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베트남에서 다시 태어나다
1967년 다낭 전선 투입. 해병 제5대대25중대3소대원. 청룡여단 CID(범죄수사대) 근무. 1968년 귀국.
1969년 콘툼 자할란 전선 투입. ‘영광의 제27청년여단’ 소년병 자원. 1975년까지 현장전투 참가. 소년병 500명 중 종전 뒤 살아남은 병사는 그를 포함해 10명.
두 사람의 베트남전 이력이다. 황석영과 바오닌은 어떻게 하여 베트남전에 참전하게 됐을까. 그들의 대화는 당시 한국과 베트남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황석영 : 66년에 군대를 갔어요. 그때 해병대를 가게 된 원인이 신체검사 기피 때문이었죠. 세번이나 기피를 했더니 동네 파출소에서 잡으러 왔어요. 그래서 그달에 나가는 군대가 어디냐 그랬더니 해병대라고 하대요. 그래서 갔는데 헌병대에 뽑혔습니다. 경남 진해 통제사령부에서 위병근무를 했지요. 근데 그때 한 하사관이 차떼기로 기름을 몰래 팔아먹었어요. 나보고 그 차를 통과시키라고 해서 보냈는데… 아, 이 사람이 문제가 되니까 “난 직업군인이고 넌 졸병이니까 넌 졸았다고 하면 끝난다. 제발 그렇게만 하라”는 거예요. 그랬더니 잡혔죠. 보름 중영창 살고 또 자대 영창을 살았는데, 그 자리에서 헌병전과 배지를 떼더니 그대로 정글전 교장인 포항으로 보내더라구요. 그래서 베트남으로 가게 된 겁니다.
정글전 교장에서는 한 2개월 동안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 친구 이름을 기억하는데… 외국어대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한 군대동기였어요. 그때 그 친구는 사회의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솔직히 난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그 친구가 정글전 훈련 끝나고 난 다음 베트남 가기 직전이었는데 화장실에서 M1소총을 입에다 물고 총 쏴 자살한 겁니다. 그때는 그 친구의 죽음을 굉장히 의아하게 생각했어요. 왜 그랬을까. 그게 개인적 원인이었는지, 아니면 전쟁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는지, 베트남전에 끌려가는 것에 대한 항거였는지, 그 가치평가는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 다음 베트남전에 가서 그 친구 죽음의 의미를 부여했어요. 그게 아주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베트남에서는 제5대대25중대3소대로 배속이 됐어요. 그런데 그때 우리가 가자마자 신병교육을 받고 쿠앙응아이성 아래쪽 해변가인 바탕칸 작전에 투입이 됐습니다. 저는 주로 그때 브로킹(방어작전)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게 한번도 적을 본 적이 없어요. (웃음) 스나이핑(저격)만 만날 날아오고. 부비트랩 터져서 깨지기만 했는데…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때 거기서 가혹행위 많이 했을 거예요. 그런 현장도 많이 봤고.
한 3개월 그 작전에 투입됐다가 다음에는 도로순찰병으로 빠졌어요. 1번 도로 순찰하는 게 임무였는데 하루종일 먼지 뒤집어쓰고 1번 국도를 왔다갔다 하면서 순찰하는 거였어요. 비교적 특과였죠. 내가 영어를 조금 한다는, 미군과 협동을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어요. 운이 좋았어요. 그러고나서 본대로 귀대했는데 그때가 구정대공세가 터졌을 때에요. 그런데 그때 우리 작은누나를 짝사랑하던 청년이 해사를 갔었어요. 중령을 달고 백령도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게 유일한 ‘빽’이었던 거예요. 어머니가 일주일 동안 배를 타고 가서 그 중령한테 “아이구 내 아들 살려주시오” 사정을 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그 중령이 자기 동기생들한테 연락해서 나를 빼는 데 이틀 걸렸어요. 아 ‘빽’이 좋긴 좋더라고. (웃음) 그때 월맹 정규군이 호이안과 후에를 다 점령했을 때인데. 거기에 투입되려고 총 닦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참 간발의 차이로 나를 전출시키러 데리러 온 거예요. 그래서 간 게 청룡여단본부 CID(범죄수사대)였습니다. 면접시험을 보는데 “너 영어 잘해?” 묻기에 무조건 “네, 잘합니다” 그랬죠. 그리고 다낭에서 합동수사대 시장조사원을 했지요. 블랙마켓을 담당했습니다. 거기서 베트남전쟁이 무엇인가를 발견했어요. 미국이 제국주의적 전쟁을 수행한다는 걸 확실히 안 겁니다.
나는 사실 베트남 인민들에게 참 고마워요. 내가 동아시아의 작가로 다시 태어나는 데 베트남 민중의 항쟁이 많은 걸 가르쳐줬단 말입니다. 거기서 내 조국의 운명도 발견했고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에서 배운 것들이 그뒤 광주항쟁을 이해하는 데에도 정신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결국 베트남전쟁에 갔다온 뒤 급진적인 좌파 활동가가 됐던 거지요.
바오닌 : 저는 좀 다릅니다. 베트남에서 일어난 전쟁이었기 때문에 베트남의 청년과 남성들에게는 베트남전에 참여하는 게 아주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특히 우리 집안은 전쟁으로 인해 큰 상처를 입었지요. 베트남 중부지역인 쾅빈이 제 고향인데 전쟁 당시 외가는 남베트남에 있었고, 친가는 북베트남에 속해 있었습니다.
황석영 : 저랑 똑같네요. 저는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 자식입니다. 한국전쟁 때 제가 소학교 2학년이었는데, 외가쪽 세명은 남으로 내려오고, 나머지는 북에 다 남았어요.
바오닌 : 어린 시절 학교를 다니면서도 빨리 커서 전쟁에 나가 미국을 물리치고 해방을 이뤄야 한다는 생각만 있었습니다. 수학이나 물리학을 공부하거나,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어요. 무력통일에 대한 확실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남쪽을 어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강렬한 염원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 어린 학생의 단순한 생각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베트남전 참전할 때 17살이었는데, 당시 그 나이의 베트남 청년이란 것은 체구도 작고 어린애와 같았습니다. 단지 내가 추구하는 이상을 향해 아주 무섭게 달려들 수 있는 혈기왕성한 나이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이상이란 것은 올바랐습니다. 어쨌든 저는 6년이란 기간을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 자신이 특별하게 대담한 병사는 아니었습니다. 두려움이 들었기 때문에 피하고 싶었고,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날그날만을 생각하며 보낸 적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저는 다행스럽게도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기뻤습니다. 다른 어떤 깊은 생각을 할 틈도 없었습니다. 전쟁의 공포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지요. 두 나라의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위해서,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이 불행한 과거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한겨레21 2000년 06월 22일 제31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