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이라는 말은 곧잘 가치와는 무관하게 합리화와 정당화의 수단으로 사용되곤 한다. 때문에 "중용이란 아무런 변화도 발전도 가져오지 못하는 방관자의 변명일 뿐이다"라는 말로 격하게 드러나기도 할 뿐 더러, '보통사람'이라는 대체적 고유명사로 오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평범함이라는 말을 자신의 삶에 대한 마지노선 정도로 책정할 뿐, 자신의 처지에 직접적으로 저항하지 못한다.
'행복하지 않아, 행복하지 않아' 하고 중얼거리며, 하필이면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애써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지만) 다른 사람 혹은 상황에서 자기 고통의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종종 저지르게 되는 가장 큰 악덕은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꼴을 보이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분명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선을 똑바로 잡지 못하는 이 분명한 악덕 속에 묻혀 살아가고 있다.
삶이 그저 밥그릇을 채우는 일에만 집중해서 움직여간다고 생각된다면, 또 다른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신념은 필요하다. 팔랑 팔랑 가볍게, 날아갈 듯 부유하며 살려고 해도 그렇다. 부당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도, 그것이 불가능한 꿈을 내용으로 하고 있을수록 더욱 더 그렇다. 자의식은 강하지만 의지가 박약하다면 심플한 인생을 꿈꿀 수 없다. 자신의 불행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고, 남이 바꿔주기 만을 바라는 사람들. 자신의 비루한 예민함에 물릴 때에, 가볍거나 무거운 것에 상관없이 신념을 묻어두고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보며 위안 받고 고무 받으려고 한다. 어떤 강력한 리얼리티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이다.
육체적인 고통을 극도로 일상적으로 목도하면서 살게 되면 어느 정도는 그것에 무감해지는 경향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므로 주위에서 '저 사람은 참 인간적인 의사군' 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사람을 만나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자신의 고통이 아닌 타인의 고통을 알알이 느끼고 사는 것이 애초에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고통은 그것을 느끼는 것 자체로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고통스럽기 때문에 또 다른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무력감 때문에 아픈 것이다.
부상당한 세계와 사람들을 위한 삶의 기록 [닥터 노먼 베쑨]
자신과 타인의 고통을 똑바로 쳐다보며 살아간 이야기가 [닥터 노먼 베쑨]이라는 책에 담겨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노먼 베쑨의 실천적인 삶을 다양한 소스를 통해 공유할 수 있는 사이트가 바로 Dr. Norman Bethune이다. 참 인간적인 의사 노먼 베쑨은 사람들이 앓고 있는 육체적인 질병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질병의 징후를 똑바로 쳐다보며 한 평생을 살았다. 그리고 아프다고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을 찾아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는 휴머니즘의 함정에 빠져 곁을 돌아보지 못하고 끝내는 서구 우월주의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한계를 지닌 슈바이처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 불합리한 상황을 바꾸려고 투쟁한 사람들과 나란히 서 있었다.
그의 후배 체 게바라가 그런 것처럼, 그도 한심한 사람을 동정하는 것이 휴머니즘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동시대에 어떤 큰 힘을 거스르려는 거대한 흐름이 있는 곳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중국 혁명의 와중에 그는 메스를 들고 부상당한 사람과 부상당한 세계를 수술하고 다녔다. 이 책에서 노먼 베쑨의 캐릭터는 살아 펄펄 뛰지만, 과장되거나 신비화되지 않는다. 독자들과 비슷한 처지, 비슷한 고뇌에 떨며 사는 인간이었지만, 흔들리지 않는 시선과 더운 가슴으로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운행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살아갔다고 기록될 뿐이다.
꿈꾸는 것만 자유인 나라에서 진보주의자로 산다는 것 [스콧니어링 자서전]
[스콧 니어링 자서전]의 원제는 'The Making of a Radical'이다. 부인인 헬렌 니어링과 함께 자급자족하는 시골에서의 생활을 그린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로 조용한 반향을 일으킨 바 있는 스콧 니어링은 100세가 되던 해에 이제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음식을 입에 대지 않으면서 죽음을 맞이했다.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은 꿈꾸는 것만 자유인 나라에서 진보주의자로 산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외로운 일이다. 테러는 항상 물리적인 형태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는 비판, 거기에서 나오는 압력도 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폭력이다. 그는 급진적인 성향으로 대학강단에서도 쫓겨나고 글을 기고하는 것도 거부당하면서 어려움을 겪는다. 이즈음 그는 헬렌을 만나 실천적인 생태론을 무기로 세상과 맞서 나간다. 나이 들어 몸은 점점 더 오그라들고 괴팍한 성정은 더해가지만 자신의 존엄성을 거스르며 타협하지는 않겠다는 고집이 그를 평생 젊음 속에 머무르게 한다.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의 웹사이트인 The Scott and Helen Nearing Papers는 소로우 연구재단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곳에는 이들의 약력 및 저서, 재단의 연구 결과물이 모두 소개되어 있다.
한 인간의 감정 상태에 대한 흥미롭고 섬세한 기록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평생을 간헐적인 정신분열 증세 속에서 살면서 끝내 아내를 목졸라 죽이고 마지막 10년간을 정신 병원에서 보낸 알튀세르의 기구한 삶은 그의 자서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 끔찍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는 말년에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입으로 '이것은 자서전이 아니고, 내 존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또 나의 존재를 이러한 형태로, 즉 그 속에서 내가 나 자신을 알아보게 되는 그런 형태로 만들었던 모든 정서적 감정 상태의 충격'이라고 말한 책을 집필한다. 평생 다양하고 분열적인 사상 편력을 보여온 것에 대한 이 기록은 '나는 지금 예순 일곱 살이다. 그러나 나는 마침내 지금, 나 자신으로서 사랑 받지 못했기 때문에 청춘이 없었던 나로서는 그 어느 때보다 지금, 곧 인생이 끝나게 되겠지만, 젊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이 책은 그의 논쟁적인 사상이 계제가 아니라, 한 인간의 내부에서 일었던 소용돌이의 스펙트럼을 흥미롭고도 섬세하게 그려낸 기록인 셈이다. 알튀세르와 에티엔 발리바르를 다룬 국내 사이트 Louis Althusser & Etienne Balibar에는 두 철학자에 관한 국내외 저서를 중심으로 심도 깊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국내 평전 시장의 대박 [체 게바라 평전]
세상에는 권력을 잡은 혁명가가 몇 있다. 레닌이 그랬고 마오가 그랬고, 동부 유럽의 몇몇 사람들이 그랬다. 하지만 죽는 순간에도 혁명가였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리브 해의 위기가 야기한 슬프고도 빛나는 시간들'을 지속시키기 위해 쿠바 국립은행장 직을 마다하고 볼리비아의 아마존 정글 속에서 죽어간 체 게바라의 일생을 서술한 [체 게바라 평전]은 국내 평전 시장의 최고 대박이거니와, 평전 출판의 모범과 가능성을 제시한 책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체 게바라를 다룬 국내 사이트로는 정종훈의 체게바라와 체게바라가 있다. 두 곳 모두 전기와 사진, 기행문, 일기 등의 자료가 수록되어 있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두 사이트 모두 메인 화면에 같은 곡의 미디 음악을 실행시키고 있다. 곡명은 <민중의 노래> 흠흠~
최근 개봉된 쿠바 영화(혹은 쿠바의 영화)인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스쳐 지나가는 장면 속에서 체 게바라는 쿠바를 각인 시키는 훌륭한 소품으로 등장한다. 쿠바의 공산화 과정에서 일터를 잃은 삶 속으로 곤두박질처 버린 그네들도 체를 기억하며, 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아끼지 않는다. 골프채를 들고 카스트로와 함께 선 그의 미소가 오히려 조지 클루니의 매력에 가깝게 느껴지는 체 게바라는 죽는 순간 끔찍하게도 예수의 모습을 닮았다고 기록된다.
지상에 유배된 천사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
원색의 화가 고호의 생애를 그린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는 평전의 고전이다. 그리고 '지상에 유배된 천사 반 고흐'는 고흐의 작품을 네델란드에서 오베르까지 다섯 시기로 구분하여 비교적 세분화된 정보를 제공하는 국내 사이트이다. 그는 자신의 귀를 자른 그 사건 때문에 너무나 유명해져 버렸지만, 따져 보면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아끼는 방법은 모두 제 각각이다.
파괴라는 말은 상대적이다. 유행 같은 말이 되어서 그렇지, '동성 연애자' 오스카 와일드가 감옥에 들어가면서 '나에게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 것은 갈릴레이가 법정을 나서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했던 것과 견주어도 그 무게가 쳐지지 않는 선언이다. 자신의 처지에 저항하고자 한다면, 그 저항은 현실의 제 삶을 파괴하는 형태로 드러나는 경우도 종종 있는 것이다. 우리가 위대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현실을 읽는 혜안을 갖고 있으면서도, '결국은 모두 돈키호테였다' 는 것이다.
재능이나 영혼의 고결함은 그들을 부러움이나 경외의 대상으로 만든다. 그러나 평범한 우리들도 꿈은 꾼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엔 불가능한 꿈을 가지라'고 했던 체 게바라의 말은 반복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여전히 감동적이다. 꿈을 꾸되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용기를 희망할 것. 돈키호테의 기상으로 가슴에 뿌리가 깊은 나무처럼 불가능한 꿈 하나씩을 간직하고 살아갈 것. 한 달에 책 한 권 읽기 힘든 우리 시대 현대인들이 필독의 자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