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부터 술을 좋아하였고 술로 인해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세종은 안맹담의 술 친구들을 불러 안맹담이 누구와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지 물었는데, 이에 술 친구들이 겁을 먹고 안맹담과 술을 마시지 않았다.[5]
불법(佛法)을 좋아하여 자신의 집에 중 10여명을 데려다놓고 밥을 먹였다. 또 중의 옷을 입고 불경을 읽기도 하였으며, 살생을 싫어하고 양잠도 하지 않았다.[6]
첫째 아들인 안여달(安如獺)과 셋째 아들인 안상계(安桑鷄)의 이름은 이들의 외조부인 세종이 직접 지어주었는데, 여달과 상계는 세종이 지어준 어릴적 이름을 어른이 되어서도 개명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다.
세종은 정의공주에게 한강의 저자도(楮子島)와 낙천정(樂天停)을 하사하였는데, 공주는 이후 막내 아들인 안빈세(安貧世)에게 물려주었다. 안빈세가 그 위에 정자를 짓고 화공에게 명하여 그림을 그리게 하니, 한동안 이에 대해 시를 읊은 이가 매우 많았으며, 정인지의 서문이 있다.[7][8]
안맹담과 정의공주 부부는 4남 2녀를 낳았다. 정인지, 한확, 효령대군 등과 이중, 삼중의 혼인관계를 맺었다.
정인지의 아들과 결혼한 장녀 안씨만이 안맹담 생전에 사망하였고[11], 둘째 아들인 안온천은 안맹담의 상 중에 사망하였다. 셋째 아들인 안상계는 세조의 계유정난에 동조하지 않고 저자도에 은거하였다가 예종 대에 복관하였으며, 넷째 아들인 안빈세는 정의공주가 병들자 세조가 특명을 내려 벼슬을 7계급 올려 동부승지에 임명하였다.[12]
↑《안맹담 묘비명(安孟聃 墓碑銘)》, 정인지 지음내 아들이 일찍이 공(안맹담)의 큰사위가 되었는데, 부부가 모두 일찍 죽고 말았다.병자년(丙子年, 1456년)에 며느리를 곡하고, 정축년(丁丑年, 1457년)에 아들을 곡하였는데 그 후 5년 만에 또 공을 곡하게 되었으니, 슬픔을 견딜 수 있겠는가?(중략)공의 장녀는 절충 장군(折衝將軍) 용양위 대호군(龍驤衛大護軍)ㆍ세자 좌익위(世子左翊衛) 정광조(鄭光祖)에게 시집갔으니, 정광조는 곧 나의 적장자(嫡長子)인데 부부가 모두 일찍 죽었다.
↑ 《세조실록》 40권, 세조 12년(1466년 명 성화(成化) 2년) 10월 24일 (임술)안빈세 · 최한경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후원에서 군사 훈련을 구경하다안빈세(安貧世)를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최한경(崔漢卿)을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안빈세는 정의공주(貞懿公主)의 아들로서 여러 아들 중에서 글을 조금 알고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공주의 병이 위급하니, 7계급을 뛰어 올려 제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