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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부처의 나라 - 경주 남산 산행기
산행일 : 2014년 2월 11일 코스 : 틈수골 - 천룡사지 - 고위봉 - 이영재 - 금오산(남산) - 상선암 - 삼릉 - 주차장 산행시간 : 5시간
그리움이 길을 만드네
“위원장님 오늘 아침 갑자기 요통이 심해져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고 월요일에 다시 받을 계획입니다. 디스크 수술을 받은 적이 있어 불안하네요. 남산은 꼭 가고 싶은데 갈 수 있는 몸 상태가 될지 모르겠네요. 참석 못하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월요일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 이대규”
토요일 아침, 허리가 심하게 아파와 운영위원장께 문자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출발 직전에 알리기가 미안해 성급하게(?) 내 상황을 전하기로 한 것이다. 일어나기조차 버거울 정도로 고통스러운 통증이 불안감을 동반하여 나를 엄습해 온다. 하지만 허리보다 마음이 더 아려온다. 벼르고 별러 기회를 만들었던 경주 남산 산행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이 한의원에서 침, 부황, 사혈 치료를 받고 나니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하여 결국 산우회 회원들과 남산 산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간절한 그리움, 소망이 허리를 곧추세운 듯하다. 감모여재(感慕如在),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사랑하는 이가 나타나 보이고 소망이 이루어지는 법.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남산의 바위들을 사랑하는 눈, 간절히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바라보리라 다짐해 본다. 그로 인해 내 마음의 눈이 좀 더 맑아지길, 감추어진 존재들이 내게 가슴을 열어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길 기도한다.
설렘 때문일까, 신라의 닭들이 홰칠 준비를 하는 시간, 나는 뒤척이면서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 버려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아 오늘도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는가. 내가 오늘 걸어가야 할 길들을 생각하며 지도를 들추어보고, 신영훈의 ‘경주 남산’ 답사여행 책도 읽다가 정일근 시집이며 히라노 교코(平野杏子)의 책 ‘신라인과의 대화’를 집어 든다.
마음이 길을 만드네 / 그리움의 마음 없다면 / 누가 길을 만들고 / 그 길 지도 위에 새겨놓으리 / 보름달 뜨는 저녁 / 마음의 눈도 함께 떠 / 경주 남산 냉골 암봉 바윗길 따라 / 돌 속에 숨은 내 사랑 찾아가노라면 / 산이 사람들에게 풀어놓은 실타래 같은 길은 / 달빛 아니라도 환한 길 / 눈을 감고서도 찾아갈 수 있는 길 / 사랑아, 너는 어디에 숨어 나를 부르는지 / 마음이 앞서서 길을 만드네 / 그 길 따라 내가 가네. - 정일근 ‘길 - 경주 남산’
아침이면 경주 남산 상선암 마애대불 앞에 허물이나 벗어놓고 갈 수 있을까? 도솔천 끝까지 솟구치는 산을 볼 수 있을까? 아니 불무사(佛無寺)를 찾을 수 있을까? 내 속의 나를 볼 수 있을까? 머리를 잃고도 따뜻한 미소로 반기는, 손을 잃고도 푸른 깨달음의 손을 내미는 돌부처를 만날 수 있을까?
7:32 여산휴게소를 지나자 회덕 46km 이정표가 나타난다. 미륵이 하생한 듯, 계룡산 너머 하늘이 밝고 붉게 물들고 있다. 8:10 비룡분기점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증약터널을 지나 옥천 대구 방면으로 접어든다. 8:20 금강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한다.
석조불상 / 돌인데 / 살아서 / 코 귀 / 깨어진 손 // 소라같은 부처의 / 귀는 / 바다의 너그러운 / 미소를 듣고 / 깨진 코 / 갈라진 귀 / 깨진 가슴 / 돌인데 / 부처는 웃네. - 박이문 ‘열반’
남산에 가면서 박이문 교수의 시 ‘열반’과 경주 박물관에서 보았던 남산의 유물들을 떠올린다. 박물관 뜰에 세워둔 불상들은 한결같이 불두와 손이 잘려나간 모습들이었다. 코를 잃고도 그들은 웃고 있었다. 팔 없이도 남산의 부처들은 세상을 포용하고 있었다. 열반의 세계였다. 한국의 불상, 특히 경주 남산의 부처들에서는 고뇌하는 표정을 찾아 볼 수 없다. 서방정토와 극락세계를 희구하는 한국인들의 마음이 돌부처들에게 저토록 넉넉한 마음을 지니게 했으리라. 생의사미륵삼존불(삼화령 애기부처)의 미소 앞에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있으랴.
10:00 평사휴게소에서 두 번째 휴식을 취한 후 경주를 향해 내달린다. 10:17 서경주, 건천(乾川)을 지나는데 눈발이 길을 막는다. 대관령 동쪽 지역을 중심으로 대설, 폭설주의보가 내려진 상태라서 내심 걱정이 된다. 하지만 눈을 이고 의연하게 서 있는 조선 소나무 군락을 보면서 마음가짐을 새롭게 한다. 歲寒然後可知松柏之後凋(날이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겠도다)고 한 공자의 말, 東嶺秀孤松, 겨울 고개 마루에 외로이 서 있는 소나무의 자태를 통해 겨울의 미감을 표현한 고개지(顧愷之)를 떠올려 본다.
사람의 마을, 부처의 나라
10:25 경주 톨게이트를 통과한다. 서설에 금오산 고위산이 수미산(須彌山-진리가 발원하는 곳으로서 불교에서 가장 성스럽게 생각하는 상상의 산. 히말라야를 수미산으로 여기고 있음. 대웅전을 향해 점점 높아지는 사찰배치는 수미산을 형상화한 것임)인 듯 설산이 되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남북으로 길게 누운 남산 산허리를 따라 형산강이 다대포를 향해 조용히 흐르고 있다. 인천교(人天橋)를 지나 포석로 290으로 우회전을 한다. 사람과 하늘, 인간과 신이 하나라 한다. 인즉불 심즉불(人卽佛, 心卽佛)이니 사람이 곧 부처요, 불성은 우리 마음에 있다 한다. 알프스 회원들이 차창으로 경주 남산 설산을 보며 탄성을 지른다. 오호라, 저기 저 경주 남산이 부처의 나라로구나! 불국정토가 바로 예로구나!
신라인들은 인간이 사후에 미륵이 계신 도솔천에 이르러서 구원을 받는다는 미륵상생신앙과 먼 훗날(56억 8천만년 뒤) 미륵불이 이 땅에 내려와 용화설법을 3번 하고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하생신앙을 융합하여 경주남산에 불국정토를 건설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바세계에 도솔천, 불국정토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상사바위(相思巖), 산신당(産神堂)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남산의 정상부에는 민간신앙이 자리하고 있지만, 8부 능선 아래로 불교 유적들이 흩어져 존재하고 있다. 사람의 마을에 부처가 내려와 있는 형국이다.
경주 남산은 서라벌의 중심부 월성에 가까이 있는데다가 그리 높지도 않고 경사도 심하지 않아 산보하듯 다가가서 편안하게 안길 수 있는 산이다. 하지만 형산강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누운 남산은 10여 개의 봉우리, 60여 개가 넘는 골짜기를 형성하였고, 흙 반 바위 반으로 유난히 바위가 많다. 바위를 숭배하는 민간신앙과 불교신앙이 결합되어, 우리 조상들은 마을 뒷산인 경주 남산에 올라 골골 바위 밑을 늘 정갈하게 하고 바위굴에 정화수를 떠놓고 촛불을 밝히고 치성을 드렸으며, 바위를 열심히 갈며 소원을 빌기도 하고, 석탑과 불상을 모시고 바위 곳곳에 양각, 선각 마애불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남산 전체를 둘러보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고, 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적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감상하려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양지마을에 살면서 한 평생 신라와 신라인을 탐구했던 고 윤경렬 선생 같은 ‘남산 지킴이’가 아니라면 감히 이 산을 안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경주 남산은 겉보기와 달리 웅숭깊은 산이라 할 수 있다.
폐사지, 공에서 색을 보다
10:40 용장 3리 틈수골 입구에 도착했다. 천룡골 따라 천룡사지를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산행의 출발점인 틈수골, 천룡골은 남산의 남쪽 끝부분에 해당하는 골짜기로서 고위산(494.6m) 서쪽에서 발원한 물들이 흘러내리고 있다. 안타깝게도 산행 코스인 천룡골, 고위산, 고위능선, 봉화대능선, 이영재, 삼화령, 금오산 정상까지는 불교 문화재를 만나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천룡사지는 쉽게 지나쳐서는 안 될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틈수골 산자락에 드문드문 감나무들이 눈을 이고 서 있다. 한국화에 입문하기 위해 선 그리기 연습 대상으로 삼는 겨울 감나무. 가을에 홍시를 달고 있는 감나무에서 나는 한국인의 한의 정서와 고향의 정취를, 겨울 감나무의 선에서 한국적 미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가 하면 천룡골로 깊이 들어갈수록 대나무가 인상적이다. 눈을 맞아 휘어졌지만 여전히 청청하다.
“눈 맞아 휘어진 대를 누가 굽다 하돗던고 / 굽을 절이면 눈 속에 푸를손가 /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 (윤선도 ‘오우가’ 중 竹)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일까, 동행하던 회원들은 폐사지 아래에서 걸음을 멈추고 술잔을 나눈다. 일행과 헤어져 나 홀로 천룡사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기로 했다. 비록 3층석탑과 절의 석재 일부, 귀부, 석등 받침, 석조, 맷돌만 남아 있는 폐사지에 불과하지만 천룡사를 빨리 만나고 싶은 기대감 때문이었다. 천룡사지에 조금이라도 오래 머물면서 말 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틈수골 입구에서 약 1.5km, 고위산(수리산) 서남쪽 가파른 산줄기가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한 해발 300m 지점에, 고위산의 가운데배(中腹)인 듯 펑퍼짐한 절터를 형성하고 있다. 남산팔경 중 제3경에 해당하는 곳이 천룡고원인데, 이곳에 널찍한 텃밭을 지닌 천룡사지가 있다. 천룡사를 고사(高寺)라고도 불렀던 것으로 보아 고위산의 사찰 중 가장 규모 있는 절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귀부, 석등대석, 석조, 맷돌이 눈에 얼굴을 가리우고 있는데, 오로지 천룡사지 3층석탑(보물 제 1188호)만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탑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몸체의 일부가 깨지고 조각마저 유실된 듯하다. 상륜부는 탑을 이곳에 다시 세우는 과정에서 보충한 것이라 한다. 하지만 단순하면서도 조형미 비례감이 훌륭한 탑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선두 그룹은 천룡사지 3층석탑에 잠시 들러 사진을 찍고 고위산을 향해 황황히 길을 재촉한다. 고즈넉한 폐사지에 나 홀로 서 있다. 선물처럼, 은총처럼 폐사지에 다시 잠시 동안의 고요가 내게 주어진다. 일상의 시간이 멈추고, 구름에 달 가듯 물 흐르듯 흘러간 천년의 시간이 일순간 내게로 다가온다. 내가 탑에 다가가는 것일까, 탑이 나를 끌어안는 것일까? 탑 속에 누가 있어 나를 부르는지, 내 발걸음과 온기로 깨어나게 될 사랑이 있는지, 나도 모를 힘에 이끌려 정강이에 닿는 눈을 헤치며 탑에 다가간다. 탑돌이 하듯, 탑을 둘러본다. 탑에 손을 대어 보면 온기가 느껴질 듯하다. 내 사랑, 천년의 잠에서 깨어나 내게 산다화(山茶花) 한 가지 건넬 것만 같다. 잠시 사람의 마을에 대한 기억이 모두 지워져 버린 듯, 무념무상의 경지에서 소요한 듯하다. 다시 정일근의 아름다운 시 하나.
저물 무렵, 찬 한 잔 달여 마시는 동안의 눈으로 사람의 마을로 가는 길들 다 지워져버렸지만 경주 남산 바위 속에 숨은 내 사랑 찾아가는 산길은 그리운 발길로 하여 따뜻하게 숨쉬며 되살아난다 사랑이여, 그대 그 길을 걸어 오늘은 내게 오라 우리 서로 차가운 이마에 더운 손 짚어 오랜 안부를 물으며 천룡사 탑 뒤에 숨어 사랑의 입을 맞추자 경주 남산에 밤새워 흰 손수건 같은 눈은 내리고 그대 보는가, 우리 사랑의 늘 푸르름을 날이 추워진 후에도 억센 눈발 속에서도 완당의 세한그림 속의 송백처럼 우리 사랑의 가난한 초가 곁에 기대어 서서 하염없이 그대를 기다리는 푸른 나를 보는가. - 정일근 ‘세한(歲寒)의 사랑 - 경주 남산’
시간은 많은 것을 지운다. 중국에서 온 사자 악붕구(樂鵬龜)가 천룡사를 무너뜨리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 예언했는데, 천룡사는 신라 말기에 폐사가 되었고 머지않아 신라 또한 망국의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천룡사는 호국사찰의 성지, 부처님의 법을 돕는 도량이었던 듯하다. 기록만 전할 뿐 돌을 깎아 만든 천룡사 석조불, 흙을 빚어 만든 불상(泥塑佛像)은 시간 속으로 풍화되었다. 절의 흔적이 가뭇해진 천룡사 폐사지에 이따금 새가 노래하다 떠나고 흰 눈이 쌓이고, 녹아 물이 되어 고여 있다가 천룡골을 지나 먼 바다로 혹은 우주로 떠돌다가, 잠시 구름이 되어 고위산 자락에 그늘을 드리울 뿐이다. 나는 삼라만상의 형상과 소리에서 자연으로 되돌아간 부처님의 모습과 법어를 보고 듣는다. 눈 속에서 돌들도 끄덕이고 꽃들이 흔들리고 있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이 되어, 다시 길을 나선다. 나그네는 집을 그리워 하지만, 길 위에 있어야 하는 법. 천룡사 3층석탑에 머물 수 없는 시간이 오늘 내게는 그리 많이 주어져 있지 않다. 그 탑에 스치는 연꽃향기가 내 마음에 오래 머물고, 예토(穢土)에서 살아가는 내 마음 밭에서 연꽃이 피어나길 바랄뿐. 고위산을 향하면서 아쉬운 마음에 다시 한 컷 담아본다. 고향집 어머니가 그러하듯이, 천룡사 3층석탑이 “어여 가 어여가” 손 사래질을 하는 듯하다. 떠나보내고자 하는 것인지, 붙들려 하는 것인지…….
칠불암 가는 길
천룡사지 위에 천룡사가 있다. 승려도 없고, 법사만 있는 암자인 듯하다. 눈 맞은 배롱나무가 인상적이다. 법사는 천룡사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1500년이나 된 유서 깊은 절이라고 자부심을 드러내지만 현재의 천룡사는 본래의 자리에 있지도 않을뿐더러 절터나 가람의 규모가 본래의 천룡사를 왜곡시킬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공(空)에서 색(色)을 보았던 감흥이 깨어질 듯하여, 법사와 잠시 대화를 나눈 후 길을 재촉하기로 한다.
천룡재에서 바로 고위산에 오를 수도 있지만, 동으로 방향을 잡아 잠시 백운암을 향한다. 천룡사에서 백운암에 이르는 산길의 설경이 눈부시다. 회원들은 연신 감탄을 하면서 고개를 들어 나무와 하늘을 바라본다.
고위산 정상. 마을 사람들은 고위산을 수리산이라 부르며, 금오산을 어머니산 수리산(고위산)을 아버지 산으로 여긴다. ‘높다, 으뜸’이라는 뜻을 지닌 말로서 독수리의 수리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나 신라인들이 동남아 해상 활동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 오늘날 오키나와(유구 琉球)였는데, 유구의 수도인 나하에 남아 있는 옛성을 수리성(首利城)이라 부른다. 우리 문화의 흔적이 이곳에도 남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위산 정상을 0.65km 내려오니 칠불암 0.7km 이정표가 보인다. 봉화대능선을 따라 북진하는데, 고위봉에서 1.0km 지점에 칠불암 0.35km 이정표가 나타난다. 일행은 이영재를 향하고, 나 홀로 칠불암을 향하기로 했다. 눈길이 험해 회원님들께 동행하자고 권유할 수 없었다.
눈이 많이 쌓인 가파른 산길이었지만 남산8경 중 제2경인 칠불암과 신선암을 놓칠 수 없었다. 칠불암 마애불상군(국보 제312호)은 경주 남산 가운데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불상군이 있고,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보물 제199호)은 경주 남산 최고의 미감을 보여주고 있는 곳이기에 산행 코스에서 빠져 있지만 들러야만 했다.
극락정토(極樂淨土), 선경(仙境), 눈 덮인 부처의 나라, 어떤 언어로도 형용하기 어려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소나무들은 묵언수행 중인 나한들이었다. 사면불을 우러르며 법당에서 독경을 하는 젊은 여승의 낭낭한 목소리만이 고요한 산사에서 적요를 깨뜨리고 있었다. 법당 툇마루 아래에는 나이 드신 공양주보살 같은 누렁개가 반쯤 눈을 열어 산객을 쳐다보더니 이내 참선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거대한 바위의 맥이 정상에서 신선암 마애불을 거쳐 흘러내려 칠불에서 멈추었고, 이곳에 7 부처가 조성되어 있다. 충남 예산의 백제시대 사방불, 문경 사불암의 사방불에 비해 규모가 크고 조각이 선명하며,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어 국보(국보 제312호)로 지정하기에 손색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눈에 덮여 전모를 볼 수 없지만, 흰 모자를 쓰고 하얀 누비 옷을 입은 삼존불과 사면불이 아름다웠다. 석굴암 본존불처럼, 항마촉지인을 하고 연좌대에 앉은 석가모니 본존불은 동쪽 토함산을 바라보고 앉아 계셨다. 북쪽에 계신 협시불은 연꽃을 든 것으로 보아 가섭존좌로 보인다. 흰 모자를 쓴 본존불, 본존불 곁에 정병을 들고 이불처럼 눈을 덮고 있는 약사여래(사면불 -동)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신선암 마애불을 뵈러 산길을 되짚어 오른다.
미완성을 위한 연가
내가 경주 남산을 좋아하게 된 것은 김승희의 시 ‘미완성을 위한 연가’에 매료된 까닭이다. ‘경주 남산의 새기다 만 마애불 앞에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시를 문학청년 시절에 읽은 적이 있다. 시인이 남산의 어떤 마애불을 보고 시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 시를 읽을 적마다 신선암 마애불을 떠올린다. 불교 문화 전문가인 신영훈(申榮勳) 선생의 말에 따르면, 마애불은 조각 후 점안을 마쳐야 경배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새기다 만 마애불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륵신앙, 내소사 대웅전 설화, 화순 운주사 와불 전설처럼 불교에는 미완성의 여백이 존재하고 그 자체가 문학적인 매력이 더 느껴진다.
하나의 아름다움이 익어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슬픔이 시작되어야 하리 저물 무렵 단애 위에 서서 이제 우리는 연옥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꿈꾸어서는 안 된다고 서로에게 깊이 말하고 있었네 - 김승희 ‘미완성을 위한 연가’ 일부
벅찬 가슴을 안고,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보물 제199호)을 홀로 바라본다. 칠불 금당 자리에서 보면 까마득히 높이 솟은 바위 봉우리 정상부, 신선암 보살님이 의자에 걸터앉아 동쪽 봉화곡, 바람재를 바라보고 계신다. 높이 4m의 바위 동쪽면을 배 모양으로 파고 그곳에 광배를 새겨 넣었다. 장식 없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의 선이 아름답다.
신선암 보살을 사모하여 한 승려가 낭떠러지에 떨어지면서 그 몸이 꽃이 되어 산화공덕(散花功德)했다는 전설을 생각한다. 지상의 인간(승려)이 날아오를 수 있는 한계치 너머에 신선암 보살(진리의 세계)이 계셨고, 승려는 동지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되어 날아올랐을지도 모른다. 백제 멸망의 비운을 목격한 후, 변산 불사의방에서 수행하시던 진표율사께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벼랑 아래로 몸을 던졌다는 전설과 유사한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해 본다. 신선암 마애불 앞에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즉 진리(달마, 보리)를 깨우쳐 중생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했던 희생적 결단을 감히 가늠해 본다. 신선암 보살상 앞에서 삶과 사랑의 미완성을 생각한다. 그리고 삶의 미완성에 저항하는 문학의 본질을 생각한다. 개인의 아픔과 고통을 사회적 아픔으로 확대시키면서 이를 양식화해야 하는 시인의 숙명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아아 아프다. 승려는 낭떠러지 아래 꽃 피어 있는데, 신선암 보살은 고요히 미소 짓고 있다. ‘사랑은 실연처럼 자유롭고 고요해야’ 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는 결국 ‘탱화와 같은 사랑을 원하는 것’(김승희 ‘실연을 위한 연가’)일까? 신선암 마애불은, 아니 김승희의 시는 삶과 예술의 비극적 존재 방식을 노래하고 있다. 하늘과 강물의 사랑, 별빛과 나무의 사랑처럼 이루어질 수 없음으로 해서 아름다운…….
고개를 들어 보니 봉화대능선 산마루로 되돌아 가야할 일이 아득하다. 칠불암에 다녀오느라 무리한 탓인지, 겨울 산행을 자주 못한 탓인지 자주 허벅지 마비 증세가 온다. 하지만 벅찬 감동을 안고 금오산을 향해 고독한 산행을 시작한다.
칠불암 1.15km 거리에 있는, 봉화대능선(봉화대~이영재) 중간 지점에 ‘용장계지곡 삼층석탑’ 표지가 있어 다시 왼쪽 계곡으로 내려선다. 이미 회원들은 금오산에 올랐을테지만, 매월당 김시습의 체취를 느껴 보고 싶은 마음에 길 잃은 멧돼지마냥 눈 덮인 계곡길을 달려 간다.
호젓한 산속에 소박한 탑이 한 기 서 있다. 용장골에 7기의 탑이 있는데, 그 중 하나다.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고, 경주 남산 지도에도 나오지 않을 만큼 안정감, 비례감이 맞지 않은 3층 석탑이다.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면서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썼다는 용장사 골짜기에 있는 3층석탑(보물 제186호)이나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86호)에 비하면 격이 떨어지는 문화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어쩌면 전문 석공이 아닌 민중들이 자신들의 소망을 담아 이곳에 세워두고 소망을 빌었고, 매월당 또한 못생긴 이 탑을 더 애지중지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정감이 느껴진다.
가슴을 씻지는 못하더라도 그나마 가슴을 어루만져주고 다독거려주는 것은, 그것은 성(城)도 아니고 들도 아니고 산이었다. 또 집 도 아니고 절도 아니고 길이었다. 울음도 아니고 웃음도 아니고 광기였고, 욕도 아니고 잠도 아니고 책이었고, 물도 아니고 차도 아니고 술이었고, 병도 아니고 꿈도 아니고 글이었다. - 이문구 ‘매월당 김시습’ 일부
용장계지곡 3층석탑에서 생육신(生六臣)의 대표격인 매월당 김시습을 그려본다. 5세 신동. 매월당 김시습은 단종 폐위사건 이후 금오산 기슭의 용장사(茸長寺)에서 터를 빌려 초당을 짓고 당호를 매월당(梅月堂)으로 하여 8년 남짓 머물다가, 수락산으로 옮기고, 부여 무량사에서 설잠(雪岑)스님으로 10년 간 주석하다가 입적(1493년)하게 된다. 산, 길, 광기, 책, 술, 글. 매월당은 은둔과 방랑, 그리고 술과 시로 난세를 살아냈다. 그는 방랑의 여정에서 민중들의 고통을 직접 체험하고, 그들을 피폐하게 만든 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발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무게를 감당하기에 그는 너무나 왜소한 개인에 불과했다. 그는 공명과 절의 사이에서 고뇌하는 과정에서 유교, 불교, 도교를 융합했던 지식인이 되었다. 그리고 매월당의 독창적 사유 체계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로 평가되는 ‘금오신화’에 담기게 된다.
암울한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매월당 김시습, 6·25로 인해 멸문의 화를 당했고 그로 인해 30여 년이나 고향을 등져야 했던 이문구, 히틀러 체제에 저항하다 망명생활을 했던 브레히트를 나는 종종 겹쳐 생각하게 된다.
힘은 없었고 갈 길은 / 너무 멀었다. 또렷이 보였지만, 닿을 수는 / 없었다. 이 세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우린 홍수에 휩쓸렸지만 / 거기서부터 떠오를 너희들,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 말할 때면 너희들이 겪지 않은 이 암울한 시대를 부디 생각해 다오. - B. Brecht ‘후손들에게’ 일부
남산에서 돌아오는 길
“인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부처가 되어 있었다.” 인도 델타 항공사의 광고 문구이다. 이 문구에 매료되어 나는 늘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인도 갠지즈강에서 몸을 씻고 캘커타 빈민거리를 누비다가, 히말라야 라다크 마을에서 별이 들려주는 속삼임을 들으며 잠들고 싶은 꿈을 꾼다.
이영재를 지나, 경주 박물관에 모셔진 삼화령 아기부처를 생각하며 삼화령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금오산을 향한다. 눈이 켜켜이 쌓인 임도를 따라 금오산으로 가는 좁은 길이 나 있다. 구도의 길을 앞서 간 도반들의 행적처럼, 늦게 처져 오는 나를 위해 순결한 발자국을 내 놓았다.
14:50 금오산(468m) 정상에 올랐다. 이미 알프스 회원들은 약 10분 전에 하산을 한 듯하다. 약 1시간 정도 등산로를 벗어나 홀로 산행을 한 탓에 회원들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 경상도에서 오신 분들이 인증사진을 찍어 주고 사과 한 쪽을 권해 숨을 돌린 후 하산길을 재촉한다. 이제는 마음이 바빠 가까운 거리에 있는 유적도 들르지 못하고 눈길을 내달린다.
차를 권하는 상선암 보살의 시선을 뿌리치고 삼릉계곡을 따라 하산을 서두른다. 낯이 익지 않은 알프스 여성 회원 두 분이 여유 있게 하산을 하고 있다. 삼릉 주차장까지 1km 정도 남아 있어 마음이 놓이기 시작한다. 지금부터라도 될 수 있는 대로 유적지에 들르기로 마음을 먹는다.
상선암에서 0.25km를 내려와 삼릉계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66호)을 만난다. 경주 남산을 노천박물관이라 부르는 게 실감이 난다. 삼릉계곡(일명 냉골) 어귀에 있는 부처로서,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발굴해낸 것이다. 발굴 당시부터 머리 부분(불두)이 없었다고 한다.
14:21 상선암에서 0.7km를 내려오니 선각육존불이 나를 반긴다. 삼릉계 선각여래좌상, 혹은 선각육존상이라고도 부른다. 냉골에서 가장 신비감을 자아내는 곳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공간이다. 회원 몇이서 먼저 다녀간 듯 발자국이 찍혀 있다. 만다라 꽃비가 내리는 듯 폴폴 눈발이 날리는데, 아미타 삼존과 석가삼존이 바위 속에 서 계신다. 바위 표면을 가공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부처님들의 선을 새겨넣어, 바위의 잔주름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소나무 가지가 꺾여지는 환청이 들리는 듯하다. 설해목(雪害木)이 부러져야 향기가 나듯, 아상(我相)을 버려야 참된 인간의 향기가 풍겨나는 지도 모른다. 경주 남산의 산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부처요, 순결한 영혼이며 탐진치(貪瞋痴-탐냄, 성냄, 분별심) 3독심에서 잠시라도 벗어난 사람들로 보인다.
주차장을 향하는 길에 목이 없이 웃는 부처들이 눈에 띈다. 처처불상. 마음에 눈으로 보면 돌 하나 나무 한 그루 모두 부처로 보인다. 눈 덮인 보살의 나라에서 몇 시간 시간을 잊고 소요하였다.
15:33 남산8경 중 제8경으로 꼽히는 삼릉송림에 이른다. 주차장이 가까이 있고, 아직 퍼플님이 송림과 삼릉의 설경을 카메라에 담고 있어 마음이 놓인다. 나 또한 이리저리 바삐 옮겨 다니며 풍경을 렌즈에 담아본다. 삼릉의 선이 통도사 삼성반월교(三星半月橋)의 반월을 닮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삼릉의 희고 고운 선을 보며, 내 가슴이 선덕여왕을 사모했던 지귀처럼 뜨거워진다. 화들짝 놀라 소나무로 눈길을 돌린다. 세한의 삶을 사는 소나무의 청청한 품모를 다시 우러르며 삼릉을 벗어난다.
언젠가 보름달이 떠오르는 날 경주남산 달빛기행을 떠나리라.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87호)에 달이 걸려 있는 모습이며, 달빛에 비친 용장사지마애여래좌상(보물 제913호)의 옷매무새를 보리라. 촛불에 일렁이는 배리 삼존불(보물 제 63호)의 미소, 미륵골 보리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36호)을 바라보리라. 별빛을 마음에 담고 살고자 했던 신라 사람들처럼, 지상의 작은 이 몸 첨성대 되어 반짝이는 눈빛으로 아스라한 하늘을 별빛을 우러르리라.
허락하신다면 사랑이여
그대 곁에 첨성대로 서고 싶네. 입 없고 귀 없는 화강암 첨성대로 서서 아스라한 하늘 먼 별의 일까지 목측으로 환히 살폈던 신라 사람의 형형한 눈빛 하나만 살아, 하루 스물 네 시간을, 일 년 삼백예순닷새를 그대만 바라보고 싶네.
사랑이란 그리운 사람의 눈 속으로 뜨는 별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밤하늘의 별이 되어 저마다의 눈물로 반짝이고, 선덕여왕을 사랑한 지귀의 순금 팔찌와 아사달을 그리워한 아사녀의 잃어버린 그림자가 서라벌의 밤하늘에 아름다운 별로 떠오르네, 사람아 경주 남산 돌 속에 숨은 사랑아, 우리 사랑의 작은 별도 하늘 한 귀퉁이 정으로 새겨
나는 그 별을 지키는 첨성대가 되겠네 밤이 오면 한 단 한 단 몸을 쌓아 하늘로 올라가 그대 고운 눈 곁에 누운 초승달로 떠 있다가, 새벽이 오면 한 단 한 단 몸을 풀고 땅으로 내려와 그대 아픈 맨발을 씻어주는 이슬이 되는, - 정일근 ‘연가 - 경주 남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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