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향토사]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 김연숙 -디지털 시대에 그리운 열매 아날로그를 찾아서-
12월, 겨울의 한 가운데 따스한 햇살이 터진 날이다.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을 찾아 송림산에 올랐다. 2만 평 송현근린 공원길, 솔빛마을 아파트를 끼고 솔 향기 내음 짙은 소나무 우거진 산길을 걸어서 올라왔다. 차디찬 바람을 견디는 한 겨울 그곳의 정원이 펼쳐진다.
수도국산(송림산) 비탈길 너머 현대제철, 동부제강이 눈에 들어온다. 동구엔 유난히 공장이 많았다. 예전에는 50만 명이라는 인구가 살아온 터전이다, 공장 근처에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시장에서 장사하는 상인도 많았다. 내 친정아버지는 인천제철 초창기부터 근무하셨고, 시아버지는 배다리 중앙시장에서 3대째 이불을 판매하셨다. 그 시절 송현동 꼭대기 돌산 근처 동네를 똥고개라 불렀다. 그곳에 살았던 예쁜 명화 언니는 밤에 잠이 든 사이에 문틈으로 들어 온 연탄가스를 마시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그 당시 며칠에 한 번씩은 연탄가스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을 자주 목격했다. 수십 년 세월 송림산 비탈진 소나무 숲을 끼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로 붐볐고 터전을 쉼없이 가꾸었다.
필자는 지난 십이년 전, 취재를 하러 배다리 지성소아과 (고) 김관철박사를 만났다. 그날 수도국산 마을에 왕진 다녔던 한국전쟁 후의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셨다. 한국전쟁 6.25 발발한 후라 예방주사 맞으려고 해도 돈이 없어 병원에 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티푸스 전염병이 돌 때 수도국산 동네 골목길에 들어서면 사람을 거적때기로 둘둘 말아서 문밖에 내놓곤 했다. 수도국산 마을 어둠이 휩싸인 골목 안에 통곡 소리 끊이지 않았다. 세상을 떠난 어른도 더러 있었지만 하늘나라로 보낸 수많은 아이도 힘없이 쓰러져 가는 모습이 눈에 띠였다고 했다. 예방주사 시기를 놓쳐서 목숨을 잃은 그들을 살리기 위해 시간이 날 때마다 수도국산 마을 곳곳을 찾아다녔다. 김 박사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 예방주사 약을 들고 저녁마다 수도국산 높은 언덕길을 오르내렸던 것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김관철 박사는 사랑의 인술을 펼쳤다. 필자는 김 박사를 만난 후 기사를 쓸 때 “동구를 빛낸 슈바이처”라는 이름을 달아드렸다.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은 지난 1960~70년대 달동네 서민들의 생활을 테마로 박물관을 만들었다. 지난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은 일본인에게 상권을 박탈당하면서 송림산으로 몰려들었다. 그 당시 수도국산에서 가족이 형성되었고 언덕 위에 펼쳐진 송현동, 송림동 마을이었다. 물이 귀한 가정은 한때 수돗물을 돈 주고 사서 먹었다. 물을 지게에 지고 높은 언덕길를 오르내렸다. 그 시절을 어둠이 짙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하숙생 구함’이란 글씨가 보이고 ‘꺼진 불도 다시 보자’ 라는 표어도 정겹게 보인다. 재래식 좁은 부엌엔 연탄 아궁이가 있다. 아궁이 안에는 다 태운 하얀 연탄재가 남아 있다. 순간 안도현 시인의 “연탄재 함부로 밟지 마라” 힘들게 살아가는 그들의 사랑을 위한 시가 떠올랐다. 꼬마전구 달아 놓은 공중화장실, 신문지로 도배한 방, 비좁은 단칸방에 모여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진지하다. 한옥 마루 대들보에 제비집이 눈에 들어왔다. 추억의 양은 도시락, 냄비, 오래된 나무 주걱, 불피우는 아궁이에 얹어있는 무쇠솥 고소한 누룽지를 생각하니 행복한 미소가 번진다. 수많은 옛이야기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은 현재 기성세대들에게 향수를 느끼게 해주고 세대들 간에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지난 시절 인천 최초 상수도 시설 수도국산(송림산)에 1908~10년 노량진과 인천 간 32.64킬로미터 수도관을 묻었다. 배수지 시설로 거의 물이 끊기는 경우가 적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수돗물이 풍족한 송현동과 송림동 특히 동구 주민들 간에 특선 물 지역에 살아서 수돗물이 끊긴 날이 거의 없었다는 말들이 간간히 오고 갔다. 아마도 물이 귀한 그 시절, 수많은 노무자 공장을 따라 수돗물 따라 수도국산으로 산업화 일자리를 찾아 모둠살이가 시작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근린공원 안 정문을 통과해 올라가면 인천 문화재 23호로 지정된 배수지 제수변실을 만난다. 1912년 유맹의 “만윤백량”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백 번이 흐르면 만 번이 빛난다”라는 뜻이다. 송현 배수지 건물로 제수변실 안으로 내려가는 화강석으로 된 장대석 23계단과 철제 정문이 있다. 배수지는 튼튼하다고 했다. 구민들이 먹고 쓰는 생활용수, 수돗물을 깨끗한 물로 마시기 위해 배수지 청소도 깨끗이 해 오고 있다. 오랜 세월을 보낸 수도국산 역사만큼 수돗물 관리도 철저히 해 오고있는 것이다. 동구 송현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시대 유적건조물 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됐다.
특히 수도국산 산을 끼고 주변 송현동과 송림동은 특히 무속인이 많이 살았다. 수도국산 꼭대기에 사는 이북 할머니는 둥근 밥상에 쌀 한 보시기 쌓아놓고 쌀 점을 봐주었다. 이웃에 살던 황주여인숙 아줌마는 힘이 들 때 무속인 할머니 찾아가서 이야기 듣고 열심히 살아왔더니 부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살기 힘겹던 그 시절 종이봉투 만들기 위해 풀칠해 붙였고, 성냥갑을 조립했다.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 온 가족이 함께 모여서 일을 했다.
아날로그 시대 역사의 뒤안길을 지나 디지털 시대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지금, 내 부모님이 사셨던 수도국산 달동네 이야기 풀어 놓는 날에는 아버지, 어머니가 무척 그리워진다. 초석을 다져온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에 많은 인파가 바닷물처럼 밀려 들어와 과거 아날로그 시대의 그리운 추억을 되새기고, 이 공간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고 튼실한 미래로 나아가는 동구로 거듭 태어나길 기원해 본다.(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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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토리 하루이코 <초역 니체의 말2>(박미정 옮김, 삼호미디어, 2019, p4~7)중에서
'삶의 창조'란 매일 반복되는 삶의 방식을 자신의 의지로 하루하루 새롭게 만들어 나감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대에는 굳이 만들어 나가지 않아도 하루는 자동 적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듯하다. 매일 같은 길을 걸으며, 같은 장소에 가고, 같은 것을 하고, 늘 하던 일을 적당히 해내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고, 위험한 일에는 몸을 사리고, 능숙하게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면서 안정되고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만족스러운 인생이라 여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할까? 그처럼 완벽하게 보호되고 만족을 가져다주는 인생이 과연 현실에 존재할까?(...)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의 하루하루와 삶의 면면을, 꿈을 향해 자신의 결단으로 능동적으로 창조해 나가야만 한다. 즉 자신을 부단히 만들어가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살아가는 것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삶에서 맞닥트리는 고난은 재해도 벌거아니다. 고통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에게 반드시 수반되는 것이다며 니체는 그 필연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고난을 수용하고 어떻게든 극복했을 때 인간은 변화한다. 낡은 자신으로부터 '탈피'한다.
그럼으로써 그전과는 삶의 풍경이 달라진다.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며, 감회도 달라진다.(...)무언가를 이루거나 창조해 내는 경우에는 고난과 장애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 고난과 장애를 뛰어넘지 않으면 무엇도 만들어 낼 수 없다. 고난 없이 천재가 된 이는 지금껏 아무도 없었다. 고난은 사람을 성장시키고 살아갈 용기를 준다. 결론적으로 고난은 강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이의 '생성의 나날'에 없어서는 안 될 은총과 같은 것이다. '높은 것에 대한 의지'란 인간이 가진 능력의 극한까지 도달하려는 의지를 말한다. 여기에는 타인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닌 자신만을 위한 고독한 고결함, 범상치 않은 적극성이 담겨 있다. 만약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세속적 탐욕에 함몰되어 버리면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은 탐욕에 힘없이 점령당하고, 높이 있는 것에 대한 의지는 멀리서 차갑게 빛나는 별처럼 요원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終)
============================================================================ [문화칼럼]
달구경이나 하며 살아야 할까 / 김철성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는 제가 제게 묻고 있는 물음 중 하나입니다. 나어리긴 해도 올해가 회갑이고, 내년 말이면 정년퇴직이니, 퇴직 후 남은 생에 대한 방향을 숙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행복론>에서 “우리의 행복에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며, 건강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를 유지하게 해주는 수단, 즉 아무 걱정 없이 마음 편히 살아가는 것이다. 명예, 영화, 지위, 명성은 그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긴 하지만, 방금 말한 본질적인 자산과 비교할 수 없으며, 그것을 대체하지도 못한다.”며 행복의 제일 조건으로 건강을 꼽았습니다. 그렇다면 건강만 유지한다면 ‘행복할까요’ 그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 같습니다.
최근 읽고 있는 남회근의 <참동계 강의, 上>에, 행복에 대한 구체적 방법이 담긴 문장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저는 늘 ‘인생기견월당두人生幾見月當頭‘라는 옛 시를 읊곤 합니다. 인생에서 몇 번이나 보름달을 보겠느냐는 말이지요. 일 년은 열두 달이니 열두 번 보름달이 뜹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진정 몇 번이나 보름달을 볼까요? 잠자고 있어서 못 볼 수 있고, 비가 오고 구름이 끼어도 볼 수 없습니다. 예전에 눈 덮인 산의 정상에서 달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붉은 색 외투를 걸치고 속에는 맨살이었습니다. 십이월 한겨울에 아미산 정상에 서서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지요. 산은 온통 눈과 얼음으로 뒤덮였는데 달이 떠오르니 그야말로 유리세계였습니다. 정말 잠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몇 사람이나 그런 맛을 즐겼을까요? 참으로 좋았습니다. 이런 것을 청복淸福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당시 이런 복을 누렸으니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달구경도 행복한 삶의 자양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글을 접하고부터는 잠자기 전 20분 옥상에 올라가 달을 보고 내려옵니다. 제 우거는 광주광역시 남구 월산동月山洞에 있는데, 그 월산月山이라는 지명이 ’달을 구경하고 좋은 산’이라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그랬는데 자주 달을 보니까 이제는 달 명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달을 보고 있으면 제안에 켜켜이 쌓인 옹졸한 속기가 시원하게 씻기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마치 성경의 “씻어 깨끗함을 받는 이”가 된 듯합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에는 달과 관련된 명칭이나 설화 등이 많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특히 남도 지방 담양군 금산리 무월마을은, 마을 동쪽 망월봉에서 달이 차오르면 마치 ‘신선이 달을 어루만지는’ 것 같대서 무월撫月이라는 지명을 얻었습니다. 장성군 황룡리에 있는 요월정邀月亭은, 오직 달을 위한 ‘달맞이 정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왜 우리 선조들을 달을 좋아했을까요. 여러 인문학적 의미가 있긴 하겠지만 필자 생각에 ‘중년의 위로’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나온 삶에 대한 회환悔恨과 얼마 남지 않는 삶에 대한 조급증의 처방전이 달인 듯싶습니다. 매월 초사흘마다 서남방에서 떠오르는 달은, 중년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주며, 삶이 끝났다고 끝난 게 아니라 늘 부활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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