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신학교 입학하여 학교 근로장학생으로 자원해서 일하게 되었다. 학교 청소하고 심부름하는 것이다. 밤에 학교를 지키는 일까지 하였다. 그리고 일신교회에 교육전도사로도 주일마다 나가서 섬겼다. 일신교회에서 야외 예배를 나가서 아이들과 같이 찍은 사진이 있다.
2학년 여름에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입대하는 것을 위로하기 위해서 우리 2학년 학생들이 저녁에 송도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이 사진을 남기고 2학년 2학기 시작하기 전 나는 8월달에 군에 입대하였다.
군에 입대하여 훈련을 마치고 훈련소 수용연대 심사대 분류과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수용연대 신우회가 있는데 그 때 사진이 있다.
대
군에서 휴가를 오면 대구 큰 누님댁을 방문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누님은 나에게 용돈을 주셨다. 누님은 자형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 누님이 그립다.
큰 누님의 사진이 있다. 어린아이는 인보이다.
수용연데 근무 당시 약혼식도 하고 결혼식도 하였다.
제대 말년에 아버님께서 면회를 오셨다. 결혼 상대가 있으니 편지를 해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편지를 했더니 편지와 함께 사진도 보내왔다. 그 사진이 이 사진이다.
이 사진을 보고 뽕 가서 결혼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빨리 휴가 나와서 약혼식을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저녁 식사 후에 밤에 대구로 올라가서 처녀의 셋째 오빠네 집에서 나의 아버지와 형님과 그리고 처녀 댁 부모님과 오빠네 가족이 모였다. 그 날 반지를 주면서 약혼하자는 것이다. 그 날 자연스럽게 약혼식이 된 셈이다. 그날 밤을 아버님과 형님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이 처녀의 하숙방에서 자고 그 다음 날 약혼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이 사진이 약혼 사진이다.
약혼식을 하고 부대로 들어가 얼마 지난 다음에 결혼 날을 잡아서 결혼식을 올렸다.
아버님께서 혼주 대표 인사를 하고 계시는 사진이다.
군에 같이 근무한 친구가 "축 결혼"이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축전도 보낸 사람들이 있었다.
마산 문창교회 시무하시는 김기현 목사님의 축전이다.
저의 아버님은 결혼식을 진행함에 있어서 변함이 없다는 전보를 보내기도 했다.
이 당시 어버님은 거제도 호곡교회의 담임 목사로 시무할 때이기에 거제도 둔득면 호곡리 호곡교회이니 우체국은 둔덕이다.
결혼식 순서지도 등사기에 밀어서 만들었다.
1973년 2월 27일 결혼식을 마치고 결혼 휴가를 즐기다가 부대로 돌아가서 8월에 제대하였다.
제대 한 후에 9월에 장로회 부산 신학교 2학년 2학기에 복학하였다.
같이 공부하던 신학생들과 사진을 남겼다.
거제도 둔덕면 호곡리 호곡교회에 아버님 계시는 곳에 아내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나는 월요일마다 부산에 나와 신학교에 왔다가 금요일 오후에 거제도 호곡에 가고...이렇게 생활하다가 이해 1973년 10월 7일 첫주에 마산시 상남면 소재지에 있는 상남교회로 부임해서 전도사로서, 신학교 2학년 2학기 학생으로서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난생 처음으로 단독으로 가정 생활을 하게 되었다. 상남교회 사택이 있는데 기와집으로 3칸이다.
아쉬운 것은 사택 사진이 없다는 것이다. 부엌 1,방 2.개.마루 있는 집이다.
신혼 생활을 잘 해 보겠다는 마음에서 이런 것도 만들었다.
여기까지 기록하다가 중단이 되었다. 아쉽다. 계속 기록했더라면 참 좋았을 것을...
여기에 "실인(室人)"이라는 것은 집사람, 아내라는 말이다. 유식하게 한 번 표현해 보았다.
상남교회 시무할 때 길화와 명화가 태어났다. 출산은 모두 처가에서 했었다.
길화는 1974년 5월 27일.음력 윤 4월 6일이다. 호적에는 28일로 되어있다.
명화는 1975년 10월 26일,음력 9월 22일이다.
예쁜 두 딸과 함께 찍은 가족이다.
동생 결혼식이 1973년 11월 13일 상평교회당에서 있었다. 신혼여행 다녀와서 3일만에 시댁으로 가는데 형님과 내가 신혼 짐을 3륜 차에 싣고 다녀왔다.
아버님 금혼식이 고향에서 있었다. 1974년 3월 12일이다. 결혼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길화 첫 돌이 되었다. 1975년 5월 27일인데 26일날 형님과 성주 대흥교회 시무하시는 부모님과 활수가 함께 왔다가 27일 돌아갔다. 이날 나는 사진관의 사진사에게 부탁해서 길화 첫 돌 사진을 찍었다. 상남 국민학교에 가서 찍었다.
장인어른 회갑 잔치를 대구 기린원에서 가졌다.
상남교회에서 목회생활 할 때 아내가 기록한 가계부에 의하면 1977년 5월인데 제정 지출계획서가 적혀 있다.
십일조-5,500원(사례비는 55,000원)
아빠-15,000원
갚을 것-10,000원
전도회 -5,000원
야쿠르트 -1,500원
책값 -1,000원
연탄 -3,000원으로 되어 있다.
1975년에는
십일조 3,000원 (사례비 30,000원)
주일헌금 1,000원
감사헌금 500원
위생비 1,000원
예비비 2,000원
저축비 7,000원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아버님께서 0977년 12월 6일 성주 대흥교회 담임 목사 위임식을 가졌다.
상남교회 시무할 때 이응주 목사님(둘째 처남)이 오셔서 청소년 신앙수련회를 가졌다.
부흥 강사로 오셔서 같이 따라온 세 아들과 길화.명화와 함께 교회 마당에서 찍은 사진이다.그리고 강사 이응주 목사님 가족과 함께 진동 해수욕장에 가서 즐기다가 왔다.
그 다음에는 저의 아버님이 부흥회 강사로 오셔 부흥회를 인도하셨다.
부흥회를 마치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장로회 부산 신학교를 졸업할 때도 상남교회에 시무할 때이다.
부산 영락교회당에서 졸업식을 하고 상남교회 성도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장로회 부산 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장로회 신학대학교 목회학과에 2년 동안 매주 서울을 오르내렸다. 월요일 오후가 되면 진해에서 올라오는 열차를 상남역에서 타고 창원역에서 내린다. 그리고 진주에서 나오는 열차를 창원역에서 타고 삼랑진역에서 내린다. 여기사 부산진 역에서 올라오는 군용열차를 저녁에 탄다.그러면 서울 용산역에 새벽에 내린다. 시내버스로 한양대 앞까지 가서 다른 버스로 갈아 타고 학교 앞까지 가서 내려 학교로 들어간다. 내려 올 때는 역순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2년을 다니니 옷이 엉덩이 부분이 닳아서 구명이 두 개 났다.
드디어 장로회 신학대학에서도 졸업을 하였다.
졸업하는 하루 전 날 우리 가족은 다 서울에 올라와서 서울역 근처 여관에 들어갔는데 오래된 건물이었다. 함께 자고 졸업하는 날 하교로 갔었다.
졸업하는 날 아내와 딸 길화와 명화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2년 동안 마산시 용지동에서 서울 특별시 광장동 신학교까지 2년동안 완행열차로 다니던 지겨운 생활을 마치게 되었는데도 좀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