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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청 너머 골에 묻은 붉은 마음
등선대 김영일
1, 귀국
삭풍이 몰아치고 동짓달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1644년 11월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돌아오는 한 떼의 긴 행렬이 있었으니 그것은 북경을 지나 조선의 한양으로 돌아오는 소현세자 일행이었다.
볼모로 잡혀갈 때도 극심했던 추위는 돌아오는 날에도 또한 그랬다.
병자호란 당시 청 태종에게 항복하고 송파 삼전도에서 삼고두 구배(三叩頭九拜)의 예를 올려 민족의 체통을 내팽개쳐 버린 조선의 16대 임금 인조
그 임금 덕분에 병자호란 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내외와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등 주전파 대신들 외 200여 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그 백성들 중에서 전부가 아닌 살아남은 자 일부가 압록강을 건너 이제 다시 고국 땅 의주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8년여의 긴 세월 모든 굴욕과 멸시와 천대 속에서 참고 견디어 왔던 세월은 가고 이제 본국으로 돌아오는 세자 일행들
지난날 고생스러웠던 날들이야 되돌아보기조차 싫었을 것이고 이제 그날들을 뒤로하고 다시 고국에 돌아오는 심정이야말로 만감이 교차 되는 심정이겠지만 그러나 그리도 고되고 힘들었던 세월은 어떤 획기적인 결정을 가슴 속 깊이 다지는 좋은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옛날 소현세자 및 봉림대군 등 청나라 심양으로 볼모로 끌려갈 때 평북 의주 청석령을 지나며 그 참담함을 읊었던 시조
청석령 지나거다 초하구 어드메뇨
호풍(胡風)도 차도 찰사 궂은비는 무슨 일로
뉘라서 내 행색 그려 임 계신 데 보낼고
당시를 생각하는 세자는 그 옛날이 다시 생각나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 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한양을 떠나갈 때 삼 학사 중 한 사람인 청음 김상헌이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렸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둥말둥 하노라
라는 시조를 읊어 가는 사람들을 눈물샘을 자아냈던 삼학사 등 저 땅에서 죽거나 남아있는 백성들을 다 데리고 나오지 못한 한을 되새기며 다시 눈물짓는 세자의 심정이 어떠하였으리오.
추위와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드디어 귀국길에 오른 소현세자 일행에는 청나라 황궁의 소속된 천주교 세례를 받은 환관들과 궁녀들이 동행하게 되었고 궁녀 중에는 굴씨(屈氏)라는 청나라 궁녀가 끼어 있었다.
그 성씨도 희한한 굴씨녀는 과연 누구인가 ?
2 굴씨녀
회오리바람이 피비린내를 몰고 오니 명나라 앞날이 그야말로 바람 앞에 등불이었다.
명나라 숭정 황제(의종)는 농민 반란군 이자성에게 붕괴되어 더이상 사직을 보존치 못함을 알고 북경의 자금성에서 황제의 권좌에서 내려왔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황제는 비빈과 처첩들 그리고 딸들 운명을 자신이 차고 있던 칼 한 자루로 스스로 결정하여 처리한 후 이어 황제 자신은 만세산 수황정 팥배나무에 목매어 자살했다.
이에 앞서 황후는 황제의 화급한 부름으로 수황정으로 급히 달려갈 때 뒤따르는 궁녀들을 바라보며 그들 앞에 다가올 처연한 죽음을 감지하고 애처로운지 손을 내저어 멀리멀리 피하라고 타이른 뒤 살아남아 뒷날을 기약하기를 권했다.
“황제와 나 그리고 우리 식구들은 나라를 보필하지 못한 책임이 있어 자결하려 하거니와 꽃 같은 너희들은 지금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데 왜 나를 따르려느냐?.
그러니 너희들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후생을 열심히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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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친 황후는 서둘러 황제의 뒤를 쫓아갔다.
궁녀들은 황후에 권고대로 마음을 바꿔 황궁을 빠져나온 뒤 민가에 숨어들어 일시적으로나마 일단 난국을 피하게 되었고 그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명나라 황궁을 탈출하여 고향에 숨어있던 굴씨녀는 민가에 숨어들어 일시적으로 난을 피할 수 있었으나 워낙 미색이 출중한 그녀는 다시 청나라 군사들에게 붙잡혀 청나라 황궁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북경의 점령관이나 다름없던 예친왕 다르곤에게 넘겨진 굴씨는 어르고 타이르며 다르곤을 따르기를 종용했으나 그러나 끝까지 다르곤을 오랑캐라 멸시하며 그를 철저히 외면하게 되었다.
예친왕은 건장한 남아 대장부였으나 그가 여인처럼 얼굴에 면사를 두르고 예하 사람들을 접견하는 것을 보고 굴씨는 이것을 보고 코웃음을 치며
“대장부라 자처하는 자가 아녀자처럼 면 전에 면사(面紗)를 하고 다닌단 말인가 ?
역시 오랑캐는 오랑캐로구나”했다.
그러나 굴씨의 마음을 돌려 잡지 못하고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어서 아름다운 여인을 두고 마음속으로만 짝사랑 했던 것이다.
미인은 박명하단 얘기는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었던가?
청나라가 북경을 함락한 지 8개월 후 굴씨는 두 왕자가 귀국하는 길에 소현세자 일행을 따라 조선으로 오게 되었다.
중국 명나라 소주에서 태어나 북경에 명의 황실에서 그리고 청나라 황실의 궁녀로 있다가 이제 더 멀리 조선에 한양으로 오게 되었으니 인생유전(人生流轉)치고는 너무 기구하지 아니한가?
3 소현세자
숭정 황제가 자살하고 난 후 명나라를 차지하려던 이자성의 반항군을 물리치고 이어 명나라를 정복하게 된 청 태종
그의 사후 황제의 뒤를 이은 청나라 세조 순치제는 섭정왕 다르곤을 통해 모든 일을 마무리하는 한편 수도를 심양에서 북경으로 옮기는 등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국력 신장에 앞장서고 있었다.
한편 볼모로 잡혀있는 조선의 소현세자와 인질들을 더 붙잡아 둘 명분이 없어진 다르곤은 이들을 풀어주고 귀국할 것을 명했다.
이어 소현세자를 접견한 자리에서 다르곤은 그에게 귀국 선물을 하사할 터이니 무엇이든 말해보라고 말하였다.
소현세자는 청나라 국보나 다름없는 용현석(龍硯石)을 그리고 서양 문물에 관한 서적과 천주교에 관한 여러 가지 서책을 부탁하니 다르곤은 이를 쾌히 승낙하고 귀국길에 왕자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귀국한 소현세자를 접견한 임금 인조는 얘기 끝에 우연히 청의 섭정왕 다르곤이 보낸 선물 이야기가 나왔다.
소현세자는 별 의미 없이 다르곤이 주어 보낸 용연석(龍硯石) 얘기를 하게 되었고 가뜩이나 세자가 여러 가지로 못마땅했던 인조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김에
“일국의 세자가 타국에서 고생하는 포로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데려오지 않고 그까짓 용연석을 가져왔느냐? ”라고 화를 내며 그 벼루를 소현세자를 향해 내 던져 버렸다.
용연석이 세자 머리에 맞자 기절초풍한 세자는 쓰러졌고 그 일로 세자는 병을 얻어 세상을 뜨고 말았다.
믿거나 말거나한 지나간 조선 역사에 한 편의 조그마한 야사(野史)라고나 해 두자.
한편 세자를 미워하던 인조는 세자를 자기를 제치고 청나라 관계자들과 내통하여 자기를 제쳐놓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속셈이 있다고 판단하여 세자와 강빈을 더욱더 미워하게 되었다.
뜻밖에 주변의 냉대에 세자는 세상만사가 귀찮아졌고 거기다가 몸까지 허약해서 병을 앓아눕게 되었다.
학질이라고 병명을 단정한 내의원의 처방에 따라 김자점과 조소용의 소개로 들어온 내의원 이형익은 계속 침을 놓아댔지만 결국 사망한 세자
불쌍한 세자는 아버지 인조와 조소용 김자점의 간계 속에 독살되었고 사초에까지 기록되었으니 이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죽은 세자는 말이 없고 역사는 그렇게 흘러갔다.
그 후에도 인조는 세자빈 강빈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고 강빈의 친정아버지 강석기 및 친정 식구들을 귀양보내거나 죽게 하여 세자빈의 친정은 쑥대밭이 되었다.
또한 세자의 세 아들 경선군 석철(당시 12세) 경완군 석린(8세)과 심양에서 출생한 경안군 석견(4세)을 제주도로 귀양 보내 첫째 아들과 둘째는 풍토병으로 죽어 갔으니 평범한 양민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보다 더 악랄하고 악독하게 세상을 살아갔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나간 역사는 말이 없었다.
다행히 이 중에서 살아남은 경안군은 그 후 세자의 후계자로서 그대를 이어가게 되었다.
4 북경에서의 조우
심양에서 볼모살이를 하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명나라를 멸망시킨 후 청나라 수도를 심양에서 북경으로 이전할 때 같이 따라간 이들은 청나라 황궁에 궁녀로 있던 굴씨를 이때에 조우(遭遇)하게 되었다.
명나라 태생으로 본의 아니게 청나라 황궁에 궁녀로 있던 굴씨녀 동병상련(同病相憐 )이 이유였을까 ?
비슷한 처지에 있던 그들의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또한 그 당시 소현세자는 천주교 신부 아담 샬을 만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세자도 천주교에 많은 관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서양 문물연구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셨던 것으로 추측된다.
세자 일행이 귀국할 때 아담 샬은 청나라 황제를 설득하여 세례를 받은 환관 이방조 장삼외 유중림 곡풍등 두문방과 최회저 유저 긴저 등 궁녀들을 딸려 보냈고 이 중에 굴씨도 동행하게 되었다.
흘러간 야사는 말이 없고 쓰여진 정사는 간특한 사실들만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용현석 사건을 하나의 야사라서 무시할 수도 있으련만 그러나 소현세자는 귀국 후 세자 자신이 청나라에서의 습득한 학문과 기술 정치철학을 살려 조선의 정치풍토 개선에 이바지하려 하였으나 부왕 인조와 후궁 조소용의 농간으로 애석하게도 귀국 후 3개월 만에 세상을 뜨시니 세자가 꿈꾸던 이상향 건설 같은 아름다운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또한 소현세자를 따라 조선에 들어온 굴씨녀는 끈 떨어진 갓이 되어 버렸다
소현세자의 사망을 계기로 청나라에서는 소현세자 귀국 시에 딸려 보냈던 환관과 궁녀들을 소환했으나 굴씨녀 등 궁녀들은 환국을 거부하고 환관들만 귀국하게 되었다.
소현세자 사후에 조선에 남겨진 굴씨녀
어찌 되었거나 이때 굴씨는 조선 왕실에 궁녀가 되어 인조의 둘째 왕후 장렬왕후 조씨의 궁녀로 일하게 되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궁녀의 생활이란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었으리라.
장렬왕후 조씨 궁에서 궁녀로 일하던 굴씨는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절망과 낙담 속에서 외로워진 그녀는 그러나 그렇게 낙심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기 위하여 장렬왕후에게 말씀드리고 궁을 떠나 여승이 되어 자수원(慈壽院)에서 지냈다.
5 세자의 후손들
또한 소현세자의 세 아들이 제주도로 유배되어 장남과 차남이 풍토병에 걸려 사망한 후 삼남 경안군이 제주에 있을 때 효종이 왕이 된 후 제주에서 강화도로 유배지를 옮겨주었다
이에 세자를 생각하는 굴씨는 어느 날 조대비를 찾아가 문안을 드리며
그의 청을 드렸다
“대비마마 그간 강녕하신지요”?
“오 아니 그간 잘 있었느냐 ?”
”늘 무슨 일로 이렇게 나를 찾아보러 왔는가?.
“예 긴히 말씀드릴 일이 있어 이렇게 염치불구하고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말해 보거라 타국에 와서 고생하는데 무슨 청이든 내 다 들어 줄 것이니”.
굴씨는 대비의 말씀에 고마움을 느끼며 이번에 강화도로 유배지를 옮긴 경안군을 소현세자와의 옛정을 생각하여 귀양지로 가서 그 수발을 해주고 싶은데 임금님께서 윤허하실지 몰라 대비마마의 협조를 구한다고 청을 넣었다.
조대비는 상감께 말씀을 드려 윤허가 나면 연락해 줄 것이니 나가서 기다리고 있으라 했다.
며칠 후 조 대비께서는 상감께서 쾌히 윤허 하셨다고 전언이 와서 굴씨녀는 궁에서 보낸 무수리와 함께 경안군 수발에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한 후 강화도로 가기 위해 마포나루에서 강화도로 가는 배에 올랐다.
황포 돛을 높이 단 배를 타고 강화도로 가는 물길을 따라가는 주변에는 푸르른 산과 들은 그리운 고향의 산천 같은 느낌을 안으며 먼 고향 명나라 소주를 그리노라니 여태까지 못 가본 고향 오래전에 살던 고향이 그립기만 하였다.
귀양지 강화에 도착하여 경안군의 배소를 찾아가 그의 수발을 거들었던 그 녀 그리고 그 아들 임창군을 돌보며 소현세자와의 정을 되새기며 살아가던 굴씨녀
그 후 효종 임금이 경안군의 귀양을 풀어준 후 경안군이 세상 풍파를 많이 겪어 그때 받은 충격으로 22살(1665년)로 요절할 때까지도 시시때때로 그를 보살피며 살아왔고 그의 사후에는 향리에서 임창군을 돌보며 돌아가신 세자를 그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6 북벌 계획
인조 사후 봉림대군이 등극한 후에도 그녀가 바라는 명나라 부흥에 대한 집념은 사라지지 않았고 또한 효종 (봉림대군 )의 병자호란의 굴욕과 국치(國恥)를 앙갚음하기 위한 청국응징 북벌정책은 더욱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청으로부터 받았던 굴욕과 수모를 털어내기 위한 한풀이를 결심한 효종과 조선 조정을 도와서 성공적인 북벌 단행을 위하여 피나는 협조를 아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명나라 궁중 법도 등을 조선에 접목하여 조선 궁중의 모든 법도 및 예절 정립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꿈에서도 잊지 못할 고대하던 북벌 !
그리운 조국 명나라의 광복을 꿈에서도 놓지 않았던 그녀
어느 날 궁중에서 대전 상궁 엄 상궁이 굴씨녀의 처소에 찾아왔다
자리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상감마마께서 굴씨녀를 부르신다는 전갈을 받고 급히 서둘러 궁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효종임금은 오랜만에 만나는 굴씨녀가 큰절을 올리자 효종은 좌우를 물리치고 굴씨녀와 단둘이만 남게 되자
”그간 잘 지내셨나요?
타국 타향에서 너무 적조하신 것은 아닌지 무엇이나 불편한 것 있으면 기탄없이 알려 주세요“.
“그리고 참 이번에 짐이 청나라로부터 받은 병자년의 한을 씻기 위하여 청나라를 응징하기로 작정하고 안팎으로 큰 준비를 하는 중이니 굴씨녀께서는 이번 준비에 필요하고 알아 두어야 할 청나라 기밀들을 하나하나 다 짐에게 말씀해주시면 내 요긴하게 활용할 것이니........”
“예 감사니다
지난번에는 경안군 문제를 잘 도와주셔서 감사드리옵고 말씀하신 문제 말고도 상감마마를 도와드릴 일들이 있으면 무엇이던지 도와 올리겠습니다”.
이리하여 굴씨녀는 북벌에 소용되는 모든 정보를 효종 임금께 말씀드렸고 한편 효종은 그 후 북벌을 위해 그리고 그 성공을 위해 내치에는 우암 송시열 외치와 국방문제는 이완 대장을 등용하여 그 계획이 착착 진행되었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도 뿌듯하고 뭉클함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굴씨녀는 청나라의 상투 트는 법 등을 우리나라 풍습에 접속시켰고 궁중 자수 등을 전수하여 궁중 예복 제작에도 많은 협조를 하였다.
그는 또한 비파 타기를 좋아하여 궁중 음악에 영향도 끼쳤을 뿐 아니라 날아다니는 새들과 대화를 하여 신비스러움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그의 뜻대로 북벌은 한창 신나게 진행되어 가는데............
7 송광사 불상
경안군이 귀양에서 풀리고 한가로이 향리에 묻혀 살면서도 부인 허씨는 시아버지 소현세자 이후에 불어닥친 이 집안에 모든 일이 불안하고 예측을 불허하는 가운데 그리고 경안군의 수복 강령과 앞날에의 무사안일을 꾀하자는 뜻에서 관세음보살상을 조성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시선이 또 무슨 일들을 꾸며내서 괴롭힐지 몰라 한참을 망설인 끝에 굴씨녀를 불러서 상의하게 되었다
집안의 대소사를 의논할 사람조차 거의 다 사라져가고 대화할 사람조차 손가락으로 꼽기 어려운 처지에 떠오른 사람이 굴씨녀였다.
굴씨녀 그래 그분과 상의하자 그리고 또한 사람 시어머니 강빈의 심복 궁녀 노예성
궁녀 노혜성은 강빈이 사약을 받고 죽기 전 자기가 죽으면 고아가 될 3형제를 자기 사후에 부탁받았었으나 귀양지에도 따라가 수발도 못 들어준 처지였고 경안군이 귀양이 풀려 사가에 칩거하고 있을 때 자주 왕래하는 처지라
그 임무에 적임자들이었다.
허씨는 그 두 사람을 불러 불상 조각 및 송광사의 그 머나먼 오고 가는 일 모두를 두 사람에게 맡기게 되었다.
장렬왕후 조씨 궁에서 시녀로 있다가 세자 사후 인생의 무상함을 느껴 궁을 나와 자수원에서 불도를 닦으며 지내던 시절에 갈고 닦아왔던 불자의 길에 마지막 일을 경안군을 위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머나먼 남도길을 노예성과 함께 길을 떠나고 있다.
허씨 부인의 배웅을 받으며.............
노예성과 굴씨녀가 송광사에 가서 허씨 부인의 염원대로 관세음 보살상이 조각을 의뢰한 후 3년 뒤 경안군 내외의 강녕을 축원하는 불상이 송광사에 조성되었다.
관세음보살상 좌우에 그려진 해와 달 경복궁 근정전의 일월도처럼 주변에 그려진 그림 속에 왕과 왕후에게 절을 하며 엎드려 있는 사람들
허씨부인은 소현세자가 살아생전에 누리지 못한 한을 이 불화 속에 아롱진 뜻을 통해 세자와 그 자손들이 못 누린 여한을 풀어 드리려 함이었던가?
그리고 경안군과 후손들에게도 .......
불화는 말이 없고 세월은 흘러갔어도 경안군 부인 허씨의 바램은 헛되지 않았던 것인가?
굴씨녀의 바램도...........
그 관음전 네 기둥에는 관음보살의 무한함을 칭송하는 주련이 걸려있어 허씨 부인의 숨은 뜻을 살며시 나타내고 있는 듯 하여라.
충분한 신통력 갖추셨으니 구족신통력 (具足神通力)
지혜와 방편을 널리 닦아서 광수지방편 (廣修地方便)
온 누리 모든 국토에서 시방제국토 (十方諸國土)
현신하지 않는 곳이 없으리 무찰불현신 (無札不現身)
8 서쪽에 붉은 무덤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통일로 주변에서 필립핀 참전비를 지나면 청 넘어 골 소현세자 종친회 땅에 실전되었다가 다시 찾은 무덤 하나
그 무덤이 굴씨녀의 무덤이다.
그녀가 세자의 종중 땅에 묻힌 사연을 추리해 보노라면 궁금증이 풀린다.
경안군을 아끼고 사랑했던 굴씨녀
효종의 북벌을 위해 일구월심 바라던 조국의 부흥은 요원한데 그러나 세월은 그녀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효종 (봉림대군 )께서 계획하시던 북벌을 보기도 전에 70세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한 굴씨녀는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아래와 같은 유언을 남기고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경안군 가족들과 허씨 부인 그리고 기별을 받고 달려온 궁중의 상궁들과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고요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기 전 그녀는 허씨 부인의 손을 잡으며 마지막 부탁을 했다.
“내 죽거들랑 조선 임금님의 군대가 청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모습을 볼 수 있게끔 명나라 가는 길목인 서울 서쪽 근교에 꼭 묻어 주십시오 .”
그녀가 죽기 전까지 아끼던 비파 하나 그녀의 일생을 달래주고 울려주던 비파가 오늘따라 구슬프게 스르렁 거리며 스스로 울리고 있었다.
유언에 따라 굴씨녀는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 대자산 자락 “청 넘어 골 ”에 묻히게 되었다.
서울 서쪽 근교인 대자동 산 자락에.....
소현세자와 굴씨녀 !
과연 그 두 사람은 어떤 관계였을까 ?
소현세자 사후 굴씨가 숨을 거둘 때까지 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을 그리도 지극정성 보필한 정성.
하물며 유배지까지도 따라다니며 보살펴 주었던 애틋한 정.
살아생전 세자를 흠모했을지도 모르는 그 마음에 아롱진 정.
끝내 그 말 한마디 못 건네고 사별한 세자와의 각별했던 마음.
오늘 그녀가 누워 있는 이곳은 소현세자의 종중 땅이고 보면 소현세자와 경안군 그리고 그의 아들 임창군 그분들과의 인연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더욱이 주변에는 경안군 그리고 두 아들 임창군 임성군 또한 손자 밀풍군이 그 자리를 함께하고 있으니 이 우연은 우연이 아니리라.
중국으로 가는 서도에 붉은 무덤
일편단심 조국 명나라 부흥을 꿈꾸며 조선의 북벌을 도왔던 굴씨녀의 묘
생전에 품었던 그 원대한 꿈을 이룰 때까지는 무덤에 풀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유언처럼 붉디붉은 무덤
한 많은 꿈이 서린 그 묘역에서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
고국의 부흥과 그리운 임을 일찍 보낸 한 때문에 무덤에 풀이 안 났더란 말인가?
실전(失傳)되어 돌볼 수 없었던 굴씨녀의 묘
일편단심 붉은 마음 그래서 더 붉게 보이는지도 모르리라
이제 다시 찾은 그녀의 묘
생전에 그리도 고대하던 일편단심의 꿈은 저승에서나마 이루어졌을까?
이름 모를 꽃들만 배시시 웃으며 피어있는 산자락에서 나그네 홀로 갈길 잊은 듯이 한 동안을 그렇게 서성이며 가신 임을 그려 보고 있었다.
바람결에 스치는 스란치마 자락인 양
싱그러운 잎새들은 곱기도 하다만
꽃다운 화용월태(花容月態) 그 모습 자취 없고
찾는 발길 드문드문 한적한 언덕에는
들꽃만 웃음으로 나그네 반기는데
일편단심(一片丹心) 붉은 뜻은 어디에 묻었던고
외로운 산기슭에 들리는 바람 소리
임의 넋 달래주는 비파성(琵琶聲) 그 소릴까
풍문에 들려오는 그 후에 세상 소식
한 잔 술 올리면서 명명백백 전하오니
임이여 붉은 마음 베개로나 삼으시고
서쪽에 흐르는 향기 세세년년(歲歲年年) 그리소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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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을 읽고 제가 몰랐던 역사적인 일에 대해 잘 알게 되었습니다.
두봉 선생님의 필력에 매료되어 단숨에 읽었습니다.
국장님 대단하십니다
잘읽었습니다 마치 소설을 읽는것 같습니다.
더욱더 분발하시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