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끄적거렸던 글입니다. 황석영 씨의 강연회가
취소되었던 것을 아쉬워하며 여기에 글을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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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와 기독교는 '손님' - 황석영의 <손님>을 읽고
황석영씨를 알게 된 것은 대학에 들어와서 이다. 그가
<장길산>이라는 책의 저자임을 고등학교 때에도 알고
있었지만 그냥 여러 소설가 중의 한사람,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책 중 처음 손에 잡은 것은 <오래된 정원>(상, 하)이다.
감옥에서 나온 이후 처음 나온 책이었다. 제작년 여름방학인가에
하권 중간까지 읽었다가 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가을인가에 다시
손에 잡고 끝을 보았던 것 같다. 공지영의 <고등어>를 읽고 얼마 후
읽은 책이었는데 운동권들의 삶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오래된 정원>은 80년대 지하 학생운동가의 삶과 그가 사랑한
한 여인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리얼리즘의 대가로 불리는
황석영씨인 만큼 그 당시의 상황들을 상세하고 사실감 있게 잘 보여주었던
것 같다. 이 책은 나에게 '케테 콜비츠'라는 판화가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하권 후반부에 나오는 한 여인의 독일 생활에서 '콜비츠'와 접할 수
있었다. 노동자와 민중의 삶을 거칠게 표현하는 그림을 찍어내는 판화가이다.
방금 전에 <손님>(창작과 비평사)을 다 읽었다. 이번이 두 번째 읽는 것인데
처음과 많이 다르다. 처음에는 잘 보지 못했던 구절들과 형식이 보이고
등장인물들의 질곡이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한국전쟁 전후 황해도 신천에서 일어난 민간인학살을 다룬 이 책은, 학살에 참여
했거나 그 학살을 본 사람들을 화자로 등장시켜 한 사건을 입체감 있게 설명해 주고
있다. 이것은 저자의 고민에서 나온 형식으로 사건 서술에 사실감을 높여주고
있다.
과거의 리얼리즘 형식은 보다 과감하게 보다 풍부하게 해체하여 재구성해야 된다. 삶은 놓친 시간과 그 흔적들의 축적이며 그것이 역사에 끼여드리고 하고 꿈처럼 일상 속에 흘러가버리기도 하는 것 같다. 역사와 개인의 꿈같은 일상이 함께 현실 속에서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어서 안되고, 화자는 어느 누군가의 관점이나 일인칭 삼인칭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등장 인물 각자의 시점에 따라 서로를 교차하여 그려서 완성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한 인물과 사건을 두고도 모든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생각과 시각의 다양성으로 자수를 놓듯이 그릴 수는 없을까. 객관적인 서술방법도 삶을 그럴싸하게 그린다고 할 뿐이지 삶을 현실의 상태로 불가능한 노릇이다. 삶이 산문에 의하여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면, 삶의 흐름에 가깝게 산문을 회복할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 나의 형식에 관한 고민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이북에서는 신천의 학살을 '미제국주의'들에 의한 참혹한
학살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황석영은 학살의 진실은 신천에 살고
있는 주로 지주와 마름인 기독교인들과 주로 소작인이거나 남의 일을 도와주는
일을 하던 맑스주의 사상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지난 학기 '북한
사회의 이해', '한국근현대사' 수업을 하신 한홍구 교수님도 황석영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고 말씀하셨다.
같은 마을에서 비록 마름과 작인으로 사회적으로 놓여져 있는 위치는 다르긴
했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와 일들을 했던 사람들이 서로 죽이게 되는 상황들을
황석영은 흥미로운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특히 후반부에 같은 기독교들이
서로의 가족을 죽이고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지옥'과 같은
상황은 이 책이 독자들에게 하는 '학살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하는 질문에
대하여 더욱더 고민하게 한다.
한국의 기독교와 맑스주의는 유럽과 같은 긴 역사 속에서 생성되고 변화해 온 것이
아니다. 외국으로부터 유입이 되었으며 유입된 기독교와 맑스주의는 한국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으로 인하여 충분히 흡수되어 자리잡지 못한 것 같다. 분단은 이북에서
기독교와 같은 종교의 '씨'가 마르게 했고, 이남에서는 '반공이데올로기'로 인하여
'빨갱이'의 '씨'는 마르고 말았다.
개인적으로 종교에 대한 호기심과 맑스주의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내가 궁금한 것은
이 두 가지가 어떻게 한국 사회에서 뿌리를 내렸으면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이다. 그리고
각각 미래에 대한 일정한 '유토피아'를 제시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기도 한데 그것이
얼마나 유효한가도 흥미있어 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손님>은 매우 유익하게
읽었던 소설이었다.
*추신: '손님'이라는 것은 객客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천연두를 서병西病으로 파악하고 이를 막아내고자 했던 중세의 조선 민중들이
'마마' 또는 '손님'이라 부르면서 '손님굿'이라는 무속의 한 형식을 만들어낸
것에 착안해서 나는 이들 기독교와 맑스주의를 '손님'으로 규정했다. -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