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고 나쁨을 구별 말고 무욕과 자비심으로 새해를 맞이 하자
중생은 누구나 분별심을 갖고 있습니다. 분별심은 좋고 싫음, 옳고 그름 따위를 판단하는 마음입니다. 중생은 이로 인해 편견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분별심을 버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활은 그 자체가 ‘분별’의 연속입니다. ‘맛있다’ ‘맛없다’, ‘아름답다’ ‘추하다’, ‘잘 산다’ ‘못 산다’ 등 모든 일을 분별합니다.
나라 경제사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보통 세모(歲暮)를 전후해서 거리는 분위기가 들뜨고, 그만큼 경기가 좋아지기 마련이지만 최근 경기는 바닥모를 침체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경기가 침체됐다’거나 ‘경기가 좋다’는 말은 상대적인 표현입니다. 어떤 기준점을 놓고 현재의 경제상황을 비교했기 때문에 ‘경기가 침체됐다’거나 ‘경기가 좋다’는 표현을 하게 되는 겁니다.
나이 지긋한 세대들은 1960~70년대의 경제 발전기를 잘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춘궁기에는 하루 세끼 때우기도 어려웠고, 텔레비전은 감히 상상도 못했고, 라디오도 드물던 시절이었습니다. 양말이 없어 맨발로 뛰어다녔고, 설빔으로 고무신이라도 받으면 닳을까봐 머리맡에 고이 모셔놓기도 했습니다. 물론 궁핍했던 시절입니다. 하지만 이런 시절을 살았던 세대는 조금 풍족해진 1970년대에 들어서도 몽땅 연필을 사용했고, 구멍 난 양말을 꿰매어 신었습니다. 밥그릇에 밥한 톨이라도 남기면 아이들에게 호통을 쳤고, 형과 언니의 옷을 동생이 물려 입는 게 예삿일이었습니다.
이 시절의 생활상과 오늘날 생활상을 비교한다면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납니다. 이런 생각을 한다면 ‘경제가 어렵다’고 쉽게 말하기 어려울 겁니다. 물론 풍족하게 사는 것이 나쁘다거나, 풍족함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풍족함을 좇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하고자 함입니다.
중생은 부처님의 참된 법이 허공과 같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이 분별심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음을 상기하고, 잠시라도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범부는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고 그것에 따라 일어나는 법을 따르며 갖가지 모양을 보고 나와 내 것이라는 그릇된 견해에 떨어져 모든 존재에 집착하고, 무명(無明)의 어둠에 들어간다. 그래서 탐심을 일으키고 성냄과 어리석은 업을 짓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보살은 바른 지혜에 의해 사물의 모양이나 이름을 보고 ‘있다’고 하지도 않고, 모양이나 이름이 없는 데서도 ‘없다’고 하지 않으니, 그것은 있고 없는 견해를 떠났기 때문이다. 모양과 이름을 보지 않음은 바른 지혜이므로 나는 그것을 진여(眞如)라 한다”고 했습니다. 《능가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흐름과 변화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해서는 안 됩니다. 경제상황이 나빠지는 것은 누군가가 원인이 되 는 업(業)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연한 과보를 상대적 잣대로 ‘좋다’, ‘나쁘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허공과 같은 눈으로 허공과 같은 무욕(無慾)의 마음, 자비의 마음을 내어야 합니다.
《증일아함경》을 보면 “대지는 깨끗한 것도 받아들이고, 더러운 똥과 오줌도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깨끗하다 더럽다는 분별이 없다. 수행하는 사람도 마음을 대지와 같이 해야 한다. 나쁜 것을 받거나 좋은 것을 받더라도 조금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분별을 내지 말고 오직 자비로써 중생을 대해야 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기축년 새해, 모든 불자들이 분별심을 버리고, 오로지 보살이 어려운 중생을 보면 갖게 되는 자비로운 마음을 가득 펼치는 한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천태종 종의회 법제분과위원장 도원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