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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 세상 스크랩 한문서예 - 한문서체
墨香 추천 0 조회 267 15.07.13 03: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문서예

중국 서예사

(1) 문자의 생성
한자의 생성은 여섯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한나라 때 허신(許愼)이 <설문해자(說文解字)>의 서(序)에서 주례(周禮)를 근거로 하여 육서(六書)라고 지칭하였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가) 상형(象形) : 실체의 형을 본떠서 만듦 ; 日, 月, 山, 川
         (나) 지사(指事) : 추상적인 개념을 부호로 표시 ; 上, 下, 一, 二
         (다) 회의(會意) : 형(形)과 형(形)을 결합시켜 새로운 음과 뜻의 글자로 만듦 ; 林, 明, 炎
         (라) 형성(形聲) : 형(形)과 성(聲)을 결합시켜 한 쪽은 종류를 다른 한 쪽은 소리를 나타
                                   내는 글자로 만듦 ; 江, 河, 忿,怒
         (마) 전주(轉注) : 글자 본래의 뜻을 전용(轉用)하여 다른 뜻으로 씀 ; 考, 樂
         (바) 가차(假借) : 소리가 같고 뜻이 가까운 글자를 빌어다 씀 ; 亞細亞, 佛蘭西, 口可口樂

이와같이 분류되는 한자는 중국의 전설시대(傳說時代)인 황제시대(黃帝時代)때 창힐(蒼 )이라는 사관(史官)이 상형 문자를 창안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 후 상은시대(商殷時代)로 부터 주(周) 선왕(宣王) 이전까지(B.C 2590-827) 갑골문(甲骨文), 금문(金文), 석문(石文), 도문(陶文)이 생겼다고 하는데 이러한 문자들을 고문(古文) 이라고 칭한다.그 후 대전(大篆), 소전(小篆) 등의 서체가 생기고, 그 후한대(漢代)에 이르러서 예서(隸書), 장초(章草), 초서(草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등이 순서대로 발생하였다고 한다.

서체
명칭

발생과   소멸  시기

통 행
년 수

비     고

발     생

소      멸

고문
(古文)

B.C. 2600∼2500년경
황제(黃帝)가 창힐(蒼 )을 사관으로 임명하여 비로소 문자를 만들었다.

B.C. 827년
주(周) 선왕(宣王) 중흥연간에 사주(史 )가 대주십오편을 지었다.

약1700년

은대의 갑골문에서 주 선왕 이전의 금문(金文), 석문(石文), 도문(陶文)에 이르기까지 모두 속한다.

대전
(大篆)
[주문]
( 文)

B.C. 827
주 선왕때 태사(太史) 주( )가 대전(大篆)을 만들었다.

B.C. 221년
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승상 이사(李斯)가 문자통일을 상소하여 진(秦)의 재래문자를 중심으로 여기에 합치하지 않는 것은 모두 폐지하고 소전(小篆)을 만들어 사용했다.

606년

주 선왕 이후 진 초기까지의 금문, 석문, 도문이 모두 속한다.

소전
(小篆)
[진전]
(秦篆)

B.C. 213년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승상 이사가 문자통일을 상소하여 진의 재래문자를 중심으로 여기에 합치하지 않는 것은 모두 폐지하고 소전을 만들어 사용했다.

B.C. 206년
한(漢) 고조(高祖) 원년에 초와 한이 서로 다툴 때 문자를 간이하게 하였다.

7년

예서가 진의 정막(程邈)이 만들었다고 전하나, 진대에는 소전을 위주로 썼고 초·한이 서로 다툴 때 소전은 속기가 어려워 점차 간이한  예서로 되었다.

예서
(隸書)

B.C. 206년
한 고조 원년에 초.한이 서로 다툴 때 문자를 간이하게 하였다.

353년
진(晋) 목제(穆帝) 영화 9년에 난정자체(蘭亭字體)가 점차 세상에 쓰여져 예서는 소멸되어 갔다.

559년

예서는 고예(진예.한예)와 금예(해서)가 있는데 통상적으로 한예를 지칭한다.

초서
(草書)

B.C. 46에서 33년간
한 원제(元帝)시 사유(史游)가 예서를 풀어서 급취장을 썼는데, 세인이 이를 장초(章草)라 칭했으며 후일에 있은 금초(今草) ,광초(狂草),행서가 모두 장초로 말미암아 변화하여 된 것이다.

초서는 응급시 편리하여 그 유행이 지금까지 쇠하지 않는다.

현  행

초서를 혹 진대(秦代)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그 사실을 고증하기 어렵다.장초를 만든 사람은 사유, 두조(杜操), 두도(杜度)라는 세 가지 설이 있는데 두조, 두도는 동한(東漢) 장제(章帝)시대 사람이니 사유라는 설이 시간적으로 가장 합당하여 세인이 모두 그 말을 따른다.

해서
(楷書)
[정서]
(正書)
[진서]
(眞書)

220년
삼국시대 위(魏)의 태부(太傅) 종요(鍾繇)가 지극히 결구가 정제된 하첩표(賀捷表)를 썼는데 이것을 해서의 시조로 본다. 이는 예서에 비해서 빠르고 편리하여 모두 이를 좇았다. 그러나 해서의 발생은 실로 불확실하며 수(隋)를 거쳐 당(唐)에 와서 완성되었다.

해서는 공정수호하여 지금의 인쇄활자로 쓰이고 쓰기에 편리하여 지금도 사용된다.

현   행

해서는 한 장제때 왕차중(王次仲)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삼국시대 위의 종요가 해서를 제일 잘 써 그는 해서의 시조로 추앙된다. 위는 오히려 전서로 쓴 삼체석경(三體石經)이 있으나 당시 사람들은 편장(篇章)과 법령(法令)을 쓸 때 모두 해서를 사용했다.

행서
(行書)

353년
진 목제 영화 9년에 왕휘지가 난정집서(蘭亭集序)를 지어 썼는데, 수일연미하여 세칭 난정자체라는 것이 이로부터 크게 행해졌다.

행서는 해서의 구속됨이 없고 초서의 방일함도 없어 오랫동안 유행하여 지금도 널리 쓰이고 있다.

현  행

행서는 한 환제시 유덕승(劉德升)이 만들었다고 전해 지는데 종요, 호소, 왕희지 등이 제각기 잘 썼으며, 이는 편지글이나 모든 문서류에 많이 쓰였다.

◈◈  중국 서예의 역사  ◈◈

  은 시대(B.C. 1751∼1123) : 갑골문.
  
주 시대(B.C. 1700∼ 700) : 종정문(금문)·대진(주문)―서주 선왕 때 사주가  정리(주문이라고

                                        도  한다)―석고문.
  진 시대(B.C. 249∼ 207)
: 소전(진전)―진시황이 이사에게 정리하도록 하였다.
  한 시대(B.C.  202∼A.D. 207) : 고례→팔분(금례 또는 한례), 장초(초서의 원형), 비의 건립

                                         (고례―노효왕 각석, 팔분―을영비·장천비·예기비·조전비).
  삼국(위·오·촉) 시대(220∼280) : 해서―위의 종요가 정리.
                                                       장초→초서, 행서가 출현.

  진(진·서진·동진) 시대(280∼420) : 동진의 왕희지·황헌지 부자에 의해 행·초서의 완성

                                                         (난정서).
  남·북조 시대(420∼589)
: 남조-왕희지 서풍(온아·세련), 북조-힘찬 육조풍 (용문조상기·

                                           정희하비·장맹룡비).
  수 시대(581∼618)
: 남·북 서풍의 통일.
                                   지영-초서(진초 천자문).
  당 시대(618∼907)
: 3대가(구양 순·저수량·우세남) 이후 안진경이 나타나 해서의 전성기.

                                   손과정의 처서가 유명함. 구양 순

       -구성궁예천명, 저수량-안탑성교서, 우세남-공자묘당비, 안진경-안근례비, 손과정-서 보

         (우리 나라에도 영향을 주었다.)
  송 시대(960∼1279) : 형식보다 필의를 존중. 4대가(소식·황정견·채양·미불)
  원 시대(1271∼1368) : 서화 동원설(황회지 서법을 통한 복고주의), 조자앙(조 맹부)의 송설체

                                     (우리 나라에도 영향), 선우추·가구사.
 
 명 시대(1368∼1644) : 초기-송설체, 중기-축윤명·문징명, 말기-동기창.
  청 시대(1644∼1912)
: 고증학·금석학의 발달. 서예 이론가도 등장. 첩파-법첩 연구(유용),

                                   비파-고대 비갈연구(등석여·완원·포세신·오양지·조지겸·오준경·

                                   오창석·하소기). 서예 리론가(포세신·강유위).

 古文

갑골문(甲骨文)
갑골문은 귀갑수골(龜甲獸骨)의 준말이다. 갑골문은 은나라 때에 점을 치기 위한 정복문(貞卜文)과 그 당시 사실 을 적은 기사문(記事文)이다. 갑골문은 상형문자에 가까우며, 예리한 공구로 새겨서 직선 이 많고 획의 끝이 뾰족한 것이 그 특징이다.갑골문은 1899년에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금 문(金文또는 鍾鼎文)

금문은 청동기 시대의 산물로 그 대부분이 종이나 솥 따위에 주각(鑄刻)하였으므로 종정문이라고 부른다.

그릇, 무기, 거울, 도장, 돈 같은 것에서도 발견된다.

동기에 문자를 기록하는 것은 상(商)에서 한 (漢)에까지 이른다.

금문은 갑골문을 계승하고 진(秦)대의 소전(小篆)에 이어지는 대전(大篆)이다.

 전 서(篆書)

전서는 대전과 소전으로 나뉜다. 대전은 주문이라고도 하는데 주나라 때 사주가 문자의 짜임을 실용 적으로 간소화 시켰으므로 붙여졌다.

대표적인 것으로 주대의 석고문이 있다. 돌을 쪼아서 북(鼓)의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漢代에 와서야 장방형의 碑가 생기게 되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문자의 통일을 꾀할 때에 이사(李斯)가 대전의 서체를 더 간략하게 만들었 는데 그 서체가 소전이다.

소전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진시황의 공적을 기록한 태산각석, 낭야대각석, 역산비가 있다. 소전은 모두가 원필이며 자형이 아래와로 길다.

서체의 시발이므로 상형성을 많이 띠고 있고, 좌우 대칭, 상하대칭이 특징이다.
                  대전 : 3천 5백년 전 은, 주 시대에 창시
                  소전 : 진시황때 대전을 정리, 통일하여 이사가 만든 것.
                  종류 : 대전(모공정, 산씨반, 석고문...), 소전(태산각석, 낭야대각석...)

  예 서(隸書)

전서는 대칭을 맞추어야 하고 곡선이기 때문에 쓰기가 불편하다. 그리하여 곡선을 직선으로 바꾸고 원필도 방필로 많이 바꾸고, 필획도 줄여서 쉽게 쓰게 한 것이 예서(隸書)이다.

기록을 보면 예서는 정막(程邈)이 만들었다. 그가 죄를 지어 감옥에 있을 때 십 년을 연구하여 예서 삼천자를 지어 진상하였는데 진시황이 좋게 여겨 어사를 시켰다.

예서란 말은 진대의 복역수를 도예 (徒隸)라 하였는데 장막이 그러했으므로 예(隸)자를 따서 지었다.

예서에서 파책이 없는, 곧 전서와 근접한 것을 고예(古隸)라 하고 파책이 있는 것을 팔분(八分)이라 한다. 예서는 전한과 후한에 걸쳐 끊임없이 발달하였다.

조전비와예기비 같은 유려형(流麗 型), 장천비와 같은 방정형(方整型), 하승비 (夏承碑) 같은 기고형(奇古型)들로 분리된다.

예서의 자형은 납작한 것이 보통이다.

전서에서 해서의 형태를 갖추어 가는 중간 형태이며 가로획의 한 획만  반드시 파세를
                  한다. 경사가 없고 수평적이다.
                  종류 : 고예(광개토대왕비), 팔분예(예기비, 조전비, 을영비, 장천비,사신비...)

  해 서(楷書)

예서가 더 실용적으로 변모하면서 위진 남북조 시대에 와서 해서의 특유한 풍격을 이루었다.

해서는 지금의 정자인데 북위시대의 것을 위시해서 이른바 ' 육조풍'의 해서가 유명하다.

종요와 왕희지를 걸쳐 초당의 구양순, 우세남, 저수량이 북위서를 계승하고 왕희지법을 더하여 방필에 원필을 가미한 완미(完美)에 가까운 체계를 이루 었고 그 후 안진경이 출현하여 거의 원필을 이 용하여 웅장한 남성적인 해서를 완성하였다.

예서를 간략화하여 만든 것으로 정자 또는 진서라고 한다. 단정하고 균제한 모양                   이며, 오른쪽이 위로 올라가는 특색이 있다.

                  종류 : 당해(안근례비, 구성궁예천명...), 육조해(장맹룡비, 조상기...)

  행 서(行書)

행서는 초서와 해서의 중간 형태로 아마 해서와 거의 동시에 생겨나서 발전했으리라 짐작된다. 왕희지의 난정서(蘭亭敍)는 고금에 빛나며 그 후 당의 저수량과 안진경을 거쳐 청에 이르기가지 끊임없이 발달하였다.

해서, 행서, 초서가 널리 쓰이면서 당 이후에는 전서와 예서가 거의 사용되지 않다가 청나라 초기와 중기에 비학의 풍토가 일어나면서 다시 문인묵객의 작품에 전서와 예서가 등장하여 지금까지도 널리 쓰이 고 있다

해서를 빨리 쓴 서체이며 획의 연결이 유동적이며 속도감이 있고 변화가 많 다.
                  종류 : 난정서, 집자성교서, 쟁좌위고...

초서 : 한 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실생활에 쓰이지 않으며 예술적 면으로 즐겨씀. 종류 : 십칠첩

3. 서예의 실제
   

   ②한자
      ㉠해서 : 방정하고 근엄하게.
      ㉡행서 : 필순·변화·억양에 유의.
      ㉢초서 : 전절 부분의 운필법에 유의.
      ㉣예서 : 용필·개형·파책에 유의.
      ㉤전서 : 가로·세로 획이 수직이 되도록, 전절은 둥글게.

영자팔법(永字八法)

영(永)자에는 해서의 기본획이 거의 갖추어져 있으므로 예로부터 영자팔법이라고 불렸다. 여덟 가지 획의 형태를 이름을 붙여 놓았는데 이 법을 기본으로 획마다 여러 가지 변화를 할 수 있으므로 한자를 배우는데 매우 중요한 기초가 된다.

youngja

측(側,점)

측은 '기울측'자로 곧 점인데, 붓을 대어 필봉을 오른쪽으로 향하여 힘을 주었을 때 그 세(勢)가 기울어져 있으므로 이런 이름을 붙였다. 그 모양은 강남콩, 밤톨과 유사하다.

늑(勒,가로획)
'재갈물릴 늑'자이다. 가로획의 긴 것을 이르며 달리는 말을 재갈로써 제어하는 기분으로 쓴다는 뜻이다.

노(弩.세로획)
'활 당길 노'자이다. 가로획을 뒤집어 놓은 모양이다.

적(갈고리)
'뛴다'는 뜻으로 구(鉤:갈고리 구)라고도 한다. 갈고리는 세로획으로 내려 와서 쓰러져 있는 붓의 일어나는 탄력으로 튀어나가면 된다. 안진경체는 이에 합치가 되나 구체는 튀어나간다기 보다는 오히려 짧은 획을 긋는 것에 가깝다. 흔히 갈고리, 파임만 잘 하면 잘 쓰는 글씨라 할 만큼 좀 어렵기도 하고 또한 중요한 획이다.

책(策:오른삐침)

'책찍질할 책'자의 의미와 같이 말을 채찍으로 때리는 기분으로 한다.

약(掠)

보통 머리를 빚으로 빚는 것같이 하여 끝에서 힘을 주어 빗어내리는 맛이라 한다.

탁(啄)

새가 모이를 쪼는 모양에서 형용된 것으로 짧고 민첩하게 하여야 한다.

'찢을 책' 보통 파임이라 부른다.

영자팔자법

영자팔자법

점을 측(側)이라고 한다.
필봉을 기울려 날카롭게 떨어뜨린 다음
붓털을 펴서 진행시키다가
발을 디디는 형세를 취한 다음
붓을 거둔다

가로획을 늑(勒)이라고 한다.
붓을 역입(逆入)한 후 필봉을 지면에 댄다.
그리고는 서서히 진행하다가 급하게 돌리되
붓을 평평하게 해서는 안된다.

영자팔자법

영자팔자법

세로획을 노(努)라고 한다.
지나치게 곧거나 너무 빼어서도 안된다.
너무 곧으면 힘이없게 되므로 곧은 중에도 굽은 형세를 취하여야 한다.

갈고리를 이라고 한다.
붓 끝을 머무르게 하고 붓을 누른 다음
갑자기 뛰게 하면 힘이 붓 끝에 집중된다.

서예가

안진경(顔眞卿)

중국 당나라(709∼785)때 사람으로 자는 청신(淸臣)이다. 안록산의 난을 평정한 인물이며 노군공에 봉해졌으므로 안노공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글씨는 처음에 저수량을 배우고 후에 장욱을 배우고 해서와 행서에서 고법(古法)을 크게 변화시키는 새 풍격을 이루어 왕희지에 필적할 만한 영향을 후대에 끼쳤다. 

해서의 조형에 있어서 안진경은 전서와 예서의 특징을 흡수하여 이를 그의 해서에 적용시켰다. 많은 서예가들의 해서가 큰 글씨 쓰기에는 적당치 않았는데 안진경의 해서는 오히려 큰 글씨에 더욱 그 묘한 맛을 발휘한다.

대표작은 해서의 '안근례비' ,'안씨가묘비'와 행서의 '쟁좌위(爭座位)가 있다. 안진경 글씨의 품격은 웅장하고 남성적이다.

왕희지(王羲之)

중국 동진(321 ~379)때 사람으로 자는 일소(逸少)이다.귀족 출신으로 세칭 왕우군(王右軍)이라고도 부른다.

서예를 예술로 끌어올리는데 눈부신 공을 세웠으며 왕희지 이후의 역대 서예가들이 왕희지를 배우지 않고서는 안 되었을 정도로 끼친 영향이 막대하며 서성(書聖)이라 칭한다.

근거에 의하면 왕희지는 어렸을 때에는 말을 잘 하지 못하였으나 자라면서 오히려 재주가 뛰어나고 성격도 진솔하면서 지조와 절개가 굳었다고 한다.

특히 왕희지는 결코 옛사람의 글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스스로 이치를 깨달아 공부하였며 고법에 얽매이지도 않았다.

그의 대표작은 행서인 '난정서'가 있고, 초서에는 '17첩'이 있다.

구양순(歐陽詢)

당나라때(557∼641)의 사람으로 자는 신본(信本)이다.

서예는 왕희지를 배워 그 정신의 진수를 얻었기 때문에, 무겁고 응축되고 강하다. 특히 그가 쓴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은 불후의 명작인데 이 때문에 구양순의 체가를 이른바 '구성궁체' 또는 '구체'(歐體)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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