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왕산 억새 김 갑 수 k4195kim@hanmail.net 화왕산 억새 군락지에 갈 작정으로 집을 나섰다. 날씨는 화창하고 봄바람은 기분 좋게 불었다. 화왕산 입구 자하곡 매표소를 지나 주차장까지는 벚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마침 벚꽃이 만개하여 터널 안은 벚꽃 놀이하는 사람들로 부산했다. 벌들도 떼를 지어 꿀을 퍼다 나르기에 바빴다. 산행 온 사람들은 연신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면서 화왕산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나도 그들과 더불어 돌계단을 하나둘 헤아리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화왕산 억새군락지는 산 정상을 오르지 않고서는 볼 수가 없다. 가을이면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 억새 축제를 연다. 억새는 단풍과 함께 가을의 모습을 아름답게 꾸며준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은 투명하여 많은 이들에게 기쁨을 준다. 바람에 몸을 맡겨 물결치는 억새의 파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생명력이 강인하여 길가나 공원 등 어디서든 잘 자란다. 험한 기후와 풍토에도 꺾이지 않고 버텨 내는 모습은 마치 나의 지난날 어려웠던 시절을 닮은듯하여 나는 억새를 좋아한다. 한 시간 반쯤 지났을까. 하늘을 찌를 듯 곧은 소나무 군락지에 다다랐다. 내 몸의 에너지는 이미 소진되었다. 힘이 들어서 더는 산행이 어려웠다. 정상을 두고 되돌아서야 하는 발걸음은 무쇠 덩이처럼 무거웠다. 체력을 보강해서 일주일 후에 다시 오르리라 다짐하며 하산했다.
기상정보는 미세먼지 나쁨이고 오후에는 비가 온다고 했다. 화사한 꽃들로 조성되어 있던 지난봄의 터널 길은 싱그러운 녹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부산했던 인파도 꿀을 퍼다 나르던 벌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섭리가 놀랍다. 흙길과 돌계단을 한 시간 반쯤 걸었을 때 하산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정상까지 얼마 남았냐고 물으니 30분 남았다고 했다. 부지런히 발자국을 세며 언덕길을 올랐다. 갑자기 먹구름이 소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가 싶더니 가는 빗방울이 떨어졌다. 금방 그칠 비가 아니어서 등산을 멈추어야 했다. 정상의 억새 군락지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안고 발걸음을 돌렸다. 체력이 바닥났던 첫 번째에 이어 날씨가 허락지 않았던 두 번째의 정복도 실패했다. 포기할 수 없는 마음은 다음을 기약했다. 하산하는 사이 봄비에 폭 젖은 온몸이 내 마음처럼 무거웠다. 오늘은 세 번째 화왕산을 오르는 날이다. 화왕산은 창녕읍에서 바라보면 병풍처럼 펼쳐진 기암절벽이다. 산 입구의 돌계단을 오를 때는 봄바람을 타고 온 솔향이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굵은 모래가 깔린 산길을 걸으며 이내 자연 속으로 빠져든다. 등산로에는 땅 위로 드러난 소나무의 뿌리가 많은 사람에게 밟혀가며 그들의 디딤돌이 되어주고 있었다. 태풍에 뽑히거나 꺾여 말라버린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곳곳에서 보인다. 바위틈에서 자라는 소나무도 보인다.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온 나무의 험난한 여정이 느껴진다. ‘바위보다 그 틈새를 비집고 사는 소나무가 더 강하다’고 한 누군가의 글이 생각난다. 나는 청소년기에 신문 배달을 하면서 고등학교에 다녔다. 대학을 다닐 때는 가정교사를 하면서 학비를 벌었다. 인고의 세월을 견딘 소나무를 보고 있자니 마치 그 옛날의 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하다. 산 중턱에서 소나무의 무덤을 만났다. 재선충에 의해 죽어버린 아름드리 소나무들을 잘라내어 녹색 비닐로 무덤을 만들어 놓았다. 재선충은 자체 이동성은 없다고 한다. 재선충을 옮기는 솔수염하늘소 북방수염하늘소를 매개로 하며 매개충이 성충이 되어 소나무를 갉아먹을 때 상처 부위를 통해 다른 나무로 옮기게 된다. 재선충에 감염된 소나무는 수분 이동이 막혀 한 달 안에 말라 죽게 된다. 산을 오를수록 더 많은 무덤이 있다. 이는 지나는 이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한다. 30년 이상 자란 튼튼한 소나무가 보이지 않는 재선충에 의해 죽어 가는 걸 보니 안타깝다. 나의 삶도 보이지 않는 충을 받아들여 죽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게 한다. 산행할 때는 험하고 좁은 길의 안전을 위해서 오르는 이에게 먼저 길을 내어주며 상대를 배려해야 한다. 이곳 역시 길이 좁은 데다 돌길이라 안전펜스와 밧줄을 의지하며 두어 시간을 오른다. 주능선이 보이기 시작하고 멀리 창녕읍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화왕산과 맞은편 관룡산을 이어주는 능선은 아직 진달래가 붉게 물들어 있다. 정상부근으로 갈수록 산세가 험하여 밧줄 난간과 안전펜스가 더 많아진다. 군데군데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안전하고 편리하긴 해도 자연경관을 해치는 것이 아쉽다. 화왕산 억새들은 바위틈에 숨었는지 아직 자태를 보일 생각을 않는다. 오르막길을 가파르게 올라 드디어 화왕산 정상에 도착한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전경이 너무나 아름답다. 성취감에 가슴이 벅차다. 하늘까지 화창해 멀리 보이는 기암절벽과 녹색 자연도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정상에서 동쪽으로 내려다보면 분화구를 중심으로 형성된 화왕산성이 있다. 10리가 되는 평원의 둘레를 따라 축성한 가야 시대의 성이다. 기암절벽을 이용한 화왕산성은 천연의 요새로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의병 활동무대 였다고 한다. 이곳은 호국정신으로 순국한 선열들의 넋을 기리는 배움의 현장으로 후손들에게 물려주어 보전해야 하겠다.
화왕산성은 여름의 대초원도 보기 좋지만, 억새군락이 장관을 이루는 가을이 제격이다. 두 봉우리 사이의 대규모 분지가 마치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새벽녘에는 또 다른 진풍경이 연출되는데 밀려온 안개가 초원을 가득 채우면 순식간에 호수가 된다고 한다. 그 광경을 보기 위해서라도 꼭 한번 새벽 등반을 하고 싶다. 봄이라 그런지 메마른 억새들만 황량하다. 자세히 다가서니 그 사이로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 있다. 가을에 꼭 다시 오라는 어린잎들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의 아름다운 모습은 볼 수 없지만, 그 말을 위로 삼아 가을의 어느 날을 기약해본다. 하산할 때는 등산할 때보다 절반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올라올 때 보지 못했던 철쭉과 진달래가 손을 흔들며 나를 배웅한다. 오늘 산행에서 오랜 세월을 참고 견딘 소나무를 통하여 인내를 배운다. 배려와 순응의 자세도 함께 배운다. 비록 억새가 펼치는 짜릿한 쾌감은 없었지만, 내 삶도 억새의 생명력을 본받아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강인한 모습으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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