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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천보(安天保)
2派7世
諡號 소의공(昭懿公)
소의(昭懿) = 容儀恭美曰昭 溫柔賢善曰懿
용모와 의표가 공손하고 아름다운 것을 소(昭)라 이르고,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현명하고 착한 것을 의(懿)라 이르렀다.
좌의정(左議政)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별장(別將) 전객부령(典客副令) 군기윤(軍器尹)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의덕부좌사윤(懿德府左司尹)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공조전서(工曹典書)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 검교참찬(檢校參贊) 검교찬성(檢校贊成) 좌의정(左議政)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성 명】 안천보(安天保)
【생몰년】 1339(충숙왕 복위 8)∼1425(세종 7)
【본 관】 순흥(順興) 안(安)
【시 대】 조선 전기
【성 격】 문신
1339(충숙왕 복위 8)∼1425(세종 7). 본관은 순흥(順興),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한 안문개(安文凱)의 손자이고, 순성군(順城君) 안천선(安千善)의 아들로
세종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조부가 되며,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소헌왕후가 어렸을 때 외가에서 자랐으므로 그를 사랑과 정성으로 양육하였다.
공민왕 11년(1362) 별장이 되고 그뒤 전객부령(典客副令)·군기윤(軍器尹)·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의덕부 좌사 윤(懿德府左司尹)·판종부사(判宗簿事) 등을 역임하였다.
그뒤 공부전서(工部典書)에 전직하였다가 곧 면직되고 16년동안 은둔생활을 하면서 가야금과 책으로 소일하였다.
태종 8년(1408)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에 등용되었고 그 이듬해 검교참찬(檢校參贊)을 거쳐 검교찬성(檢校贊成)이 되었다.
세종이 즉위한 뒤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1448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다. 성품이 충직하여 모든 일을 열심으로 처리하였으며
특히 소헌왕후의 외조부가 되어서는 언행을 삼가고 신중히 하였으며 교만함이 없었다.
죽은 뒤 제전(祭田)으로 20결(結)이 하사되었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新增東國輿地勝覽, 東國文獻備考
안천보(安天保)
1339(충숙왕 복위 8)∼1425(세종 7).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순흥안씨의 시조인 보승별장 자미(子美)의 5세손이며, 할아버지는 대제학 안문개(安文凱)이고,
아버지는 순성군(順城君) 안천선(安千善)이다.
세종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조부가 된다. 소헌왕후는 어려서부터 외가인 그의 집에서 자라 왕비가 되었다.
그는 1362년(공민왕 11)에 별장에 이어 전객부령(典客副令)·군기윤(軍器尹)·판사복시사·의덕부좌사윤(懿德府左司尹)·
판종부사(判宗簿事)를 역임하였다.
그뒤 공부전서에 올랐으나 곧 벼슬을 면직당하고 가야금과 책을 벗삼아 16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였다.
1408년(태종 8)검교한성윤에 등용되었다.
1409년 검교참찬(檢校參贊)이 되고 곧이어 검교찬성(檢校贊成)에 올랐다.
세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이 되어 치사하고, 뒤에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그는 마음이 충직하였으며
의친(懿親: 소헌왕후의 외조부)이 되어서는 더욱 행실을 삼가고 신중히 하여 교만함이 없었다 한다.
세종이 예관(禮官)을 보내 제문과 제전 20결을 하사하였다. 시호는 소의(昭懿)이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안천보(安天保)에게 제사를 내리다.
◆ 조선왕조실록인 세종실록(세종 27권, 7년(1425 을사 / 명 홍희(洪熙) 1년) 2월 23일)에 기록되어진 순흥안씨 휘(諱) 자미(子美)시조로부터 7세이신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안천보(安天保)선조의 작고에 대해 세종(世宗)이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내린 내용이다.
휘 안천보(安天保)선조는 세종대왕의 비인 소헌왕후의 외할아버지이시다.
예관(禮官)을 보내어 작고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안천보(安天保)에게 제사를 내리었다.
그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충직(忠直) 순일(純一)한 절조는 능히 시초와 종말을 같이 하였고, 인륜(人倫)으로 맺은 정의는 생존과 사망에 간격이 있을 수 없도다. 생각건대, 경은 굉원(宏遠) 위대한 자질과 너그럽고 후한 기품으로, 덕망과 위의가 있었으며, 근면하고 검소하여 대대로 착하고 복된 일을 쌓으매, 능히 오는 세대를 창성하게 하였도다.
더욱이 지위가 극한 데 달하매, 마음이 더욱 겸손하였고, 연령이 높은데도 기력은 오히려 강장(强壯)하였으니, 실로 국가의 연덕(年德) 높은 월로요, 인척(姻戚)의 아름다운 모범이었도다.
백년의 장수를 누려 길이 한적한 날을 보내기를 기망하였더니, 어찌하여 저 숙질(宿疾)로 드디어 장서(長逝)에 이른단 말인가. 고요히 척의(戚誼)의 가까움을 생각하니 어찌 폐부(肺腑)의 아픔을 견디랴.
이에 예관을 보내어 박략(薄略)한 제물을 드리노라. 아아, 운명은 피하기 어려운 것이나, 인친 공신의 죽음을 슬퍼하여 은혜와 예절을 특히 더하여 영령(英靈)의 존재함과 같이 위로하노니, 나의 이 충정(衷情)을 헤아려 흠향하기 바라노라. ”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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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遣禮官, 賜祭于卒領敦寧安天保。 其敎書曰:
忠純之節, 克合於始終; 倫紀之情, 無間於存歿。 惟卿以宏偉之資、寬厚之器, 有德有儀, 且勤且儉, 世積善慶, 克昌厥後。 加以位極而心益謙; 年高而氣猶壯, 實邦家之耆英, 姻戚之懿範。 冀享期頤, 以永閑適, 夫何宿疾, 乃至長逝? 靜思葭莩之屬, 曷勝肺腑之傷? 玆遣禮官, 聊陳薄奠。 於戲! 命數難逭, 悼親勳之云亡; 恩禮特加, 慰精爽之如在。 諒予衷懇, 庶幾饗之。
영돈녕부사 "안천보"의 졸기
◆ 조선왕조실록인 세종실록(세종 27권, 7년(1425 을사 / 명 홍희(洪熙) 1년) 2월 16일)에 기록되어진 순흥안씨 휘(諱) 자미(子美)시조로부터 7세이신 “휘 천보”선조에 대한 내용이다.
소의공으로서 시호를 소의(昭懿)라 하니, 용모와 의표가 공손하고 아름다운 것을 소(昭)라 이르고,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현명하고 착한 것을 의(懿)라 했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치사(致仕)한 안천보(安天保)가 졸하였다.
천보의 본관은 순흥(順興)이니, 순성군(順城君) 안천선(安千善)의 아들이었다.
지정(至正) 계묘년에 비로소 벼슬하여 별장(別將)이 되고, 전객 부령(典客副令)·군기윤(軍器尹)·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의덕부 좌사윤(懿德府左司尹)·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를 역임하고, 공조 전서(工曹典書)에 승진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해면되자 거문고와 서적으로 혼자 소일하였다. 벼슬길이 막힌 지 16년 만인 영락(永樂) 무자년에 태종(太宗)이 불러 검교 한성 윤(檢校漢城尹)에 임명하니, 대개 그의 순진(純眞)함을 가상하게 여긴 까닭이었다.
〈지금의〉 우리 중궁(中宮)은 천보의 외손녀(外孫女)로 천보의 집에서 자랐는데, 임금이 잠저(潛邸)에 계셨을 때에, 태종이 선택하여 배필로 삼은 것이다.
기축년에 천보를 검교 참찬(檢校參贊)에 승진 임명하고 바로 검교 찬성(檢校贊成)으로 다시 승진시켰다.
임금이 즉위하매, 좌의정에 임명되었는데, 치사하고 영돈녕부사로 옮겼다가 연로함으로 말미암아 치사하게 한 것이었다. 이에 이르러 병으로 졸하니, 나이 87세였다.
마음 가짐이 본래 충직(忠直)하였고, 왕실의 지친(至親)이 됨에 미쳐서는 더욱 근신하여 교만한 빛이 없었다. 병이 위급하매, 아들 안수산(安壽山)이 약을 올리니, 천보가 말하기를,
“인생 80이 세상에 흔히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약을 먹어 무엇하겠느냐. ”
하고, 소연(翛然)히 죽었다. 부음(訃音)이 들리니, 3일간 조회를 정지하였으며, 시호를 소의(昭懿)라 하니, 용모와 의표가 공손하고 아름다운 것을 소(昭)라 이르고,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현명하고 착한 것을 의(懿)라 이르렀다.
아들은 수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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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敦寧府事致仕安天保卒。 天保, 順興郡人, 順城君千善之子。 至正癸卯, 始仕爲別將, 歷典客副令、軍器尹、判司僕寺事、懿德府左司尹、判宗簿事, 陞工曹典書, 未幾免, 以琴書自娛, 閑廢者十六年。 永樂戊子, 太宗召拜檢校漢城尹, 蓋嘉其眞純也。 我中宮, 天保之外孫, 養于天保家。 上之在潛邸也, 太宗選爲媲。 己丑, 進拜天保檢校參贊, 俄陞檢校贊成。 上卽位, 特拜左議政, 致仕, 遷領敦寧府事, 以老仍令致仕, 至是以病卒, 享年八十七。 秉心忠直, 及爲懿親, 尤謹愼無驕色。 病亟, 子壽山進藥, 天保曰: “人生八十, 世不多有, 我何必飮藥?” 翛然而逝。 訃聞, 輟朝三日。 諡昭懿, 容儀恭美昭, 溫柔賢善懿。 子壽山。
이름 | 안천보(安天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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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순흥(順興) |
성씨 | 안(安) |
시호 | 소의(昭懿) |
생년 | 1339 |
몰년 | 1425 |
신분 | 문반 |
왕대 | 왕력 | 년 | 월 | 일 | 관력 | 형태 | 해당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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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 0 | 1418 | 8 | 15 | 좌의정(右議政) | 현직 | |
세종 | 6 | 1424 | 3 | 14 | 영돈녕(領敦寧) | 현직 | |
세종 | 6 | 1424 | 11 | 2 | 영돈녕(領敦寧) | 현직 | |
세종 | 7 | 1425 | 2 | 23 |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 현직 | |
세종 | 30 | 1448 | 6 | 2 | 영돈녕(領敦寧) | 현직 | |
세종 | 0 | 1418 | 6 | 2 |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 현직 |
안문개(安文凱)ㅡㅡ>안천선(安千善)ㅡㅡ>안천보(安天保)
2派8世
女
세종의비(妃)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모(母)
영의정 안효공(安孝公)심온(沈溫)의처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순흥안씨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三韓國大夫人 順興安氏)
(? ~ 1444)
묘 위치 : 안성시 금광면 오흥리 산 32-1 청학대 레스토랑 우측능선
조선 제4대 세종의 비(妃)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모친
영의정을 지낸 안효공(安孝公) 심온(沈溫, ? - 1418)의 배위(配位)
청송심씨(靑松沈氏)인 안효공(安孝公)에게 출가하여 장녀 소헌왕후를 비롯한 6명의 딸과 아들 3형제의 모두 9남매를 출산했고,
세종대왕의 부부인(府夫人)으로서 남편에 대한 내조와 자녀교육에 헌신했다.
부인이 세종 26년(1444) 11월 24일에 별세하자 사위인 세종의 주선으로 용인시 수지면 이의리에 예장(禮葬)했다가,
세조 13년(1467) 5월 3일 왕명으로 이곳에 천장(遷葬)되었다.
안산이 고축사로 좌우청룡백호도 좋고 용맥도 훌륭하여 보기드문 명당으로 보인다.
경기 안성시 금광면 오흥리 산 32-1안성군 금광면 오흥리(安城郡 金光面 五興里)능말 천장(遷葬)
삼한 국대부인은 순흥안씨 2파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소의공(昭懿公) 안천보(安天保)의 따님으로
세종(世宗)임금의 비(妃)인 소헌황후의 모친이다.
조부는 순흥군 안천선(安千善)이며, 증조부는 찬성사 문의공(文懿公) 안문개(安文凱)이시다.
소의공 휘 천보(天保)의 외손녀 소헌왕후(昭憲王后) 실록 기사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태조 4)∼1446(세종 28). 조선 제4대 왕 세종의 비. 본관은 청송(靑松). 문하시중 심덕부(沈德符)의 손녀이고, 영의정 온(溫)의 딸이며,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안천보(安天保)의 딸이다.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 도(祹와 가례(嘉禮)를 올려 빈(嬪)이 되고,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해졌다.
1417년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개봉(改封)되고, 이듬해 4월 충녕대군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경빈(敬嬪)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 9월에 내선(內禪)을 받아 즉위하니 12월에 왕후로 봉하여 공비(恭妃)라 일컬었다.
그러나 1432년(세종 14)에 중궁(中宮)에게 미칭(美稱)을 올리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라 하여 1432년에 왕비로 개봉되었다. 심온은 세종이 즉위한 뒤 영의정에 올라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서 귀환하던 중 아우 청(鰡이 군국대사를 상왕(上王 태종)이 처리한다고 불평한 일로 대역(大逆)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그 수괴로 지목되어 수원으로 폄출되어 사사(賜死)되었다. 이 일로 폐비의 논의가 있었으나, 내조의 공이 인정되어 일축되었다.
1446년에 52세로 돌아가시자, 헌릉(獻陵)에 장사지냈다. 뒤에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으로 이장하였다. 『영릉지 英陵誌』를 예조판서 정인지(鄭麟趾)가 제술하였다. 시호는 선인제성소헌왕후(宣仁齊聖昭憲王后)이고, 능호는 영릉으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직집현전 이계전에게 삼한국대부인 안씨의 묘지(墓誌)를 짓게 하다
직집현전(直集賢殿) 이계전(李季甸)에게 명하여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안씨(安氏)의 묘지(墓誌)를 짓게 하였는데, 계전이 아뢰기를,
“부인의 작위(爵位)는 지아비의 벼슬을 따르는 것이온데, 안씨가 비록 중궁(中宮)의 모친이기는 하나 심온(沈溫)이 이미 죄를 받아서 벼슬이 삭탈되었으니, 지아비가 이미 벼슬이 없는데 그 아내의 칭호를 대부인이라 하면 의리에 합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오라, 실로 뒷사람들의 보고 듣기에 놀랍게 될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대부인의 칭호를 삭제하고 그저 죽계 안씨(竹溪安氏)라고만 쓰사이다.”
하니,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이것이 한(漢) 나라 상관황후(上官皇后)의 모친의 일과 같으니, 그것을 계전과 더불어 의논하라.”
하였다. 승지 박이창(朴以昌) 등이 아뢰기를,
“대저 묘지라는 것은 그 평생의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온데, 살았을 때는 대부인이라 일컫고, 죽은 뒤에는 안씨라고만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옛글에 이르기를, ‘어미는 자식으로써 귀히 된다.’ 하였는데, 안씨는 중궁의 모친인지라 어찌 가장의 벼슬 있고 없음을 논하여 그 칭호를 버릴 것입니까. 신들이 요전에 예장(禮葬)하시기를 청하였사오나, 윤허하지 아니하시고, 또 대부인 칭호마저 삭제하여 버리면 의리에 실로 미안하오니, 청하옵건대, 평일의 칭호에 따라서 쓰도록 하옵소서.”
하니, 임금이 이창 등의 의논을 따랐다.
○命直集賢殿李季甸, 製三韓國大夫人安氏墓誌。 季甸啓: “婦人之爵, 從夫之職。 安氏雖中宮之母, 然沈溫旣得罪奪爵, 夫已無職, 而妻號大夫人, 非特義所不合, 實駭後人見聞, 願削大夫人之號, 只書竹溪安氏。” 上謂承政院曰: “此與漢上官皇后母事相同, 其與季甸議之。” 承旨朴以昌等曰: “大抵墓誌, 記其平生之實事, 生則稱大夫人, 死則止稱安氏不可。 況《傳》曰: ‘母以子貴。’ 安氏, 中宮之母也, 何論夫職之有無而去其號乎? 臣等前請禮葬而不允, 又削大夫人之號, 則義實未安。 請從平日之號書之。” 上從以昌等議。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三韓國大夫人 順興安氏)
영의정을 지낸 청송심씨(靑松沈氏)인 안효공(安孝公)심온(沈溫)의 배위(配位)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은 순흥안씨(順興安氏)로서 소의공(昭懿公):<이름은 안천보(安天保)이며 領敦寧府事를 역임>의 따님이시다.
조부(祖父)인 순성군(順城君)양정공(良定公):<이름은 안천선(安千善)>은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으며 증조부(曾祖父)인 순흥부원군(順興府院君)문의공(文懿公):<이름은 안문개(安文凱)>은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한 분으로서 고려말엽의 명문대가였다.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三韓國大夫人 順興安氏)께서는 안효공(安孝公)과 결혼하시어 삼남육여(三男六女)를 낳아 기르셨는데 맏따님(후의 소헌왕후)이 1408년(太宗8年 戊子) 2월16일 충녕대군(忠寧大君:후의 세종대왕)에게 출가하시자 순흥군부인(順興郡夫人)의 직첩을 받으셨다.
1418년(태종18년 戊戌)8월8일 세종이 왕위를 물려받아 즉위(卽位)하자 안효공께서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의 봉호를 받으시고,순흥군부인께서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의 직첩(職牒)을 받으셨다.
그런데 그해 안효공께서 무술옥사(戊戌獄事)에 연루되시어 억울하게도 화를 입게 되자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께서는 직첩을 삭탈당하시고 천안(賤案)에 등록되시어 천민(賤民)으로서 나이어린 자녀들과 함께 허다한 수모를 겪으시게 되었다.
처음에는 천안(天安)고을의 관비(官婢)로 되셨다가 의정부(議政府)다모(茶母)로 옮겨졌는데 사실상 실무에는 종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8년후인 1426년(世宗8年 丙午)에 우의정(右議政)이직(李稷)을 비롯하여 여러분들이 왕비의 어머니가 천안(賤案)에 올라있는 것은 나라 체면이 아니니 직첩(職牒)을 돌려드려야 옳다.」고 상계(上啓:왕에게 건의하는 일)하였다.
이때 세종대왕께서는 「돌아가신 상왕께서도 생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하시며 도승지(都承旨)곽존중(郭存中)에게 영(令)을 내려 그해 5월17일에 면천(免賤)되는 동시에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의 직첩을 돌려 받으시어 명예를 회복 하셨다.
또한 세종대왕의 배려로 소헌왕후(昭憲王后)께서는 친정에 가셔서 8년만에 모녀간의 눈물겨운 상봉을 하게 되었으며 이후에는 삼한국대부인께서 궁중에 자유로이 출입하며 소헌왕후와 자주 만나 혈육의 정을 나눌수 있었다.
1444년(世宗26年 甲子) 삼한국대부인께서 병환이 위독하시자 소헌왕후께서는 문병(問病)하시고 전의(典醫:궁중의 의사)를 파견하여 치료케하고, 한편으로는 승려(僧侶)로 하여금 불공을 드리도록 하는등 지극한 효성(孝誠)을 다하였다고 전한다.
그러함에도 삼한국대부인께서는 그해 11월24일에 별세하셨는데 이때에도 소헌왕후께서는 왕세자(王世子)들과 함께 거동하시어 치제(治祭) 하셨으며, 조정에서는 예조판서(禮曹判書)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예장도감(禮葬都監)으로 임명하여 다음해 2월28일에 水原市 二儀洞 산의실의 안효공 묘역에 예장으로 장례를 모셨다.
삼한국대부인께서는 44세에 세상을 뜨신 안효공보다 26년을 더 오래 사셨으니 70세이상 장수 하신 것으로 판단할수 있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1467년(世祖13年 丁亥)5월3일에 세조의 왕명에 의해 삼한국대부인의 묘소는 산의실에서 안성군 금광면 오흥리(安城郡 金光面 五興里)능말에 천장(遷葬)모시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성의 삼한국대부인 묘소는 향토문화재(鄕土文化財)로 지정되어 관청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안효공종회(安孝公 宗會)주관아래 1988년에 현대식 건물로 재실(齋室)경모재(敬慕齋)를 건립하였고, 1992년에는 둘레석을 설치하고 사초를 드리며 묘역주변을 석축하고 성묘로(省墓路)를 단장하는등 대대적인 묘역정화 공사를 완성하였다.
매년 묘제(墓祭)는 음 3월14일과 9월14일에 후손들이 모여 절사(節祀)를 받들고, 기제(忌祭)는 음 11월24일에 산의실의 사당에서 봉행하고 있다.
그 옛날에는 예조(禮曹)의 건의에 따른 세조(世祖)의 영(令)에 의해 매년 한식과 추석에 조정에서 향(香)과 축문(祝文)이 내려지고 안성군수(安城郡守)로 하여금 관청에서 마련한 제물로 제향을 받들도록 한 제도가 지켜져 왔었다.
1세 | [子] 안자미(安子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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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 | [ 子] 영유(永儒) | ─ | [ 子] 영린(永麟) | ─ | [ 子] 영화(永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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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 | [ 子] 정준(貞俊)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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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 | [ 子] 성철(成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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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 [ 子] 수견(守堅) | ─ | [ 子] 자겸(自謙) | ─ | [ 子] 문개(文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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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 | [ 子] 천재(千載) | ─ | [ 子] 천서(千瑞) | ─ | [ 子] 천길(千吉) | ─ | [ 子] 천선(千善) | ─ | [ 子] 천송(千松) | ─ | [ 女] 정을보(鄭乙輔) | ─ | [ 女] 임갑우(林甲佑) | ─ | [ 女] 박원비(朴元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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