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
Robert Frost (1874~1963)
영시해설 두 번째 작품은 미국을 대표하는 시인 가운데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눈 내리는 저녁 숲에 멈춰 서」(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입니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 시를 선택한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시 자체가 좋아서이고 제가 이 시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닙니다. 이 시를 통해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세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는 똑같이 자연을 시의 소재로 삼았지만, ‘자연과의 합일’을 강조했던 윌리엄 워즈워스와는 완연히 다른 프로스트의 자연에 대한 시선, 나아가 유럽의 시인과는 다르게 자연을 바라보는 미국 시인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다음은 시의 내용과 형식의 조화 문제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특히, 이 시를 통해 정형률을 갖춘 영시가 내용 전달을 강화하는 한 방법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편의 시가 갖는 서로 다른 의미 해석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특히, 시를 쓴 시인과 그 시를 읽는 독자-비평가가 한 편의 시에 대해 서로 다른 의미부여를 하는 것에 관에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우선하는 것은 먼저 한 편의 시를 제대로 느끼는 것일 겁니다. 우선, 1연을 보겠습니다.
Whose woods these are I think I know
His house is in the village, though;
He will not see me stopping here
To watch his woods fill up with snow.
이 숲이 누구의 숲인지 알 것 같네
그의 집 마을에 있어도.
그는 모를 것이네, 나 여기 멈춰 서
그의 숲에 눈 쌓이는 것 보고 있음을.
로버트 프로스트의 많은 시가 그림 같지요. 이 시도 그렇습니다. 읽고 들으면 풍경이 환하게 떠오르지요. 시를 '말로 된 그림'이라 한다면 이 시야말로 그 말에 가장 가깝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림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이 시의, 나아가 프로스트 시의 힘이 있습니다.
1연에서 시 속의 화자는 지금 어딘가 다녀오던 중 마을에서 가까운 숲에 잠시 멈춰 있습니다. 나는 이 숲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만 정작 숲의 주인은 내가 여기 멈춰선 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숲을 ‘소유한’ 주인인 그는 눈 쌓이는 숲의 아름다움을 모릅니다. 그 숲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고 느끼는 이는 정작 숲의 주인이 아니라 화자이지요. 숲을 경제적으로, 물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이가 주인이라면, 숲의 아름다움(beauty)을 향유하고 있는 이는 화자입니다. 이를 '미적 소유(Aesthetic possession)'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 그저 숲과 화자의 ‘미적 교감’(Aesthetic Communion)이라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뭐라 말하건 중요한 건 화자는 이 숲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적어도 그 아름다움의 한 면을 제대로 보고 느끼고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옆길로 새볼까요? 예로부터 인생의 시간이나 자연은 애초 ‘우리 것’이 아니라 주어진 시간동안 우리가 ‘빌려 쓰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지요. 때가 되면 우리가 받았던 대로 돌려주고 가야 하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삶의 시간도 우리가 몸담고 있던 자연도. 그렇기에 소유에 집착하기보다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자연의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느끼고 누리는 것,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보존하여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최근 환경과 생태학적 보존의 필요성이 더욱 대두되는 까닭 또한 그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시로 돌아갑니다. 2연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됩니다.
My little horse must think it's queer
To stop without a farmhouse near
Between the woods and frozen lake
The darkest evening of the year.
내 작은 말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틀림없네
한해의 가장 어두운 이때
근처에 농가 하나 없는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 멈춰 서 있음을.
“한 해의 가장 어두운 때”라는 시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12월쯤이라 생각해도 되겠지요. 절기라면 동지가 있는 그런 어느 때쯤, 한 해가 끝나가는 때. “근처엔 농가 하나 없는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 고즈넉한 곳입니다. 화자에게는 일행이 있습니다. ‘작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눈 내리는 숲에 멈춰 선 화자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야생말이 아닌 이 말은 자연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 세계에 속한 존재이지요. 그는 이런 낯선 곳에 멈춰 선 주인이 분명 뭔가 착오를 일으켰다고 “이상하게 생각”한 모양입니다.
He gives his harness bells a shake
To ask if there's some mistake.
The only other sound's the sweep
Of easy wind and downy flake.
무슨 착오가 있는지 묻기라도 하듯
그는 마구를 흔들어 종을 울리네
달리 들려오는 건 부드러운 바람과
솜털 같은 눈송이 나리는 소리뿐.
결국 그는 “마구를 흔들어 종을 울”립니다. 말은 어쩌면 두려웠던 것일까요? 그에게 익숙한 왁자한 인간 세상과는 다른 이 고요한 숲의 적막이. 말이 울리는 종소리 말고 달리 들리는 소리는 “고요한 바람과 솜털 같은 눈송이 나리는 소리”뿐 숲은 고요합니다. 이렇게 3연까지 마치 한 폭의 풍경화처럼 고요한 겨울 숲 속의 풍경을 그대로 전해주던 시는 마지막 4연에 이르러 돌연 풍성한 의미로 출렁입니다.
The woods are lovely, dark, and deep,
But I have promises to k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네
하지만 내게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네
잠들기 전 가야 할 몇 마일의 길이 있네
잠들기 전 가야 할 몇 마일의 길이 있네
숲은 “아름답”지만, 한편 “어둡고 깊”습니다. 서로 상반된 두 느낌을 숲은 동시에 화자에게 부여합니다. 아무리 눈 내리는 풍경이 아름답다 한들 아무도 없는 겨울 숲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싶습니다. 그러나 만약 저 화자가 우리가 지난 호에서 본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화자였다면 어땠을까요? 그도 이 숲에서 저 화자처럼 어둡고 깊은 두려움을 느꼈을까요? 그래서 숲에 머무르기보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숲을 떠났을까요? 아닙니다. 워즈워스의 화자였다면 그는 이 고요한 숲 속에서 더 깊은 명상으로 빠져들었을 것입니다. 저 한없는 숲 속의 고요함 속에서 화자와 말은 자연과 하나 되는 ‘자연과의 합일’(Unity with Nature)의 경지에 까지 이를 것입니다. 적어도 그러기를 욕망할 것입니다. 하지만 프로스트의 시에서 화자는 숲 속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고요한 숲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에게는 다른 ‘약속’이 있습니다. “잠들기 전 가야할 몇 마일의 길”이 있습니다. 이 ‘약속’은 무엇일까요? ‘몇 마일의 길’은 어디로 가는 길일까요? 자, 이제 우리는 처음 이 글을 시작할 때 던졌던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우선, 첫 번째 프로스트의 화자와 워즈워스의 화자, 나아가 신세계인 미국 시인 프로스트와 영국 시인 워즈워스가 자연을 대하는 차이는 무엇 때문일까요?
자연과 인간에 관한한 워즈워스와 프로스트, 영국과 미국 두 세계 사이에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워즈워스가 활동하던 낭만주의 시기의 유럽은 오랜 시간 인간과 자연이 공존해 온 역사가 있습니다. 유럽의 거의 모든 자연 공간에 인간의 발길이 닿았으며, 19세기 무렵에 이르러서는 산업혁명과 더불어 도시가 급속하게 늘어나고 성장하면서 자연은 더 이상 신비하거나 낯설고 두려운 대상이 아니었지요. 친숙한 공간이자 휴식과 안식의 공간, 심지어 여행의 공간이 되었으며, 마지막 남은 오지까지 정복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지요. 이 무렵 알프스 행 관광산업이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반면, 미국은 달랐습니다. 1620년 첫 정착민들이 발 디딘 이후 프로스트가 태어나 활동하던 시기까지 25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북미 대륙의 많은 곳은 아직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두렵고 낯선 미지의 공간이었던 것이지요. 이 무렵쯤에 이르러서야 미국인들은 미국의 자연을 처음으로 제대로 접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마크 트웨인의 두 소설『톰 소여의 모험』(1876)과『허클베리 핀의 모험』(1885)입니다. 미국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미시시피 강을 오르내리는 모험을 하는 두 작품의 주인공인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 두 소년은 ‘미국의 아담’(American Adam)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미국의 온전한 자연을 어린 시절부터 몸으로 만나는 첫 미국인이라는 점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워즈워스의, 영국의 자연과는 달리 프로스트의 자연, 미국의 자연은 미국인들에게 여전히 낯설고 두려운 공간이었지요. 그렇기에 프로스트의 대부분의 시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머물 공간이 아닌 두려운 공간으로, 때로는 적대적이기까지 한 공간으로 그려집니다. 그의 시에서 자연은 인간이 행하는 노동의 과정을 거쳐야, 인간의 손때가 묻어야 비로소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자연이 됩니다. 이 시의 화자가 숲의 아름다움을 분명하게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갖는 ‘어둡고, 깊다’는 느낌, 그것은 바로 이런 점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답지’만 ‘어둡고, 깊은’ 그 자연 속에 자리한 알 수 없는 낯섦과 두려움은 그도, 그의 말도 똑같이 느끼는 것이지요. 바로 이 점이 워즈워스와 프로스트, 오랜 역사의 유럽과 신세계 미국의 시인이 자연을 대하는 차이를 보여줍니다.
두 번째, 내용과 형식의 문제입니다. 이 부분은 약간 생소할 수도 있습니다만 앞으로 간혹 나올 영시의 형식을 이해하는 데는 꼭 필요한 부분이라 최대한 간략하게 잠시 말씀드리고 가겠습니다. 영시에는 각운(脚韻, rhyme)이 있습니다. 정형시의 특징을 이루는 것이지요. 각운이란 매 시행(line)의 마지막 음절의 발음을 동일하게 배열함으로써 정형률을 유지하는 것인데, 이 시도 각운을 지닌 정형시입니다. (각운은 영시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한시에도 각운은 아주 중요한 정형률의 규칙으로 사용됩니다. 다음은『춘향전』의 유명한 어사출또 장면입니다.
金樽美酒 千人血(금준미주 천인혈) 금잔의 향기로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玉盤佳肴 萬姓膏(옥반가효 만성고) 옥쟁반 위 맛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燭淚落時 民淚落(촉루락시 민루락) 촛대에 흐르는 촛농은 백성들이 흘리는 눈물이니
歌聲高處 怨聲高(가성고처 원성고) 노래 소리 큰 곳에 백성들의 원성 또한 크더라
여기서도 2연의 ‘기름질 고’(膏)와 4연의 ‘높을 고’(高)는 같은 음을 하고 있어서 둘은 각운을 이루고 있지요.)
다시 프로스트의 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1연의 경우, 각 행의 끝 단어는 know, though, here, snow이지요. 각각의 발음은 [nou], [ðou], [hiǝr], [snou]고요. 이때 3행의 here를 제외한 세 단어는 마지막 밑줄 친 부분의 발음이 [ou]로 같은 것이 보이시지요? 이럴 때 영시에서는 ‘각운을 이룬다’고 합니다. 그래서 1연은 편의상 표기하면 aaba라는 각운을 지녔다고 하지요. 2연도, 3연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1,2,4행은 발음이 같고 3행만 다른 각운 구조를 지니고 있어요.
그런데 또 가만히 보면 1연의 3행 발음이 2연의 1,2,4행의 발음과 같고, 2연의 3행 발음이 3연의 1,2,4행 발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각운은 이렇게 되지요. aaba bbcb ccdc. 그리고 다음에 볼 마지막 4연은 특이하게 deep, keep, sleep, sleep 네 단어 모두 똑같은 [iːp] 발음으로 끝납니다. 3연의 3행 발음과 같지요. 즉, dddd로 끝나는 겁니다. 이렇게 표시된 전체 각운을 시행에 따라 세로로 배열해보면 더 뚜렷해질 것입니다. 저 아래 전체 시의 옆에 있는 기호를 봐주세요. 어떠신지요? aaba bbcb ccdc dddd 이렇게 나란히 서 있지요? 왜 그랬을까요? 왜 저런 식으로 각운을 맞추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이 시가 ‘눈 내리는’ 숲의 풍경을 다루고 있잖아요. 시인은 눈이 내리는 광경을 저렇게 줄처럼 늘어선 각운을 통해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기발하지 않나요? 시에서 형식과 내용은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이처럼 형식을 통해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는 현대시에서도 가능하고 또 시도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의미와 관련된 부분입니다. 이 시는 표면적으로는 마을을 떠났던 화자가 다시 마을로 돌아오는 도중에 마을 근처 눈 내리는 숲 속에 잠깐 멈춰 섰다가 “지켜야 할 약속”이 있어서 다시 “몇 마일의 길”을 더 가야겠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요? 마지막 연에서 화자가 말하는 “지켜야 할 약속”과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몇 마일의 길”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저 평범한 약속일까요? 아니면 다른 무엇일 수 있을까요?
해석은 갈립니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화자는 지금 어딘가를 갔다가 다시 마을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것이지요. ‘여행’은 시에서 많은 것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보통은 ‘인생’, ‘삶’을 의미할 때가 많지요. ‘잠’은 또 어떤가요? ‘잠’은 시에서 ‘죽음’의 은유로 자주 사용됩니다. 그 유명한 독백에서 햄릿도 말했잖아요. “죽는다는 건 잠드는 것, 그 이상은 아니다”(To die, to sleep, no more). 이처럼 시에서 잠은 죽음의 은유로 흔하게 쓰입니다. 그래서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삶의 여정을 다 마쳐가는 여행객인 화자가 마지막 잠, 즉 죽음을 앞두고(앞에서 기억해주시라 했던 “한 해의 가장 어두운 때”란 시간은, 따라서 인생의 말년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잠시 멈춰 선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행의 출발지였던 그가 다시 돌아가야 할 ‘마을’은 기독교적 사고에 따르면 고향, 즉 신의 품이라고 해석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는 단순한 귀향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여행을 마치고 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길’을 의미하는 것이 되겠지요.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그 ‘약속’이란 무엇일까요? 인간으로서 신과의 약속, 신에게 제대로 갈 수 있기 위한 마지막 인간적 도리의 수행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가야 할 몇 마일의 길”은 단순한 여행길이 아니라 인간적 도리를 다 마치기 위한 여정, 즉 신에게 올바로 귀의하기 위한 마지막 인간적 도리의 수행이라고 볼 수 있지요. 시의 해석은 이렇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시에 대해서는 후자의 해석이 훨씬 일반적입니다. 많은 비평가들은 이 화자의 여행을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우리 삶의 여정을 은유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정작 시인인 프로스트는 그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프로스트는 이 시에서 잠이 의미하는 바는 ‘죽음’이 아니라 그저 ‘몽롱한 상태의 잠’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화자의 여정도 거창한 인생 여정이 아니라 그냥 마을을 벗어났다 온 단순한 여행에 대한 회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잡하게 삶이 어떻고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시인의 의도와는 다른 과잉해석이 되겠지요. 이런 예를 또 있습니다. 프로스트의 또 다른 유명한 시, 「선택하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에 대해서도 프로스트와 비평가들 사이에 서로 의견이 갈립니다. 비평가들은 시에서 “두 갈래 길” 가운데 한 길을 선택하는 것을 우리가 인생의 어떤 중요한 고비마다 행하는 의미 있는 선택으로 해석합니다.
정작 프로스트는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1912년부터 3년 정도 영국을 방문했을 때 친구인 작가 에드워드 토마스(Edward Thomas)와 자주 산책을 했는데, 갈림길 마다 고민을 하는 토마스를 보고 미국에 돌아온 뒤 써 보낸 시라고 합니다. 갈림길을 만나면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말고 선택을 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시를 받은 토마스는 프로스트의 의도와는 달리 이 시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참전을 결정하게 되고 2년 뒤 안타깝게도 전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비평가에게도 토마스에게도 프로스트가 의도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 다시 돌아와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할까요? 예전에는 시인이 시의 의미를 결정한다고 생각했지요. 그가 쓰는 것이니 일견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의도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즉 시인이 주장하는 바를 그대로 믿는 ‘의도의 오류’(intentional fallacy)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고, 언어가 위치한 상황이나 맥락(context)을 통해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이 점점 더 확산되면서 현재는 상대적으로 비평가-독자의 해석이 힘을 더 얻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인의 생각이 시어에 정확하게 담겨 전달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시인의 말이 꼭 옳은 것도 아니게 되지요. 게다가 시는 언어로 되어 있으며, 언어는 이미 자기 나름의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언어들이 어떻게 결합하는가에 따라, 즉 언어가 놓인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생산하게 된다는 생각도 틀린 생각은 아닌 것이지요.
간단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사과를 주었다”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이때 이 문장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럴려면 ‘사과’는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지 정확하게 아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사과’만 보겠습니다. ‘사과’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렇습니다. 우선 당연하게도 과일인 사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만 할까요? 백설공주 이야기를 떠올린 분은 ‘사과’가 ‘죽음’을 의미한다는 생각을 할 것이며, 성서 속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떠올린 사람은 ‘죄’를 떠올릴 것입니다. 애플 전화기나 노트북을 떠올리는 분도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언어는 이처럼 그 언어 속에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단어를 모두 같은 뜻으로 이해한다는 생각은 위험해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이유로 프로스트가 단순한 ‘잠’이라고 의도한 ‘잠’이라는 단어는 ‘죽음’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며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프로스트 자신은 단순하게 ‘잠’과 ‘길’을 의미했더라도 다르게 ‘죽음’과 ‘신에게로의 귀의’로 볼 수 있고, 또 그렇게 보는 것이 시의 의미를 더 확장시킬 수 있다는 것이 비평가들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관련하여 허쉬(E. D. Hirsch)라는 비평가의 논의가 흥미롭습니다. 그는 작가가 작품에 담으려는 ‘의미’(Meaning)와 독자-비평가들이 해석하는 ‘의의’(significance)를 구분하는데, 이는 작가와 독자의 의미부여 어느 하나를 배제하지 않고 둘 모두를 고려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면이 있습니다. 작가가 작품에 부여하려는 ‘의미’와 독자가 작품을 읽으며 부여하는 ‘의의’가 일치할 때 작품 읽기는 ‘행복한 책 읽기’일 수 있겠지요? 그러나 400년 전의 셰익스피어가 부여한 작품의 ‘의미’가 지금에 와서도 똑같을 수는 없겠지요. 지금 그 작품을 읽는 독자가 부여하는 ‘의의’가 중요한 까닭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의 마지막 연의 ‘잠’과 ‘길’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시인인 프로스트와 독자인 우리들이 서로 다르게 해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독자라도 상황에 따라 달리 보이기도 하겠고요. 그래서 한 시, 한 문학작품을 여러 사람이 읽어도 다른 느낌과 의미를 받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은 여러분이 내리셔야 합니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또한 이 시를 읽는 여러분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프로스트의 의견을 따라 단순한 잠과 여행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어떤 비평가들처럼 ‘죽음’과 ‘삶의 여정’으로 볼 것인지 말입니다.
다만, 한 마디 사족처럼 덧붙이자면 어떤 해석이건 시를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더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의 의미를 한두 가지 일정한 해석으로 좁혀 고정시키는 것이 나을 것인가 아니면 살아있는 언어의 의미생산성과 독자 해석의 다양성과 자율성을 고려하여 가능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 좋을 것인가? 이 가운데 여러분들은 어떤 선택을 하실지요?
분명한 것은 이제 시의 주인은 시를 쓰고 사라진 시인도 자신의 관점으로 시를 읽는 비평가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시의 주인은 바로 이 시를 읽는 독자 여러분이며, 또 끊임없이 변화하는 언어를 통해 시를 읽어갈 우리들 각자입니다. 시대가 변하고 언어의 쓰임새가 변하고 시를 읽는 주체들이 변화하면 똑같은 시라도 얼마든지 다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읽힐 수 있는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겠지요. 자, 여러분은 이제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시 「눈 내리는 저녁 숲에 멈춰 서」(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를 어떻게 읽으실지요?
Whose woods these are I think I know (a)
His house is in the village, though; (a)
He will not see me stopping here (b)
To watch his woods fill up with snow. (a)
My little horse must think it's queer (b)
To stop without a farmhouse near (b)
Between the woods and frozen lake (c)
The darkest evening of the year. (b)
He gives his harness bells a shake (c)
To ask if there's some mistake. (c)
The only other sound's the sweep (d)
Of easy wind and downy flake. (c)
The woods are lovely, dark, and deep, (d)
But I have promises to keep, (d)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d)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d)
이 숲이 누구의 숲인지 알 것 같네
그의 집 마을에 있어도.
그는 모를 것이네, 나 여기 멈춰 서
그의 숲에 눈 쌓이는 것 보고 있음을.
내 작은 말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틀림없네
한해의 가장 어두운 이때
근처에 농가 하나 없는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 멈춰 서 있음을.
무슨 착오가 있는지 묻기라도 하듯
그는 마구를 흔들어 종을 울리네
달리 들려오는 건 부드러운 바람과
솜털 같은 눈송이 나리는 소리뿐.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네
하지만 내게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네
잠들기 전 가야 할 몇 마일의 길이 있네
잠들기 전 가야 할 몇 마일의 길이 있네.
첫댓글 아직 영시해설과 같은 코너에 글을 쓸 수 없게 되어 있어서...등업 부탁드려요^^
옮겨놓았습니다.
카페지기에게 연락하여 곧바로 올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여국현 교수님!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우리시 책속 선생님 영시 해설은 저에겐 튼실한 알곡입니다. 정옥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