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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곤에서 비행기타고 바간으로(2014.1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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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시간으로 11월8일 11:00경, 한국시간으로 11월9일 01:30경 양곤국제공항을 빠져나와 자정쯤되어 간이숙소에 가니 창밖에 옥상광고의 시계가 12시로 되어 있어 정말 돌아가는 시계인줄 알았습니다.
숙소가 중심가의 교차로에 있어 소음이 대단했습니다.
소음만 듣고도 거의 대부분 진작에 폐차를 시켜야 했어야 하는 차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매연이 어느 정도일지는 보지 않고도 상상이 되고요.
그렇게 잠못이루는 새벽이 되었습니다.
바간의 냥우 전통재래시장에서(2014.1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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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낯설은 나라, 미얀마 바간의 냥우 전통재래시장 입니다. 낯설은 과일, 채소, 건어물들과 역시 낯설은 조각품 등도 눈에 띄입니다.
사지도 않을 거면서 사진 찍기가 뭐해 그냥 넘어가야 하는 마음이 아쉽습니다.
채소 중에 고수는 특유한 냄새로 확실히 알겠고요, 겉은 잣방울처럼 생겼는데 속은 요구르트처럼 생긴 액체에 수박씨 같은 것이 들어 있는 달콤한 열매가 신기합니다.
쉐지곤 파야(파고다)(2014.1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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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첫번째 황금대탑 쉐지곤 파고다에 도착했습니다.
쉐(shwe)는 '황금'을 뜻하고, 지곤(zigon)은 '모래언덕'을 뜻하여, 이를 합하면 쉐지곤(Shwezigon)은 '황금의 모래언덕'이라는 뜻이랍니다.
거대하고 웅장한 황금불탑이 황금의 나라 미얀마를 증명하는 것 같습니다.
바닥에 홈을 파서 물에 비친 불탑을 보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옛사람들의 지혜가 존경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난다파야(2014.1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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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지곤파야에 이어 아난다파야를 방문했습니다.
아난다파야의 가장 인상 깊은 점은 북쪽 방향의 부처님이 가까이서 볼 때는 성난 표정이지만 멀리서 볼 때는 자비로운 표정입니다.
수인(手印 mudra)이 설법인으로서 부처님 앞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귀족이나 수행자에게는 근엄한 가르침을, 신분이 낮고 미천하에 멀리서 보는 자에게는 자비의 법문을 내리시는 것 같습니다.
과거 4불의 4방불로서 서쪽에 석가모니불, 남쪽에 가섭불, 동쪽에 구나함모니불, 북쪽에 구류손불이 모셔졌다고 합니다.
틸로민로파야(2014.1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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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탑을 스투파 또는 파고다라고 하는데 미얀마에서는 파야라고 한답니다.
탑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파야는 제디라고 하는데 쉐지곤파야와 쉐산도파야가 여기에 해당되고, 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파야는 파토라고 합니다. 이 밖에 스님들이 거주하는 수도원은 짜웅이라고 합니다.
나라파티시투 왕이 다섯 명의 왕자 중 막내 왕자인 나다웅미아를 왕으로 선출하기 위하여 왕의 상징인 일산을 던져 일산이 막내에게 가까이 떨어졌다하여 막내 왕자를 왕으로 선출하고, 이를 기념하여 부왕이 지은 술라마니파토와 같은 모양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적벽돌을 쌓는 도중 훼손되기 쉬운 곳곳에 사암(砂岩) 벽돌을 끼워 넣어 건물 외벽이 상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외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미얀마 맥주와 꼭두각시 인형극(2014.1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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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다 레스토랑에서의 첫날 점심 식사에 드디어 세계 정상의 미얀마(Myanmar) 맥주로 건배를 했습니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나에게도 맥주 맛과 함께 우리들의 가슴도 탁 트이는 맛이었습니다.
식사하면서 본 꼭두각시 인형극(puppet play)는 미얀마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맥주의 즐거움에 빠져 인형극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미얀마를 이해하기 위해서 알기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바녜인 칠기공방(2014.11.9(일))
(U Ba Nyein LacquerWare Worksh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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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칠기 제작 기술은 예술성과 정교함이 세계적으로 우수하며, 특히 바간의 밍거바 마을이 유명한 생산지라고 합니다.
대나무살을 얇게 깎아 돌돌 말아 원하는 색깔로 유약을 칠하고 정교하게 문양을 새긴 다음 도금을 하고 옷칠하여 마무리하는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대나무살을 씨줄로하여, 대나무살과 말총을 날줄로 빙 둘러 엮은 다음 유약을 칠하고 문양을 새겨 도금하고 옷칠하는 방법입니다.
대나무 살을 돌돌 말을 때 접착제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 기술이 얼마나 놀라운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누하파야/난파야(2014.1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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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라타 왕은 영토를 확장하게 됨에 따라 새로운 통치이념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타톤(따똥)국의 22세 젊은 나이인 신(Shin) 아라한을 만나 불교에 대한 설명을 든고 부처님께 귀의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영토확장에 따른 피지배세력을 억누르고 반란을 막기 위해 새로운 통치이념이 필요했습니다.
아노라타 왕은 타톤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불경의 필사본을 요청하나, 타톤국의 마누하 왕은 왕비의 권청에도 불구하고 경전을 주기를 거절합니다.
결국 이에 노한 아노라타 왕이 타톤국을 점령하여, 왕과 왕비, 난파야에 감금하고, 수많은 기술자들이 포로로 잡혀와 사원의 건립 등에 투입됩니다. 후에 마누하 왕은 풀려나 마누하파야를 짓게 됩니다.
난파야는 불교사원인지 힌두교사원인지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으나, 대부분 힌두교 사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노라타 왕은 마누하 왕을 힌두교 사원에 감금함으로서 종교적인 굴욕감을 주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노라타 왕이 불교를 받아들이기 전에는 낫신앙과 힌두교 신앙이 혼재되어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만민의 평등을 주장하는 불교 이념은 언제든지 반란의 불씨가 될 수 있는 피지배 세력의 단결을 와해하여 강력한 왕국을 건설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재목이었을 것입니다.
마누하 사원 안의 뒷편에는 부처님 열반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열반상과 휴식상을 혼동하는데, 열반상은 완전히 누운 채로 손바닥으로 머리를 받치고, 발은 가지런히 놓인 상태이나, 휴식상은 머리를 든 상태로 팔을 괴고 있으며, 발바닥은 비스듬히 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노라타 왕은 각각 전륜성왕을 추구한 인도의 아쇼카왕이나 신라의 법흥왕과 공통적인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마누하파야 입구에는 마누하왕과 왕비가 앉아 있는 모습이 있는데, 마누하 왕은 왕비의 상이 있는데 왕비가 아주 화난 표정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백조를 타고 있는 여인이 있는데 책을 손에 책을 들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인레의 수상고찰 빠웅도우파야에서 언급하겠습니다.
아래 사진의 앞의 4개는 마누하파야, 뒤 3개는 난파야와 관련된 것입니다.
민카바의 구바욱지파야(2014.1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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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간에는 웨찌인과 민카바의 두 곳에 구바욱지파야가 있다고 합니다.
민카바의 구바욱지는 바간 초기(11C?)에 세워졌으며, 웨찌인의 구바욱지는 13세기 후반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웨찌인의 구바욱지는 1975년에 붕괴되어 1990년대에 재건축 되었다고 합니다.
구바욱지는 미얀마어로 그림 그려진 큰 동굴사원(Great Painted Cave Temple)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사원 내부에는 부처님 본생담(Jataka)과 과거 28불 등의 프레스코 장식이 잘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본 민카바 구바욱지는 내부가 너무 협소하고 조명이 없는 공간에 사람이 많아 사진촬영이 어려워 대신 다른 분이 촬영한 사진을 올립니다.
건물의 외벽은 스투코 장식이라하여 벽돌 위에 모래, 석회, 당밀, 아교 등 여러 가지 물질을 섞은 반죽을 덧바름으로써 벽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데, 여기에 그림장식을 하여 미적 가치를 높입니다.
끝으로 백유경에 나온 이야기 하나 소개합니다.
제목 : 남의 집 담벽
옛날 어떤 사람이 남의 집에 가서 그 집 담벽을 바르는 것을 보았다.
그 벽은 편편하고 깨끗하여 아주 좋았다.
그는 물었다.
"진흙에 무엇을 섞어 바르기에 그처럼 좋은가."
주인은 대답하였다.
"벼와 보리를 물에 푹 담가 두었다가 그것을 진흙에 섞어 벽을 바르면 이렇게 된다."
어리석은 사람이 생각하기를
'벼와 보리를 섞어 쓰는 것보다 벼만 쓰면 벽이 희고 깨끗할 것이요, 진흙도 고루 묻을 것이다' 하였다.
그는 곧 벼를 진흙에 섞어 벽에 바르고는 편편하고 고르기를 바랐다.
그러나 도리어 벽은 높고 낮아 모두 벌어졌다.
결국 벼만 버리고 아무 이익도 얻지 못하여, 차라리 보시하여 공덕을 쌓는 것만 못하였다.
과거28불과 본생담(자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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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BC3000년 경에 인도 북서부의 인더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인더스 문명이 번성하게 됩니다.
BC2000년 경에 기후변화와 지진등으로 인해 인더스 강의 물줄기가 바뀌고, 아리안족의 침입으로 힌두교 전신인 브라흐마니즘이 성립되고 아울러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간의 계급제도가 생겨나게 됩니다.
BC600년 경에 계급차별을 무시하는 불교가 성립되고 왕족의 보호아래 불교가 번성하게 됩니다.
기원후 4,5세기 경에 아소카왕의 마우리아왕조와 카니시카 왕의 쿠샨왕조가 멸망하고 힌두교를 신봉하는 굽타왕조가 번성하게 됨에 따라 불교는 자연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무슬림의 침공으로 11세기 경에 불교는 물론 힌두교조차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18세기 경에 영국의 식민통치로 20세기에 인도가 해방되기까지 불교,힌두교,이슬람교는 암흑기를 걷게 됩니다.
그러나 힌두교는 살아남아도 불교는 사라지게 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우선 힌두교는 불교 이전의 브라흐마니즘이 불교의 융성과 함께 쇠퇴하다가 자기 반성과 함께 개혁의 길을 걷게 됩니다.
반면에 불교는 대중과 승단이 점차 멀어지는 길을 걷게 됩니다.
인도에서 불교의 쇠퇴의 이유로 네가지를 꼽는데, 팔리어와 같은 지방어 대신 서민들이 사용할 수 없는 산스크리트어인 귀족언어로 경전을 결집하고, 대승불교 운동은 붓다를 신격화하게 됨에 따라 브라흐마니즘과 차별이 없어지고, 왕과 상인의 후원으로 재정적 안정이 된 불교는 승려의 자질이 저하되고, 대중을 위한 포교보다 형이상학적 논의에 치중하게 되어 이상으로 불교는 대중과 멀어지게 되고 결국 대중과 멀어진 불교는 쇠퇴하게 됩니다.
거기에다가 후에 이슬람의 침입으로 왕실이나 상인계급의 몰락으로 불교에 대한 재정적 후원마자 없어지게 됨에 따라 그나마 완전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부처님 입멸후 수 세기까지는 불상이 없는 시대가 유지 되지만, 유럽의 문명의 영향을 받아 불상이 출현하고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붓다의 신격화와 함께 다양한 붓다와 설화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는 붓다 입멸 후 불교가 수없이 분파됨에 따라 자기 파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도 신격화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인도사회에서는 왕이 전륜성왕임을 표방하여 왕은 붓다와 거의 동급으로 간주하여 붓다의 신격화를 통해 결국 왕의 신격화를 하게 됩니다.
결국 왕은 많은 불사를 통해서 왕을 신격화하게 되고, 이는 대중과 불교가 멀어지게 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와 관련하여 3천불사상 특히 과거 28불과 본생담에 대해서 올립니다.
담마얀지 파토(2014.1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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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얀지(Dhammayan Gyi)는 붓다의 가르침의 빛(The Light of Buddha's Teaching)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사실 담마얀지 사원에 대한 기억이 조금은 가물가물합니다. 카메라 건전지가 방전되었고 사원 내부가 어두워 사진을 찍을 수 없었을 뿐더러 아침부터 여기 저기 돌아다니느라 몹시 피곤해서 오로지 쉬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사진은 다른 곳에서 구해다가 올립니다.
이 사원을 건축한 나라투 왕은 아버지인 알라웅사투 왕을 베개로 질식시켜 죽이고, 왕위를 이을 형들도 죽이고 왕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왕비인 부인과 그의 오빠, 그리고 그의 아들들마저 죽입니다. 이 왕비들 중에는 인도 칼라왕의 딸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라투 왕이 몸을 씻지 않고 그녀의 잠자리에 들자 그녀는 잠자리를 피했고, 왕은 분노한 나머지 직접 칼을 들고 찾아가 그녀를 죽였다. 칼라 왕은 분노했고, 여덟 명의 자객을 브라만 승려로 변장시켜 그에게 보내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It was said that he was displeased by the Hindu rituals and one of them who made those rituals was the Indian princess who was the daughter of Pateikkaya. So he executed her for such reasons. The princess's father wanted revenge for his innocent daughter and sent 8 officers in the disguise of Brahmans and assassinated Narathu in this very temple.
(http://bagan.travelmyanmar.net/dhammayangyi-temple.htm)
그(나라투 왕)는 힌두 제사의식에 매우 불쾌했는데 이러한 제사의식을 행한 사람들 중의 하나는 파테익카야 왕의 딸인 인도 공주였다고 전해졌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이유로 그녀를 처형했다. 공주의 아버지는 결백한 딸을 위해 복수하기를 원했으며 브라만으로 가장한 8명의 요원을 파견해서 바로 이 사원에서 나라투를 살해했다.
자객들에게 죽임을 당한 그에게 칼라지아민(인도인에게 죽임을 당한 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공주가 나라투 왕에게 죽임을 당한 원인은 이 두 가지 원인이 복합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관광 가이드 고모정 팀장님의 말대로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 미얀마에서 윤회를 중시하는 힌두교 제사의식을 행했다는 것은 독재를 하는 왕으로서는 인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잠자리를 거부하는 왕비의 태도는 왕에게 더욱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비의 입장에서도 왕이 백성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부모형제를 죽이는 패륜행위에 대해서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죽임을 당한 사람이 내세에서라도 편안히 잠들 수 있도록 죽을 각오를 하고 힌두교 제사의식을 행했을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행위가 나라투 왕이나 왕비가 이 사원 건설을 마치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담마얀지 사원은 아난다 사원과 유사한 건축평면도를 가진 거대한 사원이며, 상부 노대(terrace)는 바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관광객에게 일부 접근이 제한 되었다고 합니다. 미완성 부분이 있으면 고증에 근거해 완성하고 관광객에게 미공개 부분은 공개했으면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왕은 벽돌을 접착제를 쓰지 않고 빈틈이 없이 작업하도록 하였고,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이 발각되면 그 인부들은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사진의 돌은 바로 인부의 팔을 자르는데 사용된 돌이라고 합니다.
쉐산도 파야(2014.1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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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산도 파야의 앞에 도달하자마자 탑 위에 올라가 있는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 넓은 하늘에 해가 지는 쪽으로 큰 구름 하나가 석양을 멋지게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구름이 없어지기 전에 석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가이드 고모정 팀장은 차에서 내려 우리를 탑 동쪽 계단으로 안내했고, 우리에게 탑의 계단으로 올라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탑의 계단은 가파르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올라갔는지 신통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난간이 설치되어 있어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저 내려갈 일을 걱정하면서 위만 보고 올라갔습니다.
사람들이 올라갈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원형 탑이 있는 난간에까지 올라가니 전망이 아주 좋았습니다. 산이 있기는 하지만 사방으로 지평선이 빙 둘러서 일직선으로 쳐져 있었습니다. 탑 아래로부터 지평선 까지 탑과 나무들이 어울어져 장관이었습니다. 해가 지는 올라가던 계단의 반대편으로 가니 구름은 이라와디 강 너머로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석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해는 지상에서 불과 몇도 위해서 구경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구름이 없어지고 해가 질 새라 사진 촬영하는데 집중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해도 지지 않고 구름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산아래 같으면 붉은 황혼에 해가 바로 떨어질텐데 쉐산도파야의 해와 구름과 지평선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더 대단한 장관은 탑을 중심으로 석양의 반대편에 있었습니다. 하늘 너머로부터 지평선 끝까지 정체를 모를 빛줄기가 보였습니다. 나는 그것이 무슨 현상인지 궁금했습니다. 사실 다음날 아침까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그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석양에서 독일의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휴대전화로 석양 사진을 찍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 듯 보였습니다. 휴대전화 성능이 떨어지고, 할머니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 있어서 마음대로 촬영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그 할머니의 휴대 전화를 받아 석양 사진을 많이 촬영해주었습니다. 할머니는 고맙다고 어찌할 바를 몰랐했습니다. 가방을 뒤지더니 가진 것은 이것 밖에 없다고 볼펜 한 자루를 건네주었습니다. 나는 드릴 것이 없다고 미안하다고 하면서 주는 대로 받았습니다. 할머니는 괜찮고 또 고맙다고 대답했습니다.
사진 촬영을 대충 마치고 마누라를 비롯하여 일행을 찾아보았으나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내려간 듯하여 탑 아래를 둘러봐도 일행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저녁예불 소리가 들렸습니다. 순간 이 사람들 또 사고치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아랫단에서 들려오는 소리였습니다. 한 단을 내려가니 빛줄기가 모아지는 곳을 보고 일렬로 합장하여 저녁예불을 하고 있었습니다. 외국 관광객들이 궁금하여 모두 쳐다보고 있었고, 그 중 어떤 사람들은 사진촬영을, 어떤 사람들은 비디오 촬영을 했습니다.
그 빛은 빛이 아니라 햇빛이 구름에 의해서 형성된 그림자였습니다. 해는 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아주 크기 때문에 하늘 위에 떠있는 구름에서 평행선으로 그림자가 비치고 그 그림자가 머리 위를 지나 지평선 너머로 형성되었는데, 평행선으로 달리는 철도 궤도처럼 지평선 끝 부분에서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아쉽게도 쉐산도 파야에 올라가 있었기 때문에 탑은 촬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탑 위에 올라가 찍은 사진은 분명히 있기 때문에 나는 곳 그 탑 위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고 나와 탑은 하나가 되었던 듯합니다.
쉐산도 파야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제디형의 탑인데, 타톤에서 가져온 부처님 머리카락두개가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쉐산도 파야는 금빛의 머리카락 사리(Golden hair relic)를 의미하며,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98미터)보다 1미터 더 높다고 합니다. 탑은 5단의 팔각형과 사각형 탑신과 원뿔형의 탑신으로 되어 있는데 각 단의 징두리(단의 가장자리에 쌓은 낮은 벽) 부분에는 도기판에 자타카 장면이 새겨진 판이 부착되어 있습니다.
이 불발 사리는 바고의 왕이 아노라타 왕에게 크메르의 침공을 물리쳐준 보답으로 주었다고 합니다.
1044년 왕위에 오른 바간 왕조의 아노라타 왕은 몬족의 타톤 왕국을 점령하고 제일 먼저 쉐산도 파야를 건립했다고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타톤 왕국에서 끌고 온 예술가, 건축가, 그 밖에 몬족 백성들이 이 사원의 건립에 동원 되었을 것입니다.
퀸하우스 레스토랑(2014.1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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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산도파야서 나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이라와디 강변의 퀸하우스 레스토랑에 갔습니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 가이드 고모정 팀장이 미얀마 민속의상인 론지의 착용법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남자의 론지를 빠소(paso)이라고하는데 매듭이 앞으로 가게 하고, 여자의 론지를 타메잉(htamein)라고 하는데 오른쪽(또는 왼쪽)으로 가게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남자는 일을 많이 해서 양손을 많이 쓰기 때문에 매듭이 옆에 있으면 불편하고, 여자의 경우는 아이를 돌보는 등 한 손을 많이 사용해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남자가 일을 하거나 운동할 때는 손을 가지랑이로 넣어 론지의 뒷부분을 앞으로 당겨 론지의 배꼽부분으로 집어넣으면 반바지 형태가 되어 활동이 원활하게 됩니다.
미얀마는 사시사철 덥고 물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목욕을 많이 합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우물이 있는 곳에서는 목욕을 하는데, 남자들은 웃통을 벗은 상태에서 목욕하고 여자들은 그냥 비누칠을 하고 옷의 겉 부분을 문질러 닦는다고 합니다. 다시 물을 충분히 퍼부어서 씻어낸 다음 준비한 깨끗한 론지를 겉에 입고, 입고 있던 론지는 벗어내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이밖에 초중고 모두 학생들은 녹색 론지를 입는다고 합니다.
참고로, 미얀마의 모든 교육 과정은 거의 무료로 이루어진다고 하고, 미얀마의 학제는 유치원 1년(만5세), 초등학교 4년, 중학교 4년, 고등학교 2년, 대학교 3년으로 이루어지는 1-4-4-2-3년제로 전체 14학년제이며, 초등학교까지 5년간은 의무 교육이랍니다.
쉐산도파야에서 석양을 구경하였기 때문에 식당은 주변이 보이기는 하지만 이미 해가 저물어져 있었습니다. 여려 줄의 식탁이 놓여 있고 앞에는 공연할 수 있는 무대가 있었습니다.
식탁 위에는 식사를 위한 준비가 있었고, 전등불 대신 촛불로 분위기를 조성하였 습니다.
일행이 자리에 모두 앉자 저녁 식사가 나오고 제법 어두워졌습니다. 초가 그리 크지 않고 가늘었기 때문에 주변은 어두운 편이었습니다.
우리가 먹을 식사가 나오면서 마음씨 좋은 거사님의 보시로 미얀마(Myanmar) 맥주도 등장하였습니다. 술을 잘 마시지 않는 나로서도 맛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 미얀마 맥주는 역시 일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대에는 조명이 밝혀지고 미얀마 민속의상을 차려입은 무희들이 나오면서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미얀마의 문화적인 식견이 없는 나로서는 공연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없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공연과 저녁식사가 같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공연에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식사를 하다보면 옆 사람과의 대화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연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당일의 여행 등에 대한 이야기에 몰두하게 되고 공연은 아주 특별히 주목을 끌지 않는 한 별 관심이 없어지게 마련입니다.
차라리 공연을 먼저 보고 식사를 나중에 했으면 공연에 관심을 갖고 본 다음에 더욱 즐거운 식사를 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여기에는 저녁식사를 빨리 마치고 휴식에 들어가야 하는 고충도 있었을 것입니다.
공연 중에 기억나는 것은 코끼리 공연입니다. 코끼리가 나와서 공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북청사자놀음에서 사자의 의상을 뒤집어쓰는 것처럼, 코끼리 의상 안으로 사람이 들어가서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공연을 펼치는 것입니다. 또 하나 기억이 나는 것은 아마도 동남아시아 중에서도 인도차이나 반도는 하나라는 것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 공연으로서 미얀마를 중심으로 인도차이나 반도의 각국의 의상을 입은 무희들이 나와 공연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조금 서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는 모습이 돋보였습니다.
공연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보다 늦게 도착한 다른 여행팀은 모르는 사이에 이미 모두 가버렸고 우리 팀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가이드가 사전에 공연할 내용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하고, 음식이 나오기 전에 공연이 진행되었으면 보다 즐거운 모습으로 신중하게 관심을 갖고 관람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식사가 끝나고 계산하는 과정에서 식당 측과 트러블이 생겼습니다. 식사비용은 여행사에서 지불하기 때문에 정확하지만, 일행 중 자비심으로 주문한 식사 외에 추가 요청한 맥주 가격에 의문이 생겼습니다. 마신 병의 수는 세어보면 알 수 있고, 가격은 달러나 찻트로 지불하는데 객관적으로 뻔한 가격이 부풀려졌기 때문입니다. 가이드의 중재로 트러블이 쉽게 해소 되었지만 별로 좋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아마도 미얀마 여행 중 전무후무한 옥의 티로 남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계산을 마치고 식당을 나와 바간 최고급 호텔인 미얀마 트레져 리조트로 향했습니다.
미얀마 트레져 리조트(2014.1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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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다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우바네인 칠기공방에 가기 전에 미얀마 트레저 리조트에 미리 가서 짐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했습니다. 다시 모여 우바녜인 칠기공방, 마누하파야/난파야, 구바욱지파야, 담마얀지파야, 쉐산도파야 등 관람 및 저녁 식사 후 아주 컴컴해졌을 때야 다시 리조트에 돌아왔습니다. 리조트 내 식당 옆 야외에서는 파티가 벌어졌습니다. 우리는 피곤하기도 하고 다음날 일정이 바빴기 때문에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리조트 시설은 미얀마의 많은 지역에 산재해 있는 불탑의 황토흙 벽돌의 개념을 살려 온통 붉은 색 천지였습니다.
방안에 들어서니 이웃집 간의 방음 성능이 상당히 떨어지는 것 외에는 시설이 좋았습니다.
미얀마 호텔방 천정에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바로 기블라(Giblah) 또는 끼블랏(Kiblat) 이라는 것인데 바로 메카를 향한 방향표지입니다. 인도차이나 반도 일대가 이슬람권이다보니 기블라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슬람이란 아랍어로 ‘순종’과 ‘평화’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의미가 승화되어 인간이 유일신인 ‘알라’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함으로써 몸과 마음의 진정한 평화에 도달할 수 있다는 종교적 의미를 포함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이슬람의 종교적 신조로 굳어졌다고 합니다.. 이슬람을 신봉하는 사람은 알라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기 때문에 복종자, 곧 ‘무슬림’이라고 한다 합니다. 즉 이슬람은 종교의 이름이고, 무슬림은 이슬람교 신도라는 뜻입니다.
또 하나, 신기할 것은 없는데 각 방마다 화장실에 핸드 비데가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에게는 생소하지 않겠지만 각 가정에서 좌식 비데를 쓰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조금 생소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만 그런가요?
심심해서 TV채널을 이리 저리 돌려보니 우리나라 국제 방송인 아리랑TV를 영어로 청취할 수 있었습니다. 하룻밤을 곤히 자고 다음날 아침도 역시 일찍 일어나야 했습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팀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바간에서 만달레이로 출발해야 하니 갑자기 식당이 붐비기 시작했습니다. 일류 호텔답게 음식도 가짓수가 많고 맛이 있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뒤 호텔 앞에서 기념사진 촬영을 하고 만달레이에 가기 위해 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바간공항(1)(2014.11.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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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트레져 호텔을 나와서 바간공항을 출발하여 만달레이로 가는 날입니다.
여행 중 날마다 기상시간이 아침 5시입니다. 그래도 한국하고 시차가 2시간 30분이나 되다 보니 실제 일어나는 시간은 아침 7시 30분이 되겠습니다. 부랴부랴 짐을 싸고 나갈 준비를 했습니다. 방음이 잘 되지 않아서 옆방에서도 짐을 싸느라 난리가 났습니다.
짐은 포터가 날라주기 때문에 애써서 짐을 운반할 필요는 없습니다.
식당에서 생각해보니 침대정리를 위해 수고하는 사람들을 위해 원(1) 달러를 놓고 나오는 것을 잊었습니다. 내가 원 달러를 강조하는 이유는 관광지에 가는 곳 마다 원주민들이 싸구려 물건을 파는 값으로 원달러를 외칩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시간에 맞추어 전세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호텔 사무실 앞으로 나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차 안에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일류호텔이라 기념사진 촬영하고 가자고 제안하자 대부분 반응이 좋았으나 몇 명은 귀찮다는 표정이었습니다.
모두 차에서 내려 기념촬영을 했습니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15명 전원이 기념 촬영한 것은 미얀마 트레져 호텔과 마하무니파야, 담마두타선수행센터 세 곳 뿐입니다.
사진 촬영을 마치고 앞을 보니 아침 햇살에 야자나무만 금색으로 비치는 모습이 좋아 얼른 다가가서 촬영했습니다.
버스는 서서히 호텔을 빠져나와 바간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가는 길이 왼쪽 창밖을 보니 탑들 사이로 열기구가 많이 보여 장관이었습니다.
바간공항에 도착하여 대합실에 가니 여행팀들 중에 우리가 제일 먼저 도착한 것같았습니다. 그러나 곧 대합실이 인파로 들어차고 사방에서 웅성웅성합니다. 사흘째 여행을 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익숙해지고 모르는 사람들도 잘 어울렸습니다.
대합실에서 많은 사진을 찍었습니다. 한참을 기다려 개찰이 시작되고 비행기에 탑승했습니다. 탑승하면서 몇 장의 사진도 찍었습니다. 한국의 공항 같으면 보안을 염려하여 사진촬영을 못하게 하는데 미얀마에서는 운항에 지장을 주지 않으며 촬영해도 제제를 하지 않으니 좋습니다.
마하간다욘짜웅/우베인목교 가는 길(2014.11.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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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마하간다욘짜웅과 우베인 목교에 가는 길에 대한 사항입니다.
만달레이 공항에서 전세버스에 일행과 짐을 싣고 곧장 마하간다욘 사원으로 출발했습니다. 가는 길에 고속도로를 지나는데 왕복 4차선 도로입니다. 고속고로는 중간의 공터로 구분되어 있어 중앙분리대가 따로 없으나 고속도로와 같은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산은 물론이고 도로의 지대의 높낮이가 없기 때문에 자연히 도로는 일직선입니다.
가는 길에 가이드 고모정 팀장이 미얀마의 국가 형태에 대해서 민주주의인지 사회주의인지
퀴즈를 냈습니다. 정답은 민주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군사정권에 의한 통치입니다.
미얀마는 1948년1월4일 독립하여 미얀마 연방이 성립되고, 1962년 네윈 장군의 쿠데타에의해 군사정권이 성립됩니다. 2007년 미얀마 반정부 시위가 대규모로 발생하고 2010년 11월7일 민간정부가 탄생하나, 이 또한 민간정부를 표방하는 군사정권의 연장입니다. 미얀마에는 민간인과 스님과 군부가 있다고 할 정도로 군부의 영향력은 막강하다고 합니다.
미얀마는 오랜 군부독재에 따른 국제사회의 경제제재로 인해 사실상 외국기업의 투자가 중단된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1990년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야당 민족민주동맹(NLD)의 총선 승리를 인정하지 않자 자국 대사를 소환하고 22년간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1997년 '정부종합조달법'과 '대통령령'에 의거하여 미얀마에 대한 미국업체들의 신규투자를 금지하는 등 강도 높은 경제제제를 지속하여 미국업체들의 미얀마 투자는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미얀마는 2010년 민간정부 탄생이후 2012년4월1일부터 환율제도를 변동환율제로 변경하는 등 빠른 개혁과 개방을 진행함에 따라 국제사회에서도 경제 제재를 풀어 미얀마의 조치에 화답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미얀마 정부가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5년간 소득세 및 수입관세 면제 등의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고 미국 정부도 투자 금지조치 및 금융거래 금지조치를 대폭 완화하면서 미국업체들의 투자가 확대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12년 5월 미얀마에 대한 제제를 일부 완화하고 새 대사를 공식 지명했습니다. 또한 우리의 미얀마 여행기간 중인 2014년 11월 12일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에 참석하기 위해서 미얀마에 도착했습니다.
미국은 각종 천연자원의 보고이며, 러시아와 중국의 영향력이 막강한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지정학상으로 비교적 미국에 우호적일 수 있는 미얀마와의 수교는 중요하며, 미얀마 또한 경제부흥을 위해서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미얀마의 체제와 이념을 초월하여 최근에는 양국이 상당히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제 개방의 결과 관광의 보고인 황금불탑의나라 미얀마의 관광산업이 활성화 되는 등 각종 경제분야에서 눈부실만한 발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한 참 달리다보니 바나나 농장 한 곳이 보이기도 하고, 특이하게도 긴 대나무 장대 양 끝에 짐을 달아 메고 가는 사람도 볼 수 있었습니다. 고속도로 옆 타웅타만 호수에 다다르니 멀리서 길게 늘어선 우베인 목교가 눈에 들어오고 호수를 돌아 십여 분을 달리니 우베인 목교 바로 옆에 있는 마하간다욘짜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하간다욘짜웅(2014.11.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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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마하간다욘짜웅에 관한 사항입니다. 마하간다욘짜웅은 만달레이 권역에 있는 대규모 불교 수도원이자 승가대학 입니다.
‘마하’는 크다는 뜻이고 ‘간다욘’은 향기, ‘짜웅’은 수도원이라는 뜻입니다. 즉, 큰 향기가 나는 수도원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법구경에 나오는 ‘꽃의 향기는 바람을 거스를 수 없어도 수행자가 쌓은 불법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멀리 퍼진다.’라는 부처님 말씀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마하간다욘 사원 앞에 도착하여 급히 사원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공양을 받으려고 준비 중이었습니다.
스님들의 사시 공양을 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탁발을 나가고. 특별히 재가자가 대중공양을 할 때는 따로 탁발을 다니지 않고 사원 안에서 공양한 음식을 받는 것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사원 안에서 스님들이 음식을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1,500여 명 되시는 스님이 두 줄을 지어 음식을 받으시고 식당에서 음식을 드시게 되는데 그 행렬이 길어서 시간이 많이 소요됩니다.
우리가 마하간다욘짜웅을 방문했을 때는 이미 많은 관광객들이 스님들이 나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곧 스님들이 줄지어 나가면서 음식을 받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공양 행렬이 지나가는 것이 끝나고 이 사원의 창설자이신 우자나카 스님 박물관을 관람했습니다. 이 박물관은 우자나가 스님의 젊은 시절부터의 행장을 보관하게 있었습니다.
마하간다욘짜웅은 1914년 우자나카 스님이 설립하여 100년이나 되었는데, 우자나카 스님은 팔리어와 경전 공부에 능통하고 덕(德)높은 승려에게 부여되는 ‘빈비사’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존경받는 승려였습니다. 당시는 영국이 식민통치를 강화하면서 불교 역시 구시대의 뒤떨어진 종교로 몰아가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우자나카 빈비사 스님이 버마인들의 정체성 확립과 불교의 중흥을 위해 설립한 것입니다.
설립자 우자나카 빈비사 스님은 자신도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고 팔리어 경전을 미얀마어로 번역하는 한편 입적 때까지 경전 강의에 매진하면서 마하간다욘짜웅을 엄격한 수행처로 운영하였습니다. 그 결과 미얀마 불교가 영국의 기독교 세력에 의해 무너지지 않고 많은 국민이 불교를 지키고 지금도 많은 선지식을 배출해내는 것 같습니다.
미얀마의 인구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1983년에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3천500여만 명으로 집계한 후 현재까지 더 이상의 인구조사를 하지 않고 있다고 하며, 현재의 인구는 약 6천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6천만의 인구 중 군인의 수가 45만 명이고, 스님은 이들 군인의 수보다 많은 5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들 승려중 대다수는 미얀마의 마지막 왕도(王都)인 만달레이와 그 주변에 몰려있는데 미얀마에서 스님이 되기 위해서는 유명한 스님들과 더불어 불교대학이나 강원이 많은 만달레이로 가야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있다고 합니다.
마하간다욘 짜웅의 문 앞에 나오니 비로소 연못 가운데에 세 그루의 큰 보리수 나무인 피팔라 나무가 보였습니다. 큰길에서 사원을 앞으로 두 그루는 왼편에 한 그루는 오른편에 웅장하게 서 있습니다.
우베인 목교(2014.11.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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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우베인 목교에 대한 글입니다. 보도파야왕(Bodawpaya: 1781-1819)은 1782년에 인와에서 "영원한 도시"라는 뜻의 아마라뿌라로 수도를 이전하면서 인와의 궁전에 사용했던 티크목재들을 해체해 아마라뿌라 왕궁을 건설하는데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불심이 깊었던 아마라뿌라의 시장인 우베인은 마하간다용 수도원과 호수 건너편 지역으로 스님들이 탁발 공양을 나갈 수 있도록 왕궁에 사용하고 남은 목재들을 모아 타웅타만 호수를 가로지르는 높이3m 폭 2m의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보도파야 왕은 왕궁을 인와에서 아마라푸라로 이전하고 민군대탑을 건설하게 됩니다. 민군대탑 공사를 강행할 때 백성들 사이에서 ‘이 탑이 완성되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결국 국고가 바닥나 탑도 완성하지 못하고 왕의 사후에 지진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1810년에 대규모 화재로 결국 민돈왕은 만달레이로 왕궁을 이전하고 보도파야의 꿈은 무너지게 됩니다. 또한 영국과의 갈등으로 인하여 미얀마 흥망성쇠의 사양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나마 우베인 시장이 인와 궁전 건립에 사용되었던 나무로 이 우베인 다리를 만들어 보도파야 왕의 체면을 세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팔만대장경 제작에 쓰인 나무는 산벚나무와 자작나무라고 합니다.
지리산에서 벌채하여 섬진강에 띄우면 저절로 경남 남해 관음포 대사리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이 나무를 1~2년 바닷물 속에 담가두었다가 꺼내어 경판 제작에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소금물로 삶은 다음에 음지에서 바람결에 다시 1년을 말리면 경판제작에 좋은 재목이 된다고 합니다.
우베인 목교의 티크나무가 200년이 지나로도록 물 위에서 서있을 수 있는 것은 워낙 재질이 단단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돌부처처럼 움직이지 않는 티크나무 다리가 200년의 세월 동안 바로 아래 호수의 물결 위에 자신의 흔들거리는 모습을 무심코 바라보며 서 있던 중, 어느날 어떤 동자 스님이 발우를 들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그 귀여운 모습에 빙그레 미소짓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마하무니파야(2014.11.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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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달레이의 마하무니파야는 일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방문한 곳입니다.
마하무니 파야는 미얀마 인들이 신성시하는 살아있는 불상인 마하무니를 모신 사원으로, 그레이트 파고다(Great Pagoda) 또는 같은 뜻의 미얀마어인 파야지(Phayagyi)로 부르기도 합니다. 마하무니 불상은 쉐다곤파야, 짜익티요파야와 더불어 미얀마의 3대 사원의 하나입니다. 쉐다곤 파야와 짜익타요가 석가모니의 불발을 안치한 곳이라면, 이곳의 불상은 석가모니의 생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져 그의 정기가 담겨있습니다.
마하무니 파야는 불단 위로 올라가서 개금도 할 수 있도록 되어있는데 여성은 불단위로 올라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사님들만 불단 위에 올라가서 불상을 만져보았습니다.
한국식당(Korea House Restaurant)(2014.11.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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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3대 사원 중의 하나인 마하무니 사원에 가기 전에 들른 곳이 한국식당(Korea House Restaurant)입니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 도로를 보니 개들이 많았습니다. 불교에서는 살생을 금하기 때문에 미얀마는 가는 곳곳마다 많은 개들이 도로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개들이 많은 이유는 음식이 남으면 버리지 않고 개에게 먹인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교통신호등도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도로와 보도가 구분되어 있지 않아 상당히 지저분한 도로에 개들마저 가세하니 어지러울 지경이었습니다. 관에서는 일 년에 한번 정도 날을 정하여 개의 숫자를 정리하는 날이 있다고 하지만 관광객의 입장에서는 골칫거리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가는 길에 가이드는 전통 금박제조 공정에 대해 설명해주었습니다.
우선 작은 순금 조각을 종이와 가죽으로 싸서 고무망치로 망치질을 합니다. 보통 60번을 한다고 하는데, 일정한 속도와 힘을 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냥 망치질을 하면 망치질한 횟수를 잘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는데 보통 물시계를 쓴다고 합니다. 물통에 구멍을 뚫고 물을 부은 다음에 망치질을 시작할 때부터 물방울이 떨어지도록 하여 물통 안에 물이 다 떨어지면 작업을 마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두드려진 금박을 다시 기름종이에 싸서 2차 망치질을 한 다음에 보기 좋게 사각형으로 자른다고 합니다.
금박을 만드는 일이 쉽지는 않고 많은 돈을 벌 수는 없지만 이렇게 만든 금박이 불상의 개금에 쓰이므로 미얀마 사람들은 금박을 만드는 일에 자부심을 갖는다고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한국식당(Korea House Restaurant)에 도착했습니다. 이 식당의 주인은 미얀마 사람인데, 한국에서 음식을 배우고 미얀마에 돌아와서 개업했다고 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여러 가지 반찬들이 맛이 있고 음식이 깔끔합니다. 비록 이틀 동안 이지만 한국 음식을 만나니 반가웠습니다. 여기서도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미얀마 맥주였습니다.
금박제조공장 견학이 일정표에는 있었으나 방문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에 사진을 다른 데서 가져다 올리고자 합니다.
이라와디강(1)(2014.11.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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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미얀마의 남북을 관통하여 흐르는 이라와디 강입니다.
이라와디(Irrawaddi) 강은 6세기경부터 개발되어 농업과 물자 수송에 중요한 강이라고 합니다.
마하무니 사원을 관람 후 만달레이 시장에서 과일을 사서 이라와디 강을 건너 민군탑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가이드 고모정 팀장은 마하무니 사원에서 이라와디 강으로 가는 도중에 민군탑에 가면 어리고 예쁜 수행비서가 한명씩 따라다닐 것이라고 얘기하여 사람들의 궁금증을 증폭시켰습니다.
육지와 배, 그리고 배와 배를 연결하는 나무판자가 놓여 있습니다. 나무판자에는 미끄러지지 않게 나무 폭만큼의 각목이 10개 정도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선원 두 사람이 장대를 양쪽에서 잡아 건너가는 사람이 넘어지지 않게 잡고 건너도록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일행은 승선할 때나 하선할 때나 무사히 건넜습니다.
배 하나에 선원은 두 사람인데 한 사람은 선장이고 한 사람은 항해사인 것 같으나 배를 타고 내릴 때 외에는 굳이 한 배에 두 명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배의 갑판에는 좌우 두 줄씩 네 줄의 나무로 된 안락의자가 20개 정도 놓여 있는 것 같고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천막이 쳐져 있습니다. 배의 앞에는 탁자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천을 깔고 우리가 오는 길에 시장에서 준비한 망고, 귤, 석류가 놓여져 있고, 나중에 땅콩도 가져왔습니다.
배가 출발하자 선장인 듯 싶은 분이 미얀마 물품을 판매하기 위해 설명하였으나 사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석류는 한국에서 먹는 것보다 속이 빨갛지 않은 것 같습니다. 비교적 신맛은 적고 단맛이 많은 것 같아 신맛의 괴로운 표정은 없고 오히려 즐거워하는 분위기입니다.
주변이 아주 멀리까지 평지이기 때문에 이라와디 강이나 강변은 사실 볼만하게 없습니다. 그래서 배는 한 시간 넘게 탄 것 같은데 할 일이 없어지자 잠을 청하거나 멀뚱히 먼 곳을 쳐다봅니다. 지나가는 배도 적고, 모래가 퇴적 된 곳에는 엉성한 집이 간 혹 한 두 개 보일 뿐입니다. 퇴적지에 집이 한 채 있고, 언덕배기에는 콩을 심은 듯한 것이 보이기도 합니다. 집이라고 해봤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기둥 몇 개 세우고 갈대로 엉성하게 였어져 있어 아무래도 범람하면 쓸려 내려갈 듯 싶습니다..
간혹 멀리서 연기가 나서 조금 관심을 끄는데, 아마도 마른 갈대를 태워 화전(火田)을 하는 것 같습니다. 강물은 비 내릴 때의 한강물처럼 흙탕물입니다.
한참을 기다려 배는 민군탑이 보이는 강가에 섰고, 배에 탈 때처럼 선원은 나무판자를 깔고 장대를 지탱하여 뭍으로 무사히 건너도록 했습니다.
다음은 민군탑에 올라가기 전에 영원한 도시, 불멸의 도시, 아마라푸라와 서울의 어원에 대해서 올리겠습니다.
오늘은 영원한 도시, 불멸의 도시 아마라푸라에 관한 내용입니다.
보도파야 왕이 1782년에 아마라푸라에 수도를 옮길 당시는 아마도 미얀마의 전성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급변하여 아마라푸라에 지진, 화재 등으로 수도가 다시 인와, 만달레이로 옮겨가고, 1885년 영국의 점령에 의해 식민통치가 시작되면서 수도는 양곤으로 옮겨지기까지 불과 100년 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고보면 아무리 높이 쌓아 올린 금자탑도 쓰러지기 마련이고, 세상의 영화는 덧없는 것입니다.
만달레이 건너 사가잉의 민군탑을 보면서 한편으로 인간의 무한한 노력도 천재(天災)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면 천벌을 받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콘바웅 왕조, 민군종 (2014.11.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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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드디어 사가잉의 민군에 도착하게 되겠습니다. 나는 민군탑이라고 해서 그 이름이 민돈왕이라 비슷해 민군왕이 세운 탑인가 생각했는데, 그 지역 이름이 민군이라 민군탑이라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 치고는 너무나 형편없고 어떻게 이런 곳에 이런 탑을 세울 생각을 했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와(아바)에서 아마라푸라로 수도를 이전한 알라웅파야 왕과 그의 아들 신뷰신 왕의 시기만 해도 콘바웅 왕조의 전성기였다고 합니다. 신뷰신 왕은 아유타야(태국)를 잠시 정복하고, 인도의 마니푸르 주를 공격하고, 중국 청나라와의 전쟁을 치르느라 국력을 소진하고, 결국 신뷰신 왕의 사후 3년만에 싱구왕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보도파야왕은 피의 숙청으로 정권을 찬탈하였다고 합니다.
신뷰신 왕의 아유타야 침공으로 찬란한 400년의 아유타야 문명을 철저히 파괴시켰는데, 200년 동안 정글 속에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다가 유네스코의 발굴작업을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마라푸라의 아마라가 불멸을 의미하는 것처럼, 아유타야 역시 불멸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멸을 상징하는 두 나라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신뷰신왕의 아유타야 침공으로 나라가 사양길로 가다가 결국 인도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그 원인의 발단이 알라웅파야 왕이 미얀마 남부지역의 몬 왕국을 멸망시키자 몬족이 아유타야로 피신하고, 그들이 분쟁의 불씨가 되리라고 판단한 알라웅파야 왕이 아유타야를 침공했다가 존쟁이 시작되기 전에 이질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의 아들 신뷰신 왕이 왕의 숙원사업을 이루기 위해 아유타야를 침공하여 불교 유적을 파괴하는 등 각종 잘못된 사업을 벌이다가 신뷰신 왕의 아들 신구 왕은 숙부 보도파야 왕에게 피의 숙청으로 왕권을 빼앗기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고 미얀마가 영국에 망하여 식민지가 되는 원인이 된 것 같습니다.
미얀마는 태국을 두 번 점령했는데 시암(태국)의 연대기에는 신뷰신왕의 침공의 상황을 "한타와디의 왕(바인나웅(1551-1581재위))은 군주답게 싸웠으나 아바의 왕(신뷰신(1763-1776재위))은 강도처럼 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민군에 도착하여 민군탑에 앞서 민군종과 신뷰메파야를 먼저 관람했습니다.
민군의 에야와디 강가에 도착하니 어린 아이들이 몰려와 우리를 반겼습니다. 고모정 팀장이 말한 바로 ‘수행비서’들입니다. 민군탑과 민군종, 그리고 신뷰신파야를 안내하고 각종 편의를 제공하고 그 댓가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먼저 민군탑의 입구를 지나는데 보도파야 왕 사후 20년인 1838년에 발생한 지진으로 파괴된 친테(사자)상이 벽돌로 된 속이 드러나 흉물스럽게 보였습니다. 상가를 지나 곧바로 민군종에 도착했습니다. 세계 최대의 종인 러시아의 종이 깨져서, 소리 나는 종으로는 세계 최대라고는 하나 크기만 할 뿐 별로 볼 품은 없었습니다.
미관상으로 보나 크기로 보나 제일가는 것은 역시 한국의 성덕대왕 신종이 제일입니다. 성덕대왕 신종은 민군 종보다 적은 양의 청동으로 우아하게 제작했을 뿐만 아니라 높이는 민군종의 3.65m에 비해 10cm 더 큰 3.75m로 세계 최대의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원리를 최대한 활용해서 제작하여 그 소리가 아주 아름다워 코리안 벨(Korean Bell)이라는 찬사를 얻게 했습니다.
신뷰메파야(2014.11.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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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찾아간 곳이 신뷰메파야 입니다.
신뷰메파야는 보도파야 왕의 아들인 바지도 왕자가 세운 탑으로서 불교의 우주관을 재현한 사찰입니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수미산의 밖에 7개의 산이 존재하고 맨 밖으로 이를 둘러싸고 있는 철위산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 산의 사이로 8개의 바다가 존재한다고 하여 구산팔해라고 합니다.
가장 변두리인 철위산 밖으로 지옥이 존재하고 그 안에 아귀, 지옥, 축생, 인간과 아수라가 사는 세계가 있으며, 수미산의 중턱에 사천왕천과 수미산 정상에 도리천이 있으며, 이 위로는 욕계 4천, 색계 18천, 무색계 4천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도리'는 인도어로 33을 의미하는데, 도리천 즉 33천이 있다고 합니다. 그 중심이 선견천이고 선견천 밖으로 32천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선견천에는 제석천왕이 산다고 합니다.
그 위의 염마천가 도솔천이 있는데, 이 도솔천이 바로 미래의 부처님, 즉 부처가 될 보살이 살고 있는 장소입니다.
신뷰메 파야는 보도파야 왕 재세시인 1808년에 죽은 바지도 왕자의 부인인 신뷰메를 위해서 1816년에 지었는데 1838년 지진으로 붕괴되고 1874년에 민돈왕이 보수했다고 합니다.
지진에 의해 부처님의 목이 떨어졌는데, 이를 다시 붙이는 일은 불경스러운 일이므로 다시 불상을 조성하여 이전 부처님의 앞에 봉안하였다고 하여 현재는 두분의 부처님이 한 자리에 계십니다.
민군파야(2014.11.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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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뷰메파야에서 발길을 돌려 다시 그 앞을 지나쳤던 민군파야로 향했습니다. 1838년 지진에 흉측스럽게 파괴된 모습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습니다. 건물 전체가 벽돌로 쌓아서 만든 건물인데 파괴된 모습 또한 정육면체의 커다란 벽돌이나 바위덩어리가 깨어진 것처럼 생겼고 깨어진 건물 위와 깨어진 사이로 나무와 잡초만 우거져 있습니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위험스럽게 느껴집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보도파야 왕의 아버지인 신뷰신 왕이 중국 청나라의 1765년부터 1769년까지 네 차례에 걸친 침공을 물리치는데, 중국은 결국 평화조약을 맺고 물러갑니다.
1790년, 중국과 미얀마 사이의 교역을 원한 중국 윤난의 상인들이 중국 황제가 보냈다고 속이며 부처님의 치사리를 보도파야 왕에게 가져왔는데, 결국 이 일로 중국과 교역이 재개되었고, 그렇지 않아도 선조들과 같은 업적을 남기려 했던 보도파야 왕은 위대한 왕들만 얻을 수 있는 성유물을 자신이 얻자 그것을 안치할 세계 최대의 거대한 탑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야망이 결국은 미얀마를 패망의 길로 접어들게 합니다.
아마도 신뷰신 왕이 미얀마처럼 불교국가인 불멸의 나라 아유타야(태국)를 침입하여 불교유적을 처참하게 파괴한 것에 저주를 받아 국력을 소모하고 청나라와의 전쟁을 부르고 아라칸과의 내전을 치루고, 그의 동생인 보도파야 왕은 피의 숙청 끝에 신뷰신 왕의 아들인 신구왕을 죽이고 왕위에 등극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보도파야 왕은 재정난으로 1797년 민군파야 건설을 중단하고, 또 왕의 사후에 지진에 화재를 더하고 영국의 침입에 멸망하게 미얀마는 근대사를 마무리 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바로 세계 최대의 욕망의 상징인 미완성의 민군파야와 예술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아무런 의미가 없는 민군종은 흉측스런 모습으로 남아 후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원하는 사람만 민군파야에 들러 계단을 올라가 민군파야의 부처님께 예배했습니다. 처참한 탑 안에 운이 없으신 부처님, 아마도 이 부처님도 세계 최대의 꿈에 순간 마음이 흔들렸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니면 중국 상인이 가져왔다던 치사리가 가짜였을 지도 모를 일이고.
어쨌든 보도파야 왕의 허무한 꿈이 한 번의 지진에 의해 무너진 탑, 민군파야의 여행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나도 꿈 한번 잘 꾸었습니다. 다시 우리가 타고 온 배를 타고 어린 수행비서들과 작별한 후 석양 너머로 해 저물어가는 민군파야와 신뷰메파야를 뒤로 하고 만달레이로 돌아왔습니다.
먀난산꼬 왕궁/골든덕 레스토랑(2014.11.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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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와디 강을 건너 다시 버스를 타고 만달레이 시내로 돌아왔다. 인와에서 오면서, 그리고 민군탑을 다녀오면서 만달레이의 먀난산꼬 왕궁 옆을 지나갔습니다. 이 왕궁은 민돈왕에 의해서 1857년부터 1859년까지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왕궁에는 왕궁을 건립한 민돈 왕과 미얀마의 마지막 왕인 티보 왕이 거주하였으며, 궁성의 건립을 완공하고 26년이 지난 뒤인 1885년,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의 패배로 미얀마가 영국령 인도에 병합됨에 따라 영국군의 포격으로 사실상 폐허가 된 왕궁은 더퍼린 요새(Fort Dufferin)로 개칭되어 영국군의 주둔지가 되었습니다.
미얀마의 마지막 왕인 티보 왕은 인도의 봄베이(뭄바이)로 강제 이주시키고 미얀마는 인도의 한 주로 편입시켰다고 합니다.
성벽의 길이 등을 참고하기 위하여 인터넷을 검색하니 제각각이어서 위키피디아를 검색해보니, 한 변의 길이가 2km(6,666ft)이고, 두께는 아랫부분은 3m(10ft)이며 윗부분은 1.47m(4ft)이고, 높이는 6.86m(22.5ft)입니다.
새 궁성(宮城)은 옛 아마라푸라의 궁전을 해체하여 코끼리를 통해 만달레이 언덕의 새로운 위치로 옮겨와 완성하였는데, 궁성의 이름은 에메랄드 왕궁이라는 뜻으로 먀난산꼬(Mya Nan San Kyaw)라고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포격으로 영국 화폐국(royal mint)과 시계탑만 남고 모두 불에 탔으며, 1990년대에 현대의 건축 재료로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왕궁의 옆을 지나면서 담벽과 해자만 바라보고 만달레이 시내의 골든 덕 레스토랑이라는 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곳은 이름답게 중국의 이미지가 풍기는 식당으로 내국인과 외국인이 계단을 중심으로 다른 곳에서 식사를 하도록 배치한 것 같다.
이곳에서도 역시 세계 최고의 미얀마 맥주를 시켜 힘찬 건배를 하였으며, 박상규 포교사의 덕택에 베이징 덕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가로등만 빛나는 어두운 밤거리로 나와 숙소인 쉐쀼호텔로 향했습니다.
쉐쀼호텔(2014.11.10(월))
해가 저물고 저녁만찬을 마친 뒤에 만달레이 시에 있는 쉐쀼호텔에 들어왔습니다.
쉐쀼호텔은 서울에 있는 도시의 보통급의 관광호텔 정도였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일찍 잠을 청했는데 자정이 넘도록 밴드의 쿵쾅거리는 소리에 잠을 설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나갈 준비를 마치고 2층 식당에 내려와 식당에서 뷔페음식이 준비되기 전에 창밖 사진을 찍었습니다.
미얀마 메뉴로 식사를 마치고 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쉐쀼호텔을 검색해보니 쉐쀼지역에서 지하자원인 천연가스가 발굴되었다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옛날부터 석유니 가스니 얘기가 나오는데 아직까지 채굴된 적은 없습니다.
전에 포교원 포교부장이셨던 계성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자집에 태어난 것도 복이고, 좋은 부모형제 만나는 것도 복이고, 좋은 나라에 태어나는 것도 복이고, 부처님 인연 만나는 것도 복이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런하고 우수한 머리를 가졌는데, 게다가 천연자원까지 많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쉐쀼(shwe phyu)는 백금이라는 뜻입니다. 백금은 희소성, 영원성, 순수성, 다양성 등 이 네가지를 뜻한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네가지 성품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만달레이 공항 가는 길(2014.11.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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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아침이 햇살이 밝아오고 헤호의 인레호수로 가기 위해서 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만달레이에서 공항으로 가는 길은 상당히 멀었습니다.
가는 길에 스님이 트럭 뒤에 매달려 있는 사진을 한장 찍었습니다. 아마도 탁발을 나가시는 것 같습니다. 배경으로 광고판이 하나 보입니다. 사람이 많이 서 있는 것으로 보아 미얀마의 보컬 그룹인 것 같습니다. 위로 제목이 있는데, 트론 크로스(Tron Cross)입니다.
뒤에 마크가 하나 있는데, 독일의 나찌를 연상하게 합니다. 좀 다른 점은 새가 왼편이 아닌 오른 편을 보고 있고, 새 밑에 스와스티카(卍)가 십자 표시로 대체되었다는 점입니다.
어쨋든 미얀마 사회의 구성원이 스님, 군부, 일반 국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과 대비해서 이 사진은 인상적입니다.
더욱이 흥미로운 점은 독일 나찌와 비슷한 위엄 있는 문장을 내걸은 악단, 아래는 (뭔가를 얘기하는) 일반 국민, 그리고 현재의 장소를 막 떠나려고(회피하려고) 트럭에 매달려 있는 스님, 이 모두는 서로 관심이 없는 듯 보입니다. 한 마디로 미얀마 현재의 상황과 무관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미얀마 공항에 도착하여 대기실에 들어가니 우리보다 먼저 온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또 충남 연기군의 어느 사찰에서 온 보살님들을 또 만났습니다. 그 아주머니들도 나를 보고 반가워 하였습니다.
헤호로 가다(2014.11.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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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호로 가는 비행기는 만달레이 공항을 출발해서 하늘 높이 올랐습니다.
만달레이에서 헤호까지는 가깝기 때문에 시간이 불과 30-40분 밖에 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양곤에서 바간으로 가는 길은 산이 별로 없고 평지가 많은데, 바간에서 만달레이가는 길이나 만달레이에서 헤호로 가는 길은 산이 많아 보입니다.
산 아래 쪽에는 마을이 보이고 불탑들도 많이 보입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회원 사진을 찍어보았습니다.
무엇이 겁이 나는 지 발밑을 바라보는 데만 급급하지 사진을 찍는 나에게 눈길을 주고 잠시 포즈를 취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헤호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는 전세버스를 타고 곧장 인레호수로 출발했습니다.
인레호수(2014.11.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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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호공항을 출발하여 인레호수로 갔습니다. 비포장도로로 들어서니 시골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겨우 차 한 대가 빠져나갈 정도로 길은 좁고 자갈길입니다. 밭에는 사탕수수 심어놓은 것도 보입니다. 마치 한국에서 사찰순례를 가듯 가는 길이 그렇습니다.
가는 길에 소 떼를 만났습니다. 하얀 소가 무리지어 우리가 탄 버스를 가로막습니다. 얼핏 보기에 15는 되는 것 같습니다.
운전기사는 천천히 운전하면서 소들이 비켜주기를 기다립니다.
나는 그 때를 놓칠 새라 얼른 카메라를 꺼냈습니다. 그렇지만 차 앞에 있는 소를 찍기에는 이미 늦었고, 차 옆에 지나가는 소들만 겨우 찍었습니다.
그런데 잡아먹을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많은 소를 키우는 지를 모르겠습니다.
인도에서 소를 잡아먹지 않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BC 3000년 경에 인더스강 유역에서 인더스문명이 발생하고 농경문화가 시작됩니다. BC 2000년 경에 아리안 족이 남침을 하여 이웃간의 전쟁이 시작되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성립됩니다. 지배자는 권위의 상징으로 말 희생제를 지냅니다. 말은 재물로 사용되지만, 반대로 소는 농산물을 생산하는 중요한 노동력이 되기 때문에 살생을 금하고 신성시하게 됩니다. 그러한 전통이 굳어지고 강화되어 지금까지 소의 살생을 금하고 신성시하게 된 것 같습니다.
버스는 인레호수 입장료를 받는 곳에 섰습니다. 간판의 이름은 "Foreign Exchange Collection Committee for Inle Zone"이라고 써있습니다. 번역하면 "인레구역 외환징수위원회"가 되겠습니다.
인레 구역에 들어가는 외국인에 대해서 10달러/10유로의 입장료를 징수하고있습니다.
가이드 고모정 팀장은 사무실 안에 들어가서 입장료를 지불하고 나오고 버스는 곧 출발했습니다.
곧 우리가 묵을 숙소에 도착하여 방을 배정받고 짐을 풀었습니다.
프리스틴 로터스 스파 리조트(1-1)(2014.11.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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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인레호수의 시작인 프리스틴 로터스 스파 리조트(Pristine Lotus Spa Resort)호텔에 당도하여 각자 방을 배정받고 짐을 풀었습니다.
대낮이라 사람들은 모두 배타고 멀리 떠나고, 일하는 사람들만 오갔으며, 종종 장기 투숙하는 백인들만 보였습니다.
내가 묵었던 방은 7210호 입니다. 짐은 종업원에게 맞기고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7210호로 갔습니다. 길을 가운데로 양쪽으로 잔디가 깔려 있고, 그 바깥쪽으로 방이 배치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묵은 곳은 건물 하나 당 객실이 두 개씩 입니다. 우리 방은 7209호와 7210호가 붙어있습니다.
또 건물 밖으로는 수로가 인접해 있습니다.
방에 들어서니 입구에 현관 로비가 있고, 왼편으로 화장실과 샤워장을 겸하고 있는 곳이 보입니다. 침대가 있는 방과 화장실/샤워장은 대나무 발로 구획되어 있습니다. 침대가 있는 방 옆에 욕조가 있고 욕조에는 들어가기 불편하지 않도록 손잡이가 되어 있습니다.
욕조 앞을 지나가면 밖으로 나가는 문이 있는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의자 두개가 배치되어 있고 앞에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인레호수로 나가는 물길이 보입니다. 프리스틴 로터스 스파 & 리조트가 인레호수의 시작입니다.
쾌속 보트 타고(1)(2014.11.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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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방에 집을 풀고 다시 집결하여 바로 호텔 옆에서 쾌속 보트를 탔습니다. 보트는 6인용(승객 5, 선장 1)입니다.
기다란 보트에 의자가 5개 놓여 있고, 우산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산은 빗물이나 호수에서 튀기는 물을 가리라는 것이 아니고, 쾌속으로 인한 양산과 바람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배의 뒤에는 엔진과 프로펠러가 달린 키가 있다. 엔진은 한국의 경운기 엔진처럼 생겼습니다.
한 배에 선장포함 5명씩 탔습니다.
배는 선착장을 출발하여 호수로 나아갔습니다. 호수의 입구에는 땅의 경작지를 물길과 구분하기 위하여 나무들이 새워져 있습니다. 아마 호수 가운데 흙이 있는 곳에 수생식물들을 재배하는 것 같습니다. 조금더 나아가니 프리스틴 로터스 스파 리조트를 알리는 간판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니 넓은 호수가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이 호수는 한국의 호수의 개념과는 다를 정도로 아주 넓습니다.
드디어 보트가 속력을 내기 시작했고 양쪽으로 멀리 산맥 사이로 호수가 펼쳐집니다. 하늘과 호수 사이의 만나는 수평선을 대칭으로 구름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멀리 마을이 보이기도 합니다.
강 위에는 우리처럼 배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리고 호수에서 식물을 재배하거나 물고기를 잡는 사람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