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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권의 책으로 전도하세요.
(비매품)
천국의 열쇠
-누가 천국에 가나?-
< 목차 >
Ⅰ. 하나님의 존재
1. 죽음에 대한 궁금증
2.영혼의 존재에 대한 의문
3. 보이지 않는 하나님
Ⅱ.기독교는 어떤 종교인가
1.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2.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주를 주관하십니다.
Ⅲ. 인간은 누구인가
1. 처음에 흙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2. 하나님은 인간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3. 인간은 그 계약을 파괴하고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4.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5. 죽은 다음에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Ⅳ.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종교입니다.
1.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입니다.
2.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3.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셨습니다.
4. 죽으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5.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어 주시는 중보자(仲保者)가 되셨습니다.
6. 천국으로 가는 길을 여시었습니다.
Ⅴ. 성령님은 누구신가요?
Ⅵ.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나
1. 맨 먼저 음부(陰府)로 갑니다.
2. 음부와 낙원은 지금도 ‘땅 아래’ 어딘가에 있습니다.
3. 성도들의 영혼은 부활 시에 낙원을 벗어납니다.
4. 낙원에서 나와 부활과 휴거를 거치면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Ⅶ. 천국과 지옥
1. 천국과 지옥은 어떤 곳인가요?
2. 천국과 지옥은 정말 존재하나요?
3. 선하게 살면 천국에 가지 않나요?
4. 어느 종교나 다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닌가요?
Ⅷ. 인생이란 무엇인가
1. 헛되고 헛된 것이 인생입니다.
2.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Ⅸ. 기독교 교리 요약
Ⅹ.결신하기
책 · 머 · 리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인간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씻어 정결케 해야 하나님 앞, 곧 천국에 갈 수 있는데,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한복음 3:16-18).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는데 이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구세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9)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이야깁니다.
이 책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는가에 대하여 쓴 전도서입니다. 몇 년 전에 쓴 ‘구원의 길’이라는 책을 재편집하고 증보하여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펴냅니다.
이 책은 기독교를 접해보지 않은 분들을 위해 쓴 것이므로 아주 쉽게 요약형식으로 썼습니다.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가, 천국과 지옥은 정말 있는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은 누구신가, 인간은 누구이며, 왜 죽어야 하는가, 죄란 무엇인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기타 의문이 나는 몇 가지를 문답형식으로 적어보았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들께 읽어보시라고 드려 전도용으로 널리 사용하였으면 합니다. 특히 말로 직접 전도하기 어려워하시는 분들에게 전도용으로 쓰일 수 있는 좋은 책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책으로 전도하시는 분들과,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께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21. 8. 엄원용 목사 씀
Ⅰ. 하나님의 존재
1. 죽음에 대한 궁금증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 그냥 죽음으로 끝날까? 아니면 곧장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직행하는가? 하고 궁금해 합니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일 수록 그 점이 더욱 알고 싶어집니다. ‘지금 어디에 가 있을까?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자기가 죽은 것을 알고나 있을까? 혼자서 얼마나 쓸쓸할까? 무섭지는 않을까?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을까? 아니면 영혼이 허공에 떠다니며 서럽게 우는 우리들을 보고 있을까? 또 다른 영들과 함께 있을까?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등 모든 것이 궁금한 것뿐입니다.
2. 영혼의 존재에 대한 의문
영혼의 존재에 대한 의문은 유사 이래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사이자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연구했지만 그 누구도 답을 얻지 못했고, ‘나’라는 존재는 과연 어디서 왔는지 깨닫지 못한 채, 다만 알고 싶은 욕망들이 서로 다른 종교와 철학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인간은 육체(肉體)와 영(靈)과 혼(魂)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썩어 본래 빚어진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만 남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요?
3. 보이지 않는 하나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합니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도 인간의 풍부한 상상력이 빚어낸 망상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 후 영국에서 하나님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회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천문학박사와 의학박사 두 사람이 강연을 하였습니다. 먼저 천문학자가 강연을 했습니다.
“얼마 전에 저는 최신형 망원경을 갖게 되었는데, 이 망원경은 우리가 발견한 가장 멀리 있는 별들도 볼 수 있는 고성능 망원경입니다. 그런데 이 망원경으로 아무리 천체를 살펴보아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계시다면 천국이라도 보여야 되는데 천국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래서 하나님도 천국도 없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러자 청중들이 ‘옳소’ 하고 환호하며 박수를 쳤습니다.
두 번째 강연자는 의학박사였습니다.
“나는 평생 의학을 연구하며 살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에게 영혼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나는 도무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수술했으며, 시신을 부검해 본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도대체 영혼이 어디에 있다는 것입니까? 살 속입니까? 뼛속입니까? 아니면 핏속입니까?”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큰소리로 박수를 치며 환호했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사회자가 청중을 향해 질문하라고 했으나 모두 잠자코 있었습니다. 사회자는 “그러면 이것으로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므로 회의를 마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맨 앞에 있던 할머니가
“제가 할 말이 있습니다 하더니, 연단 위로 올라갔습니다. 할머니는 먼저 천문학박사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박사님, 박사님이 가지고 있는 망원경은 아주 고성능 망원경이지요?”
“예, 무엇이든지 다 잘 보입니다.”
“그렇다면 바람도 보입니까?”
“바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바람이 없습니까?”
“있습니다.”
“어떻게 있습니까? 보이지도 않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하는 말은 옳은 말입니까? 바람도 볼 수 없는 망원경을 가지고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
천문학 박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곧이어 할머니는 의학박사를 향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박사님은 아내가 있습니까?”
“예, 자녀도 있습니다.”
“그러면 박사님은 아내와 자녀들을 사랑하십니까?
“예, 저는 아내와 자식들을 무척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칼을 가져오세요. 내가 박사님을 해부해서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어디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도대체 그 ‘사랑’이 살 속에 있습니까? 아니면 뼛속에 있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핏속에 들어 있습니까? 도대체 박사님이 말하는 사랑은 어디에 들어 있습니까? 하나 더 이야기할까요? 공기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공기는 있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계십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박수를 쳤던 사람들은 할머니의 급소를 찌르는 송곳 같은 질문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는 회의가 되고 말았습니다.
Ⅱ.기독교는 어떤 종교인가
1.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조물주)이십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어왔습니다.
“자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니 하나 물어보세. 자네는 하나님을 보았는가?”
“보지는 모했지만 살아계신 것을 믿고 있습니다.”
교회학교 어린이들에게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그려보라고 하면 어떤 모습의 하나님을 그릴까요? 어떤 어린이는 수염이 난 할아버지로, 어떤 어린이는 아기를 안고 있는 마음씨 착한 아저씨로, 어떤 어린이는 칼을 찬 무사 로 그립니다. 왜 이렇게 그렸느냐고 물어보면, “좋으신 하나님이시니까. 사랑의 하나님이시니까. 무서우니까”라고 말합니다. 다 옳은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느끼는 대로 그렸으니까요.
성경을 아무리 뒤져봐도 하나님이 ‘나 이렇게 생겼다. 그러니 나를 믿어라’ 이런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창세기 1장 27절)라는 구절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고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조물주(造物主)이십니다. 하나님 아니고서는 누가 이 세상을 창조하였겠습니까?
2.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주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첫째,자연의 오묘한 법칙과 질서를 보면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 얼굴의 생김새가 오묘함을 나에게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그날 집에 돌아와 거울을 앞에 놓고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가 말한 대로 참으로 오묘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매일 아무 생각도 없이 보는 얼굴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참으로 오묘했습니다. 머리털은 열을 차단하기 위해서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눈이 깜박거리지 않는다면 먼지가 들어가 금방 상하고 말 것입니다. 눈썹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빗물이 떨어지면 흘러서 모두 눈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콧구멍은 밑으로 뚫어져 있습니다. 위로 뚫어져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비가 오면 감당을 못할 것입니다. 귓바퀴는 소리를 모으기 위해 오그라져 있습니다. 옆얼굴과 귓바퀴 사이에는 물이 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볼록 튀어나와 있습니다. 혹 잘못해서 물이 귀로 들어갔다 하더라도 밖으로 흘러나오도록 귀밑으로 홈이 나 있습니다. 이것을 어찌 우연이라 하겠습니까?
우주의 모습은 인간의 얼굴보다 더 신비하고 오묘하다고 합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가면 어김없이 가을이 옵니다. 봄이 되면 새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여름이면 열매 맺고, 가을이 되면 열매가 익습니다. 사과나무에서는 사과만 열리고, 배나무에서는 배만 열립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도 그저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일정한 조직과 일정한 배열 속에서 일정한 법칙대로 움직인다고 합니다. 물질의 구성을 보면 어느 물질이든 원자들로 되어 있고, 이는 다시 양자와 전자로 나누어져 있어 소우주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수백만 부의 판매고를 자랑하는 명저「기독교와 유물사관」에 의하면 우주는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지구는 매시간 10 마일을 운행한다고 하는데, 100 마일을 운행한다면 주야가 10배나 증가되어 낮에는 식물이 말라죽고 밤에는 꽃술을 동사시킬 것이다. 지구는 23 도의 경사가 있기 때문에 사계절이 있는데, 이것이 없다고 한다면 해양의 증기는 남북으로 이동하여 대륙을 동결시킬 것이다. 만약 달이 지구에서 5만 마일을 떨어져 있을 것 같으면, 매일 바다의 조수(밀물)는 대륙의 높은 산까지 잠기게 할 것이다. 만약 땅이 10 피트가 더 깊어진다고 하면, 산소는 없어질 것이며, 대기층이 현재보다 얇다고 하면 매일 공간에서 떨어지는 별똥 때문에 지상에는 곳곳에서 화재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TV에서 ‘동물의 왕국’이나 식물들이 살아가고 번식하는 것을 보면 신비스럽고 오묘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렇게 우주의 오묘한 법칙과 질서를 보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우주론적(宇宙論的) 논증이라고 합니다. 이는 자연을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일에는 반드시 원인과 결과가 있습니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이 우주가 생긴 것도 누군가가 창조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원인의 제공자가 곧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장 4절에는 “집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은이가 하나님이시라.”고 했고, 로마서 1장 20절에서는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라고 했습니다. 또 요한복음 1장 3절에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처럼 우주를 보면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의 양심과 도덕성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양심을 가진 도덕적 존재인데, 그 양심과 성품을 보아서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도덕론적(道德論的) 논증이라고 합니다.
이 도덕적 양심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지으면 두려워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이 양심의 가책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도덕적이고 지적인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이를 창조하신 배후 역시 지적이시고 도덕적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9절∼20절에 “하나님을 알 만한 양심을 저희 속에 두시고 그의 만드신 만물 속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신성이 충분히 계시되어 있어 본능적으로 알게 되어 있다”라고 합니다.
성경에 있는 이야깁니다. 어떤 간음한 여자가 현장에서 들켜 잡혀왔습니다. 옷은 풀어져 흩어져 있고, 머리는 산발한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이러한 여자는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이스라엘 율법을 따르자면 이 간음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돌로 쳐 죽이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에 어긋나게 되고, 죽이지 말라고 하면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에게서 이것을 노렸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얼마 후 보니 둘러섰던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고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죄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여자를 돌로 칠만한 깨끗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때 예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고소하던 자들이 어디에 있느냐?”
“주여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시었습니다(요한복음 8장 3 -11절).
이렇게 사람에게는 양심이라는 것과 도덕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양심과 도덕성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소위 무신론을 주장하는 분들도 죄를 짓는 것은 싫어합니다. 또 죄를 지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사형수의 대부분은 죽을 때 피해를 준 가족들에게 죽을 죄를 지었다고 사죄의 말을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덕적 양심을 부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양심은 곧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 양심은 선과 악을 판단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게 합니다.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인간의 종교성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합니다.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라고 합니다. 종교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칼 마르크스는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해서 종교를 없애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를 충족해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종교는 인간이 어떤 위기나 공격을 당할 때 그 형식 여하를 불문하고 찾는 가장 보편적 인간의 활동입니다.
참호 속에서는 무신론자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또 밤이 되면 무신론자의 반 이상이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합니다. 인간의 이런 종교성이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합니다. 이것을 종교론적(宗敎論的) 논증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알게 모르게 신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을 의지하며 살도록 만드셨고, 우리의 마음속에 종교성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무신론자이건 유신론자이건 모두 하나님을 찾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종교적 존재로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심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죽어서 지옥에나 가라’ 하면 화를 내는 것도 사실은 그들의 의식 속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하고 죽어서는 어디론가 간다는 의식이 잠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위급할 때 하나님을 찾는 것도 바로 종교적 현상의 하나인 것입니다.
넷째, 인간은 미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인간은 그 한계성을 인정합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무능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이 ‘유한성’을 자각한다는 것은 동시에 ‘무한’한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무한의 경계에 위치해서 보지 않으면 유한이 유한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유한이 유한으로 보이려면 그보다 더 큰 배경이 되고 있는 무한이 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에밀 뒤르켐은 그의 책「종교생활의 기본 형태」에서 종교를 정의하기를 “성스러운 것에 대한 체험”이라고 했습니다. 또 루돌프 오프는「성스러움」이라는 책에서 “무한한 자와의 접촉에서 오는 경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또 국어사전에는 “초월적인 절대자를 믿고 숭배하는 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유신론적(有神論的) 관념을 중심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란 어떠한 형태이든지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인간 이상의 어떤 실재와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초인간적인 위력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신뢰의 정을 느끼며, 희생을 바치고 기원하고 예배하며, 나아가서는 제사의식을 행하고, 의무 관념에서 복종하는 것이 종교생활인 것입니다.
우리가 좀 더 겸손한 생각으로 되돌아보면, 인간은 너무나 미약한 존재라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대로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없이 오래 살 수도 없습니다. 이 불가항력적인 힘 앞에 인간은 무기력하여 꼼짝도 못 합니다. 이 인간의 한계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보다 숙연해지게 만들고, 보다 겸손하게 하면서, 절대자인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의지하게 합니다. 무신론자로 병들어 죽을 지경에 있는 사람은 절대자를 찾게 된다고 합니다. 결국은 하나님께 궁극적 종착점을 갖게 되고 구원을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불가항력적인 힘을 생각할 때 아마 불신자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관장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즉 조물주가 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결코 우상을 숭배하거나 잡신을 믿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이 세상만이 아니라, 인간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십계명(十誡命)에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偶像)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애굽기 20장 1-17절)고 했습니다.
Ⅲ. 인간은 누구인가
기독교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데서 출발합니다. 인간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은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바로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1. 처음에 흙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맨 나중에 인간을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을 닮은 인간을 만들고 싶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창세기 1장 26절).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에 따라흙을 빚어 인간의 육체를 만드셨습니다.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외적 모습이 아니라 영적 도덕적 형상(moral likeness), 곧 마음과 감정과 의지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만든 육체에 생령(生靈)을 불어넣어 사람(아담)이 되게 하셨습니다(창세기 2장 7절). 남자를 만드신 뒤에,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 하여 여자인 하와를 만들어 부부가 되게 하셨는데(창세기 2장 22절), 이 두 사람이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하는데, 이 세상에 저절로 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듯이, 누군가가 그것을 만든 사람이 있어야 되는데, 그 만드신 분이 바로 조물주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또 무신론자들의 일부는 인간이 원숭이에게서 진화되었다고 말합니다. 그중 하나가 자연발생설인데, 이는 무신론적인 주장으로서 인간은 자연적 변천과정에서 저절로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또 ‘종(種)의 가변성(可變性)’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자연적으로 생긴 물질이 오랜 세월 동안 환경 또는 기후 등에 의해 전혀 다른 종으로 변종되었다는 설입니다. 그리고 동물이나 식물은 다 본질상 동일한 것으로 보아 형태나 삶의 방법이 달라진 것은 진화의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를 생물의 동일성(同一性)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원숭이에게서 진화되었다면 지금도 진화되어가는 중간과정, 곧 원숭이와 인간과의 중간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이 세상에 그런 동물은 아직 없습니다. 인간은 원래부터 인간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다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환경 조건에 적응하기 알맞게 약간 진화한 것뿐입니다.
어떤 교수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이 우주 만물은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라고 했더니 한 학생이 비웃으면서, “아 그거야 저절로 생긴 것이지 무슨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 교수님은 설명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자기 집의 지하실에 해와 달과 별과 떠도는 유성들을 만들어 놓고 전자 장치를 해서 운행하게 했습니다. 하나의 소우주를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런 후에 그 학생을 불러 지하실에 데려가서 “야, 내가 하룻밤 자고 난 후에 일어나서 이곳에 와 보았더니 이런 것이 만들어져 있었어. 아, 글쎄 다 하룻밤 사이에 저절로 생겨났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은 “에이, 교수님도 나를 놀리십니까? 이게 어떻게 그냥 생길 수 있습니까? 모두 교수님께서 만들어 놓으시고, 괜히 그러지 마십시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 교수가 “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이만한 소우주를 보고도 그냥 생겨났다고 믿지 않으면서 유성들이 일분일초도 변함이 없이 제 궤도를 돌며 정확하게 운행되는 우주 만물이 그냥 저절로 생겨났다고 생각할 수 있느냐?” 이 교수의 설명을 듣고 나서 그 학생은 자기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창조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우주 만물은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생물은 그 종류대로 만드셨습니다. 사람은 사람대로, 짐승은 짐승대로, 꽃은 꽃대로 만드셨다는 말입니다(창세기1장 24-25절). 성경은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은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세기 1장 21절)고 하셨습니다.
이는 어떤 종(種)이 다른 종으로 진화되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어느 한 종이 다른 종으로의 진화는 불가능함을 뜻합니다. 흑인 황인 백인은 있어도 인종이 다른 종으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과학적 교과서는 아니지만 과학적 사실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것을 오류 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은 인간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을 만드시고 영생(永生)할 수 있도록 창조하신 후 “생육하고 번성하라”라고 하시었습니다. 그리고 이 지구상의 모든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창세기 1장 26-27절). 인간에게 복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실과만은 따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창세기 1장 22절, 3장 3절). 그 실과나무가 바로 선악과(善惡果)라고 하는 과실인데, 그 열매를 따먹으면 선(善)과 악(惡)을 알게 되는 나무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조건을 주셨을까요?
첫째,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을 알게 하시려고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지키면 보상이 따르고 어기면 벌칙이 따르는데, 이를 행위계약(行爲契約)또는 생명계약(生命契約)이라 합니다.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이를 따먹을 수도 있고 따먹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는 오로지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에 의해 선택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로봇처럼 만들어 따먹지 못하도록 하실 수도 있으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순종이지 못 먹게 했다고 해서 불순종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선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라는 명령의 준엄함을 알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둘째,인간 스스로 도덕적 본성을 발휘할 기회를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절제와 도덕과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삶의 태도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인간에게 만족과 감사의 생활과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킬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모든 것을 보살펴 주신다는 감사의 생활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을 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3. 인간은 그 계약을 파괴하고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죄(罪)라는 글자는 넉 사(四) 밑에 아닐 비(非) 자를 받쳐 쓴 것으로, 비(非)는 고기의 지느러미 혹은 새의 날갯죽지 모양이라고 합니다. 이 사(四) 자는 고기나 새를 잡는 데 쓰이는 그물을 뜻하는 글자로, 새나 고기를 잡듯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그물에 걸리듯이 잡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아담 당시에도 사탄이 있었습니다. 사탄이라는 히브리어의 의미는 ‘대적하는 자’라는 뜻인데, 일종의 마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마귀는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로 지혜와 아름다움을 지닌 천사였다고 합니다(욥기 38장 6-7절). 또 영적 피조물로서 그룹이라고 불리는 서열에 속했으며(에스겔(28장 14절), 모든 천사 중에 최고였다고 합니다(에스겔 28장 12절).
이 천사가 자신의 능력과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하나님께 감사하며 섬기기보다는 하나님의 지위까지 높아지려는 교만으로 그만 반역죄를 범하고 하나님 곁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디모데전서 3장 6절). 사탄은 타락한 천사들의 우두머리(마태복음 4장 1절, 9장 34절, 15장 41절)로, 일부는 지옥 또는 흑암에 갇혀 심판 때까지 활동을 못하고 있으나, 일부는 악령 또는 귀신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을 타락시키려고 우는 사자처럼 돌아다니며 지상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사탄이 축복받으며 잘 살고 있는 인간을 타락시켜 하나님께 죄를 짓게 하기 위해 뱀의 모습으로 하와(여자)에게 다가와 유혹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게 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지으신 짐승 중에서 뱀(사단)이 가장 간교하였다고 했습니다(창세기 3장 1절).
아담과 하와는 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고, 이로써 인간은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어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사탄의 유혹의 그물에 걸려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하신 것을 먹었기 때문에 죄가 된 것입니다(로마서 1장 18절-3장 20절). 다시 말하면 죄는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른 데에 대한 결과입니다(창세기 3장 1-6절, 로마서 1장 18-32절). 이것은 곧 하나님께 악을 저지른 행동이었습니다(창세기 3장 6절). 그래서 죄는 항상 하나님과 그의 의지에 관계되어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이행을 말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죄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책임을 지게 되었고, 인간을 유죄 밑에 서게 되는 도덕적 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죄를 원죄(原罪)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원죄란 이렇게 인류의 시조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4.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나그네와 같은 인생길에서 사람에게는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진시황도 죽기 싫어 선남선녀를 시켜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했지만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석가도, 소크라테스도, 공자도, 한때 세상을 풍미하던 나폴레옹도, 알렉산더 대왕도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왜 인간이 죽어야만 할까요?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인간은 죽은 세포는 떨어져 나가고 새로운 세포가 계속 생겨나는데 인간이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죄(罪)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명령을 거스른 인간에게 형벌을 내리셨는데, 그것은 죽음이었습니다.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얻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세기 3장 19절)고 하셨습니다. 원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되자, 영원히 하나님과 즐겁게 살 수 있었는데도 육체적 죽음을 가져와 흙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이 죄가 대대로 유전이 되어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유전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어느 날 내 친구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남을 속인 일 하나도 없고, 남에게 못되게 한 일이 하나도 없는데 내가 왜 죄인인가?” 이렇게 반문할 만도 합니다. 이는 원죄를 몰라서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아담의 죄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대표자인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직접 전가되어 인간은 모두 죄인이 된 상태로 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까지 전가됩니까?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나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과 하나님과의 계약이 지금 우리에게까지 적용되고 있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할아버지 때에 어떤 사람과 맺어진 토지 계약이 지금 우리에게까지 적용되고 있는 원리와 같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한 마디로 죄의 DNA가 후손에게까지 유전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죄의 유전인자를 우리가 물려받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인간이 죄를 짓고, 그 죄의 대가로 죽음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몸에 불순종과 오만, 시기, 질투, 거짓 등이 들어오게 되었고, 고통, 질병, 미움, 갈등, 슬픔 등 온갖 것들을 다 겪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고통의 연속이 아닙니까?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이 쉴 곳이 아주 없네. 걱정과 근심이 어딘들 없으랴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찬송가 479장).
이것이 인생의 모습입니다. 모두 아담이 지은 죄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조상 아담이 지은 원죄로 인해 불행을 겪게 된 것이지요. 시편 51편 5절에 보면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아무튼 그 죄의 결과 인간은
○천국(에덴동산)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이 되어 하나님 앞으로 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살 수 있었는데, 죽게 되었습니다.
사망(영적 사망)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타락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는 분이시므로 명령을 거슬러 죄인이 된 인간을 가까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그 생명이 다하면 죽어 다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기지 않으면 안 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영원히 살 수 있는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죄의 대가였습니다.
5. 죽은 다음에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비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죽으면 그만이라는 분들이 있습니다. 천당이니 지옥이니 하는 것은 연약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이고, 또 착하게 살아가라고 하는 이야기지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는데, 그 심판은 “하나님께서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도서 12장 14절)고 했습니다.
그러면 심판이란 무엇입니까? 심판이란 하나님께서 죽은 영혼을 의인(義人)과 악인(惡人)을 갈라놓고 의인은 천국으로 악인은 지옥으로 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도 자신이 재림하실 때 무덤 속에 죽어 있던 자들 모두를 부활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5장 25-29절). 그런 다음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린도후서 5장 10절)고 하셨습니다. 또 “천사들이 와서 의인(義人) 중에서 악인(惡人)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태복음 13장 49, 50절).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使者)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태복음 25장 41절). “의인에게는 복이 있으리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이사야서 3장 10-11절)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에는 우리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자기와 더불어 안식하는 자(먼저 세상을 떠난 성도들)들을 함께 데리고 올 것이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4장 14,15절). 그때가 되면 이들의 옛 육신은 부활의 몸으로 다시 일어날 것이고, 또 그들의 영혼은 그 몸으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돌아오실 때에 살아 있는 자들은 죽지 않고 순식간에 그 몸이 영광스럽게 변하고, 또 이미 죽었던 자들의 부활의 몸과 똑같이 됨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고린도전서 15장 52절 이하).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는 또 다른 책들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요한계시록 20장 12절)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 땅에서 심은 대로, 행한 대로 거둔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행한 대로란 ‘예수를 믿었느냐 믿지 안 했느냐’로 심판한다는 말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요한복음 3장 18절)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모두 하늘나라로 가서 어디든지 가는데, 예수를 믿은 자의 영혼은 예수님과 더불어 ‘천국이라고 하는 곳에서 영생합니다(누가복음 23장 43절). 그러나 불신자의 영혼은 ‘지옥’이라고 하는 고통의 장소로 갑니다(누가복음 16장 23장).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Voltair)는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는 죽으면 그만이라고 늘 말해왔던 사람이었는데, 죽을 때에야 깨닫고, “나는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여 지옥에 가게 되었구나!”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어’라고 말하는 것도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디론가 간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입니다. 심판의 결과는 믿는 이들에게는 아름다운 “새 하늘과 새 땅”(천국)이 기다리고 있겠고, 예수를 믿지 않는 이에게는 불 못(지옥)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Ⅳ.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종교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모두 죄인이라면 죽어 지옥으로 떨어져야 합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그대로 보고만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지극하신 사랑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내려 보내시어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게 하신 것입니다. 전도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기에 예수를 자꾸 믿으라고 합니까? 또 예수와 하나님은 어떻게 다릅니까?
1.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 중의 한 분이십니다. 기독교에서의 ‘삼위’(三位)는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을 말하는데, 여기서 ‘삼위일체’란 ‘이 세 분은 일체(一體) 곧 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데 그 존재하는 양상은 단독적인 존재가 아니라 서로 달라서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 삼위(三位)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삼위께서는 그 하시는 역할도 각각 달라서, 성부는 창조의 근원이 되시고 모든 일을 계획하시며, 성자는 그 계획을 집행하시는 분이시고, 성령은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성부께서는 죄인인 인간을 너무 사랑하시므로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고, 성자 예수님께서는 그 계획에 따라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救世主)라고 부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성부 하나님이시라면, 예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을 담당하시고, 성령님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태복음 16장 16절)라고 대답했습니다. 성자 예수님이신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동시에 인간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원래 두 가지 이름이 하나로 합해진 이름입니다. ‘예수’는 일정한 개인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요, ‘그리스도’는 신분이나 자격을 말하는 보통명사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 예수’라는 말입니다. 즉 구세주(救世主)이신 예수라는 뜻입니다. 이 예수라는 이름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여호수아의 이름을 희랍어로 옮긴 것입니다. 또 이 말은 ‘메시아’라는 히브리말을 희랍어로 옮긴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아들’(마가복음 1장 1절), ‘구세주’(베드로후서 2장 20절)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을 구세주라 말하므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같은 구세주로 인정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2.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참 인간이십니다. 성부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성자 예수님이 참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 인간이시라는 증거는 “지혜와 그 키가 자라며”(누가복음 2장 52절)라는 말씀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셔서 사람들과 다름이 없는 성장 과정을 밟으신 분입니다. 히브리서 5장을 보면 예수님은 보통 사람처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셨으며 금식도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더라도 사람들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는 믿음과 기도에 힘쓰셨고, 마귀에게 시험까지 당하신 분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인 예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까요?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인간은 죄인으로 모두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을 몹시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죄를 짓고 죽어가는 인간을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으셨습니다. 누군가가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하시고 그 죄를 용서해주고 싶었는데,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인지라 인간의 죄를 대신해 짊어질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 중의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죄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게 하여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인간이 대신 짊어져야지 동물이나 다른 물건이 대신 짊어질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야 했고, 또 죄가 없는 몸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남녀의 관계에서 태어나면 안 되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나면 역시 인간이므로 죄인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동정녀(童貞女) 마리아라는 여인을 통해 성령으로 잉태케 하여 죄가 없는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3.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언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약 2,000여 년 전 이스라엘의 베들레헴 작은 마을 어느 집 말구유 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그 뒤 33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마친 다음, 죄라고는 하나도 없으신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까? 이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그 죄를 사하여 주심으로 구원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죽어야 할 인간 대신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죄인의 몸으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기 얼마 전에 “하나님, 저희를(인간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대신 우리가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으면 예수의 흘린 피로 우리의 죄가 깨끗이 되어 우리는 천국에 가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 속에서 찾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선하심과 기쁨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나타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에게 도피처를 제공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4. 죽으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그 뒤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復活), 그 후 40일 동안의 공생애(共生涯) 기간을 거친 후 감람산에서 제자들이 목격하는 가운데 승천(昇天)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復活)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예수님이 죽었다 다시 사신 것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죽었다가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죄로 인해 죽을 몸이 다시 살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린도전서 5장 17절)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기독교 신앙의 증거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증거는 부활에 있습니다. 따라서 부활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하는 것이요, 부활 하나만으로도 신약성서 전체의 내용을 사실로 믿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부활할 수 있었나요? 그것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은 그분이 부활 승천(昇天)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속성을 다 소유하고 계신 분입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 곧 하나님을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고 하느냐”(요한복음 14장 9절)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요한복음 7장 16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한복음 14장 10절).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브리서 1장 2절)고 한 그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다.”(마태복음 11장 27절) 하시며 자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한복음 10장 30절)라고 하셨고,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한복음 5장 17절)라는 말씀만으로도 예수님은 우리 중에 강생하시어 부활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참 하나님이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5.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어 주시는 중보자(仲保者)가 되셨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죄인인 인간은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로 하나님 앞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는 못 가고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신 후로 인간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가 깨끗이 씻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으로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해(和解)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과 직접 연락이 되시고 인간과 더불어 연락이 되신 분으로 중보자(仲保者)의 역할을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단절된 사이를 이어놓는 다리 역할을 하러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라는 다리를 건너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6. 천국으로 가는 길을 여시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접촉점이 되시고, 두 세계가 서로 통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 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는다고 천국에 보내고 믿지 않는다고 지옥에 보내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이 누구인지를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죄 사함을 받아 깨끗하게 될 수 있고, 죄 사함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예수를 구세주(救世主)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죄 용서함을 받게 되고,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사귐과 교제가 다시 회복됩니다. 그리고 심판과 멸망에서 구원을 받아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서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믿는 순간 죄가 용서됩니다. 이것을 구원(救援)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믿지 않으므로 죄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바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죄를 용서받고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정받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매여 있는 죽음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됨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 갈 수 있게 됩니다.
Ⅴ. 성령님은 누구신가요?
기독교를 전도하는 사람들에게서 ‘성령 충만하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되는데 성령이 누구신지 간단히 말해보겠습니다.
성령님은 삼위일체 중에 제3위가 되십니다. 제3위라 해서 세 번째로 낮다는 의미는 아니라,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과 동격이시며, 3위의 본체는 하나이시고,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십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가장 큰 일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심을 증거하시고(요한복음 15장 26절), 믿게 하시며(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 그에게로 인도하시어(요한복음 16장 13절), 그를 높이고, 영화롭게 하시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된 사이를 성자 예수님이 다리를 놓아주시면, 그 다리로 성령님이 성부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니”(로마서 8장 16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로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우리 몸에 내주(內住)하셔서(고린도전서 6장 19절) 우리의 생활을 주관하시고, 바른 삶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시어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라디아서 4장 6절)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지배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섬기게 되어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Ⅵ.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나
1. 맨 먼저 음부(陰府)로 갑니다.
성경 여기저기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은 죽으면 맨 먼저 음부로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일단 영혼과 그리고 육체가 분리됩니다. 이때에 육체는 땅에 묻혀 썩게 되고, 모든 영혼은 일단 ‘음부(지하세계)'로 가게 됩니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로 입증됩니다. 먼저 <야곱>은 자기 아들들로부터 요셉의 비보를 듣자 짐승에게 찢겨 죽은 줄로 알고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가서 아들에게로 가리라’고 말합니다(창 37:35). 구약의 의인인 <욥>도 자신의 고통 앞에서 ‘주는 나를 음부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감춰 달라’고 간구했고(욥 14:13), ‘내 소망이 음부로 내 집을 삼음’이라고도 말합니다(욥 17:13). 사도행전 2:27에서 다윗은 주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그분의 혼이 음부에 버려지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한편 누가복음 16:23은 부자가 죽어서 장사된 후에 그 영혼이 고통의 영역인 음부(하데스)로 갔다고 말합니다.
음부는 죽은 모든 영혼이 가는 곳으로, 지하세계입니다. 이 음부는 다시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가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신 주님 자신(눅 23:43)과, 아브라함을 포함한 구약의 의인들, 그리고 신약의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의 영혼은 죽은 후 음부 중 기쁨만이 있는 <낙원>과(눅 16:23-26), 불신자로 죽은 사람들은 죽고 장사된 후에 그 영혼이 <음부 중 고통을 받는 영역>으로 가게 된다고 합니다.(눅 16:23). 즉 성경에서 음부는 나사로가 간 낙원과 부자가 간 고통을 받는 영역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으로서 죽으면 가는 곳을 통칭할 때 사용되었습니다.(눅 16:26).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낙원과 천국(the kingdom of heavens)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믿는 이가 죽으면 ‘하늘나라’에 갔다 또는 ‘천국’에 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말이 아니며, 성경적으로 표현하자면 ‘고인의 영혼이 낙원에 가서 안식하고 있다’고 해야 옳습니다. 왜냐하면 낙원과 천국은 다음과 같이 엄연히 다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1) 낙원은 믿고 죽으면 모두 다 가는 곳이지만, 천국(the kingdom of heavens)은 거듭난 후에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삶을 산 자들만 제한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일종의 보상이 주어지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마 7:21).
2) 낙원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상태에서 영혼만 가는 곳이지만, 천국은 부활 후 영광스러운 몸을 다시 입은 온전한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3) 낙원은 믿고 죽은 이들이 몸의 부활 전까지(재림 전까지) 임시로 머무는 거처라면, 천국은 우리가 영원히 살 최종 거처이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예수님도 낙원에 머무신 기간은 고작 부활 전 사흘 밤낮뿐이셨으며, 그 후에는 낙원에서 나오셨습니다(마 12:40, 행 2:27).
따라서 예수 믿고 죽은 사람이 부활 전까지 안식 가운데 머무는 임시거처인 ‘낙원’을 우리가 영원히 살 ‘천국'(마7:21)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봅니다. 낙원은 우리의 최종 종착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2. 음부와 낙원은 지금도 ‘땅 아래’ 어딘가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23:43에 의하면 예수님은 임종 직전에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2:40은 인자이신 예수님이 죽으신 후 밤낮 사흘을 <땅 속>(the heart of the earth)에 계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두 말씀을 함께 볼 때 낙원이 죽은 사람이 가는 땅 속에 있는 어떤 영역 장소임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낙원(음부)이 땅 아래에 존재한다는 성경 증거는 이외에도 더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3도 주님은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고 말함으로 낙원이 있는 음부는 하늘이 아닌 보다 낮은 곳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민수기16:31-33에도 배역한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이 땅이 갈라지면서 음부에 빠졌다고 말함으로 낙원이 있는 음부가 땅속 어디엔가 있음을 말해 줍니다. 에베소서 4:9도 예수님이 죽으신 후 ‘땅 아래 곳'(the lower part of the erath)으로 내려가셨다고 하여 주님이 가신 낙원은 땅 아래 있는 곳임을 재차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3. 성도들의 영혼은 부활 시에 낙원을 벗어납니다.
많은 분들이 믿는 사람이 죽으면 즉시로 저 하늘에 있는 천국에 들어가 거기서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산다고 막연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들의 영혼은 부활시 낙원을 벗어나 육체와 결합하여 우리의 온전한 존재 전체가 하늘로 이끌려질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모로 보나 낙원은 우리의 영원한 처소가 결코 아닙니다. 단지 부활 시에는 모두 그곳에서 나와야 할 부활 전까지의 임시 거처일 뿐입니다. 이 점은 다음 말씀들로도 증명됩니다.
예수님도 죽으신 후 낙원에 가셨습니다.(눅23:43). 그러나 주님은 밤낮 사흘 동안만 그곳에 머무셨고 그 후 부활하실 때는 낙원에서 나오셨습니다(마12:40) 또한 데살로니가전서 4:16-17은 주안에서 잠자던 자들이낙원에 영원히 머물지 않고 주님이 강림하실 때 잠에서 일어나서 구름 속 공중으로 끌어올려진다고 말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데살로니가전서 4:16-17)
따라서 누구든지 성도들이 죽음의 기간 동안만 안식하는 장소인 낙원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성도들의 부활과 휴거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비 성경적인 주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참고로 불신자로 죽은 사람들은 음부에 남아 있다가 천년왕국 이후의 백보좌 심판 때에 비로소 부활하는 것입니다(계 20:11-13).
4. 부활과 휴거를 거치면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 믿고 죽으면 즉시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곳이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은 죽은 후 머물던 낙원으로부터 부활하며, 부활 이후에는 엄중한 심판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로마서 14:10에서 바울은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말함으로 바울을 포함한 모든 믿는 이들이 장차 자신의 생전의 생활과 일에 대해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9-10에서도 ‘그런즉 우리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받을 것’을 말합니다.성경은 심지어 불신자들도 천년왕국 후 심판의 때에 음부로부터 부활하여 백보좌 앞에서 심판받을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요 5:29, 13). 이러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거듭난 후 예수님 말씀대로 행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산 자(마 7:21)와 주께 받은 달란트로 신실하게 장사하여 이득을 남긴 성도들은 심판 후 사도 바울처럼 천국에 들어가(딤후 4:18) 영원토록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것입니다(마25:21, 23). 불신자들은 천국(the kingdom of heavens)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쫒기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을 당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사람은 죽으면 다 일단 지하 어딘가에 있는 음부로 갑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죽은 사람은 <음부 중 즐거운 구역>으로 가서 부활 시까지 안식하지만, 믿지 않은 사람은 <음부 중 고통을 받는 구역>으로 가서 백보좌 심판 전까지 머물게 될 것입니다.
이상을 정리하면
↗낙원(즐거운 구역) ↗ 부활체(심판) →천국(영생)
죽음→음부(지하세계 ⇒(예수 재림)
↘지옥(고통받는 구역) ↘ 부활체 (심판) →지옥(영생)
Ⅶ. 천국과 지옥
1. 천국과 지옥은 어떤 곳인가요?
천국은 인간의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곳이라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천국이 어떤 곳인가를 잘 표현하고 있는데, 갖가지 보석으로 꾸며졌고, 굉장히 화려해서 인간의 필설로 묘사할 수 없는 곳으로 나와 있습니다. 저주도 없고, 수고함도 없고, 궁핍함도 없고, 질병도 고통도 죽음도 없으며,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강이 흐르고, 강가에는 생명나무가 12가지 과실을 맺는다고 했습니다(요한계시록 22장 1-2절). 또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으며,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가지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요한계시록 21장)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너무 아름다운 낙원으로, 그곳은 고통도 없고 오직 행복만 있으며, 죽지 않고 영생(永生)을 하는 곳입니다.
반면에 지옥은 너무도 무섭고 고통스러운 곳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벗어나올 수 없는 글자 그대로 고통에 이를 가는 불지옥입니다. 지옥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거기는 구더기가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느니라.”(마가복음 9장 48절) 했고,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태복음 8장 12절).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태복음 13장 49, 50절).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더라”(요한계시록 20장 15절).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요한계시록 21장 8절)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는 죽음으로 가능하지만 지옥으로부터의 탈출구는 없습니다.
2. 천국과 지옥은 정말 존재하나요?
사람은 누구나 죽기를 싫어합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왜 죽기를 싫어할까요? 누구나 죽음이라는 것을 앞두고 사후(死後)의 세계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사후의 세계가 두렵고 죽은 후에 어떻게 될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지옥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천국만 있다면 왜 이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기를 싫어하겠습니까? 어서 죽기를 바라겠지요.
그러면 정말 지옥과 천국이 존재할까요? 천국이 있느냐 없느냐는 아득한 옛날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책으로도 많이 읽었고, 또 천국에 갔다 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들은 천당과 지옥이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죽으면 그것으로 인생은 끝나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과 지옥은 연약한 인간들이 만들어 낸 말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겁주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라고도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그럼, 당신은 죽어서 지옥에 가시오.”하고 말하면 대뜸 화를 냅니다. “믿는 사람도 그런 악담을 하느냐?”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모순된 이야기입니까? 이들은 천당과 지옥의 존재를 겉으로는 부정하면서도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혼은 어디론가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재의식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죄를 짓고 형무소에 들어가기를 싫어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인생이 죽지 않고 그것으로 끝나버린다면 이 인생은 어떻게 될까요? 참으로 허무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인생은 사는 가치를 찾지 못할 것이고, 산다는 그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인생, 무엇 때문에 참되게 살려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인생은 그저 되는 대로 실컷 먹고 마시고 입고 살다가 죽자 할 것이고, 또한 그것을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행복으로 여길 것입니다. 의리도 예절도 도덕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동물의 세계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의도 있고, 도덕도 있고, 특히 인간에게 양심이 있는 것은 이미 인생은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무신론자의 부모들도 먼저 간 자식의 관을 앞에 놓고 “아이고, 이 늙은이를 두고 왜 네가 먼저 가느냐?”라고 통곡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디론가 갑니다. 그럼, 어디로 가겠습니까?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갑니다.
천국과 지옥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착하게 살라고 엄포로 인간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은 실제로 존재하며 우리가 반드시 가야 할 곳 중의 하나입니다. 천국은 부자나 권력 있는 자나 학력이 높은 자라 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선행(善行)을 쌓아서 가는 곳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깨끗이 씻어야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은 죽어서 그것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늘나라로 가서 심판을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심판의 결과는 천국 아니면 지옥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천국에 가기 위해 믿는 종교입니다.
저나 여러분은 때가 되면 반드시 죽어야 하고, 죽은 후에는 살아생전에 한 일에 따라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그 심판의 결과는 천국 아니면 지옥입니다.
농부들이 파종을 하고, 여름에 김을 매고 구슬땀을 흘리며 고생하는 것은 가을에 추수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도 추수할 때 알곡은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기의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선(善)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반드시 거둘 때가 올 것입니다.”(갈라디아서 6장 8, 9절)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와 같이 천국으로 가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사람과 지옥에 가서 고생할 사람을 구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산 사람은 천국에 갈 것이고 믿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뉴톤이라는 유명한 무신론자가 있었는데, 그가 임종 시에 “나는 영원히 정죄를 받았구나.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되었으니 누가 나를 구원하리오? 아, 나는 지옥에서 저주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되었구나!”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또 무신론자인 토마스 스코트 경(Sir Thomas Scott)은 죽을 때 말하기를 “나는 이때까지 하나님도 없고 지옥도 없는 줄로 알았는데,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있다는 것을 느끼노라. 나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해 멸망으로 가는구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가는지 모릅니다. 한 사람은 세상적인 사람이고, 한 사람은 신앙적인 사람일지라도, 우리는 그 사람의 주인이 하나님인지 그렇지 않으면 세상인지를 알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인인 사람은 천국으로 갈 것이고, 세상이 주인인 사람은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사후의 세계를 부정합니까? 이성적(理性的)으로 인생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이성입니다. 그러나 종교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문제이지 이성이나 과학으로 풀 문제가 아닙니다. 이성과 과학을 초월한 것이 종교입니다.지구가 자전한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기운다고만 생각해 왔습니다. 이성적으로만 따지려드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라고 하니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를 이성이나 과학으로 풀다 보면 도그마에 빠지게 되고 결국은 허무감에 사로잡혀 자살로 치닫게 됩니다. 종교를 인간의 의지나 이성으로 판단하려고 하면 많은 오류를 범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과학이나 이성으로는 천국과 지옥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 이게 과학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간다. 이게 종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러면 왜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 놓았느냐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죄를 지은 사람은 교도소로 보내듯이, 하나님도 법과 질서와 공의(公義)를 위하여 죄인은 지옥으로 보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옥은 애초에 사람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을 괴롭히는 마귀와 그 졸개들을 위해 예비한 곳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1절에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한 영영한 그 불에 들어가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지 않고 마귀의 거짓말을 믿고 마귀를 따라다니다가 마귀와 함께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상상으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늘나라의 세계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통치하시는 모든 영역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러 사람들이 모인 앞에서 잘난 척하면서 천국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람에게는 1000 달러를 주겠다고 떠들어 댔습니다. 이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어느 목사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 가운데 천국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10000 달러를 주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좀 더 겸손한 자세로 인간과 우주의 세계를 바라본다면 천국이 있다 없다를 함부로 말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자연, 끝없이 펼쳐진 저 우주의 신비,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과 끊임없이 넘실거리는 망망대해, 대자연의 오묘한 조화, 이런 우주의 신비 앞에 자신을 낮춰 좀 더 겸손하게 이 세상을 바라본다면 인간은 너무 초라해 보이고, 작게 보이고, 무기력해 보이고, 불완전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영국에 ‘하이드 파크’라는 공원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신사복 차림의 어떤 사람이 여러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하나님은 없으며, 사람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 버리고 만다는 이야기를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군중들의 맨 뒤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어떤 노동복 차림의 사람이 신사가 떠들고 있는 단상 위로 올라가 주머니에서 귤 한 개를 꺼내 여러 사람 앞에서 먹으면서 “여러분, 이 귤 맛이 어떻겠소?”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군중들은 “여보시오, 우리가 그 귤을 먹어 보았어야 귤 맛을 알 것 아니요?”하고 반문했습니다. 그러자 그 노동복 차림의 사람은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귤을 먹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귤의 맛을 모르듯이, 어찌 하나님이 계신 지 안 계신 지 체험해 보지도 않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작해야 80-90년 정도밖에 못 사는 인생,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생이 아닙니까? 과학이 고도로 발달된 세상이라지만 고작 달나라밖에 가보지 못한 것이 인간인데, 인간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난다느니,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느니 등의 말을 자신 있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몇 억 광년 떨어진 저 광활한 우주의 어느 곳에 천국이 있는지 누가 압니까?
위 이야기 가운데 신사는 하나님이 계신지를 알아보지도 않고 교만하게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으로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말해 버렸고, 다른 노동복 차림의 사람은 자신이 겸손한 마음으로 생활하면서 하나님을 찾으려고 노력했기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 교만은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문제, 신앙의 문제에 대하여 좀 더 겸허한 지세로 바라보며 임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비로소 하나님이 자리 잡게 되고, 모든 삼라만상과 인생의 참된 길은 조물주의 섭리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움직이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3. 선하게 살면 천국에 가지 않나요?
우리가 언뜻 생각하기에는 착하게 살고 선한 행실을 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야 마땅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당연히 그런 사람이 천국에 가야 합니다. 그런데 착한 행실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세계의 모든 종교가 가진 종교의 보편성입니다. 어떤 종교든지 악한 일을 하라는 종교는 없습니다. 기독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기독교는 하나님의 인간 창조와 인간의 죄로부터 시작됩니다. 죄를 싫어하시는 하나님은 죄를 지은 인간을 가까이할 수 없으므로 죄를 씻지 않고서는 절대로 하나님 앞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고, 의롭다 함을 입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많이 있으나 천국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누구나 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로마서 3장 37절)라고 했으며,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다.”(로마서 10장 9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로마서 10장 13절)라고 했습니다. 천국 가는 길은 간단합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시인하면 됩니다.
기독교는 행위로 구원을 받는 종교가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종교입니다.물론 행위도 어느 누구보다도 바르고 착하게 행동을 해야 됩니다. 흔히 여럿이 모인 가운데에서 착하게 살면 되는 것이지 착한 사람이 천국에 못 가면 그게 무슨 종교냐고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기독교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해서 하는 말입니다.
착한 행실은 인격수양이나 도를 닦는 데는 도움이 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착한 행실 그 자체가 구원의 조건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슨 법으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율법의 행위(착한 행실)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을 우리가 인정하노라’(로마서 3장 27-28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로마서 3장 20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에베소서 2장 8-9절)라고 했습니다.
4. 어느 종교나 다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닌가요?
종교 다원주의(多元主義)는 타 종교도 기독교와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종교로 보고 모두 구원의 종교가 될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출발합니다. 따라서 종교 다원주의는 기독교만이 구원의 유일성에 반한 반기독교적인 사상입니다.
종교 다원주의는 1960년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타 종교를 가진 많은 이민자들이 미국과 유럽으로 이주하면서 서로 다른 종교, 서로 다른 생활, 서로 다른 사고방식들이 구미 사회를 종교 다원화 사회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게다가 1, 2차 대전을 겪으면서 서구 문명의 한계와 동양사상에서 문제의 해결점을 찾으려는 시도가 일어나면서 종교 간의 대화를 꾀하려는 에큐메니칼 운동(Ecumenical movement) 같은 것이 그 일익을 담당했습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성경해석을 임의로 하거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내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타 종교에서 발견되는 것은 종교적 보편적 특징과 윤리적 차원의 요소와, 기도, 금식, 금욕, 제사, 예배 등 문화적 요소들만 있을 뿐,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성삼위일체의 하나님과, 인간의 죄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을 통한 구원의 신앙이 없습니다. 설령 비슷하게 있다 해도 그것은 기독교를 모방한 종교일 것입니다. 특히 그들은 높은 산을 오르는데(하나님께로 가는 것) 어떤 사람은 예수라는 길을 통해, 어떤 사람은 석가라는 길을 통해, 어떤 사람은 마호메트를 통해, 가는 길은 다르나 종착역은 같다고 합니다. 듣기에는 그럴듯한 것 같으나 그들은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특성들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다른 여타의 종교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독특한 종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독교는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이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필요했고, 피 흘려 죽으셨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만이 구원의 종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은 다른 종교에 대하여 폄하하거나 혹은 배타성에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느 종교나 다 존중해야 하며, 배타적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다 자기가 믿는 종교가 소중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하나는 어떤 종교를 가졌든,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귀한 자녀들로 태어났고, 또 날 때부터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두 천국에 가야 할 귀한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기독교 신자로서 나의 믿음 안에서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Ⅷ. 인생이란 무엇인가
1. 헛되고 헛된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서러워하고, 아쉬워하고, 다투고, 미워하고, 괴로워합니까?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란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느냐?”로 이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이 노래처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고향인 하늘나라를 떠나 이 지구상에 와서 얼마 동안 살다가 이 땅을 떠나서 다시 고향인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백(李白)의 시 가운데 “夫 天地者는 萬物之逆旅요 光陰者는 百代之過客이라 浮生 若夢”이니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는 인생은 나그네요 이 세상은 나그네가 잠시 머물렀다가 가는 여관과 같으니 인생은 꿈처럼 헛되고 허무하다는 뜻입니다. 많이 살아봤자 인생 80, 90년 그 짧은 세월을 아귀다툼을 하다가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정말 이백의 시가 이해가 갑니다.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아
영웅호걸이 몇몇이냐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네 인생도 한 번 가면 저 모양이 될 터이니
에라 만수, 에라 만수 대신이야 -성주풀이-
영웅호걸이면 무엇하고, 절세가인이면 무엇합니까? 죽고 나면 남는 것은 풀이 우거진 무덤밖에 없습니다.‘
또 성경은 “내일 일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야고보서 4장 14절)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쉬 지나가는 하루와도 같습니다. 어린 시절은 아침과도 같고, 젊은 시절은 낮과도 같으며, 늙은 시절은 저녁과도 같이 빨리 지나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장한(長恨) 세월 초로(草露) 인생이요, 오늘의 홍안(紅顔)이 내일이면 백골로 변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얼마나 헛되고 헛된 인생입니까?
나그네가 잠시 머물렀다가 가는 여관과 같은 세상, 여관에는 전화기도 있고, TV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여러 가지 편리한 물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나그네 마음대로 다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그네는 일단 여관을 떠나는 날에는 모든 것을 다 놓고 떠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관집의 소유물이지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 잠시 머물러 살아가는 동안에는 마치 여관 손님과 같이 여관의 모든 시설을 자유로이 쓰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 생활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떠날 때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고 빈손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니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거니”라는 성경 말씀처럼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이라면 갑자기 인생이 서글퍼지고 허무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시인은 이것이 아쉬워 “밤에까지 촛불을 켜놓고 놀았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우리네 인생이 나그네 인생임을 알고 살 때, 우리는 이 인생을 좀 더 값지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짧은 인생이기에, 나그네 같은 인생이기에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또 하나 인생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허무하고 무상한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니라”(야고보서 4장 14절).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알라”(데살로니가전서 5장 2절). 그러니 “너는 내일 일을 자랑 마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라.”(잠언 27장 1절)고 말합니다. 모두가 인생의 허무감을 나타낸 구절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헛되고 헛된 인생 그저 대충 살다가 죽어 지옥에 가야 합니까? 아니면 허무한 것이 인생이니 실컷 먹고 마시다가 죽자고 해야 됩니까? 이왕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죽어 천국에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옛날 위대했던 많은 선지자들도 자기가 나그네임을 알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위대한 과학자도 사상가들도 예술가들도 믿었습니다. 우리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허무한 나그네 인생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나그네 인생길을 떠나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요, 짧고 허무한 인생을 보람찬 새 생명으로 바꾸는 길일 것입니다.
2.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사람이 무엇을 주고 목숨을 바꾸겠느냐?(눅 9:25) 목숨이 천하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미국 예일대학의 생화학 교수인 모로비츠 박사는 인간 육체의 정가표를 매긴 바 있습니다. 모로비츠 박사에 의하면 인간의 인체 내에 있는 화학 물질인 효소, 단백질, 아미노산 등 생화학 물질들만을 뽑아낸다고 하면 그 값이 600만 불이 된다고 했습니다. 한때 텔레비전 드라마에 등장했던 ‘600만 불의 사나이’를 연상케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모로비츠 박사는 그것들을 인체 내에 살아 있는 세포로 만드는 데는 적어도 6백만 불의 돈이 들어간다고 해도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했습니다. 모로비츠 박사의 평가가 어느 정도 사실성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해선 확실치는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인간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값싼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까닭은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가장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창세기 1장 31절).
일제 강점기에 예수 잘 믿는 한 사공이 있었습니다. 배운 것은 없지만 나루터에서 강을 건너는 손님들을 배에 태워 정성껏 노를 저어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실어다 주었습니다. 어느 날은 손님이 둘 뿐이었습니다. 보아하니 한 사람은 일본에서 막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유학생인 듯싶었습니다. 멋진 사각모와 제복이 그럴듯하고, 손에 든 가방과 짐들을 보니 이제 고국에서 그 배운 것을 써먹기 위해 돌아오는 듯 보였습니다. 얼굴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보아하니 양반인 듯 갓에 도포에 입에 문 곰방대 하며 한 눈에 봐도 진사 벼슬은 한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사공은 노를 저으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찬송가 493장을 힘을 주어 곡조가 올라가는데, 양반이 ‘어험’ 기침을 하더니 노래를 막았습니다. “이보게 사공, 보아하니 예수쟁이인가 본데, 힘들지 않나? 노나 열심히 젓게” 사공은 기다렸다는 듯이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으리, 예수 믿어야 천당 갑니다. 이 나라도 예수 믿어야 소망이 있습니다. 젊은 선생님도 예수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옆에 있던 유학생이 고개를 돌리더니 하는 말이 “무식한 사공이 무얼 안다고, 이 나라는 하루빨리 신학문을 배워서 나라가 힘을 쌓아야 돼요, 무슨 예수 따위에 소망이 있단 말이요.” 그러자 옆에 있던 양반이 이번엔 유학생에게 말을 던졌습니다. “사공이 뭘 알겠소. 그리고 보시오. 우리나라가 망한 것은 공맹(孔孟)의 도를 잃어 버렸기 때문이요. 요즘 젊은이들이 신학문, 신학문 하는데 우리 것도 제대로 모르면서 어찌 남의 것을 알 수 있단 말이요.” 유학생과 양반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때였습니다. 갑자기 돌풍이 불어닥쳐 배가 기우뚱거리더니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세 사람은 물속에 빠졌고 헤엄을 못 치는 두 손님은 물속에서 살려달라고 허우적거렸습니다. 간신히 배를 다시 뒤집어 바로 한 후 사공은 두 사람을 구해냈습니다. 물에서 건져 나온 양반은 멋진 곰방대도 갓도 잃어버리고 정신이 나간 듯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숨을 헐떡거렸습니다. 학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에서 가져온 소중한 노트와 짐들 그리고 멋진 사각모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사공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손님들, 신학문 구학문 그것들 다 어디 쓰겠습니까? 자신의 생명 하나 못 구하면서, 헤엄이나 배워두시오.” 라고 하였다는 이야깁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태복음 16장 26절)라고 하셨습니다. 천하보다 더 귀한 것이 자기의 생명이 아닙니까? 잠언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대개 불치병에 걸리면 그간 살아온 삶을 후회한다고 합니다. 생명이 다 끝나갈 때야 비로소 철이 든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자기 수양과 지식의 유익을 얻으려면 불교나 유학 아니면 도교가 더 좋습니다. 엄격한 계율에서 종교의 만족을 얻으려면 차라리 회교가 낫습니다. 돈 벌어 부귀를 얻으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면 됩니다. 그러나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 어두운 인생길에서 저 멀리 보이는 등불 같은 것이 바로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소망이 되시고 생명의 불꽃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한복음 1장 4절)고 했습니다.
Ⅸ. 기독교 교리 요약
이상을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과 함께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불경죄를 저질렀습니다. 그 죄의 결과는 사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싫어하시는 분이신지라 죄인인 인간을 가까이 둘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가까이 갈 수 없는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고, 죽어서도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몹시 사랑하시어, 지옥에 떨어질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내려 보내 주시고,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그 죄 값으로 죽으시게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는 인간만이 대신 짊어져야 하는데, 세상 모든 인간은 죄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또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 반드시 죄가 없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셔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케 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십니다.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참 인간이 되시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후 예수님은 33세 되던 해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죄라고는 하나도 없으신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죄인의 몸으로 죽으셨습니다.
기독교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으니, 이제 우리는 죄인이었으나 죄의 속박에서 풀려나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길을 터놓으신 것입니다. 그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것입니다.
Ⅹ. 결신하기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복음 1장 14∼15절)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처럼 때가 찬 느낌을 줍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때가 왔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많은 징조들이 마지막이 가까이 왔음을 알려 주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아니면 몇 백 년 후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문제는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개인의 종말입니다. 개인의 죽음입니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퇴근 후에 기원에서 바둑을 두다가 집에 들어갔는데 다음날 새벽에 죽었다는 슬픈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어느 직장 동료는 직원들끼리 즐겁게 회식을 하고 집으로 가다가 건널목에서 차에 치어 이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미국 미네소타 주 레드레이크 폴스에 있는 성 요셉 공동묘지에 붙어있던 이색적인 공고가 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11월 15일부터 겨울 3개월간 문을 닫겠사오니 그 사이에는 죽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그 마을의 목사는 다음 주일 설교 제목을 교회 게시판에 즉시 써 붙였습니다. ‘죽음에는 휴일이 없습니다(Death takes no holiday).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 죽음입니다’(디럭스 바이블). 자기가 몇 시간 후에 죽을 것을 알았다면 바둑이나 두고, 회식자리에 술이나 먹고 앉아 있었겠습니까?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깊은 경륜과 사랑 속에 감추어진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몇 백 년, 몇 천 년 길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죽을지 혹은 내일 죽을지 모르는 것이 인생입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오라 하시면 가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누가 언제까지 살다 가겠다고 약속해 놓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기는 믿어야겠는데 귀찮게 뭐 지금 믿을 것이 있느냐 늙어지면 그때 가서 믿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주 믿지 않겠다는 사람보다는 나으나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를 놓치고 세상을 뜰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성경 마태복음 25장에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결혼식을 주로 저녁에 하는데,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불을 켤 기름을 미리 준비했다가 신랑이 오자 함께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고,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미리 준비하지 못해서 신랑이 와도 등불을 켜지 못해 잔치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미리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신랑을 맞을 수 있었지만, 다른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기에 신랑을 맞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런저런 일로 핑계를 대다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갑자기 죽으면 마치 기름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천국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는 이야깁니다. 다시 말하면 믿지 않다가 죽으면 그 때는 이미 늦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이야깁니다.
말세란 말은 두 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개인의 죽음이 가져오는 말세요, 하나는 이 세상이 끝나는 말세입니다.그래서 성경에서 죽음은 ‘밤에 도적같이 온다’(베드로후서 3:10). “그런즉 그날과 그때는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면서 ‘근신하라. 깨어 있으라.’(베드로전서 5장 8절)고 했습니다. 질병으로, 사고로, 죽음은 아무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어느 때 어디에서 죽음을 맞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이 끝나는 말세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나에게 찾아오는 죽음에 늘 대비하고 살 일입니다.
에드워드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교회 옆에 아주 방탕한 주정뱅이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이 사람이 얼굴이 하얗게 되어 달려왔습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자기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네가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내년 오늘에 너를 데려갈 것이다.”라고 알려주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이 모든 말을 듣고는
“그러면 이전부터 술과 도박을 끊고 교회에 나오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주정뱅이는 결심을 하고 술과 도박을 끊고 열심히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런데 얼마쯤 나오다 보니 열심이 식어졌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어쩌자고 열심을 잃어버렸느냐?”
라고 묻자 그 주정뱅이는
“목사님 그 꿈을 믿으십니까? 그 꿈은 개꿈이지요. 그것을 믿는 사람이 어리석지요.”
라고 하며 교회 출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주정뱅이는 계단에서 구르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날이 바로 1년 전 꿈을 꾼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성적으로 따지려 들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가지려면 먼저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따지고 비판하면 믿기 어렵습니다.그저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겠다고 하면 보입니까?
어머니와 함께 살던 어떤 망나니 소년이 갑자기 어머니가 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죽기 전 아들의 손을 꼭 붙잡고
“얘야. 내가 바라는 것은 네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거란다.”
그러고 나서 그 어머니는 눈을 감았습니다. 아무리 망나니라고는 하지만 둘이 살다가 어머니가 죽고 나니 그의 심경에 큰 변화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고민을 하던 어느 날 평소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 목사를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어머니가 우리는 죄인이라고 늘 그러셨는데 정말 죄인입니까?”
“그렇단다.”
“예수를 믿으면 천당에 간다고 하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단다.”
“그러면 천당에 가면 우리 엄마를 볼 수도 있습니까?”
“그렇단다.”
갑자기 소년의 얼굴이 환히 밝아왔습니다.
“그러면 믿겠습니다.”
신앙은 이렇게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 우리 대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까?” 이렇게 물었을 때, “예, 믿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면 되는 것입니다. 천국 가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제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믿으시겠습니까?” “예‘ 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장 28절)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자여 길이 참 어둡고 매우 험악하니
집을 나간 자여 어서와 돌아와 어서와 돌아오라 (찬송가 525장)
천국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어서 들어오라고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신앙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결단을 내리십시오. 알면서도 머뭇거리다가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기회를 놓치는 어리석은 일은 없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믿고, 늦기 전에 어서 여러분들의 이웃에 있는 가까운 교회로 나가시면 됩니다. 여러분을 친절히 맞이할 겁니다.
-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모두 교회에 나가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시기를 소망하며,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이 한 분 한 분 모두에게와, 그리고 그 가정 위에와, 하시는 일 위에 풍성히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저자 약 력
엄원용(嚴元鎔)
1944년 서산 출생, 충주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숭실대학교 대학원, 백석대학교 기독전문 대학원에서 신학박사(Th.D) 학위를 받았다
목사, 고교 교사, 신학교 강사, ‘한국가곡작사가협회’, ‘21세기한국교회음악연구협회’, ‘(사)한국수필가연대’, ‘인사동시인들’ 등에서 회장을, ‘(사)기독교문인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기독교문인협회’ ‘기독교시인협회’, ‘도봉문인협회’, 회원, ‘한국음악저작권 협회’ 정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