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사찰(護國寺刹) 용문사(龍門寺)
:경남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소재
호구산(虎丘山)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용문사는 남해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용문사의 뿌리는 보광사이다. 보광사(普光寺)는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금산에 올랐다가
산의 기운이 예사롭지 아니하여 산 이름을 보광산이라 하고,기슭에 보광사를 지은 것이다.조선중기 백월당이라는 스님이 이 보광사에 주지로 지내던 중, 호구산 골짜기에 큰 절이 들어설 만한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기운이 쇠한 보광사를 헐어 이 호구산 골짜기로 옮겨와 골짜기의 용(龍)이름을 따서 용문사를 지은 것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현종 원년(1660)에 남해현의 남해향교와 이 절의 입구가 면대하였다 하여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요구하자,백월당
대사가 남쪽에 있는 용소마을 위의 터를 정하고 용문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백월당대사는 스님들과 함께 먼저 선당양당을 지었다. 선당은 신운이 모화하여 다음해인 현종 2년(1661)에 준공했다.그리고 6년뒤에 일향이 대웅전을 창건하였고,성암이 봉서루를 창건했으며,나한전은 보휘,명부전은 설웅,향적전은 인묵,첨성각은 설잠,천왕각은 유탁,수각정은 각오가 낙성한 것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이어 숙종 34년(1708)에는 염불암을 중창했다.관음.백운 두 암자는 고을사람들의 발원으로 축조했는데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뒤에 백련암(白蓮唵)을 절의 서쪽에 신축하였다.
●용문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당의 뜻을 받들어 승려들이 용감하게 싸운 호국 사찰이다.그 증거물로 아직도 남아있는 삼혈포(임진란때
승병들이 사용한 포)라는 대포,그리고 숙종이 호국 사찰임을 표시하기 위해 내린 수국사(守國寺) 금패가 유명하다.
조선 숙종은 용문사를 수국사로 지정하고 왕실에서 용문사 경내에 축원당을 건립하고,위패를 비롯하여 연옥등,촉대,번 등을 하사
했다.그러나 연옥등,촉대 등은 일본 강점기에 없어지고 지금은 번(궁중의 매듭)과 수국사 금패만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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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 문화재로는
♣괘불탱:남해 보물 1호로 2006년에 보물 제1446호로 국가지정
문화재가 되었다.가로 613.7cm,세로 925.5cm의 크기로 삼존도
형식의 그림으로 18세기 중반 이후의 전형적인 불화모습이다.
♣부도:일주문 입구 우측 약간 높은 곳에 승려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묘탑인 부도 9기가 있다.이는 선사를 많이 배출한 오래된 전통 사찰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구시통(구유):많은 대중들의 밥을 퍼두는 함지통으로, 본시
구유는 아름드리 통나무속을 파내고 마소의 먹이를 담아주는 큰
그릇인데,많은 신도들이 운집하는 법회나 대작 불사를 회향할 때와 유사시 승병들의 밥을 퍼두던 용기로 발전,1000명의 밥을 퍼 담을 정도로 큰 그릇이다.(둘레 3m,깊이 6.7m)
♣대웅전:경남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조선 현종 7년(1666)에 일향스님이 창건,숙종 29년(1703)에 성화스님이 중창했다.팔작 기와
지붕에 정면 3칸,측면 3칸의 아담한 규모지만 정면의 중앙기둥
위쪽에 있는 용머리 장식은 그 솜씨가 정교하고 생동감 있다.
♣석불:경남 유형문화재 제138호로 약 300년전 경내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석불이다. 자애롭고 온화하면서도 존엄성을 갖추고 앉은 좌상으로, 크기는 앉은키 82cm, 어깨넓이 38cm, 무릎 폭 66cm인
화강암이다.
♣촌은집 책판:경남 유형문화재 제172호로 조선 인조 때 시인으로 명성을 날리던 촌은 유희경 선생의 촌은집을 52매의 목판에 조각한 것으로 대웅전 주존불 좌대 밑에 보관되어 있다.
◐백련암(白蓮唵):남해의 빛깔 짙게 밴 수행의 도량인 백련암은
조선 영조 27년(1751)에 건축된 것으로 암자라기 보다는 평범한
고향집 같은 느낌을 준다.그래서 그대 이후 고승만도 기미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었던 용성 스님,조계종 종정을 지낸 설석우 스님,성철 스님 등이 거쳐갔다고 한다.백련암 편액은 경봉 스님의 선필이다.성철 스님이 머무를 때만 해도 백련암은 두칸짜리 토굴이었는데,암주 소황 스님의 원력으로 가람이 갖추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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