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장구 서문을 당연한 것처럼 읽어 보게 된다. 대학장구 서문은 중용장구 서문을 쓰기 한 달 전에 쓴 거다. 같은 해 봄에 2월과 3월에 대학장구 서를 쓰고 나서 바로 중용장구 서를 쓴 거다. 60살 환갑, 남의 말이 욕을 하든, 칭찬을 하든 상관없이 귀로 들리는 말이 순해지는 나이라고 했던가. 마음에 평정이 찾아온 나이일까. 세상을 보는 지혜가 늘었으려나, 사람을 이해하고 삶의 이치를 깨달았을까. 주자는 대학과 중용이라는 책을 여하간 만들어내고 그 책 서문을 써 놓고 자기 이름을 기록해 놓았다. 나도 책을 읽으면 요즘은 독후감도 쓰고 서평도 써 놓고 이런저런 생각 글도 쓰고 싶어진다. 기록해 놓으려는 욕구일까. 남에게 보여 주려는 과시욕이 있어서일까. ‘이 정도 글 좀 쓴다네’하며 뽐내려는 내면의 욕구가 있어서일까. 아니면 이 글이 진리이고 상당히 도움을 줄 수 있으니 꼭 좀 읽어 보길 권하는 마음에서일까. 잘 모르겠다. 글 쓰는 이들의 마음이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조선시대 그 길고 많은 일기 역시 자신 혼자 반성하며 성찰하는 계기로 삼는 글이 아닌 사초가 되고 누군가에게 보이고 읽히는 글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라는 평이 많은 요즘이다. 사실과 객관에서 약간 틀어지고 멀어지는 개인적 주관이 반영이 된 일기라고 하니 그 감정적인 부분 역시 약간의 과장과 거짓, 속임도 있다는 것이 참 서글프다.
중용을 읽고 대학을 읽고, 다시 중용장구 서문을 읽고 대학장구 서문을 읽어 본다. 이제는 꼼꼼하게 글을 분석해서 읽어 본다. 무슨 말을 써 놓았나. 문장과 문구를 자세히 살펴보고 행간의 의미를 찾아본다. 주자 역시 나처럼 유학에 많이 도취된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본다. 아마 원시 유학이라 불러야 되겠지. 공자까지의 유학. 나도 이 원시 유학의 글들과 말들이 주자학이나 성리학적 유학보다 더 좋다. 도통을 이은 이들의 말들이 경전으로 남아서 지금 내가 읽고 있는데 이 글들은 어렵기도 하고 해석이 분분하고 다양하기도 하지만 몇몇 글과 문구, 문장들은 그 규모와 표현이 매우 날카롭고 세련되고 전 인류와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규범과 규칙 같은 것들 같다. 너무 당연과 당위를 강조하지도 않고 규율과 법칙을 고수하지도 않는 인간적이며 정감이 흐르고 인류애적인 내용 같아서 좋다.
성인이 나오고 현인이 나와서 인류의 임금이 되고 스승이 되어 진리와 도를 설파하고 전파하는 것이 강제와 억압만 아니라면 괜찮은 것 같다.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이 나와서 지도자가 되어 솔선수범하고 말과 행동에 모범이 된다면 평범한 나 같은 사람은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 괜찮은 것 같다. 이런 진리의 말과 가르침을 잘 전수해 오다가 사라졌다가 송나라 때 정호, 정이에 의해 다시 책으로 만들어졌다는 대학장구 서문이다. 거기에다 주희 자신이 수정, 보완을 해서 책을 엮었다는 게 우리가 지금 읽는 ‘대학’이라는 책이라는 거다.
소학에 들어가서 공부의 완성을 이루면 이제 태학에 들어가서 ‘이치를 궁구하고 마음을 바루며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道(방법)’을 배운다고 한다. 대학의 내용을 이 한 구절로 표현해 놓았다. 8살부터 소학이라는 학교에서 예의범절을 잘 배우고 나서 글 좀 읽게 되면 15살에 태학이라는 학교 가서 이치(진리)를 궁구하고 내 마음을 바루고, 내 몸을 닦고(수련하고), 남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나는 이 구절을 어찌 이해하면 좋을까 고민해 본다. 15살 사춘기 시절, 중고등학생 때의 나이에 나는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익혔던 걸까. 지금의 나는 또 무엇을 배우고 더 익혀야 할까. 옛 성현들의 경전들을 꺼내 놓고 읽는 공부라도 해 보는 거다. 뭔가 깨달음이 온다면 좋겠다만.
[원문]
〈大學章句序〉
大學之書난 古之大學所以敎人之法也ㅣ라 蓋自天降生民으로 則旣莫不與之以仁義禮智之性矣언마는 然其氣質之稟이 或不能齊ㅣ라 是以不能皆有以知其性之所有而全之也ㅣ라 一有聰明睿智能盡其性者ㅣ 出於其間이면 則天必命之하샤 以爲億兆之君師하야 使之治而敎之하야 以復其性케하시니 此ㅣ 伏羲神農黃帝堯舜이 所以繼天立極하야 而司徒之職과 典樂之官의 所由設也ㅣ라
三代之隆에 其法이 寖備하니 然後王宮國都로 以及閭巷히 莫不有學하야 人生八歲어든 則自王公以下至於庶人之子弟히 皆入小學하야 而敎之以灑掃應對進退之節과 禮樂射御書數之文하고 及其十有五年이어든 則自天子之元子衆子로 以至公卿大夫元士之適子와 與凡民之俊秀히 皆入大學하야 而敎之以窮理正心修己治人之道하니 此又學校之敎ㅣ 大小之節이 所以分也ㅣ라夫以學校之設이 其廣이 如此하고 敎之之術이 其次第節目之詳이 又如此로대 而其所以爲敎는 則又皆本之人君躬行心得之餘ㅣ오 不待求之民生日用彝倫之外라 是以當世之人이 無不學하고 其學焉者ㅣ 無不有以知其性分之所固有와 職分之所當爲하야 而各俛焉以盡其力하니 此ㅣ 古昔盛時에 所以治隆於上하고 俗美於下하야 而非後世之所能及也ㅣ러니
及周之衰하야 賢聖之君이 不作하고 學校之政이 不修하야 敎化ㅣ 陵夷하고 風俗이 頹敗하니 時則有若孔子之聖이사대 而不得君師之位하야 以行其政敎ㅣ실새 於是에 獨取先王之法하샤 誦而傳之하야 而詔後世하시니 若曲禮少儀內則弟子職諸篇은 固小學之支流餘裔ㅣ오 而此篇者난 則因小學之成功하야 以著大學之明法하니 外有以極其規模之大하며 而內有以盡其節目之詳者也ㅣ라 三千之徒ㅣ 蓋莫不聞其說이언마는 而曾氏之傳이 獨得其宗하야 於是에 作爲傳義하야 以發其意러니 及孟子沒에 而其傳이 泯焉하니 則其書ㅣ 雖存이나 而知者ㅣ 鮮矣ㅣ라
自是以來로 俗儒記誦詞章之習이 其功이 倍於小學而無用하고 異端虛無寂滅之敎ㅣ 其高ㅣ 過於大學而無實하고 其他權謀術數ㅣ 一切以就功名之說과 與夫百家衆技之流ㅣ 所以惑世誣民하고 充塞仁義者ㅣ 又紛然雜出乎其間하야 使其君子로 不幸而不得聞大道之要하고 其小人으로 不幸而不得蒙至治之澤하야 晦盲否塞하고 反覆沈痼하야 以及五季之衰而壞亂이 極矣ㅣ라天運이 循環하야 無往不復일새 宋德이 隆盛하샤 治敎ㅣ 休明하시니 於是에 河南程氏兩夫子ㅣ 出하샤 而有以接乎孟氏之傳하야 實始尊信此篇하샤 而表章之하시며 旣又爲之次其簡編하야 發其歸趣하시니 然後古者大學敎人之法과 聖經賢傳之指ㅣ 粲然復明於世하니 雖以熹之不敏으로도 亦幸私淑而與有聞焉호라 顧其爲書ㅣ 猶頗放失일새 是以忘其固陋하고 采而輯之하며 間亦竊附己意하야 補其闕略하야 以俟後之君子하노니 極知僭踰ㅣ 無所逃罪ㅣ나 然於國家化民成俗之意와 學者修己治人之方엔 則未必無小補云이라淳熙己酉二月甲子에 新安朱熹는 序하노라
[해석]
대학장구 서문(大學章句序)
하늘이 生民(사람)을 내림으로부터 이미 仁, 義, 禮, 智의 性을 賦與하지 않음이 없건마는 그 氣質을 받은 것이 혹 똑같지 못하다. 이 때문에 모두 그 本性의 所有함을 알아 온전히 함이 있지 못한 것이다. 혹시라도 聰明하고 叡智하여 능히 그 本性을 다한 자가 그 사이에 나오면 하늘이 반드시 그에게 명하시어 억조 만백성의 군주와 스승으로 삼아 그로 하여금 백성을 다스리고 가르쳐서 그(백성) 本性을 회복하게 하시니, 이는 伏羲ㆍ神農ㆍ黃帝ㆍ堯ㆍ舜이 하늘의 뜻을 이어 極(표준)을 세우고 司徒의 직책과 典樂의 벼슬을 설치한 이유이다.
三代가 융성했을 때에 그 법(敎育하는 제도)이 점점 갖추어졌으니, 그러한 뒤에 天子의 王宮과 諸侯의 國都로부터 閭巷(시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學校가 있지 않은 곳이 없어서, 사람이 태어나 8세가 되면 王ㆍ公으로부터 아래로 庶人의 子弟에 이르기까지 모두 小學에 들어가게 해서 이들에게 물 뿌리고 청소하며 응하고 대답하며 나아가고 물러가는 예절과 禮ㆍ樂ㆍ射ㆍ御ㆍ書ㆍ數의 文을 가르치고, 15세에 이르면 天子의 元子ㆍ衆子로부터 公ㆍ卿ㆍ大夫ㆍ元士의 嫡子와 일반 백성의 俊秀한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太學에 들어가게 해서 이들에게 이치를 궁구하고 마음을 바루며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道(방법)를 가르쳤으니, 이는 또 學校의 가르침에 크고 작은 절차가 나누어진 이유이다.
學校의 설치가 그 넓음이 이와 같고 가르치는 방법이 그 차례와 節目의 상세함이 또 이와 같았으나 그 가르치는 所以는 또 모두 人君이 몸소 행하고 마음에 얻은 나머지(결과)에 근본하고, 民生이 일상생활하는 彝倫의 밖에서 구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구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당세 사람들은 배우지 않은 이가 없었고, 배운 자들은 그 性分에 固有한 바와 職分에 當然한 바를 알아서 각기 힘써 그 힘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는 옛날 융성할 때에 정치가 위에서 높고 풍속이 아래에서 아름다워서 後世에 능히 따를 수 있는 바가 아니었던 이유이다.
周나라가 쇠함에 이르러 어질고 聖스러운 君主가 나오지 않고 學校의 정사가 닦이지 않아서 敎化가 陵夷(침체)하고 風俗이 무너지니, 이때에는 孔子와 같은 聖人이 계셔도 군주와 스승의 지위를 얻어 정사와 가르침을 행할 수 없었다. 이에 홀로(다만) 先王의 法을 취하여 외워 전해서 後世를 가르치시니, 〈曲禮〉ㆍ〈少儀〉ㆍ〈內則〉ㆍ〈弟子職〉과 같은 여러 편은 진실로 小學의 支流와 餘裔이며, 이 책(《大學》經 1章)은 小學의 成功을 인하여 大學의 밝은 법을 드러내었으니, 밖으로는 그 規模의 큼을 다하였고 안으로는 그 節目의 상세함을 다하였다.
3천 명의 門徒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은 이가 없건마는 曾氏의 전함이 홀로 그 宗旨를 얻었다. 이에 傳義(傳文 10章)를 지어 그 뜻을 발명했었는데 孟子가 별세함에 미쳐 그 전함이 끊기니, 이 책이 비록 남아 있으나 아는 자가 적었다.
이로부터 이후로 俗儒들의 記誦(기억하고 외움)과 詞章(文章)의 익힘이 그 공부가 小學보다 倍로 하였으나 쓸모가 없었고, 異端의 虛無 寂滅의 가르침이 그 〈이론의〉 높음이 大學보다 더하였으나 실제가 없었으며, 기타 權謀術數로서 일체 功名을 성취한다는 학설과 百家 衆技의 부류로서 세상을 혹하게 하고 백성을 속여 仁義를 막는 자들이 또 紛紛하게 그 사이에 뒤섞여 나왔다. 그리하여 君子(위정자)로 하여금 불행히도 大道의 要諦를 얻어 듣지 못하고 小人(백성)으로 하여금 불행히도 至治의 혜택을 얻어 입지 못하게 하여, 晦盲하고 否塞하며 反覆하고 沈痼하여 五季(五代 말)의 쇠함에 이르러서는 무너지고 혼란함이 지극하게 되었다.
天運이 循環하여 가면 돌아오지 않음이 없기에 宋나라의 德이 융성하여 정치와 교육이 아름답고 밝았으니, 이에 河南程氏 두 夫子(明道ㆍ伊川)가 나오시어 孟氏의 전통을 이으셨다. 그리하여 실로 처음 이 책을 높이고 믿어 表章하시고, 이윽고 또 이를 위하여 그 簡編을 차례하여 歸趣를 밝히시니, 이렇게 한 뒤에야 옛날 太學에서 사람을 가르치던 방법과 聖經ㆍ賢傳의 뜻이 찬란하게 다시 세상에 밝아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熹)의 不敏함으로도 다행히 私淑하여 참예해서 들음이 있게 되었노라.
다만 이 책이 아직도 佚失됨이 많기 때문에 나의 固陋함을 잊고 다른 책에서 뽑아 모았으며, 사이에 또한 나의 의견을 붙여 闕略(빠진 부분)을 보충하고 後世의 君子를 기다리노니, 참람하고 주제넘어 죄를 피할 수 없음을 지극히 (잘) 알고 있으나 國家의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루려는 뜻과 배우는 자들의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방법에 있어서는 다소의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淳熙 己酉(1189) 2月 甲子日에 新安 朱熹는 序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학장구서 [大學章句序] (대학중용집주, 성백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