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신부님이 수년간의 노고 끝에 부평에 성당을 신축했다. 신부님의 안내로 성당을 둘러보며 나는 품격(noble)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부평깡시장 바로 앞에 언제나 개방되어 있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성당, 거룩함과 속된 것이 하나(聖俗一如 성속일여)임을 보여주는 멋진 상징물이 있다. 성당으로 들어서는 문들이 예술작품이다. 성당 문 앞에서 나는 그 아름다움에 취해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하느님을 만나는 지름길은 아름다움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나의 평소의 생각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아름다움에 눈뜰 때 영혼은 깨어난다. 아름다움이 사람을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아름다움은 존재와 생명과 진리를 드러낸다.
성당 문을 열고 들어서면 신비한 빛이 쏟아진다. 정면과 사방에 신부님의 스테인드 글래스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다. 성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브라함, 모세, 마리아와 같은 성서 이야기에 나오는 진부한 인물들이 없어 신선하다. 성서 이야기나 기독교적인 냄새가 확 풍기는 노골적인 성화들에서만 거룩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 자체가 거룩함이다. 이런 아름다운 성당에 들어와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신을 만난 것 같은 신비한 체험을 했다.
성당 옆에는 작은 명상실이 있고 아래층에는 연주회나 전시회가 가능한 공간이 있다. 신자 자신들만의 닫혀있는 예배 공간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이다. 위로만 뻗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뻗어 있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나는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 찬송, 기도와 같은 종교의식 위주의 수직직 종교가 이웃을 향한 수평적 종교로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예수님 자신도 종교의식 중심의 유대교에서 벗어나 가난한 이웃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과 애환을 같이 하셨다.
예술가 한분이 진실로 품격있는 성당 하나를 만들려고 의자나 벽의 색깔, 나무결등 미세한 부분까지 전체적인 조화를 위해 얼마나 고심하고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보고 느끼면서 나는 내 인생의 성의 없음을 돌아보며 부끄러웠다.
품격은 성의 성심에서 나온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옛사람들은 마음을 다하고(盡其心진기심) 본성을 다하는 것(盡其性 진기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다. 유교 경전의 핵심인 대학 중용의 요지는 정성을 다해 하늘이 명한 본성(天命之性)을 이루는 것이 성인이 되는 길이며 그것이 인간이 태어난 목적이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성서를 한마디로 뜻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강화에 사는 내 친구 부부는 정성을 다해 꽃을 가꾸고 해마다 오월이면 그 꽃을 보여주려고 가든파티를 연다. 수백종류의 꽃을 가꾸려고 칠십에 가까운 부부(주로 부인이)가 새벽부터 일어나 수고를 한다. 이것이 바로 고상한(noble) 삶의 표본이다. 친구인 나는 나이 들어 수고하는 모습이 안타까와 이제 그만하라고 말리지만 소용없다.
집 하나에도 정성이 들어가면 품격이 살아난다. 강화에 집을 짓고 이사와 사는 내 친구는 강화에 사는 어떤 시인이 좋다고 자기 마당에 그 시인의 시비를 세우겠다고 한다. 자기 집에 들어오는 이들이 그 시비에 새겨진 시를 보고 좋아할 생각을 하면 손님 맞이로는 이 보다 더 좋은 접대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집은 참으로 품격있는 집이다. 품격을 순 우리말로 하면 멋인데 이런 집은 얼마나 멋진가?
얼마전에 세계의 굴뚝들이라는 사진책을 본 적이 있다. 굴뚝은 실용적으로만 생각하면 연기만 잘빠지면 그만일텐데 굴뚝의 모양이 그렇게 다양하고 아름다울 수 없다. 인간은 먹고 사는 것만으로 만족할 줄 아는 동물이 아니라 멋을 창조할 줄 아는 창조적 존재다.
사실 멋 중의 최고는 멋진 인간이다. 사람의 외모나 장신구 모자 옷등도 다 예술 작품이다. 자기 개성을 살려 멋진 외모를 보여주는 것은 선행 중의 선행이다. 그를 보고 꽃을 보듯 눈이 즐겁다면 그는 걸어다니며 선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미술이 보여주듯 틀에 박힌 정형화된 아름다움만이 아름다움이 아니다. 멋진 수염을 기른 남자나 멋진 머리를 하거나 멋진 스카프를 매거나 멋진 모자를 쓰거나 멋진 치마를 입은 여인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람의 외모도 그러할진대 아름다운 인격을 가진 사람은 얼마나 더 멋진가. 말에 품격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를 만난 것 같다. 요즘처럼 말에 품격이 떨어진 세대는 없을 것이다. 말이 통할 때 느끼는 감동은 어떤 기쁨 보다 크다. 말 하나 품격있게 할 줄 모르면 인생 공부를 헛되이 한 것이다. 말을 많이 하고 글을 자주 쓰는 나는 늘 조심스럽다. 비판도 참 멋지게 할 줄 알면 좋을텐데 그런 재주가 없어 나는 자주 상처를 준다. 칭찬이나 아첨도 상대방이 눈치 못채게 은유적으로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대놓고 아첨을 해 천박하다. 인문학 공부는 어찌보면 품격있게 말하는 법을 배우는 공부다.
진짜 품위 있는 사람은 착한 마음을 내는 소박한 사람이다.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착한 마음을 볼 때처럼 진한 감동을 느낄 때는 없다. ‘형 점심 먹었어요. 국수 한그릇 삶았는데 와서 드실래요?’ 고려산 밑에 산골책방을 하는 아우가 가끔 초대하는 말이다. 볼음도에 사는 아우도 사랑스럽다. ‘형, 보고 싶네요. 바다에 그물쳤는데 신선한 회 먹으며 소주 한잔해요. 혼자 오지 말고 외로운 아우 생각해 이쁜 여자 한분 모시고 오세요’. ‘홍 선생, 신선한 문어 한 마리 사왔는데 와서 포도주 한잔하며 점심 먹지’ 은퇴한 신부님이 손수 음식을 차리고 나를 초대하는 말이다. 사람이 이런 인정을 낼 수 있다면 그는 얼마나 멋진 인간인가.
첫댓글 고려산 밑의 산골책방 가보고 싶습니다.