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들리는 함성
相 汎 임 재 석
나이 70대 후반에 들어선 요즈음도 과거 전북 ㅇㅇ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교사시절의 일들이 가끔씩 떠오른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도 있었지만 웃음이 절로 나오는 사건들도 있었다. 그 중에는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이야기가 하나있어 적어 보려 한다.
1970년대 후반, 그때는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려면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던 시절이었다. 시험은 일반 과목의 필답 고사도 있었지만 체육과목도 있었다. 특히 체육 과목은 실기였으며 모든 학생들에게 필수 과목이었다. 그 시험의 이름은 지금도 생생한 <체력장> 이었는데, 여기에 포함되는 종목은 멀리뛰기, 오래 달리기, 100m 달리기, 턱걸이, 팔굽혀 펴기 등 이었다.
평소 3학년 체육 담당 교사는 체육시간에 이 시험 종목을 반복 연습 시키는 것에만 매진하였다. 그리고 가을에는 어느 한 날을 지정해 3학년 전체가 체력장을 미리 평가해보는 날로 정했다. 그날은 체육교사 혼자 3학년 전체 학생들을 평가하고 지도하기에는 역부족이라서 3학년 담당 다른 교과 교사들도 운동장에 나와서 체육교사를 도와주며 보조교사 역할을 했다.
3학년 선생님 중에 국어담당 김 ㅇㅇ 선생님과, 영어담당 설 ㅇㅇ 선생님이 계셨는데, 두 분은 전주에서 출퇴근을 함께하며 각별히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영어 선생님은 성격이 쾌활한 편이었고 국어 선생님은 상대적으로 과묵한 편이었다. 두 선생님 모두 학생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던 분들이었다. 두 분의 키는 서로 비슷했지만 국어 선생님은 살이 찌고 배가 많이 나온 분이어서 별명이 <배쟁이>였다. 영어 선생님은 날씬해서 보기에 좋았다. 그래서 겉으로 판단하기에 국어 선생님은 몸이 아주 둔하게 보였고 영어 선생님은 운동을 잘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체력장 예행 평가를 하던 날 오후는 파란 하늘에 청량한 바람까지 불어 전형적인 가을날씨를 보였다. 학생들과 선생님들로 온 종일 장터처럼 시끌벅적하던 운동장이 조금씩 정리되어가고 있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끝나 영어 선생님이 기분이 좋았을까? 학창시절이 생각났을까? 국어 선생님께 갑작스런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김 선생님, 우리 둘이 누가 이기나 운동장 한 바퀴 뛰어봅시다.”
그러자 국어 선생님은 짐짓 놀라는 표정으로 싫다고 말했다.
“한 바퀴 합시다.”
“싫습니다.”
영어 선생님의 계속되는 재촉과 국어 선생님의 거절을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지켜보면서 국어 선생님이 참으로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러던 중 뜻밖에 국어 선생님은 “그럽시다” 하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두 분이 겨뤄보기로 의견일치를 본 것이다.
운동장 둘레를 크게 한 바퀴 돌면 약 150m 정도쯤 되는 제법 큰 트랙이 나온다. 이 운동장은 평소 가운데에 잔디가 잘 가꾸어지고 다듬어져서 하루 종일 공부에 지친 학생들이 뒹굴면서 휴식을 취하기에는 아주 좋은 놀이터였다.
두 분이 출발선에 나란히 올라서자. 주변의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호기심에 웅성거렸다. 긴장의 순간이 지나고 마침내 출발 신호가 떨어지자 두 분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출발선에서 “와 --”하는 소리가 일어나자 운동장의 멀리 있는 사람들의 시선도 일제히 트랙을 향했다. 그리고 배쟁이 국어 선생님과 날씬한 영어 선생님의 달리기 시합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순식간에 넓은 운동장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로 큰 차이 없이 비슷하게 뛰어 나갔다. 잠시 후 영어 선생님이 조금 앞서기 시작했다. 모두에게 예견된 일이었다. 그리고 반 바퀴 정도에 다다랐을 즈음,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국어 선생님이 큰 배를 앞으로 내민 채 영어 선생님의 앞으로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영어 선생님은 조금씩 뒤로 쳐지기 시작했다. 둘의 간격은 계속 벌어졌고 결승점이 다가오자 바라보던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함성은 운동장을 떠나갈 듯 했다.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였다. 양손을 흔들고 발을 구르며 목청껏 지르는 소리에 2 층 목조 건물이 들썩거리고 유리창도 함께 흔들거리며 메아리쳐 공명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마침 서쪽 하늘엔 붉은 해가 호남평야의 지평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저녁노을의 채운도 여느 날보다 더욱 붉은 것만 같았다.
드디어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학생들과 교사들은 더욱 환호성을 연발했다. 국어 선생님의 나온 배에 흰색의 테이프가 끊어지고 뒤이어 영어 선생님이 들어왔다. 두 선생님들 모두 기진맥진하여 잔디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승자와 패자 구분 없이 최선을 다 했기에 그 시합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었다.
내 머리에 깊이 각인 된 그날의 모습이 가끔은 선명하게 떠오르고 함성소리도 들려온다. 어쩌면 살아오면서 가장 크게 소리 지르고 발 구르며 웃어본 날 이었기 때문 일 것이다. 참으로 행복했었다. 원초적 행복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그날 영어 선생님이 국어 선생님을 이겼더라면 그것은 당연한 일로 별 기억이 없을 것이다. 국어 선생님이 이겼다는 그 반전이 이토록 행복한 기억으로 내게 남아 있는 것이다. 좋은 추억을 갖게 해 준 두 분에게 늦게나마 마음으로 고마움을 전해야겠다. 사실 그날이 내게 재미로만 남아 있지는 않다. 사는 동안 겸손해야 한다는 교훈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생의 도전과 반전을 위해 늘 떠 올렸던 그날의 함성은 이제 행복이 되었다.
2022/06/20。
첫댓글 상범 시인님!
옛 추억이 묻어나는 아름다운 삶의 한 페이지 감상 잘했습니다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추억을 되씹어 봅니다
좋은 작품에 감사를 드립니다
건강하시고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