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해놓고 여지껏 올리지 못했습니다.
*다시 원본을 살펴보며 불완전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고치고, 남용한 불완전명사 '것'의 사용을 자제하며, 띄어쓰기에서 제 나름의 원칙도 적용하여 이 연재물을 정본(正本)으로 삼고자 합니다.
*사실 다른 작품들도 다시 한 번 손을 봐둬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게으른 탓에 그러지 못했는데 어찌됐든 올해는 단편만으로 묶은 작품집 1권, 중편으로 묶은 작품집 1권을 내야겠다는 목표를 정했습니다.
<박희주 장편소설>
사랑의 파르티잔
*차례
1. 바람---2
2. 돌풍---24
3. 광풍---49
4. 질풍---70
5. 태풍---79
6. 삭풍---94
7. 폭퐁---128
8. 역풍---150
9, 회오리---166~182
사랑의 파르티잔
-반란이 혁명일 수 있듯이 불륜은 언제 일상이 되는가.
(1) 바람
마흔으로 넘어가기 전, 이 서른아홉에 아무도 모르는 비밀 하나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쉰이 되고 예순을 넘어 죽을 때까지 그 내밀함을 즐기려 했다. 그 즐거움이 식상해지면 오십이 되기 전에 또 하나 만들면 되리라. 오십이 넘어가면 만들고 싶어도 내 몸이 따라주지 않으려니.
나는 굶주렸다. 허기졌다. 내 몸이 원하는 걸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나를 구속시킨 종교와 도덕과 관습과 윤리가 육체보다 정신을 중요시 여기지만 그 갈증은 심해져만 갔다. 고비였다. 이대로 살아갈 것인가. 아무도 모르게 속으로만 응어리진 불만을 안고서. 한국여성의 평균수명을 고려한다면 삶의 반 토막, 젊은 날은 가고 늙을 일만 남았다. 그동안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열정은 고사하고 질질 끌려 살아왔다. 줏대도 없고 좌표도 없이. 사육되어진 것이다. 지금의 나는 내가 바라던 모습이 결코 아니다. 단 하루만이라도 나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래 영등포역에서 전라선 열차를 탔다. 목적지는 일단 종착역인 여수까지 표를 아낌없이 끊었다. 좋은 남자를 만나면 도중에 내려도 좋을 것이다. 가다가 맘에 드는 남자를 만나지 못한다면 내 열망의 불행일 거니 생각하리라.
굳이 좋은 남자, 괜찮은 남자일 필요도 없다. 이 세상은 좋은 남자, 괜찮은 남자가 너무도 흔하니까. 단 하나, 상대가 날 고른다기보다 내가 상대를 고른다는 것. 그가 어떤 남자여도 상관없으리. 건달이든, 놀고먹는 백수든, 엔지니어건, 전문직 종사자건 간에. 그 사랑은 오늘로 끝이니까. 그걸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남편은 그 많은 여자 중에 왜 하필 나를 골랐을까.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첨 봤을 때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그만하면 네게 과분한 남자야, 라는 주변의 부추김에, 최고라면 사족을 못 쓰는 부모의 안달에, 친구들의 시샘어린 눈총을 은근히 즐기며 사랑도 모르고 덜컥 결혼해버렸으니. 분명 거기엔 내세울 게 없는 우리 집안과 어쭙잖은 대학 출신인 내가 만만치 않은 재력의 시댁에다 우리나라 최고라는 명문대 출신인 남자를 만나기 쉽지 않다는 현실도 감안됐으리라.
결혼 후, 아이를 낳자면 낳았고 두 살 터울로 둘째를 낳았으며 그만 낳자고 해서 불임수술을 받았다. 평생이 보장되는 사서직공무원을 그만두래서 그만 뒀고 여행 가자면 갔고 섹스하자면 했다. 심지어 먹는 것까지 뭐를 먹자면 따라 먹었다. 언제나 지극히 수동적이고 순종적일 수밖에 없는, 오로지 가정주부로서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나라는 정체가 없는, 한심한 여자였다, 나는.
이제 13년. 남편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서 나이에 어울리는 무게를 달았다. 마흔셋의 나이에 대그룹의 홍보이사라면 어울린다기보다 오히려 넘친다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고 공부도 열심이다. 분명 주위에서 보기에 부족함이 없는 가정이고 나는 거기에 합당한 요조숙녀이다. 오로지 남편과 아이들밖에 모를 것 같은. 무슨 걱정거리가 있으랴 싶은. 거기에 무얼 더 바란다면 욕심이 지나치다고 비난받을 것만 같은. 그렇지만 나는 뭔가가 부족했다. 요즘 유행하는 2프로보다 더. 날이 갈수록 그 구멍은 커지고. 바람은 거침없이 들락거렸다. 나도 밤이면 자지러지고 싶다는 열망이 바람으로. 그토록 좋아하는 책읽기에서도 열망은 충족되지 않았다. <금병매>, <소돔 120일>, <모피를 입은 비너스>, <O의 이야기>, <아라비안나이트>까지. 그것은 남의 이야기였다. 내 얘기를 만들고 싶었다.
남편은 출근했고 아이들은 학교에 갔다. 평소 같으면 집안청소나 해야 할 시간에 아이들을 위한 메모만을 남기고 공들여 화장을 한 다음 아홉시발 무궁화호 열차를 탄 것이다. 역에서 대형거울에 나를 비춰봤을 때 주변엔 나만한 여자는 없었다. 서른아홉? 근사했다. 봄날에 어울리는 분홍색 원피스와 짝을 이루는 스카프, 치렁거리는 머리, 볼륨 있는 몸매, 햇빛을 보지 않아 더 하얀 얼굴에 내가 봐도 예쁜, 또렷한 이목구비. 남자들의 시선을 끌기엔 내가 봐도 충분했다. 남편이 나와 결혼을 적극적으로 원했던 건 이 외모가 특히 작용했을 것이리라.
그럴 듯한 남자를 찾아 앞에서부터 샅샅이 뒤져볼 참이다. 아니다 싶으면 마지막 칸에 타고가다 도중에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가기를 반복할 생각이다. 절대 남의 눈을 의식하지 말지니. 이번 남자 사냥에 나서는 내 마음의 철칙이다.
좌석번호를 무시하고 맨 앞 칸에 올라선 나는 먼저 전면을 응시했다. 평일이라 좌석은 띄엄띄엄 비었다. 눈알을 굴리지 않고도 사람들의 면면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뒤 꼭지만 보고도 어느 정도 그 사람이 어떤가는 감을 잡을 수 있지 않은가. 거기는 없었다.
다음 칸으로 서서히 의자를 손으로 짚어가며 걸어갔다. 열차는 역을 출발하여 속력을 내고 있었다. 문을 열어 무심한 척, 자리를 찾는 척, 전방을 주시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줌마, 총각, 아가씨, 아이들까지 여러 군상의 얼굴들이 눈에 잡혔다. 사냥감이라 해도 다 잡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우선 옆자리나 앞자리가 비어있어야 한다.
나는 상대방의 눈에 어떻게 보여야 하나. 그래, 나는 가장 친한 친구의 문병을 가는 중이다. 직업여성도 아니고 후줄근하게 살림에 찌든 주부도 아니다. 그냥 쉽게 접근하기 힘든, 만만치 않은 여성으로 보였으면 좋겠다. 아니지, 되바라져 보이면 어때? 상관치 말자. 내 하고 싶은 대로 하자. 자연스럽게, 언감생심 미혼까진 바라지 않는다.
멀리서 봐도 그럴 듯해 보이는 한 남자는 동행이 있었다. 그것도 여자. 동행이 남자라면 사냥감으로 부담은 되지만 못할 것도 없는데……. 여기도 없다. 그냥 지나친다. 조급해할 것도 없다. 그러나 셋째 칸으로 다가서다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요의를 느낀 것은 아니다. 단지 거울을 보려고, 내 얼굴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어서다. 혹시 옥에 티가 있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들어 자신감을 갖기 위해서였다. 역시 거울 속의 나는 자신을 가져도 충분했다. 최면이었다. 다시 진군.
문을 열면서 눈을 감았다가 앞으로 나가며 떴다. 첫눈에 인연은 알아볼 수 있다는 친구의 말이 떠오름과 동시에 셋째 열, 창 쪽 좌석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있는, 밤색 가죽으로 된 마도로스모자 비슷한 것을 쓰고 체크무늬 남방에 검은색 점퍼를 입은, 안경 쓴 남자의 얼굴이 인상적이다. 짙은 눈썹과 야무지게 다문 입이 예리해 보이지만 지성미가 물씬 풍긴다. 순간 여기를 지나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무턱대고 그 남자의 앞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차가 운행하는 반대 방향의 의자. 가방을 옆에 놓고 치마를 단정히 여미며 보니 먼저 검은 면바지에 랜드로버 신발이 눈에 들어와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웬 걸? 남자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창밖만 응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당연히 이게 웬 홍자냐! 하며 부신 눈으로 쳐다볼 줄 알았는데……. 우습게도 괘씸한 생각까지 들었다. 나이는 나보다 서너 살 많을까? 어떻게 보면 같은 또래로도 보이고.
그래, 좋았어. 너무 쉽게 걸려들면 재미없잖아? 시간은 넉넉하다. 이 남자가 수원에서만 내리지 않는다면. 내 속과 겉은 그렇게 달라져 있었다.
기차는 벌써 도심을 벗어났다. 산과 들은 온통 초록이다. 5월이 계절의 여왕이라 했던가? 집구석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화사한 햇빛이 내 마음 속에도 가득하다. 남자는 여전히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창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응? 저게 뭘까, 저 남자의 남방에 매달려 있는 것은? 그래, 맞다. 로댕의 연인 카미유 클로델의 초상이야. 그녀가 조각한 <소외된 사람들>을 사진으로 봤을 때 뭉클했었지. 남자는 무릎을 꿇고 있는데 여자가 허리를 숙여 남자의 얼굴을 두 팔로 감싸 안은 그 장면. 어째서 난 거기에서 불륜의 냄새와 함께 서늘한 감동을 느꼈을까. 주목으로 깎았군. 비련의 여인 카미유를 목에 걸고 다니는 남자가 있다니! 내 눈이 틀리진 않았어. 저 남자는 특별한 뭔가가 있다. 아무튼 사냥감으로 잘 찍은 것 같아.
“안녕하세요?”
느닷없이 말을 걸었다. 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나를 보다가 주변을 살핀다. 내 인사에 답할 사람은 자신 밖에 없는 줄 이제야 아셨는가.
“아, 예. 안녕하세요?”
이제 할 말이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요긴한 얘깃거릴 충분히 생각하고 말을 걸었을 텐데……. 그래, 아무 말이나 늘어놓자. 어차피 오늘은 내 역사에 없는 시간이니까. 미소를 지었다.
“어디까지 가세요?”
“전주까지 갑니다. 어디까지 가세요?”
나는? 나도 전주다.
“어머, 잘됐네요. 저도 전주 가는데요.”
“전주가 집입니까, 아니면 다니러 가시는 길입니까?”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나를 먼저 알리기보다 상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러시는 남씨는 전주가 집인가요, 다니러 가시는 길인가요?”
남자가 피식 웃었다. 되물어서 웃었는지 생뚱맞게 남씨라고 해서 웃었는지 알 수는 없다.
“남씨라니요? 저는 강간데요?”
“그건 중요하지 않잖아요? 서로 의미만 통하면 되니까.”
당돌한 척했다.
“그럼 여씨세요?”
“네.”
“재밌네요. 어쨌든 반갑습니다. 저는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조문가는 길입니다.”
“저도 반가워요. 저는 친구 문병차 가는 길이구요. 병원 장례식장인가요?”
“예. 예수병원 장례식장입니다.”
“어쩜, 우연이네요. 저도 그 병원인데요?”
엉큼하게도 나는 필연을 강조하고 싶었다. 남자는 아주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랬었나? 내가 이렇게 머리가 술술 돌아갔었나? 아예 이 남자를 잡으려고 작정했구나. 그런데 이 남자는 도대체 뭘 하는 남잘까? 애초엔 궁금해 하지 말자던 사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