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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정치시민넷 익산근대문화유산 2차 투어기
좋은정치시민넷 익산 근대문화유산 2차 투어가 지난 17일에 있었습니다. 토요일인데도 19명의 회원과 시민들이 참가를 할 정도로 열기가 있었고 점심때를 지나 시작된 투어는 해질 녘에 끝났습니다. 가을의 따뜻한 햇살과 추수를 기다리고 있는 황금들녘, 도로가와 하천 제방에 군데군데 모여 하얗게 피어 있는 억새꽃은 운치를 더해 주었습니다.
1900년 초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투어단은 가을향기와 역사에 취해 있었고 하나하나 옛 이야기를 이어가는 모습은 매우 진지해 보였습니다.
이번 2차 투어는 지난 9월 12일에 이어 두 번째로 익산 창인동에 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리지점 관사, 사택에 이어 이리농림고등학교 축산과 건물, 황등 요교제, 황등 임익수리조합 창고, 함라 3부자집을 탐방하는 일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투어를 하면서 느꼈던 것은 익산이 가진 것이 참 많다는 생각입니다. 고대역사의 문화 유적도 많지만 근대 역사 자료가 지천에 널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산을 잘 꿰어 교육자료, 관광자산으로 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앞으로 많은 관심을 가지면 근대에서 고대까지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현장이 될 수 있겠다는 기대도 생겼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리지점장 관사나 사택은 신한장이라는 곳에 있습니다. 신한장은 원래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리지점 직원들의 사택이 있던 곳인데 해방 이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신한공사로 이름이 바뀌고 이곳을 직원들의 사택으로 사용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신한장에는 아직도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리지점장 사택을 포함하여 당시 직원 사택이 남아 있습니다. 신한장은 창인동 이리침례교회 뒤편에 있는 마을입니다. 인북로가 개통되면서 대부분 집들이 철거되었다고 합니다.
제1회 졸업기념 식수비와 나무가 있는 옛 이리농림학교(현 전북대 익산캠퍼스) 옛 정문 정원, 일제시대 도로가 가장 잘 남아 있는 이리초등학교 옛 정문 길, 유형원의 반계수록에 기록되어 있는 호남의 3대 제방 중 하나인 황등제(김제 벽골제, 고부 눌제와 함께 국중3호), 마한의 수도라고 표기되어 있는 광교 중창비(용안), 1414년(조선태종) 익산에 4개 군현(함열현, 용안현, 함열현, 익산군(금마))이 있었는 데 그 중의 하나인 함열현, 조선 500년 동안 현정소재지로서 관아가 있었던 곳입니다.
시작부터 투어단과 동행을 하여 해설을 해주신 김승대 전라북도 학예연구관은 “전라북도 함열은 마한시대 함해국이다. 허균이 1611년(광해군3년) 유배 온 곳이다. 이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음식 품평서인 ‘도문대작’을 집필한 곳이다. ‘도문대작’은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크게 입맛을 다신다는 뜻으로 <성소부부고> 제26권중 제26권이다. 허균이 함열에 귀향지로 정한 이유는 친구가 현감으로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함열은 헌종의 계비 명헌왕후가 태어난 곳이다. 부임을 받아 전라도를 지나는 고을 수령들은 이곳에 와서 절을 하고 갔다고 한다. 함열은 현감들이 욕심을 내던 곳이다. 함열현이 관할하는 지역이 평야 지대이고, 성당에 세곡창이 있었기 때문에 다들 욕심을 냈다고 한다.” 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투어를 마치며 드는 생각은 근대건축물들이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유재산이라고 하지만 지역의 중요한 자산이고 보물인데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함라에 새로운 건축물들이 많이 들어서고 있는데 3부자집 경관과 맞지 않게 대부분 현대식 건축물입니다. 한옥지구로 묶어 전통을 살려 건축을 할 수 있게 했다면 더욱 좋았을 거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리지점장 관사
익산 창인동 소재,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리지점장 관사, 몇 년도에 건축되었는지는 알 수 없음. 2층 목조 건물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일본이 한국의 경제를 독점, 착취하기 위하여 설립한 국책회사로 주로 토지를 강점, 강매하여 높은 비율의 소작료를 징수하고 많은 양곡을 일본으로 반출하다가, 1917년부터 본점을 일본 도쿄로 옮기고 동양 각지로 사업을 확대하였으나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 참패하면서 문을 닫았다.
동양척식주식주식회사 이리지점은 현 중앙동 기업은행 자리이다. 관사와 사택이 알려진 것은 2008년 9월 일본인 전촌민자(1923년생) 일행이 고향 익산을 방문하면서다. 천촌민자씨는 구 이리 출신으로 현재는 도쿄에 살고 있다. 그녀는 이리 소학교(현 중앙초등학교), 이리여학교(현 이리 여중고), 공주사범학교를 졸업 한 후에 교편을 잡고 현 동산초등학교와 이리초등학교에서 근무를 하였다. 아버지 이가라시 구마타로는 당시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리지점장으로 근무를 하였다.
창인동 소재.동양척식주식회사 이리지점장 관사. 2층 목조 건물. 건물 원형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개인재산으로 왕래한 흔적이 없이 대문이 잠겨 있다. 일본식 가옥으로는 큰 규모로 굴뚝이 있는 것을 보면 1층은 온돌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리지점장 관사 건축양식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홍균 교수(기전대학교)
창인동 소재. 옛 신한장에 남아 있는 주식회사 이리지점장 사택
창인동 이리침례교회 뒷편 옛 신한장에 남아 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직원 사택
전촌민자씨가 직접 그린 지도를 가지고 설명하는 김승대 연구관
▣ 이리농림고등학교 졸업기념 식수비
이리농림고등학교는 1922년 4월 관립(5년제)로 설립된 전문대학이다. 1947년 이리 공립농림중학교(6년제), 1951년 이리농림고등학교(3년제), 1991년 국립이리농공전문대학으로 승격 개편되고 1999년 국립익산대학으로 교명이 개명되었다. 현재 전북대와 통합하여 전북대 익산캠퍼스로 활용되고 있다.
구 정문을 지나 바로 있는 정원을 보면 제1회 졸업기념 식수비를 비롯하여 여러 식수비와 당시 식재한 나무들이 보이고 옆으로는 일제시대 도로가 가장 잘 남아 있는 이리초등학교 구 정문길이 있다.
이리농림고등학교 역사에 대해 설명해 주시고 계시는 오석고 어르신
▣ 이리농림고등학교 축산과 교사
익산 마동 소재. 익산시 등록문화재 제178호, 1932년 건축
1931년 『조선의 건축』에 의하면 ‘1931년 이리농림학교 축산과가 신설되고 연구실 등을 중축하기로 결정하였으며 건축비는 약 10,000원이 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 건물의 양식은 대칭형 건물로 내부가 3칸의 교실로 되어 있다. 가운데 교실 뒤편에만 복도를 구성하였고 이 복도에 배면 출입구와 화장실이 붙어 있다.<익산의 근대문화유산(익산문화원 2010)>
▣ 요교호(황등호)
황등제는 일제 강점기인 1909년에 요교호 안쪽을 가로질러 도로를 만들기 위하여황등산과 도치산 사이를 연결하여 쌓았던 제방이며, 이곳에 있었던 호수가 요교호(腰橋湖)이다. 이 호수를 예전에는 상시연(上矢淵), 귀교호(龜橋湖)라고 불렀다. 속칭 ‘허리다리못’, 또는 ‘황등호수’라고 하는데 일제는 ‘임익수리조합저수지’라고 공식 명칭 하였다. <동국문헌비교>에 의하면 황등호는 조선시대 국중삼호(國中三湖)로 김제 벽골제, 정읍 고부 눌제와 더불어 조선의 3대 호수였다. 호남과 호서라는 명칭이 황등호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황등호는 오늘날 삼기면, 임상리, 팔봉동, 황등면에 넓은 들판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호수를 나룻배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황등호는 군산 서수, 임피, 황등 일대의 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관리되지 않아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옥토에 관심을 갖고 있던 일제가 임익수리조합을 설치하고 황등호를 복구할 목적으로 제방을 증축한 것이다. 황등제가 있는 지역의 바로 인근에 황등면 도선, 백길, 도촌 등의 마을이 있는 것을 보면 호수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황등제를 수축하면서 발견 된 것이 요교비다. 정조4년(1780년)에 제방과 교량의 가설에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은덕을 알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요교비 기록에 의하면 황등제 1780년에 수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황등호가 사용 용도가 없어진 것은 1923년 6월에 대아리 저수지를 준공하고 1935년 경천저수지를 신설하면서다.(전북농조 80년사)
임익수리조합에서 공고한 임익수리조합간척지평면도를 보면 일제는 1935년 황등호 물을 빼고 간척하기 시작하여 1937년부터 1,200평씩 필지를 분할하여 매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탐천 배수갑문
요교비 아래 음각되어 있는 설명 내용을 옮기면 " 요교비는 임익수리조합장 등관태랑이 요교제를 수축할 당시 현 위치 부근 땅속에 묻혔던 석비가 출토되어 전북농조황등출장소에 보존되어 오다 현 위치에 이설한 것으로 그 내용은 건륭45년(정조4년)(서기1780년) 무너져 내린 제방을 수축하는 역사와 교량을 가설하는데 많은 시주를 한 몇 사람의 은덕을 후세의 귀감으로 삼기 위하여 화주승 지원이 세운 것으로 추정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탑천제방에 세워져 있는 '만추의 서정' 동상, 옛 황등호 황금들판과 잘 어울린다.
임익수리조합에서 1937년(소화12년) 발행한 간척지 평면도(소장 권세호), 황등호를 간척하고 매각하기 위해 발행한 도면
황등호 모습(1928년), 익산의 근대문화유산(익산문화원 2010년)
▣ 황등역 부근 황등농협 창고
1935년(소화10년) 건축 추정, 일제 미곡창고, 목재 구조에 양철 판으로 마감
임익수리조합 미곡창고, 임익수리조합 관할 미곡지대에서 생산된 쌀을 보관한 창고로 추정, 황등역 옆에 있는 것을 보면 이곳에 미곡을 보관한 뒤 황등역을 이용 군산항으로 실어 감. 건물 뼈대는 목조이며 마감은 양철 판으로 하였음. 지붕은 나무판위에 흙을 덮고 양철 판으로 마감함.
창고 내부 천정
창고 내부 벽을 신문으로 도배 함. 신문은 군산일보 1935년(소화10년) 4월 16일자.
▣ 함라 조해영 가옥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소재,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1호, 1918년 건축, 지상1층 한식목조 기와
이 가옥의 주인인 조해영은 도평의원을 역임하였다. 조해영의 부친은 참봉을 수직한 조용규(1882~1953)로 일제시기 함열리에 「조용규농장」농장을 운영했던 함열리의 3대 부호 중 하나였다. 조용규의 부친인 조한기(1836~1903)가 1900년(고종37) 사천군수, 1902년 정읍군수를 지내 현지 수동마을에서는 ‘조정읍댁’이라 칭한다. 정읍군수 재직 시 가뭄과 기근에 사재를 털어 군민을 도와주었다고 해 현재 태인 피향정에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조해영 가옥은 사랑채, 부속채, 별채,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채는 원래 화단자리가 있었으나 철거되었다. 상량문에 대정 7년이라 명기되어 있어 1918년에 건축된 것을 알 수 있다. <익산의 근대문화유산(익산문화원 2010년)>
김승대 연구관은 "김육불망비가 조해영 가옥에 있는 것을 보면 옛 도로 부지를 일부 점유하여 건축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김육불망비는 조선중기 1659년(효종 10년)에 세워졌으며 익산시향토유적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의 전면 중앙에 “영의정김공육경요보민인덕불방비”라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대동법 실시로 유명한 인조, 효종 대 실학의 선구로 유명한 영의정 김육에 대한 선정비이자 불망비이다. 김육은 호남지역의 대동법 실시를 여러 차례 건의하고 유언으로까지 임금에게 간절하게 당부한 사람이다.
조해영 가옥 안에 있는 널려있는 기념비와 부속물
조해영 가옥 사랑채
조해영 가옥 별채(일본식 가옥)
▣ 김안균 가옥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소재,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3호, 1922년 건축, 지상1층 한식목조 기와
김안균(1934~2004)은 이 지역의 3대 부호 중 하나인 만석군 김병순(1894~1936)의 4남이다. 현재는 김안균씨가 돌아가시고 나서 관리인이 집을 돌보고 있다.
현지에서는 김진사댁이라 칭하는 바 김진사는 김병순을 일컫는다. 김병순의 큰 아들 김해균은 일제시기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전신) 영어교사를 역임하였다. 1936년 김병순이 사망하자 근거지를 서울 혜화정(혜화동)으로 옮겨 생활하자, 4남인 김안균이 거주하게 되었다.
김해균은 공산주의자 박헌영의 후배이며 김해균이 경영하던 서울 혜화정은 1945년부터 3년간 박헌영이 거주하던 곳이고 조선공산당 준비위원회를 결성한 곳이기도 하다. 6.25이후 김해균은 박헌영과 함께 월북하여 계속적으로 북한에서 활동을 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가옥은 현재 전북에서 가장 큰 규모의 가옥이며, 익산에 남아 있는 고가 중에 가장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1920년대에 지어진 우리나라 상류가옥의 하나로 조선말기의 양반가옥형식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일본식 수법이 가미되어, 주택의 모습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 갔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 창고, 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익산의 근대문화유산(익산문화원 2010년 발간)>
김안균 가옥 전경 <익산의 근대문화유산(익산문화원 2010년 발간)>
▣ 이배원 가옥
익산시 향토유적 제10호, 1917년 건축
이배원(1881~1949)은 부친 이석순(1839~1926)때부터 일궈온 재력을 바탕으로 일제시기 호남지방의 최고 자산가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1901년, 1902년에 빈곤한 자를 많이 도와 이에 걸인들이 향리에 적선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의 아들 이집천(1900~1959)이 편찬한 「오당수화」(1924), 「서벽정시고」(1929)에 보면 당대에 얼마나 재부와 권세가 컸는지 짐작 할 수 있다. 「오당수화」는 이배원의 부친인 이석순의 결혼 60주년 기념인 회혼식에 보내준 여러 인사들의 서화를 모아 놓은 것이다.
이 집은 현 관리자인 이석영의 조부인 이배원이 1917년에 지은 것으로 그는 함라면의 대표적인 부농 중 하나였다. 이 가옥은 함라 3부자 집 중에서 가장 먼저 지은 집으로 김안균과 조해영 가옥의 모델로 작용하였다.
건립당시에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문간채, 곳간채 등 여러 채가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주위의 토석 담장만 남아 있다. 사랑채는 내부가 개조되어 원불교 교당으로 활용되고 있다. <익산의 근대문화유산(익산문화원 2010년 발간)>
안채
사랑채 원불교 교당으로 사용되고 있음.
한옥 주변으로 잘 정비된 돌담길
글 : 손문선 대표
설명 : 김승대 전라북도 학예연구관, 김홍균 기전대 교수, 오석고 어르신
사진 : 윤대윤 회원, 익산문화원
행사진행 : 장경호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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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리를 잘하였네요. 같이 동행하였지만 놓친 부분을 설명을 읽고 알게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