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숙공<원충갑>장군의 묘를 보고...........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38호.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간현3리 산25
○한 때는 한 문중의 시조였던 묘라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합니다.
※忠肅公<元沖甲>장군은 忠肅公系의 시조였습니다. 原城伯系의 시조<元克猷>의 후손임이 밝혀지자 바로 原城伯系의 산하로 들어가 원성백계의 한 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충숙공<원충갑>장군의 묘는 원성백계에서 관리해야 할 것입니다.
※충숙공<원충갑>장군은 고려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한 명장입니다. 그래서 원주시에서 이 묘를 지방 문화재로 지정하고 축제행사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원주에서는 평사공계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원주 시장이 평장사공계의 후손이 당선되므로서 재력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하늘을 찌를 듯한 위세입니다. 그리고 시중공계도 버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조를 공격하고 <가승>과 <구보>를 가지고 서로 논쟁이 생기는 이야기는 서로 삼가고 삼계가 힘을 합쳐 이 충숙공<원충갑>장군의 묘도 원릉군<원균>장군 묘처럼 웅장하게 묘역을 정화하였으면 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원릉군<원균>장군으로 인하여 실추된 원주원씨의 이미지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忠肅公 < 元沖甲 >
○<원충갑>[元冲甲, 고종 37년(1250)∼충숙왕 8년(1321)], 시호는 충숙(忠肅), 본관은 원주(原州), 향공진사로 원주의 별초(別抄)에 있을 때인 충렬왕 17년(1291) 합단적(哈丹賊)이 침입하여 원주 치악성을 포위하자 전후 10차에 걸쳐 적을 크게 무찔러 후세에까지 무명(武名)을 남겼다.
○<원충갑>의 이러한 공로로 원주를 익흥도호부(益興都護部)로, 다시 1308년에 원주목으로 승격되었고, 원주에 부과되던 각종 부역과 잡공이 3년간 면제되었다.
○<원충갑>은 중랑장·장군 등 여러 벼슬을 거쳐 삼사우윤에 올랐다. 당시 간신 <오기(吳祈)>가 충렬왕 부자를 이간하고 어진 신하를 모해하는 바가 많았기 때문에 원나라 사신인 단사관(斷事官) <티므르부카(帖木兒不花)>에게 그의 처벌을 호소하였다. 1303년 <홍자번(洪子藩)>과 함께 <오기>를 잡아 원나라에 압송하였으며, 충선왕 때 응양군상호군이 되었다. 합단적을 물리친 공으로 충숙왕 6년(1319) 추성분용정란광국공신이 되었다.
○묘는 배위 정경부인 익흥(원주)이씨와 합장묘이다. <원충갑>의 따님이 원주이씨 중시조인 부령공 <이희백(李希伯)>의 배위이므로 원주원씨와 원주이씨와의 혼인관계를 알 수가 있고, <원충갑>의 묘역과 <이희백>의 묘역이 같은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현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치악산 영원산성 안에 ‘원충갑사’를 세워 제사를 모시다가 현종 10년(1669) 사당을 세워 원충갑을 주향으로 하고, <김제갑(金悌甲)>과 <원호(元豪)>를 배향하였으며, 현종 11년(1670) 윤 2월 7일 ‘충렬사’로 사액되었다.
○충렬사는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2009년 5월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 402-3에 복원되었다. 그리고 사액현판은 그동안 충북 괴산 <김제갑> 목사의 후손인 안동김씨 제학공파 문숙공 15대손 <김성수>씨가 보관하고 있다가 원주시의 충렬사 현판 반환 교섭 결과, 2009년 4월 현판을 원주시에 기증하기로 결정하였다. 원주시는 사액현판 원본이 훼손이 심하여 보전 처리한 뒤 특수재질의 보관함을 만들어 원주시립박물관에 영구 보관하기로 하였다.
<합단(哈丹)1)>의 침입
○고려 충렬왕 16년(1290) 원나라 반군 <내안(乃顔)>의 부장이었던 <합단(哈丹)>이 만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원나라 장수 <내만대(乃蠻帶)>에게 패하자 오히려 방향을 돌려 고려를 침입한 사건이다.
○고려는 중군만호 <정수기(鄭守琪)>, 좌군만호 <박지량>, 우군만호 <김흔(金忻)>으로 하여금 각각 금기산동ㆍ이천현계ㆍ권가현계를 지키도록 하는 한편, 원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합단의 무리는 원나라의 쌍성을 점령하고 고려의 등주(안변)를 함락하였으며, 이듬해 철령을 넘어 교주도 양근을 점령하였다. 이에 왕은 강화로 피란하는 한편 원주별초 소속의 <원충갑(元沖甲)>이 원주에 들어온 적을 물리쳤다. 원나라도 1만의 군사를 보내주었고, 원주에서 패한 합단의 잔당은 계속 남하하여, 주력은 충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들은 다시 연기에 집결하였다가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의 급습으로 대패하였다. 그들의 기병부대는 다시 전열을 정비하였으나 <한희유(韓希愈)>의 추격으로 <합단>과 아들 <노적(老的)>은 2,000여 기를 이끌고 북쪽으로 도망하였다. 이로써 1년 6개월 동안 <합단>의 침입은 끝나고 9월 왕은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원주 영원산성 대첩제 거행
충숙공 <원충갑(元沖甲)>장군 승전 705주년을 맞아
1996년 3월 10일 원주시 판부면 금대리에서 원주 영원산성 대첩제위원회(위원장 <박영진>) 주관으로 제1회 원주 영원산성 대첩제가 거행되었다.
고려 충렬왕 17년(서기1291년) 합단적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둔 용장 <원충갑> 장군의 승정 705주년을 맞아 거행된 이 행사에는 원주시장을 비롯하여 각급기관 단체장, 문화계, 언론계 그리고 청소년 학생과 원주시민 1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고도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영원산성은 통일신라(658년) 때에 석성(石城)으로 축조된 약 2㎞, 높이 3m, 폭이 2m이고 치악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며 예로부터 원주를 지키는 요충지였다.
고려시대에는 명장 충숙공(忠肅公) <원충갑(元沖甲)>장군이 원나라 합단적을 크게 격파하여 국란타개의 원동적 역할을 하였으며 임진왜란(1592) 당시에는 원주목사 <김재갑>이 이곳에서 왜적과 혈전을 거듭하다 장렬히 순절하고 그 부인과 아들 김시백도 함께 순직하였으니 이곳이야 말로 만고삼강(萬古三綱) 충효열(忠孝烈)의 정신과 애국 충전의 숨결이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인 것이다.
위원회에서는 대첩제를 통한 영원산성 복원과 함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조선조 헌종때(1669년) 에 건립하였다가 고종 8년(1871년)에 대원군 시책에 의하여 철거된 충렬사(忠烈祠)를 복원하여 충숙공 <원충갑>장군과 충장공 <원호(元豪)>장군, 원주 목사 <김제갑>을 다시 모시고 원주시민의 충효 및 고향 사랑의 정신을 함양하며 이 곳을 중심으로 청소년의 심신 수련 활동과 우리의 얼 심기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을 다짐하였다.
※출처 - ≪원주원씨종보≫ 제4호(1996.06.29). 1면.
<출처>
원종석 지음, ≪原州元氏 新始祖論≫에서 퍼왔습니다.
2010년 9월 30일
연구자 비오 글올림
첫댓글 원주원씨에는 원릉군과 같이 패전만 하는 장군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충갑>장군과 같이 승전하여 나라를 구한 장수도 있다는 것을 널리 홍보하여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