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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천뉴타운 소사 괴안10B 재정비촉진구역 원문보기 글쓴이: 샤넬
한문서예 | |||||||||||||||||||||||||||||||||||||||||||
중국 서예사 | |||||||||||||||||||||||||||||||||||||||||||
(1) 문자의 생성 이와같이 분류되는 한자는 중국의 전설시대(傳說時代)인 황제시대(黃帝時代)때 창힐(蒼 )이라는 사관(史官)이 상형 문자를 창안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 후 상은시대(商殷時代)로 부터 주(周) 선왕(宣王) 이전까지(B.C 2590-827) 갑골문(甲骨文), 금문(金文), 석문(石文), 도문(陶文)이 생겼다고 하는데 이러한 문자들을 고문(古文) 이라고 칭한다.그 후 대전(大篆), 소전(小篆) 등의 서체가 생기고, 그 후한대(漢代)에 이르러서 예서(隸書), 장초(章草), 초서(草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등이 순서대로 발생하였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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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서예의 역사 ◈◈ 은 시대(B.C. 1751∼1123) : 갑골문. 도 한다)―석고문. (고례―노효왕 각석, 팔분―을영비·장천비·예기비·조전비). 진(진·서진·동진) 시대(280∼420) : 동진의 왕희지·황헌지 부자에 의해 행·초서의 완성 (난정서). 정희하비·장맹룡비). 손과정의 처서가 유명함. 구양 순 -구성궁예천명, 저수량-안탑성교서, 우세남-공자묘당비, 안진경-안근례비, 손과정-서 보 (우리 나라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 나라에도 영향), 선우추·가구사. 비파-고대 비갈연구(등석여·완원·포세신·오양지·조지겸·오준경· 오창석·하소기). 서예 리론가(포세신·강유위). | |||||||||||||||||||||||||||||||||||||||||||
古文 | |||||||||||||||||||||||||||||||||||||||||||
갑골문(甲骨文) | |||||||||||||||||||||||||||||||||||||||||||
금 문(金文또는 鍾鼎文) | |||||||||||||||||||||||||||||||||||||||||||
금문은 청동기 시대의 산물로 그 대부분이 종이나 솥 따위에 주각(鑄刻)하였으므로 종정문이라고 부른다. 그릇, 무기, 거울, 도장, 돈 같은 것에서도 발견된다. 동기에 문자를 기록하는 것은 상(商)에서 한 (漢)에까지 이른다. 금문은 갑골문을 계승하고 진(秦)대의 소전(小篆)에 이어지는 대전(大篆)이다. | |||||||||||||||||||||||||||||||||||||||||||
전서는 대전과 소전으로 나뉜다. 대전은 주문이라고도 하는데 주나라 때 사주가 문자의 짜임을 실용 적으로 간소화 시켰으므로 붙여졌다. 대표적인 것으로 주대의 석고문이 있다. 돌을 쪼아서 북(鼓)의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漢代에 와서야 장방형의 碑가 생기게 되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문자의 통일을 꾀할 때에 이사(李斯)가 대전의 서체를 더 간략하게 만들었 는데 그 서체가 소전이다. 소전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진시황의 공적을 기록한 태산각석, 낭야대각석, 역산비가 있다. 소전은 모두가 원필이며 자형이 아래와로 길다. 서체의 시발이므로 상형성을 많이 띠고 있고, 좌우 대칭, 상하대칭이 특징이다. | |||||||||||||||||||||||||||||||||||||||||||
전서는 대칭을 맞추어야 하고 곡선이기 때문에 쓰기가 불편하다. 그리하여 곡선을 직선으로 바꾸고 원필도 방필로 많이 바꾸고, 필획도 줄여서 쉽게 쓰게 한 것이 예서(隸書)이다. 기록을 보면 예서는 정막(程邈)이 만들었다. 그가 죄를 지어 감옥에 있을 때 십 년을 연구하여 예서 삼천자를 지어 진상하였는데 진시황이 좋게 여겨 어사를 시켰다. 예서란 말은 진대의 복역수를 도예 (徒隸)라 하였는데 장막이 그러했으므로 예(隸)자를 따서 지었다. 예서에서 파책이 없는, 곧 전서와 근접한 것을 고예(古隸)라 하고 파책이 있는 것을 팔분(八分)이라 한다. 예서는 전한과 후한에 걸쳐 끊임없이 발달하였다. 조전비와예기비 같은 유려형(流麗 型), 장천비와 같은 방정형(方整型), 하승비 (夏承碑) 같은 기고형(奇古型)들로 분리된다. 예서의 자형은 납작한 것이 보통이다. 전서에서 해서의 형태를 갖추어 가는 중간 형태이며 가로획의 한 획만 반드시 파세를 | |||||||||||||||||||||||||||||||||||||||||||
예서가 더 실용적으로 변모하면서 위진 남북조 시대에 와서 해서의 특유한 풍격을 이루었다. 해서는 지금의 정자인데 북위시대의 것을 위시해서 이른바 ' 육조풍'의 해서가 유명하다. 종요와 왕희지를 걸쳐 초당의 구양순, 우세남, 저수량이 북위서를 계승하고 왕희지법을 더하여 방필에 원필을 가미한 완미(完美)에 가까운 체계를 이루 었고 그 후 안진경이 출현하여 거의 원필을 이 용하여 웅장한 남성적인 해서를 완성하였다. 예서를 간략화하여 만든 것으로 정자 또는 진서라고 한다. 단정하고 균제한 모양 이며, 오른쪽이 위로 올라가는 특색이 있다. | |||||||||||||||||||||||||||||||||||||||||||
행서는 초서와 해서의 중간 형태로 아마 해서와 거의 동시에 생겨나서 발전했으리라 짐작된다. 왕희지의 난정서(蘭亭敍)는 고금에 빛나며 그 후 당의 저수량과 안진경을 거쳐 청에 이르기가지 끊임없이 발달하였다. 해서, 행서, 초서가 널리 쓰이면서 당 이후에는 전서와 예서가 거의 사용되지 않다가 청나라 초기와 중기에 비학의 풍토가 일어나면서 다시 문인묵객의 작품에 전서와 예서가 등장하여 지금까지도 널리 쓰이 고 있다 해서를 빨리 쓴 서체이며 획의 연결이 유동적이며 속도감이 있고 변화가 많 다. | |||||||||||||||||||||||||||||||||||||||||||
초서 : 한 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실생활에 쓰이지 않으며 예술적 면으로 즐겨씀. 종류 : 십칠첩 | |||||||||||||||||||||||||||||||||||||||||||
3. 서예의 실제 | |||||||||||||||||||||||||||||||||||||||||||
영자팔법(永字八法) | |||||||||||||||||||||||||||||||||||||||||||
영(永)자에는 해서의 기본획이 거의 갖추어져 있으므로 예로부터 영자팔법이라고 불렸다. 여덟 가지 획의 형태를 이름을 붙여 놓았는데 이 법을 기본으로 획마다 여러 가지 변화를 할 수 있으므로 한자를 배우는데 매우 중요한 기초가 된다. | |||||||||||||||||||||||||||||||||||||||||||
① 측(側,점) 측은 '기울측'자로 곧 점인데, 붓을 대어 필봉을 오른쪽으로 향하여 힘을 주었을 때 그 세(勢)가 기울어져 있으므로 이런 이름을 붙였다. 그 모양은 강남콩, 밤톨과 유사하다. ② 늑(勒,가로획) ③ 노(弩.세로획) ④ 적(갈고리) ⑤ 책(策:오른삐침) '책찍질할 책'자의 의미와 같이 말을 채찍으로 때리는 기분으로 한다. ⑥ 약(掠) 보통 머리를 빚으로 빚는 것같이 하여 끝에서 힘을 주어 빗어내리는 맛이라 한다. ⑦ 탁(啄) 새가 모이를 쪼는 모양에서 형용된 것으로 짧고 민첩하게 하여야 한다. ⑧ 책 '찢을 책' 보통 파임이라 부른다. | |||||||||||||||||||||||||||||||||||||||||||
점을 측(側)이라고 한다. |
가로획을 늑(勒)이라고 한다. | ||||||||||||||||||||||||||||||||||||||||||
세로획을 노(努)라고 한다. |
갈고리를 적이라고 한다. | ||||||||||||||||||||||||||||||||||||||||||
서예가 | |||||||||||||||||||||||||||||||||||||||||||
안진경(顔眞卿) | |||||||||||||||||||||||||||||||||||||||||||
중국 당나라(709∼785)때 사람으로 자는 청신(淸臣)이다. 안록산의 난을 평정한 인물이며 노군공에 봉해졌으므로 안노공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글씨는 처음에 저수량을 배우고 후에 장욱을 배우고 해서와 행서에서 고법(古法)을 크게 변화시키는 새 풍격을 이루어 왕희지에 필적할 만한 영향을 후대에 끼쳤다. 해서의 조형에 있어서 안진경은 전서와 예서의 특징을 흡수하여 이를 그의 해서에 적용시켰다. 많은 서예가들의 해서가 큰 글씨 쓰기에는 적당치 않았는데 안진경의 해서는 오히려 큰 글씨에 더욱 그 묘한 맛을 발휘한다. 대표작은 해서의 '안근례비' ,'안씨가묘비'와 행서의 '쟁좌위(爭座位)가 있다. 안진경 글씨의 품격은 웅장하고 남성적이다. | |||||||||||||||||||||||||||||||||||||||||||
왕희지(王羲之) | |||||||||||||||||||||||||||||||||||||||||||
중국 동진(321 ~379)때 사람으로 자는 일소(逸少)이다.귀족 출신으로 세칭 왕우군(王右軍)이라고도 부른다. 서예를 예술로 끌어올리는데 눈부신 공을 세웠으며 왕희지 이후의 역대 서예가들이 왕희지를 배우지 않고서는 안 되었을 정도로 끼친 영향이 막대하며 서성(書聖)이라 칭한다. 근거에 의하면 왕희지는 어렸을 때에는 말을 잘 하지 못하였으나 자라면서 오히려 재주가 뛰어나고 성격도 진솔하면서 지조와 절개가 굳었다고 한다. 특히 왕희지는 결코 옛사람의 글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스스로 이치를 깨달아 공부하였며 고법에 얽매이지도 않았다. 그의 대표작은 행서인 '난정서'가 있고, 초서에는 '17첩'이 있다. | |||||||||||||||||||||||||||||||||||||||||||
구양순(歐陽詢) | |||||||||||||||||||||||||||||||||||||||||||
당나라때(557∼641)의 사람으로 자는 신본(信本)이다. 서예는 왕희지를 배워 그 정신의 진수를 얻었기 때문에, 무겁고 응축되고 강하다. 특히 그가 쓴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은 불후의 명작인데 이 때문에 구양순의 체가를 이른바 '구성궁체' 또는 '구체'(歐體)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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