간다. 물금에서 논 스무 마지기와 삼랑진에서 서른다섯 마지기를 팔았다. 그리고 남 주어놓은 소도 열 마리나 팔았다. 김해 사는 부자가 논을 탐내서 값도 제대로 받았으니 이 돈이면 어디로 가도 우리 식구는 먹고 살 거다.”

남편 말에 놀란 갓난이는 작은 목소리로 “어떻게 그런 일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갓난이는 불확실한 앞날을 상상하느라 잠은 오지 않고 손 집사가 선반에 올려놓은 가방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기차가 종착역인 서울역에 멈춰 서자 선반에 올려놓았던 가방을 챙겨 들고 내리는 손 집사를 따라 내리는 선출이 형제와 함께 내리는 갓난이 얼굴에 아침 해가 밝게 비쳤다.

기차에서 내린 손님들이 아침을 먹겠다고 북새통을 이루는 역전 국밥집으로 들어가서 겨우 아이들만 자리에 앉히고 손 집사와 갓난이는 서서 콩나물 국밥으로 아침 요기를 했다.

서울역 대합실 천장은 까맣게 높고 으리으리하다. 

사람들이 완행기차표를 사려고 길게 줄을 서 있는데 손 집사는 한 쪽으로 가더니 급행열차 표를 사 왔다.

“어떻게 벌써 표를 샀어요?” 갓난이가 묻자 손 집사가 “우리는 차비가 비산 급행을 끊었다” 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급행 손님만 나가는 1번 개찰구로 갔다.

갓난이는 남편을 따라 급행열차를 타면서도 속으로 돈을 좀 안 아끼고 너무 헤프게 쓰는 것 같아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 신의주까지 가는 급행열차는 밀양에서 탔던 차보다 깨끗하고 의자도 폭신했다.

후출이는 뭐가 좋은지 까불며 선출이에게 장난을 걸었다.

갓난이가 좀 조용히 하라고 말렸으나 잠시뿐 또 장난이었다.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보고 있던 손 집사가 내리자고 하였다.

갓난이는 어디 멀리 가는 줄 알았는데 벌써 내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어딘지도 모르고 따라 내리고 보니 처음 들어보는 개성이란 곳이었다.

역 광장에서 손 집사가 비싼 인력거를 불러 가족들을 태웠다.

생전 처음으로 안방마님이나 타던 귀한 인력거를 타면서 갓난이는 이런 호사를 할 처지가 아닌데 이양반이 너무 한다 싶었다.

인력거에서 내린 곳은 칼을 찬 무서운 순사가 문지기를 보고 있는 개성경찰서 문 앞이었다.

손 집사가 순사에게 다가가 일본말로 무어라 이야기를 하더니 어리둥절해 하는 갓난이와 아이들을 데리고 수위실 안으로 들어갔다.

선출이와 후출이는 순사들이 무서워 불안해하는 눈치다.

갓난이도 순사들 앞에 앉았으려니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그런 가족들을 위로할 량으로 손 집사는 “우리는 인자(이제) 여기서 살 꺼다(산다).” 하고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갓난이는 옆에 경찰들이 있어 무어라 말은 못하고 긴장이 된 체 손 집사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조금 있으니 젊은 순사가 오더니 손 집사 가족들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면서 따라 오라고 하였다. 

순사를 따라 가족들과 함께 경찰서 뒤편 후문 밖에 있는 관사에 들어가니 후지끼 상이 먼저 와 있다가 손 집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후지끼 상은 며칠 전 양산 경찰서에서 이 경찰서로 옮겨온 고등계 형사부장이다.

손 집사도 후지끼 상을 따라 이곳으로 왔다.

후지끼 상은 손 집사 가족들에게 당분간 이 관사에서 생활하라고 하였다.

부엌에는 직원들이 사용하던 간단한 취사도구가 있고 방 안에는 갓난이가 처음으로 구경하는 담요가 있었다.

성 참봉댁 같은 세간은 없었지만 주인집을 도망 나온 처지에 이만 한 집과 세간이면 부족할 것이 없었다.

손 집사는 개성 경찰서에 출근하며 후지끼 상을 따라 다니게 되었다.

쉽게 말해서 일본경찰 보조로 고등계형사부장인 후지끼의 통역을 맡아하며 조선인 간자들을 관리 하였다.

개성 경찰서로 출근하게 된 손 집사는 이름을 도시오로 고쳐 불렀다.

양산경찰서 고등계 형사부장 후지끼 상은 개성으로 발령을 받은 상태에서 손 집사로부터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항일시위에 관련된 유림 선비들의 활동 상황과 그들에게 성 참봉이 쌀 천석 금을 넘겨 준 일과 부산진에 있는 일신여학교와 동래고보 교사들이 성 참봉을 찾아다니며 후원을 받은 사실, 3월 29일 구포장날 만세운동을 주도한 구포 면서기 임봉래가 성 참봉 집에서 강도를 가장하여 돈을 건네받은 정보를 입수하였다.

경상남도 경찰부는 후지끼 상이 올린 보고서로 창원, 동래, 밀양 등지의 유림선비들과 구포장날 만세를 준비한 임봉래 일당과 일신학교에서 만세운동에 가담하였던 선생들이 체포되었다.

마산 의신여학교에 스물두 살 당찬 여자 선생 박명연(朴命連 작가주 : 박순천여사 본명)이 있었다.

당차게 혼자 성 참봉을 찾아왔다가 여자라고 거절을 당했으나 그 당찬 모습이 마음에 들어 손 집사가 성참봉 몰래 삼량진에서 쌀 서른 가마니를 처분해 주었다.

손 집사는 박명연이를 생각해서 마산 의신학교 교사들의 정보는 빼놓고 유림들만 밀고했다.

뛰어난 정보 능력을 인정받은 후지끼는 만세사건 전부터 공산당 활동이 심한 개성으로 전출하기 전에 이 일로 서울 경시청에서 표창까지 받았다.

일본 말을 잘하고 선비들 못지않은 학문과 부잣집 마름으로 있으면서 관공서에 출입하며 세련된 손 집사를 후지끼 상이 개성으로 데리고 왔다.

그렇지 않아도 참봉 댁을 떠나야 할 손 집사는 쾌히 후지끼 상을 따라왔다.

힘이 좋아 장정 서너 명을 수월하게 당하는 주먹과 학식이 있고 머리 회전이 빠른 도시오는 후지끼에게 좋은 조수가 되었다.

고등계 형사가 된 조선인들이 많았지만 도시오는 후지끼를 따라 다니는 보조로 만족했다.

조선인 고등계형사들은 잡혀온 조선인 사상범들을 고문하는 일을 하지만 도시오는 일체 취조에는 간여하지 않아 좋았다.

도시오는 이제 전처럼 조선인 양반들에게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당당하고 힘을 줄 수 있었다.

일본 관리에게 부침하는 조선인 재력가들도 후지끼에 연을 대려고 도시오와 가까이 할 정도가 되었다.

후지끼는 타고난 정보가로 정보를 분석하고 취합하는 능력이 탁월하고, 요소요소에 심어놓은 조선인 간자들이 물어오는 하찮은 것에서 좋은 정보를 찾아내고 있었다.

정보를 얻으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주므로 간자들의 충성심도 절대적이었다.

후지끼 상은 경찰서 안에서도 다른 일본인들과는 달리 조선인 순사나 보조원들에게도 친절하고 예의가 발랐다.

자기보다 두어 살 위인 후지끼의 이런 인간성에 감복한 도시오는 충성스러운 심복이 되어갔다.

도시오는 경찰 보조원이기는 하지만 조선인 형사들보다 지식이 많고 부잣집 집사로 일한 경륜으로 경찰 업무를 빠르게 파악해 갔다.

개풍군에서 도의 지원을 받아 임진강 지루인 사천 변에 제방공사를 하게 되었다.

제방 공사를 하게 되면 아무 쓸모가 없던 진지들이 새로운 농토로 변하게 된다.

전에 군수와 가까운 친척 한 사람이 비적(독립군)질을 하다가 잡혔다.

군수가 그에게 돈을 빌려준 사실이 밝혀져서 비적에 연류 될 처지에 있을 때 후지끼가 경기도 경찰부에 손을 서서 무마해 주었다.

군수의 억울한 사실을 아는 후지끼는 그를 자기 끄나풀로 만들기 위해 도와주었지만 군수 입장에서는 대단한 은혜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은혜로 군수는 수백만평 늘어나는 땅 가운데 10만평 정도를 후지끼 상에게 사례를 주고 싶었다.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자기 땅으로 등기만 해 놓으면 따로 불하를 받을 필요가 없으므로 새로 생겨날 땅 가운데 미리 10만평 정도 등기해 줄 수 있으니 쌀 200가마니 값만 군에 헌납해 달라고 하였다.

그냥 줄 수도 있지만 직원들 눈도 있고 하니 몇몇 간부들에게 추석 인사라도 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군수의 뜻하지 않은 제안에 후지끼는 도시오에게 쌀 200가마니로 10만평을 등기하라고 시켰다.

도시오는 재방이 막아지지도 않은 불모의 하천에 제방을 막아 진지(榛地)를 농지를 만든다고 쌀 200가마니를 헌납하라는 말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해마다 홍수 철이면 강물이 범람하는데 어떻게 하천을 막으며, 설사 막는다 해도 어느 천 년에 될 지도 모르는데 도시오가 가진 농장에서 2년 농사를 몽땅해야 겨우 300가마니가 나오는데 그렇게 주고 불하를 받으려니 선득 내키지 않았다.

후지끼가 도시오의 어리석음을 꾸중하며 설명을 했으나 믿지 못하고 불안한 고집을 피웠다.

화를 벌컥 내며 그렇다면 쌀 100가마니 정도를 버리는 샘치고 5만평만 등기하라고 하였다.

도시오는 화까지 내는 후지끼의 권유를 더는 거절하지 못해 피 같이 아까운 쌀 100가마니를 군청에 헌납하고 물이 흐르고 있는 하천의 한편에 6만평의 땅을 자기 이름으로 등기를 했다.

후지끼 상은 도시오가 받은 6만평 외에 조선인 정보 끄나풀들에게 5만평 땅을 등기 해주었다.

도시오는 이런 후지끼에 대한 신뢰가 흔들려 은근히 의심이 생기려 했다.

피 같은 쌀을 100 가마니나 주었기에 시간을 내어 사천평야로 나가 자기 앞으로 등기 된 땅을 둘러보는데 여러 명의 일본 사람들이 긴 장대와 긴 줄을 가지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도시오가 일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니 양력 10월부터 제방 공사를 하려고 측량을 하는 중이라 하였다.

도시오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추석을 지나고 얼마 안 되어 일본에서 들여온 처음 보는 불도저란 것이 강바닥에서 흙을 밀어다 모으고 트럭으로 큰 돌들 싫어와 제방을 만들어나갔다.

불도저가 강바닥에서 흙을 밀어다 제방을 만드는데 한번 밀어다 놓는 흙의 량이 지게로 진다면 몇 날을 저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량이었다.

농한기라 지게꾼들도 품을 벌겠다고 짐을 저 나르고 있었다.

설 명절이 되어도 쉬지 않고 불도저와 트럭들이 일을 하고 있고 품을 드는 농민들도 사방에서 개미떼처럼 모여와 셀 수 없이 많았다.

도시오는 상상도 못해본 불도저가 흙을 모으고 하루라도 더 벌어보겠다고 모여든 품꾼들로 하천은 하루가 다르게 막아지면서, 엄청난 토지가 생겨나고 있었다.

후지끼가 시키는 대로 땅을 더 많이 등기하지 못하고 후지끼를 의심한 자신의 무지함을 후회하면서도 6만평이나마 불하할 수 있게 해준 후지끼 상이  마음으로 고마워했다.

사천강 서편에 있는 도리산에 올라가 광활하게 뻗은 사천평야와 멀리 장단평야를 바라보니 재물은 하늘이 준다는 선인들의 말처럼 하늘이 자신을 도우는 것만 같았다.

도시오는 제방과 함께 불모지가 옥토로 변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후지끼를 붙여준 천지신명에 우러러 감사를 드렸다.

부모님이 과수원을 경영하고 있어 어릴 때부터 과수원에서 자라 난 후지끼는 과수원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여 도시오에게 불하받은 땅 가운데 돌과 자갈이 많아 논농사를 짓기에 부적합한 땅에 사과나무를 심으라고 일러주었다.

성 참봉 댁에서 논농사만 관리해 온 도시오는 과일농사에 대하여 문외한이라 과수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후지끼 상의 설명을 듣고는 사과나무를 심기로 하였다.

쉬는 날에 후지끼 상과 같이 오토바이를 타고 사리원으로 가서 사과농장을 경영하고 있는 후지끼 상 고향 선배를 만나 과수원을 견학하였다.

후지끼 상이 과수원 주인에게 도시오를 소개시키며 사과 농장을 만들려고 하니 지도를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후지끼 상 고향 선배는 도시오를 위해 차가운 봄바람이 부는 농장으로 가서 농장을 구경을 시켜주고는 마침 자기가 키워놓은 품종이 좋은 3년 된 묘목이 한 500여주 있는데 값을 싸게 주겠으니 물이 오르기 전에 빨리 옮겨 심으라고 하였다.

3월 하순이면 나무에 물이 오르므로 빨리 심으라고 하였다.

도시오는 일본인 농장주의 지도를 받아가며 3년 된 사과나무 500주와 2년 된 배나무와 복숭아나무 각각 100주씩 심었다.

갑자기 농장이 많아지게 된 도시오는 가난하게 살고 있는 처갓집 장인 장모와 처남 가족들을 불러올리기로 하였다.

범어리에서 개성으로 올 때는 비밀리에 도망을 쳐 나오다 보니 처갓집에 연락도 못하고 왔다.

삼랑진에서 소작을 붙이고 있는 갓난이네 친정 가족들을 만나러 내려가 처갓집 식구들을 데려 왔다.

사천 강변에 새로 생긴 과수원에 농막으로 지은 집에서 처갓집 가족들이 살며 논과 과수원을 관리하게 하였다.

(계속)

[旻鈺/양병우]

목사님! 오랫만에 글 뵈오니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카페 쪽지도 막아놓으셔서 그나마 인사도 드릴 수 없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낭월]

목사님 잘 지내십니까..너무 오랜만이에요. 반갑습니다.

[청송 김성대]

잊을까 또 끈질긴 인연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귀한 작품을 올려 주심에 감사드리며 오랜만에 흔적을 봅니다.다음 모임에는 뵐 수 잇을까요? 늘 하시는 목회와 교회에 축복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長村 李元淳]

모임이 주말이 되기에 뵈옵지못함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