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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제 정촌현의 중심지인 신정동 일대의 문화유적
정읍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부터이다. 영원면 성지마을에서는 구석기시대의 편마유문암제가 수습되었고, 2008년 정우면 양지마을에서는 구석기시대의 석영제 여러 면 석기가 수습되었다. 2020년 산내면 매죽리에서는 대규모 구석기 유적층이 발견되어 정읍의 역사적 근원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정읍천 지류인 천원천의 서쪽, 비룡산에 위치한 입암면 접지리 유적에서는 지석묘군 사이에서 신석기시대 적석노지 2기와 신석기시대 토기편 여러 점이 확인되었다. 여기에서는 새김무늬(침선문), 찍은 무늬(점열문), 빗금무늬(선문) 등의 빗살무늬토기(무문토기)가 주종을 이룬다. 특히 빗살무늬토기에 2~3열의 점열문이 시문된 것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신석기시대 만기(晩期)로 편년된다. 적석노지는 모두 원형의 평면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단면은 완만한 U자형으로 굴착되었고 내부에는 크기 10~20cm 가량의 깨진 돌이 채워져 있다. 석재는 불에 맞아 붉게 변색되었으며 내부에서는 소량의 목탄이 검출되었다. 적석노지는 일종의 노시설로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식량자원을 획득하고 조리했던 시설물이다. 이 신석기 유적층을 파손시키며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7기의 고인돌이 축조된 것이 확인되었다. 고인돌 왕국인 모로비리(현 고창군으로 마한 모로비리국, 백제 모량부리, 현재 모양성이 있음)의 세력 분화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비룡산 산자락에 있는 신석기시대 유적층 위에 고인돌을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입암면과 용산동 일원에는 고인돌이 거의 리(里) 단위로 20여 개소에 걸쳐 자리하고 있다. 이 중에서 정해마을에 있는 치마바위는 정읍의 유래를 담고 있는 고인돌로 이 일대에서는 가장 큰 고인돌이다. 입암면 접지리 유적에서는 고인돌 7기가 조사되었다. 무덤방의 위치별 분류는 지상식 1기, 반지하식 2기, 지하식 4기로 세분된다.특히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받침돌을 배치한 후 그 사이에 깬돌(할석)을 채워 넣는 방법으로 조성된 묘역시설이 2기에서 확인되었다. 이러한 묘역시설은 진안 용담댐 수몰 지구에서 확인된 묘역식 지석묘와 비교되며 대략 기원전 6세기 무렵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한다.
정읍시립박물관으로 이전 복원된 시기동 고인돌은 고부 만수리에서 확인된 것과 같은 주형(柱形)지석을 갖춘 고인돌로 주변에서 신석기시대의 토기편이 수습되었다. 상평동 종합경기장 부지에서는 청동기 집터 6기, 구상유구 1기, 독무덤 1기가 낮은 구릉상에서 조사되었다. 주거지는 송국리형으로 출토유물은 무문토기호, 홍도완, 소형토기 등의 토기류와 갈판 등의 석기류이다. 상평동유적은 기원 전 9세기 초반에서 7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생활유적이다.
신정동 정해마을 남쪽 보화교 교당 앞에 지석묘 1기가 있다. 상석의 장축은 360cm, 단축은 240cm, 높이는 120cm이다. 상석의 평면은 장방형의 형태를 보이며, 단면도 장방형의 형태로서 이 부근에서는 제일 큰 규모이다. 원래 지석묘 옆에 커다란 당산나무가 있었는데 베어낸 후 좋지 않은 일이 계속 이어지자 이 지석묘를 잘 보살피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지석묘 주위를 자연석으로 둘러쳐 놓은 상태여서 하부에 지석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주민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고인돌은 치마바위라 불리는데 이 바위 밑으로는 바다와 통하고 이 바위를 들어내면 바닷물이 치솟아 올라와 정해는 다시 바다가 된다고 한다.
표 3. 구 정읍현 지역 고인돌
번호 | 마을 | 갯수 | 비고 | 번호 | 마을 | 갯수 | 비고 |
1 | 정해마을 | 1 | 정해마을 전설의 치마바위 | 13 | 신성마을 | 3 | 마을 어귀 |
2 | 반암마을 | 4 | 정해마을 북쪽 | 14 | 신마석마을 | 7 | 정읍시립박물관으로 이전 |
3 | 계화마을 | 1 | 속칭 자라바위 | 15 | 자래등마을 | 1 | 신규 발견 |
4 | 구암마을(1) | 9 | 마을 민가 | 16 | 선암마을 | 1 | 신면유적 인근 |
5 | 구암마을(2) | 2 | 교암초등학교 뒤편 밭 속에 합쳐 놓음 | 17 | 신면마을 | 1 | 속칭 구시바위 |
6 | 신기마을 | 1 | 밭두렁에 위치, 마을 안 3기 정도 땅속에 묻음 | 18 | 붕래마을 | 8 | 논가로 이동, 훼손 |
7 | 평암마을 | 2 | 다원시스 부지 내 | 19 | 시기‧송산동 | 7 | 1기 정읍시립박물관으로 이전 |
8 | 평점마을 | 4 | 망실 | 20 | 회룡마을 | 1 | 내장산 어귀 |
9 | 서당마을 | 3 | 망실 | 21 | 음성마을 | 1 | 마을 뒤편 야산 |
10 | 원하부마을 | 4 | 민묘역 | 22 | 송죽마을 | 3 | 내장산자락 |
11 | 신등마을 | 2 | 이동된 것 | 23 | 옹암마을 | 1 | 구시바위, 이동된 것. |
12 | 군령마을 | 1 | 마을 어귀 | 24 | 원접마을 | 1 | 마을 민가 |
입암 마석리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1기가 확인되었고 이곳에서 동쪽으로 2미터 가량 떨어진 지점에서는 원삼국시대 15호와 16호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이 주거지는 평면 형태의 송국리형 주거지이다. 이 주거지를 포함에서 마석리에서는 원삼국시대 주거지 34기가 발굴되었다. 신면유적에서는 삼국시대의 주거지 33기, 불땐자리(소성유구) 6기, 분구묘 8기, 토광묘 8기, 옹관묘 8기, 수혈 3기가 발굴되었다. 토광묘와 옹관묘는 추가장으로 판단된다. 부장 유물은 호, 바리모양 토기(발형토기), 쇠손칼(철겸), 쇠낫(철겸), 쇠도끼(철부) 등이다. 토광묘에서는 발형토기, 두귀달린호, 고리자루칼(환두도), 쇠낫, 쇠손칼, 쇠도끼 등이 출토되었다. 신면유적 발굴 당시 내조회마을에서 일부 유적층을 발굴 조사하던 중 근처에 분구묘가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신정동 금구마을에서는 원삼국시대 주거지 15기와 백제시대 주거지 3기, 백제 웅진시대 고분 9기가 조사되었으며 개배와 삼족기 등이 출토되었다. 고분은 웅진 2기식 횡혈식 석실분 3기와 횡구식석곽분 2기가 조사되었으며, 나머지 4기는 벽석과 연도의 유실이 심하여 유형을 알 수 없다. 출토유물은 3기의 고분에서 금제이식 3쌍과 옥류 28점, 토기류 35점, 대도나 도자와 같은 다수의 철기류 등이다. 석축묘 외에도 백제시대 옹관묘 2기, 기타 고분 1기가 확인되었다. 백제고분군은 6세기 초엽에서 중엽 이후까지로 판단되며 유물에서도 이러한 연대를 뒷받침하고 있다. 출토 유물 중 금제이식, 곡옥과 관옥 등의 장신구류, 그리고 무기류 등에서 피장자의 신분은 유력자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수성동 오정유적에서는 원삼국시대 주거지 17기, 수혈 4기, 시대미상의 석곽묘 3기가 조사되었다. 이 원삼국시대 주거지에서는 4주식 주공, 부뚜막, 장타원형구덩이, 벽구 및 배수로 등의 내부시설을 갖춘 전북 서해안 지역의 마한계 주거지의 특징이 확인되었다. 이문 유적에서는 원삼국시대 주거지 3기가 발굴 조사되었다.
표 4. 정읍지역의 고대 주거지
순서 | 유적 명칭 | 시대 / 개수 | 연대 | 내용 |
1 | 망담 유적 | 청동기 / 1기 | 청동기 전기 | |
2 | 상평동 유적 | 청동기 / 6기 | 중심연대 기원전 9C 초반~7C | 방형주거지 1기, 원형 3기 |
3 | 외장 유적 | 청동기 / 2기 | 상한연대 기원전 | |
4 | 보화리 유적 | 청동기 / 1기 | 타원형구덩이를 갖춘 송국리형 주거지 | |
5 | 마석리‧접지리 유적 | 청동기 / 1기 | ||
6 | 유정리 유적 | 청동기 / 1기 | 내주공과 구덩이를 갖춘 타원형 주거지 | |
7 | 장수동 유적 | 청동기 / 5기 | 방형 1, 원형 3기 | |
8 | 망담 유적 | 원삼국 / 2기 | 부뚜막 시설: 3C | 이문유적 원통형 토제품 5C 전반경 |
9 | 오정 유적 | 원삼국 / 17기 | 중심 연대 3C, 하한 4C 중반 | 직구호: 4C 전반기 형식 |
10 | 마석리‧접지리 | 원삼국 / 34기 | ||
11 | 신정동 유적 | 원삼국 / 15기 | 방형 | |
12 | 장수동 유적 | 원삼국 / 19기 | 방형계 대부분 | |
13 | 신천리 유적 | 원삼국 / 4기 | ||
14 | 이문 유적 | 원삼국 / 3기 | ||
15 | 용흥리 유적 | 원삼국 / 1기 | ||
16 | 신면 유적 | 삼국 / 33기 | 기원 후 4C 전후 | 방사선탄소 연대측정: 2C 중엽~ 4C 전후 |
17 | 남산유적 | 삼국시대 / 40기 | 중심 연대 4세기 중반 | 마한계에서 백제로 넘어가는 과도기 |
18 | 신월리 유적 | 삼국시대 / 5기 | 평면형태로 방형계 | |
19 | 관청리 유적 | 삼국시대 / | 5C 초 | 4주식 방형계 |
죽지리 산성과 초산산성을 중심으로 옛 정읍현 지역을 살펴보면 고인돌은 동편 보다 서편에 집중되어 있다. 동편에는 붕래마을, 송산동, 회룡마을, 송죽마을에 집중되어 있고 서편에는 구암마을, 평암마을, 반암마을, 정해마을 등에 집중되어 있다. 주거지와 분묘 등은 서편에 집중되어 있고, 고속철도 부지와 국도 21호선 구간, 내장산리조트, 호남고속도로 정읍 입암구간 선형공사, 방사선연구센터 등을 건설하기에 앞서 지표조사와 시굴조사에 이은 구제발굴이 다수 진행되면서 많은 성과물을 거두게 되었다.
아쉬운 점은 정읍현의 고대 행정, 군사의 중심지인 산성에 대한 조사가 없는 점이다. 삼국시대의 산성은 초산산성, 죽지리 산성이 있고, 입암산성의 초축이 백제 때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초산성은 높이 238m의 초산 정상부를 테머리식으로 감은 석성으로 둘레는 1,061m이다. 건물지에는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의 토기조각과 기와조각이 산포되어 있다. 초산 서쪽에 남북을 잇는 도로가 통하고 있어 산성으로의 접근은 용이하다. 정해마을에서 초산까지는 약 5km 거리이다. 죽지리 산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이루어졌다. 외성의 두레가 678m이고 내성의 둘레가 42m이다. 정읍 냇가 남쪽 언덕에 있는 대실마을 서쪽 죽지봉의 동쪽 경사면을 삼태기형으로 감은 토성이다. 내성의 정상 광장에서는 토기조각과 기와조각 등 백제시대 유물이 나왔다. 정해마을에서 죽지봉까지는 약 7km 떨어져 있다.
용산동 및 신정동 일원에서는 삼국시대 토기가마 2기, 조선시대 백자가마 7기, 옹기가마 3기 등이 조사되었다. 삼국시대 토기가마는 경사면에 터널식으로 굴을 파고 만든 굴식 가마이다. 1호 가마는 경사면을 바닥으로 이용하고 있는데 삼국시대 토기가마의 일반적인 형태이다. 2호 가마의 전체 길이는 643cm이다. 그밖에 신정동 일원에서는 격자문이 타날된 토기편과 승석문이 타날된 토기편이 채집되었는데 확실한 백제계 토기편으로 분류된다. 이들 유물의 출토 지점은 정해마을에서 부귀마을, 간등마을, 백제고분군이 발굴조사된 금구마을로 이어지며, 이 지역에서 벗어나 멀어지는 지점에서는 거의 분포양상을 보이지 않는다.
신정동 백제고분군에서는 금제이식이나 옥, 철제대도나 토기와 같은 풍부한 유물의 출토를 통해 피장자의 신분이 이 지역의 유력자였음이 확실시되며 신정동 일대의 백제유물 산포지들은 이러한 유력자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배경에는 용산천과 천원천 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넓은 충적지에서 이루어지는 농업생산력이라는 경제적인 이유, 새재나 갈재라고 하는 큰 고갯길을 통해 호남정맥을 넘어 영산강문화권과 이어지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백제는 여기에 정촌현을 두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해마을은 구 정해마을과 신 정해마을로 구분된다. 정해마을은 용산천을 끼고 있는 평야지대이다. 마을의 남쪽에 원래의 정해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던 관계로 그곳을 구 정해마을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지역이 논이나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마을의 남단에는 보화교 교당이 자리하고 그 북쪽으로 접한 곳에 교인촌의 흔적으로 각각의 민가를 분리했던 돌담이 근래까지 남아 있었다. 보화교 교당 마당에는 치마바위라 불리는 고인돌 1기가 있다. 유물산포지는 마을 서쪽 묘목밭으로 경작되는 지역에 위치한다. 이 일대에 대해서 정촌가요특구 조성을 위한 공사에 앞서 실시된 발굴조사에서는 별다른 유적이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인돌을 중심으로 보화교 교당과 교인촌이 있던 곳을 발굴 조사하지 못한 상태라 아쉬움이 크다.
보화교 교당에서 도로를 건너 동편에는 새로운 정해마을이라는 뜻의 신정마을과 정해마을 위쪽 마을이라는 뜻의 상정마을이 근래 조성되었다. 남아 있는 대지를 보면 작은 돌을 쌓아놓은 것이 여러 곳에 보일 정도로 지표면에는 돌과 자갈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구 정해마을에서는 백제토기로 판단되는 격자타날의 회청색경질토기를 포함하는 경질토기들이 수습되는데 내면은 물손질하여 정연한 흔적이 보인다. 백자편들이 상당수 수습되고 있는데 이는 이곳에 조선시대의 마을이 있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떨어진 정해마을에서는 표면에 승석문이 타날된 흔적이 남아 있는 회청색경질토기편 1점이 수습되었다. 마을 서쪽과 접한 밭에서는 회청색경질토기편이 여러 점 수습되었는데 1점은 표면에 승석문이 타날되어 있어서 백제토기편으로 판단된다. 승석문이 타날된 토기는 기벽이 두터워 대옹편으로 판단된다. 정해마을 서편에서는 회청색경질토기편 약간과 회청색 혹은 회색의 연질토기 다수가 수습되었다. 경질토기편 1점은 기표면에 격자문이 타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토기편으로 판단된다. 정해마을 북쪽 밭에서는 기표면에 격자문이 타날되어 있는 백제계 토기편이 수습되었고, 정해마을 동편 유물산포지에서는 승석문이 타날된 흔적이 남아 있는 회청색토기편 1점이 수습되었다. 부귀마을과 간등마을 유물산포지 4개소에서도 승석문과 격자문이 타날된 토기편이 수습되었다.
신정동 백제고분군은 6세기 초엽에서 중엽 이후까지로 판단된다. 신면유적의 주거지는 그 중심연대가 기원후 4세기를 전후한 시기로 볼 수 있다. 분구의 평면 형태나 출토 유물 중 환두도의 제작기법을 보았을 때 중심 시기는 4세기를 전후한 시기로 판단된다. 백제계 주거지에서 확인되고 있는 판석재 부뚜막 시설이나 삼족기, 고배, 개배 등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러한 취락의 특징은 전북지역에서 5세기 중엽에서 후엽까지 마한계 분구묘가 지속적으로 축조된 점과도 관련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표 5. 정읍의 고대 고분군
순서 | 명칭 | 시대 구분 | 묘제 형식 및 특징 |
1 | 지사리 고분군 | 4세기 말~ 5세기 전반 | 분구묘, 수혈식 석곽 포함 |
2 | 신면리 고분군 | 4세기 전후 | 분구묘, 옹관묘, 주거지, 환두도 출토 |
3 | 운학리 고분군 | 5세기 후반 | 수혈식 석실묘, 백제 금동제장식금구(金銅製裝飾金具)과 금동제투각장신구(金銅製透刻裝身具)가 출토 |
4 | 은선리 및 도계리 고분분 | 6세기 전반∼7세기 전반 | 횡혈식 석실묘, 웅진시대와 사비시대 묘제 |
5 | 신정동 고분군 | 6세기 초엽~ 중엽 이후 | 횡혈식 석실묘, 금제 장신구 출토 |
6 | 장금리 고분군 | 웅진기 | 횡혈식 석실묘 |
7 | 청석리 고분 | 6세기 중반 이후 | 횡혈식 석실묘 |
8 | 통석리 고분 |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 횡혈식 석실묘, 추가장(追加葬) 흔적 |
9 | 신천리 고분 | 미확인 | 주구묘 |
10 | 관청리 고분 | 5세기 | 옹관묘 |
11 | 두지리 고분군 | 6세기 | 분구묘 |
12 | 백산리 고분군 | 6세기 | 분구묘 |
13 | 박산리 고분군 | 6세기 | 분구묘 |
14 | 신월리 고분군 | 6세기 추정 | 분구묘 |
15 | 장내리 고분군 | 6세기 추정 | 분구묘. 2020년 신규발견-미보고, 2기 잔존, 1기 망실 |
16 | 산성리 고분 | 원삼국시대 추정 | 대형옹관편 수습(망실) |
17 | 백암리 고분 | 원삼국시대 추정 | 대형 옹관편 수습(망실) |
18 | 관청리 고분군 | 원삼국시대 추정 | 분구묘 형태, 2019년 주민 제보 - 미보고, 5기 내외 잔존 |
19 | 천원리 고분 | 원삼국시대 추정 | 옹암마을 앞, 분구묘로 추정(제기 출토) |
20 | 청량리 고분 | 6세기 추정 | 장내리 고분군 근처, 속칭 말무덤 |
석실묘 | 중광리(작천), 중광리(원천), 애당리(두암), 애당리(모촌), 고교리(소고), 흑암동(신흥마을) | ||
분구묘 | 앵성리(수성지): 속칭 말무덤, 애당리(애당) 2기: 망실, , 남복리: 망실 | ||
기타(망실) | 창동리, 장문리, 남복리, 산매리, 승부리, 복흥리, 구룡리, 신평리, 오성리, 비봉리, 고교리(주정), 고교리(성고), 신천리(춘수), 신천리(저동), 용정리(외동): 옹관묘, 백운리: 옹관묘 여러 기 망실, 흑암동(신흥) 석실고분 1기 망실, 산외면 ‧ 입암면 석실고분 구전. |
백제가 초산도비리국을 점령하고 입암산 북쪽 평야지대에 진출한 것은 5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백제가 마한을 멸망시키고 고사부리성을 축조한 시기(삼국사기에는 온조왕 때)는 5세기 무렵으로 백제는 4세기 대까지 주로 북방세력과의 쟁투에 주력했다. 신면유적의 분구묘가 4세기 전후에 축조되었고 신정동 고분군이 6세기 초엽에서 중엽 이후까지의 것이라 할 때 초산도비리국은 5세기경에 백제의 영향권 아래 세력을 유지하며 분구묘를 축조했고, 백제 정촌현은 그 전후에 성립되었으며 6세기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유력자의 웅진기 고분이 축조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백제 정촌현의 시대가 활짝 열렸을 것이다.
백제는 정촌현의 치소를 5세기 무렵에 정해마을 일대에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입암면 마석리와 신정동 금구마을에서 마한시대의 주거지가 발굴되고, 입암면 신면리에서 분구묘와 삼국시대의 주거지 33기가 발굴된 것이 주목된다. 신면유적의 경우에 주거지는 삼국시대(또는 원삼국시대)의 것인데 분구묘와 옹관묘가 많이 축조된 것은 백제계가 마한계와 결합되었거나 우위를 점한 결과일 수 있다. 백제 정촌현이 정해마을에 있었다는 것을 확증할 유적은 없으나 금구마을의 발굴 결과는 정해마을에 치소가 설치되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새재 북쪽이나 입암산 북쪽 가까운 곳 보다는 주변에 산이 둘러져 있고 서쪽으로 지금의 내장산-고창간 도로와 서북 방향으로 신정동-연지동을 연결하는 도로를 따라 수구가 열려 있는 정해마을이 입지에 유리했을 것이다.
근초고왕은 371년 수도를 한산으로 옮겨 평지에 위치한 기존의 궁성과 함께 거대한 수도권을 만들었다. 백제 정촌현이 평지에 있었다가 후대에 초산이나 죽지봉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있고 이를 통해 관장하는 지역의 범위를 넓혔을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백제의 성장에 따라 지방통치도 서서히 자리를 잡아간 것을 의미한다. 기존 마한의 초산도비리국의 영향을 벗어나 독자적인 지역 지배권을 정촌현이 확보하였다. 한산으로의 수도 이전과 정촌현의 독자성 확보에는 100년 정도의 시간차가 있었다.
『한원(翰苑』의 백제 기록에 「國鎭馬韓 地苞拘素 陵楚山而廓宇」라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 이는 어느 시기 백제의 남방경역을 표시한 말로서 「마한을 누르니 땅은 구소를 감싸고 초산을 넘어서 울타리를 삼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위의 「국진마한 지포구소 능초산이곽우」라는 구절은 곧 백제가 호남정맥을 경계로 정읍·고부를 새로운 판도 안에 포함시켰다는 것이다. 구소(拘素)는 고사(古沙)와 대응하는 마한 시대의 소국 명칭으로 마한의 고비리, 백제의 고사부리로 연결된다. 또한 초산(楚山)은 『위지』 마한의 기록에 초산도비리국이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 초산은 마한시대에 입암산과 초산 사이에 자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초산도비리국을 뜻한다.
백제는 근초고왕 시대에 마한의 구소국과 초산도비리국을 공략하는데 성공하여 자신들의 영토로 삼았다. 백제본기 온조왕 36년(서기18)조에 “8월에 원산·금현 2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을 축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대체로 근초고왕 시기의 기록을 앞당긴 것으로 판단된다. 위 기록은 『한원(翰苑)』의 기록인「國鎭馬韓 地苞拘素 陵楚山而廓宇」중에서 「國鎭馬韓 地苞拘素」의 한 구절이 「馬韓築城…築古沙夫里城」이란 온조왕의 기사와 같은 상황이다.
백제는 4세기경에 초산도비리국을 누르고 이 지역에 정촌현을 설치하였다. 그 근거로 볼 수 있는 유적과 유물이 근래 들어 속속 발굴되어 세상에 드러났다. 신정동에 건설된 첨단방사선연구센터를 비롯하여 입암면 신면리 등에서 마한시대와 백제시대의 마을 및 집터 유적과 분구묘 등을 발굴한 결과 환두도와 옹관 등이 출토되었다. 입암면과 신정동, 과교동 일원에는 마한시대 이전에 고인돌의 축조가 널리 확산되어 이루어졌다. 이러한 분포 양상은 청동기시대에서 마한시대의 초산도비리국 그리고 백제의 정촌현으로 이어지는 발전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읍통문 홈페이지 이진우 샘 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