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시 흑암동 배영고등학교 뒤편에 있는 정충사(旌忠祠)는 여산 송씨 임란공신 송상현을 배향하고 있는 서원이다. 송상현 이 분은 누구인가. 여기서 『호남절의록』, 『호남삼강록』을 비롯한 사료를 통해서 공에 대한 업적을 소개하고 기리고자 한다. 송상현(宋象賢:1551 명종 6 – 1592 선조 25)
자는 덕구, 호는 천곡, 본관은 여산이다. 여산군 송익손의 후손이며 참판에 증직된 송복흥의 아들이다. 공은 1551년(명종 6)에 고부 천곡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덕성스럽고 경솔하지 않았다. 부모를 모실 때는 아무리 춥거나 더울 때도 의관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종일토록 시립하였다. 아우인 참판 송상인과 우애가 돈독하였다. 손위 누님은 장언오의 처이다. 일찍 과부가 되어 누님이 친정에 와서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공은 누님을 섬기기를 극진히 하였고 생질들을 가르치기를 자기 아들과 다름없이 하였다.
공은 일찍이 경사에 통달하였으며, 세 번 읽으면 잊지 않을 정도로 총명하였다. 15세 때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하자 시험관이 반드시 나라에 큰 동량이 되리라고 예견하였다.
1570년(선조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6년(선조 9)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사간원과 육조에서 관직을 두루 역임하다가 소인배의 간계로 외직으로 나가게 되었다. 1584년(선조 17)에 질정관으로, 이듬해에는 서장관으로 중국을 두 차례나 다녀왔다. 뒤에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1588년(선조 21) 배천의 수령으로 나아가 정여립의 난을 평정하였다.
1591년(선조 24)에 동래부사가 되었다. 이때는 왜적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장계가 올라간 직후로 조정에서는 문무를 공을 선발하여 동래부사로 보냈다. 그러나 사실은 선의에 의한 인사가 아니어서 주위 사람들이 와서 억울하게 되었다며 위로하였다. 그렇지만 공의 부친은 “신하의 직분이란 사퇴하기 어려운 것이다. 장차 죽게 된들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공은 김장생에게 왜적이 들어오면 죽음으로써 싸울 것을 맹세하는 뜻이 담긴 시를 지어 보냈다. 김장생은 공의 뜻을 장하게 여겨 그 시를 벽에 걸어 두었다.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왜적이 대거 침입해 오자 병사 이각이 군사를 거느리고 공에게 와서 왜적의 기세가 월등하고 중과부적이니 도망치자고 하였다. 공은 대의로써 그를 책망하고 사수할 것을 제의했으나 이각은 공의 뜻에 따르지 않고 도망하였다.
그는 청지기 신여로에게 말하기를 “나는 국토를 지키는 신하가 되어 마땅히 죽어야 하나 너는 노모가 있으니 빨리 돌아가라.” 하니 신여로는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양군이 접전하게 되자, 왜적은 “싸울 터이면 싸우고 싸우지 않을 터이면 길을 비키라.”는 글을 목판에 써서 보내왔다. 공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고 응수하였다.
이에 왜적이 병사를 총동원하여 성을 포위하자 양산군수 조영규가 이 소식을 듣고 공과 함께 성을 사수하기 위해 달려왔다. 이튿날 15일에는 왜적이 성을 넘어 밀어닥쳤다. 수십 배나 많은 왜적을 당하기는 중과부적이었다. 공은 조복(朝服)을 꺼내어 갑옷 위에 입고 남문의 초루에 올라가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두 손을 마주잡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공이 통신사로 일본에 왕래할 때 정성스럽게 대접한 일이 있는 적장 평조익(平調益)은 공에게 다가와 성에 틈이 있는 곳을 가리키며 빨리 피하라고 알려주었으나 공은 평조익의 말을 듣지 않았다. 평조익이 옷깃을 잡고 피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불응하고 객관으로 나아가 북향사배한 후 손을 깨물어 피를 내어 부채에 써서 부친께 마지막 글을 올렸다. “외로운 성 적군 에워싸 달무리졌으니, 그런 줄도 모르는 열진(列鎭) 모두 베개만 높습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 의리가 지극히 무거워서 부모 은혜 가벼이 하니 헤아려 주소서.” 이글을 공의 아버지에게 보냈다.
수종을 드는 사람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내 배꼽 아래 조그만 사마귀가 있으니 이것을 증거로 삼아 내 시신을 거두라.”라고 하고는 호상에 앉아 한 점 흔들림 없이 눈을 부릅뜨고 군관 송봉수, 김희수와 향리 대송백, 소송백 등과 관노 철수, 매동 등과 좌우로 늘어서서 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마침내 적의 칼에 맞아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왜적 평조익과 현소 등이 공의 장렬한 죽음에 감탄하였으며 공을 해친 자를 잡아서 따라 죽게 하였다. 신여로는 집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송공은 나라를 위해서 죽었거니와 나라고 홀로 공을 위하여 죽지 못하겠는가.” 하고서 군수 조영규, 교수 노개방, 유생 문덕겸 등과 함께 적과 싸우다가 죽었다. 동래의 백성 김상과 공을 모시던 두 여인, 금섬과 금섬의 몸종 만개도 적과 맞서 싸우다가 죽었다.
이를 지켜본 적병들이 공의 시신을 거두어 동문 밖에 묻고 표목을 세워 [충신 송상현의 묘]라고 써서 세우고 시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 이로부터 동래성 남문에 위에 붉은 기운이 수년 동안 빛나고 있었다. 이 기운을 보는 적은 더욱 두려워 “송상현과 같은 총의지사가 있으니 조선에는 이런 충의지사가 얼마나 더 있을 지 알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1594년(선조 27)에 김응서가 적장 가등청정으로부터 공의 충절의 죽음을 자세히 전해 듣고 조정에 이 사실을 아뢰어 공을 좌찬성에 증직하고 정려를 세우게 하였다. 1595년(선조 28)에 아전과 백성들이 영구를 붙들고 호곡하며 백리 밖까지 따라와 전송하였다. 가등청정 이하 적병들도 모두 말에서 내려 엄숙히 예의를 표하였다. 나라에서는 국지사(國地師)를 보내 묘지를 잡아 청주 가포곡에 장사를 지냈다. 이로부터 산 아래 마을을 강상(綱常)이라 칭하였다.
문정공 송준길이 조정에 아뢰어 “충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동래 충렬사와 정읍 정충사에 배향되었다.
(정읍통문 홈페이지 유종국 교수님 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