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혁 | 350여년전 능주목사를 지낸 신열도(申悅道)가 이 마을을 개척하고, 그 후 신석우(申錫祐, 1816~1881)라는 선비가 단구서당을 지어 후학을 가르치어 단구라는 지명이 불리워졌다. 이 서원은 정묘, 병자호란시에 신적도(申適道), 신달도(申達道), 신열도(申悅道) 형제의 창의정신과 청나라와의 화친을 강력히 반대하며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충의정신을 널리 밝히고, 신적도의 아들 신채(申埰)의 고매한 유학사상을 후학들에 전승시키기 위하여 향리 유림들이 1856년(철종 7) 장대서원에서 향회(鄕會)를 열어 서원을 세울 것을 결의하고 도내의 각 서원의 동의를 얻어 동년에 착공 후 1858년(철종 9)에 준공을 보게 되었다. 1868년(고종 5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있은 후에 관리가 중단되면서 자연히 멸실되었다. 1873년 대원군의 집정이 끝나자 제단을 설치하여 매년 향사를 지내왔다. 1989년 복원되었다. |
배향인물 | 1)신적도(申適道, 1574~1663) 본관은 아주(鵝洲)이며, 자는 사립(士立) 호는 호계(虎溪)이며 아버지는 흘(仡)이다. 의성현 도암리(陶岩里)에서 태어나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1605년 향시에 합격하였는데 그때 유성룡과 정경세가 그 시권(詩卷)을 보고 극구 칭찬하였다. 정묘호란에 의병을 규합하여 주야로 달려갔으나 적이 이미 물러갔으므로 궁궐에 이르러 소(疏)를 올렸다. 이에 인조가 선생에게 특별히 상운도(祥雲道) 찰방을 제수하였다. 1632년에 제릉(齊陵), 건릉(健陵) 참봉을 역임하였고, 병자(丙子)에 금인(金人)이 재침하자 선생이 또 다시 의병을 조직하였으나 이미 도성이 함락되고 화의가 성립되었으므로 선생은 곧장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가 김상현(金尙鉉), 정온(鄭蘊) 등과 더불어 통곡하였다. 이 후로 학산(鶴山) 미곡(薇谷)에 채미헌(採薇軒)을 지어 두문불출하였다.
2)신달도(申達道, 1576~163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형보(亨甫), 호는 만오(晩悟). 수(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의 원록(元祿)이고, 아버지는 흘(仡)이다. 조목(趙穆)·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610년(광해군 2)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정계가 혼란하여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였다. 1623년(인조 1) 5월에 명나라 희종(熹宗)의 등극을 기념하는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하였다. 그 뒤 문한관(文翰官 : 문필에 관한 일을 맡은 관직)을 거쳐 1627년 사간원정언에 이어 곧 지평(持平)으로 승임되었다. 이해 6월 병조판서 이귀(李貴)의 전횡(專橫)을 배척하는 소를 올려 이귀의 미움을 샀으며 부사직(副司直)으로 전보되었다. 1629년 사헌부장령이 되었을 때, 내수사(內需司)가 진상을 과다히 강요하는 폐단을 일소하게 하라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보다 앞서 1627년 정묘호란 때 윤황(尹煌)과 함께 적극적으로 척화론을 주장하다가 파직되었다. 후일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3)신열도(申悅道, 1589~1659년)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진보(晉甫), 호는 나재(懶齋). 수(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호조참의 원록(元綠)이고, 아버지는 흘(仡)이며, 어머니는 전력부위(展力副尉) 박륜(朴倫)의 딸이다. 교리 달도(達道)의 동생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0여 세에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1624년(인조 2)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1606년(선조 39)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27년 정묘호란 때에 인조를 호종하였다. 이듬해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예조정랑·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1638년 울진현감을 지내고, 1647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어 민생에 대하여 상소하였고 뒤에 능주목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선사지 仙槎志≫와 ≪문소지 聞韶志≫가 있다.
4)신채(申埰, 1610~1672) 본관은 아주(鵝洲)이며 자는 자경(子卿), 호는 인재(忍齋)이다. 아버지는 건원릉(健元陵) 참봉 적도(適道)이며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순(淳)의 딸이다. 1629(인조 7)년 향시에 합격하고 1646년 성균관유생으로 들어갔다. 학문이 뛰어나 왕으로부터 「성학십도명(聖學十圖銘)」제작의 명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여 조정에서 효(孝)․우(友)․목(睦)․인(婣)․임(任)․휼(恤) 등 육행(六行)으로 관유(館儒)를 선발하여 표창할 때에 수위(首位)를 차지하고도 지극히 겸손했다고 한다. 1672년(현종 13)에 향년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인재선생유집(忍齋先生遺集)등 이 있다. |
관련인물 | 신석우(申錫祐1816(순조 16)~1881(고종 18). 본관은 아주(鵝州), 자는 덕문(德文)이며, 호는 가헌(可軒)이다.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황조산 아래 봉정을 짓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1866년 유후조(柳厚祚)의 천거로 경상도도유사(慶尙道都有司)에 올랐다. 저서로는 『가헌집(可軒集)』이 전한다. |
건축물 | 단구서원은 사우인 상덕사(尙德祀), 강당인 명교당(明敎堂), 동재 거인재(居仁齋), 서재 첨의재(沾義齋) 등 4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서원의 배치는 전면에 3칸 규모의 산형대문인 외삼문(外三門)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상덕사(尙德祠)가 자리 잡고 있으며 마당의 좌우에는 동서재(東西齋)가 배치되어 있다. |
건물배경 | 이 서원은 신석우(申錫祐, 1816~1881)가 단구서당을 지어 유생들을 가르치다가 그가 주관하여 신적도(申適道)와 신열도(申悅道)의 충성을 기리고 신채(申埰)의 유학사상을 전승시키기 위해 1858년(철종 7)에 서원으로 승격하여 건립하였는데, 그들을 배향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 서원 앞 공적비에 새겨진 글과 「거인재중건기(居仁齋重建記)」에 따르면 1873년(고종 10)에 다시 제단을 설치하여 향사를 지내다가 1989년에 전 민선 대전시장(前 民選 大田市長) 신기훈(申基勳)의 주관으로 묘우(廟宇)를 복원하고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부지임야 534평은 후손 신원효(申源孝)가 기증하였다고 한다. 그 다음 해인 1990년에 신달도(申達道)를 추봉하였다. |
건축특징 | 신적도, 신열도, 신달도, 신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상덕사(尙德祠)는 나지막한 축단 위에 지어졌고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동재(東齋)인 거인재(居仁齋) 또한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당을 가운데로 하여 좌우로 협실을 두었으며, 당은 뒤로 문을 열 수 있게 트인 공간으로 되어 있다. 서재(西齋)는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정면 3칸, 측면 1칸인데, 정면에서 우측을 제외한 두 칸은 앞에 마루를 두었다. |
건축구성 | 솟을대문으로 된 외삼문을 들어서면 상덕사(尙德祠)가 정면에 자리 잡고 있으며 마당의 좌우에는 동․서재가 배치되어 있다. 동재는 거인재(居仁齋)라고 편액되어 있으나 서재는 편액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동재에는 「거인재중건기(居仁齋重建記)」와 「단구서원상량문(丹邱書院上樑文)」이 표구된 액자가 걸려있다. |
현판 | 거인재중건기(居仁齋重建記) 신재인(申載仁) 기(記) |
마을 이야기 | 의성 > 중남권 > 분토리 - 비옥한 흙을 토해 내는 동네란 뜻으로 분토(粉吐) 봉양면은 의성군 중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 67.1㎢, 인구 5,734명, 13개리로 구성되어 있다. 동쪽으로 의성읍, 서쪽으로 비안면, 남쪽으로 금성면, 북쪽으로 안평면에 접한다. 면의 북부는 100~300m의 구릉성 저산지를 이루고, 북동쪽에서 흘러오는 남대천(南大川)과 남동쪽에서 흘러오는 쌍계천(雙溪川)이 면의 중앙부에서 합류하여 봉천(鳳川)이 되어 서쪽으로 흐른다. 그 유역에 기름진 평야가 형성되어, 경지면적이 차지하는 비율이 다른 면에 비해 높은 편이며, 주요 농산물은 주곡 작물외에 원예 작물 재배가 성하여 배추, 참외, 호박, 수박 등 채소 생산이 군내에서 수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과일로는 전국에서 품질이 최상인 자두가 유명하다.
분토리(粉吐里)는 주위에는 구봉(九峰)이라고 불리는 아홉 개의 산봉우리가 둘러싸고 있어서 이를 찾아온 어떤 지관(地官)이 이 구봉 중 봉두산(鳳頭山)이 봉의 알을 품은 형상을 하고 있어 길지라고 기뻐하였으나 앞산 갈모봉이 사혈(蛇穴)임을 알고 분함을 토해 냈다는 뜻으로 분토(憤吐)라 하여 그대로 지명으로 전해 왔다. 그 후세에 마을 이름에 분할 분[憤]은 좋지 않은 뜻이라 하여 비옥한 흙을 토해 내는 동네란 뜻으로 ‘분토(粉吐)’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약 360년 전에 능주목사(綾州牧使)를 지낸 바 있는 신열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그 후에 신석우(申錫祐)가 단구서당을 지어 유생을 가르침에 단구라 칭하다가 1879년에 와서 고종에 의해 서원이 철폐되자 마을의 안 고개의 이름을 따서 엄고개 또는 엄현(奄峴)이라 불렀다. 인근에 새로 생긴 또 하나의 자연마을은 신기(新基)라고 불려진다. 원래 아주신씨 집성 마을이었으나 안동댐의 조성과 더불어 수몰 지역의 주민이 이주해 와서 신씨를 비롯한 몇몇 성씨들이 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