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회는 16세기 형성되었고, 청교도운동은 17세기에 전개되었다. 장로교회는 청교도운동에 가담하였고 그 운동력을 강화시킨 측면이 있다. 이 글은 청교도 운동의 역사 가운데에서 영국 장로교회의 청교도운동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다. 한편, 장로교회의 특성만을 가지고도 논할 것이 너무나 많지만 초신자들은 다음 내용 정도를 먼저 알면 좋을 것 같다.
1. 토마스 카트라이트와 초기 장로교제도
영국은 1534년 헨리 8세가 수장령(首長領, Act of Suprmacy)을 선포하여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결별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인 결별이었을 뿐 교회로부터의 단절은 아니었다. 영국국교회는 여전히 로마 가톨릭의 교리와 제도에 묶여 있었다. 헨리로부터 찰스 1세(Charles I, 통치 1625-1649)까지 “영국은 한 세기가 넘도록 정부와 교회가 분리되지 않은 문제로 영국국교회의 수구파와 청교도 개혁파” 간의 치열한 다툼을 지속하였다.
이 과정에서 여러 분파들이 생성되었다. 교회정치제도를 놓고 청교도들은 크게 온건파(Non Conformist)와 분리파(Separatist)로 나뉘었다. 온건파는 국교회 안에서 개혁을 시도하였고, 분리파는 국교회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고 보고 분리를 감행하였다. 온건파는 장로파와 독립파로, 분리파는 회중주의파와 침례파로 구분되었다. 따라서 영국의 청교도들은 온건파에서부터 분리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하였다.
장로교 정치체제를 창시한 한 사람을 꼽는다면 칼빈의 제자 테오도르 베자이다. 영국에서는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가 장로주의의 기초를 놓았다. 카트라이트 이전에는 감독제를 일정 부분 축소하는 개념의 장로제 실시가 권장되어 왔었다. 부처(Martin Bucer)는 20개의 교구마다 노회를 조직하고 부주교들을 세워 설교와 권징에 능률을 도모하자고 하였고, 낙스는 감독들을 제거하고, 관구를 나누어 1개를 10개로 만들자고 하였다. 런던에 있는 외국인들의 교회인 아 라스코에서는 “목사와 장로들의 회의에 있어서 장로교 제도를, 그리고 감독 방법(superintendency)에 있어서는 수정된 감독제(episcopacy)를 보여주고 있었다.”
낙스의 후계자 앤드류 멜빌은 한 단계 더 나아가서 감독제를 폐지하고 장로들의 회의인 치리법원, 노회, 대회에 권위를 부여하는 “비타협적이고 배타적인 장로제”를 제안하였다. 영국에서 카트라이트와 월터 트래버스, 존 필드 등과 같은 초기 장로주의자들은 멜빌의 견해를 옹호함에 따라 다소 급진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다. 카트라이트는 1569년 장로교 교회정치제도를 요청한 ‘치리문서’(The Book of Discipline)를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제출하였다가 거절을 당하고, 1570년 케임브리지의 레이디 마가렛 신학부 교수가 된 후에 사도행전을 강론하면서 본격적으로 장로주의를 설파하였다. 그의 강의는 대학의 젊은이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영국국교회의 감독제도는 국왕-대주교(Archbishop)-감독(Bishop) 체제로 감독이 교회들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감독은 일반 성직자들을 임명할 뿐만 아니라 교인들에 대한 치리권도 교회법정을 통해서 행사하였으므로 일반 성직자들은 절대적인 통제와 간섭으로 소신껏 목회하기가 어려웠다. 카트라이트는 대주교와 부주교와 같은 감독직을 없애고, 각각의 교회는 국가가 교회 자체적으로 선출된 목사와 장로들에 의해 운영하며, 목사들은 한 교회만 책임질 것을 주장하였다. 그 외에 사순절을 지키는 것과, 세례 받을 때 십자가 성호 긋는 것을 금하고, 주의 만찬을 받을 때 무릎 꿇는 일은 로마 가톨릭의 미신적 풍습의 잔재이므로 폐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장로교운동을 강력하게 제지하면서 정부의 탄압정책에 호응하던 존 위트기프트(John Whitgift, 1530-1604) 대주교는 토마스 카트라이트와 오랫동안 대립했다. 위트기프트의 주도로 카트라이트는 학교에서 축출당하고 제네바에서 1년간 머물렀다. 그리고 다시 고국에 돌아와서 ‘의회에 대한 권고’(Admonition to Parliament)를 저술한 장로주의 목사들- 토마스 윌콕스(Thomas Wilcox, 1549?-1608)와 존 필드(John Field, 1545?-1588)를 지지하였다. 이들 장로주의자들은 스코틀랜드 교회처럼 의회에 의해 장로교 제도로 바뀌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의회는 감독만의 특권인 성직자 안수제도를 없애고 회중이 목사를 선택하도록 하며, 치리제도를 정상적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교회에서 어떤 것도 하나님 말씀의 근거 없이는 이행될 수 없다고 호소하였다. 곧 이어 두 번째 ‘권고’가 나타났다. 이것은 카트라이트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작성인은 불분명하였다. 내용이 선동적이었으며 교회의 재조직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참고문헌>
Hans Küng, 『그리스도교』, 이종한 역 (서울: 분도출판사, 2002)
원종천, “영국 청교도 영성 발전 과정의 역사적 조명,” 「신학과 선교」2005년 9호 (양평: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출판부, 2005)
김홍기, “청교도주의운동, 그 역사적 재발견”, 「신학과 세계」2006년 여름호(56호) (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출판부, 2006)
피터 툰, 『청교도와 칼빈주의』, 양낙흥 역 (서울: CLC, 2009)
존 T. 맥 닐, 『칼빈주의 역사와 성격』, 정성구, 양낙흥 역 (서울: 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90)
조엘 비키, 랜들 페더슨 편저, 『청교도를 만나다』, 이상웅, 이한상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0)
A. F. Scott Pearson, Church and State: Political Aspects of Sixteenth Century Puritanism (London: Cambridge University, 1928), 17: 원종천, “영국 청교도 영성 발전 과정의 역사적 조명”
첫댓글 와? 잘 읽어 볼게요.
위 글을 보더라도 교회 역사라는 게 하루 아침에 영웅적인 인물이 나타나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구나 하고 느낄 것입니다. 오랜 세월과 인물과 시간을 통해서 만들어져 가는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우리는 약간 만의 활동과 역할을 담당할 뿐임을 새삼 느낍니다.
좋습니다. 한국 개혁주의 내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수동 순종을 가지고 논쟁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이는 개혁주의 안에도 몇 가지 스펙트럼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글은 회중교회가 아닌 장로교회의 청교도운동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실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기대가 됩니다. 수고하셨어요.
네. 감사합니다.
청교도에 대하여 잘 몰랐는데 조금씩 읽으며 배워나가겠습니다. 유익한 글로 인하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