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째 날 – 서안의 풍경
서안 시앤양(咸陽) 공항에 도착했다는 기내 방송이 들린다. 공항을 나서는데 낯익은 얼굴의 사람이 눈에 띈다. ‘어! 김00선생님 아니십니까?’ 서로 금방 알아보며 안부와 오늘의 경위를 묻는다. 세상에! 이런 인연이라니! 뵌 지가 10여 년이 된 터였다. 50대의 중년이 되어 만나는 인연이라니!
중국 땅 시안(書安)에서 우연한 만남과 함께 중국여행의 첫 걸음이 시작된다.
희뿌윰한 대기가 옅은 연무(烟霧)에 휩싸여 있는 탁한 날씨가 우리를 맞는 함양의 첫 인상이다. 목이 약간 매캐한 느낌이다. 대낮인데 안개 낀 아침녘 같다. 가까운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는다. 호텔 식당인데 상차림이 고개를 외로 돌리게 한다. 우리가 좋은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는 가이드의 자찬(自讚)의 말이 역한 반응을 일으킨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함양 공항을 출발해 서안으로 가는 고속도로 위를 달린다.
차창 밖으로 하천이 보인다. 가뭄 탓인지 원래 물이 적은지 물이 많지 않다. 가이드가 이곳이 위하(渭河))라고 한다. 초한지(楚漢志)에 나오는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격전을 벌였던 강이었으며, 강태공이 세월을 낚던 곳이라 설명한다. 그리고 길 좌우로 보이는 넓은 지역을 관중평원(關中平原)이라고 하는데, 동서로 길이가 400Km로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와 같다고 한다. 책에서 읽은 역사의 현장을 차창 밖으로 보면서 묵상(黙想)에 잠긴다.
위하는 ‘위수(渭水)’라고도 하는데 황하(黃河)의 한 지류를 이른다. 강태공(지금은 낚시꾼의 별칭이 됨)이 낚시를 하다 서백(西伯 : 후에 주나라 문왕이 됨)을 만나 재상에 발탁되어 널리 알려진 곳이다. 강태공의 이름은 상(尙)이다. 그의 조상이 여(呂)나라에 봉해져 ‘여상(呂尙)’이라고도 한다. 문왕의 조부인 ‘태공(太公)’이 바라던(望) 사람이라 ‘태공망(太公望)’이라 불린다. 그래서 ‘강태공’이라는 별칭이 생기게 되었다. 후에 주나라 무왕(武王 : 문왕의 아들)을 도와 상(商 : 은나라)나라 주왕(紂王)을 정벌하여 천하를 제패하고 제(齊)나라 제후에 봉해진다. 그에게는 유명한 고사(故事)가 있다. 그는 공부만 하느라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다. 벼슬은 하지 않고 글만 있었는데, 어느 날 글을 읽느라 정신이 팔려 말리고 있던 곡식이 비에 떠내려가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그렇게 집안일에 신경 쓰지 않아서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아내가 그만 집을 나갔다고 한다. 그런 그가 제나라의 제후가 되었으니, 집을 나갔던 머리가 허옇게 센 늙은 아내가 그를 찾아와 지난날의 일을 뉘우치며 다시 거두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랬더니 강태공이 신하에게 물을 한 동이 떠오라고 하여 땅바닥에 붓고는 다시 동이에 담을 수 있다면 받아들이겠노라 했단다. 그래서 ‘엎지른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뜻의 ‘覆水不返盆(복수불반분)’이라는 성어가 나오게 되었다. 태공망에게는 ‘窮八十 達八十(궁팔십 달팔십 : 궁하게 산 팔십 년 호화롭게 산 팔십 년)’이라는 재미있는 성어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지만 말이다.
관중평원(關中平原 )은 중국의 역사서인『사기(史記)』에 '금성천리(金城千里 : 쇠로 만든 성이 천리)' 또는 '천부지국(天府之国 : 천혜의 자연 지역)' 및 '사새지국(四塞之国 ; 사면이 요새인 지역)으로 불리며 서주 이래로 12개 왕조가 도읍을 정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황하가 범람하여 이루지는 비옥한 토질과 천연의 요새를 이루어 ‘관중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관중(關中)’이라는 말은 ‘관(關 : 옛날에 국경이나 요지의 출입문)’의 가운데라는 뜻으로 ‘동쪽의 함곡관(函谷關), 서쪽의 대산관(大散關), 남쪽의 무관(武關), 북쪽의 소관(蕭關)’ 가운데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사방이 천혜의 요새를 이루기에 ‘사새지국(四塞之国)이라 불린 것이다. 그러니 이곳을 얻으면 당연히 천하를 얻기에 수월했을 것이다. 그랬던 천혜의 요새지 함양의 궁궐을 불태우고 재물을 약탈했던 항우와 약법삼장(約法三章 : 한나라 고조 유방이 함양에 들어가 유력자들과 약속한 법 삼장)으로 함양 땅에서 인심을 얻은 유방의 정치적 안목으로 천하를 얻게 되는 초한전의 귀결점.
초한지에서 펼쳐지는 항우와 유방의 대격전을 회상하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그렇게 장렬한 영웅들의 쟁투가 펼쳐졌던 격전의 장은 흔적도 없고 광활한 평원엔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찼다. 그런 들판에 시원스레 뚫린 고속도로 위로는 수많은 자동차들이 경쟁하듯 질주를 한다.
첫 번째 관광할 곳인 실크로드 출발지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서 숨을 들이켜니 흙냄새가 난다. 조정래 선생의 소설『정글만리』에 나오는 장면 그대로 마스크를 해야 할 것 같다.
실크로드 출발지 석조 부조
벽돌로 쌓은 커다란 문이 세워져 있고 대리석 돌이 깔린 공터엔 팽이를 치며 놀이를 즐기는 사람이 있다. 비단길의 출발지임을 알려주는 대상(隊商)을 조각한 대형의 석조 부조물이 우람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그 앞에서 남녀 노인이 중국의 전통 악기인 ‘얼후(二胡)’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며 여가를 즐기고 있다. 그저 평범한 곳에 조그만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그 옆에 비단길(중국말 : 絲綢之路(사조지로)의 안내도가 돌비석에 새겨져 있다. 그런데 동해바다가 ‘일본해(日本海)’로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중국 지도 여러 곳에서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곳에 와서 다시 확인하니 분노가 인다. 그냥 그렇게 나만 알고 가는 것인가? 부조물을 살피며 걷다가 ‘문명교류사’의 세계적 권위자인 정수일 선생의『실크로드학』이라는 책이 떠오른다. 선생은 비단길의 한반도 연장설을 주장하며 우리나라의 ‘경주’로 출발지를 삼았다. ‘실크로드’ 연구에 대한 기존의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실크로드가 포함하는 시⦁공간적 방대함에 대한 문명교류사의 일부로 실크로드를 연구하여 하나의 새로운 학문으로 정립하였다.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금빛으로 커다란 글자가 양각된 “大唐芙蓉園(대당부용원)”이라는 곳에 왔다. 입구에는 “九天門(구천문)”이라고 쓰여 있고 현수막에 “熱烈祝賀新修改《安全生産法》公布實施(열렬축하신수개《안전생산법》공포실시)”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새로운 법의 시행을 환영하는 현수막이다. 가이드가 매표소에 갔다 오더니 공연을 안 한다고 ‘大雁塔 北廣場(대안탑 북광장)’으로 이동한다.
대안탑과 분수
퇴근시간이라 교통이 혼잡하다. 복잡한 출퇴근 시간을 중국어로 ‘高峰時間(까오펑 스쟨 : 최고 정점 시간)’이라한다. 성문으로 들어간다. 성안의 도시가 성 밖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가이드의 설명으로 ‘종루(鐘樓 : 우리나라 서울의 종각과 같다)’ 광장을 지나가고 있음을 안다. 종루는 명나라 때 세워진 건물로 도성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리기 위해 건축한 것이다. 북 광장에 도착했다. 멀리 대안탑이 보이고 커다란 분수가 있는데 겨울철이라 분수가 작동되지 않는다고 가이드의 설명이다. 대안탑은 들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출입이 금지되고 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다.
대안탑은 현장법사(玄奘法師)가 인도 ‘천축국(天竺國)’에서 가져온 불경을 간직하기 위해 당나라 때 건립한 탑이다. 지금의 탑은 명나라 때 둘레를 다시 개수한 것이다. 원래의 이름은 ‘자은사탑(慈恩寺塔)’이다. 자은사는 당나라 고종의 어머니인 문덕황후가 돌아가자 그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사찰이다. 그래서 탑의 이름이 된 것이다. 사각형의 칠층 전탑(塼塔 : 벽돌 탑)으로 높이가 64m나 되어서 유명해진 탑이다. 옛날에는 “雁塔題名(안탑제명)”이라 하여 과거 급제자들이 이 탑에 올라가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지금은 들어가서 볼 수조차 없다. 그저 멀리서 그 웅장함을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탑이 있는 사찰을 둘러 싼 담장에 현장이 불경을 구해오는 장면이 부조(浮彫)되어 있다. 부조를 찬찬히 훑어보며 걷는다.
대안탑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진다고 한다. 현장법사가 인도로 구법(求法)여행을 가다가 길을 잃었는데 기러기가 길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탐 이름에 기러기 ‘안(雁)’자가 들어갔다고 한다.
해질녘이 되니 운무가 뿌옇게 보인다. 옆으로 시민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여러 가지 나무와 화초 및 식물들이 심어져 있어서 둘러보다가 특이한 나무가 보인다. 원줄기가 곧게 자라다가 위에서는 용이 똬리를 튼 듯이 구부러진 모양에 가지가 뻗어 나갔다. ‘龍爪槐(용조괴)’라는 이름이 붙어 있고 시에서 보호하는 보호수라고 적혀있다. 회화나무의 일종인 것 같다. 회화나무가 오래되면 용이 서린 듯 똬리를 틀고 있는 모양이라 ‘龍槐(용괴)’라는 말이 한시에 보인다.
북광장을 산보하듯 거닐며 두루두루 살펴보고 다음 장소인 야시장인 회족(回族)거리로 간다고 한다. 중국어로는 “후이민지에(回民街 : 회민가)”라고 한다. 중국도 주차난이 심해서 회족거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소방서 앞에 주차를 했다.
회족 거리 입구 돌패방(牌坊)
회족 거리 야시장으로 간다. 많은 사람들이 붐빈다. 거리의 좌우에 늘어선 가게엔 수많은 물품들이 행인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먹을거리와 기념품 및 갖갖이 장신구들을 펼쳐 놓고 호객을 한다. 중국인들은 음식을 사먹으며 거리를 활보한다. 족 음식인 양고기 꼬치(중국어로 양로우츄알(羊肉串儿)가 보인다. 그 외에 특유의 많은 음식들이 좌판에 쌓여 있다. 두부로 만든 음식을 양념장에 찍어 먹어보니 맛이 있다. 조정래 선생의 소설에서 달콤하다는 작은 홍시(감)를 사서 먹는다. 어려서 콩시라고 일컫던 작은 연시와 같다. 조그마한 감 20개를 팩에 담아 10위안을 받는다. 감은 이 고장 특산이란다. 석류도 많이 난다고 한다. 석류의 빨간 즙을 컵에 담아서 판다. 호도의 딱딱한 껍질을 살짝 깨고 소금에 볶아서 팔기도 한다.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어린애 주먹만 한 크기의 대추다.
개 대가리 대추
‘狗頭棗(구두조 : 개 대가리 대추)’라고 쓰여 있다. 양의 발도 튀겨서 판다. ‘羊蹄(양제 : 양 발굽)’라고 한다. 단백질이 풍부해서 미용에도 좋은 건강식품으로 이슬람 사람들의 전통 음식이란다. 서안을 대표하는 유명한 음식인 ‘파오뭐(泡饃 : 포막)’도 있다. 저녁에 호텔에서 TV를 보니 이 음식을 하는 식당을 집중 취재하는 장면이 있어서 자세히 보았지만, 거리에서는 물만두인가 정도로 생각했다. ‘饸饹(흐어러)’라는 메밀가루나 수수가루 따위로 만든 틀국수도 있다. 중국 북부지방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다.
회족이라는 말은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쌍화점(雙花店 : 만두가게)”이라는 고전을 통해서 처음 접했던 기억이 난다. ‘만두가게에 만두를 사러 갔다가 회회아비(몽골인)가 손을 잡았는데 이 일이 여기저기 소문이 나면’하는 내용으로 된 기억이 난다. 퇴폐적인 성 윤리 의식을 나타내어 조선시대에는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로 지목된 대표적인 곡이라고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회회(回回)’라는 말은 몽골인이 아니라 이슬람 사람을 말하는 한자어 표기다.
저녁을 먹고 호텔에 여장을 푼다. 간단한 짐정리를 하고 김선생님 일행 분과 서안의 밤거리를 구경할 겸 중국 인민들의 삶을 체험할 겸 밖으로 나갔다. 시내의 풍경은 서울과 다름이 없지만 상점의 간판이 한자투성이라 이곳이 중국임을 알려준다.
식당을 살펴보다가 만만한 집으로 들어간다. 중국 고량주와 안주를 시킨다. 김선생님이 중국인들이 먹는 일상 음식과 술을 마시고 싶다 하여 메뉴판에서 이것저것 보다가 적당한 것을 시킨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저간의 일들을 이야기 한다. 가이드가 내일의 일정 변경에 따른 금전적인 문제로 일행들과 마찰이 있는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중국인이면서 한국 동포이기도 조선족의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 말한다. 베이징에서 가이드의 전횡에 몸살을 앓았다고 김선생님은 말한다. 그러면서 오늘의 일과 앞으로의 일정에서 껄끄러워질 것을 예단한다. 조선족에 대한 한국인들의 심정과 중국인들에 대한 선입견 등에 대해 술안주 삼아 이야기를 나눈다. 중국사람 식당에서 그들의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는 체험을 아주 흐뭇해하는 김선생님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다. 소식이 단절됐던 10여 년의 세월을 회고하며 함께하는 즐거움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며 이야기를 나누다 늦게 호텔로 들어와 내일을 위한 휴식을 취한다.
둘째 날 – 화산(華山)의 정취(情趣)와 발 마사지
새벽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컴컴한 거리에 괴괴한 적막감이 흐른다. 이국땅의 캄캄한 새벽도 별다른 감흥은 없다. 한국에서처럼 책을 펼쳐 아침 공부를 한다.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오늘 일정인 화산을 향해 출발한다. 날씨가 참 좋다. 서안의 날시 답지 않게 쾌청하다. 화산까지는 2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한다. 가이드가 화산 및 중국에 관해 설명을 하지만 난 나대로 차창 밖의 풍경을 유심히 살피며 중국문화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본다.
화산은 오악(五嶽)의 하나로 동쪽은 태산(泰山), 서쪽은 화산(華山), 남쪽은 형산(衡山), 북쪽은 항산(恒山), 중앙은 숭산(崇山)이다. 오악은 중국의 대표적인 산을 다섯 방위로 나눈 것을 말한다. ‘5’라는 숫자는 ‘오행사상’에서 유래한다.
화산이 얼마 남지 않았다. 차창 밖으로 멀리 낙타의 등처럼 뾰족뾰족한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도로표지판에 ‘소화산(少華山)’이라 적혀 있다. 중국 전설 한 토막이 생각난다. 전설에 의하면 황하의 강물이 화산에 막혀 흐르지 못하자 황하의 신인 ‘거령(巨靈)’이 ‘태화산(太華山)’과 소화산의 둘로 쪼개어 그 가운데로 물이 흐르게 했다고 한다.
화산 전경도
화산 가는 주차장에 내려서 매표소로 올라간다. 매표소 앞에 화산전경도(華山全景圖)를 커다란 바위에 음각으로 멋지게 새겨 놓았다. 옆에 ‘奇險天下第一山-華山(기험천하제일산-화산)’이라 쓴 안내판이 있다. 화산의 위치와 역사에 대한 설명과 ‘화산은 기(奇), 험(險), 준(峻), 수(秀)의 네 글자로 표현되고 화강암으로 이루어졌으며 중화(中華)의 ’화‘가 여기서 유래한다.’고 되어 있다.
가이드가 매표를 하러가면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여 일행들은 기념사진을 찍고 매표소에 들어간다. 바닥에 화산전체의 축소 모형을 만들어 놓고 투명유리판을 깔아 놓아 한 눈에 기기묘묘하고 우람한 화산의 전경을 볼 수 있다. 안내도를 따라 희희낙락하며 미리 화산을 답사해 본다. 매표소 안내판을 보니 우리가 가기로 한 북봉보다 더 높고 산세가 수려하다고 하는 서봉의 가격 차이를 보니 가이드가 제시했던 가격보다 훨씬 차이가 적다. 그래도 가이드가 제시한 가격에 서봉을 가기로 일행들이 결정을 하고 가이드를 찾으니 보이지 않는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화산행 셔틀버스를 타고 화산으로 간다.
화산을 오르기 위한 장소로 이동하는 도로가 구절양장(九折羊腸)의 험한 산길을 닦아 놓았다. 계곡에는 물이 없는 건천인데, 이렇게 험한 산 속에 인가가 있다. 산기슭 밭에는 감나무가 심어져 있다. 돌로 이루어진 험한 산기슭에 밭은 조성했는데 돌로 축대를 층층이 쌓아 올려서 밭은 일구었다. 산세의 험악함에 혀를 내두르고 축대를 쌓은 밭에 탄성이 절로 난다. 밭에 심어진 감나무에는 아직 따지 않은 분홍색 감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손이 모자란 탓일까? 까치밥은 아닐 텐데. 어제 회족 거리에서 사먹은 작은 감과 같아 보인다. 처음에 셔틀버스를 탈 때는 장삿속이라 했는데 오르는 산길의 험난함을 보니 이해를 하겠다.
화산 석조 패방
주차장에서 내리니 중앙에 “太華勝景(태화승경 : 태화산의 빼어난 경치)”이라 쓴 커다란 다섯 개의 문이 있는 석조 패방(牌坊) 뒤편으로 화산의 모습이 보인다. 조금 더 오르니 세 개의 문이 있고 가운데 “尊嚴峻極 天威咫尺(존엄준극 천위지척 : 존엄하고 대단히 높은 천자의 위엄이 가까이 있음)”이라 쓴 짙은 갈색의 패방을 지난다. 케이블카를 타는 곳에 왔다. 겨울철이라 사람이 많지 않다. 케이블카는 중국어로 ‘란처(纜車 : 람차, 닻줄 차)’라고 하는 데, 이곳엔 ‘수어따오(索道 : 삭도, 동아줄 길)’라고 되어있다. ‘가공삭도(架空索道)’의 줄임말이다. ‘索(삭)’자는 ‘책속에서 항목이나 낱말 등을 찾는 목록’을 말할 때는 ‘찾을 색’이라 읽고, 동아줄이나 새끼를 말할 때는 ‘삭’이라 읽는다. 케이블로 연결하여 물건이나 사람을 나르는 것을 말하는 영어의 ‘ropeway’를 ‘索道’라고 번역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수어따오를 타고 화산을 오른다. 중국과 독일의 합작으로 건설했다고 한다. 서서히 화산으로 오르는 수어따오 안에서 아래의 경치를 내려다본다. 산을 오르는 계단 길이 보인다. 무공을 연마하는 화산파가 있었다고 하던데 이렇게 험한 길을 올라야 신체를 단련하고 최고의 경지에 오르는 무공을 이룰 수 있으리라.
몇 개의 고개를 넘고 넘어야 화산의 정상에 오르는지. 수어따오가 한 고개를 넘어간다. 인간의 힘으로는 오를 엄두도 못 낼 바위산에 철탑을 세우고 굵은 쇠줄 하나를 연결해, 우물물을 퍼 올리는 두레박처럼 매달려 장천을 떠가는 아슬아슬함이, 손에 땀을 쥐고 온 몸이 경직되며 오줌을 찔끔거리게 하니 작은 움직임에도 추락할 것 같아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며 고개도 돌리지 못한다. 간신히 좌우사방으로 눈동자만 굴리며 둘러보니, 위로는 푸른 하늘이고 아래는 흰색 화강암의 기묘한 바위가 거대한 산을 이루었다. 그 바위에 나무들이 자라고 있으니 끈질긴 생명력의 경이로움을 느낀다. 미국 영화 《클리프행어》에서 보았던 끊어진 케이블카 위에서 두 사람이 싸우는 장면에서 그 아슬아슬함에 숨도 못 쉬고 영화에 빨려들어가던 긴장감을 느낀다. 용기를 내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한 만 길 낭떠러지 밑으로 바위협곡이 마치 저승 야차(夜叉)가 잡아먹을 듯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만 같아 진저리를 치며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멀리 폭포를 이룬 바위 골에 얼음이 얼어 있어 여름철 장마가 지면 이태백의 시구절처럼 “飛流直下三千尺(비류직하삼천척 : 떨어져 날리는 물줄기가 삼천척이네)”의 장관을 이루리라. 까마득한 아래로 바위산 중턱의 평지를 이룬 곳에 인가도 보인다. 김용(金鏞)의 무협소설『소오강호(笑傲江湖)』에 나오는 화산파의 후예가 검술을 연마하던 장소로 전해지는 곳인가?
삭도(索道)에서 본 화산
수오따오가 외줄에 매달려 산등성이를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의 긴장감이 더욱 자지러지게 한다. 혹시 브레이크가 고장이 나서 쏜살같이 아래로 내려갈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거의 90도에 가까울 정도의 경사진 쇠줄에 매달려 내려가는 수어따오 안에서 느끼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은 환상의 극치를 넘어 몽환적 감각 그 자체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황홀함에 빠진다. 눈은 눈대로 펼쳐진 시야에 그대로 빨려들고 몸은 몸대로 오감이 작동하여 마음의 제동을 해체해 버린다. 바위면 바위 나무면 나무는 또 어떤가? 생김생김이 조물주의 조화로움이요, 생명체가 살아가는 우주의 섭리라 느껴진다. 작은 인간의 몸으로 좁은 세상에 살면서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인양 행동하는 인간의 오만함이 가소롭게 느껴진다. 이런 무한의 경치를 못보고 죽는다면 어찌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으랴! 화산 한 곳만 보고도 이런 감상이 드는데 세상에는 또 얼마나 많은 절경들이 있는가? 더욱이 우주라는 대자연에서 보면 인간이란 보잘 것 없는 존재의 허무감이 느껴진다. 장자가 말하는 6월의 바람을 타고 구 만 리 장천을 날아가는 대붕(大鵬)의 “소요유(逍遙遊)”가 이런 뜻일까? 비록 문명의 이기(利器)를 이용해서 하늘을 날고 있지만 말이다. 그렇게 화산의 정상을 오르는 곳에 도달했다.
바위산 곳곳에 잔설이 남아 있고 굵은 나무와 잡목들이 숲을 이루었다. 생김새는 자작나무인데 수피(樹皮)가 붉은 색을 띈다. 나중에 알았지만 '거제수나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도 있다. 굵은 나무에 화산송(華山松 : 화산 소나무)이란 팻말이 붙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보는 소나무와는 몸체가 다르다. 이백의 시에 “太華生長松 亭亭凌霜雪(태화생장송 정정릉상설 : 태화산의 오래된 소나무 꿋꿋이 눈서리 아랑곳 않네)”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소나무를 말하는 것인가?
바위산을 오르는 길이라 오르기 편하게 정으로 쪼아 놓았다. 낭떠러지 경계 쇠사슬에는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자물쇠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사랑을 꼭꼭 자물쇠로 채워놓겠다는 뜻인 것 같은데 그렇게 하면 사랑이 달아나지 않는가?
화산 연화동(蓮華洞)
중국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둥글게 솟은 바위가 마치 거대한 연꽃 봉오리를 닮아서 이 바위를 연화대(蓮花臺)라고 한다. 아래의 동굴은 명나라 때(1522-1527)때 서안부의 도사가 팠다고 한다. 그래서 연화동(蓮花洞)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 오른쪽 위로 목조 건물의 도교사당이 있는데 “翠雪宮(취설궁)”이라는 현판이 세로로 걸려 있다.
이 바위에 ‘蓮花洞(연화동 : 연꽃 동굴)’, ‘太乙蓮台(태을연대 : 태을 천제의 연꽃 누대)’, ‘華頂靑松(화정청송 : 화산정상의 푸른 소나무), ’擢茎天表(탁경천표 : 하늘 바깥의 탁월한 줄기)‘, ’金天重鎭(금천중진 : 금천이 무겁게 누름)‘ 등의 문구가 파란색으로 각자(刻字)되어 있다. 이 두 글귀 사이에 예서체로 ’蓮峯(연봉 : 연꽃 봉우리)그리고 사당 들어가는 왼쪽엔 ’臥薪嘗膽(와신상담)‘라는 눈에 익은 성어도 보인다. 이 외에도 많은 문구가 해서와 초서체로 쓰여 있어서 서예를 감상하는 전시회장을 방불케 한다.
사당을 돌아서 올라가니 쪼개진 바위가 포개어져 있는데 “斧劈石(부벽석 : 도끼로 쪼갠 바위)”이라 쓴 힘찬 글씨가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옥황상제의 딸이 서울로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서생 유언창(劉彦昌)에게 한눈에 반해 몰래 결혼을 했는데, 오빠에게 발각되어 엄마에게 알려져서 이 바위에 갇히게 되었단다. 그때 침향(沈香)이란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커서 선녀의 도움으로 신령스런 도끼를 얻어 바위를 깨서 엄마를 구했단다. 이런 전설로 인해 “劈山救母(벽산구모 : 산을 쪼개어 엄마를 구함.)”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나게 되었다.
화산 정상
바위를 파서 만든 계단을 쇠사슬 줄을 잡고 정상에 오른다. 왼쪽으로 수 천 길 낭떠러지가 까마득히 내려다보인다. 화산의 정상임을 알리는 표석이 서 있다. 여기도 예외 없이 붉은 천을 매단 자물쇠가 치렁치렁하게 걸려 있다. 방상씨(方相氏 : 역귀를 쫒아내는 사람)의 방패 문양을 위에 새겼다.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일까? 아래에 ‘華山西峰 (蓮花峰) 海拔 2086.6米(화산서봉 연화봉 해발 2086.6 미터)’라 쓰여 있다. 멀리 화산 전체를 조망한다. 일망무제의 장대한 산세가 한 눈에 펼쳐진다. 문득 이육사 선생의 시「광야」가 떠오 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는 구절을 암송해 본다. 산은 하늘에 맞닿을 듯하여『삼일신고(三一神誥)』에 나오는 구절 “蒼蒼非天 玄玄非天……無上下四方 虛虛空空(창창비천 현현비천 무상하사방 허허공공 : 푸르고 푸름이 하늘이 아니고 가물가물 한 것이 하늘이 아니며……위아래 사방도 없이 허허 공공이라)의 표현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심호흡을 하며 화산의 정기를 듬뿍 마신다. 시원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 상쾌함에 온 몸이 전율한다. 문득 행글라이더를 타고 내려가면 어떻게 될까 하는 망상이 든다. 바람이 불지만 춥게 느껴지지 않고 겨울철인데 눈도 많이 내리지 않았다. 이런 좋은 날씨도 우리 일행이 받는 하늘의 복이라 여기며 되돌아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은 한결 여유롭다. 미끄럼을 타고 비탈진 언덕을 내려가듯 신나는 기분으로 주위를 조망한다. 재미있는 그림책을 복습하듯 즐기는 맛이 난다. 그래도 바위산의 웅혼한 기운을 받는 벅찬 느낌에는 변함이 없다. 되돌아보고 또 되돌아보며 아쉬운 작별을 고하며 화산을 뒤로 하고 패방을 지나 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왔던 가파른 고갯길을 되돌아간다. 고속도로를 달려 서안시내로 접어드는데 임동(臨潼)이란 곳을 지나는데 가이드가 멀리 진시황릉(秦始皇陵)이 보인다고 한다. 그저 들판 위에 봉긋이 솟은 야산과 같다. 중국의 능은 외관상으로 작은 언덕처럼 보인다. 가이드가 진시황릉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한다.
관광오신 어느 분이 진시황릉에 가더니 절을 올리더라는 것이다. 자신이 진씨라서 진씨의 시조인 진시황에게 예를 표시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일본에서 진씨와 관련된 유적지에 진시황을 끌어들여 웃음거리가 됐던 사건이 있었다. 진시황은 ‘진(秦)나라가 처음으로(始) 황제(皇)를 칭했다’는 의미다. ‘황제’는 원래 중국의 전설상의 성군인 ‘삼황오제(三皇五帝)’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 성군처럼 최고의 자리에 있는 왕을 처음으로 진나라에서 칭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진시황의 성은 가득할 ‘영(嬴)’이고 이름은 정치 ‘정(政)’이다. ‘嬴(영)’은 현대 중국어에서 ‘이기다’는 뜻으로 쓰인다.
저녁을 먹고 발 안마 하는 곳으로 간다. 가이드가 안마하는 선생님들이라는 말을 한다. 안마하는 선생님? 의아해 하며 안마하는 곳에 들어가니 명찰을 달고 있는데 ‘技師(기사)’라고 쓰여 있다. 그래서 농담 삼아 안마하는 선생님이냐고 물으니 웃으며 안마하는 기술자라고 대답한다. 아하! 스승 師(사)가 있으니 그렇게 번역해서 부른 거였구나? 그리고 우리가 안마하는 데 얼마를 받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네는 모른다고 했다. 그래야 노동의 착취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함께한 김선생님께 농담을 하며 안마를 받고 나온다.
일정을 마치고 어제처럼 밤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중국 식당에 가서 뒤풀이를 한다. 저녁에 조선식 식당에서 삼겹살을 먹었는데 한국의 돼지고기 값보다 비싸다. 고량주를 한 병 시켰는데 터무니없이 값이 비싸다. 이런 저런 일정에 있던 불만족과 흡족한 관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호텔로 돌아와 내일을 위한 휴식을 취한다.
셋째 날 – 진시황의 병마용(兵馬俑)과 양귀비의 화청지(華淸池)
오늘도 쾌청한 날씨가 오늘 일정을 나서는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진시황의 병마용은 장대함과 불가사의함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었다. 그래서 누구나 한 번 쯤 가보고 싶은 곳이다. 서안을 찾는 이유도 진시황릉과 병마용을 비롯한 중국의 고대역사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먼저 들른 곳은 ‘샨시역사박물관(陝西歷史博物館)’이다.
섬서 역사박물관
쾌청한 날씨지만 기온은 쌀쌀하다. 박물관의 전경이 중국답다는 느낌이다. 붉은 오성홍기가 바람에 나부끼고 건물 이마엔 “弘揚憲法精神 建設法治中國(홍양헌법정신 건설법치중국 : 헌법정신을 널리 드날리고 법치 중국을 건설하자)는 붉은 현수막이 걸려있다. 외국인 관광객은 옆의 상품 판매점을 거쳐 들어가게 되어 있다. 화기를 단속하는 장비가 공황검색대처럼 되어 있다.
이 박물관은 중국 최대 규모와 최신식 시설을 자랑한다. 제1 전시실은 선사시대부터 춘추전국시대를 지나 진나라 때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제2 전시실은 한나라 때부터 위진남북조 시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제3 전시실은 수·당·원·명·청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된 작품이 37만 여 점이나 된다고 한다.
진시황 천하통일
박물관을 들어서서 처음 만나는 것은 거대한 석조 사자상이다. 이것은 당나라 순릉(順陵 : 당나라 측천무후의 엄마 양씨의 무덤)의 무덤을 지키는 석사자(石獅子)의 복제품이다.
안으로 들어가서 제1 전시실부터 차례로 주마간산 격으로 살펴본다. 115만 년 전의 유인원의 생활상으로부터 서주(西周)시대의 풍부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주나라의 유적은 청동으로 제작된 예기(禮器), 악기(樂器), 병기(兵器) 등인데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銘文)이 눈길을 끈다. 한자의 성립과 발전과정에서 갑골문과 청동기 명문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사위정(五祀卫鼎)”, “다우정(多友鼎)” 등의 청동 솥의 면모를 보았다.
동방의 제국이라 불리는 진나라 때의 병마용의 유적은 병마용 갱에서 다시 볼 것이기에 건성으로 보고 지나친다. 재미있는 것은 진시황이 육국을 멸망시킬 때 썼다는 칼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이태백의 시「古風(고풍)」의 앞부분을 인용해서 설명해 놓아 흥미롭게 보았다.
秦王扫六合(진왕소육합 : 진나라 왕이 천하를 통일하니)
虎视何雄哉(호시하웅재 : 호랑이의 눈초리 영웅 같도다!)
挥剑决浮云(휘검결부운 : 칼 휘둘러 뜬 구름 가르니)
诸侯尽西来(제후진서래 : 제후들이 서쪽으로 조공 온다네)
<대한아풍(大漢雅風 : 한나라의 우아한 풍경)>이라 명명된 제2 전시실에는 한나라 때의 문물과 불교문화의 전래로 인한 종교문물이 전시되어 있다. 서한시대의 유물로 “皇后玉玺(황후옥새)”, “유금죽절훈향로(鎏金竹节熏香炉)” 등과 같은 유물이 있다.
<성당기상(盛唐氣象 : 융성한 당나라의 기상)>이라는 제3 전시실은 중국 고대의 전성기인 수당시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고대 중국인민들의 생활 정경과 예술추구의 풍구하고 다채로운 채색 도자기를 볼 수 있었다. 특히, 당삼채(唐三彩 : 당나라 때의 세 가지 채색) 도자기의 아름다운 문양과 색채의 아름다움이 눈길을 끌어 한참을 뚫어지게 보기도 했다. “원앙연판문금완(鸳鸯莲瓣纹金碗)”, “앵무문제량은관(鹦鹉纹提梁银罐)” “삼채재악낙타용(三彩载乐骆驼俑)”과 같은 국보급 유물을 보았다.
박물관 안에 전시된 유물을 다 기억할 수는 없다. 남의 나라의 역사유물의 역사적 연원과 찬란한 문물을 우리 역사에 견주어 보면서 현실의 우리를 되돌아보는 법고창신(法古創新 : 옛 것을 본받아 새것을 창조함 )의 정신을 되새겨 볼 뿐이다.
박물관을 관람을 마치고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절절한 사랑이야기가 전해지는 “화청지(華淸池)”로 간다.
화청지 부용원
화청지 들어가는 건물의 용마루 끝에는 치미가 서로 마주보고 처마가 날렵하게 뻗어나간 중국 전통가옥의 모양을 한 대문에, 중국의 국보급 학자로 널리 알려진 꿔머루어(郭沫若 : 곽말약)선생의 유려한 필치의 “華淸宮(화청궁)”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화청지 건너편에는 늘씬한 몸매의 여자가 육감적인 자태로 춤을 추고 그를 바라보며 장구를 연주하며 너울춤 팔의 형상을 한 검은 빛의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당나라 때의 춤인 “예상우의무(霓裳羽衣舞)”를 표현한 것이라고 안내문에 적혀 있다.
화청지 안에 있는 건물들은 당나라 때의 것은 없고 대부분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문을 들어서면 돌 표석에 ‘芙蓉園(부용원)’이라 쓴 큰 연못이 보이고 끝에 ‘長生殿(장생전)’이라는 큰 누각이 보인다. 이 건물은 당나라 현종 때 세웠던 건물이다. <玄境長生殿(현경장생전)>이란 영상물로 제작되어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서 중국인들에게 특별한 인상을 준 것 같다. 그래서 내부 공개 시간이 정해져 있고 그걸 보기 위해 관람객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화청지 비림(碑林)
왼쪽으로 돌아가면서 두루 살펴본다. 라일락이 고목이 되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해 준다. 샛길 안쪽으로 들어가니 비림(碑林)이 있다. 화청지를 다녀간 근대의 사람들의 붓글씨를 비석에 새겨 숲을 이루었다. 그중에서도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노래인 장편의 서사시「장한가(長恨歌)」를 쓴 비석에서 한참을 감상한다. 이 시는 당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인 백거이(白居易 : 자(字) 낙천(樂天))의 작품으로 세상에 널리 회자된다. 전체가 4장으로 이루어졌다. 1장에서는 황제와 절세가인 양귀와의 만남과 양귀비에 대한 현종의 지극한 애정을, 2장은 안록산의 난으로 양귀비를 죽게 한 뉘우침과 외로움의 회한을, 3장은 양귀비에 대한 생각만으로 환상에 빠져 있는 나날을, 4장은 도사의 환술로 양귀비의 영혼과 미래의 사랑을 맹세하지만 인간과 천상세계의 단절로 뼈저린 한탄의 여운을 이야기한다. 사랑의 기쁨, 괴로움, 외로움의 서정이 간장을 녹이듯 절절이 흐르는 사랑의 열병은 현종에 대한 새로운 인간 면모를 보여준다. 특히, 장편이지만 시의 내용이 그다지 어렵지 않아 많은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을 받게 된다.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漢皇重色思傾國(한황중색사경국) 한나라 황제 여색 중히 여겨 나라는 기울어가도
御宇多年求不得(어우다년구부득) 나라 다스리며 오랜 세월 살펴도 구할 수 없네.
楊家有女初長成(양가유녀초장성) 양씨 집안에 갓 장성한 딸이 있었으나
養在深閨人未識(양재심규이미식) 규방 깊숙이 자라니 누구도 알지 못하나
天生麗質難自棄(천생여질난자기) 타고난 아름다운 자질 그대로 벼려지기 어려워
一朝選在君王側(일조선재군왕측) 하루아침에 뽑혀 군왕 곁에 시중을 들었네.
이 시의 첫 구절에서 미인을 뜻하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성어의 유래가 되었다. 두루 둘러보며 비석의 문구도 감상해 본다. 연못에 흐르는 물에 하얀 김이 솟아오른다. 양귀비가 온천물에 목욕했다고 하니 온천물이 흘러내리는 것 같다. 화청지의 온천은 향기롭고 피부를 희고 매끄럽게 해주어 중국의 온천중에 이름이 높아 ‘천하제일어천(천하제일어천)’이라 불린다. 산책을 하듯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감상을 해 본다. 장생전 내부를 관람하기 위해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본다. 장생전 이야기도 장한가의 한 구절이 있다.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칠월 칠일 장생전에
夜半無人私語時(야반무인사어시) 인적 없는 야삼경에 속삭이던 말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하늘을 나는 새가 되면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연리지) 땅에 나무로 나면 연리지가 되자고
천상의 양귀비에게 지상의 현종이 꿈을 꾸듯 애타는 사랑의 열병을 회한조로 한탄하는 열망의 장면이다. 그런 꿈의 궁전이지만 이룰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이 부질없음을 어찌하랴! 세월의 무상함만 우주의 숨결로 흐르는데, 옆에는 새로 복원되는 건물을 짓느라 기계소리 요란하다.
화청지의 “비상전(飛霜殿 : 서리가 날리는 전각. 겨울철 온천의 수증기가 오르면 얼어서 서리가 날리는 정경이 펼쳐진다고 함 )” 앞에는 중국 최고의 수중 승강 무대가 설치되어 대형 역사무극인 《장한가》가 상영된다고 한다. 화려한 영상예술의 환상적인 무대가 펼쳐진다고 한다. 제한된 시간에 화청지의 겉모습만 대충 훑어볼 수밖에 없다.
양귀비를 이야기하다 보면 중국의 사대(四大) 미녀를 말한다. 그런데 이 미녀들은 단순히 얼굴만 예쁜 것이 아니라 각각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월나라의 미신 서시(西施)는 정인이었던 책사 범려(范蠡)의 요청으로 월나라를 위해 오나라 왕 부차(夫差)의 연인이 되어 오나라 멸망에 앞장섰다. 후한 말의 사도(司徒) 왕윤(王允)의 가기(歌妓)였던 초선(貂蟬)은 주인의 부탁에 따라 미인계로 동탁과 여포의 이간계(離間計)에 자신의 몸을 던졌다. 왕소군(王昭君)은 후한과 흉노의 화친을 위해 흉노족의 우두머리인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을 갔다. 하지만 양귀비는 이들과는 다른 운명을 가진 여인이다. 양귀비는 원래 17세에 현종의 18번 째 아들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현종은 자신의 아내인 무혜비(武惠妃)를 잃고 시름에 젖어있었다. 그래서 측근 환관인 고역사(高力士)가 황제의 뜻에 맞는 여인을 발탁했는데 바로 며느리인 옥환(玉環 : 양귀비의 본명)이었다. 절세미인으로 소문이 자자했지만 며느리였기에 자신의 아내로 삼을 수 없어 도교에 입문 시켜 ‘태진(太眞)’이라는 도사로 삼아 현종의 가까이 두었다. 그리고 후에 귀비로 삼으니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현종은 양귀비를 총애한 나머지 그의 언니들과 오빠에게도 높은 관직을 주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녀의 언니에게 한국부인(韓國夫人)이라 봉해진 이름이다. 그녀는 ‘자질풍염(資質豊艶)’이라는 말처럼 풍만하고 농염한 미인이었다. 더욱이 가무에도 뛰어났으니 군주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재질(才質)을 겸비한 미인이다. 하지만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 했으니 그의 운명도 안록산의 난과 함께 마외파(馬嵬坡)에서 처절한 운명을 마감하며 그녀의 집안도 몰락한다. 현종은 ‘개원(開元)의 치(治)’를 구가할 만큼 태평성대를 이끌던 현명한 군주였는데, 그녀의 치마폭에 싸여 정치를 외면하여 나라를 망국으로 이끌었으니 서양말로 ‘팜무파탈 : 남성을 파멸적인 상황으로 이끄는 매력적인 여자의 뜻)의 여인으로 이해된다.
화청지 관광을 마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하는데 가이드와 길이 엇갈렸다. 편안하게 해 주려는 것이 도리어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다.
다음 일정은 진시황릉 지하 궁전이라는 뜻의 “진릉지궁(秦陵地宮)”이다. 갑옷을 입은 병마용의 모형이 입구에 늠름하게 서 있고 관람객들이 북적여서 큰 기대를 갖고 들어갔지만 어두컴컴한 가운데 조명 불빛에 진시황릉의 지하 궁전의 모형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실제 고증을 받은 것 같지는 않고 발굴된 유적을 보고 추정해서 그렇게 만들어 놓은 관광용 모형 건물이다. 입장료를 내고 일부러 가볼 곳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저 한 바퀴 휘 둘러보는 것으로 족하다.
진시황릉 1호갱 병마용
다음 장소는 서안을 관광하는 최고의 목적지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秦始皇 兵馬俑 博物館)’이다. 겨울철이라 그런지 관람객이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다. 입구에서 병마용 갱이 있는 곳까지 조금 걸어서 이동한다.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어서 걷기에 쾌적한 느낌을 받는다.
병마용 갱으로 들어선다. 가이드가 갱이 처음 발견될 당시의 상황과 위치를 설명해준다. 우물을 파다가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내용이다. 병마용은 중국 순회전시 때 길림대학교 박물관에서 친견을 했다. 그래서 몇 몇의 모양은 익히 알고 있지만 갱(坑) 내의 원형 그대로 위치한 것을 보니 경이로움 그 자체다. 수많은 병마용이 있지만 얼굴 모습은 제각각 다르게 조성되었다고 하니 제작한 사람들의 노고를 알 수 있다. 사진의 도판으로 봤을 때는 무감각하게 다가왔던 모습들이, 실제 내 눈으로 보니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이렇게 많은 병마용을 어떻게 제작했으며 어디서 구워 왔는지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흙은 또 어디서 그렇게 많이 구해 왔을까? 진시황이 등극하고 능을 조성하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이 많은 토용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연인원은 또 얼마나 동원되었을까? 능 조성뿐만 아니라 만리장성도 쌓지 않았는가? 유적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내밀한 수수께끼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직접 보는 것이 최고다. 그래서 답사를 다니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상상하면서 유물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깨닫는 것이다. 병마용도 도판에서 보면서는 단순히 그런 사실이 있었다고 확인하는 것에 그쳤다면 올바른 의미를 깨우칠 수 없었다. 1,2,3호 갱의 면면을 살펴보면서 그것의 조성된 경위를 세밀하게 분석할 수는 없더라도 전체적인 규모와 생동감 넘치는 표현력을 통해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상상해보면 역사유물에 대한 깊은 인식을 얻게 된다.
3호 갱으로 간다. 상상을 초월하는 갱의 토용들의 모습과 갱 구조의 크기에 대한 경이로움으로 진정되지 않은 가슴으로 다른 갱을 보러 간다. 순서상으로 2호가 맞지만 발굴된 위치로 인해 3호 갱부터 관찰을 한다.
3호 갱은 1호 갱에서 보이는 병마용의 숫자보다는 보다 깊은 갱도와 토용들의 전술적인 배치를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토용들의 위치도 여러 줄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성벽 같은 구조의 흙벽에 기대어 나란히 서 있다. 반듯반듯하게 벽면이 깎여진 부분도 직각으로 곧게 깎여져 있다. 궁전의 벽 같다는 느낌도 든다. 그래서 궁궐을 호위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토용으로 구워서 지키게 한 것이 아닌지. 앞쪽으로는 말의 모습도 보인다.
진시황릉 3호 갱
황제의 행차를 위해 기다리는 것인가? 그렇다면 수레의 모습을 한 토용도 있어야 한다. 나중에 박물관 전시실에서 보니 청동제 수레가 보인다. 하여튼 1호 갱과는 엄연히 다르다. 그래서 갱을 보고 있는 순간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큰 갱의 모습들이 이 지역 전체로 조성되었다면 이것은 가히 불가사의가 아닐까? 이런 대대적인 공사를 사람의 힘만으로 이렇게 거대한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기 때문이다. 병졸들의 시선도 1호 갱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병마용에도 각각의 신분에 따라 모습이 다르다. 장군용(將軍俑)은 두 종류가 있는데 숫자가 많지 않다. 전포(戰袍 : 고대 장수가 입던 긴 옷)를 착용한 토용과 갑옷을 착용한 토용으로 나뉜다. 공통된 특징은 머리에 관을 썼으며 키가 크고 장대하며 장군의 풍모가 있다. 또한 무사용(武士俑)도 활을 서서 쏘는 모습의 입사용(立射俑), 한 쪽 무릎을 꿇고 쏘는 모습의 궤사용(跪射俑), 말을 탄 자세의 기병용(騎兵俑), 전차를 운전하는 어수용(御手俑) 등 그 모습이 각각이다.
진시황릉 2호 갱
2호 갱은 아직 발굴하지 않은 상태의 모습 그대로 흙 지붕이 덮여 있다. 발굴함으로써 유물이 훼손될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마치 도자기 가마를 연상시킨다. 한 쪽에 발굴을 하다가 중단한 병마용의 흩어진 모습들이 보인다. 발굴을 위해 파헤치다 보면 내장 유물들이 파손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발굴 유물을 수습해서 원래의 모양대로 퍼즐조각 맞추듯 꿰맞추기를 한다. 발굴 과정에서 파손되지 않더라도 매장된 상태에서 파손되는 경우도 많다. 지각의 변동이나 흙의 퇴적과정 등으로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파손되는 것이다.
덮여 있는 흙은 기와를 올린 듯 울퉁불퉁하게 골을 이루고 있다. 그냥 흙으로 덮여 있어서 압력을 받아서 토용들이 파손된 것 같다. 마을 단위처럼 차단벽으로 나뉘어져 있다. 발굴을 해서 잘 정리해 놓으면 1호 갱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갱의 관찰을 마치고 박물관으로 간다. 박물관에는 출토 초기의 채색된 병마용의 사진을 걸어놓았다. 처음 발굴 당시에는 모든 병마용 들이 채색토기였다는 말인가? 또한 청동기 출토품으로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도 있다. 현재 발굴된 병마용의 출토품과 구조만으로도 상상을 초월하는데 전체 규모를 아울러 본다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단지 불가사의라고 밖에 탄식할 뿐이다. 그래서 필설(筆舌)로 다할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른다.
채색된 유물이 변색되는 것은 발굴 기술이 모자라서 그렇다. 매장된 것이 진공상태인데 갑자기 외부의 공기를 만나서 변색되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발굴한 우리나라의 찬란한 문화재인 신라의 금관이 그랬고, 공주의 무령왕릉의 벽화가 그랬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채색도 그 화려함이 극치를 다했다고 한다. 이곳 병마용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초기의 사진들에는 채색된 병마용이 있는 것이다.
병마용을 보면서 떠오른 구절이 『맹자』「양혜왕장」에 나오는 “仲尼曰 始作俑者 其無後乎(중니왈 시작용자 기무후호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처음 허수아비를 만든 사람은 후손이 없을 것이다!)”라는 구절이다. 이 말은 ‘정치로써 사람을 죽인다(殺人以政)’는 글 속에서 맹자가 인용한 것이다. 순장제도로 산 사람을 파묻는 관습의 폐단을 말하면서, 사람을 생각하고 사람을 위하는 인본주의를 깨닫게 해주는 말이다. 이렇게 많은 토용을 만들어서 자신의 사후세계를 지켜 주리라 믿은 진시황은 결국 3대도 못 가서 나라가 멸망하는 비운을 맞게 될 줄 알았겠는가?
출토 당시 채색된 병마용
병마용을 관찰하고 돌아 나오는 길은 병마용 1호 갱 박물관으로 연결되어 있다. 박물관을 다 둘러보고 물건을 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여 중국답구나 하며 병마용 도판 1권을 샀다. 병마용을 처음 발견한 사람의 후손이 친필 서명을 해 준다.
박물관을 나오며 건물을 다시 돌아본다. 전서체로 쓴 ‘秦兵馬俑壹號坑大廳(진병마용일호갱대청 : 병마용 일호 갱 박물관)’이라 쓴 ‘전서(篆書)’가 가슴을 울린다.
진시황은 황제가 된 뒤 16년 밖에 권좌에 있질 못했지만 그에게는 극과극의 포폄(褒貶)이 있다. 진시황의 세 가지 업적이 포(褒 : 칭찬)요, 만리장성을 쌓고 백성들을 혹사시켜 환난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린 것이 폄(貶 : 나무람)이다. 첫째 문자의 통일이다. 중국 전역에서 각 나라마다 다르게 썼던 한자를 전서(篆書)로 통일한 것이다. 둘째가 수레바퀴 폭의 통일이다. 각 나라마다 다른 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수레바퀴의 폭을 달리하였다. 이것을 일컬어 ‘동문동궤(同文同軌)’라고 한다. 셋째 도량형(度量衡)의 통일이다.
진시황 능과 관련하여 ‘수은’에 관한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지금은 수은 중독을 염려하여 진시황 능의 발굴을 어렵게 한다고 여겨 능의 접근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한나라 때의 무덤인 “마왕퇴(馬王堆)”를 발굴하면서 무덤을 조성한 것을 보면 수은으로 강을 만들었다. 그래서 이는 죽은 사람이 천상의 강을 건너간다는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근대에도 그랬는지, 중국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모옌의 소설『홍까오량 가족(紅高粱家族)』에 보면, 청나라 말기에 한림(翰林)을 지낸 사람의 장례식에 수은을 가득 담은 관을 내가는 장면이 나온다. 저승의 강에 몸을 담그는 의미로 그렇게 한 것이다. 서양에서도 연금술 시대엔 수은이 장생불로의 영약으로 여겨졌으며 동양의 도가에서도 단약(丹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따라서 진시황 능의 수은이 현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진시황에 대한 일련의 일화들은 널리 알려진 것도 많고 그의 생애에 대한 정치사적인 쟁론도 많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다만 ‘진시황(秦始皇)’란 그의 칭호에서 보듯 그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삼황(三皇)만큼 뛰어나나도 여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전까지는 왕(王)이라는 군주의 호칭을 처음으로(始)) 황제(皇)라고 한 사람이니 말이다. 진시황 병마용을 뒤로 하고 박물관을 나오는데 관광객을 위한 노점상이 물건을 사라고 아우성을 친다. 작은 홍시가 그럴 듯해 보여서 샀다가 속에 좋지 않은 감을 넣고 포장한 것을 보고 헛웃음 웃는다. 저녁을 먹고 날이 어두워져 첫날 들렀던 “大唐芙蓉園(대당부용원)”으로 공연을 보러 간다.
대당부용원의 자운루 야경
캄캄한 밤중에 입구를 들어서니 넓은 정원에 큰 건물들이 보인다. 잘 정리된 잔디밭에 커다란 나무가 있다. 길을 따라 가니 거대한 호수가 나타나고 야간 조명의 불빛이 비추며 현란한 세계가 펼쳐진다. 왼쪽의 큰 건물에도 분부시게 휘황찬란한 불빛이 불붙는 듯하다. 잠시 후에 호수에서 분수가 퍼져 오르면서 레이저 쇼가 진행된다. 뭔지도 모르면서 보고 있는 한국인 관광객들은 그저 레이저 불빛이 나타내는 영상 쇼를 보면서 감상을 한다. 날씨가 싸늘한데 호수에서 쇼를 위해 뿜어내는 분수의 물결이 날리고 흥미도 없고 해서 먼저 나온다고 하니 일행 모두가 숙소로 돌아간다. 중국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이 곳 ‘대당부용원’은 5A급 국가 여행지구로 지정된 곳이다. 이는 화청지와 같은 최고 단위의 문화관광유적지다. 천 여 무(亩 : 1무는 약 200평)의 넓이에 12억 위엔(元)이 투자된 어마어마한 공원이다. 12개의 문화주제 공원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당나라 융성시기의 문화를 재조명하는 곳이란다. 당나라 전성기인 ‘성당(盛唐)’ 때의 풍모를 간직한 황실 정원식의 대형 주제공원이다. 우리는 12개의 주제 중에서 자운루(紫云楼) 앞에서《水秀表演區 : 수수표연구(수상 쇼 공연 지역 》의 수상 쇼를 본 것이다. 이곳은 봄가을이 관람하기에 최적이고 여름과 겨울은 피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아무런 설명 없이 현대 문명을 보기 위해 중국에 온 것은 아니다.
저녁 8시 30분이 넘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은 차가 밀려 혼잡하다. 성문 앞 회전 교차로엔 차들이 뒤엉켜 북새통을 이루는데, 성벽을 따라 연결된 전기 조명으로 그야말로 ‘불야성(不夜城)’을 이루었다. 불타는 야경에 눈길을 빼앗기며 혼잡한 짜증을 달랜다.
낮에 가이드가 성을 설명하면서 성의 안과 밖을 구별하는 법을 설명하는데 성벽 위에 구멍 뚫린 곳이 안쪽이란다. 총을 쏘는 곳이라고 하면서. 으잉? 성벽의 안과 밖은 설명 없이도 구별된다. 바깥쪽은 직각으로 쌓아 있고 안쪽은 오르는 계단이나 다른 시설이 있다. 구멍은 전문 용어로 ‘총안(銃眼)’이라 한다.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남한산성’의 성벽에 보면 가까운 곳의 적을 쏘는 ‘근총안’과 먼 곳을 쏘는 ‘원총안’으로 구별되어 있다. 그리고 성벽 앞의 ‘해자(垓字 :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파 놓은 못)’를 강이라고 설명한다(뒤에 안 일이지만 여기서는 ‘호성하(護城河 : 성을 보호하는 강)’라고 하니 강이라고 말할 만 하다.).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앞에 가면 세계 외고의 크기를 자랑하는 해자가 있는데 커다란 호수로 오인한다, 일본의 천황이 머무는 도쿄성의 해자도 주변 경치를 잘 가꾸어 놓아 언뜻 보면 아름다운 호수처럼 보인다.
호텔로 돌아와 방으로 가지 않고 어제와 같은 식으로 중국의 거리를 활보하며 같은 집으로 뒤풀이를 하러 간다. 오늘 저녁만 지나면 중국 땅을 이별하니 3일간 여행에 대한 소회와 우연의 만남을 통해 더욱 알찬 관광이 되었음을 서로 간에 확인한다. 그리고 조선족 가이드의 처지를 이해해야 하는 일에 대한 의견 등을 나눈다. 그리고 이번 중국 여행으로 삶의 새로운 변곡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중국 여행에 대한 서로 간의 속내를 주저리주저리 떠들다 빼갈(白干儿)을 간뻬이(乾杯)하며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
넷째 날 – 탄탄대로의 명나라 성벽
서안성 동문 장락문
아침 날씨가 쌀쌀하다. 오늘은 서안의 명나라 성벽을 보는 것으로 중국의 관광을 마무리한다. 차를 타고 다른 곳을 관광하면서 줄곧 지나다니며 본 곳이라 외관상으로는 별 감흥을 못 느낀다. 성문 앞의 커다란 현수막에 붉은 색 바탕에 흰 글씨로 “華夏文明之源 絲綢之路起點(화하문명지원 사조지로기점 : 중국 문명의 근원 비단 길의 기점)”이라 써있다. 문명의 기원을 강조하는 그들의 자부심을 느낀다. 그 옆에는 “弘揚文化(홍양문화 : 문화를 널리 드날리고) 提升城市(제승성시 : 도시를 드높이자) 傳承文明(전승문명 : 문명을 전승하여) 保護文物(보호문물 : 문화유적을 보호하자)” 등의 깃발을 세워놓아 역사문화도시로서의 면모와 선진 문화를 지향하는 도시민의 긍지를 갖자는 홍보용 깃발이다.
성문 앞의 안내 표석이 세워져 있다. 이 성은 명나라 홍무 3년부터 11년까지(1370-1378) 수나라 대흥성과 당나라 장안성의 황성(皇城)에 기초를 두고 북쪽을 등지고 동쪽을 향하여 확대 건설된 성이다. 성벽의 높이는 10-12m, 성벽 아래의 넓이는 15-18m, 성벽 위의 넓이는 12-14m, 둘레는 13.94Km이며 평면의 장방형으로 쌓았다. 장락문(長樂門)이 서안 성의 동문이고, 안정문(安定門)이 서문, 영녕문(永寧門)이 남문, 안원문(安遠門)이 북문이다. 옹성(甕城)의 동, 남, 북 삼면이 열려 있어 성을 드나드는 도로이다. 서안 성벽의 방어체계는 호성하(護城河), 조교(弔橋), 전루(箭樓), 성루(城樓), 각루(角樓), 여장(女墻), 타구(垜口) 등을 체계적으로 갖춘 고대의 완전한 군사시설이다. 성루는 이자성의 성벽 공격으로 무너져서 청나라 순치 연간에 다시 지어졌다. 이러한 개괄적인 내용을 알고 옹성의 성문 안으로 들어가니 동문인 “長樂門(장락문)”이 우뚝한 위용을 자랑하고 누각에는 “旭日東升(욱일동승)”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서안 성벽 위 전경
성벽 위로 올라간다. 성벽 위는 벽돌로 바닥을 편편하게 쌓아놓아 2차선 도로를 방불케 한다. 소설『정글만리』에서 마라톤 대회도 열고 주인공이 자전거를 타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또, 성벽을 쌓은 벽돌의 제작에 대한 정보도 제공해 준다. 베이징의 쮜용관 장성(居庸关 长城)에서 보았던 규모보다는 작지만 오랜만에 보는 중국 성벽의 장대함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자전거를 대여하는 곳이 있다. 한 시간에 120위앤 이다. 20분의 시간 밖에 없으니 깎아달라고 했더니 안 된단다. 그렇겠지. 옆에는 편안히 앉아 성벽 위를 돌아볼 수 있는 전동차도 있다. 성벽위에서 멀리 서안 시내를 둘러보고 성벽 아래도 내려다본다. 성 안에서는 아침 운동으로 태극권을 하느라 여념이 없고, 성 밖에는 인민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아침 농산물 시장이 열려 북새통을 이룬다. 수많은 농산물이 거래되는 장면을 무연히 바라보며 김선생님과 민초들의 삶에 대한 애환을 이야기한다. 시장을 직접 둘러보며 물건을 사보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사진으로 남긴다. 성벽 위를 걸어 다니며 성벽의 구조를 살펴본다. 성문 방어 시스템의 옹성(甕城)에 대한 구조와 설명이 되어 있어 읽어 보니 재미있다. 옹성은 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으로 적이 옹성 안에 들어오면 옹성 위의 협공을 받게 되는 데 마치 ‘항아리 속의 자라를 잡는 격’을 뜻하는 ‘甕中捉鱉(옹중착별)’과 같다. 그래서 ‘옹성(甕城 : 옹성(항아리 성)이라 했다고 한다.
짧지만 그렇게 마지막 날의 관광을 마치고 함양 비행장으로 간다. 가는 길에 물건을 사야할 곳 두 군데를 들린다. 물건을 사기 위해 관광을 하는 것 같다. 어쨌든 이제 모든 일정을 마감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 가이드가 차 안에서 중국에 관광 와서 언짢았던 일은 모두 가이드에게 돌리고 편안히 한국에 돌아가시라는 이야기를 하며 작별의 인사를 한다. 공항에서 헤어지며 우리는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비행기가 공중 궤도에 접어들며 평안한 자리가 된다. 짧지만 알찼다고 생각되는 여행의 의미를 되새기며 관광과 답사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본다.
‘관광(觀光)’이라는 말은 사전적 의미로 ‘명승·고적·풍속 등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관광’의 어원을 보면『역경』의 관괘(觀卦)에서 온 말이다. 관괘의 네 번째 효를 풀이한 “觀國之光, 利用賓于王(관국지광 리용빈우왕 : 나라의 광명을 살펴보는 것은 임금의 손님노릇하기에 이로우니라)”에서 온 말이다. ‘관국지광(觀國之光)’을 줄여서 ‘관광’이라는 말이 영어 ‘tour’의 번역어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답사(踏査)’라는 어휘의 뜻을 보면 ‘현장에서 직접 보고 조사함’이니 결국은 같은 말이 된다. 그러니 굳이 ‘답사 여행’과 ‘관광 여행’을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진다. ‘여행(旅行)’이라는 말도 같은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단순히 풍물만 보고 왔어도 현지의 무엇을 직접 본 것이기에 조사하지는 않았더라도 스스로 보고 얻은 것이 있으니 결국은 답사나 관광의 의미와 같은 것이다.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착륙한다는 기내 방송이 들린다. 관광으로 떠났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온다고 생각하며 공항을 빠져 나와 수화물을 찾느라 일행들과 먼저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김선생님 일행과 후일을 기약하며 집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2015년 2월 6일 풍산고등학교 교무실에서
첫댓글 유병상선생 잘봤어요. 책써도 되겠네. 김세민
잘 읽었소이다. 계속 좋은 글 올려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