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심씨(靑松沈氏
▣ 由來
始祖(시조)沈洪孚(심홍부)는 高麗(고려)때에 文林郞(문임랑)으로 衛尉寺丞(위위시승)을
歷任(역임)하였다.
沈洪孚(심홍부)의 4世孫(세손)인 沈德符(심덕부),諡號(시호)는 公貞(공정)가 高麗(고려)忠肅王(충숙왕)
때에 倭寇(왜구)의 侵入(침입)을 平征(평정)하고 恭愍王(공민왕)때에는 中興9功臣(중흥9공신)의
한 名(명)으로 門下侍中(문하시중)이되어 靑城府院君(청성부원군)에 封(봉)해졌다가
靑城忠義伯(청성충의백)에封(봉)해져서 後孫(후손)들이 本貫(본관)을 靑松(청송)
(靑城=靑松)으로 하였다.그 後(후) 沈德符(심덕부)는 太祖(태조) 李成桂(이성계)를 도와
朝鮮(조선) 創業(창업)에 功(공)을 세우고 判門下府使(판문하부사)와 領三司事(영삼사사)를
거쳐 定宗(정종) 卽位年(즉위년)에 左政丞(좌정승)에 이르렀다.
- 墓(묘)는 慶北(경북) 靑松郡(청송군) 棲梧里(서오리) 寶光山(보광산)에 있다.
▣ 人物
沈德符(심덕부)의 아들 7兄弟代(형제대) 에서 家勢(가세)가 크게 隆盛(융성)하여 가장 華麗(화려)
한 人脈(인맥)을 이루었다. 世宗(세종)의 丈人(장인)이면서도 上王(상왕)인 太宗(태종)의 脾胃(비위)
에 거슬려 끝내 王命(왕명)으로 죽음을 當(당)했던 沈溫(심온)은 靑城君(청성군)
德符(덕부)의 다섯째 아들이다.太宗(태종)이 世宗(세종)에게 禪位(선위)한뒤 兵權(병권)만을
掌握(장악)하고 있었다. 溫(온)의 막내 아우인 淸(청)이 軍國(군국)의 大事(대사)를 上王(상왕)이
쥐고 흔드는 것을 不當(부당)하다고 兵曹判書(병조판서) 朴習(박습)에게 不評(불평)한 것이
上王(상왕)의 귀에 들어가 獄事(옥사)가 일어났다.
죽음에 臨(임)하여 溫(온)은<내 子孫(자손)들은 代代(대대)로 朴氏(박씨)와 婚姻(혼인)하지 말라>
고 遺言(유언)하였다.그 後(후) 沈氏(심씨)는 代代(대대)로 그 遺言(유언)을 지켜 朴氏(박씨)와
婚姻(혼인)을 論(론)하지 않다가 溫(온)의 玄孫(현손)祥(상)과 隆(융)이 朴氏(박씨)와 婚姻(혼인)
했는데 後孫(후손)에 아들이 없거나 子孫(자손)이 隆盛(융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同知敦寧府使(동지돈령부사) 沈逢源(심봉원)의 孫子(손자) 喜壽(희수)는 宣祖 末(선조말)에
吏曹判書(이조 판서)와兩館大提學(양관 대제학),左·右贊成(좌·우찬성)을 거쳐 左議政(좌의정)
에 이르렀으며,光海君(광해군)이 卽位(즉위)한 後(후) 權臣(권신)李爾瞻(이이첨)의 專橫(전횡)
이 甚(심)해지자 病(병)을 핑계로 辭職(사직)을 請(청)했으나 許諾(허락)되지 않고 右議政(우의정)
에 轉任(전임)되어,1614年(光海君 6) 永昌大君(영창대군)의 伸寃(신원)을 上疏(상소)했다가
死刑(사형)을 當(당)하게 된 鄭溫(정온)을 求(구)하여 流配(유배)에 그치게 하는 等9등)
훌륭한 業積(업적)을 많이 남겼다.
特(특)히 그는 相臣(상신)의 벼슬을 지내면서도 허물어져 가는 집 한 채밖에 없어서 임금이
大闕(대궐)의 말 한 마리를 보내어 팔아서 집을 고치라고 시켰을 만큼 가난하게 살았으며,
晩年(만년)에 屯之山(둔지산)에 들어가 詩(시)로써 餘生(여생)을 보냈다.
그밖의 人物(인물)로는 壬辰倭亂(임진왜란)때 勇猛(용맹)을 떨쳤던 沈友正(심우정)의 아들
沈鉉(심현)이 仁祖(인조)때 여러 郡縣(군현)의 守令(수령)을 지내고 敦零莩正(돈령부도정)
에 이르러 丙子胡亂(병자호란)이 일어나자 宗社(종사)를 따라 江華(강화)에 避亂(피란)가서 淸兵(청병)
이 上陸(상륙)했다는 消息(소식)을 듣고는 家廟(가묘)의 位牌(위패)를 땅에 묻은 後(후) 國亂(국란)의
悲運(비운)을 痛嘆(통탄)하는 遺書(유서)를 쓰고 夫婦(부부)가함께 自決(자결)했다.歷史上(역사상)
이들 夫婦(부부)_처럼 泰然(태연)하고 節度(절도)있는 죽음은 없었다고 하는데, 그때 夫婦(부부)
의 나이가 70歲(세)였다. 조카 沈東龜(심동구)가 배를 대놓고 避亂(피란)할 것을 발을 구르며
재촉하고 있는데 鉉(현)은 애써 돌려보내고 朝服(조복)을 입은 다음 東向四拜(동향사배)을
하고 임금에게 올리는 遺書(유서)를 지었다.
<臣(신) 鉉(言見)은 東向四拜(동향사재)하고 南漢山城(남한산성)에 계신 主上殿下(주상전하) 에게 올리옵나이다>로 始作(시작)된 이 글의 內容(내용)은 임금에 對(대)한 報恩(보은)의
죽음을 傳(전)하는 內容(내용)이었다.
그 遺書(유서)를 外孫子(외손자)朴長遠(박장원)에게 주어 배를 태워 보낸 다음 夫人(부인)
宋氏(송시)를 돌아보며 <情(정)은 百年(백년)을 같이하고 義(의)는 한番(번) 죽음을 같이하니 내가 忠臣(충신)이되고 그대는 忠臣(충신)의 아내가 되지 않겠는가> 하며 함께 죽을
것을 勸誘(권유)하자, 宋氏(송씨)는 <從容堂故事(종용당고사:죽음이 주는 生理的(생리적) 苦痛(고통)이나 精神的(정신적) 葛藤(갈등)을 무화시킨다는 뜻)을 본받겠나이다> 하고 말했다.
이들 夫婦(부부)는 서로 마주보며 목을 매었는데, 서로의 어깨를 짚고 便安(편안)히
運命(운명)에 從容(종용)한 모습으로 죽어있었다고 한다.
주요파】
▲용담공파 ▲감찰공파 ▲첨정공파 ▲학유공파 ▲학생공파 ▲대사헌공파
▲별좌공파 ▲참봉공파 ▲영월공파 ▲과천공파 ▲정읍공파 ▲군자감공정파
▲승지공파 ▲사평공파 ▲양지공파 등 77개파
심홍부 (청송심씨의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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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덕부 (沈德符 : 심홍부의 증손자) 심원부 (沈元符 : 심덕부 동생)
고려말의 문하시중 : 경파(京派) 고려말의 전리판서 : 향파(鄕派)
경파의 시조 심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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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총제공파 판사공파 성주지사공파 인수부윤공파 안효공파 청원군파 동지총공파
심덕부의 아들 7형제 가 경파의 하위 분파 7개 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넷째 심징(沈澄)과 다섯째 심온(沈溫)의 자손이 크게 번성하였습니다.
심온 (심덕부의 넷째) : 세종의 국구(國舅), 영의정
심종 (심덕부의 여섯째) : 태종의 부마
심회 (심온의 작은아들) : 영의정
시조 심홍부는 고려 때 벼슬을 지냈다.
그의 증손 심덕부가 고려 공민왕 때 왜구를 격퇴하여 공을 세운 뒤 청송백에 봉해졌다.
그 뒤 후손들이 청송을 본관으로 삼았다.
시조의 증손인 심덕부. 심원부 형제에서 크게 두 파로 갈린다.
이성계의 역성혁명 후 좌의정을 지낸 형 심덕부의 후손은 대대로 서울에서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동생 심원부의 자손들은 새 왕조의 벼슬을 마다하고 두문동에 들어간 선대의 유훈을 지킨다.
결국 대대손손이 고향에 살며 서울의 벼슬을 멀리 했다.
현재 경북 청송군을 비롯해 영남 일대에 퍼져 사는 심씨들은 거의 심원부의 후손들이다.
이들은 형 집인 심덕부 집안을 가리켜 "서울집"이라 부른다.
그 숱한 정승, 문형(文衡), 왕비들은 모두 서울집 출신들이다.
오늘날에도 각계에서 활약하는 저명인사들은 대부분 심덕부의 후손들이다.
서울집은 심덕부의 아들 7형제에서 일곱 개 파로 나누어진다.
7형제가 모두 입신 출세하여 이로부터 자손이 크게 번창한다.
그 중에서도 넷째 집인 인수부윤공파와, 다섯째 집인 안효공파(심온)
가 번성하여 굵직한 벼슬을 도맡아 했다.
특히 심온은 세종의 장인(그의 딸이 세종비 소헌왕후)으로 영의정을 지냈다.
그러나 심온은 임금의 장인이면서도 상왕인 태종의 비위를
거슬려 끝내 사약을 받았던 비운의 주인공이다.
태종은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도 병권만은 그대로 쥐고 있었다.
심온의 아우인 심정이 이에 불만을 품고 "명령이 두 곳에서 나온다"
고 말한 것이 태종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심정은 국문을 당하고, 심온은 "불평의 두목"으로 지목된다.
심온은 결국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체포돼 사위 세종이 내린 약사발을 받는다.
한편에서는 이를 두고 심온의 덕망과 지위를 시기한
다른 사람의 모함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심온의 아들 심회가 영상을 지내 심덕부-심온-심회까지 3대 정승이 나왔다.
역사상 3대 영상을 배출한 집은 달성서씨, 청풍김씨, 청송심씨 세 집 뿐이다.
청송심씨의 상신(영의정.좌의정.우의정) 13명 중 9명과 대제학 2명, 왕비 2명,
부마 1명이 모두 안효공파의 심회 후손에서 나와 "서울집"의 주류를 이룬다.
영의정 심연원의 아들 심강은 명종 장인이다. 심강의 2남이 유명한 심의겸이다.
김효원과 함께 동서분당의 장본인인 심의겸은
영상 심연원의 손자이자 명종비인 인순왕후의 동생이다.
심의겸이 벼슬을 할 당시부터 심씨들은 사색당쟁의 주역 혹은 조연으로 등장한다.
남북인과 노소론 등 사색간의 대립투쟁은 생과 사의 양극이었다.
당쟁에서 이기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패하면 일문 일족의 씨가 마르는 처절한 싸움이었다.
당쟁 발생의 직접적인 요인은 선조 때의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에서 시작된다.
당시 전랑(銓郞)이라는 관직은 비록 자리는 낮았으나 관리의
임면(任免)을 장악하고 있는 중요한 자리다.
때문에 전랑의 임명은 이조판서라도 간여하지 못한다.
반드시 전임자들이 추천하도록 되어 있었다.
처음 김효원이 전랑에 천거됐을 때 심의겸이 반대했으나 결국 김효원이 전랑이 됐다.
임기를 마친 다음에는 심의겸의 아우 충겸이 물망에 오르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거절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생긴다.
당시 김의 집이 서울 동쪽 낙산 밑 건천동에 있어 그 일파를 동인이라 했고,
심의 집은 서쪽 정릉방에 있었기 때문에 그 추종자들을 서인이라 불렀다.
이로부터 시작된 당쟁은 죽고 죽이고, 내쫓고 내몰리는 악순환이 무려 3백60년 동안 계속된다.
청송심씨의 족보는 ‘청송심씨대동세보’ 라고 하는데,
1545년 발간된 을사보를 시작으로 2002년 경진보까지 총 11회의 대동세보가 발간되었습니다.
종이 책자로 만들어 지는 족보로는 이 경진보가 마지막이 될것으로 생각됩니다.
앞으로는 사이버 시대에 인터넷으로 족보가 관리될것으로 예상되는데 후세에 자손들이
뿌리를 찾는데 도움이 되고 손자들의 교육상 필요할 것 같습니다.
청송지명설명
청송’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를까. ‘주왕산’이나 ‘
주산지’ 따위의 명승지를 떠올리는
이들도 있겠지만 ‘청송교도소’나 지금은 청송제3교도소가 된
‘청송보호감호소’를 떠올리는 사람도 적지 않을 터이다.
경북 북부의 궁벽한 산골인 청송이
사람들에게 ‘교도소’나 ‘감호소’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기억되는 상황은 아무래도 찜찜할 수밖에 없겠다.
청송이 ‘청송 심씨’의 관향이라는 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안동을 굳이 ‘안동 김씨’나 ‘안동 권씨’의 본관으로 기억하지
않듯이 청송을 굳이 심씨와 이을 이유는 없다. 나는 청송을 일본의 한국계
도예가 ‘심수관’ 일가의 고향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심수관은 임란 뒤인 1598년 일본에 끌려가 사쓰마 도기[薩摩燒]를 만든
심당길의 후예다. 부친에 이어 ‘습명’(襲名:선대의 이름을 계승함)으로
14대 심수관이 된 이 조선 도공의 후예는 한국 성(姓)을 고집하며 400여
년 간 가업을 계승해 오고 있다고 한다. 막상 청송에 심수관 가의 유적이
따로 없는 것은 이들의 선조가 남원에 옮겨 살다가 일본에 끌려간 까닭이라고 한다.
심수관, 심훈과 청송 심씨
청송 심씨는 고려 충렬왕 때 심홍부를 시조로 받든다.
이들이 청송을 본관으로 삼게 된 것은 심홍부의 증손 덕부가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우고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기 때문이다.
덕부의 다섯째 아들 온(溫)은 여식을 충녕대군(뒤의 세종)에게
시집보냈는데 이이가 곧 소헌왕후다.
덕부의 아우 원부는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형과 달리 새 왕조를 거부하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의를 지킨다. 이른바 두문동 72현(賢) 가운데 하나다.
후손들도 그의 유훈을 받들어 ‘선훈불사(先訓不仕)’라 하여 대대로 벼슬을
멀리 하였는데, 현재 청송에 사는 이들은 대체로 이들 원부의 후손이라 한다.
지금 청송에는 심원부의 장증손 외 100여 호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청송 심씨는 조선조 500년 간 정승이 열 셋, 왕비가 넷, 부마를 넷씩이나
낸 서인 집안이지만 우리 역사에서 두드러진 인물은 그리 보이지 않는다.
산수화에 새로운 화풍을 이루어 김홍도와 함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알려진 심사정이 눈에 띄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소설 ‘상록수’의 작가이자
‘그날이 오면’의 시인 심훈의 이름이 우뚝할 뿐이다.
▣ 科擧及第者(朝鮮時代)
沈光彦(심광언) (1490 庚戌生) : 文科中宗20年(1525) 式年試 甲科 壯元及第
沈通源(심통원) (1490 庚戌生) : 文科 中宗32年(1537) 別試 甲科 壯元及第
沈忠謙(심충겸) (1545 乙巳生) : 文科 宣祖5年(1572) 春塘臺試 甲科 壯元及第
沈友正(심우정) 1546 丙午生) : 文科 宣祖16年(1583) 別試 甲科 壯元及第
沈演(심연) (1585 乙酉生) : 文科 仁祖4年(1626) 別試 甲科 壯元及第
沈瑄(심선) (1597 丁酉生) : 文科 仁祖20年(1642) 廷試 甲科 壯元及第
沈楸(심추) (1702 壬午生) : 文科 英祖7年(1731) 庭試 甲科 壯元及第
沈國賢(심국현) (1714 甲午生) : 文科 英祖23年(1747) 式年試 甲科 壯元及第
(沈履之(심이지) (1720 庚子生) : 文科 英祖31年(1755) 庭試2 甲科 壯元及第
沈翼雲(심익운) (1734 甲寅生) : 文科 英祖35年(1759) 庭試 甲科 壯元及第
等 모두 811名의 科擧及第者가 있다.
(文科 194명, 武科 37名, 司馬試 578名, 醫科 2名)
本貫 沿革
本貫所在地 : 慶尙北道 靑松
靑松(청송)은 慶尙北道(경상북도) 中部(중부) 東(동)쪽에 位置(위치)한 地名(지명)으로
靑松郡(청송군)의 巴川面(파천면) 一部(일부)는 高句麗末(고구려말)에 靑杞縣(청기현)
이었는데 757年(新羅 景德王16)에 積善縣(적선현)으로 改稱(개칭)되어 野城郡(야성군)
:(盈德)의 領縣(영현)이되었다.積善縣(적선현)은 高麗初(고려초)에 鳧伊(부이)또는
雲鳳(운봉)으로 불리다가 986年(成宗5) 靑鳧縣(청부현)으로 改稱(개칭)되어 禮州郡(예주군):
(盈德郡)에 屬(속)하였다가 1018年(顯宗9)에 禮州(예주):(寧海)의 屬縣(속현)으로
倂合(병합)되었다가 1390年(恭讓王2)에 監務(감무)를 派遣(파견)하였다.1394年(太祖3)
眞寶縣(진보현)을 合倂(합병)하였다.1419년(世宗1)靑寶郡(청보군)으로 昇格(승격)하였다.
後(후)에 眞寶(진보)와 分離(분리)되었고 世祖(세조)때 松生縣(송생현)을 倂合(병합)하여
靑松郡(청송군)으로 改稱(개칭)되었으며,安德縣(안덕현)을 倂合(병합)하여
靑松都護府(청송도호부)로 昇格(승격)하였다.1895年(高宗32)에 地方制度(지방제도)
改正(개정)으로 安東府(안동부)靑松郡(청송군)·眞寶郡(진보군)이 되었고,1896年에
慶尙北道(경상북도)靑松郡(청송군)·眞寶郡(진보군)이 되었다.1914年 郡面廢合(군면폐합)
으로 眞寶郡(진보군)一部(일부)를 合(합)하여 8個面(개면)으로 改編(개편)하였다.1979年
5月 靑松面(청송면)이 邑(읍)으로 昇格(승격)하였고,1983年 英陽郡9영양군)
立岩面(입암면) 芳田里(방전리)·興邱里(흥구리) 等(등)一部(일부)를 編入(편입)하였다.
現在(현재) 靑松郡(청송군)은靑松邑(청송읍)과 雰(부동)·府南(부남)·縣東(현동)·
縣西(현서)·安德(현덕)·巴川(파천)·眞寶面(진보면)
等(등) 1邑(읍) 7面(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 人口數
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하면 靑松沈氏(청송심시)는
1985年에는 摠 44,446家口 186,384名,
2000年에는 摠 65,744家口 212,717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