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 1. 왜 모든 것은 무아이며, 공성인가?
용수보살[나가르주나]께서는
대지도론에서 왜 그 모든 것이 실체가 없는 무아이며, 공인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위 말씀을 풀어보자면,
법이란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 모든 것은 인연화합하므로써 존재하는 것이므로,
모든 법 그 자체에는 그 어떤 실체로써의 성품이 있는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무아/공성을 이해하려면, 연기법....즉 인연화합에 대해서 자세히 이해해야 합니다.
인연화합생기(因緣和合生起)의 준말이 바로 연기법(緣起法)이고,
그 의미는 원인(인 因 )과 조건(연 緣 )이 서로 의지하고 결합(화합 和合 )해서
일어나고 발생한다(생기 生起 )는 의미입니다.
그 첫번째 예가 바로 수레입니다.
옛날엔 나무로 수레를 만들었지요. 바로 그 수레를 말합니다.
수레는 바퀴, 바퀴 축, 바퀴살, 앉거나 물건을 놓을 자리, 손잡이 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서로 의지하고 결합되어져서 수레라는 물건이 생겨납니다.
이것저것이 조합되고 모여서 하나의 완성된 물건이 나오고,
그 물건에 수레라는 이름/호칭/명칭을 붙여놓고 나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그 물건을 수레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중생들이 무명에 빠지는 이유는
첫째, 그냥 보여지는 모습 그대로가 진짜인줄 아는 것과,
둘째, 그 물건에 붙여놓은 이름/호칭/명칭 때문입니다.
중생은 호칭/이름/명칭에 집착하고
그로 인해서 수레라는 것에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다 라고 여겨버립니다.
실제 수레라는 것은 온갖 부품들이 조합되어져서 생겨난 하나의 물건이라,
그 하나의 물건..즉 수레라는 것에는 그 어떤 실체라는 것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만,
거기에 이름을 붙여놓고, 그걸 서로 부르다보니, 수레에 그 뭔가가 있는 듯이 착각 합니다.
수레를 부분부분 다 해체시켜 놓으면, 수레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 때는 그냥 온갖 헤체된 다양한 부품만이 있을 뿐이지요.
법은 인연 화합하는 까닭에 있을지언정 별달리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저 수레처럼
온갖 부품들이 결합된 하나의 물건에 사람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은 것입니다.
물론 수레는 수레의 모양과 빛깔이 있고,
사람에겐 사람의 모양과 빛깔과 특성/성질이 있습니다만,
본질적인 면에서 보면 인연화합으로 인해 생겨난 것은 동일 합니다.
특히 마음도 그렇게 작동합니다.
마음에 어떤 뭐가 있어서 그게 스스로 생각하는게 아니란 얘깁니다.
사람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이것이 오온이고, 오온이 곧 색수상행식 입니다.
색은 곧 물질인 내 몸이고, 수상행식은 마음에 해당합니다.
오온, 즉 이 다섯개가 합쳐진게 바로 어떤 하나의 결합체인데 그걸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몸과 마음[수상행식]을 따로 따로 해체시켜놓으면,
수레와 마찬가지로 그 어떤 실체로써의 모습이나 성질은 찾을래야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집착하는 그 "나"라는 것도 역시 그 정체는 호칭/명칭입니다.
이 오온에 "나"라는 이름을 붙여놔 버린 겁니다. "수레"라는 명칭처럼 말이죠.
그래서 몸과 마음에서, 그리고 몸과 마음 이외에서......
"나" 또는 "영혼"을 아무리 찾아봐도 찾아지지 않습니다. 그저 호칭이기 때문이지요.
샨티데바의 입보리행론에 아주 멋진 게송이 나옵니다.
"항상 내 안에 그 무엇이 있다고 착각하네"
그 무엇이란 바로 나 또는 영혼으로써의 실체를 말합니다.
나도 내 마음을 관하다 보면,
아주 우스운 사실이지만, 무서운 걸 하나 깨닫게 됩니다.
"나"라는게 어딨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 "나"라는 걸 상처안받게 보호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또, 상처/피해/손해를 입을 "나"라는게 어디에 있고, 어떤 모습인지도 모른채
그냥 긴장하고, 초조해하고, 두려워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게 무명이지요.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게 바로 무명입니다.
탐진치 무명 번뇌의 근본이 바로 "나"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집멸도 사성제에서 두번째인 집성제입니다.
업과 번뇌의 중심에는 바로 이 "나"가 있습니다.
중생은 그 "나", 자신을 가장 괴롭히는 그 "나"를 가장 소중히 여기기에
결코 고통에서 못 벗어난다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잘난척, 교만, 이기심, 질투, 분노, 속임...
이런 것들은 다 "나"라는 것이 만들어내는 것들이지요.
성인과 범부중생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중생은 "나"라는 걸 가장 소중히 여기지만,
성인들께서는 그 "나"를 원수로 여기고 그 모든 집착을 버리십니다.
사물이건, 마음이건,
그 모든 것은 인연이 화합돼서 작동합니다.
뭐가 하나 딱 있어서 그게 모든 걸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는게 아니란 얘기지요.
이 고정관념을 부수는게 불교 수행입니다.
그래서 불교 수행이란,
이 세상 그 어떤 종교나 사상, 철학과도 같을 수가 없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불교의 핵심인 무아...공성의 진리는,
그 어디에도 없는 오로지 불교만의 위대하고 위대한 진리입니다.
다른 종교나 사상, 철학등은 그 모든 것에 다 실체가 있다는 기반 위에 세워진 것들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진리를 만난다는 것은 백천만겁난조우란 명언이 있을 정도지요.
모든 것에 실체가 있다는 기반 위에 세워진 종교나 사상 철학들은
그걸 배우고 익히면 익힐수록 오히려 더더욱 무명/무지/어리석음만 더 커지는 꼴 입니다.
연기법, 무아, 공성의 진리를 조금이라도 터득한 자는, 모두 불자가 되어버립니다.
그 이상이 없거든요.
다만 못 깨달아서 불법의 진리 세계로 못 들어오는 것일 뿐....
백천만겁난조우........명언입니다.
대지도론 1. 왜 모든 것은 무아이며, 공성인가?
[출처] 대지도론 1. 왜 모든 것은 무아이며, 공성인가?|작성자 마하보디
[출처] 대지도론 1. 왜 모든 것은 무아이며, 공성인가?|작성자 마하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